지난가을에 나온 황동규 시인의 시집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지성사). 절친 마종기 시인의 시집(<천사의 탄식>)과 앞서거니뒤서거니 나왔다. 이분들의 나이가 여든둘, 여든하나다. 마지막 시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황동규 시인도 적었다("마지막 시집이라고 쓰려다 만다"). 딱히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연말에 올해의 책을 꼽으면서 한국문학 작품으로는 이 시집을 골랐다(소설은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를 골랐다. 너무 '영화적'인 소설이었지만, 작가가 그 이상의 역작을 써낼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골랐다). 이보다 앞선 시집은 <연옥의 봄>(2016)과 <겨울밤 0시 5분>(2015)가 있었다. 나로서도 대학 1학년 때부터 읽었으니 33년쯤 됐다(한 학기 강의를 들은 인연으로 내게는 음성지원이 된다). 시인은 1958년에 데뷔했으니 시력 62년이다. 첫번째 시가 '불빛 한 점'이고, 그 62년을 한 점으로 모으고 있는 시이다. 


한창때 그대의 시는

그대의 앞길 밝혀주던 횃불이었어.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없던 길 내고

그대를 가게 했지. 그대가 길이었어.

 

60년이 바람처럼 오고 갔다.

이제 그대의 눈 어둑어둑,

도로 표지판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표지판들이

일 없인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게끔 되었어.

 

이제 그대의 시는 안개에 갇혀 출항 못 하는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이 되었군,

그래도 어둠보단 낫다고 선장이 켜놓고 내린,

같이 발 묶인 그만그만한 배들을 내다보는 불빛.

어느 배에선가 나도! 하고 불이 하나 켜진다, 반갑다,

끄지 마시라.


마지막 연은 황동규 풍 그대로다. 안개에 갇혀 출항 못하는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 한 점이 시인이 찾은 현재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정확하고 재치있다(여든의 시인에게 쓸 말은 아니지만). 비록 여든의 나이는 아니더라도 한해의 마지막 날은 인생의 마지막 날과 같은 느낌을 잠시라도 갖게 한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는 건, 한평생을 돌아보는 일의 축소판 아닐까. 우리 각자가 불빛 하나 켜두어도 좋은 밤인 것. 당신도 끄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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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1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1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짜로는 한해의 마지막 날이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밀린 페이퍼거리만 하더라도 열손가락은 채워진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란 판단에 접었다(그래도 몇 가지는 오늘내일 적게 될 듯싶다). 이런 때는 사소해보이는 일부터 손을 대든 게 수다('상수'라고 적으려다가 자신할 수 없어서 '수'라고만 적는다). 제목은 미하일 조센코(1894-1958)의 단편집이다(지난해 나온 것을 뒤늦게 구입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조센코'로 표기되었다. '조셴코'와 '조센코'의 경합.
















조센코는 20세기 전반기 최고의 단편작가다(후반기는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안톤 체호프의 뒤를 잇는. 단편집 <감상소설>만 나와있었는데(강의에서 다룬 적이 있다), 이번에 한권 추가된 것. 작품은 많기 때문에(체호프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다.  


"미하일 조센코는 소비에트 시대 때인 1930~40년대 러시아 풍자문학의 거장이다. 이 책은 미하일 조센코의 소비에트 러시아 사회를 풍자한 단편소설들을 1부로 만들고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과 행동을 맑게 그린 단편소설들을 묶어 2부로 구성하였으며 3부에서는 조센코의 문학세계와 당시의 소비에트 러시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적자면, 망명작가 도블라토프(1941-1990)도 러시아의 대표적 단편 작가다. 
















아, 조셴코의 표기가 '조쉬첸꼬'로도 돼 있었다. 두 권의 소설(<되찾은 젊음>은 장편)이 나왔었는데, 현재는 절판된 상태. 다닐 하름스의 단편집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청어람미디어)도 절판돼 아쉽다.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음에도 번역본 상황 때문에 다루지 못한다. 
















하름스는 러시아 부조리문학의 대표 작가로 다수의 작품이 영어권에 소개돼 있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좊은 작가다(하름스 작품에 대해 대학원시절에 쓴 리포트를 나도 올려놓은 적이 있다). 단편들 외에 <엘리자베타 밤> 같은 대표 희곡도 소개되면 좋겠지만 현재로선 바람일 뿐이다. 아무려나 '연말정산'에 러시아문학 얘기도 하나 끼워넣는다는 의미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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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20-12-31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센코와 하름스의 절판된 책들을 어렵게 구해서 읽기는 했는데
샘 강의로 듣지 못해 아쉬웠던~

로쟈 2020-12-31 21:52   좋아요 0 | URL
네, 강의의 조건인지라..^^
 

매일같이 하는 일이 책들과의 숨바꼭질이다. 찾는 책이 보이지 않아서 벌이는 일(일주일 전에 만졌던 책을 다시 찾는 게 매번 미궁을 뒤지는 것 같다). 흔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자주 주의를 딴곳으로 돌린다(흠, 데스크톱의 키보드도 말썽이어서 같은 문장을 여러번 치고 있다. 이것도 스트레스군). 리커버판으로 다시 나온 이제니의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을 펼치게 된 사정이다. 

















언제 다룬 적이 있던가. 확인해보니, 지난봄에도 '불만'을 적었었군. "나는 왜 많은 젊은 시인들이 자폐적 세계에서 발화연습만을 거듭하고 있는지 이해 불가하다"고. 그렇다면 험담의 재탕이 되겠다. 


소개된 약력에 따르면 이제니 시인은 1972년생이고, 2008년 신춘문예로 데뷔, 2010년에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비)를 펴냈다. 이어서 두 권은 문지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은 모르고>(2014)와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2019)이다. 출간 2년이 안 돼 리커버판이 나온 셈이군. 최근작은 현대문학사에서 나온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2019)다. 시집 제목대로, '있지도 않은 문장'의 세계가 이제니의 시세계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있지도 않은 대상/세계를 적은 문장들의 세계, 그게 또한 '흘려 쓴 것들'의 세계다. 


이상이 선구적인 사례인데, 무의미시는 언어를 기호로 사용하며 시란 그 기호의 퍼포먼스다.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시가 기본적으로 의미를 배제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한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이상의 '오감도'를 중단시킨 건 독자들의 항의였다. 기본적으로 끝이 있을 수 없는 기획이다). 무의미의 남용과 범람. 의미란 지시대상(세계)과의 긴장관계에서 발생하는데, 그 지시대상을 지워버렸기에 아무런 통제나 구속을 받지 않게 되는 것. 남는 건 언어의 기호적 유희다(좋은 경우에 재미 정도는 제공한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 아무거나 선택해도 무방하지만, 가령 '구름에서 영원까지'를 보자. 원시가 행갈이를 하지 않고 쓰되, 구두점은 찍었다.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소리로 다가왔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어제의 귓속말을 데려왔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떼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언젠가 네가 주었던 검은 조약돌. 바다는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고양이, 구름, 돌, 빛, 어둠, 바람, 주머니, 바다 등이 오브제로 등장하고, 슬픔, 기억, 이름, 침묵, 죄, 영원 등이 소환되지만, 이들을 아우르는 정서의 구심점이 없다. '슬픔'을 지목할 수 있지만, 구체성이나 무게감을 갖고 있지 않아서 슬픔의 정서를 환기하지 않는다('막연한 슬픔'의 표현이라고 읽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것이 '흘려 쓴' 세계다. 아무것도 붙잡거나 붙들지 않고 흘려보내는 세계. 의미를 비워내거나 배제하는 시. 언어의 율동에 대한 연습이라고 하면 최대치의 평가가 될 것이다. 이 율동은 다양하게 변주될 수도 있다. 어차피 의미와 무관하기에 대충 뒤섞어도 된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떼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어제의 귓속말을 데려왔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소리로 다가왔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언젠가 네가 주었던 검은 조약돌. 바다는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이렇게 문장들을 뒤섞어놓아도, 별로 차이가 없는 시, 그게 무의미시다(이런 시의 생산은 AI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무의미한 시로 수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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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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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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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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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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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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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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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점심 먹을 시간에 시집 한권을 읽었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이번에 파울 첼란 전집(시인의 또 다른 유작이 되었다)이 나오기도 해서(일차로 두권이 나왔다) 다시금 손이 갔다. 이번 문지판은 문학동네 포에지 같은 재간본이 아니라 리커버 한정판이다(문지에서도 재간본은 R시리즈로 나온다).

2018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나(뮌스터에 묻혔다고) 허수경은 생몰연대를 같이 적게 된 시인이다. 1964년생. 진주 시인.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던 <슬픔 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가 첫 시집. 나는 출간된 뒤 시간이 좀 지나서, 시집이 평판을 얻은 뒤에 사서 읽은 듯하다(당시 문지와 창비시인선, 그리고 민음시인선과 실천문학 시인선까지가 독서 범위였다). 지금도 첫번째 시집이 가장 나았던 것 같은 인상이다.

문지에서 나온 <혼자 가는 먼 집>(1992)은 두번째 시집. 이번에 다시 읽으니(리커버판은 해설을 빼서 슬림해졌다) 역시나 첫번 시집보다 못하다는 느낌이다(<슬픔>을 읽은 지 오래 되었으니 이 또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목도 그렇고 넋두리가 너무 많다. 이런 장면.

잠깐, 광화문 어디쯤에서 만나 밥을 먹는다
게장백반이나 소꼬리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이라도
무얼 먹어도 아픈 저 점심상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서늘한 점심상‘의 두 연이다(이 시는 두 연 더 이어진다). 서로 어긋나서 다투는 연인의 모습, ‘비통한 관계‘의 모습이 그려진다.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이어서, 비유컨대 당사자들은 이 장면이 몰카처럼 찍히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치 않는 듯하다. 즉 시인 자신도 시라는 걸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 시다.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라고 적었는데, 독일행의 힌트가 될까.

상당수의 시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의 심정을 담은 심경시로 읽힌다. 비록 절실한 감정을 읊조린 것이겠으나 (적어도 나 같은) 독자의 감정을 움직이는 시는 드물다. 그나마 건진 건 ‘저이는 이제‘ 같은 시다.

저이는 이제 술을 팔지 않는다네
헐한 술을 빚던 저녁이 저이에게 있었던가
낡은 저녁 의자에 기대 노을 산숲처럼 끄덕이네
아주머니 차 한잔 파셔요 고향에 당도 못 한 나 같은 사람에겐
가슴으로 대신 누룩밭을 거두는 것을 당귀차라도 한잔.
저이가 술을 팔 때 나는 무얼 팔았던가
아주머니 편강 한쪽 주셔요 고향에 당도 못 한 저이 같은 가슴으로
생강밭을 고르는 것을 생강편 같은 인가 근처로 가는 것을
갈 수 있다면 아주머니
고향에 가지 말고 저랑 둘이서 당귀차나 끓이셔요
이미 건너온 저 물에서만 퍼내도,
퍼내도 아주머니
낡은 저녁 의자 좀 빌려주세요

직설적이지 않은 은근한 넋두리가 될 때 시의 리듬감도 살아나고 어조에 여유도 묻어난다. ˝넌 왜 날 버렸니?˝와 ˝저랑 둘이서 당귀차나 끓이셔요˝의 차이다(성숙도의 차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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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12-3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로쟈 2020-12-31 23:48   좋아요 0 | URL
네, 감사. 새해복많이.~
 

강의에서 주로 소설들을 읽기 때문에, 시를 읽는 건 내게 휴식 같다. 원래부터 산문소설과 시는 그렇게 대비되기도 하지만. 노동과 휴식. 그렇다고 모든 시가 그런 건 아니다. 대책없는 시들이 너무 많고 요령부득의 시집도 부지기수다. 무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시집들도 허다하게 그렇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나의 기준이나 취향을 바꿀 생각은 없다. 나대로의 기준과 취향으로도 읽을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시들이 없지는 않기에. 한편으론 드무니까 만날 때 기쁜 것이기도 하고.


















최근에 재간본 시집 시리즈로 나온 '문학동네 포에지' 가운데(1차로 열권이 나왔다. 절판된 세계사 시집이 다수) 내게 가장 반가웠던 건 박정대의 <단편들>이다. 1997년에 초판이 나왔던 시집. 시인도 젊었고 독자로서 나도 젊었던 때다(나는 만 서른이 되기 전이고 시인은 서른을 두해 넘긴 나이였겠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 과거의 느낌이 낯선 시인들이 있고(최근에 다시 읽은 최승자의 시들이 그렇다. <이 시대의 사랑>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사랑'처럼 보였다), 반면에 마치 어제 만난 듯 생생한 시인들이 있다. <단편들>이 그렇다. 


<단편들>에 실린 모든 시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 편의 시들이 여전히 좋다(이 시집 이후 박정대의 시들을 나는 다 따라가지 못한다. 너무 주정적이고 도취적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단편들> 정도의 취기를 좋아하는 것). 많은 시들이 그때를 환기시켜주는데, 한편으론 왕가위 영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동사서독>의 '취생몽사' 같은 시들이 그래서 좋다. 언젠가 '물질적 황홀6'을 내가 쓴 책에 인용하기도 했었는데, 아마 조교 때 펴낸 책이었겠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갔다 나는 그리운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갔다

세상의 물빛 머금은 모든 것들은 경건한 자세로 

꽃을 피울 태세였지만 꽃의 어깨를 건드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비가 내려 습기 찬 들판이거나 어두운

영화관에서 팔짱을 낀 채 들꽃이 죽고 들꽃의 시선이 죽고

자막처럼 빠르게, 자동차들은 거리를, 물방울들을

튕기며 사라져갔다

(...)


다시 읽으니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박인환 시 같기도 하다(세련된 센티멘털리즘). 여긴 가식도 기교도 없다. 포즈라고 해도 괜찮은 정동, 감정의 움직임이 있다. 김수영 시들을 읽을 때 깨달은 거지만, 나는 말들의 속도감을 좋아한다. 박정대의 시들이, 다시 보니 그렇다(소월시문학상 수상자인데, 그보다는 김수영문학상이 어울렸을 시인이다).


<단편들>을 다시 뒤적이다가 '사북에서'에서 눈길이 멎었다(확인해보니 시인이 강원도 정선 출신이다). 이런 속도감과 응시는 어떠한가. 


아 벌써 어두워, 걸어가면서 고양이들은 

소리지른다, 좁은 길을 벗어난 막사 같은 집들은

덜컹거리는 문을 닫고 서둘러 성냥불을 

켜본다,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교회당의 종소리

유난히 하얗다. 골짜기 가득 쌀밥 같은 눈 내린다

아 벌써 어두워, 고양이들은 뛰어가면서

소리지른다, 여인네들은 가슴이 뛴다

저녁 밥상을 준비한다 창문을 후려치며 

바람이 달아나고 있다


시의 1연이다. 2연에서는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사내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사북'을 제목으로 단 시들을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 시가 유일하게 기억하게 될 시다. 내가 좋아하며 지지하는 시의 좋은 사례다. 말의 속도감과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묘사. 사북의 저녁 풍경을 이보다 잘 묘사할 수 있을까. 고양이처럼 여인네들처럼 독자도 가슴이 뛰게 하는 시. 












  


   



기억에도 그렇고, 확인해보니 <단편들>이 첫 시집이었고 이후에 아홉 권 가량의 시집을 더 펴냈다. 대략 절반 이상은 구입해서 읽은 듯한데, 그래도 내게는 <단편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재출간이 반갑다는 것. 
































나대로의 판단이고 추정이지만, <단편들> 이후 (일단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나 <아무르 기타> 등) 박정대의 시에는 음악이 너무 노골적으로 시를 대신한다. 시인은 가객이자 음유시인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음악과 적당한 거리와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인은 점차 스스로를 뮤지션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그런 시인들이 몇 명 된다. 아예 뮤지션인 경우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시 자체의 음악성이 실종된다. 시 대신에 그냥 음악이 들어와 앉는 것. 시는 메탈 사운드를 들려줄 때가 아니라 다만 읊조릴 때 아름답다. 


그리고 나는 담배를 피우며 음악을 들었다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연애는 다만 연애였을 뿐 상처를 주지도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연애는 그저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였을 뿐

내 가슴으로부터 한번 떠나간 애인은 영원히 복구되지 

않았다 가끔 염소들이 울고 이 세상의 데시벨이 약간 올라가고

부서진 건물들이 다시 개축되고 몇 점의 구름이 흘러갔을 뿐

기침처럼 다만 흘러갔을 뿐


-'물질적 황홀8'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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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0 0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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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0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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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0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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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0 19: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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