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써 겨울학기 강의가 일단락되었고(계속 이어지는 강의도 있지만) 곧바로 봄학기 강의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미국 여성작가 읽기(https://blog.aladin.co.kr/mramor/12360354)도 일정 가운데 하나인데, 내달에 다룰 조이스 캐롤 오츠는 특히 다작의 작가여서(장편소설만 60권이 넘는다) 정돈이 좀 필요하다. 국내 번역작을 일부 절판본을 포함하여 언대순으로 정리해둔다. 국내 번역작들 대부분이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 읽기



1969 <그들>



1993 <폭스파이어>



1994 <흉가>



1995 <좀비>



1996 <멀베이니 가족>



2001 <블론드>
















2007 <사토장이의 딸>
















2008 <위험한 시간여행>



2011 <악몽>



2013 <대디 러브>



2014 <카시지>



2016 <인형의 주인>



2016 <그림자 없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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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문학과 마찬가지로 영국문학강의도 통상 19세기와 20세기로 구분해서 진행하고는 한다. 19세기 강의에서는 주로 토머스 하디가 마지막 작가로 다루어진다(여성작가라면 조지 엘리엇). 간혹 로버트 스티븐슨을 읽기도 하지만. 그리고 20세기 문학의 첫 주자로는 E.M. 포스터나 D.H. 로렌스부터(여성작가는 버지니아 울프부터). 그럴 경우 두 거장을 건너뛰는 게 되는데, 헨리 제임스(1843-1916)와 조셉 콘래드(1857-1924가 그들이다. 두 세기의 경계선상에 놓이는 작가들. 강의에서 두어 작품씩 다루기는 했지만 주요 장편들 가운데 절판된 것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많아서 여전히 숙제로 생각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올해는 그 숙제의 일부를 덜게 되었는데, 두 작가의 주요 작품이 다시 번역돼 나와서다. 콘래드의 <로드 짐>(1900) 새 번역본이 얼마 전에 나온데 이어서 이번에는 제임스의 <대사들>(1903)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예전에 한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나왔었다). 두 작가 읽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페이퍼를 따로 써야겠다. 먼저 <로드 짐>에 대해.


"콘래드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 중 하나로,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들을 두고 도망친 젊은 항해사 짐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여러 화자의 입을 통해 짐과 그 조난 사건의 수수께끼를 파헤쳐 가는 한편, 그 사건 이후 씻어 낼 수 없는 치욕을 안고 살아가는 짐의 파멸과 방황, 모험의 서사를 강렬하게 그려 낸다."


















콘래드의 주요작은 <어둠의 심연>(<암흑의 핵심>)(1899)부터 시작해 <로드 짐>(1900), <노스트로모>(1904), <비밀요원>(1907), <서구인의 눈으로>(1911) 등으로 이어지는데, <노스트로모>와 <서구인의 눈으로>는 절판된 상태여서 강의에서 다룰 수 없다. 차선은 <어둠의 심연>과 <로드 짐>, <비밀요원> 정도까지만 읽는 것. 일단 <로드 짐>은 올해 강의일정에 포함시켰다. 


















헨리 제임스의 <대사들>은 후기작에 속한다. 장편소설이 23편이나 되기에 전작이 소개되기를 기대하기 어렵고 또 다 읽기도 어렵다. 주요작이 관심대상인데, 후기작으로는 앞뒤의 <비둘기의 날개>(1902)와 <황금주발>(1904)과 함께 <대사들>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두 작품이 더 번역되면 좋겠다. 


















반면에 전기작은 제법 소개되었다. <아메리칸>(1877), <데이지 밀러>(1878), <워싱턴 스퀘어>(1880), <여인의 초상>(1881), <나사의 회전>(1898) 등이다. 














































제임스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번역된 <여인의 초상>이고, 강의에서도 대표작으로 다뤘었다(<데이지 밀러>와 <나사의 회전>도 다룬 작품). 다만 후기작을 다룰 기회가 없었는데, <대사들>이 그런대로 미진한 부분을 채워줄 듯하다. <비둘기의 날개>라도 번역된다면 균형이 좀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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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태생의 호주 작가 패트릭 화이트의 작품이 번역돼 나왔다. <전차를 모는 기수들>(문학과지성사). 1961년작. 사실 작가나 작품이 낯익은 독자는 극히 드물 텐데, 나 역시도 몇년 전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명단에서 이름을 보고서야 비로소 존재를 알았다(1973년 수상). 노벨문학상 수상작 강의에서 다루려다 마땅한 작품이 없어서 포기한 기억이 있다. 
















작품 가운데서는 찾아보면 <인간의 나무>도 번역되었지만, 현재 구할 수 있는 건 <불타버린 사람들>과 이번에 나온 <전차를 모는 기수들>밖에 없다. 아무려나 호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기억하면 되겠다. 


"서사시적이고 심리적인 수법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세계 문학계에 탁월하게 소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화이트는 1990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이어가며 오스트레일리아인의 정체성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언젠가 오세아니아권의 문학도 다룰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아니면 영연방 문학?), 일단은 챙겨놓는다(아마도 오세아니아보다는 동남아권 문학을 강의에서는 먼저 다루게 될 듯싶다. 빠르면 올 하반기로 일정을 고려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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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하퍼 리와 움베르토 에코

5년 전 페이퍼다. 하퍼 리와 움베르토 에코가 나란히 타계한 지 5년이 된 것인가. 에코의 책이 연이어 나오고 있어서 독자로서는 실감이 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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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에 실린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최근 강의에서 다시 읽은 모리악(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케루>(1927)의 주제를 간략히 짚었다. 테레즈의 운명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다룬 속편 <밤의 종말>(1935)은 이번 강의에서도 읽지 못했다. 언젠가 다룰 기회가 있으리라..
















한겨레(21. 02. 19) 가문의 정신보다 중요한 것


프랑스 작가로는 앙드레 지드(1947년)에 이어서 195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세대로도 지드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간판 작가다. 하지만 바로 뒤이은 사르트르와 카뮈 같은 실존주의 세대 작가들에 가려진 면이 없지 않다(1957년에 카뮈가, 그리고 1964년에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사르트르는 거절했지만). 프랑스 문학의 한국 수용에서도 그렇게 앞뒤 세대 작가들 때문에 모리아크는 소홀한 대접을 받은 편인데, 그럼에도 작가로서 얼마간 존재감을 갖는다면 <테레즈 데케루>(1927)에 빚진 바가 크다. 테레즈 데케루는 어쩌면 작가 모리아크보다도 유명한 작품이고 그 주인공이다.


비록 모리아크가 자신의 최고작으로 꼽은 건 아니지만 대중과 평단은 <테레즈 데케루>를 그의 대표작으로 지목해왔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에 어떤 불일치가 있는 것인데, 줄거리만 보자면 남편을 독살하려 했던 아내의 이야기인 이 소설을 오늘날 작가가 의도한 대로 ‘신을 믿지 않는 인간의 비극’으로 읽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작품의 의미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다는 뜻도 되는데, 그런 가능성은 모리아크가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에 고려했던 ‘가문의 정신’ 대신에 ‘테레즈 데케루’로 바꾸면서 열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가문의 정신’은 이 작품이 묘사하는 사회적 공간을 지배하는 정신이다. 프랑스 랑드 지역의 유력한 집안 출신인 테레즈는 같은 지역의 대지주 베르나르와 결혼한다. 정략적이지만 자연스러운 결혼이었다. 베르나르는 그 지역 남자치고는 세련된 데다가 부자였고 아주 못생긴 남자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여동생 안과 누구보다 절친한 사이였던 테레즈는 빠른 안정을 위해 베르나르보다도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부터 그녀의 기대는 어긋나기 시작했고 테레즈는 분노와 환멸을 품게 되었다. 신혼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유형수의 심정이 되었다. 별다른 교제나 연애감정도 없이 시작하게 된 결혼생활의 불행이었다.


비록 베르나르와의 결혼이 기대와 다른 불행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체념하거나 적응하는 방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꿎게도 이제는 시누이가 된 안이 몰락한 집안의 장 아제베도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테레즈와 달리 책도 좋아하지 않고 생각도 없었던 안이지만 장에 대한 사랑에 들떠 벅찬 행복감을 느낀다. 안의 편지를 받은 테레즈는 가족의 반대에 봉착한 그녀의 사랑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질투한다. “그녀도 테레즈처럼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테레즈까지 어깃장을 놓으면서 안은 연인과 헤어지고 다시금 가문의 정신에 따르게 된다. 문제는 테레즈가 안과의 관계를 떼어놓기 위해 만난 장에게서 베르나르가 갖고 있지 않은 능력과 매력을 발견한 데 있다. 지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이 청년은 테레즈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정신적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테레즈와 장의 불륜관계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많은 남편 살해 이야기와 <테레즈 데케루>의 차이점이다). 다만 테레즈는 아버지와 남편이 절대적으로 삼는 가문의 정신과는 다른 선택지도 가능하다는 사실에 눈뜨게 될 따름이다. 그것은 테레즈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을 독살하려던 테레즈의 시도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아버지와 남편의 방책으로 법적 책임을 피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이 소설의 열린 결말에서 테레즈는 남편과 별거하면서, 가문의 이름이 아닌 자기의 이름을 갖기 위한 도정의 출발점에 선다. 비록 작가 모리아크의 응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독자는 그녀를 응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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