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먼 기억처럼 여겨지지만 지난해초에 나는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고 강의했다. 프랑스문학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프랑스 ‘국민작가‘의 대표작을 짚고넘어가야겠다는 계산에서. 계산이 어긋나지 않아서 <레미제라블>을 통독한 이후에 프랑스혁명의 의의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발자크부터 프루스트까지의 프랑스문학도 가늠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세계문학 강의와 이해의 전환점이었다.

<레미제라블>을 강의하며 모은 자료와 읽은 자료가 좀 되는데 그래도 데이비드 벨로스의 <세기의 소설, 레미제라블>(메멘토)을 읽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데이비드 벨로스는 조르주 페렉 전문가로 번역학에 관한 책 <내 귀에 바벌 피시>(메멘토)가 국내에 소개돼 있다. <세기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마치 보너스 같은 책. 조만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오랜만에 다시 읽고 강의에서 다룰 예정인데, 이 대작을 쓰면서 톨스토이가 귀감으로 삼았던 소설이 <레미제라블>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이밍이 꽤 적절하다. <레미제라블>과 <전쟁과 평화>를 같이 읽는 것. 두 작가가 어디까지 동행하고 어디부터 차별화되는지 따라가보는 것. 세기의 소설들을 따라 읽는 일이야말로 ‘판타스틱 어드벤처‘에 다름 아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연말연시는 두 대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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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송받은 책 중의 하나는 송찬호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다. 오래 전에 읽은 시집이다. 시집 초판은 1989년에 나왔고 표지갈이를 한 2판이 2000년에 나왔다. 배송된 건 2015년에 나온 2판4쇄다.

내가 기억하는 송찬호는 사색적이고 진지한 시를 쓴다는 것과 전업시인이라는 것. 대구 산격동을 배경으로 한 시도 시집에는 들어 있으나 아마도 이후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한다. 굳이 행방과 근황을 추적하지는 않는다.

얼른 뜨는 시집이 대략 댓 권인데, 나는 <10년 동안의 빈 의자>와 <붉은 눈, 동백>까지 따라 읽은 기억이 있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과 <붉은 나막신>은 기억에 없거나 가물하다. <붉은 나막신>도 그래서 이번에 구했다. 이렇게 시집 다섯 권만 되어도 그 사이에 30년 가까운 세월이 출입한다.

‘말은 나무들을 꿈꾸게 한다‘를 읽는다. 목차를 보고 고른 게 아니고 아무 곳이나 펼쳐 짚은 시다.

말은 나무들을 꿈꾸게 한다 말을 시작하면
팔은 부드러운 나뭇가지로 변하고
딱딱한 몸도 나무 기둥으로 구부러진다
(약간 뒤틀리는 것이 자유롭고 편하다!)

통영 출신이지만 대구에서 오래 살았던(경북대에 재직했다) 김춘수의 ‘꽃‘을 연상하게 하는 시다. 김춘수의 꽃이 추상적인데 반해서 송찬호의 나무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이다. 그리고 더 에로틱하다.

이윽고 내 몸속에 숨어 있던 밤의 여인들이 나타난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묘령의 여인들이
허리 아래로는 한 몸으로 붙으면서
여러 개의 가슴으로 나뉘어져 뻗어 올라간
이 다성적인 나무의 줄기들

28년 전에 송찬호는 전위에 있던 시인으로 기억하는데 잘못된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부드럽고 순한 상상력이라니! 게다가 논리적이다. 논리적이란 말은 말과 상상의 흐름이 방해받거나 교란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즘 시들에서는 드물어진 덕목이다(요즘 주목받는 시인들은 상대적으로 더 과격하고 히스테리컬하다).

아니다, 말의 논리와 문법을 교란하는 난해시는 진작부터 있었다. 이 문제는 계보정리와 유형탐구가 필요하다. 아무튼 송찬호의 시를 오랜만에 읽으며 모난 것 없는 상상력에 놀란다. 그의 시에는 원래 사각형의 상상력만 있었던 게 아니었지. 둥근 것을 꿈꾸는 시인을 보라.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길게 뻗어 와 손을 내민다
이미 오래 침묵하였던 입술로
동그란 모음을 그 손가락에 끼워 준다
가지마다 푸른 물방울 보석만 반짝이는 깊은 밤
이렇게, 침묵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 있으랴

발이 왜 이리 가볍지,
진흙 덩어리 공기의 덧신을 신었었나?

사랑의 키스와 언약, 그리고 공중부양으로 마무리되는군. 표제시 때문에 죽음의 이미지와 같이 떠올리던 건 착시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시들도 얼핏 보니 둥근 것들 투성이다. 더불어 성애의 이미지가 넘쳐난다. 시인의 이미지를 교체하고 다른 분류 칸에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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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준의 첫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창비)가 나왔다. 북플을 통해 알게 돼 시집을 구하기 전에 맛보기로 읽어 본다. 이런 경우엔 전문이 소개된 시를 옮겨놓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저녁을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는 막간에 ‘어떤 귀가‘를 읽는다.

나도 모르게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하고 만다
‘어떤’ 말을 하고 나면 ‘어떤’ 말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우리는 입을 벌린다
입을 다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엇이 말하는 걸까
내 얼굴에는 언제나 ‘어떤’ 입이 놓여 있다
입속에는 ‘어떤’ 집이 놓여 있다
현관문을 돌린다
이곳으로 아무도 도착하지 않는다
식탁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다. 밥을 먹다가 또
무엇을 말했던 걸까
내 곁에 둘러앉은 ‘어떤’ 침묵들
‘어떤’ 말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말로도 말하지 않는 우리가 대화를 한다(‘어떤 귀가‘ 전문)

흠 ‘어떤‘ 말들에 시비를 거는 시로 보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데 어떤 말을 했고, 더 나아가 서로 어떤 말들을 주고받았다면 그 말은 누구의 말이냐고, 혹은 무슨 말이냐고 시비를 거는 시. 우리는 입을 벌려 말을 하지만 그 말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른 말인가, 시인은 그런 걸 따져보려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이 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이고 그래서 별로 흥미롭지 않다. 말과 의미에 대한 회의도 차고 넘치지 않는가. 이 시인의 시인다움을 보여주려면 다른 시를 보여주었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시들은 부분 인용만 돼 있어서 찬찬히 읽어보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에,

그것을 생각하다가 그것은

이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옷장 속에 구겨두고 어항 속에 풀어두고 꽃병 속에 꽂아두고

이것에는 단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두운 곳에서 헤엄치다가 가만히 시들어버립니다. 아득한 나라 알 수 없는 숲 속에서 이름 모르는 새가 울고

내 곁에 있어도 그것인 것들

그것은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목을 닮았습니다

(…)

내 곁에 없어도 이것인 것들(‘설명‘ 부분)

이라고 옮겨보아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 언어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나가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고 해두자. 그런데 시는 그걸로 충분한 것일까. 아직 설득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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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교보에 들렀다 구입한 책의 하나는 국사학자 도진순 교수의 <강철로 된 무지개>(창비)다. 제목으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다시 읽는 이육사‘가 부제.

˝근래 이육사의 시를 새롭게 해석하는 글을 연달아 발표하며 국문학 및 역사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도진순(창원대 사학과 교수)의 이육사론이 드디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저자는 그동안 김구, 안중근 등 한국 근현대사 주요 인물에 대한 연구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이번엔 저항시인 이육사에 도전했다. <강철로 된 무지개: 다시 읽는 이육사>는 육사의 대표작 ‘청포도‘ ‘절정‘ ‘나의 뮤-즈‘ ‘꽃‘ ‘광야‘ 등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기존에 잘못 이해되어온 육사 시 해석의 오류를 바로잡고 육사 시에 대한 감상의 지평을 넓혀준다.˝

육사는 많은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문학사에 남을 만한 몇편의 절창을 남겼다. 도진순 교수의 책은 단순한 시인론을 넘어서 새로운 시 해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책을 구한 이유다. 한국현대시사에 대한 책들을 주섬주섬 다시 모으고 또 읽고 있는데 육사 시에 대해서는 이 책으로 가름할까 한다(평전과 전집도 체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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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에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한 강의 시즌1이 종료되었고 내주부터는 시즌2 강의가 진행된다(단편집 <녹턴>과 장편 <파묻힌 거인>,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 다루게 될 작품들이다). 시즌1에서 마지막으로 다룬 작품이 <남아있는 나날>과 함께 가장 많이 읽히는 <나를 보내지 마>였는데, 영화 <네버 렛 미 고>의 원작이기도 하다.

강의준비차 영화도 보았는데 키라 나이틀리와 캐리 멀리건, 앤드류 가필드 등이 주연한 영화에서 멀리건은 화자인 캐시 역을 연기했다. 세 친구는 장기 기증을 위해 복제된 인간(클론)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간다. 이들의 삶과 사랑을 담담하게 따라가는 게 원작이고 영화 또한 줄거리는 다르지 않다.

원작소설에 대해서는 따로 할 얘기가 많지만 페이퍼를 적는 것은 영화에서 캐시의 표정이 생각나서다. 담담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의 절제된 슬픔을 멀리건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을 지칭하는 ‘가엾은 것들‘(poor creatures)을 필멸적 존재로서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도 이해한다면(나는 그게 이 작품의 문제성이라고 본다) 이 표정은 피조물 일반의 표정이기도 하다. 즉 우리 모두의 표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억해둘 만하다...

PS. 번역과 관련하여 클론들의 원본을 ‘근원자‘라고 옮긴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시구로는 ‘possible‘이나 ‘model‘이란 단어를 쓰고 영화 자막에는 ‘원본‘이라 옮긴 것 같다. ‘근원자‘는 너무 거창한 번역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원본에 대해 루스가 비하하며 얘기한 대목이 잘못 옮겨졌다. 루스가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는 부랑자나 인간쓰레기,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정신병자나 죄수들로부터 복제된 거예요. 그게 우리 근원이에요.˝(232쪽)

이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We all know it. We‘re modelled from trash. Junkies, prostitutes, winos, tramps. Convicts, maybe, just so long as they aren‘t psychos. That‘s what we come from.˝(164쪽)

다시 옮기면, ˝우리 다 알고 있잖아. 우리 원본은 쓰레기들이라는 걸. 약쟁이, 창녀, 술주정뱅이, 부랑자들이지. 그리고 죄수들일 수도 있어. 정신병자가 아닌 경우에 말이야. 그게 우리의 원본이라구.˝

요컨대 정신병자는 클론의 모델이 아니다. 정신병자가 다른 ‘쓰레기‘들과 차이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이시구로의 원문은 분명 번역본과는 다르게 옮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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