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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엔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수다에 대한 독후감으로 '정성일 아줌마와 자크 랑시에르'란 페이퍼를 쓰겠다고 예고한 적이 있다. 그가 지난 계절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는 랑시에르의 책 <영화 우화들>을 마침 내가 지난주에 구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려고 했었다. 아마도 이 달 안으로는 쓰기 어려울 텐데, 막간을 이용해서 자크 랑시에르를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는다(아래 이미지는 <영화 우화들>의 영역본).

알튀세르 사단의 3인방 중 한 사람이었던 랑시에르에 대한 관심은 전적으로 슬라보예 지젝을 경유한 것이다(바디우와 아감벤 등도 내게는 모두 지젝이 소개해준 철학자들이다). 그래서 랑시에르에 관한 글들은 앞으로 '로쟈의 지젝'에 적을 두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주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과 미학 관련서들이 눈길을 끌었고, 나는 그의 저작들을 얼추 6-7권 정도 구해놓은 듯하다(랑시에르의 최대 미덕은 주저들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것이다). 조만간 번역서들이 나온다고 하니까 어쩌면 몰아서 읽어볼 수도 있겠다. 아래 '담비'의 기사가 그 워밍업이 되겠다.

담비(07. 02. 14) 자크 랑시에르 한국 상륙 예정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의 주저인 '미학의 정치' 등이 도서출판 울력을 비롯한 몇몇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지난 1980년대에,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팀 일원이었다가 알튀세르와 틀어져서 다른 길을 걸어간 이로만 알려진, 아니 그 이후 15~16년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왔던 철학자다.

랑시에르의 한국 상륙은 "왜 그런 중요한 사람이 번역되지 않는지 정말 이상하다"라는 어느 소장 철학자의 말마따나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프랑스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뒤를 이어 지성계를 주름잡은 비판철학자 4인방 가운데 에티엔 발리바르는 윤소영 한신대 교수가 지난 80~90년대에 이미 소개해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같은 네오 맑시스트와 '따로 또 같이' 진격하면서 맑스주의가 90년대 후반까지 그 담론적 생명을 이어가는 데 골몰했고, 그의 동료인 랑시에르에겐 너무 무관심했다. 아니, 발리바르가 랑시에르를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한국 학자들의 무관심이 더 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2명인 알랭 바디우와  E. 라클라우가 최근 들어서야 한국에 소개되고 있어 이들과 함께 랑시에르의 책들도 본격 조명될 조짐이다. 알랭 바디우의 책들은 현재 새물결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라클라우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통해 대중들과 얼굴을 '쎄게' 익혔으니, 아마 곧 주저가 소개돼 대학원생들이 손때를 어지간히 묻힐 것으로 예상된다(*라클라우/무페의 주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는 (다른 이름으로이긴 하나) 이미 번역돼 있고 지젝, 버틀러와의 공저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은 도서출판b의 근간 예정으로 돼 있다).

랑시에르의 책이 서점에 깔리기 전에 왜 지금 이 시점에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 시작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매우 극단적인 주체성의 이론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랑시에르는 현대사회가 선전하는 '자유', '평등' 같은 가치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괘씸죄'를 건다. '배제된 목소리'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이기도 하며, 랑시에르의 표현대로라면 사회라는 건축물 속에 그 자신의 '공간'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쉬운 예를 들면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거기 해당하며, 일본의 불가촉천민으로 여겨지는 '부라쿠민(部落民)'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주의 체제이든 뭐든 간에 이들을 계산에 넣지 않고 호혜와 평등을 주창해왔다는 것이 랑시에르가 벌인 폭로전의 전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랑시에르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해설을 몇차례나 썼다. 특히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 b, 2005)에서는 아주 길게 랑시에르의 비판이론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어 맛보기로서는 안성맞춤이다. 왜 지젝 얘기를 꺼내는가 하면 이런 랑시에르의 핵심주장은 얼핏 접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고 '극단적'인 주장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고대 그리스의 예를 들며, 귀족정과 과두정이 상류층 체제라고 비판하며 스스로의 몫을 요구한 데모스 집단을 강조할 때는 "뭐지?, 원시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젝은 랑시에르가 결코 앞뒤 재지 않는 원칙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랑시에르의 주장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서 풀뿌리 연대를 강조하는 요즘의 진보주의자들과 기본 멘탈리티는 동일하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렌즈를 국가 내부의 국부적인 현실에 맞출 때가 많기 때문에 훨씬 검증해보기 쉬운 쪽에 속한다.

최근 한국에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화재가 발생해 3층에 머물던 외국인들이 대량 참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관리가 허술했다, 직원들 근무가 엉망이었다는 후속보도가 나오고, 이들 이주노동자들에게 보호한답시고 수갑을 채우고, 문을 밖에서 잠궈놓았던 정황이 알려지면서 성토여론이 일고 있다.

랑시에르는 바로 이런 존재들, 수갑에 묶여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체제를 합리화해온 것이 오늘날의 정치철학이라는 것을 탁월하게 이론화했다. 또한 이들 정치철학들은 랑시에르 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데,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원정치(arche-politics), 초정치(para-politics),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 극정치(ultra-politics)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중 극정치의 예만 들어본다면, 이들은 정치의 직접적 군국화를 통해 정치를 부정한다. 이들이 부정하는 정치는 물론 '사회에 자신의 몫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투쟁으로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정치'를 말한다. 투쟁을 더 큰 투쟁으로 말소시키는 전략인데, 오늘날 급진적 우파가 계급 투쟁보다는 계급(또는 성)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는 어떤 은폐를 가하는가. 지젝은 이 대목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을 빌려온다. 제임슨은 맑스주의가 때로 인간 행위를 실용성의 극대화로서 보편적으로 모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 판본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는데, 양자 모두가 고유한 정치적 사고의 필요성을 없애버리는 것은 똑같다는 지적이다. 그에 비해 랑시에르는 '언어의 모호성' 같은 문학이론을 철학적 사유 속에 도입하면서까지 정치라는 것의 미묘한 운동성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쉬운말로 정리하자면, 소수자들의 정치적 발언은 이러한 네가지 형태의 '부정'에 의해 정치적 시민권을 갖지 못한채 주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이 밀려만 나겠는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의 프랑스혁명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듯, 막히면 터지게 마련이다. 물론 랑시에르에 따른다면 터진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로가 다양해졌고 사회의 기득권 섹트들이 수없이 쪼개져있는 현 상황에서는 다른 식의 정치적 투쟁이 가능하다는 점을 랑시에르의 이론은 환기시켜주는 듯하다. 경제적 성장을 이룬 중산층의 나태한 무의식을 겨냥한 랑시에르의 이론이 한국땅에서 얼마나 생산적으로 음미되고 변형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리뷰팀)

07. 02. 21.

P.S. 참고로, '담비'(http://www.dambee.net/)는 '담론비평'의 약자인데 최근에 문을 연 온라인 학술저널이다. 교수신문의 강성민 기자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분가하거나 독립한 것이 아닌가 싶다(요즘 교수신문은 이름만 걸고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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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7-02-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구입한 스리지Cerisy에서 열린 랑시에르 토론을 엮어 낸 책의 저자들을 보면 바디우의 독자들과 상당수 겹침을 봅니다. 사실 랑시에르는 영어권에 바디우보다 30년도 더 일찍 알려졌고,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그의 마오주의시절(저널<논리적 반란>)의 글들이 번역되었는데.. 아마도 60-70년대 영,미 알튀세주의자들의(초기 Radical Philosophy그룹) 영향일거라 생각됩니다... 어디에선가 그가 학위논문(<프롤레타리아의 밤>)에 도움을 얻기 위해 푸코를 찾아갔는데, 푸코가 랑시에르에게 한수 접어줬다는....^^

로쟈 2007-02-21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독자와도 얼마간 겹칠지 모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읽어본 건 아니지만 <미학의 정치> 같은 책들이 관심사와 맞아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녁을 조금 일찍 먹고 돌아오니 책상에 작은 소포가 놓여있다. 물론 책이다(오늘도 세 개를 받았다). 아마존에서 온 걸 뜯어보니 얼마전에 소개한 바 있는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2007)가 들어 있다(*들은 바로는 국역본이 곧 나온다고 한다).

이미지보다 별로 크지 않은 '포켓북'이다(한동안 전철에서 읽을 책이 정해졌다!). 지난 3일에 주문을 했으니까 보름 정도 걸린 셈이다. 책값보다 배송비가 더 비싸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이지만(합계 21.9불이다), '지젝'이라서 참아두기로 했다(이 시리즈의 최신간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이며 나는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다).  

Этика психоанализа. Семинары. Книга 7. (1959-60)

이런 입문서들이 대개 그렇듯이 색인 앞에 붙은 마지막 장은 추천도서 목록이다. 라캉에 대해서라면 물론 <에크리>와 <세미나>를 읽어야 한다. 지젝의 권고는 반드시 둘다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어느 하나만 읽어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게 지젝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둘을 겹쳐서, 잇대서 읽어야 하다. 사위인 밀레르가 편집하고 있는 라캉의 <세미나>는 국내에 단 한권도 출간돼 있지 않지만 불어로는 절반 이상이 출간됐으며 영어로는 1-2년의 터울을 두고 계속 번역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장 최근에 나온 건 <세미나7: 정신분석의 윤리>(2006)이다.

 

 

 

 

지젝의 설명에 따르면 예컨대 이 <세미나7>과 <에크리>에 실려 있는 '칸트와 함께 사드를' 같은 글을 같이 읽어야 한다는 것(물론 우리로선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세미나>건 <에크리>건 번역돼 있지 않으니까. 몇 편의 글이 <욕망이론>(문예출판사, 1994)으로 번역돼 있으나 불어본 <에크리> 이상으로 읽기 어렵다(이루어지지 않는 게 욕망이라지만 라캉 읽기에 대한 욕망만큼 이를 실증해주는 게 또 있을까?).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얼마나 경쾌하며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

이어서 지젝이 제시하는 최고의 2차 문헌들(지젝은 이하의 책들을 화끈하게 'the best'라고 소개한다). 몇 권은 그래도 국내에 소개돼 있어서 나의 손끝이 가볍다. 제일 먼저, 가장 짧은 최고의 입문서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 그리고 라캉 임상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정신의학>(민음사, 2002)과 다리언 리더의 <왜 여자들은 부치는 편지보다 더 많은 편지를 쓰는가?>(1996). 목록에서 내가 안 갖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몇 달전에 도서관에 주문해놓았지만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다리언 리더는 국내에 소개된 <라캉>(김영사, 2002)의 저자이다.

 

 

 

 

라캉과 철학에 대한 에세이는 조안 콥젝의 <나의 욕망을 읽어봐>(1994)와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 콥젝의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와 함께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콥젝의 글은 <성관계는 없다>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최고의 라캉주의적 독해는 에릭 샌트너의 <나만의 사적인 독일>(1996)과 믈라덴 돌라르의 <단지 목소리뿐>(2006). 돌라르는 알다시피 지젝의 단짝으로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의 이론정신분석학회 최초의 멤버 2인 중 한 사람이다. 

거기에 아직까지는 라캉에 관한 최고의 전기로 꼽히는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 2000). 이만한 분량으로는 유일한 전기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지젝에 따르면 몇몇 논란이 될 만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가장 방대한 전기적 자료를 제공해주는 책이라고.   

마지막으로 라캉에 관한 최고의 웹사이트, 는 여전히 www.lacan.com 이다.

07. 01. 19.

P.S. 지젝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건 겸연쩍은 일이었겠지만, 내가 꼽는 최고의 라캉 입문서는 물론 지젝의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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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1-19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문고는 이용안하시나요. 교보에서 주문하신 라캉책 12000원에 뜨는데요.

로쟈 2007-01-19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 땐 제가 성미가 급해서 바가지를 쓰기도 합니다.--;

에바 2007-01-19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던 페이퍼였는데 드디어 책이 도착했군요. 저는 일단 학교 도서관에 신청해 두었는데 책이 도착한 듯 싶습니다. 추가 페이퍼도 기다리겠습니다.^^

로쟈 2007-01-1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가 페이퍼는 에바님이 쓰셔도 좋을 듯한데요.^^

기인 2007-02-2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다시 라깡을 공부하게 될 수도.. 왜냐하면 다시 알튀세를 공부하게 ‰映?때문이죠. 이는 다시 제임슨을 공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결국 그 라깡으로 간다면!!! -_-; 최대한 알튀세에서 멈추는 것이 목표입니다. ㅎ
 

오 마이 갓!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설마 이런 뒷북성 제목을 내가 달았을 리는 없다. 오마이뉴스의 뒷북성 기사의 제목이 그럴 뿐이다(알라딘에서 맨날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입증해준다!). '씨네마떼크 탐방'을 다루는 기사가 연재되는 듯한데, 두번째 꼭지가 지난번에 소개했던 아스트라 테일러 감독의 <지젝!>이다. 기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관련기사'로 옮겨놓는다. 나와 무관하지도 않기에... 

 

오마이뉴스(07. 01. 15)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라캉도 어려운데 지젝에게까지 관심이 생겨 자료를 찾다가 뜻밖에도 '오!재미동'에서 귀한 다큐멘터리 자료를 한 편 만났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겸 문화연구자 슬아보예(*슬라보예) 지젝을 다룬 다큐멘터리 물이다. 슬아보예(*기자분이 아직 감이 없나 보다) 지젝은 현존하는 지식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고, 국내에도 그의 다작으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람이지만, 다큐멘터리로 그를 접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2006년 가을 종로의 '스펀지'에서 열렸던 서울영화제에서 지젝에 관한 영화가 한 편 상영되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알게는 되었지만 보지는 못했다. 그 영화가 이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반가웠다(*단순한 사실도 확인하지 않다니. 서울영화제에서 상영된 건 <지젝의 기묘한 영화강의>였다). 국내에는 출시가 물론, 되지 않았고 'ZEITGEIST FILMS'라는 곳이 판권을 가진 DVD로 물건너 온 것이였다. '오!재미동'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로쟈라는 분이 자막을 입혔고, 지난 12월에는 상영회와 강의도 있었다고 한다(*어떻게 '-했다고 한다'란 기사를 쓸 수 있을까!). DVD케이스의 표지에 지젝(Slavoj Zizek)은 "문화이론의 엘비스(The Elvis of cultural theory)"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젝은 인문학 동네에서는 남자 마돈나 취급을 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고,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까 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주제로 삼아 끊임없이 주절대는 수다쟁이 철학자이기도 하다(*이건 나의 서평 멘트를 옮겨온 것이다).

그런 그는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로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 보면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엄밀히 말하면, 쉘링)로부터 정신적 세례를 받은 진정한 좌파철학자이다. 전 지구적 세계화문제부터 모국인 슬로베니아의 정치적 현실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고민하고 글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한편, 자신을 스스로 스탈리니스트라고 주장을 하는 공산주의자이기도 하다. 동구에서는 공산당 정권의 몰락 이후 좌파들이 서유럽보다도 더 비난과 공격을 당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현실 좌파로서의 선택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1990년대에 슬로베니아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그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는 그의 사상이 현재보다는 오른쪽이었고 다원주의사회 지향적이었다고 한다.

<지젝>에 나오는 자료화면을 보면, 그의 정당은 자유민주당(Liberty Democratic Party)이다. 하지만, 이 당명을 우리식으로 '자민당' 정도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역사적, 현실정치적 문맥에 따라서 똑같은 '자유'와 '민주'도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단히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고, 1989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학계와 이론계에 등장하여 불과 15년이 지난 현재 당당히 우리 시대의 사상가 반열에까지 올라있다. 현재는 구체적 정치보다는 출판과 담론의 영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젝!>은 사실 그의 이론세계를 다 알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여러 강연들과 인터뷰를 보면서 때론 오해를 했을 법한 그의 퍼스낼리티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었고, 그가 사실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가령, 라캉 정신분석학과 쉘링철학, 마르크스레닌주의 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특히 보스턴에서의 강연을 보면 그가 여러 이론상의 적들, 특히 페미니스트의 공격에도 쟈크 라캉의 철학을 고수하고, 그가 일종의 흥행수단으로서 택한 자신의 강의와 저술방식에 대한 변명을 듣게 되어서 이채롭기도 하다.

혹시 최근 인문학, 철학, 문화연구 동향에 관심이 있어서 지젝의 세계에 대해서 한 번 공부해 보고 싶다면, 먼저 아스트라 테일러의 71분짜리 다큐멘터리 <지젝!>을 한 번 시청하고, 지젝 입문서로 엘피출판사에서 간행한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으면 그의 여러 저서들을 직접 독파해 보라! 현대사회와 정치현실, 대중문화와 서구의 주요정치·문화담론에 대한 나름대로 식견이 생기게 될 것이다.(심정곤 기자) 

07. 0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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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7-01-15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식입니다. 다만 저로써는 그 상연회와 강의를 듣지 못해 아쉬움점이 뒷북을 칩니다.

로쟈 2007-01-1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 들으셨다고 하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강의는 아주 훌륭했답니다...

열매 2007-01-16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지젝의 책에서 무엇을 읽었다는 이야기는 한줄도 안 나오는군요. 기사로 본다면 고작 영화 한편과 토니 마이어스의 책 한권 정도 읽고 이런 하나마나한 '기괴한' 글을 쓴 꼴인데, 그 용기에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1년 여 영어본으로 라깡을 읽어왔는데, 과연 한국에서 라깡을 이야기한 사람 중에 라깡의 에끄리나 세미나를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물음이 들더군요.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글을 그렇게 잘 정리해서 외우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공부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깡의 세미나들은 그 당시 세미나를 함께 했거나, 함께 했던 사람들을 '모시고' 전수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11월에 동국대에서 있었던 라깡학회에 '구경'갔을 때 느꼈던 것은, 라깡을 원전으로 읽어내는 '일진'학자들과, 라깡'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간의 미묘한 위계 질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철학과에서 풍기는 이런 미묘한 뉘앙스, 혹 아실까 싶습니다.
여하튼 이런 어이없는 기사를 북리뷰에서 자주 보다 보니 한국에는 언제쯤이나 제대로 된 북리뷰를 볼 수 있으려나 하는 '안쓰러움'이 듭니다.

로쟈 2007-01-16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를 읽으면서 저도 반가움보다는 착오적인 느낌이 먼저 들었습니다(거기에 기시감!). 원래 'news'를 다루는 게 언론이 아닌가요. 아니면 심층분석/이든가. 오마이뉴스야 '시민기자'들의 기사로 채워지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편, 지젝도 영화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요즘 읽고 있는 스타브라카키스도 그런 얘기를 하는데, 비의적이고 수사적인 라캉의 담론이나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다 사기입니다...

나비80 2007-01-1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의는 아주 훌륭했나보군요ㅋㅋ^^ 저도 전형적으로 저런식으로 기자질을 해먹다가(?) 그 비루함을 못 견뎌 뛰쳐나와버렸죠. 기사를 쓸 때 어려운 주제는 감당이 잘 안되곤 해 여러 곁말을 에둘르거나 중대한 사안일지라도 실체 확인을 게을리 해 개박살이 나곤 했답니다. 예민한 독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그만두길 백 번이고 잘했다 생각합니다. 본격적, 전면적으로 구라를 칠 수 있는 일이 제게는 맞겠더라구요.^^

로쟈 2007-01-16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자를 하셨군요.^^ '전면적 구라'는 언제쯤 나오는지요?(이건 소이부답이신가요?)^^

오늘사람 2007-02-1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를 쓴 심정곤이라고 합니다.
먼저 지젝에 조예가 깊은 분들께 죄송합니다.
현재 라캉에 관한 기사도 썼는데 그것도 욕먹겠군요.
제 의도는 고지곧대로 소개입니다.
씨네마떼크,지젝,라캉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도 있지만
저처럼 조금만 아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언짢아 마시고 양해부탁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로쟈 2007-02-1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 읽기>에 관한 기사도 읽어봤습니다.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서 기사를 쓰신다는 것에 저는 이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기사라면 '팩트'를 확인하시고 쓰셔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에크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아직 영문으로도 완역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는 내용은 어떤 소스에 근거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브루스 핑크의 완역본이 작년에 나와 있습니다. 기사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사람 2007-02-1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렇군요.

브루스 핑크 완역본은 어디선가 들은 가억이 나기는 했는데, <라캉읽기> 책내에 언급된 내용을 기준으로 기사작성했습니다. 시차가 있나봅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지젝에 대한 비판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고 에바님이 물어오셔서 몇 군데 검색을 해봤다. 몇 편의 글들에 대한 서지 정도를 확인해두었는데, 영문 서지인지라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건 다름아닌 내가 3년전에 쓴 것이다. 다시 읽으며 약간의 '시간차'를 느끼게 되지만, '자료'로 치면 무난할 것도 같아서 그냥 옮겨놓는다(지젝에 관해 쓴 자료들을 다 옮겨놓은 줄 알았는데 창고에 없다!).  

인터넷 검색(산책)을 하다가 작년(*2003년) 10월 6일자 이대학보에 실린 '지젝 특집'을 읽게 되었다. 당시 각 대학 학보마다 지젝의 방한을 맞이하여 학술면 특집을 마련했더랬는데, "욕망과 실재로 현대사회를 본다"라는 이 특집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특집은 "사회를 구하는 환상,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지젝의 작업을 개관하는 기사와 함께, 각각 그의 행동적 지식인으로서의 실천에 대한 지지와 이론적 작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짧은 기고문 두 편으로 구성돼 있다. 내가 제목에서 '두 가지 의견'이라고 한 것은 이 두 기고문을 말한다.

먼저 허윤(국문4)은 자신이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를 열거한다: "그는 학문이 삶과 괴리되지 않음을, 사상이 현실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가다. 이것이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학자는 상아탑에 갇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상아탑의 높은 벽을 부수고 두 발을 땅에 붙인 채로 자신의 사상을 펼친다. 개인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을 현실사회와 연결시키고 현실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짧은 기고문의 마무리인데, 여기에 그대로 옮긴 이유는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에 나는 그보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전지구적/인간적 현실에 대해서 발언/비판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내가 작년에 읽은 가장 감동적인 책이다). 지난번 방한 강연회에서의 그의 거친 목소리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복장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바이지만, 그는 이론적/사회비판적 저작들을 계속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즘의 인물은 아니다. 요컨대 '교수'나 '학자' 타입이 아니라, '활동가'이다.

사실 그가 슬로베이나의 류블랴나 대학에서 맡고 있는 지위도 우리식의 '연구교수' 같은 것이어서 강의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그는 강의로부터 면제돼 있다). 그것은 슬로베니아 당국 혹은 대학권력과의 마찰/불화의 결과이지만, 그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전화위복으로 삼는다. 우연찮게(우연은 아니다. 그는 대담에서 영화에 대한 관심/열정은 철학보다도 앞선 것이었다고 말하니까) 대중적인 영화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 '뜨게' 되었지만, 그의 그러한 '전술'은 사실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건 충분히 훌륭한 '미끼' 역할을 해준 것이니까.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부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친-지젝파들은 애초에 라캉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갖지 못했거나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대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라캉 이해는 전적으로 자크-알랭 밀레에 기대고 있다. 밀레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지젝도 가능하지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이론가이자 해석가로서 밀레와 구별되는 지점은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그가 '활동가'라는 점에 있다. 물론 그가 활동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라캉의 이론과 독일 관념론 같이 아주 난삽한 '이론'이긴 하지만, 이때의 이론은 이미 실천으로서의 이론이다. "정신이 뼈"라는 헤겔의 문구를 반복하자면, 그에게는 "이론이 곧 실천"이다(반면에 '실천적 이론'이라거나 '이론적 실천'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이론/실천의 이분법적 도식안에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와 작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열정은 '연구'에 바빠서 미처 사회적 '활동'을 할 만한 여가가 없는 책상물림들에겐 충분히 자극적이며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러한 모범에 따른다는 것은 무사안일하게 'mere life'나 'mere study'에 함몰돼 있는 '왜소한' 자신의 삶/학문을 더이상 방치하지 않는 것이며, 지금까지의 습관/관행을 "이건 아니지!"라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어서 진태원(서울대 철학과 강사)은 지젝의 세계적인 유명세("동유럽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주류 철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진단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론'(이건 비교문학쪽 소관이다)과 '철학'(분석철학이나 현상학)을 구분하는 미국 학계의 제도적 특성 때문인데, "더 나아가 이는 지젝의 논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즉, "지젝은 정교한 논변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대중문화의 사례들의 제시를 통해 자신의 이론, 곧 라캉의 정신분석을 예증하는 논의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이론의 타당성을 따지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같은과 김상환 교수의 "지젝은 여러 이론들의 활로를 찾는 공을 세웠지만 독자적인 이론가는 아니"라는 평가와도 맥을 같이 한다.

사실, 이러한 평가/비판은 니체의 철학을 무체계적이라고 하여 '문학류'로 취급하거나, 데리다의 철학을 지나치게 수사적(동시에 수행적)이라고 하여 '비철학'으로 간주해버리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에코그라피>를 번역하기도 한 이에게서 이러한 태도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다소 의외이다. 국내 '유일의' 데리다 전문가 김상환 교수의 평 또한 그간에 '데리다'에게 쏟아졌던 단골 비판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 문제는 지젝의 실재가 아니라 지젝의 대가적 명성을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 아닐까?

진태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지젝의 급진적인 사회적 변혁에 관한 주장은 경험과학적 지식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어 논증적 효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데, 이 또한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는 되지 못한다. 최근에 바울이나 레닌에 경도되어 있는 지젝에 따르면, 진정한 행위(act)는 어떤 계획이나 고안에 의해서 성취/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겪어낸다거나 통과한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경험과학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된 사회변혁의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지젝의 말대로, '지식'은 사후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의미화하기 위해서 마련되는 것이다. 지젝도 인용하고 있는 영국 사회철학자 존 엘스터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상태"이지, 결코 선행 계획의 결과가 아니다. 지젝이 강조하고 있는 행위에의 결단에 대해서,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식(증거)를 제시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내보여라, 그럼 신을 믿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신앙은 도약의 문제이다).

평자는 당부의 말로 덧붙인바, "앞으로 '이론가' 지젝의 핵심과제는 라캉 사유의 약점이기도 한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는 것인 듯하다"라고 했는데, 평자가 과연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일치'(이건 상당히 프래그머티스틱한 주장인데)야말로 이론의 목적이자 철학의 지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좀 의심스럽다. 평자가 전공한 스피노자가 과연 그러한 철학자이며, 헤겔이 그러한 철학자이며, 알튀세르가 그러한 철학자인가?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양자역학의 진리(이론)는 전부 넌센스가 될 것이고, 무의식의 진리(앎)를 말하는 정신분석학 또한 잠꼬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사실 지젝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내 경우에, 상당히 역설적이고 급진적인 그의 주장들이 매우 실감있다는 점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아주 리얼한 것이다. 책속의 진리야 말로 지젝이 혐오해 마지 않을 만한 것인데, 지젝의 '이론'을 책속의 진리로만 치부하는 것은 비판으로서도 좀 고약하다...

04. 01. 07/ 07.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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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1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아, 이것이 지난번에 어느 페이퍼에서인가 암시(?) 되었던 로쟈님과 진태원님의 견해 차이군요. ^^

로쟈 2007-01-1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이나 지젝이나 모두 거부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게 수용되는 거라고 했으니까 학계/대학에서의 거부감 같은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제생각엔 거부의 '논리'가 불충분한 게 아닌가 싶어요...

sommer 2007-01-15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부정성으로 귀결되는 '반성'과 무관하게 '행위'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활동가'가 곧 지젝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하이데거가 실패했던 그 지점에서 물구나무를 서는...사례가 곧 이론이 되는 '매뉴얼'처럼 말이지요...

로쟈 2007-01-1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행위'가 '자기부정성'(반성)과 무관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오히려, 자기부정, 지젝식 용어로는 자기철회의 제스처가 바로 행위인데요. '형이상학적 활동가'란 명칭도 형이상학을 새롭게 정의하지 않는 한 지젝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suture님의 자세한 입론을 기대합니다...
 

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동문선, 2005)을 예전에 읽다가 체크해놓은 대목들이 있어서 다시 대조해보기 위해 원서를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이런 일이 드물진 않다. 내일 학교에 가서 다시 복사해야 할까?). '안티고네'란 주제에 대해서라면 한 학기 강의가 가능할 정도로 많은 수의 관련서들이 있고 나는 그 중 몇몇 권을 갖고 있다. 이 참에 견적이라도 내볼까 했는데 며칠 미뤄야겠다.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버틀러의 책과 함께 임옥희의 <주디스 버틀러 읽기>(여이연, 2006)를 참조하실 수 있겠다. 버틀러의 주저 7권에 대한 해설을 겸하고 있는 이 책은 당연히 <안티고네의 주장>에 대해서도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내가 꺼내든 책은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이다. 전체 6개의 장에서 제5장이 '프로이트 독자로서의 주디스 버틀러'를 다루고 있는바, 지젝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버틀러의 독자들도 필독해야 하는 장이다(두어 페이지만 읽어도 이토록 재미있는 책을 사람들이 왜 읽지 않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guilty pleasure'라도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안티고네'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도 다루어지는군.  

미리 말하자면, 이달말쯤에는 지젝의 또다른 주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도 출간된다(예정대로 출간된다면 2월의 이론서로 꼽아둘 참이다). 참고로, 지젝 스스로가 꼽은 네 권의 대표작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시차적 관점>(2006)이다. 뒤의 두 권은 분량도 만만찮은데, 지젝의 이론적 매트릭스를 구성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만큼 반복적으로 읽어두는 게 지젝을 이해하는 관건이다(*<부정성과 함께 머물기>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란 제목으로 2월 중순에 출간됐다. 이제 <시차적 관점>만 소개되면 지젝의 '4대 주저'는 모두 번역된 셈이 된다).  

각설하고, 지젝의 버틀러론을 시간날 때마다 정리해둘 작정이다. 그 첫번째 꼭지는 '왜 도착은 전복이 아닌가?'이다. 이것만으로도 견적이 너무 많이 나와서 '도착적 주체와 히스테리적 주체'란 제목을 달고 도착증과 히스테리증을 비교하고 있는 대목 정도만을 따라가볼 생각이다(이 절은 명실상부한 '도착적 철학자' 미셀 푸코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건 다른 자리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먼저, 서두: "'칸트와 사드와 더불어'라는 주제에서 이끌어낼 핵심 결론들 가운데 하나는, 미셸 푸코처럼 도착의 전복적 잠재력을 옹호하는 자들이 조만간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부정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395쪽) 즉, 전복의 철학이나 정치적 기획은 프로이트적 무의식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것. 왜인가?

"이론적으로 이 부정은 프로이트 스스로가 강조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정신분석에 있어서 히스테리와 정신증은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길을 제공한다, 즉 무의식은 도착증을 경유해서는 접근할 수 없다. 프로이트를 뒤따라서 라캉은, 도착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건설적인 태도인 반면에 히스테리는 훨씬 더 전복적이며 지배적 헤게모니를 위협한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396쪽)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훨씬 더 '쎄' 보이는 도착보다도 히스테리가 오히려 더 전복적이라는 것. 이것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갖는 역설이다('프로이트로 돌아가자!'란 구호를 내건 라캉이 이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건 당연한 일이겠고). 물론 상식적으로 보자면 상황은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도착증자들은 히스테리증자들이 단지 은밀하게 꿈꾸는 것을 공공연하게 실현하고 실행하지 않는가?"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역설과 대면하게 된다. 무의식은 우리가 (히스테리증자로 머무는 한에서) 공상하기만 할 뿐 실현하는 것은 기피하는 은밀한 도착적 시나리오들로 구성되는 것인 아닌 반면에 도착증자들은 영웅적으로 '그것을 한다'는 역설과 말이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역설이란 무엇인가? 그게 은밀한 도착적 시나리오들과 무관하다는 것. 그러니 그러한 시나리오를 실현/실행하는 건 비록 '영웅적'이라 하더라도 헛발질이다. "우리가 우리의 은밀한 도착적 환상들을 실현(acting out)할 때 모든 것이 폭로되지만 무의식은 여하간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 무의식은 거기에 없었다?

왜인가? "왜냐하면 프로이트적 무의식이란 은밀한 환상적 내용이 아니며, 오히려 사이에 끼여드는, 은밀한 환상적 내용을 꿈의 텍스트(혹은 히스테리적 증상)으로 번역/치환하는 과정에 끼어드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이 향유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도착증자는 무의식의 핵심인 그 틈새를, 그 '화급한 물음'을, 그 장애물을 흐려놓는다."(396쪽)

히스테리와 도착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도착증자는 (무엇이 향유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타자에 대한) 답을 알기 때문에 무의식을 배제한다. 그는 그것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는다. 그의 위치는 흔들릴 수 없다. 반면에 히스테리증자는 의심한다. 즉 그녀의 위치는 영원하고도 구성적인 (자기-)물음의 자리이다: 타자는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지? 타자에게 나는 무엇이지?..."(397쪽) 마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처럼!

 

"도착과 히스테리의 이런 대립은 특별히 오늘날 적실하다. 주체성의 전형적 양태가, 상징적 거세를 통해 부성적 법칙에로 통합된 주체인 것이 더 이상 아니라, 즐기라는 초자아의 명령을 따르는 '다형적으로 도착적인' 주체인, 우리 '오이디푸스 몰락'의 시대에 말이다." 즉, 오늘날의 주체는 '다형 도착적' 주체이다. '오이디푸스 몰락'의 시대에 넘쳐나는 건 갖가지 도착증자들의 행태이다(그럼에도 여전히 안티-오이티푸스가 우리의 구호인가? 누가 오이디푸스에 시달리는가? 아래 사진은 최근에 뜨고 있다는 인형방).

따라서, 오늘날 정치적 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도착증의 닫힌 원환고리에 사로잡힌 주체를 어떻게 히스테리화할 것인가"이다. 지젝의 통찰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후기 자본주의 시장 관계의 주체는 도착적이며, 반면에 '민주적 주체'는 내속적으로 히스테리적이다. 다시 말해서, 시장 메커니즘에 사로잡힌 부르주아와 보편적인 정치적 영역에 연루된 시민의 관계는, 주체적 경제에서 볼 때, 도착증과 히스테리의 관계이다."(397-8쪽)

"따라서 랑시에르가 우리의 시대를 '후-정치적'(*탈정치적)이라고 부를 때 그는 정치적 담론이 히스테리에서 도착증으로 이처럼 이행했음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후정치'란 사회적 사태들을 관리하는 도착적 양태이며, '히스테리화된' 보편적/탈구적 차원이 박탈된 양태이다."(강조는 나의 것)

최근에 이러한 포스트-폴리틱스의 시대, 도착적 '탈정치 시대'를 징후적으로 드러내주는 유행어가 '참 나쁜 대통령' 아닐까? 아마도 곧 웃찾사나 개그야에서도 패러디될 만한 이 유행어를 듣거나 발언하면서 우리가 희희락락할 때 도착적 쾌락은 따로 먼 곳에 있지 않다('탈정치'의 노무현 버전이 '탈권위'이므로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는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관련기사를 읽어보는 것으로 이 페이퍼는 일단락짓도록 한다.

한겨레(07. 01. 12) '참 나쁜~’ ‘참 좋은~’ 요즘 정치권 최고 유행어  

노무현 대통령이 새해 벽두에 꺼내든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카드는 단숨에 정국을 개헌정국으로 몰아넣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판을 뒤흔들 수 있는, 매우 엄중한 ‘개헌 국면’ 속에서, 아기자기한 유행어와 패러디가 탄생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입으로부터 시작된 ‘참 나쁜 대통령’ 시리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박근혜 전 대표가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단순명쾌하게 비판하자, 이튿날 노 대통령이 재반박하더니, 다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안에서 각각 이 말을 빗대 엄호와 반격을 펴면서 ‘참 나쁜 ~’, ‘참 좋은 ~’이 정치권에 유행어가 됐다.

#1. ‘참 나쁜 대통령’의 탄생/ 1월9일

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에 개헌 제안을 하자, 박근혜 전 대표 캠프는 박 전 대표의 말이라며 다음과 같은 반응을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돌렸다.

<박근혜 전 대표, 노무현 대통령 회견 관련 반응>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2. 노무현의 반격/ 1월10일

이튿날인 10일, 3부 요인 및 헌법기관장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다.

“나쁜 대통령은 자기를 위해 개헌하는 대통령이다. 이번 개헌은 나를 위한 개헌이 아니고, 차기 대통령을 위한 개헌이다.”

정권연장을 위해 3선 개헌을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이다. 전날 자신에게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말한, 박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전 대표를 공격한 것이다. 청와대는 청와대브리핑에 ‘나쁜 개헌, 나쁜 대통령’이라는 글을 올려 노 대통령을 엄호했다.

“우리 역사에 정말 ‘나쁜 개헌, 나쁜 대통령’이 있었다.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려는 개헌, 독재를 항구화하고자 한 개헌, 그것을 날치기나 폭력으로 추진하려 했던 대통령이 진짜 나쁜 개헌, 나쁜 대통령이다. 박근혜 전 대표에게 묻는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을 추진한 이승만 대통령,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유신 헌법을 제정한 박정희 대통령, 단임제이지만 7년 임기를 누릴 수 있도록 개헌한 전두환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인가.”

#3. 박근혜, “참 좋은 대통령 만들자”/ 1월11일

11일 서울 여의도에 새로 마련된 한나라당 서울시당 사무소 개소식에서 ‘참 나쁜’ 시리즈가 업그레이드됐다. 이 행사는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경기지사, 원희룡 전 최고위원, 고진화 의원 등 대선 주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먼저, 강재섭 대표가 인사말에서 개헌론을 비판하며 외쳤다. “노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국가안보나 국민경제는 없고 오로지 선거와 정권연장 음모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볼 때도 ‘참 나쁜 대통령’입니다!”

행사장에는 “명언이다”, “옳소”라는 추임새와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박근혜 전 대표도 환하게 웃었다. 이어 단상에 오른 박 전 대표가 말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민생 챙기기에 매진해도 모자라는 정권이 또다시 개헌을 들고 나오면서 온 나라를 흔들어 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한마음으로 뛰어서 ‘참 좋은 대통령’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4. 김한길 “참 나쁜 발상”/ 1월12일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확대간부회의에서, ‘참 나쁜’ 패러디를 활용해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한나라당에 말씀드린다. 헌법이 규정한 헌법 발의권 행사하는 대통령에 무대응하고 함구령으로 일관하는 한나라당은 초헌법적 발상이고, 초헌법적 발상은 ‘참 나쁜 발상’이다.”

이날 여의도 국회 주변 식당가에서는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참 나쁜 사람이군요” 등 ‘참 좋고, 나쁜’ 시리즈가 밥상, 술상에 올랐다.(황준범 기자)

07. 01. 1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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