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옮겨놓고 있는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이 내일은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을 다루고 있다. '방앗간'을 또 지나칠 수 없어서 옮겨놓고 몇 자 보탠다. 아래 열음사판 시집 표지를 보니 감회가 새로운데, 애석하게도 소장하고 있는 시집은 아니다. 대신에 창비사의 오장환 전집을 갖고 있고 거기에 뛰어난 예세닌 번역시들이 수록돼 있다. 물론 이 책 또한 절판되었지만...

한국일보(07. 12. 28) [오늘의 책<12월 28일>] 자작나무 숲에서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이 1925년 12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여관에서 자살했다. 30세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예세닌은 1916년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 역사에 바탕한 섬세한 서정시ㆍ서사시를 발표해 러시아혁명기를 대표했던 시인이다. 한 세기 저편 러시아의 ‘마지막 농촌 시인’이지만 그는 세 인물과 얽힌 인연으로 우리 기억에 각인돼 있다.

첫번째 인물은 현대무용의 개척자인 ‘맨발의 이사도라’ 이사도라 던컨(1877~1927). 예세닌의 자살의 직접적 원인은 음주벽과 신경증이었지만 그의 죽음이 던컨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던컨은 러시아 혁명 후 1921년 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예세닌은 자신보다 열일곱살 연상인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1922년 결혼식을 올리지만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다 1924년 결별했다.

이듬해 자살한 예세닌이 여관방에 남긴 마지막 시는 ‘잘 있거라, 벗이여’였다. 던컨은 예세닌이 죽은 지 2년 후 파리에서 죽었다. 스포츠카를 시승하기 위해 뒷좌석에 앉아있던 그녀가 어깨 뒤로 둘러 내려뜨린 숄이 차 뒷바퀴에 낀 채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목이 졸려 숨진 것이다.

두번째 인물은 러시아 현대시의 개척자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예세닌의 장례식장에서 ‘예세닌에게’라는 시를 낭송했던 그는 5년 후 역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세번째 인물은 한국의 시인 오장환(1918~1951)이다. 예세닌에 크게 영향을 받은 오장환이 1946년 번역한 <에쎄닌 시집>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번역시 작업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이 시집은 오장환이 월북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금기였다. 노문학자 박형규 번역으로 ‘어머니’ ‘목로술집의 모스크바’ 등 예세닌의 절창을 모아 1985년 출간된 <자작나무 숲에서>도 절판 상태다.(하종오기자)

07. 12. 27.

Виталий Безруков Есенин

P.S. 자료를 찾으니 예세닌에 대해서는 소설도 나와 있고, 영화도 제작되었다(영화의 몇몇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5IrtAU36438 참조). 그리고 예세닌의 자료 사진들(http://www.youtube.com/watch?v=0fXAS7HRl5o)과 함께 '진짜' 장례식 자료화면도 떠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UjJepN2ZrCY). 

"Сергей Есенин". (Фото — 1tv.ru)

영화속 장례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XFwLTDilATk 참조. 러시아 그룹 '류베'가 부르는 노래 '자작나무'는 http://www.youtube.com/watch?v=LuxlG2Y7j0U 에서 들어보시길...

P.S.2. 예세닌 삶과 시에 대한 촌평은 천양희 시인의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샘터,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마야코프스키의 시 '세르게이 에세닌에게'는 물론 <마야코프스키 선집>(열린책들, 2006)에 번역돼 있다. 오장환 시에 대해서는 유종호의 <다시 읽는 한국시인>(문학동네, 2002)을 일독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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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장환 시인의 고향에서 근무를 했던 적이 있어서 오장환문학제를 구경한 적이 있었어요.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다는데 월북하는 바람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로쟈님 서재에 와서 사진을 다시 보니 반가운거 있죠.^^

로쟈 2007-12-28 00:51   좋아요 0 | URL
별칭이 '비극의 미남시인'이네요.^^

깐따삐야 2007-12-28 12:50   좋아요 0 | URL
하핫. 별칭 귀여운데요. 비운의 꽃미남이시구나. 오장환 시인.^^
 

이번주 '장정일의 책속 이슈'를 옮겨놓는다. 이달초 작가가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것은 이미 알고 있던 바인데 그 '객담'이면서 동시에 러시아의 두 작가에 대한 '예찬'이기도 해서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해놓는다. 더불어 몇 가지 코멘트도 덧붙인다. 

한겨레(07. 12. 23) 러 혁명이 숨통 막은 ‘문학 우상’

나는 한번도 외국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무슨 세미나가 있어서 일본에 아흐레를 묵어야 한다면, 아홉 권의 일본 소설을 가지고 가서 하루에 한 권씩 읽고 돌아오곤 했으니 그건 여행이 아니다. 엉뚱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 장소는 뜨거운 물을 가득 받은 욕조다. 이때 손바닥에 배어드는 습기와 얼굴에 흐르는 땀을 걷어내기 위해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는 것은 필수.

한 십여년 전, 중국에 갔을 때도 그랬다. 만리장성 코 앞에서, 나홀로 호텔방에 남았다. “흥, 그 까짓 만리장성!” 그러면서 그날치의 중국 소설을 읽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채 뜨거운 욕조의 물이 식을 때까지 책을 읽는 여행자. 아무리 현지에서 읽는 그 나라의 소설이 각별한 독서 아우라를 선사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지난 11월30일에서 12월6일까지 6박7일 동안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관하는 한-러 문학교류 행사에 참가했다. 이번에도 여섯 권의 러시아 소설을 챙겨가고자 책을 골랐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 그것들을 털어냈다. 하루에 한 권씩, 가져간 책을 모두 독파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이번 여행에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젊었을 때는 그 조바심이 책읽기에 필요한 적당한 동력이 되어 주었으나, 이제는 그 조바심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늙은 것이다.

그래서 골라든 책이 마르크 슬로님의 〈소련현대문학사〉(열린책들, 1989). 시대순으로 대표적인 작가와 문학사조를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작은 러시아 작가사전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어, 오랫동안 러시아 작가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참조하곤 했으나 완독을 하진 못했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 자주 들르는 단골 헌책방에서 D. S. 미르스키의 〈러시아문학사〉(문원출판, 2001)를 구했다. 앞의 책이 1917년 혁명 전의 과도기부터 소련공산당 치하의 사미즈다트(지하출판)까지를 다루었다면, 뒤의 책은 11세기 초 고대 러시아 문학의 발생에서부터 혁명 직후인 192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모스크바에서의 첫날, 러시아 작가들과 서로 소개하는 자리에서 ‘마야코프스키와 불가코프의 나라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악마와 마르가리따〉(삼성출판사, 1983)라는 제명으로 처음 선보였으나 훗날 〈거장과 마르가리따〉(한길사, 1991)로 게재된 불가코프의 작품을 읽고 그의 ‘광팬’이 되기 훨씬 전에, 나의 러시아 문학 우상은 단연 마야코프스키였다. 20대 초반 문청 시절, 앤 차터스와 새뮤얼 차터스 부부가 함께 쓴 〈마야코프스키: 사랑과 죽음의 시인〉(까치, 1981)을 읽은 순간부터, 러시아는 내 청춘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해가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아침은 희뿌연 새벽과 구분이 되지 않았고, 오후 네 시에는 아예 해가 졌다. 무슨 말을 더 하랴? 나는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 욕조 속에서 문학기행을 했다. 레닌은 미학적 전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공산당 관료들에겐 상상력이 마비되고 없었다. 절판된 마야코프스키 희곡집은 재간되어야 하고, 미간인 불가코프의 작품은 속간되어야 한다.(장정일 소설가)

07. 12. 22.

Д.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P.S. 러시아문학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했던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교과서' 역할을 했던 것이 미르스키의 <러시아문학사1, 2>(홍성사, 1985; 화다, 1988)와 슬로님의 <소련의 작가와 사회>(열린책들, 1986)였다. 모두 영어본을 옮긴 것인데, 망명문학사가인 드미트리 미르스키의 책은 최근에 러시아어본도 출간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러시아문학사>(2006)라고 나온 책이 그것인데 876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사라고 소개돼 있다.  

Михаил Булгаков Михаил Булгаков. Пьесы

한편, 작가가 "절판된 마야코프스키 희곡집"이라고 적은 것은 3권짜리 선집의 하나였던 <미스쩨리야 부프>(열린책들, 1993)를 가리킨다. 표제작 외에 <빈대>와 <목욕탕> 같은 1920년대말의 풍자극들이 실려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야코프스키가 불가코프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는 점. '마야코프스키와 불가코프의 나라'라고 돼 있지만 정작 두 사람은 적대적 관계였다(러시아에서는 두 사람의 이 적대관계에 초점을 맞춘 책도 나와 있다). "미간인 불가코프의 작품은 속간되어야 한다"고 작가는 주문했는데, 주요작들로 치면 현재 1/3 정도는 번역/소개돼 있다(<투르빈가의 나날> 같은 대표작이 빠져 있다. 이미지는 불가코프 희곡집인데, 1991년판으로 800쪽 분량이다. 내가 갖고 있는 1987년판은 656쪽 분량이다. 3년전에 3,000원을 주고 구했던 책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새 번역본도 내년초에는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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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2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퍼렇고 허연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좋으련만..욕조속의 책읽기, 그것도 낯선 도시와 관련된 책을 읽기.. 손이 젖어 책장만 안젖는다면 (다소 성가신 일 일것 같지만)독서광들의 어쩔 수 없는 유희.. 어디 가까운 일본 온천에라도 다녀오고픈데 말이죠..내게 있는 마야코프스키는 누래지고 있네요

로쟈 2007-12-22 20:48   좋아요 0 | URL
일본 정도야 얼마든지 다녀오실 수 있을 텐데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언론리뷰들이 다소 뒤늦게 뜨고 있는데 늦게라도 많은 이들이 관람할 수 있으면 좋겠다(나는 이달 마지막주에 단체관람할 예정이다). 그래야 러시아 미술을 안방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생길 것이기에. 그런 계산속으로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12. 12) 칸딘스키 보러 갔다가 ‘19세기 러시아’에 빠지다

주최측에서 욕심을 많이 부린 전시다. 이는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 됐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19세기 리얼리즘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까지’(한·러교류협회 주최)는 제목 그대로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러시아 미술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한 작가만 54명, 작품은 회화만으로 무려 91점이다. 한국 사람들이 알 만한, 추상화의 선구자 칸딘스키를 제목에 내세웠지만 그의 작품은 4점밖에 안된다. 초기 습작 소품 두 점을 빼면 실질적으론 두 작품에 불과하다. 정작 감동을 주는 작품은 19세기의 그림들이다. 제목이 전시의 진가를 제대로 강조하고 있지 못한 셈이다.



바꿔 말하면 19세기 러시아 그림들을 본 것만으로 전시의 가치는 높다. ‘광대한 국토만큼이나 폭과 깊이를 자랑하는 러시아 미술의 백미’를 볼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특징은 리얼리즘으로 요약된다. 문혜영 큐레이터는 “민중·인간에 대한 관심, 광대한 영토에 대한 사랑이 러시아 미술의 두 가지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사실주의적인 메시지는 드라마틱한 러시아적 분위기를 담아 회화로 표현됐다. 19세기 작품은 총 63점으로 초상화, 풍경화, 역사화, 풍속화 등 주제별로 구분된 방에서 전시되고 있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등 예술가들을 주로 그린 것이 특징인 19세기 러시아 초상화는 동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자랑스러워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다. 러시아의 국민화가로 꼽히는 레핀이 인물의 본질을 깊숙이 통찰해낸 작품 ‘작가 고골의 분신’을 비롯해 낭만적 분위기를 가진 대작 크람스코이의 ‘달밤’ 등이 대표작이다. 풍경화에선 러시아 특유의 자연풍경을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묘사한 사브라소프, 격정적인 바다의 생명력을 탁월하게 묘사한 아이바조프스키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혁명, 빈부격차, 사회부조리 등을 주제로 러시아 미술의 본질적 특징인 ‘사회 참여로서의 예술의 적극적 힘’을 반영한 작품들은 역사화와 풍속화 섹션에서 확인된다.

러시아 회화사 전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전쟁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는 베레샤긴의 ‘불의의 습격’, 권력자와 무산자의 불평등한 현실을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마소예도프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 등은 꼼꼼히 챙겨봐야 할 작품이다. 주제별로 접근하다보면 러시아 미술의 아름다움을 다각도에서 속속들이 볼 수 있게 된다.

20세기 러시아 미술은 유럽 화파와 교류하며 여러 사조를 혼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말레비치, 라리오노프, 곤차로바, 포포바 등 다양한 화풍을 보이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 24점이 경향별로 전시된다. 칸딘스키 작품으로는 완숙기의 걸작 ‘블루 크레스트’와 ‘구성 #223’이 왔다.



전시장 구성은 좋은 편이다. 19세기의 드라마틱한 그림에서 받은 감상의 충격은 20세기의 현대적 그림들을 보며 한숨 돌릴 수 있다. 작품 수가 많기 때문에 작품이 빽빽하게 걸려 있어 감상하기에 다소 숨찬 느낌이다. 그러나 칸딘스키 작품 넉점을 여유있게 배치해 놓은 붉은색 방이 마지막에 있어서 감상을 인상적이면서도 여유롭게 마무리할 수 있다. 작품들은 러시아 양대 국립미술관인 러시아미술관과 트레티야코프미술관에서 왔다. 1996년 ‘일리야 레핀전’ 이후 12년 만에 들어온 러시아 미술전이다. 내년 2월27일까지.(임영주기자)

0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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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12-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봐야지 하는...전시입니다. 모네마네피카소에 넘 정열을 쏟아붓는 우리네 전시회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닙니다..다만 넘 편중..되었다는 생각이..)에서 이렇게 보기 힘든 전시회를 기획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로쟈 2007-12-13 14:16   좋아요 0 | URL
어렵게 성사된, 드문 기회인 건 확실합니다...

소경 2007-12-1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날 가마터 발굴장에서 일하는게 초읽기로 다가 왔네요. 어렵지 않게 행사에 문제만 없다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찬바람에 곡갱이질이나 호미나 삽질에 열정이 붙을 지도. ^^;;

로쟈 2007-12-14 22:37   좋아요 0 | URL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들고 가시길.^^

소경 2007-12-14 22:29   좋아요 0 | URL
앗.. 어제 시골에서 김장 도와서 챙긴 돈으로 책을 다량 구입해서 인터넷으로 손쉽게 구입은 무리고, 가기전에 구내 서점에 부탁해서 구해야겠네요. 연모하는 누님이 밥사준다 해서 다음 주에 직행 할 걸 미뤘는데 그게 다행인지 ^^;;, 추천 고맙습니다.

로쟈 2007-12-14 22:38   좋아요 0 | URL
겨울에 땅 파면서 읽기는 가장 좋은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향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 기사에 러시아에 관한 내용이 다루어졌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러시아사 전공자인 한정숙 교수이다.

경향신문(07. 12. 08)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41)멀고도 가까운 러시아

글쓴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지난 11월 하순에 주한 러시아 부대사인 티모닌 박사의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교수로 재직했던 역사학자이자,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러시아 대표단 부단장으로도 활약하는 외교관이다. 강연에서 그는 주로 한국과 러시아 학자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다루었고, 역사인식에서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그는 일반적 한국인들은 러시아와 중국은 한국의 통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6자 회담의 성공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이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티모닌 박사는 러시아는 남북한 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 확립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며, 따라서 6자회담도 성공하기를 원한다고 답했고, 그 사례로 마카오의 BDA은행에 동결되어 있던 북한 자금을 러시아가 자국 중앙은행을 통해 북한으로 송금할 수 있게 한 것을 거론했다.

그 자리에 모인 청중은 박사의 열띤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강연이 끝난 후까지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반적 한국인들은 과연 그 질문자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는 한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적대 세력이라고만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단지 질문을 좀 미숙하게 한 것일 뿐일까.

해방 후 소련이 북한 정권을 지원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소련에 대한 남쪽 사람들의 두려움은 컸다.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러시아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후에도 그 여파는 남아 있다. 제정 러시아의 제국주의 정책과 러·일전쟁의 기억까지 덧붙여져 러시아에 더 심한 두려움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다 체제전환 과정에서 보인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혼란상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러시아를 중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일부 인사들은 아예 한반도 평화 논의에서도 러시아를 배제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동아시아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나라인 데다,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대국 중에서 우리와 과거사 문제, 고대사분쟁, 영토분쟁, 군대주둔 등의 복잡한 문제가 걸려 있지 않은 나라다. 동아시아 자체에서 다른 요인들로 인해 대립과 갈등이 펼쳐지지 않는다면 러시아가 이를 조장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냉전시대적 편견과 불안감을 벗고 이 나라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좋은 동반자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와 동아시아의 만남-
동아시아와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만났다. 동아시아도 러시아도 비슷한 시기에 몽골제국의 지배와 간섭을 겪었으며, 사람과 물자의 교류 속에서 살았다. 원제국의 수도에는 러시아인 수공업자, 병사들이 끌려왔기 때문에 이미 13~14세기에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과 동아시아인들은 얼굴을 맞대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몽골인이나 타타르인들 가운데 러시아에 귀화하여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접촉의 첫 단계에서 동아시아가 러시아로 갔던 데 비해, 다음 단계에서는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왔다. 1480년에 몽골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러시아는 차츰 몽골제국의 옛 영토를 차지했고, 몽골제국의 잔여세력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동쪽으로 나아갔다. 몽골제국의 수중에 들어온 적이 없는 광대한 시베리아 지역까지 모두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러시아와 국경분쟁이 일어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조선이 지원군을 파견했으며, 그리하여 이른바 나선정벌을 통해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러시아 군대와 맞붙기도 했다.

러시아에 동아시아는 주된 관심지역은 아니었다. 유럽 지역에 사는 러시아 지배층에 동아시아는 너무 멀었고 시베리아는 경제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제국주의 열강의 영토쟁탈전이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면서 러시아는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동아시아에서도 이해관계의 충돌을 겪게 되었고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면 이 지역에서도 입지를 굳혀야 했다. 19세기 중반, 서아시아 및 서남 아시아에서 서유럽 열강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특히 크림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앙아시아를 거의 장악한 이후에는 세력의 공백지대처럼 되어 있던 만주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산업 부르주아지는 시베리아를 통해 중국에 러시아의 물품을 판매하고 태평양 함대를 지원하며, 태평양을 통해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기를 원했다.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를 통해 동아시아와 북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부설하였다. 이 철도의 부설은 1891년에 시작되어 1916년에 완공되었는데, 페테르부르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게 된 철도의 노선 일부는 부설 당시 러시아 영토에서 만주로 들어와 중국 동북부지역을 길게 휘감은 후 다시 연해주를 향해 나아갔다. 이러한 노선을 만들기 위해 러시아쪽 관계자들은 청의 실력자였던 리훙장에게 300만 루블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뇌물로 약속하기도 하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러시아는 동부 시베리아와 동아시아로 밀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의 결과로 조선이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러·일전쟁이 한반도 지배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간의 싸움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 제국이 조선을 직접 지배하려 계획한 증거는 별로 없다. 러시아 지배층의 주된 관심은 만주를 장악하는 것이었고 그러기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만주로 넘어오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여겼으며, 여기에서 일본과의 충돌이 일어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은 일본의 경우처럼 러시아인들과 직접 전쟁을 하거나 나라 전체가 서로 적대관계에 놓인 적은 없다. 러시아와 일본의 접촉은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림전쟁에서 대결 중이던 영국·프랑스와 러시아는 캄차카 반도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항구를 군함의 정박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3개 일본 항구의 이용권을 보장받는 대신 쿠릴 열도 영토 일부를 넘겨주고 사할린을 양국통치 아래 두기로 약속하는 시모다 조약을 맺었다. 영토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러·일전쟁의 패배 결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때문일까. 레닌은 그의 저서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서문에서 제국주의 지배를 받는 나라의 예로 코리아를 특별히 언급했고 러시아 혁명 후에는 한인 혁명가들이 러시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러시아 속의 아시아, 아시아 속의 러시아-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은 이래, 유럽인들은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비판하는 의미에서 러시아를 “아시아적 사회”라고 불러 왔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은 이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의 한 핵심적 요소로서의 아시아성을 자부심과 함께 확인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스키타이인이다. 우리는 아시아인이다”라고 썼다. 러시아 자체 안의 아시아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일군의 논자들은 유럽에 대비되는 유라시아 사회로서의 러시아 사회의 성격을 강조하며 유라시아주의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아시아 속에도 러시아가 깊이 들어와 있다. 몽골은 러시아 혁명 후 두번째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유지했고, 러시아의 키릴 문자를 받아들여 공식문자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다.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어느 때보다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에서 ‘러시아의 해’가 선포되었고 러시아는 2007년을 ‘중국의 해’로 선포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영토갈등을 겪고 있지만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의 채굴권 때문에라도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다. 그리고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남북한 어느 쪽과도 적대하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야말로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정착을 위해 소중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유럽-러시아-아시아를 잇는 매개체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철도로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보다 더 긴 철도가 둘이나 있다. 하나는 모스크바와 평양을 잇는 철도이며, 다른 하나는 키예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철도이다. 서울과 평양 사이에 철도가 연결된다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철도를 통해 모스크바를 거쳐 서유럽까지 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꿈을 꾼다. 이는 경제적으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정신적 풍요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한반도 남쪽은 북쪽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반도가 아니라 섬의 상태에 있다. 대륙과 육로로 연결되지 않는 공간인 것이다. 공간적 협착성은 시야의 제한, 사고와 상상력의 한계를 낳는다. 대륙으로부터 강제로 배제당하지 않고, 대륙 어디든지 육로를 통해 다닐 수 있다면 굳이 국가의 영토로서 이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아쉬울 것이 있겠는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한국인들의 삶의 스케일도 얼마든지 더 넓어질 수 있다.(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0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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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 전시회 소식은 지난주에 전한 바 있는데, 한겨레 관련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255305.html). 모처럼 대규모의 러시아 미술전이 개최된 참인지라 주요 화가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간혹 페이퍼로 올려놓을 계획이다.

한겨레(07. 12. 07) '인민’과 함께 한 혁명전야

아이바조프스키, 보그다노프-벨스키, 바스네초프, 먀소예도프, 페로프, 수리코프, 크람스코이, 레핀…. 금시초문이라고 부끄러워 말라. 아직 우리가 만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스키’ ‘프’자 돌림이니 물론 러시아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인들과 비슷하게 러시아 제정 말기 혁명전야를 살았다.

러시아 문학은 1920년대 이후 일본 유학파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반면 러시아 화가들은 그렇지 않았다("러시아문학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건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최소한 1908년 최남선이 <소년>지에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미술인들이 배운 것이라야 유럽 야수파, 인상파에 국한됐다. 1990년 러시아와의 수교 이후도 마찬가지. 냉전시대를 건너 한국을 찾아온 한-러 수교 5돌 기념전은 칸딘스키, 말레비치처럼 서유럽 미술사에 편입된 아방가르드 유파가 주인공이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02-525-3321)에서 내년 2월27일까지 열리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은 딱하게도 칸딘스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사를 훑는 91점의 끄트머리에 달랑(?) 넉 점만을 소개하고 있는데도…. 이해할 만하다. 한국인에게 러시아 미술은 칸딘스키 외에는 전인미답이기 때문.

이 전시회는 사회변혁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아간 화가들의 세계를 들춰봄으로써 러시아 혁명전야를 통째 복원해 볼 수 있으며, 한때 ‘브나로드’(인민 속으로)를 외치며 농촌으로 스며들었던 식민지 조선 문인들의 마음 풍경을 엿볼 기회다.

전시의 중심은 1870년 먀소예도프, 페로프, 사브라소프, 크람스코이 등이 세운 ‘이동예술전협회’ 회원들. 졸업작품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시로는 반역적인 주장과 함께 왕립 페테르부르크미술아카데미를 자퇴한 이들은 ‘미술이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취지로 이동예술전협회를 결성해 전국을 누비며 전시회를 열었다. 이 단체는 정부 후원 없이 오랫동안 큰 큐모로 존속하며 인민들과 교감했다. 1880년 레핀, 수리코프 등 2세대 작가들이 가세하면서 인상파의 빛과 색, 외광의 눈부심을 수용하면서 미술계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의 구호는 미술판 브나로드인 “미술을 인민에게”.

이들이 즐겨 그린 소재는 혁명전야의 실상.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유형지에서 갓 돌아온 언니와 겁을 먹고 경계하는 동생들의 눈초리를 통해 시대상을 드러낸다(*'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먀소예도프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는 허름한 농민들이 의회 담벼락에 기대 허기를 끄는 반면 실내에서는 지주들이 포도주를 곁들인 성찬을 즐기는 순간을 잡아 지방자치회가 허울임을 폭로한다. ‘유형수들의 휴식’(야코비), ‘익사한 여인’(페로프),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레핀), ‘임시숙소’(마코프스키), ‘노부모의 상경’(레베데프), ‘농가의 깃털 작업장’(키브셴코), ‘암산’(보그다노프-벨스키), ‘방앗간 주인’(크람스코이) 등도 가슴을 울린다.

또 다른 중심은 기업인 후원자. 91점 가운데 41점은 국립트레티야코프미술관에서 온 것으로, 트레티야코프미술관을 세운 부유한 상공인이자 미술애호가인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콜렉션이다. 크레티야코프는 “돈을 벌게 해준 사회에 유용한 시설을 남겨 환원하고 싶다”며 미술품을 사들였다. 그는 구두쇠였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이면 아무리 비싸도 돈주머니를 털었다. 평소 누구한테나 콜렉션을 무료로 개방했던 그는 죽기 6년 전 40년동안 수집한 3천여점의 작품을 모스크바시에 기증하고 큐레이터를 겸직했다.

또다른 후원자는 철도왕 마몬토프(1841-1918). 예술가이기도 한 그는 1870년 모스크바 근교 자작나무 숲에 자리한 아브람체보 영지를 구입해 예술가 마을을 만들었다. 이 공동체에서 레핀, 바스네초프, 수리코프, 세로프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뒷바라지했다. 마몬토프의 조카 ‘타티야나 마몬토바의 초상’(레핀)이 그 증거. 아내를 관장으로 앉히고 생색을 내는 우리나라 기업인들과 대비된다.

이밖에 작가 마이코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등의 초상은 당대 지식인들의 네트워크를 잘 보여주며, 풍속화, 풍경화에서는 작가들의 조국애가 흠씬 묻어난다. 리얼리즘 회화가 너무 강렬한 탓인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작품은 오히려 덤처럼 느껴진다. 부나비처럼 유행을 따라다니는 한국 미술판에 ‘러시아 거장전’은 신선한 충격이다. 관객이 얼마나 들지 주목거리(*듣자 하니 아직까지는 별다른 호응을 얻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자주 오는 기회는 아닌 터인데).(임종업 기자)

07. 1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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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2-0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 근처에서 하니 한 번 가봐야겠네요

로쟈 2007-12-07 10:51   좋아요 0 | URL
좋은 동네에 사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