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로 커피와 함께 엊저녁에 사온 떡을 먹다 보니 주목하지 않고 흘려보냈던 책이 생각난다. 어제 펴본 <反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의 뒷표지에도 소개돼 있어서 떠올리게 된 게리 폴 나브한의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아카이브, 2010)이다. 저자보다도 유명한 이는 책의 주인공인 러시아의 식량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 "20세기 과학계의 거인이자 진정한 세계주의자"(조효제)란 평가를 받는 학자다.   

  

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게리 폴 나브한이 쓴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는 바빌로프가 20세기 초 인류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세계 5대륙을 누비며 식량의 씨앗을 찾아나선, 눈물겨운 일대기다. 그것도 도서관을 뒤져 찾아낸 자료나 관련 인물의 증언만을 바탕으로 구성한 단순 전기가 아니라 바빌로프가 탐사했던 지역을 거의 그대로 답사하면서 생동감 있게 엮은 노작이다. 바빌로프의 전기와 지은이의 여행기를 혼합한 독특한 형식이다.  

현대 작물 육종을 창시한 바빌로프는 오늘날 세계 식물유전학자들의 영원한 영웅으로 숭모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스탈린의 정치적 희생양 찾기와 동료 과학자의 질시에 맞서다 천수를 누리지 못한 채 억울한 죽음으로 마감해야 했다. 지은이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바빌로프의 또 다른 영웅적인 모습, 환경과 사회정의를 위해 애쓴 운동가의 면모를 새롭게 보여준다.  



바빌로프는 전 세계 작물종자를 수집한 유일한 과학자이자 인류의 새로운 농법을 찾아 115차례의 원정을 감행한 탐험가나 다름없다. 바빌로프의 여정은 중앙아시아의 파미르고원에서부터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아마존 열대우림에 이르기까지 형언하기 힘들 만큼 험난했다. 바빌로프의 가장 큰 학문적 공헌은 과학 사상 처음으로 발견한 ‘다양성 중심지’ 이론이다. 문화다양성과 작물다양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처음으로 깨달은 과학자이기도 하다. 인류의 식량안보를 지키는 과업에서 농업생물다양성이 주춧돌에 해당한다고 처음 주장한 이도 바빌로프다. 그는 이런 신념 때문에 목숨까지 잃어야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물 육종을 위해 바빌로프가 처음 고안하고 설립한 종자은행이 지구적 대재앙에 대비해 2008년 2월에 이르러 노르웨이 북극 지역에 생긴 사실이다. 여기엔 무려 200만종의 씨앗이 냉동 저장돼 있다.(경향신문)

 

개인적으론 스탈린시대의 악명 높은 생물학자 리센코(1898-1976)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는데, 바빌로프란 짝을 알지 못했다. 바빌로프를 쫓아낸 인물이 바로 리센코였던 것이다. 학문과 권력이란 주제와 관련해서 '리센코와 바빌로프'도 연구해볼 만한 테마다. 암튼 그런 부가적인 관심까지 갖게 되는데, 일단은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먼저 일독해봐야겠다. 잘 차려진 음식들을 대할 때마다 상기할 만한 제목이기도 하고...

11. 01. 30.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1-30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31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tty 2011-01-3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재미있겠어요. 원서 표지 예쁘네요~ (알록달록을 좋아해서;)
먹는걸 다룬 책이라니 바로 구입해야 할 듯 합니다 ^^;;;

로쟈 2011-02-01 13:41   좋아요 0 | URL
요리책은 바로바로 구입하시겠네요.^^

雨香 2011-02-0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서 소개해주신 <씨앗의 자연사>와 엮어서 읽어봐야 겠네요.

로쟈 2011-02-01 17:23   좋아요 0 | URL
네, 그것도 괜찮은 선택인데요...
 

주중에 구입한 책 가운데 하나는 오종우 교수의 <백야에서 삶을 찾다>(예술행동, 2011)이다. 오랜만에 나온 국내 필자의 러시아문학 관련서여서 반가운데,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세 작품을 나도 역시 강의한 적이 있고 앞으로도 하게 될 예정인지라 유익한 참고가 될 듯싶다. 소개기사가 뜨기에 옮겨놓는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안나 카레니나>, <닥터 지바고> 세 작품의 이미지는 저자가 참고한 책들이다.     

경향신문(11. 01. 22) ‘무엇으로 사는가’ 매몰된 삶 깨우는 섬광

적어도 겉으로만 보자면, 가히 고전과 교양의 전성기라고 부를 만하다. 각종 고전물과 교양서적들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출간된 <백야에서 삶을 찾다>가 특별히 눈에 띈다. 고전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 까닭이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러시아 문학을 강의해온 오종우 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46)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등 러시아 문학의 걸작 세 편을 통해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책을 펴냈다.  

“정보화·세계화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정보와 상품에 매몰되다보니, 자신과 시대를 객관화시킬 여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에 매몰돼 살다보면 현실 문제와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현실을 충실히 살아야 하겠지만, 그와 더불어 현실을 벗어난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을 뛰어넘어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저자는 방대한 내용과 깊이를 지니고 있는 각 소설의 텍스트를 충실하게 독자에게 소개하고 작가의 삶과 사상에 대해 알기 쉽게 전하면서도, 각 작품이 현대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에 초점을 맞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욕정과 살인, 증오와 보복으로 가득찬 주인공들의 추악한 모습을 통해 ‘악을 통제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지배자가 올바른 신인가’라고 묻는다. 저자는 현대에 이르러 정치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이득, 과학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며 “그것들이 삶의 기준이 되고 근거가 되는 순간, 사람들 사이의 경쟁은 극도로 심화돼 사회는 다원성을 잃고 황폐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인간이 존엄한 근원이 되는 자유의 가치를 강조한다. 



<안나 카레리나>에서는 시대를 초월해 변하지 않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안나 카레리나는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지만 욕망 때문에 파멸에 이르고 만다. 그녀가 파멸에 이른 것은 그 사랑이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 과잉 때문이었다. 저자는 욕망의 과잉으로 언제나 결핍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대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의해 기형화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역사는 인간의 세계인식 가운데 한 단면이 지나치게 활성화돼 삶의 형태와 제도를 획일화시키는 경향을 띠고 있으며, 20세기에 그것이 정치 이데올로기였다면 21세기에는 경제적 자본”이라고 말한다. 



<닥터 지바고>에서 저자는 기존에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소설로 ‘정치적’으로 읽혀온 작품을 ‘실용’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다. 실용의 의미를 도구적 기능이나 돈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의 의미와 가치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예술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한번도 소멸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진정 실용적인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세상을 창의적으로 해석해서 이해하는 일, 기성의 질서에 단순히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주체로서 살아가는 일이 예술의 근본 속성”이라고 말한다.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와 지바고의 짧지만 강렬하고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예술의 실용성에 맞닿아 있다는 해석인 셈이다.  

<닥터 지바고>를 통해 던지는 ‘실용’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물질은 풍부하지만 정신은 갈수록 피폐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왜 고전과 인문학이 새삼 인기를 끄는지, ‘고전의 상품화’를 넘어서 진정한 삶의 성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저자는 러시아의 걸작 세 편에 기대어 거기에 답한다.(이영경기자) 

11. 01. 22.  

P.S. 특이하게도 책의 세 파트는 세 권의 책으로 분할돼 출간되기도 했다. 낱권이 편한 독자는 그렇게 읽어도 좋겠다. 참고로, 저자는 체호프 전공자로 체호프 번역서와 연구서들을 갖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이 2011-01-2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통해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를 알게 됐고 이번에 또 한권 좋은 강의록을 소개 받네요.
기대됩니다. 또 한번 좋은 소개 고맙습니다^^

로쟈 2011-01-23 13:21   좋아요 0 | URL
저도 <단테 신곡 강의> 덕분에 <신곡>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신문의 '고전 톡톡 다시 읽기' 연재에서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다뤄졌기에 옮겨놓는다. 이 연재는 수유+너머와 공동기획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코뮨주의'적 삶의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기에 수유+너머와의 '결합'은 자연스럽다...    

서울신문(11. 01. 17)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시대와 삶을 질문하는 모든 청년들을 위한 책이다. 작가는 새로운 시대의 자유와 혁명을 말하는데, 놀랍게도 이 과정이 사랑과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리케이드 앞이나 공장의 파업 현장이 아니라 사랑과 결혼을 통해 혁명을 한다? 그런 혁명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지하실’에서의 삶
“나는 자유롭고 싶어요!” 소설은 ‘자유’를 향한 베라 파블로브나의 당찬 외침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현실 앞에서 공허하기만 하다.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의 어린 여성, 19세기 중반 러시아에서 그런 여자에게 허락된 삶이란 자신을 구원해 줄 남자를 기다리거나 하급 노동자가 되는 것뿐이다. 이미 정해진 삶의 행보만이 강요되는 곳, 누구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 곳, 베라는 이런 자신의 현실을 ‘지하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하실’에는 ‘사랑’이 넘친다. 아니 바로 이 ‘사랑’이 곧 그녀를 구속하는 지하실의 정체다. 흔히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에 불과하다. 베라의 어머니가 모성애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삶을 딸에게 강요하고, 부잣집 도련님 이반이 오로지 헌신적으로 남편을 보필해줄 여성을 배우자로 찾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모순투성이의 관계를 지속하는 한 우리에게 자유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베라는 이 ‘지하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의 모험을 감행한다.

●이기적 유물론자의 사랑법
베라와 사랑에 빠지게 될 두 남자 로푸호프와 키르사노프.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이기적 유물론자들이다. 물론 여기서 ‘이익’은 화폐적 척도로 계산되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를 충만하게 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선택을 말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원하는 것들의 ‘무게를 하나씩 달아’보고 ‘그중에서 가장 유리한 것을 선택’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동정, 연민, 희생으로 점철된 관계는 서로를 구속하고 괴롭게 한다. 그러니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하여 사랑하고, 일하고, 관계하라! 이 이기적 계산법에 따라 베라는 집을 나오고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고자 노력하는 신청년, 로푸호프와 결혼을 한다.

베라와 로푸호프의 사랑은 그 자체가 지하실로부터, 강요된 삶의 행보로부터 탈출하는 일이며 동시에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부부 관계는 아주 파격적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방을 썼고, 심지어 ‘중립의 방’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외부와 소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베라는 자신의 취미와 꿈을 살려 가난한 여자들과 함께 운영하는 ‘봉제공장’을 만든다. 구성원 모두가 공장의 주인이기에 그들은 각자의 관심과 능력에 따라 소비조합, 공동주택, 배움터 등의 새로운 관계와 생활들을 조직해 간다. 공장은 이제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동의 현장이 아니다. 그곳은 새로운 관계와 실험 속에서 가난한 여성들이 삶을 바꾸고 존재를 충만하게 하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베라와 로푸호프는 단지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일련의 행보들이 구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바꾸고 외쳤던 바로 그 혁명의 실천이 된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엇을 할 것인가’의 혁명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이제 사회를 바꾸고, 일상을 바꾸는 것을 넘어 존재의 근본적인 고양을 시도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베라와 로푸호프의 결별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들의 사랑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 로푸호프의 ‘절친’ 키르사노프와 베라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경우 보통은 서로에 대한 극한 분노와 질투, 자기 비하로 얼룩진 파국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영원한 사랑’에 대한 믿음이 온갖 망상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베라 역시 처음에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자신의 새로운 사랑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로푸호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절망에 사로잡히기는커녕 베라를 헤아려 주고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적극 돕는다. 심지어 베라와 키르사노프가 타인들로부터 비난받지 않도록 치밀한 자살극을 꾸미기까지 한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랑의 무상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다 거기에 맞는 시간을 갖고 있는 법이오.” “당신은 오직 한 종류의 사랑에 만족했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원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에게는 이별의 아픔마저도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수련의 과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로푸호프의 노력으로 두 사람은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었다. 베라는 그동안 자신을 지하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로푸호프에게 의존하여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의존한 채로는 살아갈 수 없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한 사랑과 삶의 변화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을 얻은 베라는 자신의 두 번째 사랑이 단순히 파트너를 바꾼 관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독립한 두 남녀의 결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녀는 의사가 되는 수련을 받기로 결심하는데,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이 도전은 베라가 자기 존재의 축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모든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삶을 한가운데로 도약시키고 있었다. ‘완전한 독립 없이는 진정한 행복이란 불가능하다.’ 혼자서 가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랑만이 통상적인 삶의 습속을 바꾸는 혁명이 될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시대의 격변 속에서 길을 찾는 모든 청년들에게 체르니셰프스키는 이렇게 답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것만이 사랑과 혁명이 조우하는 길이라고.(박수영_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서울신문(11. 01. 17) [고전톡톡 다시읽기] 체르니셰프스키와 레닌

19세기 중반 러시아. 구체제는 각종 모순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차르는 토지개혁령을 시행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아버지 세대는 부르주아적 삶의 양식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그 역시 이미 유럽 각국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Nikolai Chernyshevskii, 1828~1889)는 이 시대적 질문과 온몸으로 대결한 러시아의 작가였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 잡지에 기고한 글들이 지주들의 반발을 사 그만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후로 약 20여년을 감옥과 시베리아의 유배지를 전전하다 세상을 떠났다. 노래와 춤으로 가득한 한편의 연애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왼쪽·1863)는 바로 그 감옥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일개 연애소설이 일으킨 사회적 반향은 의외로 엄청났다. 주인공들을 따라 수많은 청년들이 안정된 삶을 박차고 집을 나왔고, 곳곳에서 각종 생활 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약 40년 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대명사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역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만난다. 그는 이 소설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자신이 쓴 정치 팸플릿에 같은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제국주의의 타도를 외치는 혁명가, 그리고 감옥에서 연애 소설을 쓴 작가. 더군다나 계급투쟁과 전투적 당의 창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오른쪽)는 청년들의 사랑과 결혼을 골자로 하는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레닌은 체르니셰프스키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체르니셰프스키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지닌 진지한 사람은 누구나 다 혁명가라는 것을 보여 준 것’ 이라고. 수인의 몸으로 연애소설을 쓴 체르니셰프스키도 대단하지만 거기서 혁명을 읽어낸 레닌 역시 대단할 따름이다.(서울신문·수유+너머 공동기획) 

11. 01. 18.  

P.S. 첨언하자면, 사회소설이 '연애소설'이란 외피를 띠는 것은 당시에 일반적이었다. 투르게네프 소설의 애독자로서 체르니세프스키가 <전날밤>이나 <아버지와 아들>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다는 점도 참고할 수 있다. 더불어, 레닌과 젊은 세대 혁명가들을 열광하게 만든 건 소설에 등장하는 '새로운 인간' 라흐메토프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강철인간' 라흐메토프는 베라/로프호프/키르사노프와는 또 다른 '새로운 혁명가형'을 예고하는 인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이미 예고돼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마지막 1년을 다룬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내주 개봉된다 한다. 지난달에 서거 100주년을 맞은 이 거장의 삶을 한번쯤 음미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덤으로 아내 소피야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도 기대를 모은다.   

한겨레(10. 12. 07) 성자로 박제된 ‘소년’의 마지막 1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명저를 남긴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젊어서 자기 집 농노를 해방시켰으며 말년에 종교에 심취해 금욕과 청빈 공동체를 꾸렸던 인물. 20세기 초 한국의 문학청년들을 매료시키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사진)은 재산의 사회환원에 반대하는 아내 소피야의 극성을 피해 남부 러시아로 이동하다가 11월20일 아스타포보 역에서 객사하기까지 톨스토이의 마지막 1년을 따라간다. 톨스토이는 살아 있는 성자가 아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이었으며 소피야 역시 세간에 알려진 대로의 악처가 아니었다는 게 영화의 핵심이다. 



영화의 저본은 전기작가 제이 파리니의 소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소설은 지은이가 나폴리의 한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일기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일기장의 주인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비서 발렌틴 불가코프. 그는 톨스토이와 마지막 1년을 함께하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톨스토이와 그 주변인물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영화가 신화를 깨는 것은 그런 연유다.

노년의 톨스토이는 후광으로 존재할 뿐. 낮에는 성자로 추앙을 받지만 저녁에는 43년을 해로한 아내 소피야와 침대에서 수탉울음 소리를 내며 장난하는 늙은 소년이다. 막내딸 사샤, 수제자 블라디미르, 주치의 마코비츠키 등 톨스토이의 낮을 관장하는 톨스토이주의자들은 알려진바 ‘성자’로 그를 박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재산과 저작권 일체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의 유서에 서명을 받아내려 한다. 이를 안 소피야는 노발대발한다. 영화는 이 무렵 개인비서로 기용된 톨스토이 숭배자 발렌틴의 시각을 따라가면서 진실에 접근한다. 수제자 블라디미르는 발렌틴에게 소피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하라고 하지만, 발렌틴은 소피야가 말처럼 위험인물이 아니라 톨스토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곳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마샤를 만나 뜨겁게 사랑하고 그들을 떼어놓는 톨스토이주의자들의 차가움을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

“죽어가고 있나요? 이미 죽었나요?” 마지막 정거장에 개떼처럼 몰려든 기자들이 끈질기게 묻는 질문이다. ‘살아 있는 성자 영면하다’라는 기사를 써놓고 그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 뚜껑이 닫히기 전까지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하지만, 뚜껑이 덮이고 나서 진실은커녕 왜곡이 시작된다.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소피야를 남편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악처에서 남편을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으로 탈바꿈시킨 헬렌 미렌의 연기가 압권. 그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으며, 로마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5일 개봉.(임종업 선임기자) 

10. 12. 06. 

P.S. 제이 파리니의 소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은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고 있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앤드류 노먼 윌슨의 전기 <톨스토이>(책세상, 2010)가 서거 100주년의 의미를 좀 채워준다. 올해는 체호프(1860-1904)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 한권으로 묶은 <체호프 희곡 전집>(시공사, 2010)이 김규종 교수의 번역으로 최근 출간됐다. '빈손'으로 한해를 보낼 뻔했는데, 역시 다행스럽다. 아래 사진은 생전에 두 사람이 함께 한 모습.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델러웨이부인 2010-12-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눈물나는 장면 있습니다...

로쟈 2010-12-07 06:40   좋아요 0 | URL
벌써 보셨군요.^^

2010-12-07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7 0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0-12-07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선 너무 홀대하는 것 같군요.그의 청빈 사상이 현재 자본주의에 심하게 물든 러시아의 현실과 맞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이나 미국에서 더 기리는것 같군요^^;;;;

로쟈 2010-12-07 06:40   좋아요 0 | URL
네, 그랬다는 기사가 뜨네요...

푸른바다 2010-12-0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톨스토이보담 체호프에 더 눈길이 가는군요.^^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도덕교사같은 어투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전 체호프 희곡들을 동완 번역 신원문화사 판본으로 그 많은 오탈자를 수정해가며 읽었고 그 후론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번역본은 전집이라는 점도 그렇고 가격도 그렇고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네요.^^

로쟈 2010-12-08 08:17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어제 구입했습니다.^^

루쉰P 2010-12-0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보고 싶은 영화네요^^ 꼭 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0-12-08 08:1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보려고 합니다.^^

비로그인 2010-12-0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 서거100주년을 기념하여 제 나름대로 기념행사(?!)를 하고 있어요. 러시아어 알파벳 암기를 하고 있습니다. B,H,P,C 가 헛갈리네요! 그 밖에 희한한 글자들도... // 영화도 꼭 보고 싶네요.

로쟈 2010-12-08 08:17   좋아요 0 | URL
흠, 전공자보다 열심이신데요.^^

2010-12-30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31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드카로 시작해서 맥주로 끝내기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한겨레21의 '예술가가 사랑한 술' 코너에서 '체호프의 보드카'가 다뤄졌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봄에 주간한국의 기사에서 다뤄진 것과 같은 아이템이다.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다.  

  

한겨레21(10. 11. 19) 체호프의 언론인을 위한 코스 메뉴 

춥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지만 올가을은 남다르게 춥다. 옷장 구석에 묻혀 있던 코트는 옷장 문을 열었을 때 손이 닿기 쉬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러시아인은 대륙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겨울이면 보드카를 마신다는데, 어깨에 한기가 오스스 돋아나기 시작한 요즘, 보드카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 칵테일의 베이스로 여기저기서 보드카를 흡수해왔겠지만 한 번도 스트레이트로 먹어본 적은 없다. 한 잔, 단 한 잔만 마신다면 왠지 몸에서 열이 펄펄 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집착하며 밤 11시 야근을 마치고 셔터를 반쯤 내린 슈퍼마켓에 허리를 잔뜩 굽히고 기어들어가 보드카 한 병을 ‘득템’했다. 추위에 대비한 월동 준비 물품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도전해보리라 생각한 안톤 체호프의 언론인을 위한 8가지 코스 메뉴를 채우려면 보드카가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체호프는 1880년께 ‘자명종 달력’이라는 글에 언론인에게 맞춤한 메뉴를 작성해 실었다. 8단계 코스는 다음과 같다. 1. 보드카 한 잔 2. 양배추 수프와 카샤(메밀가루로 쑨 죽의 일종) 3. 보드카 두 잔 4. 양고추냉이를 곁들인 어린 돼지고기 요리 5. 보드카 세 잔 6. 양고추냉이·고춧가루·간장 7. 보드카 네 잔 8. 맥주 일곱 병

술잔이 없어 커다란 머그의 바닥에 보드카를 공평하게 펼쳤다. 한 모금 마시니 뜨끈한 감각이 뱃속을 데웠다. 바깥의 찬 공기를 쏘인 피부는 여전히 차갑고 몸속만 따뜻해지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올겨울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하지 않고 오늘은 8코스 중 1단계에만 머물기로 한다.

알코올을 무려 40% 포함한 보드카는 타는 듯 목을 타고 내려가 온몸 구석구석에 뜨거운 기운을 전했다. 러시아에서 처음 판매될 때는 60%에 이르는 보드카도 생산됐다고 한다. 몇 잔이면 쉬이 취하는 이 술을 두고 차이콥스키는 “보드카에 취해 게슴츠레한 얼굴로 비틀거리던 러시아 백성들 모습을 가락으로 바꾸면 <백조의 호수> 같은 러시아 음악이 된다”고 했다.

여기, 게슴츠레하게 비틀거리는 이들로 그득한 문학작품도 있다. 소련 지하 출판물 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는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열차>는 취기로 출렁대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페투슈키에 이르기까지 2시간 남짓의 기차여행을 한다. 그는 44개 역을 거치면서 준비해온 각종 술을 꺼내먹으며 만취 상태에 도달한다. 흔들리는 시선과 끊임없이 웅웅대는 대화들을 따라가노라면 읽는 이도 함께 취할 지경이다. 술자리에서 덜 취한 이가 취한 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듯, 대화의 맥락을 따라잡으라고 알려주는 각주만 50여 쪽에 이른다. 올해 초 독일에서는 예로페예프의 이 소설을 연극으로 옮긴 무대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 마르크 슐체가 진짜 보드카를 마시며 연기하다 술을 못 이겨 급히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단다.

독한 보드카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양에서 해장술의 베이스로도 쓰인다고 한다. ‘블러디 메리’는 보드카에 토마토 주스와 우스터 소스, 소금, 후추를 조금 넣고 셀러리와 레몬 조각 등으로 장식한 칵테일이다. 숙취 해소에 좋아 브런치와 함께 곁들이는 경우가 많단다. 따뜻한 취기를 주는 것에서 시작해 숙취까지 돕는 술이라니, 올겨울 완벽한 술을 찾은 것 같다!(신소윤 기자)  

10. 11. 21.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딧불이 2010-11-22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유일하게 즐기는(?) 블러드 메리가 이런 효과가 있었군요. 머리로는 몰라도 몸은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네요.

로쟈 2010-11-24 08:31   좋아요 0 | URL
모든 술하고 잘 어울려서 보드카를 성격 좋은 술이라고 하더군요...

2010-11-22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5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5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