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카페의 '한국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코너에 <안나 카레니나> 읽기를 실었다(http://cafe.naver.com/mhdn/70879). 제목은 토마스 만의 말을 빌려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 말해주는 것'이라고 붙였다.

 

 

 

너무도 유명한 작가와 소설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기, 이게 내게 주어진 미션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소감을 적는다는 미션.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하다”는 도스토옙스키의 평이 『안나 카레니나』 뒤표지에 박혀 있는데, 이건 사실 톨스토이 자신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작품의 주제가 뭐냐는 질문에, 그걸 말하려면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야 한다고 했다던가. 요컨대 군더더기라곤 한군데도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는 뜻이리라.

 

완벽한 작품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경탄이 아니라면 경탄에 경탄 정도?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만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다”라는 게 그가 남긴 경탄이다. 무얼 덧붙이겠는가. 햄릿의 말처럼 “그리고 침묵.” 위대한 작품에 대해선 침묵하는 게 옳다. 일단은 그렇다. 그럼에도 몇 마디 거들려고 한다면 뭔가 다른 빌미가 필요한데, 이번에도 출처는 톨스토이 자신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난 직후 소위 ‘정신적 위기’를 경험한 톨스토이는 『참회록』을 쓰면서 모든 예술을 부정한다. 너무도 ‘과격한’ 톨스토이였기에 자신의 작품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소설은 더이상 쓰지 않겠다는 게 그의 결단이었다. 만년에 그가 서가에서 빼낸 책을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표지를 보니 『안나 카레니나』였다는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가장 완벽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작가에게는 잊힌 작품. 근대 소설의 정점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작가에게는 그 한계를 깨닫게 해준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문제성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너무도 유명한 첫 문장이 실마리이자 맥거핀이다. 실마리처럼 보이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히치콕이 즐겨 구사했던 맥거핀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적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이 문장은 1부의 첫 문장이기에 전체 8부로 구성된 소설 전체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상 작품의 대략적인 내용과 주제까지 암시해주는 문장으로 읽힌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라는 것. 소설의 초점은 물론 불행한 가정들에 맞춰진다.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보다 남들의 가지가지 불행한 가정사를 읽는 재미다. 아이들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곤경에 처한 스티바와 돌리 커플의 이야기부터가 얼마나 흥미로운가! 오빠 부부를 중재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기차를 타고 달려온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눈이 맞아 열애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는 또한 얼마나 위력적인가! 고위 관리이면서 가정에서도 사무적인 남편 카레닌이 안나의 불륜에 대한 응징으로 이혼을 거부함으로써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점차 삐걱거리게 된다. 브론스키의 애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에 상심한 안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결국은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대략 이런 줄거리라면 러시아식 ‘막장 드라마’의 소재로도 변주될 만하다. 여주인공 이야기의 기본구조만 보자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안나 카레니나』의 거리는 몇 뼘 되지 않는다. 그런데 플로베르와 다르게 톨스토이는 안나의 이야기에 또다른 이야기를 병치시키고자 했다. 그것도 동등한 비중으로. 바로 레빈의 이야기인데, 건축에서 비유를 들자면 안나 이야기와 레빈 이야기는 『안나 카레니나』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다. 공정하게 제목을 붙이자면 『안나와 레빈』이라고 해야 맞을 만큼 레빈은 이 작품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놀라운 것은 이 두 주인공이 거의 만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7부에 가서야 레빈은 안나를 찾아가 독대하고 그녀의 솔직함에 좋은 인상을 받는다. 바로 7부 끝부분에서 안나가 자살하게 되므로 둘의 만남은 분명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대체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주는 ‘연결의 미로’는 무엇인가? 어째서 두 인물은 주인공이면서 각기 다른 장면에 나오는가?

 

물론 이런 의문을 작가가 의식하지 못했을 리 없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두 기둥을 덮어주는 지붕이 작품에 존재한다고 시사했다. 잘 찾아보라고?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이 작품에선 레빈만이 아니라 안나 또한 작가 톨스토이의 분신이다. 곧 레빈이 정신적 자아를 대표한다면, 안나는 육체적 자아를 대표한다. 톨스토이 자신이 레빈처럼 삶의 의미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인물이었고, 안나처럼 강렬한 육체적 욕망의 소유자였다. 문제는 이 두 자아의 통합이다.

 

육체적 욕망에 의해 결합된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이 결국 파국에 봉착하는 데 반해서 레빈과 키티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교감을 통해 이상적인 커플 상을 보여주는 듯싶다. ‘행복한 가정’의 모델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8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빈은 자신의 깨달음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다. 비록 사랑스러운 아내이지만 키티는 형이상학적 물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레빈의 고뇌를 특이한 성벽 정도로 이해할 공산이 크다. 실제로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 역시 남편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가정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얼핏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대비시키려는 듯 보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의 가능성 자체에 회의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무리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란 첫 문장이 맥거핀이라고 말한 이유다. 불행한 가정에 대한 소설적 탐구는 작가 톨스토이로 하여금 ‘가정의 불행’이란 결론으로 이끈다. 모든 가정은 필연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도달한 결론이다. 하지만 이 결론을 그는 『안나 카레니나』 안에는 적어두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정도의 문장이지 않을까. “무릇 모든 가정이 행복을 꿈꾸지만 행복은 가정 안에 깃들지 않는다.”

 

톨스토이에게 인생의 진리와 함께하지 않는 행복이란 가능하지 않으며,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기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가정은 그런 진정한 행복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예술과 함께 가정을 삶의 진리를 은폐하는 기만으로 간주한다. 『안나 카레니나』를 떠나면서 톨스토이는 예술로부터,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떠난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진리 앞에서 완벽한 예술도 행복한 가정도 모두가 기만에 불과하다. ‘위대함의 허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한번 더 위대한 소설이다.

 

13.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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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소 2018-06-2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안나카레니나를 읽지 않았습니다.
근데 로쟈님의 리뷰를 읽으니 이제는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몇년 전 부산 시립도서관에서 강연하셨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인간이 책이란걸 읽기에는 아직 진화가 덜 되었다고. 혹시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두 배 세 배로 읽어야 된다고.
늘 건강하세요. ^^

로쟈 2018-06-30 18:12   좋아요 0 | URL
네, 빠져서 읽어보실 만합니다.~
 

한겨레의 '최재봉의 문학풍경'을 옮겨놓는다. 최재봉 기자가 여름에 진행한 '로쟈의 러시아문학 읽기'(http://blog.aladin.co.kr/mramor/6389785) 수강 소감을 올려주셨다. 참고로 이번 가을에 진행할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는 9월 9일 개강 예정이다.

 

 

한겨레(13. 08. 05) 19세기 러시아문학과 보낸 한철

 

월요일 저녁이면 데이트가 있었다. 상대는 19세기 러시아문학. 광화문 북카페로 강의를 들으러 갈 때면 데이트에 나가는 심정이었다. 인터넷 서평꾼으로도 알려진 러시아문학자 ‘로쟈’ 이현우 선생이 강의를 이끌었다. 수강생은 열명 안팎.

 

6월17일부터 7월29일까지 7주에 걸쳐 강의가 진행되었다. 러시아문학의 아버지라 할 푸슈킨부터 체호프까지 일곱명의 일곱 작품. 세 번째 순서였던 레르몬토프를 제하면 매우 익숙한 작가와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강의는 새로웠고 유익했다. 혼자 책을 읽고 자료를 뒤지면서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성취감을 주었다.

 

생각해 보면 강의 내용을 공책에 받아 적어 가면서 공부를 해 본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학교 문을 나선 뒤로는 강의를 듣기보다는 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최근에만도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지식나눔 강연’에 나가 말품을 팔았던 터였다.

 

쉰 넘은 ‘아저씨’가 수강생이랍시고 나타나면 다른 이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듣자 하니 인문학 강좌의 수강생은 절대 다수가 이삼십대 여성들이라던데. 첫날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는 어쩐지 쑥스럽다 못해 주눅까지 드는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동료 학생들 중에는 제법 나이 지긋해 뵈는 남성들이 섞여 있었다.

 

푸슈킨이라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다인 줄 알았다. 러시아문학이란 것이 푸슈킨에 와서야 비로소 성립했고, 러시아문학 전체를 ‘푸슈킨 하우스’라 부르며, 푸슈킨의 작품 독자로 한데 묶인 러시아 사람들을 ‘푸슈킨 공동체’라 이른다는 사실을 새로 배웠다. 도스토옙스키가 푸슈킨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청중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든가, 망명작가 나보코프가 푸슈킨보다 꼭 100년 뒤인 1899년에 태어난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식의 ‘푸슈킨 커넥션’도 기억에 남았다. 푸슈킨의 대표작인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오페라로 만들면서 차이콥스키가 주인공 오네긴을 싫어한 나머지 오네긴의 아리아를 만들지 않았다는 ‘여담’ 역시 재미졌다.

 

레르몬토프의 연작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은 이번 강의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작품이었는데, 그 현대성이 놀라웠다. ‘나와 세계의 맞섬’이라는 낭만주의적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가는 주인공 페초린은 혐오와 매력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 푸슈킨의 결투를 다룬 시 <시인의 죽음>으로 데뷔한 레르몬토프가 푸슈킨보다 무려 열살이나 어린 스물일곱 나이에 역시 결투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은 흔히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대립을 다룬 작품으로 해석되지만, 결혼 여부를 기준으로 전혀 다른 대립쌍을 구성하는 로쟈 선생의 관점이 참신했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제목을, 각각 톨스토이의 육체적 자아와 정신적 자아를 대리하는 두 주인공 이름을 따 ‘안나와 레빈’으로 해도 좋았겠다는 견해 역시 그럴듯했다. 그러나 체호프 희곡 <갈매기>의 여주인공 니나를 긍정 일변도로 해석하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니나에게 과연 그럴싸한 ‘미래’가 있을지, 그는 드라마가 끝나도록 여전히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월요일의 데이트는 일단 끝났다. 가을에는 20세기 러시아문학이라는 새로운 상대와의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이다.(최재봉 문화부 기자)

 

13.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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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을유문화사, 2013)에 대한 간략한 독후감을 적었다.

 

 

한겨레(13. 08. 05) 공산주의 마을을 누가 파괴했을까

 

‘소비에트 유토피아문학의 정수’로 소개됐지만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1928)는 소련에서 거의 부재했던 작품이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분위기를 타고 정식으로 출간된 게 1988년이기 때문이다. 이해에는 역시나 금서였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도 출간돼 러시아 독자들과 만났다. <닥터 지바고>의 경우, 러시아혁명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소련에서 공식 출간되지 않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에겐 ‘반공문학’으로 읽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누구보다도 사회주의 이념에 헌신적이었던 철도노동자 출신 작가의 대표작은 어째서 금지됐던 것일까.

 

전체 3부로 구성된 장편 <체벤구르>의 주인공은 사샤 드바노프이다. 어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죽음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서 두 발을 밧줄로 묶고 호수에 몸을 던졌다가 죽었다. 죽음을 마치 여느 마을에 마실을 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사샤는 아이들이 많은 드바노프 집안에 입양되지만 끼니를 제대로 이을 수 없는 가난 때문에 구걸에까지 나선다. 방랑자이자 기계공인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그를 양자로 거두며, 혁명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당원이 된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도록 볼셰비키는 텅 빈 심장을 가져야 한다는 양아버지의 교훈을 품고서 사샤는 당의 명령에 따라 진정한 공산주의 마을을 찾아 떠난다. 당과 무관하게 자생적인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를 건설한 마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자 코푠킨이 사샤의 동행이 돼준다.

 

두 사람은 순례 길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유명인의 이름으로 개명한 마을도 거쳐 간다. 혁명 이후의 삶은 그 이전과는 다른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들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되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됐다. 그리고 무엇이 새로운 완벽한 삶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건설해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예컨대 ‘도스토옙스키’는 사회주의를 좋은 사람들의 모임 같을 걸로 생각했을 뿐이어서 필요한 물건이나 건물에 대해서 무지했다. 사샤와 코푠킨이 도착하게 되는 공산주의 마을 체벤구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르주아를 몰아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한 이 공산주의 유토피아에서는 태양도 이전보다는 더 열심히 일할 거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이들의 ‘낙원’은 얼마나 보존될 수 있을까. 소설의 결말에서 체벤구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군대의 공격을 받고서 파괴된다. 코푠킨을 포함해 동지들이 모두 살해당하고 사샤만이 홀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사샤는 언젠가 아버지가 몸을 던졌던 호수로 걸어들어간다.

 

 

비극적으로 보이는 결말은 사회주의에 대한 플라토노프의 지극한 염려를 반영하는 듯이 보인다. 궁금한 것은 ‘외부 군대’의 정체를 작가가 어째서 모호하게 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로서 적은 혁명군(적위군)이거나 반혁명군(백위군)일 수밖에 없다. 체벤구르가 반혁명군에 의해 파괴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모호하게 처리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혹 플라토노프는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이상적 공산주의 마을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현실사회주의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현실사회주의를 ‘현실과 타협한 사회주의’로 이해하게 되면 억측은 아닐지도 모른다.

 

13.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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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연극인(27호)의 '色다른시선' 코너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http://webzine.e-stc.or.kr/03_story/plan_view.asp?Idx=294&CurPage=1&KeyWord=&SearchName=).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연극 <더 게임 - 죄와 벌>의 비교를 청탁받고 쓴 것이다. 몇군데 오탈자는 수정해놓는다...

 

 

 

연극인(13. 07. 04) 원작과 각색 사이의 게임

 

명품극단의 <더 게임 – 죄와 벌>은 <죄와 벌>, <푸르가토리움>과 함께 ‘<죄와 벌> 3부작’을 구성한다. 연출자 김원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친숙한 걸작을 통째로 다루기보다는 한 국면씩에 집중한다. 그러한 분할은 물론 원작의 무게감을 덜어주고 상대적으로 열린 연극공간을 창출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원작에서 배역과 모티브를 따오긴 하지만 자유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번역극’이라기보다는 ‘번안극’에 가깝다고 할까.

 

일종의 모티브 연극으로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던 <죄와 벌>과 달리 <더 게임>의 초점은 라스콜리니코프(‘라스꼴리니꼬프’)와 예심판사 포르피리(‘뽀르피리’)의 관계다. 원작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포르피리의 관계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관계와 함께 세 가지 핵심적인 관계적 국면이다.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자백을 유도하려는 포르피리와 그게 맞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신경전은 이 작품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더 게임>은 그 긴장감을 극적 긴장감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둘의 대립을 극의 핵심 모티브로 삼으면서 연출자는 인물의 대비 관계를 더 강화시켰다. 원작에서 포르피리는 30대 중반으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보다는 열 살 가량 나이가 많고, 아버지가 없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겐 유사 아버지와 같은 기능도 갖는 인물이지만 <더 게임>의 뽀르피리는 철저하게 라스콜리니코프와는 적대적인 인물로 설정됐다. 각본에 따르면 그는 ‘종잡을 수 없는 냉혈한으로 냉소적인 뽀르피리’라고 소개된다. 반면에 라스콜리니코프는 ‘병든 청춘의 치기어린 열정이 내비치는’ 인물이다.

 

원작 <죄와 벌>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놓인 가난한 법대 휴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할 궁리를 하고 범행 리허설까지 하지만 막상 자신의 저지를 행위에 혐오감을 느끼며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던 범행을 결국 포기하고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당포 노파와 같이 지내는 이복동생 리자베타가 이튿날 저녁 전당포에 없다는 사실을 우연히 엿듣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정작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도끼로 살해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리자베타가 나타나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정에 없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바노브나 자매 살해사건’의 전말이다. 살인 사건 이후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신경쇠약에 빠지며 자신의 범행에 대한 자책감과 혐오감에 시달리면서 포르피리와 대결한다. 적어도 논리적인 추궁(심문)에는 밀리지 않겠다는 게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뽀르피리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더 게임>은 이 대결의 구도를 좀더 일방적인 것으로 설정했다. 뽀르피리는 거미줄을 쳐놓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포식자이고 ‘병든 청춘’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피식자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을 위해서 뽀르피리의 성격화도 달라졌다. <더 게임>의 기본적인 상황은 뽀르피리의 첫 자기소개에서 이미 예고된다.

더 게임_텍스트1

하지만 가끔은 ‘소화하기 힘들 놈들’도 등장한다. 팽팽한 신경을 벌이게 되는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경우다. 자수를 권고하는 정도의 역할에 머무는 <죄와 벌>의 포르피리와는 달리 <더 게임>의 뽀르피리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완벽한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자책감과 죄의식에까지 시달리는 라스꼴리니꼬프는 피의자를 궁지에 몰아놓고 노련하게 압박해 들어가는 검사 뽀르피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뽀르피리는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스꼴리니꼬프의 논문 ‘범죄에 관하여’란 논문에서 범행의 동기를 읽어낸다.“이 사건은 금전만이 사건의 전부가 아냐.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라고 판단하는 뽀르피리는 인간을 평범한 인간과 비범한 인간으로 구분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이론을 범행의 ‘예고장’으로 간주한다.

<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이론, 혹은 초인사상은 인간이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뉠 수 있고, 비범인은 범인의 한계를 넘어 초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역사상의 비범인들, 곧 모든 입법자나 건설자들이 바로 그런 권리를 행사해왔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자신은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이다. 가난 때문에 휴학중인데다가 하숙집 여주인에게 빚까지 진 처지에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주요한 관심사는 그 자신이 과연 비범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같은 역사상의 비범인처럼 자기에게도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한 발작 넘어설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살인은 그런 시험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범죄이론의 가공할 만한 결과를 라스콜리니코프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주인공의 정신적 부활 과정을 보여주는 게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였다.

 

하지만 <더 게임>은 제목대로 ‘게임’에 더 치중한다. 그것은 원작에서 명백히 ‘조연’의 자리에 있던 뽀르피리를 라스꼴리니꼬프와 대등한 인물, 아니 더 나아가 주인공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작에는 없는 뽀르피리와 소냐와의 관계를 새로 고안해 넣은 데서도 알 수 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를 찾아가 복음서에 나오는 라자로의 부활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원작 대로이다. 범행 이후, 아니 범행을 계획할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분리돼 있던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와 함께한 장면에서 그러한 고립을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 갱생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소냐에게 리자베따를 죽인 범인을 알려주겠다고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파격적인 것은 여기에 이어지는 뽀르피리와 소냐의 가학적 성애 장면이다. 거미줄이 쳐진 무대 디자인과 함께 <더 게임>을 특징지어주는 장면이다. 어떤 장면인가.

소냐의 목을 맨 밧줄을 든 뽀르피리가 등장해 소냐를 끌고 무대를 누빈다. 그는 돈을 주고 소냐의 몸을 사서 학대한다. 그러면서 소냐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 게임_텍스트2

실상 <더 게임>에서 뽀르피리는 정의를 구현하는 검사라기보다는 악마의 형상이다.“죄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당신이야말로 아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선택하는 사람 아닙니까?”라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반문은 <더 게임>의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정작 아무렇지도 않게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써 뽀르피리는 법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살인을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원작에서와 달리 <더 게임>에서는 뽀르피리 역시 ‘비범인’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누가 물을 수 있는가? 관객인가?

고전은 언제나 다시 읽히며 재해석되는 가운데 생명을 유지한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지식인 청년의 고뇌를 담은 <죄와 벌>이 <더 게임>을 통해서 한 번 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자극한다. 우리 안의 라스꼴리니꼬프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원작 <죄와 벌>이었다면 <더 게임>은 우리 안의 뽀르피리를 만나보라고 제안하는 듯도 싶다. 원작과 각색 사이의 게임이라고 할까. 원작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게임이다.

 

13.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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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러시아문학을 주제로 여름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기간 6월 17일부터 7월 29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7;30-9:30이다. 구체적인 일정과 강의신청은 푸른역사 아카데미 카페의 공지(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99)를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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