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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9일부터 6월 11일까지 종로구 창성동의 '갤러리 팩토리'에서는 2006 팩토리 기획 '현대 여성 미술의 새로운 표상 - 신여성'의 두번째 전시로 '김연태 회화전'이 진행중이다. 전시회의 타이틀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며(알다시피 메를로-퐁티가 같은 제목의 책을 쓴 바 있다), 나는 개막일에 들러서 작품들을 감상한 바 있다. 소개하는 뜻에서 몇몇 작품의 이미지와 해설을 옮겨온다. 전시회 해설은 독립 큐레이터 이순령씨가 썼다.

 

● 삶은 모호한 것 투성이이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쉽사리 길들여지지도 않는다. 세월의 켜가 쌓이면서 익숙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 늘 낯선 상황에 서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김연태의 작업에 다가가는 과정 역시 그러했다. 작업실에서 처음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나는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는, 섣부른 접근을 허용치 않으려는 듯한 그 세계가 이내 궁금해졌다. 그리곤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조금씩 다가서서 조심스레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지금에도 여전히 그녀의 작품들과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이 글은 어떤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그 감추어진 내밀한 속 풍경을 엿보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출발하였다.

● 회화나 입체, 설치에 이르기까지 김연태의 작업은 드로잉이 근간이 된다. 아크릴, 잉크펜을 사용하여 세필로 찰나의 인상을 포착하는 드로잉은 순발력이 뛰어난 그의 성격에 잘 맞는 매체이다. 초기부터 꾸준히 해온 드로잉 작업은 그녀 개인적으로는 일상의 투영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만났는지 무엇을 읽고 느꼈는지 그 단상에 대한 흔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배제된 채 화면은 몇 개의 선으로 요약된다. 상대적으로 터치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회화 작품조차 절제되고 그래서 때로는 비워진 듯 충만한 상태로 제시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드로잉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이다.

●(김연태는) 작가 특유의 상상력에 의한 과감한 생략은 지루하고 산만한 세부를 잘라내고, 우리의 관심을 곧바로 사물의 핵심적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글에 비유하자면 장황한 미사여구를 곁들인 산문이 아닌, 암시적 단서를 던져주고 읽는 이의 반응을 지켜보는 시(詩)에 가깝다. 최소한의 언어로 가볍고 경쾌하게 대상을 요약하는 김연태의 드로잉은 그중에서도 하이쿠를 연상시킨다. 시이지만 이미지적 성향이 강한 하이쿠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에 대한 인상을 간결한 시구로 표현한다. 이와 유사하게 그의 드로잉 작업은 슬쩍 무심한 듯 그은 몇 개의 선으로 대상을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가볍고 단순해질 권리가 우리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 우리의 삶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경계를 알 수 없게 뒤섞여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의 관심은 민중, 역사, 정치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에서부터 개인, 일상, 욕망 등의 사적인 가치로 옮겨가게 되었다.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여성을 중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한다. 김연태는 그만의 예민한 감성으로 그 징후를 드로잉 작업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 소소한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그는 자신의 작업을 ‘상황과 장면의 기억 속에서 꿈을 꾸며 색을 입히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 덧붙여 ‘나는 주제를 찾아 헤맨 적이 없다. 언제나 주제가 나를 찾아 왔을 뿐이다’라는 가브리엘 마르케스(Gabriel Jose Garcia Marquez)의 말을 인용한다. 작업노트 한 켠에 적혀 있는 이 문장은 작업에 임하는 그의 태도를 짐작케 하는 단서가 된다. 삶의 순간순간 찾아오는 느낌과 감정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데서 작업은 출발한다. 이렇듯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예기치 못하게 스치는 작은 미동마저 포착할 수 있는 발화점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대상에 내재한 특질들을 포착해내는 명민한 능력의 소유자인 작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그 느낌이란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것이 서서히 내적 사고를 점령해가고 결국 그것에게만 온 신경과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말한다. 김연태는 이렇듯 집중된 감정이나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침묵과 그 진실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 하지만 사소한 일상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개인적 감성과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친절하거나 투명하지 않다. 드로잉 안에서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친근한 사물이 불안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화면 속에서 발견되는 형태들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애매한 상태로 제시되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스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 김연태의 작업을 읽는 묘미는 이러한 익숙함과 낯설음의 공존에 있다. 일반적으로 비평이란 언어를 통해 작품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밝혀내거나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반적 추측은 미끄러지고 작품의 의미를 관통하려는 노력은 공허함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독자를 애매모호한 상태에 둠으로써 불확실한 감정을 촉발하는 것을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두려운 낯설음(uncanny)’이라고 정의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두려운 낯설음‘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 김연태는 일상의 어떤 대상에 감추어진 시각적 가능성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낸다. 구체적인 형상에서 출발하되 사물을 물질보다는 사건으로서 상황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어느 순간 우연히 눈에 들어온 말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낯설고 서늘한 감정과 그 예기치 않은 상황이 주제가 된다. 말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수차례 전이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에는 더 이상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물의 외연적 실체는 휘발되고, 그것과 닮았지만 그것이 아닌 새로운 문맥이 드러난다. 즉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모방이란 의무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방식으로 해석의 문이 열린다. 작가는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고 100% 소통가능한 현실로부터 의미를 면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주어진 개념의 틀에 갇히는 비평의 언어적 판단과 단정을 중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 분명한 사실은 그의 작품에는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생명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지만 탐지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크고 요란한 동작보다는 섬세하고 작은 변화 속에 내재된 움직임이다. 우리는 의외로 작은 변화에 더 민감하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을 김연태의 회화는 가시화한다. 그리고 일상적인 것에 내재된 비가시적인 형상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가늘고 섬세한 선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솜털처럼 예민한 실선들이 구두나 가방처럼 생명이 없는 사물의 표면을 감싸고 있거나, 탯줄과도 같은 생명선이 서로 관계없는 사물들을 연결하거나, 혹은 나무줄기처럼 뻗어가며 뿌리내리려는 사유의 이미지를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작가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시각적 표현이다. 그에게 선은 더듬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선을 긋는 것은 대상을 알아가는 가장 솔직한 방법인 동시에 자신에게로 향하는 행위인 것이다.

● 이처럼 김연태의 드로잉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선 상에 서있다. 이러한 태도에는 작가의 은밀한 욕망의 투사가 개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내면화하는 응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Jacques Lacan)의 욕망 이론에 의하면 응시란 타자의 영역에서 나에 의해 상상되는 응시를 말한다. 외부에 놓인 사물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하나의 시각적 경험인 응시는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자기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라진 ‘결여’의 형태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김연태의 작업과 맞닿아 있다. 생략되고 숨겨지는 단계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재현의 과정에는 시각을 통해 어떤 외적 실체로부터 진정한 자아를 도출해내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자기반영성의 미학이 된다”는 작가의 언급과 일치한다. 자기애적 성향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 사실 우리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자기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세계에 관여하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김연태에게 있어서 작업이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든 대상과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해가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내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끊임없이 새로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은 눈을 뜨고는 있지만 일상의 삶 속에 아직 잠들어 있는 감성들을 일깨우고,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자아를 되찾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길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풍경이지만, 길 위를 걷는 사람에게는 통로이다.” 앞으로 김연태의 작품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지에 대한 예측은 지금처럼 모호한 채로 남겨두고 싶다. 그러나 그는 길 위에 서있고 좀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심할 수 있고 기다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전시는 그 예감에 대한 믿음이다.

06.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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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사와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위대한 세기: 피카소’전이 지난 20일부터 9월 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번에 전시되는 피카소 작품들은 세계 20여 곳의 미술관과 재단, 화랑, 개인 소장가들로부터 빌려왔으며, 대부분 국내에서 처음 전시되는 것들이라고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5. 23)에는 피카소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출간한 바 있는 작가 김원일씨가 이 전시회를 둘러본 소감을 적어놓고 있어서 옮겨온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피카소를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시기별 대작과 걸작 등 140여 점으로 만나는 이번 전시는 사실상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피카소 회고전이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5만여 점의 작품과 92세로 붓을 거둔 생애 자체가 이제 20세기의 전설이 된 피카소의 대표작 140여 점을 모아 전시한 서울시립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그림을 동경해 해외에 나갈 때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을 둘러보고, 그의 화집을 사모아 오다 몇 해 전 그의 전기를 썼던 필자로선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가 위대한 점은 그를 현대미술의 한 유형에 가둘 수 없는 자유분방했던 창작혼에 있다. 1900년 촌티를 못 벗은 스페인의 지방 화가로 파리에 입성한 후 청색시대, 분홍빛시대, 짧은 원시미술시대를 거쳐 입체주의, 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두루 섭렵하고 고전의 자기식 해석법인 ‘변형’의 또 다른 시도와 도자기 작업 끝에, 누구도 도달한 적 없던 최상의 경지를 정복한 피카소는 그야말로 시각예술의 모든 장르를 깨부순 활화산이었다.



-19세에 예술의 메카 파리로 나와 곤궁했던 초기, 가난한 이웃들의 애환을 슬픈 빛 청색으로 표현했던 ‘모성’‘곡예사, 어린이와 개’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단연 시선을 끄는 대작 ‘솔레르씨의 가족’은 가난한 양복점 주인의 가족을 정감 있게 표현한 청색시대의 걸작이다. 현대미술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 후 브라크와 함께 경쟁적으로 분석적 입체주의를 실험했던 시기의 ‘비둘기’도 전시됐다. 사물을 각과 선으로 자르는 수법의 이 그림은 현대 추상미술의 시발점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절대적이다.



-그의 세 번째 연인이었던 러시아 무용수 올가를 로마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고전주의로 복귀한 시기의 ‘우물가의 세 여인’을 통해 피카소 미술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빨간 카페트 위의 기타’는 평생 서로 질투하며 사랑했던 경쟁자 마티스의 색의 대비를 재해석케 하는 40대 피카소의 대표적인 주제다. 피카소의 대표적 걸작으로 흔히들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등을 연상하지만 ‘무용’을 제외해선 안 된다.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통, 엘뤼아르 등과 사귀기 시작했던 1925년에 그린 ‘무용’은 야만적이고도 난폭한 기법으로 파리 화단을 경악케 했던 작품이다. 나는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그려진 그 대작 앞에 오래 서있었다. 혼란스러운 꿈의 세계를 생생한 현실과 결합시켜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분해한 이 광란의 춤 그림 앞에서 ‘평면회화가 이제 갈 데까지 가버렸다’며 놀랐을 당시 파리 화단 평자들의 탄성이 들리는 듯 했다.



-당대 최고의 부르주아였으면서도 평생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피카소는 ‘스페인 내란’을 거쳐 군부 프랑코가 무력으로 조국을 장악하자 격분하여 탁구대보다 큰 대작 ‘게르니카’(1937)를 그렸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전 수 없는 밑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에 전시된 ‘미노타우로스’와 ‘우는 여인’도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미노타우로스의 광폭성과 전쟁에 수난 당하는 여인의 비극적 모습이 스페인 내란의 참상을 상징하는 한편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한 그의 현실참여 정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게르니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본 다섯번째 연인 도르 마르를 모델로 한 초상화도 여러 점 전시되어 있는데, ‘게르니카’가 색을 배제했듯이 초상화도 어두운 톤이 주조를 이룬다. 스페인 내란과 2차 세계대전이 피카소로 하여금 밝은 색조를 거부케 했던 것이다.



 

 

 

-피카소가 40대에 만난 네 번째 연인으로 청초한 마리 테레즈와 60대에 들어 만난 여섯 번째 연인 프랑수와즈 질로, 일곱 번째로 마지막 연인이 된 자클린느 로크의 초상화도 보인다. 마리 테레즈는 관능적이고 부드럽게, 프랑수아즈 질로는 이지적으로, 로크는 현모양처로서 모성성에 입각하여 각각 달리 해석했다. 평생 일곱 여자와 산 그가 한 여성을 만날 때마다 그의 그림도 변모를 거듭했음을 보는 것도 피카소 그림감상의 포인트다. “소설가가 자서전을 쓰듯 나는 그림으로 자서전을 쓴다”고 말했듯, 피카소의 그림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을 연대순으로 보면 그의 삶 자체가 올곧게 담겨 있다.



-피카소는 만년에 자신의 그림에 영감을 준 들라클루아, 벨라스케스, 마네의 그림을 재해석한 ‘변형’을 시도했는데,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출품돼 있었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십 장의 밑그림을 그리는 실험을 되풀이했는데, 밑그림 자체가 곧 완성품으로 평가된다. 90이 넘어서까지 담배를 즐긴 그는 “이제야말로 늙었다. 그러나 담배 맛은 20대 시절 그대로다”라고 말했듯.‘담배 피우는 남자’를 많이 그렸다. 관음증에 시달린 말년의 애교 넘치는 펜화 수채화와 함께 담배 문 남자상도 여러 점이 전시된 게 볼만 했다.


-그 동안 서너 차례 피카소 그림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세계 23곳의 기관 및 개인 소장처가 협조하에 그의 전 생애의 그림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전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미술 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자신의 교양 수준 점검을 위해 일차 관람해볼 만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전시다.

06. 05. 23.

 

 

 

 

P.S.  미술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피카소 전 초대권을 얻은지라 한번쯤 시간을 내보려고 한다. 영어판 대형화집도 우연히 염가로 구한지라 나름대로의 '준비'도 된 듯하다. 더불어, 미리 읽어볼 만한 책으로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아트북스, 2003)와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디자인하우스, 1996)을 꼽아본다. 전자는 도서관에서 대출했고, 후자는 소장도서지만 아마도 박스에 있는 듯하여 이 또한 대출해야 할지 모르겠다. 8월에는 몇 마디 더 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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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5-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일님이 쓴 책 피카소에 대한 전기도 꽤 좋은 책입니다.

로쟈 2006-05-2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작가를 닮았다면 진중한 맛이 있겠습니다.

바람돌이 2006-05-2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전시도 보고 싶어요. ㅠ.ㅠ

로쟈 2006-05-2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료가 좀 되는 듯하더군요...

해적오리 2006-05-24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께요. ^^
 

 

 

 

 

 

 

젊은 작가 황혜선의 전시회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기간은 2006. 5. 11 - 6. 1). 전시회 도록 서문으로 씌어진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제목은 '황혜선의 정원 이야기: '고요한 삶'과 '최대한의 삶''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과 어법으로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황혜선의 이번 전시회는 한 ‘젊은 예술가’의 집요한 관심과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관심과 주제는 여느 예술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날로그적인) 조형적 오브제들로 구현돼 있기에 (디지털적인) 논리적 언어로 쉽게 포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에게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관심과 주제는 그 일련의 예술작품들을 들여다보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작가의 작업은 매번 “황혜선의 최근작은 다소 의외였다”라는 평가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의외성’은 반복됨으로써 그 자체의 문법을 구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즉, 작가는 매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지만 어떤 반복의 흔적들을 남기며, 관객은 거기서 고유한 언어(랑그)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언어는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 언어인가?


먼저, 이번에 전시되는 10점의 작품들은 전시회-텍스트, 혹은 집약된 황혜선-텍스트를 구성하는 통사적 기본단위이다. 즉, 매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어휘이고 문장이면서 스스로 말을 건네는 하위텍스트들이다. 전시회-텍스트는 공간적 동시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관객의 동선에 따라 의미론적으로 (재)구성되는 시간적 서술성을 갖기도 한다. 작품의 배치/배열 자체가 작가의 섬세한 고려를 수반하는 것일 때, 이러한 서술성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렇다면, 이 전시회의 하위텍스트들이 제일 먼저 건네는 메시지(발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텍스트-세계가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5년에 처음 발표된 이 작품에서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은 지시적으로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20장의 대형 유리‘벽면’을 가리킨다(이 작품은 ‘입체적인 벽화’의 컨셉을 갖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사적 공간의 기억들이다.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을 고집하자면,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사소한’ 내용과 (입체 벽화라는) ‘거창한’ 형식 사이의 미묘한 충돌이다. 이 충돌의 언어적 상관물은 아마도 작가의 2000년 작품 제목이기도 한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일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모든 것을 기대한다? 그렇다, 어쩌면 그러한 언어적 진술 속에 황혜선-텍스트의 비밀이 슬쩍 암시되어 있는 건 아닐까?


작가가 창작활동의 초기부터 집요하게 관심을 가져온 주제가 ‘소통’의 문제였다는 걸 상기해본다면(귀/귀마개가 작가의 첫 주제였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 불신의 대상은 일상에서의 소통가능성 자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관객과의 소통가능성에 대한 불신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겠다. 그 소통가능성에 대한 불신은 으레 소통가능성에 대한 기대/요구와 그 경험적 좌절을 전제로 한다(소통에 대한 작가의 불신이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불신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하였던 것일까? 바로 소소한 일상들과 일상의 정물들에 대한 관심이다.


작가 황혜선의 ‘정물(Still Life)’ 연작은 그런 의미에서 창작에서의 한 분기점이라 할 만하다. 흰색 캔버스천을 이용해서 만든 흰색-받침대 위의 (다소 찌그러진) 흰색-정물들이 보여주었던 것도 받침대 위에 놓인 조각 작품이라는 ‘고상한 형식’과 찌그러진 일상적 정물이라는 ‘소소한 내용’ 간의 불일치, 혹은 미묘한 의미론적 충돌이었다.


그러한 의미론적 충돌에 작가 황혜선다운 반복이 놓여 있다. 이것을 다소 현학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작가 황혜선이 즐겨 다루는 오브제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서 사소한 ‘최소존재론적 대상들’이고, 반면에 그것들이 자리하는 공간/형식은 관례상 고상한 의미가 기대되는 ‘최대의미론적 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물론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충돌/파격의 원조라면 마르셀 뒤샹을 꼽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뒤샹의 작품에는 황혜선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사소한 개인성’에서 ‘개인성’이 빠져 있었다).      


최소존재론과 최대의미론의 대비와 충돌, 어쩌면 그것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라는 작가의 언명에 상응하는 황혜선 고유의 미학적 양식이 아닐까? 일상의 사소한 세목들과 자잘한 이야기들에 주목하게 될 때, 세상이라는 정원은 ‘큰 이야기들’ 몇 개로 가름될 수 없는,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의 무한-정원이다. 그러한 세계상을 가지고 작가는 우리의 일상적 세목의 크기를 벽화적 크기로까지 확대/격상시킴으로써, 소통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뛰어넘는 ‘크나큰 관심’을 관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작가는 모든 것을 기대한다!). ‘나’의 속삭임과 사소한 이야기에 좀더 귀기울여달라고.


작품 ‘흘리지 못한 눈물’ 또한 그런 맥락하에 놓인다. 눈물이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함축하고 있지만,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므로 이 눈물은 눈물로서의 존재성도 갖지 않는, 최소존재론적 눈물이다. 그 눈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다독였던 것은 크리스탈에 아주 미세하게 씌어 있는 ‘그래’ ‘괜찮아’ 같은 자기위안적 문구들일 것이다(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 문구들을 관객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믿지/기대하지 않기에?!).


그런데,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흘리지 못한 눈물’의 존재론적 위상에 걸맞지 않는 ‘대형’ 크리스탈들이다. 이 크리스탈들이 ‘흘리지 못한 눈물’의 최대의미론적 상관물인바, 이제는 ‘흘린 눈물들’보다도 훨씬 큰 크기와 광채를 갖고서 자신에 대한 관심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고요한 삶’(still life)이 오히려 ‘최대한의 삶’(maximum life)을 위한 방책인 것처럼.

 

따라서 황혜선의 작품세계에서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작가적 관심을 액면 그대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해 보인다. 거기에는 작가의 작지 않은, 사소하지 않은 기대와 열망이 내기로 걸려 있기 때문이다. ‘상처’와 ‘Scars’ 같은 작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상처’에서 작가는 강화유리판에 아주 작은 흠에 다이아몬드를 붙여놓았다. 흔히 ‘영원한 가치’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이 작품에서 갖는 지시적 의미는 아주 작고 사소한 ‘상처’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보석의 질감을 획득하면서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상처가 된다. 만약에 그것이 ‘영원한 상처’라면, 그 상처는 결코 사소한 상처라고 말할 수 없다.

 

‘흉터들의 책’이라고도 부름직한 ‘Scar’ 역시 유사한 의미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지인들의 신체에 난 사소한 흉터들을 사진에 담아놓음으로써 그것들의 일상적인 존재론적 지위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의학용 자료집에서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사진은 대상의 ‘아름다운’ 면을 찍어서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이 사진이란 형식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낳는다.


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적어도 타인들에게는 가리고 싶거나 숨기고 싶어 하는 흉터 사진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흉터들은 모두에게 보여지는 ‘아름다움’은 결코 갖지 못하는 지극한 ‘개인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최소한으로 존재하도록 요구받지만,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최대한의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마치 고흐의 ‘낡은 구두’처럼). 작가 황혜선이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왜? 그녀는 모든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의외라 할 만한 것은 ‘약속’이란 제목이 붙은 스테인레스 작품일 텐데, 표제와 모양에 비추어 결혼반지 등에 해당하는 ‘내용’과 그 중요성을 전달하는 크기라는 ‘형식’이 일치하고 있는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며 어떤 징후일까? 보다 친절하게 작품의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너무나 믿기 때문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양동이)을 참조함으로써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일부러 고른 양동이 형상은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허름한 양동이의 그것이다. 우리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라는 작가의 언명을 실마리로 삼아 이 전시회-텍스트를 읽고자 했지만, 이 스테인레스 양동이 오브제가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최수주의적) 불신과 (최대주의적) 기대 사이의 균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즉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점. 어쩌면 작가 황혜선이 약속하는바, 혹은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그것이 아닐까?     

 

그러한 모순적 형용에 의해서 지시되는 균형점은 ‘우연히 일어나지만 미리 정해져 있는’에서도 반복된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건 ‘속치마’이다. 오브제로서의 ‘속치마’는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자극하는데,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숨겨진 욕망’의 상관물 아닌가? ‘겉치마’라는 일상적인 외피에 가려진,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을 드러내곤 하는 ‘속치마’에 대해서, 작가는 ‘우연히 일어나지만 미리 정해져 있는’이란 제목을 붙인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속치마’의 드러남이란 사건의 우연성과 필연성이다. 우연과 필연이라는 모순적인 양태가 조우하는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지점이 작가 황혜선의 영점이 아닐까?(마치 고흐의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낡은 구두’의 끈 같은.)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만남의 지점, 균형점에 대한 믿음/기대가 ‘너무나’에 의해서 수식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믿음/기대의 과잉이며, 이 과잉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이끌고 가는 동력이다. ‘발이 닿지 않는’과 ‘두려운 낯설음’이라는 작가 자신의 프로필적 자아상이 암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그것이다. ‘발이 닿지 않는’에서 작가-형상은 지상으로부터 (정서적으로) 10cm 가량 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초월이되, 최소초월이고 최소주의적 초월이다(때문에 낯익은 것이면서 낯선, ‘두려운 낯설음’을 낳는다).

 

이 초월을 낳는 간극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와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 사이의 단락적 거리이며 ‘인간 황혜선’과 ‘작가 황혜선’ 사이의 거리이다(우리는 때로 스스로에게 ‘두려운 낯설음’의 존재이다. 하물며, 작가들임에랴!). 그리고 이 거리를 낳는 것이 “너무나 믿기 때문에”이다. 작가는 너무나 믿기 때문에, 삶이라는 양동이의 물이 균형점에서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다 찼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름 붙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삶에 대한 감정과 예술창작의 자기운동은 시작된다.


이 전시회에서 의미론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놓이는 작품이 물잔에 출렁이는 물을 보여주는 영상물 ‘바람과 같은 무게’인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필연적이다. 얼핏 이 작품에서도 보여지는 것은 삶 혹은 감정의 은유로서 제시된 물잔 속의 ‘폭풍’이다. 그것은 출렁이다가 잠잠해지고 잠잠해지다가 다시 출렁이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한 출렁임의 운동을 낳은 것은 제목에 따르면 ‘바람과 같은 무게’이다. 물론 이때의 바람은 사소한 공기의 운동을 지칭한다. 하지만, 물잔 속의 물은 그 미세한 공기의 결을 따라 심하게 출렁이고 다시 잠잠해진다.


물잔 속에서 (넘치지 않게) 요동하는 물은 그것이 아무리 격렬하고 히스테리컬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고요하면서 사소한 율동체이다. 극히 최소한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투명한 물은 작가 황혜선의 최소주의적 오브제의 계보를 잇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최소주의적 율동이 그것 나름으로는 정지된 균형점 상태와 구별된다는 점이다. “채워낼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이라는 정념의 운동처럼.


작가 황혜선의 세계는 정지된(Still) 세계이지만 동시에 삶(Life)의 세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 세계는 엔트로피의 세계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계속 유입되는 反엔트로피(=네겐트로피)의 세계이다. 이 ‘외부’의 물질적 표상은 ‘바람과 같은 무게’이지만, 그 심리적 근원은 “너무나 믿기 때문에”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지극한 의미를 갖는 ‘최대한의 삶’에 대한 갈망이다.


작가 황혜선이 지난 10년간 정물적인 오브제들의 ‘바람과 같은 무게’로써 (물론 특별히 배려하는 건 아니지만) 관객들에게 시사해온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여기서 뒤늦게 드는 생각은, 어쩌면 ‘고요한 삶’(최소존재론)이라는 것 자체가 ‘최대한의 삶’(최대의미론)의 알리바이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황혜선의 예술세계, 혹은 그녀의 정원에서는 일상적인 사물들과 사소한 기억들마저도 벽화적인 크기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지 않은가? 혹은 스노볼처럼 영원한 의미공간에 보존되고 있지 않은가? 흘리지 않은 눈물조차도 대형 크리스탈로 표상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녀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우리의 범상한 정원들보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 것인지!     

 

06.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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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6 1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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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의 전시회 소식을 접하고 주최기관인 소마미술관의 보도자료를 옮겨오려고 했으나, 오마이뉴스에 더 잘 정리된 기사가 있기에 그걸 대신 가져온다. 작성자는 김형순 기자이며 나는 기사에 따로 손대지 않았다. 이전에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지의 논리>와 관련하여), 나의 관심은 소쉬르의 언어학과 그와 동시대인인 클레의 방법론 사이의 유사성, 혹은 상관성에 놓여 있다(매개가 되는 것은 음악, 음악적 컴포지션이다). 그럴 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컴포지션 추상화들이다. 아무려나 국내에서는 최초의 전시회라고 하니까 언제 시간을 좀 내야겠다. 아래는 소마미술관이 내건 간략한 작가 소개이고(강조는 나의 것), 바로 이어지는 것이 오마이뉴스의 기사이다.

-환상적이고, 재치 있으면서, 때로는 괴기스럽기도 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 파울 클레(1879-1940)는 현대 미술가 중에서도 가장 지적이고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준 작가이다. 스위스 베른 근처에 있는 뮌헨부흐제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화가였으며, 1920년대에는 독일의 조형미술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폭넓은 독서를 하였고, 철학, 식물학, 생물학, 인류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광범위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화가에게도 '폭넓은 독서'는 필수적이다). 그에게 있어 풍부한 이미지의 원천은 자연이었다. 그는 바다나 산, 들을 찾았고 조개껍질, 식물, 꽃, 나무 등을 관찰했다. 또 캔버스뿐 아니라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으며, 유화, 템페라, 수채, 과슈, 동판, 드로잉 등 다양한 기법들을 실험했다.

-클레의 작품은 완전히 추상적이지도, 완전히 형상적이지도 않다. 그의 작품은 고도로 숙련된 드로잉 기법을 보여주는 한편, 색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소품들로, 기본적으로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심원한 지성으로 파악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읽고,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원초적인 상징과 형태를 창조해냈다. 그의 미술은 시, 음악, 그리고 꿈에 가까우며, 한눈에 들어오는 미술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게 하는 미술이다. 마치 하나하나가 작은 보석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무려 9,100여 점에 달하는 클레의 작품들은 몇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우리만큼 다양하고 다면적인 미술세계를 이룬다.

 
▲ 올림픽공원 옆 미술관, 마치 영화 제목 같다. 현대적 건축물이 조각 공원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 뒤로 움직이는 백남준 작품 '쿠베르탱'이 자리 잡고 있다.
ⓒ 김형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미술관이 이름을 바꾸고 새로 단장한 '소마(SOMA)미술관'에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동화적 환상과 다양하고 실험적인 형태와 색채를 표현한 20세기 미술의 거장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눈으로 마음으로' 전이 오는 7월2일까지 국내에서 처음으로 판화, 유화, 수채화, 드로잉 등 약 60점을 선보이며 열린다.

 
 
  파울 클레(Paul Klee) 생애 및 프로필  
 
 
 
▲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여념이 없는 파울 클레
1879 12.18 스위스 뮌헨부흐제 출생
1898 뮌헨 이사.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
1906 릴리 슈툼프와 결혼
1910 첫 전시회 56점(베른, 취리히, 바젤 미술관)
1912 F. 마르크, W.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 그룹전' 참가
1914 마케 등 친구들과 튀니지 여행
1920 '클레 회고전'에 362점 출품(골츠 갤러리)
1921 '바우하우스'에서 강의 시작
1925 '바우하우스' 데사우로 이전
1929 '탄생 50주년전'(뉴욕 근대미술관, 베를린 국립미술관)
1931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
1933 나치 압력으로 교수직에서 해고
1935 희귀병인 진행성 피부경색증 발병으로 다작 시도
1937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에서 100여점 압류
1938 스위스 시민권 획득
1940 6.29 스위스에서 사망
 
 
파울 클레는 우리가 익히 들어왔고 미술 교과서에서 많이 봐왔지만 뚜렷한 대표작이 연상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술의 본질을 추구했는지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그를 '그림의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지적인 요소와 함께 시적 상징성과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이 그림 속에서 잘 구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울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Münchenbuchsee) 음악가 집안에서 1879년 12월 18일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클레는 성악가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음악 교사가 된 사람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프리크도 슈투트가르트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후에 결혼한 릴리 슈툼프도 피아노 교수였다.

그는 이렇게 음악의 한복판에서 살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미술을 택했다. '그림 한 점에 대하소설이 담겨 있다'든가 '예술의 꽃은 단연 미술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는 결국 스스로 제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음악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과 경험을 미술 안에서 통합시켰다.

그의 작품이 조금 괴기하고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선묘와 추상적 기법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서정적 분위기 연출하는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데다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적 요소가 공상적이고 우화적인 요소로 승화되어 그림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리라.

 
▲ '미래의 남자(1933, 좌)', '비탄에 빠짐(1934)' 클레 작품은 독특한 선묘와 구도와 색채 이 모든 것들이 신비하고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하여 관람객 마음을 사로잡는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갖가지 구도와 색채 실험

클레는 평생 일기를 거르지 않고 쓸 정도로 성실했고 지적 호기심을 불태우는 학생처럼 살았다. 철학, 식물학, 인류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폭넓은 독서와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산과 바다, 꽃과 나무와 물고기 등 주변의 사물을 예의 관찰하였고 그 속에서 풍부한 이미지를 발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르네상스 화가들처럼 해부학에서 푸생이나 다비드, 밀레 등 고전주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탐구했다. 또한 이글거리는 태양 이면에 인간의 번뇌를 표현한 고흐, 현대 회화를 연 세잔, 야수파의 선각자 마티스, 북유럽의 표현파 특히 입체파를 한 단계 끌어올려 오르피즘의 창시한 들로네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 '별들과 함께(1923)' 판지 위에 종이에 연필과 수채. 클레의 9천여 점 작품이 다 천차만별이지만 이 작품도 이채롭다. 엷고 진한 색채 간 대조와 어린이처럼 장난기 넘치는 해학과 유머가 돋보인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그림 재료도 캔버스,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 복합 매체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안료로는 유화는 물론, 불투명한 수채 물감인 구아슈, 동판, 드로잉, 그리고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썼다는 템페라 물감까지도 두루 시도했다.

무려 9146점에 달하는 작품은 제작한 클레는 사물의 원리를 다각도로 실험하고 검사하는 과학자 같은 작가로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림 하나도 모방하지 않으면서 다르게 그린 것 같다. 그는 이런 각고 끝에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미술의 공간성 실험이나 시각적 확대, 현대적 조형성을 창조하여 20세기 미술계의 거장이 되었다.

클레는 1912년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 및 프란츠 마르크와 알게 되어 상호 교류했으며 그들의 전위파 그룹인 '청기사파(Blaue Reiter)' 전시회도 참가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쾰른, 베를린 등 유명 사립미술관에서 초대를 받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 '언덕(1914, 하좌)', '색채 띠에 연결된 추상적 색채의 수채(1914, 하중)', '그리고 아, 나를 더욱 쓰라리게 하는 것은 당신이 내가 가슴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1916, 상좌)' 글씨를 채색화로 형상화한 작품, '여러 층의 작은 구조물(1928, 우)' 튀니지 여행 후 채색의 확연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파울클레미술관
ⓒ 김형순
 
2년 후 30대 중반이 된 클레는 겨우 12일간 짧은 여행이었지만 어린 시절 친구인 루이 무아예와 동료 화가인 마케와 함께 튀니지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지중해 해안의 이글거리는 색이 주는 눈부신 광채에 반해 버렸다. 이 여행은 그의 미술을 자연 그대로의 현상에 대한 묘사로부터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는 더 강력한 추상적 화풍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본다면 극과 극이 통하나 보다. 아프리카의 가장 원시적 색채와 미술이 서구의 가장 전위적 미술의 원형이 된 것이다. 하긴 피카소나 마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첨단 미술을 대표하는 입체파나 야수파도 결국은 아프리카 부족의 원시 조각이나 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 '수염이 있는(1939 좌)', '빛에 비추어진 나뭇잎(1929)' 두 작품이 10년간의 간격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구상에서 보다 확대된 추상으로 변모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추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미술 개념에 더 가까우리라.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보이지 않는 색채와 소리까지 그리기

이는 이번 전시회 부제인 '눈으로 마음으로'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냥 '눈으로 보는 관점'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누어 봐야 한다는 점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2층 전시실에 붙어 있는 클레의 명구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는 말과 전시 표제어는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대한 해석을 이 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박윤정씨에게 부탁드렸더니 그는 "그림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심상의 표현"이라는 명쾌하고 멋진 해석을 내놓았다. 클레다운 이 명구에 전문가다운 해석이다. 이런 해석을 듣고 보니 이런 말이 떠오른다. "현대 미술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더 나아가 들리지 않는 것도 그리는 것이다."

 
▲ '피라미드(1932)' 판지 위에 종이에 펜과 수채.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넘치는 작품으로 선과 면, 형태와 색채만으로 조형 효과를 최대화했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위에 '피라미드(1932)'를 보게 되면 사람의 이목구비가 약간 보일 정도로 완전한 추상화는 아니지만, 이목구비를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선과 면이나 삼각형이나 사각형 같은 형태 그리고 여러 밝기의 붉은 색, 고동색 등 색채를 통해 사물의 이미지를 더 실감나게 보여준다. 바로 이런 것이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적 미술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나치 박해와 불치병과 투쟁

한편 40대에 들어선 클레는 '바우하우스' 조형예술 학교에서 후배 양성에 힘쓴다. 당시 그의 별명은 '바우하우스 부처'였다고 하니 그의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구도자적이었을 거라는 추리해 볼 수 있다. 이 학교가 바이마르 공화국 언론과 당시 따가운 여론에 밀려 1925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1931년 대학을 뒤셀도르프로 옮겼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아 1933년엔 나치에 의해 해임된다. 게다가 1937년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에서 102여점 자신의 작품이 압류하는 등 나치 탄압이 극에 달하자,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 냄새가 난다"라 말을 남기고 스위스로 귀화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가장 잔인한 한 시대의 생생한 증언자가 되었다.

 
▲ '눈(1938)' 삼베에 파스텔. 캔버스 대신에 삼베를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그는 이렇게 그림 재료에서도 두루 다각적 실험을 시도했다. 한눈으로 보이는 것을, 다른 한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1938년 작 '눈'이라는 작품은 당시 분위기를 풍긴다. '한눈으로 보고 다른 눈으로 느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어라'라는 메시지도 포함된 것 같다. 제작 연도로 봐서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로 나치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을 것 같다.

클레는 말년에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희귀병인 피부경색증를 보이자 반대급부인지는 몰라도 놀라운 정도로 많은 작품을 쏟아 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초기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선묘와 다르게 병마로 손길이 무뎌지면서 선과 면이 단순해지고 굵어졌지만 원숙하고 중후한 아름다움으로 넘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그림자를 작품 전반에 담은 듯하다.

 
▲ '밤의 암탉(1939)' 작고 1년 전 작품으로 검붉은 바탕에 굵고 검은 선이 더욱 완숙해 보인다. 작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도 감지되는 것 같다. 이 그림은 구상적 요소를 해체하여 추상적 바탕에 담았다. 추상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클레 그림은 때론 추상 화가답지 않게 고전적 느낌을 준다는 지적도 받는데, 이는 그가 미술과 음악, 추상과 구상, 서구적 미술과 비서구적 미술, 천진난만함과 괴기함, 차가운 지성과 따뜻한 서정 등 경계를 넘나들며 퓨전적 요소를 많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클레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나중에 배워야 하는 작가라고 이 미술관 큐레이터 박윤정씨는 귀띔해 준다.

 
▲ '소문(1939)' 판지 위에 페이스트에 유채. 극도로 단순화한 형상과 구도를 띠고 있으며 돌고 도는 소문처럼 아래 작은 바퀴처럼 인생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생사화복을 초월하여 말년의 대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림 같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한국 작가 중 그의 영감을 많이 받은 분이 장욱진 화백이 아닌가 싶다. 새와 나무가 많이 등장하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서 만나는 넉넉하고 한가로운 마음과 우화적이고 해학적 형식으로 표현한 장욱진 그림은 들여다볼수록 반추상이긴 하나 도교 풍의 한국판 클레 같다.

클레의 '보이게 하는 그림'과 장욱진의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그림'이 동서를 넘어서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니 클레가 먼 나라 작가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06. 04. 18.

 

 

 

  


P.S. 오래전에 호암아트홀에서 있었던 장욱진 전시회가 기억난다. 관련서와 기념품을 샀던 기억도. 그리고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던 기억도. 10년도 더 된 기억 같다. '도쿄풍의 한국판 클레'라... 그러고 보니, 닮은 점도 없지 않다. 한데, 클레도 자기 가족의 그림을 그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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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4-1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욱진 전시회 기념 도록과 슬라이드 필림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 님과 제가 같은 공간에 있었겠군요.
아참, 클레 이 화가를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는 강금실씨가 좋아한다죠? 아마두.
일단 퍼가요

로쟈 2006-04-18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같은 공간에 있었다니 뒤늦게 영광입니다.^^

비자림 2006-07-17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파울 클레의 그림을 좋아해요. 살짝 얻어 가서 찬찬히 다시 읽을게요. 감사합니다.^^
 

 

 

 

 

폰카로도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내가 사진에 대해 특별한 조예를 갖고 있을 리 없다. 몇 사람의 사진가와 사진의 역사에 관한, 누드 사진의 역사에 관한 책 등이 내가 갖고 있는 전부이다. 물론 롤랑 바르트나 수잔 소택의 사진론, 그리고 존 버거의 사진 에세이 등도 갖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외한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진 예술의 거장이라는 에드워드 웨스턴의 이름을 현재 열리고 있는 그의 전시회 소개 기사를 읽고 이번에 처음 알았을 정도의 문외한 말이다. 어딘서가 보았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는 티나 모도티와의 커플 공동전에 대한 소개 기사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옮겨놓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또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비록 늦게 알게 되었으나 두고두고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옮겨오는 기사는 오늘자 한국일보(2006. 04. 10)의 것으로 작성자는 조윤정 기자이다.

 -“멕시코를 떠나는 것은 티나를 떠나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20세기 사진 예술의 거장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은 1926년 멕시코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며 작업노트 한 켠에 이렇게 끄적거렸다. 노트 속의 티나는, 그가 4년 동안 멕시코에 머물 때 함께 한 제자이자 연인으로 멕시코 혁명에 참가한 티나 모도티(1896~1942)였다.



-둘은 1919년 처음 만났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티나 모도티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웨스턴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하고 사진도 배웠다. 천연두로 남편을 잃은 모도티는 1923년 전쟁과 혁명, 변화의 혼돈으로 뒤엉킨 멕시코로 스승 웨스턴과 함께 건너간다. 당시 웨스턴은 부인을 둔 유부남이었다. 둘은 그곳에서 사진관을 함께 운영하고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에이 시케이로스, 프리다 칼로 등 아방 가르드 예술가와 만나 멕시코 르네상스를 주도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사른다. 스승과 제자였던 둘은 그 사이에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정규 사진 교육을 받지 않은 모도티의 사진 기술은 거의 웨스턴으로부터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웨스턴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모도티의 대표작 ‘장미’는 장미가 카메라 렌즈 속에서 하나의 조각처럼 변신하는데 이것은 누드, 사막, 조개 등을 인위적 조작 없이 조리개 작업 만으로 세밀하고 분명하게 포착하는 웨스턴의 작품과 흡사하다.

-웨스턴의 ‘사막 위에 여자’는 사막 사진 위에 누드 사진을 잘라 붙인 것처럼 대상이 극명하다. ‘누드’는 솜털 하나와 털이 난 구멍, 살결까지 보일 정도로 세부 묘사가 날카롭고 정확하다. 웨스턴은 이들 작품을 통해 사진의 기계적 사실성을 극대화했다. 여자의 몸과 바이올린, 물위에 떠 다니는 배의 형상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웨스턴은 카메라가 사람의 눈보다 명확하고 세밀할 수 있다고 믿고 그 스타일로 작업에 몰두했다.



-모도티가 정치, 사회 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사회적 이슈로 활동 범위를 넓히자 웨스턴은 심한 거부감을 느끼며 끝내 결별한다. 그러나 티나 모도티는 사랑을 잃고도 차가운 정치적 신념으로 꿋꿋이 살아가면서 멕시코 체류 10년 동안 역동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가난, 고통, 힘겨운 노동 등을 담아낸 모도티의 사진에서는 정밀함과 우아함이 독특하게 묻어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이데올로기 논쟁 때문에 70년 대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으나 91년 ‘장미’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당대 최고의 사진 경매가인 16만5,000달러에 낙찰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모도티와 헤어지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웨스턴은 피사체의 사실성을 더 강조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조개’(1927년)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정교한 조명으로 사진 속 조개 껍질이 금속성 기계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구겐하임 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은(1936년) 최초의 사진 작가였으며,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다양한 예술적 시험을 시도했다.

-둘의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인 스트레이트 사진은 지금 ‘사진의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 뤼미에르에서 전시되고 있다. ‘사진의 전설’ 전은 5월 7일까지 계속된다.

06.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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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隣) 2006-07-1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 님 서재를 자주 열람하는 철학도입니다. 나온다던 순수이성비판 재번역 출간 소식에 댓글을 따라 님의 서재까지,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퍼가고 싶어 망설이다 인사드립니다. 잠시 거닐어보니 저는 인문학도를 명패만 걸고 있었군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글구, 딴엔 예술을 짝사랑하는 철학도라 멀리 사는 데도(부산) 그 비싼 돈을 주고 클레 전을 보러갔었지요. 클레는 제가 좋아하는 벤야민이나 들뢰즈가 좋아하는 작가라... 들뢰즈가 여러 차례 얘기하는 클레의 책,<현대 예술 이론>을 누가 번역 좀 하면 좋으련만.. 그 페이퍼도 퍼갑니다.

로쟈 2006-07-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을 짝사랑하는 철학도시라면 예출철학을 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더불어, 클레의 <현대 예술이론>도 번역해주시면 저도 좋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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