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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새 번역본들이 나온 김에 <신곡> 번역비평에 관한 예전의 기사를 다시 읽어보았다. 교수신문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1, 2권에는 아직 실리지 않았다(올 4월에 나온 2권에는 왜 빠졌을까?). 번역 비평의 필자가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번역본을 낸 김운찬 교수이다. 적어도 지적된 내용들은 교정돼 있겠다. 그러니까 아래 기사는 이번에 나온 김운찬본과 박상진본에 대한 평가는 다루고 있지 않다(그건 당분간은 독자의 몫인 듯싶다).

교수신문(06. 12. 26) 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57) 단테의 『신곡』 

아마 ‘신곡’ 처럼 번역자를 시험하고 힘들게 하는 작품은 드물 것이다. 가장 큰 이유로 상당한 분량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곡’ 은 중세 유럽의 지식을 총체적으로 집약하고 있다. 수백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에피소드들, 전설, 고전 신화, 중세의 철학과 신학, 천문학과 지리 등에 대한 이해 없이 단테의 저승 여행을 뒤따라가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원본이든 번역본이든 대부분의 판본에는 많은 역주와 해설들이 덧붙여져 있다.

또한 ‘신곡’ 은 다양한 알레고리와 은유, 다의적인 표현들을 특징으로 한다. 거기에다 3행 연구(聯句), 각운, 11음절 시행(詩行) 등의 운문 형식과 음악성, 리듬까지 작품의 일부를 이룬다. 훌륭한 번역은 당연히 그 모든 것을 고려하고 최대한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쉽게도 우리 나라에는 그런 번역본이 아직 나와 있지 않다.

단테는 개화기에 이미 소개되기 시작하였으나 ‘신곡’의 완전한 번역본이 나온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최민순 신부가 옮긴 판본(경향잡지사, 1957-59년)이다. 그 이전에 혹시 부분적이거나 전체적인 번역본이 나왔는지 필자로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최민순의 번역본에서 저본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탈리아어 원본이 아니라 영어나 스페인어 번역본에서 중역하였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후 1970년에 들어와서야 임명방의 번역본이 나왔고, 뒤이어 여러 가지 번역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거의 모든 세계문학 전집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다. 대략 열거하더라도 유영(1972), 하병호(1974), 허인(1975), 이영숙(1976), 한형곤(1978), 강인웅(1977), 정인섭(1982), 문병선(1983), 최현(1988), 구자운(1991), 김의경(1991), 정노영(1993), 김문해(1997), 최현(1997), 유한준(1998) 등의 번역이 있는데, 출판 연도는 판본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때로는 한 번역자의 작업이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부분 번역의 저본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단테의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옮긴 것은 임명방, 허인, 한형곤의 번역뿐이다(*그러고 보니 나는 이 번역본들을 모두 갖고 있다). 유영이 10여 종의 영어 번역본과 이탈리아어 원본을 참조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나 여전히 모호하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일부 번역본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똑같은 경우도 있다. 가령 강인웅과 정인섭의 번역본은 분명히 번역자가 서로 다른데도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 외에 번안 작품들도 많다. 유한준(1998), 김혜니(1999), 정미옥(2005)은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해 축약하여 번안하였다. 최요한(1994)은 아예 제목을 ‘소설 신곡’이라 붙였으며, 최근의 번안 작품으로 박상진(2005), 최승(2005)을 들 수 있다. 번역과 번안을 구별하는 잣대는 원본에 대한 충실함일 것이다. 번안은 원본을 임의적으로 줄이거나 덧붙임으로써 기본 골격만 유지하고 나머지 부분을 자의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물론 ‘신곡’ 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번역과 번안을 뚜렷하게 구별하기 어렵지만 간단한 기준이 하나 있다. 번안은 바로 원본의 시행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행의 숫자를 아예 표시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기본적인 요건을 무시하는 상당수의 번역본들은 번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옮겼다고 해서 언제나 중역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다. 최민순의 경우처럼 중역본이 오히려 원본에 충실한 경우도 있다. 거의 모든 번역본이 드러내는 문제점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우선 단테의 텍스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다. 번역에 앞서 해석의 단계에서 이미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신곡’ 을 읽고 어렵다고 말하는데, 원본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대부분 번역자의 이해 부족이나 미숙함이  원인이다. 그 결과 두 번째 문제점으로 우리말의 가독성이 떨어진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민순과 한형곤의 번역본이 무난한 편에 속한다. 최민순 역은 멋들어진 우리말 용어들과 함께 시인으로서 번역자의 모습을 보여주듯이 시적인 표현들이 돋보인다. 한형곤 역은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자세하고 풍부한 해설과 역주를 자랑하며 단테의 저승 구조를 보여주는 도해와 그림들까지 제공한다. 둘 다 비교적 원본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이따금 가독성이 떨어지는 표현들이 눈에 띄는 것이 흠이다. 원본의 자구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우리말 표현이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번역본들의 경우 판본마다 차이가 있지만 번역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 번역본에서 공통적인 실수나 오류가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전의 번역본이 이후의 번역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신곡’ 의 경우 그런 경향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지적하자면 ‘지옥’ 21-22곡의 에피소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뜨겁게 끓어오르는 역청(瀝靑) 속에서 삶아지는 탐관오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강둑에 있는 악마들이 고통을 가한다. 그런 악마들의 형벌 도구 또는 무기를 단테는 raffio, uncino, runciglio 등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하는데, 모두 ‘갈고리’ 또는 ‘갈고랑쇠’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본들은 거의 대부분 ‘(쇠)갈퀴’나 ‘작살’로 번역하고 있다.

최민순의 번역본은 ‘쇠갈퀴’, ‘작살’, ‘갈쿠리’로 옮기고 있는데, 여기에서 갈쿠리는 갈고리의 사투리 표현일 것이다. 어쨌든 이 세 용어는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킨다. 한형곤은 주로 ‘쇠갈퀴’와 ‘작살’로 옮겼지만 뒤에 23곡 140행에서 ‘갈고리’로 표현하고 있다. 임명방은 ‘갈퀴’로 옮겼으며, 허인은 앞의 해설에서 ‘갈고리’로 설명한 다음 정작 본문에서는 ‘갈퀴’로 옮기고 있다. 유영은 ‘갈고리’로 번역하고 있지만, ‘쇠스랑’도 함께 사용한다. 또한 강인웅과 정인섭의 동일 판본이 ‘갈고리’로 옮기고 있지만, 지나친 생략과 축약으로 번역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그 외에는 거의 모두 ‘(쇠)갈퀴’ 또는 ‘작살’로 되어 있다. ‘갈고리’와 ‘갈퀴’, ‘작살’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며 전체적인 흐름에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원본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때로는 사소한 차이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영어 번역본들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영어 번역본들은 여러 가지 용어로 옮기고 있는데, 롱펠로Longfellow는 rake, hook, grapnel, grappling-iron으로, 세이어즈Sayers는 prong, hook, grappling-iron으로 번역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 번역한 맨덜봄Mandelbaum은 prong과 hook으로, 코터Cotter는 여기에다 grappling-hook, fork, pitchfork 등을 덧붙여 옮겼다. 이탈리아어 원본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피하기 위하여 다양한 표현을 찾았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갈고리’보다 ‘갈퀴’에 가까운 rake와 prong을 사용하였다. 참고로 ‘신곡’ 의 탁월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꼽히는 구스타브 도레의 판화에서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삼지창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21곡 100-101행에서 악마들 중의 하나가 두려움에 떠는 단테를 가리키며 자기 동료에게 “Vuo' che 'l tocchi in sul groppone(내가 저 녀석의 어깻죽지를 건드려 볼까)?” 하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에서 groppone는 ‘어깨’를 가리키는데, 우리말 번역본들은 하나같이 ‘궁둥이’나 ‘엉덩이’로 옮기고 있다. ‘어깨’로 번역한 판본은 하나도 없다. 악마들의 천박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그런 저속한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히 원본에서 멀리 벗어난다. 이것도 분명히 영어 번역본들의 영향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엉덩이’로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롱펠로, 세이어즈, 맨덜봄, 코터의 번역본도 하나같이 rump 또는 bottom으로 옮기고 있다.

출처가 불분명한 번역도 있다. 21곡의 137-138행에서 악마들이 자신들의 두목을 향하여 신호를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드러낸 이빨 사이로 혓바닥을 내밀어 보이는 천박한 몸짓이다. 이상하게도 허인을 비롯하여 여러 번역본들에서 “신호로 눈까풀을 까뒤집어 보였다”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 연원과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번역본들 사이의 상호 영향이나 모방 때문일 것이다. 이런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번역본에서 오역과 비틀린 문장들이 넘친다. 특히 ‘신곡’ 의 경우 기존 번역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좀더 원본에 충실하고, 아울러 우리말 표현에 보다 잘 어울리는 새로운 번역본이 절실히 요구된다.(김운찬/ 대구가톨릭대· 기호학)

07. 08. 12.

P.S. 겸사겸사 동아일보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중 <신곡>에 대한 해제도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5. 06. 15)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62>신곡-단테

2004년 11월 4일은 유럽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모인 유럽연합(EU) 가입 28개국 국가원수들은 이날 대통령궁에서 EU헌법 초안에 서명했다. 이 헌법은 각국 국회나 국민투표를 거쳐 2006년 11월 1일에 발효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행사가 교황청에는 참으로 씁쓸한 날이기도 하였으니, 유럽이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구가 헌법 서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교황의 끈질긴 주장을 유럽 정상들이 묵살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서문에 “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인문적 유산”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패권 다툼이 유럽 전체를 황폐하게 하던 중세에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정립한 인물이 다름 아닌 시인 단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더불어 시성()이라는 월계관을 쓴 이탈리아 시인 알리기에리 단테는 겔프당과 기벨린당의 정쟁으로 내란이 끊이지 않던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권위를 확립함으로써 유럽에 궁극적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려던 정치적 노력이 실패하자 역사의 지평을 넘어 세계사 전체를 종교철학의 시각으로 재정리하여 3부 100곡으로 이루어진 ‘신곡()’을 남겼다.

신곡은 단테라는 한 영웅이 육신을 입은 채로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종교적 서사시이다. 그가 탐험하는 명계의 처음 두 곳은 이성()의 상징인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고 세 번째는 신앙()의 상징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는다. 단테가 아홉 살에 처음 보았고 18세에 다시 해후하였으나 딴 남자에게 시집가 불과 24세의 나이로 죽은 한 여인이 구원의 여성이 되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서사시는 “여기 한숨과 눈물과 드높은 통곡이 별 없는 하늘에 메아리치는” 지옥에서 시작하여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여 있는 것을. 그리고 만사를 한결같이 움직이는 바퀴와 같이 해와 별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돌리고 있더니라”는 천국으로 끝난다. 인류사가 인간의 의지와 신의 사랑이 엮어내는 승리의 기쁨 속에 완성된다는 낙관적 역사관을 보여준다. 전의 중세인이 대자연()과 성서()라는 두 편의 책에서 인생과 신을 읽었다면 단테는 신과 인간이 함께 엮는 역사()라는 책으로 인생을 읽었다.

그래서 지옥의 멸망된 족속으로 드는 길은 인생과 자기 사회에 대한 역사적 태만과 해악이며, 실상 지옥은 인간 자유의지의 개별적 집단적 행사를 신이 영원히 존중함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정의는 내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이어 그 극한 지혜와 본연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는 영겁까지 남아 있으리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 그리고 “세계에서 세계로 이렇듯 내 길잡이의 자취를 따라 두루 찾게 해 주신 그 평화의 이름으로 나는 일을 하리라”는 시인의 동경대로 한반도에 평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의 시집을 펴든다.(성염 주교황청 대사·전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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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pus 2007-08-1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한 가지 의문이 들어서 여쭙습니다.
로쟈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실어주신 서평 내용 가운데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김운찬씨가 최민순 신부 번역본을 중역이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민순본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당장 확인을 할 수가 없어서 좀이 쑤시네요.
고 최민순 신부는 라틴어부터 로망스어 전반을 다 섭렵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중역을 해야 할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 싶네요.
김운찬씨가 단순히 '짐작'으로 중역이라고 단정한다면 고인과 독자들에게 굉장히 큰 실례가 아닐까 합니다. 어찌됐든 최민순본 이후로 그 판을 뛰어넘을 만한 번역은 (제 생각엔)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참고로 최민순 신부의 다른 번역본들 <고백록> <시편과 아가> 등은 판본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두서없이 죄송합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로쟈 2007-08-1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민순본을 안 갖고 있어서(갖고 있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사정은 모르겠구요, 김운찬 교수도 '짐작'을 적은 것이니 좀더 확인이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쿠자누스 2007-08-1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을유문화사에서 1987년 9월 10일 초판 인쇄한 최민순 본 <하>권에 한 형곤 교수의 해설이 붙어 있는데, "이탈리어를 모르던 때 단테의 문학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최 신부의 번역서 덕분"이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2005년 한형곤 본은 " 1978년 처음으로 출판되어 1990년까지 널리 읽혀왔으나, 중간에 출판이 중단되어 독자들은 『신곡』을 이탈리아어판 완역본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번역판 외에는 이탈리아어판을 번역한 다른 책이 나타나지 않[았다]"( http://www.libro.co.kr/Product/BookDetail.libro?goods_id=0100006070202 )고 합니다. 최 신부가 중역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글은 이해할 수 없네요. 을유문화사 최민순 본은 원본을 밝히지 않았씁니다.

로쟈 2007-08-14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을유문화사본의 해설이라면 평자도 참조했을 텐데, 중역 얘기가 나오는 건 의문이군요...

쿠자누스 2007-08-15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이 '중역'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의 다른책에는 판본이 밝혀져 있는데 그 책에만 없으니까요. 중역이 아니라면 한형곤 본을 첫 번째 원전 번역이라고 소개한 글이 문제가 되겠고요.

로쟈 2007-08-1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스페인어본 얘기들이 나온 듯도 합니다...
 

내일 아침신문을 미리 훑어보려니까 눈에 띄는 기사가 있다. '한국번역비평학회'가 출범한다는 소식이다. 우리 출판문화에서 번역서 갖는 비중(인문서의 경우 거의 절반 이상이지 않나 싶다)을 고려할 때 오히려 뒤늦은 감이 들 정도이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된 번역문화의 정착을 위해서 필요한 첫걸음이 내디뎌지기를 기대한다.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는 않지만, 번역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면서 번역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도 개선되고 번역 업적에 대한 학계의 인식도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찾아보니, 지난달초에 담비에도 소개기사가 게재되었었다.

   

한국일보(07. 03. 02) "번역 업그레이드” 학술적 비평 첫 시도

국내 발행 도서 중 번역서 비중이 30%를 훌쩍 넘었지만 번역의 질을 담보할 장치는 아직 미비하다. 최근 몇몇 교수와 연구기관이 국내의 낮은 번역 수준을 비판했고 일부 네티즌은 오역 사례를 꾸준히 지적하고 있지만 대체로 산발적·개인적 차원에 그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번역 비평을 표방한 첫 학술 단체인 한국번역비평학회(회장 황현산 고려대 교수)가 3일 창립학술대회를 열고 본격 출범한다.

◆ 단순한 오역 비평을 넘어

어문학 교수들이 주축을 이룬 번역비평학회는 번역학 체계 정립과,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 전반의 번역물 평가기준 마련을 목표로 하고 있다. 번역 실무나 통번역 교육에 초점을 맞춘 기존 번역학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학회 이사인 이영훈 교수(고려대)는 “지금까지 번역은 학문적 활동보다 기술적 작업으로 평가 받아온 게 사실”이라며 “해묵은 오역시비의 덫에 걸린 번역비평 방법을 다양화·체계화해 번역 수준을 향상시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학회는 번역자의 주체적 해석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번역 이론 발표를 맡은 전성기 고려대 교수는 “번역자는 원텍스트를 정보 차원에서 읽는 것을 넘어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며 작품을 재구축하는 번역문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문 번역가이자 또 다른 발표자인 정혜용 박사는 “(원문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은 더 이상 번역의 규범이 될 수 없다”면서 “작품마다 지닌 고유한 논리를 읽어내 자신의 모국어로 되살리는 존재가 번역가”라고 주장했다.

국내 정상급 번역가들도 학술대회에 초청된다. 황보석(영어) 김난주(일본어) 이인숙(불어) 권미선(스페인어) 등 각 언어권 작품에서 손꼽히는 번역가들이 ‘번역 환경과 해결방안’ ‘번역의 어려움’ 등을 주제로 발표하고 참석한 학자들과 토론한다. 평소 번역 환경의 문제점을 비판해왔던 박상익 우석대 교수와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도 참석한다. 이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번역비평의 대상인 일선 번역자들에게 일방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단 현장의 여건과 애로사항부터 살피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 번역비평 무크지 발행

학회는 한국퀘벡학회와 공동으로 11월2~3일 ‘퀘벡과 번역’이란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영어·불어가 공용어인 캐나다는 일찍이 번역 이론과 실무가 발달했고, 특히 퀘벡은 번역비평 부문에서 가장 선구적인 지역이다. 또 학회는 올해부터 1년에 두 차례 정도 번역비평 무크지를 펴낼 계획이다. 학술이사인 조재룡 성균관대 교수는 “번역 관련 대담, 번역비평 에세이 등 딱딱하지 않은 내용으로 꾸밀 예정”이라며 “유명 고전작품의 여러 번역본을 비교 평가하고 신간 번역서를 비평하는 코너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번역 현장 일각에서 학회가 공언한 비평 활동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김난주씨는 “번역가의 언어 선별은 병아리 감별사의 작업과 닮았다”며 “번역가 개인의 감각적 역량에 획일적 기준을 적용한다면 결과적으로 무리가 따를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표정훈씨도 “학계에서 번역을 진지하게 다루겠다는 것은 바람직하다”면서도 “향후 학회의 비평 활동이 열악한 번역현장 여건을 도외시한 채 이뤄진다면 오히려 번역에 대한 신뢰만 더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훈성기자)

담비(07. 02. 05)  번역비평학회 창립 기념 학술대회

번역과 비평이 만난다? 늘 쏟아졌던 번역물이지만, 지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번역 교양물들이 쏟아지고 있는 시대다. 번역은 반드시 오역논란을 부른다. 번역이 어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불성실하게 이뤄진다는 증거는 날이 갈수록 더해져가는 느낌이다. 출판계의 대필관행과 학계의 표절관행으로 우울한 이 시점에 번역비평을 본격적으로 표방하는 학자들이 있어 반가운 마음이다.

오는 3월 3일 한국번역비평 학회가 공식 창립되면서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번역비평, 이대로 좋은가?”를 주제로, 한국문학번역원, 고려대학교 언어문화연구원, 한국학술진흥재단 번역인문학 프로젝트 연구팀과의 공동 개최로 진행될 3월 3일 학술대회는 1부 ‘번역 이론’, 2부 ‘번역 실천’, 3부 ‘번역 현장’으로 구성되어, 국내 번역 현황을 점검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번역이론의 필요성과 출판 현황 전반을 살펴볼 예정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학회 창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학술원 회원이신 원로불문학자 정명환 교수와 한국문학번역원 윤지관 원장의 기조강연으로 시작된다. 번역이론 정립을 위하여 마련된 1부에서는 다년간 번역문법과 번역학 정립을 위해 고군분투해온 전성기 고려대 교수와 파리 통번역대학원 박사로 번역 이론 및 실천에 왕성한 활동을 보여온 정혜용 박사의 발표가 마련되어 있다.

‘번역 실천’을 주제로 마련된 2부에서는 황보석, 김난주, 이인숙, 권미선 등, 국내 최고의 번역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번역의 경험과 어려움을 함께 논한다. 한편 3부에 발표가 마련된 표정훈 출판평론가와 박상익 교수는 정확한 진단과 날카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번역 전반의 문제점을 숙고해온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논객들이다. 이와 아울러 분과별 발표가 진행되기 전, 한국불어불문학의 발전에 초석을 놓은 학자로 평가받는 정명환 교수와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의 기조연설, 번역비평학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황현산 고려대 교수의 축사가 마련되어 있다.  

한국번역비평학회에서는 학술대회와 동시에 학술발표회의 원고들을 수합하여 전문 무크지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소장학자들의 번역전반에 관한 성찰을 중심으로 무크지를 운영할 것이며, 국내를 대표할 수 있는 번역가들과 번역이론가들의 대담도 기획 중에 있다.

11월 2일-3일 열리는 학술대회는 한국퀘벡학회와 공동으로 주관하여 국제학술대회로 규모를 확장할 예정이다. 인문학 위기 타개와 번역 비평의 활성화를 위해 지난 해 10월 고려대학교에서는 번역인문학 국제 학술대회가 개최된 바 있으며, ‘퀘벡과 번역’이란 주제로 열리는 11월 국제 학술대회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다 폭넓고 다양한 국ㆍ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한 자리에 모을 예정이다.(리뷰팀)

학술대회 세부 일정

09:30-10:00 : 접수

1부 : 개막 행사 (10:00 - 11:20)  사회 : 한대균(청주대)
10:00 - 10:10 : 개회사 - 황현산(번역비평학회장, 고려대)
10:10 - 10:40 : 기조강연 1 - <번역에 관한 몇 가지 고찰>, 정명환(학술원회원)
10:40 - 11:10 : 기조강연 2 - <번역의 정치성>, 윤지관(한국문학번역원장)
11:10 - 11:20 : 휴식

2부 : 번역이론 (11:20 - 12:40)   사회 : 이영훈(고려대)
11:20 - 12:00 : <번역문학비평을 위하여>, 정혜용(서울대 불문과)
   토론자 : 김윤진(한국문학번역원)
12:00 - 12:40 : <인문학번역과 번역문법>, 전성기(고려대 불문과)
   토론자 : 송태효(고려대 레토릭연구소)

* 12:40 - 14:00 : 중식 (고려대 국제관 1층 교직원식당)

3부 : 번역 실천 (14:00 - 16:40)  사회 : 김재혁(고려대)
14:00 - 14:40 : <우리 번역의 현주소와 개선 방안>, 황보석(미국문학 번역가)
   토론자 : 정혜윤(기독교방송국 PD)
14:40 - 15:20 : <일본 문학번역의 함정들>, 김난주(일본문학 번역가)
   토론자 : 유숙자(일본문학 번역가)
15:20 - 15:30 : 휴식
15:30 - 16:10 : <한국문학 프랑스어 번역의 난점들>, 이인숙(한․불문학 번역가)
   토론자 : 고봉만(한길사 기획위원)
16:10 - 16:50 : <스페인어 문맥의 함축적 성격과 번역의 어려움>,
       권미선(스페인문학 번역가)
   토론자 : 송상기(고려대)
16:50 - 17:00 : 휴식

4부 : 번역 출판과 현장 (17:00 - 18:20)  사회 : 조재룡(성균관대)
17:00 - 17:40 : <번역자의 조건들>, 박상익(번역비평가)
17:40 - 18:20 : <출판제도 안에서의 번역>, 표정훈(출판평론가)

07. 03. 01.

P.S. 교수신문에 한국번역비평학회 초대회장 황현산 교수와의 인터뷰기사가 게재되었기에 마저 옮겨놓는다. 기사를 읽으면서 받게 되는 인상은 불문학자이면서 여러 권의 문학 번역서를 낸 역자답게 황교수의 고민은 상당히 고차원적이라는 것이다. '상투적인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 번역서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투적인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번역의 미학이나 윤리, 철학을 따지기 이전에 일단 '번역' 자체가 제대로 안되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겪는 현실이다. 아마도 읽는 책들이 서로 다른 모양이다...   

교수신문(07. 03. 02) 한국 번역, 오역시비에 그쳐…상투적 번역이 더 문제”

한국번역비평학회(회장 황현산)가 지난 3일 고려대에서 ‘번역비평,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창립 학술대회를 열었다. 번역에 관한 이론과 현장경험이 만난 의미 있는 자리였다는 평가다. 지난달 27일 학술대회에 앞서 학회장인 황현산 고려대 교수(불어불문학과·사진)를 만나 우리나라 번역의 문제점 및 번역비평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황 회장은 지난해 9월 학회 창립 이후 초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번역을 이론화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계기를 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학회를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일반적으로 번역을 ‘우리말로 돼 있지 않은 텍스트를 우리말로 바꿔 소개하는 작업’ 정도로 여기는데, 이는 잘못됐다”고 강조했다. “번역작업을 하다보면 두 언어에 관해 어느 때보다 깊이 있는 성찰이 이뤄진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시나 소설 같은 언어창작물 보다 오히려 번역이 담당하는 역할이 커요. 언어의 모든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번역은 인문학의 모든 주제와도 연결돼 있습니다.”

번역을 둘러싼 잘못된 인식은 번역비평의 한계로 이어진다. 황 회장은 ‘번역담론’의 문제를 꼬집었다. “한국의 번역은 늘 오역시비에서 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을 통해 탐구하고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게 되죠. 번역은 언어를 분석하기에 굉장히 좋은 재료인데, 아직 우리나라 번역은 그 단계에 이르지 못 했다고 봅니다.”

본지가 지난 2005년부터 연재한 ‘고전번역비평- 최고의 번역본을 찾아서’를 언급하자 황 회장은 칭찬과 함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번역의 중요성은 물론, 번역을 객관화하고 공공연히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데 교수신문이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연재물을 보면서 “오역이 많다, 잘 읽힌다” 정도의 논의를 넘어 체계적인 번역 담론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오역시비에 앞서 우리나라 번역작업이 안고 있는 근본장애로 ‘상투적인 번역’을 지적했다. “우리말로 쓴 것보다 더 우리말 같은 번역들”은 번역의 중요한 힘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황 회장은 “상투적이지 않다는 것은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다는 뜻인데, 소설이나 시에선 낯선 말도 용납하면서 유독 번역에서 낯선 용어가 나타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이어 “낯선 것을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상투적인 번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전했다. 

번역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기 위해 학회는 갈 길이 멀다. 황 회장도 “공개적, 객관적으로 번역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학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번역이론가와 현장번역가가 만나 번역에 관한 인식을 같이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자평한 그는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학술회의, 국제학술세미나, 월례발표회 등을 통해 번역에 관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성찰해 나가겠다”고 학회의 향후 계획을 밝혔다.(김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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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0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에서는 논문 쓰는 것보다 번역이 훨씬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우리나라의 인식은 아직 한 참 먼 것 같아요. 미국의 명문대에서는 박사학위 논문 절반이 고전텍스트 번역이라고 하던데..

로쟈 2007-03-0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학계의 고질 같습니다. 대학원생들 시켜서 주로 대리번역들을 하다보니, '업적'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젠 좀 달라져야지요...

jouissance 2007-03-02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문제를 제일 앞서, 제일 줄기차게, 재기했던 사람이 김용옥이죠. 그래요, 이젠 달라지겠죠. 달라져야 하구요. 회장(황현산)은 제대로 뽑은 것 같네요. 황현산이 2005년에 출간한 말레르메 <시집>은 번역의 전범이라 할만하죠...

로쟈 2007-03-02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절차탁마 대기만성> 등에서부터 힘주어 강조했던 것이죠. 한데, jouissance님 전공이 불문학이신가 보네요.^^

jouissance 2007-03-02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문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전공은 아니랍니다. 누가 전공을 물어보면 말하기가 조금 뭐해요. 하도 다닌듯 안 다닌듯 그럭저럭 다녀서 말입니다...^^

기인 2007-03-02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번역. 복잡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도발적인' 것은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고전 <장자>의 재번역본이다. 한겨레의 기사 타이틀은 아예 "왜곡·오역의 ‘장자’는 불태워라"인데, 그간에 나온 <장자>의 번역들이 왜곡과 오역으로 도배돼 있으니 다 불태워 마땅하다는 것. 역자인 기세춘 선생의 일갈을 옮기면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장자는 장자가 아니다.” 나도 몇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는지라(비록 지금은 다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인지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데(내가 처음 접한 건 허세욱 선생이 옮긴 범우문고판 <장자>였다),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란 소리니까 더 없이 도발적인/충격적인 발언임에 틀림없다. 소위 '전문가들'의 신뢰할 만한 리뷰들을 읽어봐야 상황판단이 가능할 듯싶지만, 일단은 역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책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아마도 내일자 신문에 게재되는 모양이다.

경향신문(07. 01. 27) ‘장자’ 재번역한 기세춘씨

“노·장자의 기본 ‘캐릭터’가 완전 변질됐습니다. 저항성이 사라지고 지배 담론으로 윤색됐어요. 그 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고증학적 작업을 거친 재번역이 필요합니다.”

기존 학계에 기세춘씨(72)는 ‘불편한 존재’다. “시중의 동양고전 번역서를 모두 수거해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고전 번역서가 왜곡과 변질, 오역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게 기씨의 주장. 그가 “칠십 노인의 망령기와 당돌함으로 만용을 부려” 나선 재번역의 첫 결실로 ‘장자’(바이북스)를 내놓은 건 이때문이다.



“학계에선 아무도 경종을 울리지 않습니다. 저야 강단학계의 학맥이나 스승이 없어 자유로우니까 욕 좀 하겠다는 겁니다.” 기씨에 따르면 노장사상은 도교가 일어나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으면서 신비학으로 왜곡됐고, 정치권력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는 은둔과 청담의 사상으로 변질됐다. 왜곡의 뿌리는 2~3세기 중국 위진(魏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조에 의해 등용된 왕필이 당시 반란의 중심이었던 도교 세력의 민중성을 거세하기 위해 ‘노자 도덕경’과 ‘장자’에 나타난 반체제성과 저항성을 제거해 체제순응적이고 권력친화적인 내용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국내에 출간된 노장 주해 및 해설서들은 왕필의 주해를 근간으로 삼은 탓에 이러한 왜곡을 답습한 것들”이라고 비판했다.

번역자의 오역도 ‘장자’의 본 모습을 훼손했다. 시대와 문화, 언어 등의 차이로 인한 변질과 오해 가능성조차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번역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은미하고 철학적인 담론이 치졸한 처세훈이 되고, 서사적인 우화는 그 핵심을 놓치고 초점을 그르쳐 다른 길로 빠져버린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가 ‘장자’의 오역으로 꼽는 예를 살펴보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죽일 자를 풀어주는 것이오(綽乎其殺之)’로 해석해야 할 것을 ‘여유있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다’로, ‘잘못을 행해도 형벌로 다그치지 말라(爲惡無近刑)’로 해석되는 부분을 ‘어쩌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하라’로 옮긴 게 대표적. “권력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인 노장 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게 그의 분노 섞인 한탄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적 담론인 ‘동심론(童心論)’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심론을 기공술(氣功術)로 해석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가꾸어 젊음을 되찾자고 한 것은 “한심하다”고까지 말했다.

기씨는 “중국 고전의 경우 수천년 묵은 고문자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뜻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 “고전은 내용이 포괄적이므로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등 광범위한 소양이 요구된다”며 “자기 깊이가 그걸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 밥술이라도 먹게 됐으니까 적어도 동·서양 고전은 우리가 제대로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은 비판정신이 생명입니다. 그냥 그대로 답습하려면 왜 합니까.”(김진우 기자)

07. 01. 26.

 

 

 

 

P.S. 참고로, 교수신문에 연재됐던 고전번역비평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는 안동림과 오강남 역주의 <장자>가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표플 얻었지만 반론도 만만찮은 것으로 소개돼 있다. 지난 1963년 최초의 완역본이 출간된 이래 60여 종 이상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문학자와 종교학자의 번역이 가장 '읽힐 만한' 번역으로 추천되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거기에 '재야' 고전학자의 새 번역본이 보태진 셈이다. '정역본'으로 공인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장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하여 전문가의 조언을 같이 옮겨둔다.

교수신문(05. 07. 04) 장자,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자’는 천의 얼굴을 가진 고전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해석의 다양성은 모든 고전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특징이기는 하지만, ‘장자’의 경우 이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따라서 ‘장자’를 펼칠 때는 먼저 어떤 시각에서 읽을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각박한 현실로부터 삶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번득이는 지혜로 가득 찬 우화집으로 읽힐 수도 있고, 특유의 도가적 상상력으로 포장된 신화적인 사유의 보고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또 그런 주제들을 탁월한 레토릭으로 버무려낸 한 편의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자리매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형형색색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들어 있는 문제의식들의 면면을 감안한다면 ‘장자’의 본령은 역시 철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자’의 뼈대를 이루는 사유들이 조형된 시기가 중국철학의 황금기인 ‘戰國’ 시대라는 점도 이런 판단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러므로 ‘장자’에 대한 제대로 된 독법은 그것을 한 권의 철학서로 읽는 것이다.

‘장자’를 철학서로 읽고자 할 때 그 종잡을 수 없는 사유의 늪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선이해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첫째, ‘장자’에서 구사되는 언어적 표현들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통상 ‘장자’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구사 방식은 크게 ‘우언(寓言)’과 ‘중언(重言)’과 ‘치언(癡言)’, 세 가지로 나뉜다고들 말한다. ‘우언’은 말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른 말 속에 은폐시켜 전달하는 방식이고, ‘중언’은 사회적으로 그 권위가 이미 확립된 사람의 입을 빌리는 이중의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이며, ‘치언’은 마치 내용물이 일정 기준 이상 차오르면 저절로 기울어져 쏟아지도록 고안된 술잔처럼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고착되는 것을 시종일관 거부하는 표현법이다. 이와 같은 언어구사 방식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특유의 통찰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이런 까닭에 ‘장자’를 읽을 때는 언제나 이른바 ‘행간’을 읽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장자’는 연대기를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저자들이 만들어낸 집단 저작물이라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일반화된 견해에 따르면, ‘장자’에는 적어도 너댓 가지의 사상적 성향들이 혼재되어 있다. 장자 본인의 사상에서부터 그를 비교적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 장자후학들의 사상, 한비자류의 법가적인 경향성이 강한 사유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아나키즘적 색채가 농후한 사유 그리고 이런 정치적인 관심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탈속적인 개인주의적인 성향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혼재된 생각의 갈래를 개략적으로라도 묶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장자’는 고작해야 잡다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끌어 모아 놓은 단편들의 모음집에 지나지 않게 된다.

셋째, ‘장자’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의 성격을 간파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장자’에 담겨 있는 사유의 폭과 깊이는 ‘전국’이라는 시대가 제기한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나름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소화해낸 결과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중국의 전국시대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이후의 동서양 철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철학적 주제들의 원형이 제시된 시기이다. ‘장자’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적 분위기의 중심을 관통하며 형성된 고전이다. 장자 본인의 사상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 내편에서 다뤄지고 있는 문제만 보더라도, ‘자연’과 ‘인간’을 비롯해 ‘주체’, ‘타자’, ‘언어’, ‘소통’, ‘실재’, ‘몸’ 등 그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거론되는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를 정도로 다양하다. ‘장자’는 이런 주제들이 특유의 탈중심주의적 가치관과 심미적 세계관 속으로 수렴된 결과다. 이점이 또한 현대의 포스트모던적인 지적 상황에서 ‘장자’가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을 먼저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요소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며 구축해내는 철학적 사유의 정수와 대면하는 작업이다. 몇 번의 두레박질로 모두 길어 올리기에는 그 사유의 깊이가 너무 깊은 책, 그것이 ‘장자’이기 때문이다.(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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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7-01-2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덕에 또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늘 신세만 지네요. 그래도 로쟈님이 계속해서 좋은 정보 퍼뜨릴 거라 믿으며 자주 들르겠습니다.^^

로쟈 2007-01-2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 다 떠 있는 정보들입니다.^^;

승주나무 2007-01-2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도 장자가 4종이나 있었군요. 안동림본, 오강남본, 김학주본, 서광사본.. 장자는 편린만 취해서 그 전체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코멘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안동림본을 읽고 있는데(비싸고 두꺼운 것을 신뢰하는 편벽 때매) 옛날처럼 원문과 대조해가며 볼 수준이나 여건은 아니구요~~
장자의 정역본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모두 잡고 읽어보려구요. 근데 김학주본은 이제 애정이 식게 되더군요^^ 좋은 펌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07-01-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종을 갖고 있는데, 이게 문헌고증도 필요하지만 문학성도 옮겨줘야 하기 때문에 '난감한' 번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거 같습니다. 거기에 '내편'과 '외편', '잡편' 간의 차이(저자의 복수성)도 고려해야 하겠고. 연구서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가장 읽을 만한 번역(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번역?)이 먼저 확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biosculp 2007-01-2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물가물한데 동심론은 이탁오 애기하는것 같은데 김용옥교수가 그런식으로 해석을 한 기억은 없는데 다시 책을 뒤져봐야 겠군요.
그리고 김용옥 교수 책을 기준은로 노자철학이것이다에서 왕필의 필터로 본 노자이기에 그 왕필이 살던 시대 위나라지만 한나라가 붕괴된후라 한제국의 논리를 먼저 해부하고 노자로 가자 뭐 이런식의 논리였던것 같은데. 좀 심하게 애기하면 김용옥도 다 한애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쩝

로쟈 2007-01-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존 학계와 '불편한 관계'이면서 도올과도 생각이 다르다고 하니까 저도 뭐라고 덧붙이진 못하겠습니다. 전공자들끼리도 의견조율이 안되는 게 고전번역인지라...

기인 2007-01-2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자는 아예 다른 텍스트도 있지 않습니까? 왕필 이전 텍스트도 있고, 그 해석에 대해서 김시천 선생님께서 숭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요. 벌써 그 텍스트 이름도 가물거립니다;; 저도 장자 가장 좋아하는 고전 텍스트였었거든요. 매우 법가적으로 해석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로쟈 2007-01-26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철학에서 이야기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1-2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박원재씨 저 분한테 학부시절 장자를 배웠더랬는데;;;

기인 2007-01-2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출국하기 직전 떠오른 것.. 김시천 선생님은 장자가 아니라 노자 도덕경 새로운 텍스트였어요. ㅋㅋ 죄송합니다; 음. 집에와서 책장에 보니 '노자'아저씨의 책을 보고 두둥;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위지본 도덕경이었던가. 새로운 텍스트는요. 아니 근데 왕필 아저씨는 장자도 재해석 한 건가요? 스물몇살때 도덕경 주 달고 요절하신 천재로 기억하는데.. 돌이켜보면 6년 전쯤 기억이라 막막합니다.. 도는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기억할 수 업다... ^^;
 

'번역과 인문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 소식을 스크랩해놓는다. 번역과 번역학, 번역비평에 대한 관심이 더 고조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수신문(06. 10. 10) '번역과 인문학' 국제학술대회 열려

고려대 문과대학이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오는 19일 고려대 국제관에서 '번역과 인문학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주최 측은 학술대회의 목표가 "우리의 인문학과 관련하여 현금의 번역 역량을 점검하고, 번역 원론과 각론에 걸쳐 학문 분야별‧언어별로 중요 주제들을 검토하여 바람직한 번역문화를 전망함과 동시에 우리의 학문 현실에 적합한 번역학과 번역비평론을 창도하는 데 있다"라고 밝혔다.

번역은 하나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언어 경험을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언어 경험으로 바꾸고, 한 시대에 한 지역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 사고에 시공을 뛰어넘는 보편적 형식과 가치의 시험을 부과하는 고도의 학술적 작업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또한 출발 텍스트와 그 문화를 객관화하는 가운데 목표 문화 속에 그에 대한 정신적‧언어적 터전을 준비하는 번역활동은 대상 문화를 존중하는 일이 자문화의 유연성을 높이고 폭을 넓히는 일과 통하는 고도의 윤리적 작업이라고 이번 학술대회 프로그램을 풀이한다.  

이번 학술회의는 이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 일련의 개막강연과 네 개의 주제별 분과토론을 3일에 걸쳐서 진행한다. 첫날의 개막강연에서는 앙리 메쇼닉(사진) 파리8대학 교수, 金聖華 홍콩중문대학 교수, 전성기 고려대 교수 등 선도적 연구자들의 발제가 있고 이어서, ‘번역 일반론’ ‘문화 수용으로서의 번역’ ‘번역이론과 번역현장’ ‘한국작품의 외국어 번역의 문제’ 등 네 개의 큰 주제를 둘러싸고 펼쳐질 이틀간의 분과토론에는 30명의 국내외 관련 연구자들이 사회자와 주제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한다.

특히 마지막 날 토론에서는 이연숙 히토츠바시대 교수, 파사레바 라리사 고려대 교수, 삐오 세라노 스페인 베르붐 출판사 대표, 노자끼 미츠히코 오사카시립대 교수 등 우리의 문학작품을 각기 해당 국어로 옮긴 바 있는 번역자들이 토론자로 참석하여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 실태를 살피고 향후의 전망을 논의하게 된다.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다.

첫째 날 10월 19일(목) - 국제관 214호 국제회의실(국제대학원동)

개막식

사회:김재혁 교수

 (고려대)

3:30 ~ 3:40

개회사(조광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장)

3:40 ~ 3:50

축사(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

3:50 ~ 4:00

감사의 말(대회준비위원장 황현산 교수/고려대)

개막강연

사회:김춘미 교수

     김양순 교수

 (고려대)

4:00 ~ 4:45

앙리 메쇼닉 교수(파리 8대학):번역의 의도는 언어이론을 통째로 바꾸는 데 있다

4:50 ~ 5:35

진성화 교수(홍콩중문대학):문화의 차이와 번역의 책략

5:40 ~ 6:25

전성기 교수(고려대):번역인문학과 번역비평

저녁식사 (6:30 ~    ) : 국제관 교직원식당

둘째 날 10월 20일(금) - 국제관 321호 원형강의실(국제어학원동)

주제발표 1

번역 일반론

사회:김승옥 교수

 (고려대)

9:30 ~ 10:15

발표-김응종 교수(충남대):번역은 제2의 창작인가

토론-김경현 교수(고려대)

10:20 ~ 11:05

발표-서지문 교수(고려대):사랑도 번역이 되나요? - 번역자의 이질적 언어, 문화권 간의 교량역할 -

토론-이성일 교수(연세대)

11:10 ~ 11:55

발표-박여성 교수(제주대):‘번역투’와 번역비평에 대한 텍스트과학적 접근 -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한국어 번역본을 중심으로 -

토론-장영준 교수(중앙대)

점심식사 (12:00 ~ 1:30) : 국제관 카페테리아

주제발표 2

문화 수용으로서의 번역

사회:황현산 교수

 (고려대)

1:30 ~ 2:15

발표-조성택 교수(고려대):번역과 오․이해: 한역불교용어를 통해서 본 동아시아불교

토론-박태원 교수(울산대)

2:20 ~ 3:05

발표-정광 교수(카톨릭대):개화기 시대의 성경번역에 대하

토론-전성기 교수(고려대)

3:10 ~ 3:55

발표-김용민 교수(한국외대):한국에서 루소 사상의 수용과 그 번역문제

토론-박홍규 교수(고려대)

※ 종합토론 (4:05 ~ 5:05) : 사회 최동호 교수(고려대)

저녁식사 (5:30 ~    ) : 인촌기념관 1층 귀빈홀

셋째 날 10월 21일(토) - 국제관 321호 원형강의실(국제어학원동)

주제발표 3

번역이론과 변역현장

사회:이재훈 교수

 (고려대)

9:30 ~ 10:15

발표-이연숙 교수(일본 히도츠바시대학):개념의 번역과 문체의 번역

토론-정병호 교수(고려대)

10:20 ~ 11:05

발표-황현산 교수(고려대):시와 번역

토론-김인환 교수(고려대)

11:10 ~ 11:55

발표-김동준 교수(동덕여대):한국한문문학작품 번역을 위한 제

토론-윤재민 교수(고려대)

점심식사 (12:00 ~ 1:30) : 국제관 교직원식당

주제발표 4

한국작품의 외국어 번역의 문제

사회:김양순 교수

 (고려대)

1:30 ~ 2:15

발표-피사레바 라리사 교수(고려대):한국시의 러시아어 번

토론-최선 교수(고려대)

2:20 ~ 3:05

발표-삐오 세라노(베르붐 출판사 대표):한국문학작품의 스페인어 번역: 성과와 도전

토론-이재학 교수(고려대)

3:10 ~ 3:55

발표-노자끼 미츠히코 교수(오사카 시립대학):일본에서의 한국 고전문학 번역

토론-최관 교수(고려대)

※ 종합토론 (4:05 ~ 5:05) : 사회 민용태 교수(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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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6-10-1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이런 '번역학'에 대한 세미나가 열리는군요. '번역'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학계 풍토에 대한 자책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번역에 대한 논의가 붐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번역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번역학 즉 번역'에 대한' 논의만 무성한 현 상황은 안타깝습니다.

'번역'에 관한 세미나의 경우, 이제는 '번역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에 대해 기획의 방향을 섬세하게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 세미나같은 경우, 개화기 성경번역이나 루소의 수용같은 논문은 역사학 계통의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개화기 번역에 대한 논문은 동아시아학, 국문학의 제일 인기 분야입니다. '번역은 제2의 창조인가'와 같은 논문은 김효중의 <번역학> 한권만 읽어도 왠만한 것은 커버할 수 있을 것인데 무슨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하지만 문제는 이 세미나에서의 번역에 대한 여러 논의가 짬뽕이라는 것입니다. '번역학'이 있을 정도로 논의가 복잡한데도 원론, 각론 다 모아 한큐에 진행하겠다는 것인데, 이런 기획 자체가 아직도 번역에 대한 논의의 중요성에 대해 세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일전에 번역과 관련한 리포터를 한편 쓰기 위해 KISS에서 '번역'키워드로 한글 논문 20여편을 찾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태반이 김효중의 개론서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거나, 번역학 개론과 자신의 분야를 적절히 배합한 것들이었습니다.
정말 한국에서 필요한 번역에 대한 논의는, 번역의 강국 일본의 경우 출판사들은 어떻게 번역관련 작업을 하는가, 일본이나 미국의 대학 출판사들은 어떻게 번역을 하는가, 출판물 선정, 필자 섭외, 섭외의 기준, 번역까지의 기간 선정, 편집자와 번역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등에 대한 수많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찾아본 논문 중에는 외대 통번역 교수 두분이 연구비 받고 한국 출판사를 선정해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한 논문이 딱 한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한 대상이 출판사 단 네곳밖에 되지 않아 논문이라고 하기에 턱없이 그 기준이 모자랐습니다.

원래 각국의 번역 상황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고 했으나, 한국에 관한 위 논문을 제외하고는 단 한편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번역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인지만 있을 뿐 번역 대국의 번역 상황에 대해 실질적으로 실증적인 취재, 연구가 치밀하게 되지 않는 한, 이러한 '번역학'세미나는 80년대 초반 김용옥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번역에 대해 그리도 강조한 것 이상을 뛰어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번역학' 교수들이 생기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만요...

로쟈 2006-10-13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님/ 유익한 코멘트를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이번 학술대회 조직위에서 열매님 같은 분을 초빙했어야 했는데요^^). 매달린 일들 때문에 제 의견을 본문에 자세히 적지는 못하겠지만, 제기하신 문제들에 공감합니다. '학술대회'란 건 그냥 '행사'이죠. 실질적인 변화를 누가, 어떻게 가져올 수 있고, 또 가져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라이더 2006-10-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좋은 댓글 이네요.

biosculp 2006-10-13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 들렸다 을유문화사에 신복룡교수가 번역한 군주론이 이 책과 더불어 강정인교수가 번역한 까치판을 같이 사서 읽고 있는데, 같은 책 다른 번역으로 읽은적은 처음입니다. 갈수록 다른면이 많더군요. 술어부터, 강정인은 식민지라고 한곳을 신복룡은 이주민 정책으로 번역하고 각자 잘 이해되는 부분도 다르고. 역시 번역은 두권이상을 동시에 봐야 뭐가 다른지 알수있는것인지. 그러다 보니 이거 영어판이라도 같이 봐야 되겠다 이생각이 들더군요. 영어판도 두권이상(이탈리아어는 모르니)
번역, 읽다가 이해 안되는것은 한권읽었을때고 동시에 두권을 읽어보니 또다른 세상입니다.

로쟈 2007-12-02 10:16   좋아요 0 | URL
뒤늦은 답글인데, 맞습니다. 같은 곡을 각기 다르게 연주하는 하는 것이죠.
 

제시카 알바 주연의 영화 <슬리핑 딕셔너리>(2002)의 배경은 1930년대 영국의 식민지 말레이시아의 사라와크 섬이다. 아버지의 유업인 원주민 계몽사업을 위해 영국군 청년장교 존이 섬에 오게 되는데, 총독은 그에게 원주민 최고의 미인인 셀리마(알바)를 ‘슬리핑 딕셔너리’로 붙여준다.

‘슬리핑 딕셔너리’란 주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원주민 언어를 가르치는 여자를 가리키는데, 존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난다면 거부하지만 곧 셀리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영국과 원주민 양편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법적으로도 금지돼 있다. 이들의 사랑은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번역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폴 리쾨르의 <번역론>(철학과현실사, 2006)과 함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해설’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더글러스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동문선, 2002)를 읽다가 문득 떠올리게 된 생각은 텍스트간(더 나아가 ‘문화간’) 번역의 중재자로서의 번역자(혹은 통역자)의 위치와 운명이라는 게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그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비교불가능한 것을 비교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등가성의 창출을 주된 임무로 하면서 동시에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하녀! 

그러한 생각이 연이어 떠올리게 한 건 번역의 ‘일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리쾨르의 <번역론>이 지닌 ‘특수성’이다. 그의 지적대로 ‘이국적인 것의 시련’과 ‘비교불가능한 것의 충격’이 번역의 대전제이지만, 리쾨르는 언어 내적 번역을 외적 번역 못지않은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그러한 시련/충격을 흡수해버린다: “(내적 번역에서처럼) 이렇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외국어를 번역하는 번역자가 하는 일이다.”(121쪽) 이로써 “(언어) 내적 번역과 언어 외적 번역 간의 가교가 이루어진다”고 리쾨르는 주장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의 맥락에서도 그러할까?


로빈슨이 간결하게 정의한바 “포스트식민주의는 지리적/언어적 전치와 지배와 복종으로 서로 얽혀 있는 동력에 의해 야기된 심리/사회적 변형들인 통문화적 권력을 바라보는 방식이다.”(29쪽) 하면, 문제는 단순하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까? 가령, “어떻게 멕시코의 스페인어로 씌어진 텍스트를 미국 영어로 다시 써서, 가난한 제3세계 국가의 구성원에게 지니는 의미를 지구상의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구성원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할 수 있는가?”(47쪽)


또한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는 시위대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고전적인 사례는 번역의 문제가 언어 내적 번역에서도 단순하지 않음을 시사해준다. 번역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지배/복종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국제관계가 국가들간의 (이념적으로)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FTA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도 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세계는 평평한 듯 보이지만, 거기엔 굴곡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곡률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걸 평평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균등하게 분배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텍스트번역에서건 문화번역에서건 번역은 불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리쾨르에 따르면, “번역은 이론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나 실제로는 수행 가능한 작업”(100쪽)이다.


다만, “번역 작업은 이국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발생하는 내적 저항을 물리치고 이루어진 회상의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번역이라는 이상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애도의 작업”(118쪽)이라는 것을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때 번역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며, “이국성을 가진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117쪽)가 그 두 주인이다. 번역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독자를 저자에게 데리고 가는 이국화/외국화(foreignizing)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자국화(domesticating)가 번역의 두 가지 양태이다.


포스트식민주의 번역론에 따르면, 이때의 저자와 독자는 추상적인 무국적자가 아니다. “문화의 번역불가(능)성은 가장 첨예한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계 지역에서는 실제 해결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즉 그 국경의 양측에 걸쳐 있는 ‘멕시코인들’(그리고 몇몇 ‘북미인들’까지도)은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고, 그 다양한 구성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경험을 양쪽 언어로 번역한다.”(47쪽) 역설적이지만, 이렇듯 “이론적으로는 어렵고 고된,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쉽고 순조로운”(리쾨르, 100쪽) 것이 번역 작업인 것이다. 더 나아가 번역은 우리의 일상이기까지 하다.

 


번역의 신화적 기원으로서 흔히 ‘바벨 이후’를 거론하지만,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그 역사적 기원으로서의 ‘바빌론 유수 이후’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다가 하느님께 징벌을 받아서 각기 다른 말들을 하게 됐다는 것이 ‘바벨 이후’가 뜻하는 바라면, 바빌로니아가 유대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을 강제로 데려가 바빌로니아에 억류시킴으로써 언어가 다른 이민족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다른 말들을 배우게 됐다는 것이 ‘바빌론 유수 이후’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것은 곧 ‘디아스포라’(이산)의 기원이기도 하다.

 

번역의 역사적 기원이 암시해주는 것은 최초의 번역적 상황이라는 것이 항상 제국의 정복/점령과 그로 인한 권력의 분화, 그리고 이산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로빈슨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제국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신민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종속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계발하여 순응적이거나 ‘협력하는’ 신민으로 변모시켜야 했다. 제국으로서 번역의 역사에 대한 초기의 관심 영역 중 하나는,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지인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통역가들의 선발과 훈련이었다.”(22쪽) 이것이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탄생 배경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전체 포스트식민 세계가 번역의 장으로 계속해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 맥락에서 번역은 하나 이상의 국가 혹은 지역 문화와 관련된 문화적/언어적 재능을 지닌 소수의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언어 텍스트의 의미상 전달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의사소통의 기초이다. 이렇게 번역은 처음으로 번역을 형성해준 식민 권력의 분화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이다.”(49쪽) 물론 이러한 참여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번역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을 요약하자면, (ⅰ)번역은 식민화의 채널로서 교육에 필적하며, 교육과 연관되고, 제도와 시장의 명백한 혹은 숨어 있는 통제를 받는다, (ⅱ)번역은 식민주의의 붕괴 이후 계속된 문화적 불평등을 위한 피뢰침이다, (ⅲ)번역은 탈식민화의 채널이다(51쪽)가 된다. 여기서 핵심은 번역이 식민화의 채널이면서 동시에 탈식민화의 채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쾨르가 시도하고 있는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번역과 번역행위에 대한 이러한 인류학적 성찰, 정치적 성찰이다.

 

<슬리핑 딕셔너리>에서 존과 셀리마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며 영국군과 원주민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존은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셀리마와 재회하게 되며 둘은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이 정념론적인 차원의 확인은 번역의 관점에서 윤리적인 차원으로까지 승화된다. 리쾨르가 제안하는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주인을 모두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것, 혹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것은 결국 언어적 환대를 실행하는 것”(119쪽)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속에서 셀리마는 존(영국)과 자기 부족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 주인 모두를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언어적)환대’의 요청 때문에. 그러한 환대의 공간은 지리적으론 접경지대이며, 사회적으론 교통공간이고, 문화적으론 혼합공간이며 인종적으론 혼혈공간이다(셀리마는 혼혈이다).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자신의 집에 맞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리쾨르, 89쪽)으로서의 번역은 그러한 공간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행복한 도전’이다. 더불어,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공간에 처한 이주민들이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이기도 하다.    

 

 

 

 

 

하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박상익,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지적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뼈아프다. 번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행복을 위해서도, 생존을 위해서도 너무 안이한 것 아닌가?..

 

06. 08. 27.

 

P.S.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본래는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대한 서평을 기획했었지만, 너무 '뻔한' 얘기들만 늘어놓게 되어 8매 정도를 쓰다가 접었다. 그리고는 결들여서 쓰고자 했던 리쾨르의 <번역론>과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을 중심으로 구도를 다시 짰다. 로빈슨의 책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긴 하지만, 정독할 만한 성격의 책은 아니다.

 

리쾨르의 <번역론>은 읽어볼 만하지만,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국역본의 편제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순한 본문에 비하면 너무 장황하다싶은 해제 '논문'이 책의 성격을 딱딱하게 만들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사실 본문의 각주들도 미주로 돌리는 게 가독성을 위해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교정상의 실수들도 적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85쪽의 역주18)에서 낭시의 책은 <경계의 미학>이 아니라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이며, 128쪽 역주23)에서 첼란의 시집 <죽음의 푸가>는 문학과지성사가 아니라 청하출판사에서 나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건 전영애 교수의 첼란 연구서(학위논문)인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이다. 그리고 앙리 메쇼닉에 대한 각주는 같은 내용이 해제(53쪽)와 본문(154쪽)에서 반복되고 있다. 85쪽 역주19)에서 "도야는 독일 신인본주의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는데..."라는 건 교정이 안된 문장이다. 117쪽에서 "이국성을 가진 있는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가..."도 마찬가지이다. 71쪽 역주3)에서는 벤야민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기술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오기됐다. 그리고, 62쪽에서 '각주(各主)'의 한자는 엉뚱하다. '각주(脚註)' 아닌가?

 

여하튼 이런 실수들이 공들인 번역에도 불구하고 책이 조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분량에 비하면 저렴한 책도 아닌데, 좀더 세심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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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6-08-2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어요. 번역과 슬리핑 딕셔너리가 겹쳐지는 부분이 교묘하네요. 언어적 환대와 육체적 접대를 동시에 제공하는 주체들이 저 바벨의 성 주변에는 아주 많았겠군요. (바벨 그림도 무지 멋집니다.^^)

로쟈 2006-08-2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히 인상에 남는 영화는 아니지만, 글이 딱딱해질 거 같아서 집어넣어본 거죠. 사실 번역이란 게 허드렛일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구요...

푸른괭이 2006-08-2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선정적이네요(=재미있네요) ㅋㅋㅋ 실상, 번역이라는 것 자체는 허드렛일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고문'인데...

은라라 2011-08-3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환대라는 의미가 와닿ㅈ 않네요. 중요한 키워드 같은데요.
누군가를 환대한다 에 나오는 '환대'를 말씀 하신 것 맞지요.
그리고 번역을 허드렛일 일이라고 하는 건.. 좀
번역 자체는 초고의 지성인(모든 책은 아니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봐요.
허드렛일로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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