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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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가장 유럽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866)은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에 이르는 위대한 작가적 여정의 첫 번째 이정표이다. 이미 작가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통해서,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공리적 사회주의의 이념을 공박하면서, 진정 '살아있는 삶'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죄와 벌>은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하는 2×2=4의 수학적 공리의 세계(합리적 이성의 세계)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이론으로 변형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뉠 수 있고, 이때 비범인은 초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역사상의 모든 입법자나 건설자들은 이와 같은 권리를 행사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한다.

가난한 전직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자기 자신이 비범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어로 '(범)죄'의 어원적인 뜻은 '한 발작 넘어섬'인데, 그는 자기 자신이 모든 장애를 딛고 한 발작 넘어설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살인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한다. 하지만 살인 사건 이후에 그는 줄곧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그것은 주로 자신이 한 발작 넘어서서 첫 번째 걸음을 옮기는 데 실패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일종의 정신분열이 일어나는데, 학대받는 늙은 말을 끌어안고 울던 유년시절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유럽 합리주의의 세례를 받은 청년 라스콜리니코프 사이의 분열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러시아와 유럽의 분열을 함축한다.

사실 주인공의 이름에서 '라스콜'은 러시아어로 분리/분열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리/분열이 해소되는 것은, 루터가 '악마의 창녀'라고 부른 이성의 대변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결심하고 성스런 창녀 소냐의 권유대로 광장에서 대지에 입을 맞추게 됨으로써이다. 하지만, 8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진정한 갱생에 이르는 과정의 이야기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니다. 나폴레옹 모방이 아닌 그리스도 모방으로서의 진정한 인간의 삶, 혹은 위대한 죄인의 생애를 묘사하고, 고통과 수난을 통한 삶의 구원을 역설하고자 한 작가의 고투는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알료샤에 이르는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죄와 벌>의 현재적 의의란 어떤 것일까?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과 그 실행을 소비에트 러시아(1917-1991)의 건설과 파산에 견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작가가 유난히 강조한 바, 결코 변증법으로 대체할 수 없는 '살아있는 삶'은, 모두가 합리적/계산적 이성에 근거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정치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요구한다. 역사의 종언 이후에 우리에게 남겨진 삶은 바로 이 갱생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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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1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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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 읽기 사전
조유선 지음 / 열린책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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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출간에 맞추어 드디어 이 작가의 읽기 사전까지 출간됐다!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아직 새로운 셰익스피어나 괴테 전집도 완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알기엔) 외국 문학 작가 사전이 출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한국문학의 경우에도 박경리 선생의 <토지 문학 사전> 정도가 예외적이고, 단지 몇 종류의 작가 사전 정도가 나와 있는 걸로 안다.

무릇 사전이란 그 나라 출판문화와 학문 수준의 지표라는 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많은 사전들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가나 작품 사전이란 거기에 덧붙여서 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학문적 온축의 집약이란 뜻을 갖는다. 때문에 그 연구사나 연구인력면에서 다른 외국문학에 비해 풍족하지 않은 러시아문학계에서 전집 번역에 뒤이어 이러한 사전이 출간된 일은 크게 격려할 일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미 전집이 출간된 푸슈킨 사전이나 톨스토이 사전, 체호프 사전도 기대해 봄 직하고, 19-20세기의 대가들의 작품들도 가급적 많이 번역되고 이런 사전까지 더불어 출간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책의 부록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번역 서지와 연구 서지가 붙어 있는데, 처음 보는 문건들도 있는 반면에 누락된 것들도 있고, 몇 군데 오타도 눈에 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서구>란 논문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서가>란 제목으로 탈바꿈되어 있기도 하다. 좀더 세심한 교정이 아쉽다. 그리고 또 하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국내 연구서지는 작가의 명망과 한국에서의 지명도에 견주어볼 때 너무도 빈약하다. 단행본 연구서도 손에 꼽을 정도가 못된다. 이번 사전의 출간을 구두끈을 다시 바짝 조일 계기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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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도시에 가다
이득재 지음 / 문화과학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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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M 쿳시의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도 암시된 바 있지만,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엇보다도 '페테르부르크'란 도시 공간의 작가이다. 그때의 페테르부르크는 근대 러시아의 모순과 운명을 집약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들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페테르부르크를 알아야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한다'는 것.(저자가 왜 '레닌그라드'란 명칭을 고집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레닌그라드의 현재 명칭은 페테르부르크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시대에도 물론 페테르부르크였는데 말이다.)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은 <죄와 벌>이다. 그리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저자에 의해서 도시계획가로 변신 혹은 격상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더 보탬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다만, 거기에 한정하여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이해가 아닌 새로운 축소주의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하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영화를 다룬 4장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제쳐놓고, 유독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죄와 벌>을 비교하고,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두 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두 편만을 대조시키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이왕 브레송 영화를 다룬다면, <백치>에 영감을 받았다는 <당나귀 발타자르>에 대한 분석은 왜 빠졌을까?)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그 주제들에 걸맞는 내용이 부피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데서 느껴지는 아쉬움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준비한 탓인 듯한데, 내용들간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부족한 한편으로 오타들도 눈에 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온순한 여인>(147쪽)은 <부드러운 여인>(151쪽)과 혼용되고 있고, '니끼타 미할코프'의 형인 영화감독 '안드레이 곤찰롭스끼'(콘찰롭스키가 맞다)는 그 아들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122쪽). 타르코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도 굳이 <시간 안에 새기기>(143쪽)란 제목으로 바뀔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어쨌든 '위대한'작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국내 저작이 매우 드문 형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름만으로도 반가움을 갖게 해주는 책이다. 더구나, 저자는 그 '위대함'이란 꼬리표를 떼어내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저자는 '책머리에'의 끄트머리에다 이렇게 적어 놓는다: '아무쪼록 본서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단순한 깐죽거림이거나 냉소주의로 비쳐지질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이 서평도 절대로 깐죽거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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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자의 꿈 러시아 고전산책 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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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작인 <백야>(1848)와 함께 묶인 <우스운 자의 꿈>(1877)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복잡한 종교 철학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여기에 그의 전체적인 세계관이 집대성되어 있다.'(모출스키) 이러한 주장에 다소 과장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우스운 자의 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토피아관을 이해하는 데 필독 작품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 분량에 비하면 영양가 만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우스운 인간이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부른다'(109쪽)는 서두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연상케 한다('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유토피아를 화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공통적이지만, 지하생활자가 당대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합리적 유토피아를 공박하는데 열을 내고 있다면, 우스운 자는 그에 대한 작가 자신의 대안적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 유토피아를 말하는 화자가 '우스운 자'인 것은 작가의 겸양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스운 자가 꾸는 꿈(=유토피아)은 무엇인가? 그가 꿈속에서 자살한 이후 어떤 힘에 이끌려 가보게 되는 세계는 또다른 지구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고갈되지 않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자연과 대지, 바다와 숲을 에찬하면서 지상의 천국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미 <악령>과 <미성년>에서 작가가 그려내었던 황홀경의 세계이다. 하지만, 우스운 자는 자신이 그 세계를 (꿈속에서지만) 타락시켰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그는 그 낙원의 '바이러스'였던 것이리라. 그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잠이 깨지만, 그가 본 진리의 세상은 이미 가슴속에 각인돼 있고, 그는 세상에 나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진리란 아주 단순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들도 사랑하는 것.'(146쪽) 그러나 단순하다고 해서 그 실천까지 손쉬운 것은 아니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고백대로, 우리는 '먼 데 있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있지만 이웃은 사랑할 수 없는 족속들이니까...

꿈을 꾸기 전 우스운 자는 더이상 우스워지지 않기 위해서 자살을 결심하고 자신에게 온 불쌍한 어린 소녀를 무시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그는 제일 먼저 그 소녀를 찾아나선다. 모출스키에 의하면, 그 어린아이가 곧 대지(=지구)이며 천국이다. 즉 천국-어린아이-대지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성스러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결말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떤 신비로운 것이 있다!' 내일이 어린이날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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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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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나보코프는 자신의 예술론을 한마디로 요약한 바 있다. '내게 픽션은 거칠게 말해 미학적 지복을 주는 한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책들은 흔치 않다.(나머지는 쓰레기이다.) <롤리타>는 물론 그 흔치 않은 책들에 속한다. 천재적인 언어감각과 교활한 작가적 재능의 작가 나보코프조차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았을 정도니까. 그리고 이 점은 '서문'에 이미 드러나 있다.

'비비안 다크블룸은 <나의 신호>라는 전기를 곧 출간할 예정인데 원고를 탐독해 본 비평가들은 그것이 그녀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8쪽)

비비안 다크블룸은 영어 철자를 재조합하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된다. 즉 나보코프의 아나그램이다. 마치 히치콕 영화에서처럼 작가 자신이 카메오로 출연하고 있는 것.(사실 히치콕과 나보코프는 여러 모로 비교해 볼 만하다. 둘은 모두 1899년생이다.) 그래서 독자에게 '신호' 혹은 '암시'(힌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 즉 자신의 작품(<롤리타>)가 가장 훌륭한 책이 될 거라고.

사실 험버트 험버트가 자신의 님펫인 롤리타(12세)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이 '불륜담'(그래서 논란이 됐지만)에 혹자는 동정을 느낄 수도 있고, 또 혹자는 부러움 섞인(?)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표면적인 이야기의 이면에서 작가 나보코프가 정말로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의 개인적인 비극은 타인의 관심사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그토록 자연스러운 내 말, 자유롭고 풍요하고 끝없이 온순한 러시아어를 버리고 이류의 영어를 해야 하는 내 설움에 있다.'(431쪽)

영어를 쓰는 미국 작가가 되기 이전에 나보코프는 이미 탁월한 재능의 러시아 작가였다. 그가 자신의 모국어를 포기하고 영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설움이 바로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포르노그라피적 사랑의 배면에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롤리타>는 결코 에로틱하지 않으며 비윤리적이지도 않다. 작가의 표현을 빌면, 유머 누아르이되, 좀 서글픈 유머 누아르일 뿐이다. 왜냐면, 우리의 유년이란, 결코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 것이기에.

역자는 유려한 번역을 통해 비록 나보코프의 말장난을 다 옮기지는 못했지만(그건 불가능하다), 험버트의 여정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다만, 해설에서 이 작품을 <저자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소설로 평한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롤리타>를 끝까지 꽉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전지적인 작가 나보코프이기 때문이다. 사실, 험버트며, 퀼티며, 얼치기 작가들에게 모두 징벌을 내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작가 나보코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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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haze 2019-12-1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운 섞인이라니요 ㅎ 로쟈님 너무 나가시는 것 같네요. 누군가 어린 여성에게 성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의 표면적인 내용은 사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부러움섞인 불쾌감이라는 가벼운 농으로 표현되는 것은 좀 불편하네요. 누가 부러워 할까요. ㅎ 로쟈님 연령대에 판타지를 가진 중년 남성이겠지요. 여성들은 로쟈님의 그 말장난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공감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공감대가 없는 말장난은 그냥 쓸데없는 말일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