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07호)의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당초 '세대' 문제를 다루려고 했지만 고른 책들의 초점이 '나이'여서 주제는 '중년 이후의 삶'으로 귀결됐다.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 책들을 둘러본 기회였다...

 

 

 

책&(12년 6월호) 중년 이후의 삶

 

‘인생의 사계’라는 말이 있다. 우리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대략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의 네 시기를 일컫는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자연의 사계는 봄, 가을이 점점 짧아지는 쪽으로 가는 듯싶지만, 인생의 사계는 가을과 겨울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청춘이 짧은 건 그대로이지만, ‘고령화 사회’란 말이 가리키듯이 노년은 유례없이 길어지고 있다. 물론 의학의 발달과 생활여건의 향상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난 건 좋은 일이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청춘만 연장하는 기술은 갖고 있지 않다. 그렇게 늘어난 인생의 가을과 겨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과제를 던져주는가.

 

우에다 오사무의 <남자 나이 45세>(더난출판, 2012)는 45세를 문제적인 나이로 지목한다. 육체연령이 젊어졌기 때문에 45세면 과거의 36세 정도이지만 커리어상으로는 옛날의 55세에 해당하는 나이다. 육체적으로는 아직 한창이지만 요즘의 풍조로는 은퇴를 요구받는 일도 흔하다. 40-50대 정년을 뜻하는 ‘사오정’의 현실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이 ‘험난한 현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45세가 되어서 갑자기 닥친 현실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대지 않도록”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조언이다. 물론 준비할 사항은 많다. 하지만 ‘신용과 건강은 최대의 자산이다’ 같은 흔한 충고를 제외하면 ‘45세부터 다시 시작하는 평생공부법’ 같은 제안이 눈길을 끈다.

 

경영컨설턴트답게 저자는 인문고전을 읽으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는다. 대신에 먹고 살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같은 실속 있는 공부를 권한다. 저자는 46세에 법학전문대학원에 다시 입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딴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공부에서도 목표를 명확히 하고 최단경로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독서의 경우에도 다양한 독서 대신에 그가 권장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기 위한 독서다. 목적의식을 갖고서 책을 선택하되 한권을 읽고 나면 첫 번째 책과 다른 관점에서 쓰인 책을 읽어서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책을 읽었다는 사실보다는 얼마만큼 나의 것으로 소화했느냐가 관건이다. 45세 중년을 위한 사회적 환경이 그렇게 호의적이진 않더라도 빈틈없는 준비를 통해서 80-90세까지 만족하는 인생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르고트 캐스만의 <젊은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작은책방, 2012)은 중년 여성을 위한 조언을 담은 책이다. ‘여성용’이 따로 필요한 것은 같은 중년이라고 해도 남성과 여성이 부닥치게 되는 문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여자 나이 50세’인데, 남자들이 50세 이후에도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반면에 일반적으로 여자가 50대에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대신에 50대 여성은 대부분 결혼한 자녀의 아이를 돌보거나 나이 든 부모를 간병하는 일을 떠맡으면서 자신의 노년도 준비해야 한다. 노년을 준비하는 데 중요한 것은 혼자 사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혼이나 남편과의 사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중년 여성은 혼자 사는 처지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홀로 사는 삶이 고독한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혼자 있지 않으면서도 고독한 것과 고독을 느끼지 않으면서 혼자 있는 것. 당연히 바람직한 것은 혼자 있더라도 고독하지 않은 삶이다. 홀로일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더 깊이 대면하며 더 안정되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체험담이다. 물론 오래된 우정을 잘 가꾸어나가는 것은 중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충고도 저자는 잊지 않는다. 덧붙여 여성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저자는 인생 중반에 오히려 ‘담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남은 인생길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풀 죽어 의기소침하게 사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길을 잘못 걸어가는 것이다.”
 
루이스 월퍼트의 <당신 참 좋아보이네요!>(알키, 2011)는 80대의 노(老)생물학자가 쓴 노년의 인생론이다. 벨기에의 한 연구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반적인 예상과 다르게 인생의 행복도가 가장 놓은 나이가 80대였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가장 심한 40대가 최저점을 찍은 것과는 다르게 80대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여생을 살기에 그렇다는 분석이다. 물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노년이라면 사정은 좀 다를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스트레스를 피하고 꾸준한 운동과 건강식단을 통해서 치매, 특히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하는 것이 ‘웰에이징(well-aging)’에서 중요하다고 저자는 충고한다.

 

늙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건강을 오래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노년의 비극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젊음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늙음에 대한 거부로서 안티에이징(anti-aging)은 노년의 행복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다. 지금 자신의 나이에 맞게 잘 살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럴 때 들을 수 있는 말이 “참 좋아 보이세요!”이다.

 

12. 06. 13.

 

 

P.S. 인생의 사계를 모두 다룬 교과서적인 책은 심리학자 대니얼 레빈슨의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이대출판부, 2003)과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 2004)이다. 책은 원고를 쓴 이후에야 생각이 나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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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80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분량상 기사에서 빠진 한 문장을 채워놓고 비문 하나를 바로잡았다). 담비사 모요의 <죽은 원조>(알마, 2012)가 지난주에 고른 책이었다. 지난번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 리뷰까지 이번 서평집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에 들어갔으니까 이 리뷰부터는 다음 서평집에 포함되겠다(2년후쯤?). 담비사 모요는 하버드대학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제자로 <미국이 파산하는 날>(중앙북스, 2011)을 통해 먼저 소개된 바 있다. 퍼거슨은 책의 추천사를 쓰고 있기도 하다.

 

 

 

주간경향(02. 06. 19) 아프리카의 빈곤을 부추긴 원조정책

 

1985년 7월 13일 전세계 15억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라이드 에이드(Live Aid)’ 콘서트가 개최됐다. 아일랜드 가수 밥 겔도프가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해 기획한 자선공연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도 그 시청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여느 고등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팝음악을 즐겨듣던 10대였는지라 쟁쟁한 팝스타들이 출연했던 콘서트 놓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선공연이라는 명분도 훌륭하지 않은가. 하지만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잠비아 출신의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의 <죽은 원조>(알마)는 그 ‘라이브 에이드’의 이면에 대해서, 원조의 어두운 진실에 대해서 폭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책의 원제는 ‘데드 에이드(Dead Aid)’. 물론 ‘라이브 에이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역설적이지만 저자는 ‘살아있는 원조’의 대안으로 ‘죽은 원조’를 제시한다. 원조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원조를 없애는 것이 ‘죽은 원조’ 전략이다. 왜 원조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원조에 중독된 아프리카의 현실이 마약 중독자의 처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원조에서 벗어나는 일이 당장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테지만 원조 의존적인 아프리카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70년대보다 낮아져 있고, 하루 1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체 7억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다. 특히 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은 전세계에서 빈민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다. 평균수명은 세계 최저이며 문맹률은 가장 높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아프리카대륙의 50% 가량이 비민주적 체제하에 놓여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아프리카의 자연적 조건 탓인가? 아니면, 아프리카인들이 특별히 무능하고 그 지도자들이 선천적으로 더 타락하기 쉬운 때문인가? 저자는 의외의 답을 제시한다. 모두가 원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각 정부에 차관이나 증여의 형태로 대규모의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원조다. 그런데 어째서 이 원조가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되었나? 발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유럽 경제의 재건을 위해 원조금을 제공한 마셜플랜이었다. 마셜플랜의 성공이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고, 아프리카가 최적의 후보지였다. 냉전체제하에서 지정학적 영향력을 고수하려는 패권국가들의 대결의식도 원조 경쟁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런 원조가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이었다면? 르완다의 폴 카가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1970년대 이후 3000억 달러 이상의 원조금이 아프리카대륙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인력 개발에서 이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저자는 특히 원조가 권력자들의 부패를 가장 많이 ‘원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해외 원조의 유입은 국민들에 대한 정부의 재정 의존도를 낮추기 때문에 중산층과 시민사회를 약화시킨다. 그리고 원조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분쟁을 촉발함으로써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심지어는 내전의 잠재적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니 모든 원조가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저자가 보기에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는 분명 실패작이다. 애초에 전혀 다른 조건과 환경에 놓인 아프리카대륙 국가들에게 마셜플랜과 같은 모델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서방식 민주주의가 아프리카 경제의 구제책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에 불과하다.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의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간과한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사례 외에도 피노체트의 칠레와 후지모리의 페루는 민주주의 없이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곧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만 거꾸로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아프리카는 원조로부터의 출구 전략이 절실하다. 라이브 에이드의 전자기타 소리보다 더 강하게 귓전을 때리는 “원조에 반대한다!”는 절규를 들으며 아프리카의 현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12. 06. 12.

 

P.S. 마감에 쫓겨 급하게 쓰는 와중에 번역도 한 대목을 확인하느라 원고가 더 지체됐었다. 서두에서 저자가 오늘날 아프리카 현황에 대해 정리해주는 곳이다.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350만 명이 넘는 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은 전 세계에서 빈민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전 세계 빈민의 약 50퍼센트가 이곳에 몰려 있다."(30쪽)

뭔가 문제인가? '350만 명'이란 숫자다. 너무 적은 숫자여서 아마존에서 원문을 확인해보니 'over half of the 700 million'을  그렇게 잘못 옮긴 거였다. 7억의 절반 이상이니까 '350만 명'이 아니라 '3억 5천만 명' 이상이어야 한다.

 

 

 

한편, 책을 읽은 뒤에 그 여파로 주문한 책은 중국의 아프리카 공략을 다룬 <차이나프리카>(에코리브르, 2009)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후마니타스, 2008), <지속가능한 민주주의>(한울, 2001), <민주주의와 시장>(한울, 2010) 등 아담 쉐보르스키의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이다(<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구입했던 듯싶은데 소재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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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와 함께 이번주에 나오는 서평집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의 표지를 올려놓는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이어지는 두번째 서평집이고 제목은 그런 의미를 담았다. 이번주 목요일 저녁쯤이나 나는 책을 받아보게 될 듯싶다...

 

 

12.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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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에 출간되는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의 표지를 올려놓는다. 세계문학에 대해 그간에 쓴 글들을 '세계명작 다시 읽기'와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두 부로 나눠서 묶은 책이다. 주로 세계문학 고전에 대한 강의를 오래 해오고 있는 터여서 책은 앞으로도 여럿 더 내게 될 듯싶다.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는 일종의 출사표인 셈이다...

 

 

12. 06. 08.

 

P.S. 내주엔 서평집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도 같이 출간된다. 시기가 서로 맞물려 아예 출간 일정을 같게 잡았다. 서평집 표지도 조만간 올려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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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오전에 방한중인 마이클 샌델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한겨레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고, 비교적 많은 분량이 지면에 실리게 됐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와이즈베리, 2012) 출간이 이번 방한과 인터뷰의 계기가 됐지만 개인적으론 '공공철학자로서 샌델'이란 모습이 드러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동행했던 최원형 기자의 정리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2. 06. 04) 마이클 샌델 “내 철학은 민주적 시민정신…”

 

‘인터넷 서평꾼’ 이현우, 마이클 샌델을 만나다

2010년 국내 출간된 마이클 샌델(59)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치철학서로는 드물게 100만부 넘게 팔리는 등 ‘공정사회’ 담론과 맞물려 열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샌델로부터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즉각적인 대답을 얻어내려 하거나, 샌델을 보수적인 ‘공동체주의자’로 규정하는 등 그의 입장을 곡해하거나 비판하는 흐름도 적지 않았다. 지난 1일 서울 한 호텔에서 최근 새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들고 방한한 샌델을 ‘인터넷 서평꾼’인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가 만났다. 이번 만남은 샌델의 정체성이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공적 토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공철학자’임을 새삼 확인시켜줬다. 샌델은 이날 저녁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강연에도 나와 ‘팝가수 레이디 가가 공연에 암표는 허용될 수 있는가’ ‘가수 비나 축구선수 박주영이 군 복무를 면제받아야 하는가’ 등 일상생활 속의 도덕적 딜레마들을 특유의 화법으로 제시하며 1만4000여명의 청중들과 토론하기도 했다.

 

 

 

이현우(이하 이) 당신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놓고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반향이 일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또 책이 한국 사회에서 수용되는 과정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은 혹시 없는가? 한국 지식인층에서는 당신의 책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꽤 나오기도 했다. 특히 당신의 철학적 입장을 ‘공동체주의’로 생각하고 자민족중심주의나 공동체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이클 샌델(이하 샌델) 오래전부터 있었던 오해다.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국내에선 <정의의 한계>로 소개됐다) 2판 서문을 통해 똑같이 공동체주의라고 불리더라도 내가 동의하지 않는 공동체주의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최근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가 국내에 소개돼 여태까지 한국에서 빚어진 오해는 조금 불식되리라 본다. 이 책에서 당신의 입장을 공동체주의와 구분짓기 위해 ‘공화주의’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당신을 ‘공화주의자’로 이해해도 좋은가?

 

샌델 그렇게 부를 수 있다. 공화주의는 시민 생활과 민주주의적 시민정신의 미덕 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자유주의·공동체주의와 다른, 그 사이에 있는 제3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철학’을 강조하는 입장을 드러낸 <왜 도덕인가?>(책의 원제는 ‘공공철학’)를 쓰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익숙지 않은 개념인데, 공공철학이 무엇인지, 그 필요성이나 의의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샌델 공공철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포함해 나의 전체 저술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다. 철학적인 생각들을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삶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취지다. 사생활에서나 시민적 삶에서나 철학적 문제를 포함한 중요한 문제들, 곧 정의가 무엇이고 공동선이란 무엇인지, 시민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시장에서 돈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책을 관통하는 관심은 (삶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활성화하고 논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대학의 학자들만이 아니라 민주시민으로서 우리 모두가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 공공철학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공공철학에 대한 열정은 어떤 계기로 생겼나? 철학을 처음 공부할 때부터 있었던 것인가?

 

샌델 고등학교 시절부터 토론을 좋아했다. 언제나 정치와 정치적 논의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고, 대학에 와서도 철학보다는 정치, 역사, 경제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졌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부터 철학에 매혹됐고, 학위를 딴 뒤에도 정치적인 토론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번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당신은 시장경제를 도구로서 갖고 있던 사회가 시장이 삶의 모든 영역을 잠식하게 하는 ‘시장사회’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하면서 ‘불평등’과 ‘부패’의 문제를 다뤘다. 두 가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 최근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점거하라’(오큐파이) 시위 운동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샌델 돈과 시장이 건강, 교육, 가족 생활, 시민 생활 등과 같은 영역에까지 확대되는 것에 대해 ‘불평등’과 ‘부패’ 두 가지 관점에 근거한 우려가 있다. 예컨대 돈을 써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면, 돈으로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없는 부모들에게는 불공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또한 대학 진학의 원래 의미와 목적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부패’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은 학문적 우수성을 추구함으로써 명예를 얻고자 하는곳이지, 경제적 수익을 추구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공정성에 근거한 반대와, 부패에 근거한 반대를 구분해야 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우리는 고등교육에 있어 공정성뿐만 아니라 재화의 존엄성까지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점거하라’ 시위 운동은 불평등에 관한 문제제기다. 대중들은 ‘긴급구제’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들의 세금으로 월가와 은행을 구제하는 것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월가와 은행들은 경기가 좋을 때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 경제 위기를 자초했는데, 그들이 일으킨 손실은 국민 세금으로 메우게 됐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가 일어난 뒤로 이런 불공평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고, 이 문제는 아직 풀리지 못한 상태다.

 

새 책에서 경제학자들이 옹호하는 ‘인센티브’에 비판을 가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샌델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효율성을 근거로 들며 내 비판에 반대한다. 그들은 시장은 중립적이어서 재화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경제적 효율성만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며, 비시장적인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이나 자동차 같은 물질적 재화는 누군가 나에게 팔든, 선물로 주든 그 가치가 변하지 않고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선생님과 학생, 민주적 시민들 사이의 관계, 교육이나 건강 등의 영역에는 비시장적인 가치가 있고, 여기에 시장 메커니즘을 적용하면 시장적 가치가 비시장적 가치를 밀어내게 된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당신은 책 속에서 “미국의 경우 시장경제를 가진 사회에서 시장사회로 이행하는 데 30년이 걸렸고, 그건 공적토론이 약화됐던 시기와 일치한다”고 봤다. 그렇다면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또 다시 30년 이상이 걸릴까?

 

샌델 좋은 질문이지만 답은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 이스라엘의 어린이집 사례가 있다. 아이를 찾으러 늦게 오는 부모들을 일찍 오게 하려는 생각으로 벌금을 매겼더니, 벌금을 ‘요금’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늦게 온 부모들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시장적인 가치가 비시장적인 가치를 몰아낸 대표적인 경우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일을 겪은 뒤 벌금 제도를 폐지했지만 그 뒤로 더 많은 부모가 더 늦게 오게 됐다는 점이다. 의무감, 책임감 같은 비시장적 가치가 인센티브에 근거한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해체·잠식·변질되면, 다시 복원시키기가 어렵다. 물론 대중은 지난 30년 동안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런 변화를 반영한 정치적인 논의도 최근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오직 시간만이 알 수 있다.

 

당신은 ‘시장 대 도덕’의 프레임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현재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시장을 도덕화하려는 시도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덕적인 시장과 자본주의, 박애적 자본주의 등 ‘착한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다. 당신은 ‘시장은 도덕적일 수 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어 이와는 입장이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샌델 그런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견해에도 동의한다. ‘도덕적 시장’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텐데, 그것이 교육, 건강, 시민·가족 생활 등의 영역에 시장이 영향을 미칠 수 없도록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나의 견해와 일치한다.

 

나는 ‘도덕적 시장’이라는 것이 하나의 형용모순으로서,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샌델 나는 시장이 어디에 속하고 어디에 속하지 않은지에 대한 공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 시장이 어떤 때에 ‘공공선’(public good)에 도움이 되며, 또 어떤 때에는 비시장적인 가치를 해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토스터, 텔레비전과 같은 물질적 재화에 대한 수요가 있을 때에 시장은 효과적인 도구다. 그러나 건강, 교육, 인간관계, 시민·가족 생활 등의 영역에서 시장적 가치와 돈은 비시장적인 가치를 해친다. 따라서 인간 활동의 어떤 영역이 시장에 의해 바람직하게 지배되고, 어떤 영역이 시장 대신 다른 가치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는 것인가 등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센티브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가? 인센티브가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는가?

 

샌델 인센티브 자체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인센티브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들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마다 보상으로 돈을 주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돈을 받기 위해 책을 읽지만, 점점 재미를 붙이면 나중엔 돈을 받지 않아도 독서를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돈을 줄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읽는 잘못된 습관만을 주게 될 수도 있다. 이게 내가 걱정하는 바다.

 

당신이 말하는 공적인 토론은 강의실 바깥에서도 유효한가? 미국이나 한국이나 현실 속 공론장은 왜곡되어 있기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최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결혼을 지지했다가 보수파들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에서는 최근 진보정당이 내부 경선 과정의 부정·부실 의혹 때문에 많은 도덕적 비난을 사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 도덕적 가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

 

샌델 공적인 토론은 강의실 바깥에서도 물론 유효하다. 당신의 말대로 현실 정치에서는 왜곡도 생겨난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행위들은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 그걸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적 담론을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생각을 진지하게 견지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설득의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설사 그것이 왜곡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더라도 말이다.

 

한국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그 (민주적) 시스템을 남용할 위험을 안고 있다. 돈의 위력이 정치와 정치운동에서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은 그런 남용의 한 사례다. 이는 미국 사회도 늘 갖고 있는 문제다. 돈의 위력이 커질수록 부패가 생기기 마련이고, 이는 민주주의적 평등의 이상과 시민들의 평등한 목소리를 왜곡시킨다.

 

공적 토론을 위한 역량을 쌓기 위해선 ‘독서’가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마침 올해는 한국 정부가 정한 ‘독서의 해’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 권 정도로 굉장히 낮은 수준이다. 원활한 공적 토론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독서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샌델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독서는 시민으로 하여금 역사와 경제, 현재 세계적인 이슈, 다른 사회 등에 대해 알게 해준다. 그런데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무엇을 읽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교육, 역사, 경제, 철학 등을 아는 것이다. (독서는) 양보다 질이다.(정리 최원형 기자)

 

12.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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