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517141831§ion=03). 수주 전에 존 올콕의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동아시아, 2013)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오늘 오전에야 쓴 것이다. 독서가 더디게 진행돼 리뷰도 예정보다 늦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생물학을 바라보는 입각점을 마련할 수 있어서 유익했다.

 

 

 

프레시안(13. 05. 17) 얼음물 테러당한 하버드대 교수, '유전자 결정론자'?

 

존 올콕의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김산하·최재천 옮김, 동아시아 펴냄, 이하 '사회생물학의 승리')는 '사회생물학 논쟁'의 중간 결산 같은 책이다. 제목에 '다윈 에드워드 윌슨'이 들어간 건 군더더기인데(두 사람의 인명을 그렇게 병기한 의도는 어림해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 원제는 좀 더 간명하게 <사회생물학의 승리>이고 2001년에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왔다.

 

물론 과학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신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책이다. 사회생물학 쪽으로도 지난 10년간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나왔을 법하니까. 그럼에도 저자가 '승리'라는 말을 쓸 수 있었다면 그맘때에도 대세는 충분히 기울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까. 그렇다면 사회생물학 논쟁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에서 '사회생물학의 승리'를 말할 수 있는가가 일차적인 요점이겠다.

 

 

먼저 저자가 서두에서 묘사한 유명한 에피소드를 음미해본다. 1978년 2월 에드워드 윌슨이 미국과학진흥회의 연례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 젊은 여성이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가 머리 위에다 얼음물 한 주전자를 쏟아 부었다. 그러자 공모자들이 연단에 올라와 윌슨을 조롱하며 플래카드를 흔들어댔다.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교수이며 개미를 비롯한 사회성 곤충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학술회의장에서 당한 봉변의 전말이다.

 

 

요즘처럼 스캔들이 넘쳐 나는 시대에는 뉴스거리가 되기도 힘들지 모르지만 과학자사회에선 분명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윌슨은 어째서 비난과 조롱의 표적이 된 것인가. '사회생물학'이란 말을 탄생시킨 1975년 작 <사회생물학>(이병훈 옮김, 민음사 펴냄) 때문이다(윌슨은 이 책으로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란 별칭을 얻는다). "하등동물인 아메바의 군체에서부터 현대 인간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행동의 사회학적 기초를 면밀히 탐구한" 책이다.

 

윌슨의 정의대로라면 사회생물학은 '모든 사회성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체계적 연구'이다. 이것이 왜 문제되는가. 그 '사회성 동물'에 인간도 포함돼서다. 윌슨은 대형 말벌인 타란툴라 호크의 사회행동이나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똑같은 학문적 대상으로 다루고, 그렇게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생물학>의 마지막 장을 인간에 할애하는데 그래봐야 전체 분량의 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국내에 <사회생물학 1,2>가 번역돼 나왔을 때 관심을 갖고 읽은 대목은 주로 그 마지막 장이었지만, 그의 '상식적인' 주장은 일부 동료 학자들과 대중에게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인 현상 유지를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이론을 창안했다"는 비난이 그에게 퍼부어졌다. 소위 '사회생물학 논쟁'의 발발이다.

 

 

 

사회생물학 논쟁과 관련해서는 프란츠 부케티츠의 <사회생물학 논쟁>(김영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피터 싱어의 <사회생물학과 윤리>(김성한 옮김, 연암서가 펴냄), 국내 학자들이 쓴 <사회생물학 대논쟁>(김동광·김세균·김환석 외 지음, 이음 펴냄) 등도 참고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책은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스티븐 로우즈·R. C. 르원틴·레온 J. 카민 외 지음, 이상원 옮김, 한울 펴냄)이다. 놀랍게도 저자들 가운데는 하버드 대학교의 동료 교수인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와 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 등이 포함돼 있었다. 과학계에서 윌슨만큼의 인지도를 갖고 있는 명망가들이 사회생물학에 대해 나치의 우생학과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공격했고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 데 성공했다.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는 문구 자체가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유전자 결정론이란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준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결정론은 사회생물학 반대론자뿐 아니라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처드 도킨스를 포함해 전문 진화생물학자라면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반대 진영에서는 '사회생물학=유전자 결정론'이라는 프레임을 교묘하게 써먹었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손쉬운 비판이 여론의 동조를 끌어내는 데 유력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고의성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사회생물학 논쟁의 시작은 '결정론으로서 사회생물학'이라는 허수아비 비판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

 

저자 존 올콕은 윌슨의 회고적 분석에 따라서(윌슨의 자서전 <자연주의자>(이병훈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참고할 수 있다) 사회생물학 논쟁이 1970년대 중반 미국 대학가의 분위기와 맞물려 진행됐다고 본다.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캠퍼스 내 좌파 교수와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란 개념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행동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사회를 개조하면 자연스레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관점이었다. 하지만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고 "가난한 자와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윌슨을 포함해 진화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배계급의 하수인'으로 몰아붙였다. 사회생물학이 오해와 부정적인 평판을 덮어쓰게 된 배경이다.

 

국내에도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번역되고 연이어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가 소개됨으로써, 자세한 학문적 논쟁을 알 수 없는 독자로서는 <사회생물학>의 무리한 주장(유전자 결정론)이 다른 과학자들에게 비판받은 것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벌써 20년 전 상황이다. <사회생물학의 승리>는 바로 그러한 이해를 교정해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저자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회생물학이 불필요한 적개심을 얻는 데 공헌한 잘못된 오해들을 규명하고 제거하여 사회생물학 연구의 진정한 본성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저자가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오해들을 규명한다고 하니까 어떤 오해들인지에 대해서도 일별해볼 필요는 있겠다. 다음의 여덟 가지이다.

(1)사회생물학은 윌슨 개인의 새로운 이론이다.
(2)사회생물학은 인간의 행동을 주 관심대상으로 삼는다.
(3)사회생물학은 종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형질의 진화를 다룬다.
(4)사회생물학은 어떤 행동 형질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전제에 기초한 환원주의적 분야이다.
(5)사회생물학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행동을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비교한다.
(6)사회생물학은 검증되지 않고 검증 불가능한, 그럴싸한 이야기를 생산하는 데 특화된 공론이다.
(7)사회생물학은 학습된 행동이나 인간의 문화적 전통을 설명하지 못하며 오직 경직된 본능만을 다룬다.
(8)사회생물학은 어떤 행동을 '자연적' 혹은 '진화된' 것으로 명명함으로써 좋지 않은 인간의 행동을 모두 정당화한다.

사회생물학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 독자라면 당연히 이 책에 대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독서 면제니까. 하지만 사회생물학에 대해 좀 들어본 적이 있고,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해온 독자라면 이 책은 요긴한 도움을 줄 수 있다.(다만 저자가 에드워드 윌슨이나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필력을 자랑하는 건 아니어서 정색하고 읽어야 한다는 조건은 붙는다. 개인적인 독후감으로는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더 재미있다.)

 

가령 사회생물학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자이자 그에 대한 오해의 유포자이기도 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견해를 보자. 그는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모든 인간행동의 범주가 가능하지만 어느 것으로도 편향되지 않은 뇌를 상정하는 생물학적 잠재성이라는 사상과 특정 행동적 특질에 해당하는 특정 유전자를 상정하는 생물학적 결정론 사상을 대치시킬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윌슨의 차이를 '생물학적 잠재성' 대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대립으로 규정한다. 열렬한 다윈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굴드는 인간의 문화적 발전에 대해서만큼은 진화의 과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사회과학자들이 주로 이러한 입장에 서는 것은 당연하지만 굴드는 생물학자라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이렇듯 '문화가 전부'라고 보는 입장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빈 서판 이론'이고, 문화결정론이다.

 

일례로 집단학살에 대한 설명을 비교해보자면, 굴드는 우리의 뇌가 어떠한 경향성도 갖고 있지 않기에 집단학살은 보편적이지 않고 그 분포양상도 무작위적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살인적인 집단의 수만큼 평화로운 집단이 있다"는 게 굴드의 생각이고 예측이다. 굴드가 보기에 결정론적 생물학(사회생물학)은 인간에게는 집단살인 유전자가 있고 그래서 집단살인은 보편적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렇게 보는 사회생물학자는 없다는 점에서 이 역시 전형적인 허수아비 비판이다.

 

 

 

윌슨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유전자는 문화를 가죽 끈으로 묶어놓고 있다. 끈은 상당히 길지만, 가치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유전자 풀에 미치는 결과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속박될 것이다"이라고 말한 바 있다.(굴드는 이런 정도의 입장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모든 것은 유전적 성향과 환경의 만남에서 결정된다.

 

굴드의 예측과는 반대로 저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에서 이용한 데이터를 참고하여 집단학살이 역사가 기록된 이래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일어났다는 걸 밝힌다. 결코 20세기 문명의 발명품이 아닌 것이다. 더불어 "아마도 집단학살의 가장 흔한 동인은 군사적으로 강한 자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의 당을 차지하려고 하면서 그들의 저항과 맞설 때일 것"이라는 다이아몬드의 지적대로, 집단학살에는 어떤 패턴이 있다. 곧 집단학살이 임의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자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자원을 확보하려는 행동의 결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사회생물학의 민감한 이슈 가운데 하나인 강간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다른 동물들에서나 인간에게서 강간이 유전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진화적 적응 전략이라고 본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강간이 성적 욕망과 무관하며 단지 잔혹한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힘과 지배의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강간을 '자연적'이라고 여길 경우 강간범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만약 강간이 성적 욕망과 무관하다면 피해 여성의 분포는 살인 피해자의 연령 분포와 비슷하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생식력이 가장 높은 연령대에 집중돼 있다. "24세 여성이 강간을 당한 확률은 54세 여성이 당할 확률보다 약 4~20배 정도 높았다"고 보고된다. 강간이 성욕과 무관하다는 주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통계다.

 

강간은 남성에게 진화한 심리적 기전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강간이 적응적인 조건부 전략이라는 가설에 따르면 강간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거나 처벌의 가능성이 낮은 조건과 관련성이 있다. 여성의 의지에 따라 짝을 맺을 가능성이 적거나 없는 남성에게서, 그리고 전투 중인 병사처럼 처벌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강간이 발생할 확률은 높아진다.

 

하지만 현재의 환경은 우리의 뇌가 진화한 환경과 다르며 강간 같은 행동이 유전자에 이익을 가져다줄 확률도 낮아졌다. 게다가 자주 오해받는 것처럼 어떤 행동이 '자연적'이라고 해서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생물학이 어떤 행동을 진화적 적응 행동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좋지 않은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진화된 심리의 독재'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

 

<사회생물학의 승리>는 사회생물학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식시킴과 동시에 우리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훨씬 더 심화시켜준다. 교양학술서의 난이도를 갖고 있는 책이지만 "사회생물학의 내용과 역사에 대한 명쾌하고 유창하며 정확한 저작"이라는 에드워드 윌슨의 평가에 어긋남이 없다.

 

13. 05. 17.

 

P.S. 리뷰를 쓴 김에 번역본의 오류도 한두 가지 지적한다. 책의 장제목이나 절제목은 편집자의 판단에 따라 새로 붙여질 수 있지만(가령 9장의 원제는 '사회생물학의 실제 적용(The Practical Applications of Sociobiology)'이지만 번역본에서는 '인간과 사회생물학'이라고 붙여졌다) 9장의 첫 절 제목이 '집단학살'인 건 착오로 보인다. 그런 내용이 안 나올 뿐더러(집단학살은 7장 끝부분에 나온다) 원제는 '사회에 대한 위협(A Danger to society?)'이다. 번역도 한 군데 지적하면, 7장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의 말을 번역본은 이렇게 인용했다.

 

"진화적 관점이 도움이 되는 경우는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것에 대해서 뭔가를 가르쳐줄 때이다. 가령 학살이 어떤 유전자에 의해 유발된다고 해도... 인류 역사는 결정론이 아니라 잠재적 가능성을 입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적 양식의 모든 특징이 결정적이기보다는 유연성을 보인다는 점을 통에서 우리는 학살과 같은 문화적 현상이 왜 진화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209쪽)

마지막 문장의 '통에서'는 '통해서'의 오자다. 처음 두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An evolutionary speculation can only help if it teaches us something we don't know already - if, for example, we learned that genocide was biologically enjoined be certain genes... but the observational facts of human history speak against determination and only for potentiality."(143쪽)
번역본은 강조한 if-절을 첫 문장과 분리해서 이해했는데, 내 생각엔 첫 문장에 이어지는 것이다. 굴드가 보기엔 집단학살이 특정 유전자에 의해 유발된다는 식이면 진화적 고찰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사는 결정론보다는 잠재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집단학살 유전자'가 집단학살을 유발한다는 식의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게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는 굴드의 주된 이유인데(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면 사회생물학, 더 나아가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말해줄 게 없다고 그는 믿는다?!), 본문에서 지적한 대로 이건 굴드의 편의적인 이해이자 허수아비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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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2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의 <불교 파시즘>(교양인, 2013)을 읽고 적었다. 전작 <전쟁과 선>(인간사랑, 2009)와 같이 읽어도 되고 따로 읽어도 무방하다. 개인적으로 <전쟁과 선>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서였던 듯하다... 

 

 

 

주간경향(13. 05. 21) 일본 군국주의와 선불교는 어떻게 결합했나

 

미국의 불교학자이자 승려이기도 한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의 <불교 파시즘>은 불교에 대해서, 더 넓게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원제는 <선과 전쟁 이야기(Zen War Stories)>로 전작 <전쟁과 선>(인간사랑·2009)의 속편이다. 전작은 일본의 고명한 선승들이 군국주의와 전쟁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걸 폭로하여 일본뿐 아니라 서양의 선 수행 공동체에 큰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하지만 저자의 초점은 폭로가 아니라 불교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불법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엄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특정 선사가 군국주의자들과 맺은 관계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자는 먼저 일본의 많은 선불교 지도자들이 1930∼1940년대에 선을 무엇이라고 믿고 이해했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설명해준다. 일례로 나카지마 겐조 선사는 15세에 정식으로 승려가 된 인물로 21세 때 자진해서 입대하여 일본제국 해군에서 약 10년간 복무했다. 그가 80세를 넘기고 쓴 회고록에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경험담이 포함돼 있는데, 전우들의 비참한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깊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일본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고통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겐조 선사는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대동아전쟁의 잘못은 전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패배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이런 태도는 겐조 선사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그의 스승인 야마모토 겐포 선사의 설법에 따르면 “절대자인 부처님께서 사회의 화합을 깨뜨리는 자들이 있을 때 그들을 죽이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듯 깨달은 사람들은 선악과 생사를 초월한다는 선불교의 믿음이 겐조 선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결과적으론 이기주의적 무관심을 낳았다.

 



선악과 생사의 초월이 선 수행자들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군인에게 필요한 자질이다. 선불교와 군국주의가 자연스레 결합될 수 있는 배경인데, 1942년 당시 ‘전쟁의 신’으로도 불렸다는 육군 장교 스기모토 고로는 자신에게 선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백하면서 “선이 군인에게 필요한 이유는 일본인, 특히 군인이 모두 자아를 없애고 자기를 제거하여 군신일여(君臣一如)의 정신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미천한 나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사생관이 천황 숭배와 결합되면 그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 된다.

전쟁 말기 일본 선불교의 지도적 인사들은 천황폐하의 1억 신민은 모두 명예로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적이 보이면 죽여야 한다. 거짓을 타파하고 진실을 확립해야 한다. 이것은 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면서 모든 국민이 결사항전에 나서는 ‘국민 절멸 체제’를 정당화했다. ‘나’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은 마당에 적의 생명이 중요할 리 없었다. 군인의 최고 영예는 죽어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살아서 포로로 잡히는 일은 가장 큰 치욕이었다. 일본군이 전쟁포로들을 유난히 경멸하고 학대한 것은 그런 이유, 곧 그들이 명예롭게 죽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천황을 모시는 ‘황도 불교’가 궁극에는 ‘불교 파시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저자는 보다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윤리의 정립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것은 민족적 정체성이나 국가적 정체성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윤리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윤리다. 비단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인이라면 온갖 ‘성전(聖戰)’이라는 미명 아래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13.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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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23-01-07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러시아문학에 관한 선생님의 강연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올해도 더욱 건강하시고 다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로쟈 2023-01-08 21:0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이번달 책&(418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클래식 이야기'다. 클래식에는 문외한인 편에 속하지만, 클래식 전문가나 애호가들의 책은 그것대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클래식 감상법은 간명한데, 반복해서 들으라는 것이다... 

 

 

 

책&(13년 5월호) 음악이 흐르는 책

 

5월은 가정의 달이면서 ‘계절의 여왕’이기도 하다. 싱그러운 계절을 만끽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클래식 음악에 관한 책을 몇 권 골랐다. 전문가 수준의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음악의 감동은 누구에게나 손을 내민다. 하지만 막상 그 손을 맞잡고 환희에 도달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다.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5월에는 클래식과의 속 깊은 데이트를 주선해주는 책들을 통해서 음악과의 만남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보아도 좋겠다.


클래식의 문외한이라도 거리낌 없이 손에 들 만한 책은 조윤범의 <나는 왜 감동하는가>(문학동네, 2013)이다. 현악사중주단의 리더이면서 칼럼니스트이고 음악FM방송의 DJ이기도 한 저자가 클래식 안과 밖의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책으로도 묶인 <조윤범의 파워클래식1,2> 강의로 유명한 그는 음악의 감동이 자연스러운 것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감동은 이해와 공감, 그리고 표현이라는 과정을 거쳐야지 도달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가들은 주변에 많이 있다. 지금 당장에라도 음반을 감상하거나 연주 동영상을 관람할 수 있으니까. 다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이해와 공감이고, 또한 이를 표현하려는 노력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방안에다 여러 개의 실을 빨랫줄처럼 매달고 악기 이름을 적은 메모지를 실에 붙여서 자기만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레코드판으로 듣더라도 마치 음악회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보에와 플룻이 나오면 가운데를 쳐다봤고, 바이올린이 나오면 왼쪽 앞을, 첼로가 나오면 오른쪽 앞을 쳐다봤다.” 물론 그렇게 듣는 것이 습관이 되자 그는 눈을 감고 들어도 악기들의 위치를 상상할 수 있었다. 어떤 악기가 어떤 소리를 내며 지금 그 소리들이 어떻게 어우러지고 있는가를 느끼는 것은 그런 반복적인 청음의 결과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점에서 클래식도 예외는 아니다.


대중과 가장 친숙한 지휘자이자 음악 해설가인 금난새의 <금난새의 교향곡 여행>(아트북스, 2012)은 한국인에게 클래식의 대명사로 통하는 ‘불멸의 교향곡’ 11작품에 대한 해설서이다. ‘교향곡이란 무엇인가’란 친절한 소개에서부터 하이든의 교향곡 ‘고별’을 거쳐 말러의 교향곡 1번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 대한 해설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교향곡에는 “작곡가의 음악적 정서뿐만 아니라 시대정신과 사상, 감정, 나아가 문학적인 내용 등 모든 세계관이 담겨” 있다. 교향곡이 ‘소리로 빚은 위대한 문화유산’인 것은 그 때문이다. 저자는 그 교향곡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친절하면서 미더운 가이드를 자임한다. 


연주자나 지휘자가 아니라고 해서, 곧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해서 클래식 애호가의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시절부터 클래식 음반을 쫓아다니다 결국 일간지의 음악담당 기자가 된 문학수의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에는 클래식에 대한 저자의 열정과 조예가 여실히 담겨 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클래식과 친해질 수 있는가란 물음에 답하여, “이 곡 저 곡 많이 들으려고 하지 말고, 같은 곡을 자꾸 반복해 들으세요.”라고 조언한다. 반복적으로 들음으로써 곡의 흐름에 익숙해지고, 음의 전체 구조가 머릿속에 들어올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음악이 주는 감흥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물론 바쁜 일상에서 꽤 긴 시간의 클래식을 반복해서 듣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시간을 바치지 않는다면 음악은 결코 당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저자의 믿음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저자의 ‘클래식 읽기’에는 빈번한 술자리를 잊고 드라마 시청과 주말 등산을 포기하면서 음악에 바친 그의 시간이 집약돼 있다. 음악의 감동이 그런 ‘희생’을 보상해주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젊은 시절 그를 음악의 길로 이끈 대표적인 작품이 ‘혁명’이란 제목이 붙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라는 점이다. 금난새 역시 특별한 애정을 고백하면서 “가끔 쇼스타코비치가 저를 위해 작품을 썼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라고 언급한다. 클래식 애호가들의 이런 감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클래식 연주를 비교해서 듣는 것만큼 재미있다. 

 

 


한편 아무리 감동을 들먹여도 진지한 클래식 애호가가 되는 일이 부담스런 독자도 있을 법하다. 부담스럽지 않게 클래식을 살짝 비껴가고자 한다면 애초에 장일범, 정준호 등 클래식 멘토 7인이 쓴 <호모 클라시쿠스>(생각정원, 2012)를 읽고 방향을 틀어도 좋겠다. 클래식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거꾸로 빠져나오는 출구이기도 할 테니까. 7명의 사례를 읽다가 클래식 애호가의 기질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면 하는 수 없다. 류준하의 <내 삶의 변주곡 클래식>(현암사, 2012)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음악의 기쁨을 아는 젊은 클래식 애호가를 위한’ 책이다. 반면에 클래식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된다면 이민희의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팜파스, 2013)도 적당하다. 스물 네 곡의 음악이야기를 늦은 밤 라디오방송에서처럼 편안하게 들려준다. 헨델과 모차르트의 곡 이야기와 함께 자우림과 이상은의 노래 이야기도 담겨 있다.

 

13. 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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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강의차 읽은 게 계기가 돼 쑤퉁의 <쌀>(아고라, 2007)을 다뤘다. 얘깃거리가 많은 소설이지만, 제한된 분량에 맞추느라 오전 시간을 거의 잡아먹은 글이다. 쑤퉁의 작품은 여럿 소개돼 있으며 대부분 구입한 상태인데, 장편 중에서는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 2007)과 <뱀이 어떻게 날 수 있지>(문학동네, 2008) 등을 먼저 읽어보려고 한다. 한편, <쌀>은 <대홍기 쌀집>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됐는데(지나치게 선정적이란 이유로 7년간 상영 금지됐었다고), 어디서 구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한겨레(13. 05. 11) 지옥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남는 법

 

세상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어지럽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를 묻는 게 먼저인지도 모른다. 중국 작가 쑤퉁의 소설 <쌀>(아고라·2007)의 주인공 우룽은 난세를 버텨내지 못하고 그냥 황천길로 떠나는 건 억울할뿐더러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룽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 살아 있는 것, 둘째, 사람답게 사는 것. 일단은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고향 펑양수에 홍수가 나자 우룽은 석탄운송 열차에 몸을 싣고 낯선 도시로 온다. 사지(死地)가 된 고향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도시는 비정했고 사람들은 속악했다. 부두 건달패의 우두머리 아바오는 먹을 것을 구걸하는 우룽의 손을 발로 짓이기며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음식을 주겠다고 조롱한다. 고아인 우룽은 고향에서도 개보다 나을 게 없는 존재였지만 굶어죽지 않기 위해 건달들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신이 정말 개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면도 있다. 쌀 냄새에 이끌려 와장가의 대홍기 쌀집에 찾아간 우룽은 거렁뱅이 취급을 받자 밥그릇을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생존에 대한 욕구가 전부는 아니다. 그에겐 어엿한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 무보수로 일하게 된 쌀집 주인 펑 사장과 목욕탕에 가서 그의 등을 밀다가도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인데 왜 나만 항상 당신의 등을 밀어야 하는 거지?’라고 의문을 품는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모든 차별과 모욕을 마치 장부에 기입하듯 가슴에 새겨두었다가 철저하게 복수한다.

 

 

쌀집의 큰딸 쯔윈이 실력가 뤼 대감의 정부 노릇을 하면서도 그 하수인인 아바오와 정을 통하는 걸 알게 된 우룽은 뤼 대감에게 밀고의 편지를 보내 아바오를 죽게 만든다. 쯔윈이 아바오의 아이인지 뤼 대감의 아이인지 불확실한 아이를 임신하자 펑 사장은 우룽을 일단 데릴사위로 삼았다 제거하려고 한다. 하지만 명줄이 쇠심줄 같은 우룽은 악착같이 살아남아, 아들을 낳고 뤼 대감 댁으로 들어간 쯔윈 대신에 그 동생 치윈과 결혼하여 대홍기 쌀집의 주인이 된다. 쌀자루를 들고나가 부두 조직의 우두머리까지 된 장년의 우룽은 뤼 대감도 암살하고 마침내 도시의 실력자가 돼 꿈을 이룬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자신을 살인도 서슴지 않는 복수의 화신으로 만든 대가로 얻은 것이며, 성병으로 썩어가는 그의 육신처럼 무상하다.

 

모두가 복수를 벼르는 악인임에도 우룽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의 교훈 때문이지 싶다. 은전 두 닢을 준다고 하니까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청년의 손을 짓밟으며 우룽은 처음 도시에 왔을 때 아바오에게 당한 치욕을 상기한다. “복수심과 증오심이야말로 우리가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밑천”이라는 게 자존심을 지키지 못한 청년에게 가르쳐주고자 한 우룽의 교훈이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객차에 쌀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떠나는 우룽의 마지막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애초에 우룽의 꿈은 금의환향이다.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이 개가 아니라 어엿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는 것이다. 생니를 다 뽑고 이빨 전부를 금니로 해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쑤퉁의 <쌀>은 어엿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 증오와 복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세상의 지옥도를 보여준다.

 

13.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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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43호)에 실은 리뷰도 옮겨놓는다. '인문학을 공부하다' 특집인데, 내가 청탁받은 건 세 권의 인문서에 대한 검토였다. 제목에 모두 '인문학'이 들어가 있어서 '인문학 책'이라고 따로 작명을 했다(원래 쓰이는 말인지는 긴가민가). 불황 속에서도 읽히는 '인문학 책'의 매력과 아쉬움을 적었다. 그러고 보니 기획회의에는 상당히 오랜만에 글을 싣는다.

 

 

기획회의(13. 05. 05) '읽히는' 인문서의 시대

 

인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행히 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 ‘최근 인문학 분야 도서 중 어떤 책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짚어달라는 게 <기획회의> 편집자의 주문이기에. 인기 인문서의 원인 분석을 해달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인문학의 향방에 대해서도 뭔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란 불길한 예감도 든다. 인문학 책이 왜 읽히고 있으며(더 정확하게는 왜 팔리고 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더듬다 보면, 인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으며 우리 곁의 인문서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점검해보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거창한 문제는 일단 덮어두기로 한다. 나로선 부족한 역량과 분량을 얼마든지 핑계로 댈 수 있다. 익숙한 게 믿는 구석이다. 그냥 앞가림만 하기로 하자.  

 

통칭하면 ‘인문 분야 도서’이고 ‘인문서’이지만, ‘인문학 책’이라고 특정하게 되면 제목에(적어도 부제에) ‘인문학’이란 말이 들어간 책을 별도로 가리킨다. 이게 ‘업계 용어’로 등재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거기에 준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책들인가. 가령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서도 <숲의 인문학>(글항아리) <홍루몽 인문학>(휘닉스) 같은 제목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으며 심지어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행복한미래), <조선시대 어린이 인문학>(열린어린이) 같은 제목도 충격적이지 않다. ‘인문학’의 오지랖이 넓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해해줄 만하다. 인문서는 안 팔리는 책의 대명사이지만 특이하게도 언제부턴가 ‘인문학’이란 말은 독자를 유인하는 매끈한 미끼로 간주된다. 인문서는 안 읽어도 ‘인문학’에는 끌린다? 무슨 이유일까? 세 권의 책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일단 주현성의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더좋은책)에서부터 시작해보자. 2012년 10월에 출간돼 10만부 이상 판매됐다고 전해지는 책이다(그 정도면 인문서로서는 상반기 최대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제목이 말해주듯 전형적인 ‘인문학 책’이다.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이 부제. 무엇이 비결일까. 저자는 인문교양 분야 베스트셀러를 기획한 경력의 출판기획자라고 소개되지만 이 책이 데뷔작이다. 기획자로서의 감각이 내용 구성에 배여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시작하는"이란 문구가 독자들에게 어필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06년 대학 인문학의 위기 선언과 함께 시작된 대학 바깥의 역설적인 ‘인문학 붐’도 한 풀 꺾인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상황에서(서울대의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을 소개한 CEO 인문학> 같은 책도 몇 년 전에 나왔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금 시작하는"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 나로선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는 ‘재정비’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인문학 붐과 함께 다수의 관련서가 쏟아져 나왔고, 스타급 인문학자들도 탄생했으며, 인문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시대의 영웅’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기술을 모두 줄 수 있다”는 말로 인문학 열풍을 더 부채질했다. 그 결과 대학 내 인문학의 위상과는 무관하게 인문 지식과 인문학적 성찰의 가치에 대해선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가 됐다. ‘인문학’은 대접 받는 유행어가 됐다. 그래서 형성된 게 ‘이건 뭐지?’라는 궁금증과 뭔가 알아야 한다는 부담이 아닌가 싶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 전공자라면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이지만 다수의 비전공자에게는 다르게 비쳤을 법하다. 그들에게 ‘인문학’이란 말은 판독해야 할 시대의 상형문자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문학, 역사, 철학 책들에 두루두루 눈길을 주어보지만 쌓이는 건 두서없는 지식이고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안 그래도 뜬 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는 인문학 얘기들이 머릿속에서 정돈되지 않은 채로 나열돼 있는 상황이라고 할까.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의 등장배경이다. 더불어 "처음 만나는 인문학"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이어야 하는 이유라고도 말하고 싶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의 저자는 인문학과는 구면이지만, 그래도 아직 뭔지 잘 모르겠다는 독자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동안 많은 교양 입문서가 나왔지만 매우 산발적이거나 한 분야의 지식에만 치우쳐 있어, 인문 교양에 욕심을 내는 초심자들에게는 꽤 긴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필요한가.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인문서를 읽는 즉시 바로 소화할 수 있는, 그런 체계적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책”이다. 요컨대 체계적인 실전용 가이드북이라고 할까. ‘최소한의 인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곧바로 인문서 독서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저자가 자임한 역할이다. 그런 취지에서 고른 영역이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 이슈 등 여섯 가지라는 점은 이 책만의 특징이자 개성이다. ‘인문학의 핵심 여섯 분야’를 이렇게 꼽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은 독자의 필요와 눈높이에 맞는 기획과 콘텐츠를 통해서 인문서의 숨은 독자들을 끌어낸 공로를 십분 인정해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책의 독자들이 저자의 기대대로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인문서를 읽는 즉시 소화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가장 어렵게 여겨질 ‘현대의 철학’ 장만 하더라도 저자는 비트겐슈타인뿐만 아니라 콰인, 크립키 등의 전문적인 분석철학자까지 다룬다. 입문서라고는 하지만 ‘인문 교양’의 범위를 상당히 넓게 잡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비중을 고려하면 프로이트와 함께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상상계’라는 개념에다 ‘Imagery’라고 잘못 병기한 걸로 보아(‘the imaginary’ 대신에) 저자 자신이 성급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나 의심도 든다. 소쉬르 언어학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인간 이성을 구조로 대치함으로써 구조주의를 이성에 뿌리를 둔 기존의 철학과 분명히 다른 탈근대(탈이성)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고 한 대목도 요령부득이다. 짐작엔 ‘주체’를 ‘이성’으로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싶다. 때문에 분명 ‘흥미로운 지식의 향연’을 제공하고는 있지만, 독자가 가려서 즐겨야 한다는 조건은 붙는다. 물론 그렇게 가려서 즐길 만한 독자를 겨냥한 입문서가 아니라는 게 딜레마이긴 하지만.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북드라망) 역시 제목에 ‘인문학’이란 말이 들어간 ‘인문학 책’이다. 더불어 저자의 이름도 같이 들어가 있는 건 ‘고미숙’이란 이름이 이미 하나의 브랜드라는 걸 말해준다. ‘동의보감 삼종세트’의 마지막 권으로 나온 책은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와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서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은 독자에게는 가벼운 ‘몸 풀기’로 여겨지는 ‘사회비평적 에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대학이 지난 ‘지적 구심력’이 이미 끝났다는 것. “리모델링과 시설투자에 올인하는 사이, 대학은 한낱 ‘취업전선’이 되어 버렸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이제 대학에는 지성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대학이 지성을 포기하자 새로운 지성의 광장이 열렸고 ‘대중지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어떤 시대인가. “지식인이 대중의 흐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지성의 주체’가 되는” 시대다. 저자는 바로 그런 시대를 주도한 대표적 인문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은 그런 저자의 활달한 문체와 문제의식을 여일하게 담고 있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반복적이란 느낌도 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글이 ‘아기를 업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라는 점에서도 그렇다(양기 덩어리인 아이에겐 음기가 필요하다는 것, 등은 서늘하다는 것, 아기를 업으면 엄마가 자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세 가지 이유다). 인문학의 오지랖에 경탄할 밖에!

 

 

 

미국의 교육전문가 리 보틴스의 <부모 인문학>(유유)은 ‘교양 있는 아이로 키우는 2,500년 전통의 고전교육법’이 부제다. 고전 공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단단한 공부>나 <공부하는 삶>과 맥을 같이하고, 또한 이지성의 베스트셀러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와도 연결될 수 있는 책이다. ‘공장 교육’으로 전락한 오늘날 국가 주도의 공교육을 비판하면서 저자는 부모가 직접 자녀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는 ‘고전 공부법’을 주창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육은 다음 세대가 역사 속 위대한 고전과 대화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지 않는다”는 저자의 비판에 십분 공감하더라도 그의 전제까지 공유하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다. 어떤 전제인가. 부모들이야말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저자는 “12년 동안 효과적인 학교 교육을 받고도 아이들 공부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정도로 기초 지식을 배우지 못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라고 묻는데, 우리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 “고전 공부에 관심이 많은 부모는 양질의 학습 자료만 있으면 공부법을 습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에게 그런 학습 자료가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때문에 <부모 인문학>은 부모의 책임감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더라도 그 깨달음이 우리의 교육법을 바꾸게 해줄지는 미지수다.

 

어느 분야에서건 마찬가지겠지만 ‘읽히는’ 인문서도 비결과 한계를 갖는다.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틸까. 인문 지식과 인문학적 성찰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가라앉지 않기 전에 새로운 출구를 뚫어줄 ‘인문학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아니 굳이 ‘인문학’이란 말을 제목에 붙이지 않아도 인문서가 읽히는 시대를 고대한다.

 

13.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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