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는 순간, 떠나고 싶게 했던 책을 추천해 주세요!

벤은 사진가가 꿈인 신탁 관련 변호사입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히피짓도 하고, 집도 나오며 사진가가 되겠다고 노력하지만, 집에서의 원조가 끊기자, 꿈을 좇는 생활을 잠시 접고, 일단 변호사가 되어 돈을 벌기로 합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로펌 가장 구석의 지루한, 그러나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신탁분야 변호사이고, 신탁분야 변호사의 대빵은 벤과 비슷하게, 잠시 예술가(화가)의 꿈을 접고, 돈을 벌고 있는 잭입니다.

잭도, 벤도, 꿈을 접고 '잠시' 의 '잠시'라는 건, 이미 '돈', 즉, 편안한 생활을 '꿈' 대신 선택한 순간 '평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식탁 앞에 앉아 갖가지 물건들을 멍하게 보던 벤은 생각합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식탁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갖가지 물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흰 벽, 수공 소나무 캐비닛, 조리대, 주방 기구들, 장식장에 깔끔하게 쌓인 흰 웨지우드 접시들, 메모판에 핀으로 꽂은 가족사진, 냉장고를 장식한 학교 알림장과 애덤의 그림.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공간을 채우고, 시간을 채울 것을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 축적되면 인생이 되는 게 아닐까?
'물질적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가짜일 뿐이고, 언젠가 새롭게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등에 짊어진 건 그 물질적 안정의 누더기뿐이라는 걸.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소멸을 눈가림하기 위해 물질을 축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축적해놓은 게 안정되고 영원하다고 믿도록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꿈대신 돈을 선택한 아마추어 사진가이자 변호사인 벤의 이야기이자, 무명의 허세꾼인 사진가 게리의 이야기입니다. 벤이자 게리인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요.  

벤이 게리가 되었을 때, 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납니다. 그런 그가 뉴욕에서 지금까지 살아 온 그의 인생을 통째로 잘라버리고, 유령같이, 좀비같이, 미국을 횡단하다시피해서 달리고, 또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와이오밍을 거쳐 '몬태나' 입니다.   

 

"동이 트자마자 루트 22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방금 눈을 치웠지만 군데군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낭떠러지로 떨어져 마지막 노래를 부르기 직전 간신히 제동을 건 게 두 번쯤 되었다. 나는 이를 덜덜 떨며 시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엉금엉금 기었다. 히터를 세게 틀었지만 바깥 기온이 영하 13도라 별 효과가 없었다. 게리의 가죽점퍼와 카우보이부츠는 와이오밍의 겨울 날씨에 별 도움이 안 됐다. 

(중략)

차 안도 춥고 바깥도 추웠지만 지평선에서는 더할 수 없이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험준한 티턴산맥의 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죽비죽한 산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4,000미터 높이로 솟아올라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산맥에서는 친근감이나 포근한 느낌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구약성서 같은 태도를 지닌 산맥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경건하고, 무자비하며, 숙명적인 느낌이었다. 티턴산맥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현재 내 고민이 별것 아니게 느껴졌고, 인간은 그저 유한하고 덧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로 깨닫게 했다. 나는 티턴산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산맥이 나를 심판하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심판의 결론은 전적으로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이었다. 티턴산맥에 비해 나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출처 : image 1, image 2,  

와이오밍에 대한 동경 아닌 동경을 가지게 된 것은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입니다. (리뷰 '외로움조차 침범할 수 없는 고단함') 애니 프루의 '와이오밍 스토리'에도, 이안 감독의 영화에도,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음악에서도 한동안 헤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와이오밍을 지나, 아이다호를 거쳐, 몬태나에 도착합니다.  

" 속도를 줄여 엉금엉금 기었다. 눈 벽을 잘못 뚫고 나갔다가 언제 죽음의 경계를 넘어설지 알 수 없었다. 길을 따라서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앞길을 막는 건 없었다. 몇 시간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차를 운행했다. 도로는 사라져 보이지 않고, 시야도 1미터를 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북쪽을 향해 갔다.

오후 1시쯤, 타지패스(아이다호 주와 몬태나 주의 경계에 있는 산길)를 지났다. 그러자 표지판이 보였다. '광활한 하늘의 땅'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표지판이었다. 몬태나 주였다.

하늘은 없었다. 눈의 돔뿐이었다. 루트 287 도로를 탔다. 앞에 깜박이는 제설차 불빛이 보였다. 제설차가 나를 위해 길을 열어주었고, 나는 그 제설차를 뒤따랐다. 새로 열리는 길을 따라 세 시간 동안 달려 90번 고속도로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출처 : image 1,  image 2

몬태나에 도착하게 된 주인공, 그곳인 그가 지나 온 수많은 주와 같이 거쳐 지나가야할 또 다른 주일 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몬태나Montana 는 스페인어로 mountain 의 뜻이라고 합니다. 산이 많고, 겨울이 긴 '광활한 대지의 땅' Big Sky Country

"마운틴폴스에는 빈 방이 있는 모텔이 두 곳뿐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이 홀리데이인이어서 그곳을 택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눈은 중력과 상관없다는 듯 바람에 날렸다. 차 문을 열자 눈이 앞자리까지 몰아쳤다. 모텔 주차장을 걸어 나오는 동안 내 몸무게의 느낌이 감지되지 않았다. 마치 걸어 나오는 동안 내 몸무게의 느낌이 감지되지 않았다. 마치 걸어가는 게 아니라 바람에 내 몸이 날아올라 모텔 정문까지 다다른 듯했다.

나는 프런트데스크에 물었다.
"십이월 초에는 날씨가 늘 이런가요?"
"그럼요, 몬태나의 겨울이니까."  "   





 

image 1, image 2, image 3 

  
엉겹결에 몬태나에 관한 사진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주인공  

 

 

 

 

 

  

 

마운틴폴스에 집을 구하고, 암실을 꾸미고, 거리로 나가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작은 잡화점 겸 술집 바에서 찍은 냉담한 여주인,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무뚝뚝한 주인, 허름한 주유소의 젊은 부부와 아기 등등  

술집에서 만난 루디라는 능력있는 알코홀릭 기자를 집까지 데려오게 되고, 다음날, 루디가 그의 사진을 모두 가져간 것을 알게 됩니다.  

루디에 의해 '몬태난'지에 '몬태나의 얼굴들' 사진을 연재하게 된 게리  
그렇게 몬태나에서의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소설가들, 화가들, 사진가들.. 소위 예술하는 사라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광활한 대지의 땅'을 찾는다고 합니다.
게리 역시 몬태나에서 '사진에 눈을 뜨게' 됩니다. 몬태나라는 자연은 위대하고, 인간은 왜소하다. 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장소 덕분이기도 하겠고, 모든 것을 본의 아니게 버리고 와서 두번째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게리의 마음 속 스위치가 켜진 덕분이기도 하겠습니다.  

그 몬태나에서, 몬태나의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이 책의 2부인데, 읽고 있으면, 그 춥고 광활한 도시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집니다.  

'책을 덮는 순간 떠나고 싶게 했던 책' 이라는 이벤트 제목을 보는 순간, 저는 물론 .. 떠올렸습니다. 그리스, 에게해, 조르바 ..
책을 덮고, 떠나고 싶었고, 떠났던 그 책. 벌써 이 공간에서 몇 번인가 이야기해서, 요건 패스. 겨울, 삿포로, <철도원>의 그 곳, 혹은 '오 겡끼 데스까~' <러브레터>의 그 곳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 책, 더글러스 케네디의 <빅 픽처>를 읽게 되었어요.  

 

 

 

 

읽는 내내 몬태나를 상상했습니다. 삿포로에 처음 갔을 때, 이것은 '다른 세상' 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태어나는 곳을 정할 수는 없지만, 죽는 곳은 정할 수 있다면(뭐 요것도 반반이겠지만) 삿포로에서 살다가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겨울을 좋아하고, 눈을 좋아하고, 바다와 바람도 좋아합니다.

몬태나의 겨울은 어떤 것일까요?

책 속의 게리 서머스가 찍은 사진들은 '상처받은 몬태나'를 그대로 표현하였다고 칭송받습니다.
다소 지치고, 웃는 얼굴에조차 어디엔가 절망의 부스러기가 떠돌고, 사람도 도시도 그렇게 조금씩 닳아가는 모습을 몬태나의 산들은 가만히 무심히 지켜보고 있겠지요.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에 대한 이야기는 리뷰에서 다시 쓸 것이고, 강한 인상의 '몬태나'였지만, 그보다 더 강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와이오밍이고, 몬태나고 너무나 멀어보이는 곳입니다. 그러니깐, 아마도, 99% 정도는 앞으로 살면서 갈 일도 없고, 찾아가지는 못하면서, 계속 동경만 하게 될 그런 동네로 여겨져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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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7-03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순식간에 추천이! 감사합니다!!

2010-07-03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4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가트 2010-08-2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계 영화음악계의 거장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리더로 있는 아르헨티나/우루과이 최고 탱고 뮤지션들이 함께한 일렉트로 탱고밴드 바호폰도Bajofondo의 서울 공연이 8월 28일 저녁 7시 광장동 악스홀에서 있습니다. 2008년 울산 월드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한 첫 내한공연에서 열정과 감동으로 함께한 최고의 라이브 무대를 선물했었습니다.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작곡한 주옥같은 영화음악도 기타와 차랑고로 직접 연주한다고 합니다.

하이드 2010-08-2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찾아봐야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시체를 사는 남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성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벚꽃 ..>에 이어 두번째로 읽는 우타노 쇼고의 작품이다. 에도가와 란포에 대한 오마주. 라고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가 주인공인 이야기. 사건 해결, 그의 성격, 취향, 작품 들이 곳곳에 나오니, 란포 매니아라면 (그런 것이 있다면 ?) 무척 좋아할 듯 하다. 앞에 '그런 것이 있다면' 이라고 괄호 안에 넣어둔 건 좀 불공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란폰데 ..  

우리나라에서 란포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추리소설계에서 엄청난 위상을 지니고 있다. 번역된 작품들도 꽤 있고.. 일본 원서 전집을 다 모은 분도 봤다. 번역본을 몇 권 읽어본 나로서는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좋긴 하지만, 몇몇 단편들은 진짜 너무 끔찍해서, 책꽂이에 꽂아두면, 옆의 책이 떨 것 같아 읽고 나서 어디에 둬야할지 망설일 정도였다.  

이 소설은 그정도는 아니지만, '월애병'에 걸린 자살한 쌍둥이 여장 남자. 라는 주인공이 나오니만큼, 묘한 분위기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월애병은 .. 월요병하고는 상관없고 (... ) 달을 사랑하는 병. 이라고 할까? 달로 돌아가고 싶어(?) 우는 그런 병이라니 뭔가 루나틱하다. 그렇지.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유명한 추리소설가가 '백골귀'라는 연재본을 보고, 그 작품을 쓴 젊은 신인 작가를 만나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 테두리이고, '백골귀' 가 에도가와 란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 안의 책이다. 책 안의 책일까?  

트릭은 .. 일단은 너무 뻔하다. 난 딱히 추리를 하면서 추리소설을 읽지는 않는 게으른 추리소설 독자인데, 이건 정말 너~어무 뻔하다. 이단은? 우타노 쇼고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첫번째 작품에서 '반전'으로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작품이 란포식으로 각색되었다고 해서 반전을 기대하지 말란 법 없다.  

이전처럼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아 얼척 없었던 반전, 반쯤은 화나고, 반쯤은 충격적이었던 그런 반전은 아니지만, 나름의 반전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이야기는 짤막하고, 재미나다.
란포의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특히 더 재미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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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2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칼럼 매켄의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열심히 읽고 있는데, 단숨에 읽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분량도 생각보다 꽤 많아서 아직도 읽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반 이상 읽었으니, 이 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썰을 좀 풀어볼까 한다.

반 이상 읽었는데, 계속 기대된다.  

 

 

 

첫 20페이지를 두근거리며 읽었다고 했는데, (그러니깐 '사세요' 가 아니라, 일단 '처음 한 열장만 읽어보시라니깐'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거다. 헤헤) 그 다음에는 약간 영문 모르게 아일랜드의 두 형제가 나온다.  

동생은 예수님 같은 사람이라고 얘기했는데, 아주 어릴때부터 막 아홉살 이 때부터 노숙자들과 어울리며, 고통 분담 차원에서 술도 마셔주고, 자신이 가진 걸 모두 내 주며 싹수를 보이더니, 뉴욕으로 건너가 빈민가에 살면서 문을 열어두고 흑인 창녀들이 그의 집을 화장실로 쓸 수 있게 해주고, 양로원에 봉사하고, 창녀들 뒤치닥거리하며 살고 있다.  

동생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형은 동생이 살고 있는 빈민 아파트를 이렇게 묘사한다. 형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   

   
 

광기와 탈출의 오랜 시간들. 빈민 아파트 단지는 절도와 바람의 희생자였다. 고층 건물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바람 덕분에 아파트 단지에는 그들만의 날씨가 만들어졌다. 비닐봉지들이 몰아치는 여름바람을 타고 날았다. 날아다니는 쓰레기들 아래로 아파트 마당에서 노인들이 앉아 도미노 놀이를 했다. 비닐봉지 소리는 라이플총 소리 같았다. 그 쓰레기를 한동안 바라보노라면 바람의 정확한 모양새를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바람은 주위의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어떤 면에서는 매력적이었다. 한 덩어리로 기운차게 빠른 속도로 불어치는 소용돌이와 8자 바람, 용수철 모양 나선형과 소라 모양 나선형 바람들, 그리고 와인 병따개 모양의 바람, 때때로 비닐 조각은 파이프에 끼거나 철망 울타리 꼭대기에 닿았다가 경고라도 받은 것처럼 다시 볼품없이 물러났다. 그러다 손잡이가 서로 만나면 봉지는 떨어졌다. 비닐봉지가 걸릴 나뭇가지도 없었다. 이웃 아파트에서 남자아이 하나가 낚싯줄이 없는 낚싯대를 창밖으로 내밀었지만 봉지를 하나도 잡지 못했다. 비닐봉지들은 종종 한곳에 머물러 마치 이 회색 풍경 전체를 감상하듯 있다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며 공손하게 절을 하며 사라져버리곤 했다.  

 
   

 정말 우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빈민 아파트 앞의 바람 부는 스산한 풍광이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비닐봉지라는 장치, 바람의 모양, 그 배경 속의 노인들, 아파트 창문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 ..  

시간적 배경은 닉슨 대통령 시절, 무역센터 빌딩이 다 올라가고, 입주를 시작할랑말랑 하는 그 시점이다.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상류층의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신문광고에서 그녀와 같은 처지의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들에게 상류층의 그녀가 사는 파크 애비뉴는 모노폴리 게임에서나 볼 법한 곳이다.  

글로리아 집에서의 모임을 마치고 나와 창가에서 손을 흔드는 글로리아를 바라본다.  

   
 

그들은 모두 함께 일어났다. 물론 글로리아는 제외하고. 글로리아는 11층 창가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무늬 있는 드레스의 가슴 높이께로 창문 창살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 높은 곳의 글로리아는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아름다워 보였다. 쓰레기 파업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쓰레기 옆엔 쥐들이 나와 있었다. 고가 아래 늘어선 창녀들, 눈발이 날리는데도 핫팬츠와 목 뒤로 끈을 묶는 티셔츠만 입고 있었다. 추위를 피하고 있다가 트럭들이 지나가면 트럭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에게서 하얀 입김이 구름처럼 피어났다. 만화 대사를 쓰는 말풍선 모양. 그러나 끔찍했다. 클레어는 다시 위층으로 뛰어올라가 글로리아를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이 지독한 쓰레기 더미에서 그녀를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풍경과 처지와 배경이 정말이지 손에 잡힐 것 같다. 글을 읽으며, 책 속으로 들어가 보고, 듣고, 느낀다. 
이야기는 두번째 이야기와 빈민층 아파트를 통해 연결되고, 첫번째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첫번째 이야기와 연결되는  장면은 정말 아름답다. 숨을 죽이고 다음 문장을 읽게 만든다.

그러니깐, 첫 20페이지의 그 장면은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도시, 무미건조한 일상에 매몰된 도시인들, 체념과 안타까움이 범벅된 그 도시의 그들에게 찬란한 빛,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희망, 일탈.. 등을 보여주는 정말 ... '대단한' ... '역사상 최고의, 지상 최대의 예술적 범죄' 인 것인 건가. 싶다.  

세번째 이야기도 이 전의 이야기와 연결되고, 네번째 챕터인 '거대한 지구를 영원히 돌게 하자' 이 소설의 제목과도 같은 이 챕터에선 필립 프티의 이야기도 잠깐 나온다. 이쯤되면,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구원하러 이 세계에 납신 초자연적 존재같다.  

   
  몇 초 만에 그는 순수 그 자체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공기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리며 그는 동시에 그의 몸의 안이었고 또 밖이었다. 미래도 과거도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줄타기에 즉각적인 자부심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삶을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가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각각 다른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이전 이야기들을 물고 있는 구조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생각나는 보통으로 잘 쓴 연작 소설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다.  

아주 고급스러운 지그소 퍼즐을 아주 세련되게 맞추어 나가는 듯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그 순간, 마지막 장을 덮는 그 순간, 어떻게 이 책을 느끼게 될지, 궁금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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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0-07-0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너무도 많군요. 풀썩 ;;; 요즘 책장을 바라보면서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더 커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가끔 암담해지기도 하지만 ^^; 이렇게 멋진 책이 존재한다는 두근거림을 알려주는 하이드님의 페이퍼를 읽으면 책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지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어요.그래서, 감사하다구요. 하이드님. ^^

하이드 2010-07-01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굿바이 쇼핑>처럼 1년간 책 안사기 해볼까 생각만 하고 있는데.. 안 될꺼에요. 그죠? ^^;

전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같은 책이 좋더라구요. 정말 잘 쓴 글, 첫줄부터 막줄까지 꽉 짜인 플롯,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 그 중에서도 이 책은 중간중간 숨을 멈추게 하는 그런 장면들이 나와요. 숨을 멈추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따라가게 되는 그런 장면들. 다 읽고 후 - 하고 숨을 내쉬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음미하게 만드는 그런 장면들이 있어요.

chika 2010-07-02 09:30   좋아요 0 | URL
하이드가 책을 안사기 해볼까 해요,는 일주일동안 굶어볼까 해요...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인거 아시죠? ㅎㅎ
 

첫문장, 아니고, 첫 20페이지다. 근 몇년간 읽은 중 '가장' 이란 최상급이 들어간 것에 의구심을 가질지도..
'지금까지 읽은 중 가장!' 이라고 하려다 참았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지난 몇 해를 통틀어 우리를 열광시킨 최고의 소설" 이라고 했다.
프롤로그 격인 첫 20페이지를 정말 오래간만에 가슴 두근거리면서 읽어내고, 두번째 이야기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정말 기대된다.  

다 읽고 나면, 나역시 뉴욕 타임즈 따라서 최고!최고! 불 뿜을 것인가? ^^

2009 아마존 선정 최고의 책 1위. 작년 내내 이 책의 추천을 닳도록 보다가 마무리까지 1위로 멋지게 장식한 작품이다.  

 

나는 틀림없이 이게 세계무역센터 사이에 줄 걸고 건넌 필립 프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건'을 둘러싼 '인간군상'에 대한 이야기인듯 하다. 여튼, 읽는 중이기에, 마지막에 어떻게 마무리 될지 기대기대 

서점 갈 일 있으면, 앞에 20페이지라도 한 번 들쳐보길 권합니다.

아름답고 실감나는 문장을 쓰는 작가다. 근 몇년간 읽은 중 가장 박력 있고, 아름다운 첫 20페이지. 라고 했는데, 그 이후의 이야기들도 캐릭터들과 장면들을 눈에 보이듯 그려내는 대단히 탁월한, 그래서 읽는 즐거움이 있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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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6-3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온 와이어는 다큐멘타리로 있어요 꼭 찾아서 보시기 바래요~~

하이드 2010-06-30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때 이야기하셨던게 이 영화군요! 찾아 볼께요!!

Mephistopheles 2010-06-30 10:55   좋아요 0 | URL
아닌데..그때 말한건 뉴욕의 작가가족 이야기..

하이드 2010-06-30 10:58   좋아요 0 | URL
아 글쿠나;; 여튼, 다큐 영화도 많이도 챙겨 보시는 메피님 ^^

무해한모리군 2010-06-3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에 주문하러 들어왔다 이 글을 읽고야 말다니 ^^;;

moonnight 2010-06-30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래요? +_+; 하이드님의 추천이라면 바로 보관함 넣어야지요. 랄라~

stella.K 2010-06-3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한 지구...>가 이 사람 이야기였군요.
근데 번역본 만해도 4권인데 똑같은 이야기를 제목만 달리해서 쓴 건가요?
아님 다 다른 건가요?

건조기후 2010-06-3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재밌겠어요. 하지만 전 이미 오늘 새벽에 주문을 해서.. 예의상ㅎㅎ 며칠 더 기다렸다 주문들어갑니다.
새벽에 주문하면서 보관함 숫자가 너무 징글징글해 확 추려냈는데.. 비우자마자 이 책 들어가네요.ㅎㅎㅎ

지나가다 2010-06-3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완전 제대로 뽐뿌(?)시네요. 이글을 본 이상 이책 안사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번역본이 이리도 아름다우면 원문의 감동은 어느 정도일까요?
바로 지릅니다.
 
철서의 우리 下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교코쿠도 시리즈는 '망량의 상자>우부메의 여름>광골의 꿈' 이었다. 그리고 외전 격인 '백기도연대'는 말그대로 외전격이니 패스, '항설백물어'는 쿄고쿠 나츠히코의 작품이긴 하나 교코쿠도 시리즈는 아니고.  

'망량의 상자'가 2005년에 나왔으니... 이런 젠장! 도대체 몇 년만에 책을 내 주는 거임! 엄청엄청 오래 기다렸다. 그 기다림으로 사리가 나올 즈음에 전작들을 아우르는 좋은 작품이 나왔다. <망량의 상자>를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처음 교코쿠도를 만난 <우부메의 여름>이 임팩트가 가장 크다. <광골의 꿈>에서는 교코쿠도가 나오는둥 마는둥 해서 '이건 교코쿠도 시리즈가 아니야!' 짜증이 났고.. 이번 작품에선 <우부메의 여름>의 구온지 의사와 <광골의 꿈>의 골동품상 이마가와가 골고루 나오고, 기바는 안 나오지만, 에노키즈와 교코쿠도, 물론 세키쿠치, 그리고 아츠코와 도리구치까지 골고루 골고루 많이 나와주니 교코쿠도 시리즈의 팬으로서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시리즈 순서대로 처음부터 찾아 읽으세요. 라는 무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우부메의 여름>과는 꽤 깊은 관계가 있으니, <우부메의 여름>은 꼭 읽고 있는 것이 좋겠다.  

교코쿠도와 세키쿠치는 교코쿠도가 의뢰 받은 고서 감정을 위해 하코네로 여행겸 일겸 떠나게 된다.
근처에 있는 여관 '센고쿠로'에는 수수께끼의 절 명혜사를 취재하기 위해 아츠코(교코쿠도 동생)와 도리구치가 묶고 있고, 마침 그 여관에는 명혜사의 스님에게 편지를 받고 물건을 보기 위해 온 이마가와!도 있고, 또 마침 그 여관에는 <우부메의 여름>의 구온지 노인도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깊은 산 속의 절 명혜사. 그 곳에서 선을 추구하는 승려들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교코쿠도의 장광설 뿐 아니라, 스님들이 번갈아가며;; 일본 불교와 그 이전의 불교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 놓는데, 오래간만에 봐서인지, 아니면, 이전의 장광설에 비해 내용이 그나마 알아들을만한 거여서인지 (물론 다음장 넘기면서 나의 청순한 뇌는 이미 그 알아들을 것 같은 장광설은 죄다 까먹지만, 여튼, 읽을 때 발가락 끝이 근질거린다던가, 식은땀이 난다던가 하며 몸이 배배꼬이는 현상 없이 제법 들을만한 장광설이다.) 읽을만하다.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괴기스럽게 죽어나가는 스님의 모습은 나중에 알고보면, 꽤 그럴듯한 이유도 있고, 이전의 복선도 무척 충실하다. 시마다 소지의 무조건 찢고, 꼬매고 하는 괴기살인과는 다른 심오한 뜻들이 있다구.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다 너무나 중요하다.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 세 권의 분량으로 인물, 배경, 사건 등을 꼼꼼히 보여줄 수 있었지만, 역시 천페이지가 넘더라도 이천페이지가 안 넘어서 아쉬운게 교코쿠도 팬들의 마음일지도.  

교코쿠도에 의해 해결되는 사건의 마지막은 뭐랄까, 사건 해결마저 장광설이라 책장이 더디게 넘어가는 면이 없지 않았는데 (더디지만, 힘참!) 이번에는 그마저 술술 넘어가, 마지막까지 독자의 눈을 결코 놓지 않는다.    

나의 빠심을 자제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정말 재미나고, 잘 쓴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덧 : <광골의 꿈>에서 약간 세키쿠치 역이였던 '바보' 에 '당하는' 이마가와와 원래 '바보'에 '당하는' 세키쿠치가 한꺼번에 나와서 누가 더 불쌍할까. 궁금했는데, 세키쿠치 윈이다. 세키쿠치가 더 불쌍해.  

덧2 : 하권 320페이지 즈음을 읽고 있는데, 새벽 세시 넘은 그 시간에 중간에 이십페이지 정도 빠진 것을 발견. 난 정말 깜깝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한참 사건 해결되고 있는 찰나에.. 천페이지 넘게 달려 막 마지막 결론의 서막이 비추이기 직전에 파본이라니요! 나의 파본 비율이 날이 갈 수록 높아지는 것은 출판 미래를 위해 내가 유달리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고 믿고 싶다. 혹은 내가 유달리 책을 많이 사서 그런거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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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0-06-3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아직 비닐도 안 뜯고 고이고이 모셔놓은 책이에요. 여름 휴가때 읽으려고 아껴놓았는데 그렇게 재미나단 말이에요? +_+;; 그, 그런데 새벽세시 넘은 시간에 사라진 이십페이지라니요. 게다가 하권에서!!! 상상만으로도 황당하기 그지없군요. ㅠ_ㅠ;

하이드 2010-06-30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권을 다 본 지금 무척 뿌듯합니다. ^^
저 이번 주에 여름 휴가 추천 일본 미스터리! 페이퍼 올릴꺼에요. 달밤님은 거진 다 읽었거나 샀거나 했을 것 같지만, 그래도 ~

Kitty 2010-06-30 22:11   좋아요 0 | URL
이거 기둘립니다 ㄷㄷㄷ

Apple 2010-06-3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정말요? 이런..마이클 코넬리를 잠시 덮어두고 철서부터 만나야하나...ㅠ ㅠ 저도 맘에 드는 교고쿠도 시리즈가 하이드님이랑 순위가 똑같은데, 광골에서 좀 실망을 많이 해서 점점 시들해지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하이드 2010-07-0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광골의 꿈 별로 ;; 좀 화났죠 ㅎ 근데, 그거 읽은 보람이 있어요. 철서의 우리에 우부메의 여름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마가와는 광골의 꿈에서 나왔던 인물이다보니, 안 읽은 것보다는 읽은게 낫다고나 할까.. 요 ^^

철서의 우리.. 짱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