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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평점 :
" 전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는지, 왜 레일 위를 걷고 있었는지,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게 돼요. ... 저기, 당신은 왜라고 생각해요?" (...)
꽤 긴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조차 잊어먹었을 무렵, 다미오 씨가 불쑥 말했습니다.
"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
입소문 무성했던 '환상의 빛' 을 읽었다. 표제작인 '환상의 빛'을 포함하여 '밤벛꽃', '박쥐', '침대차' 네 개의 단편을 담은 단편집이다. 이 책을 읽던 중에 어딘가에서 '나이가 들면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는 글을 읽었다. 옮긴이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 나이가 들면서 우연이 삶을 지배한다는 믿음이 짙어간다. 나이가 든다는 거은 뭔가를 잃어버리는 일의 연속이다. 그 뭔가는 늘 모호하다. 그러니 말끔하게 정리된 이야기에서는 거짓의 냄새가 난다. 거짓은 잃어버린 그 모호한 것에서 기인하는 외로움과 불안에서 온다. 그 외로움과 불안 역시 모호하니 거짓말이라도 해서 살아야 한다. '
12월 읽은 좋은 책들중, 번역이 참 좋다. 고 인지하며 읽게 된 책이 두 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환상의 빛'이다. 책의 종이는 아주 얇은데, 손에 척척 달라붙는 재생지인 것 같다. 그것들과 이 '모호한' 상실의 이야기가 이 겨울에 콱 와 닿고만다.
나이가 들면,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삶이 분명하지 않고 모호해진다.
이런 기분으로 이 책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모든 단편은 죽음과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전 읽었던 하루키의 단편집에서는 떠나간 여자, 남겨진 남자를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도 죽음과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책들을 보며 나를 돌아보게 되는 그런 계절의 끝, 겨울인건지도 모르겠다.
'환상의 빛'에서는 어릴적부터 좋아했던 남편의 자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재혼을 하고 바닷가마을로 가서 아이도 시아버지도 남편도 생기게 되지만, 자살한 남편에게 왜? 라고 끊임없이 묻는 여자다.
'밤벚꽃'에서는 죽은 아들과 이십년만에 재회한 전남편, 그리고, 시아버지가 물려준 벚꽃이 아름다운 집에 사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숙을 놓으려다 포기하는 찰나 나타난 청년은 하룻밤만 빌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빌려주게 되지만, 미심쩍다. 왜? 벚꽃은 유독 아름답다.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르겠는걸, 하고 아야코는 생각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져버리는 활짝 핀 벚꽃을, 아야코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일찍이 이렇게 숨을 죽이고 바라본 적은 없었다. 부풀어 오른 엷은 분홍색의 커다란 면화가 파란 빛의 테두리를 두르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톡톡, 톡톡 줄어가는 요염한 생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아야코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신기한 밤을, 벚꽃과 함께 깨어 있자고 마음먹었다.
'박쥐', 에서는 옛친구의 죽음, '침대차'에서는 어릴적 친구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기승전결의 이야기라기보다, 현실이 그렇듯, 모호한 이야기들이 분위기를 타고 꽃처럼, 눈처럼사알 마음에 내려 앉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