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없는 당근이 도마 위에 누워 있다. 


나는 언제나처럼 0.1초 정도 재빠르게 그것을 훑는다. 

어느덧 중년을 넘어선 내 앞에 이제 겨우 몇 개월을 살았을 뿐인 당근이 자신의 마지막 생을 맡긴 채 누워 있다. 

일순, 마음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로 시작하는 '채소의 신' 






귀여운 일러스트 표지와 제목으로 일단 사고 본 책인데, 첫문장부터 마음을 확 사로잡는다. 원서 따라왔는데, 잘 따라왔다. 












마음의 소리를 따라, 나는 요리사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근을 대한다. 

나에게 요리란, '한 생명의 본질이 다른 생명을 살림 조화로운 창작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상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배운 당근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은 방해만 될 뿐이다. 

나는 눈앞의 당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는 잡념을 지우고 내 안에 잠들어 있는신성함을 끌어 모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당근을 바라본다. 


스윽 하고 당근에 칼집을 넣는 순간 당근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마지막까지 당근을 정성껏 보내줘야 한다는 긴장감과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이 당근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내 안에서 간절한 기도처럼 솟아난다. 


나는 무엇을 만들지 정하지 않고 요리를시작한다. 요리와 재료에 대한 개염을 정해두지 않기 때문에 재료의 상태를 보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채소는 '이런 것이다'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채소가 가진 무한대의 가능성을 시험해볼 수 있다. 


개념은 과거의 경험 우에 만들어진다. 어째서 개념이 생기는 것일까? 

사회의 고정화된 개념은 공통의 인식을 바탕으로 안정을 모색하기 위한 여할을 담당한다. 



이런 책이다. 막 진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다가 갑자기 두부곤약하야시라이스. 이렇게 레시피가 나와버리니 뭔가 경건한 마음에 두 손 모으고 읽다가 웃음이 피식피식 나면서 그 반전의 리듬에 익숙해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불이 닿아 보들보들해진다는 것은 곧 달고 맛있어진다는 말과 같다. 일반적으로는 조리 시간을 가능한 한 단축하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완성할 수 있는 맛이 있다. 나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몹시 사랑스럽다. 

기다림을 고통스럽거나 쓸모없는 일이라고 여기지 말고, 즐길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작지만 소중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심플하지만 공들인 시간만큼 더욱 맛있어지는 이 요리는 별다른 소스 없이 그대로 먹어도 충분히 깊고 균형 잡힌 맛일 터. 물론, 식어도 정말 맛있다. 


"요리는 채소의 생명을 빌려 완성하는 거예요!" 나는 요리 교실에서 이런 말을 자주 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요리를 할 때 '채소=요리의 재료'라고 인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채소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종이나 천처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하나으 재료라고 여기고 마는 것이다. 

"채소 하나하나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자세히 한번 보세요! 같은 채소라도 어제의 얼굴과 오늘의 얼굴은 분명 다르답니다" 하고 나는 학생들도 채소의 생명력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힘주어 이야기한다. 



이 책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인용한 글들을 보면 감이 잡히려나? 반 정도 읽었는데, 감이 안 잡힌다. 어떤 책인지는 알겠는데, 그동안 읽었던 다른 책들과 비교를 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읽다보니 무지하게 배가 고파졌기에 이 책을 읽고 떠오른 가장 완벽한 음식, 흑석동 최고의 맛집에 가서 '비빔밥'을 먹어야겠다. 채소를 온몸으로 느끼며 먹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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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5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15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가노 료이치의 책을 단숨에 읽기는 쉽지 않다. '제물의 야회'는 소리소문 없더니 연말 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들 사이에서 1위를 차지한 저력을 보인 작품이기도 했다. '환상의 여자'라는 제목에서 이미 코넬 울리치의 '환상의 여인'을 떠올리며 700여페이지에 가까운 묵직한 하드보일드 장편이 나왔을때 기대하지 않은 일본미스터리 마니아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제물의 야회'에서도 변호사의 역할이 돋보였고, '환상의 여자'에서도 그렇다. 줘 터져도 굴하지 않는 본인도 독자도 나쁜놈도 대체 왜? 이제그만. 싶을 정도로 굴하지 않은 불독같은 면모를 보이는 유약해 보이는 변호사가 '환상의 여자'를 찾는 주인공이다. 


하드보일드의 빠지지 않는 주제는 '실종된 여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당연히 앞서 말했듯 코넬 울리치의 '환상의 여인'을 떠올리기도 하고,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 둘과는 다른 이야기이고, 다른 어조이지만, 같은 이야기를 다른 층에서 보는 정도의 다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선의 차이가 작가의 스타일이자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일 것이다. 


단숨에 읽히지 않는 것은 분량 때문만은 아니다. 가노 료이치의 작품은 분명 페이지 터너는 아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쌓아가는 사건들과 펼쳐 보이는 단서들은 견고해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건조하지만 단단한 문장들도. 그렇게 단숨에 못 읽고, 며칠을 붙잡고 지냈더니 주인공과 함께 환상의 여자를 찾아 한참을 헤매이다 돌아온 것만 같다.  


5년만에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불륜의 상대였던 그녀.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졌던 그녀를 우연히 만났고, 그녀는 다시 사라진다. 이번에는 '죽음'으로 영원히. 그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변호사 스모토는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며, 그녀가 5년전에 왜 떠났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반전이나 스릴보다는 스모토의 그녀를 찾기 위한 노력과 고난이 이 책의 재미일 것이다. 란 것은 이 책의 마지막장까지를 보기 위해 노력과 고난으로 읽어나가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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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아이스보틀 맘에 들어서 (->손잡이 달렸고, 커버 있는게 맘에 쏙 들고, 양이 360ml밖에 안 드는건 좀 별로) 

신간을 주섬주섬 챙겨보지만, 나 며칠전에 책 샀잖아.. 신간 살 꺼 없잖아. 책파우치는 별로라서 한 번 사보고 계속 사은품 선택 안 했을 뿐이고.


여튼, 지난 주말 나온 레베카 솔닛 책은 사야 하니 장바구니 담고, 다뉴브가 엄청 좋다는 글을 봐서 담고 주섬주섬 5만원(중고도서 미포함이라 엄청나게 장바구니 담았다 뺐다 애씀) 채워서 주문하고 사은품도 챙기고 등등등 했는데,배송일이 14일로 뜬다. 다뉴브 재고가 없는 거. 그래서 또 마구 머리 굴리다 미야베 미유키 신간을 발견하고! 우왕, 재밌겠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권. 데뷔 27년, 출간작 60여 종, 수상 및 노미네이트 27건, 미스터리차트 28회 랭크인.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리며 굵직한 상을 휩쓸어온 희대의 이야기꾼 미야베 미유키가 가족과 인연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펴냈다. '가족이 만능의 묘약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후루하시' 가문의 비극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사무라이이자 도가네 번의 시종관(주군의 의복과 일용품을 관리하는 직책)이던 소자에몬의 뇌물 수취증서가 발견된 것. 개 한 마리 베지 못하는 유약한 성격의 소자에몬은 기억에도 없는, 그러나 자신의 글씨를 완전 빼닮은 수취증서 앞에 끝내 할복하고 만다. 

아버지의 결백을 믿었던 둘째 쇼노스케는 에도의 쪽방촌으로 올라와 수취증서의 배후를 찾아 진실에 조금씩 다가간다. 벚꽃이 처연히 흩날리는 봄의 에도, '가족'의 재건을 꿈꾸는 쇼노스케에게 가족에 대한 신념이 산산조각 나는 사건이 잇따르고, 후루하시 가문처럼 그의 운명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데…. 2014년 1월 1일, 일본 NHK 특집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를 모았다.

했는데 또 재고가 없다. 


할 수 없다. 그냥 주문 고고. 주말에나 받아보겠지만, 그 전에 읽을 책이 ... 많습니다.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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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5-05-1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로 주문 고고~ 지난 주 신간 샀지만..(흑)
 
서루조당 파효 서루조당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교고쿠 나츠히코의 책은 나올때마다 열과 성을 다해 구매해서 읽었다. 가장 좋아하는건 역시 처음에 읽었던 '우부메의 여름'이나 '망량의 상자' 였다고 생각하지만, '서루조당 파효'는 교고쿠도를 읽은지 십여년만에 단번에 나의 베스트로 올라왔다. 

'서루조당' 시리즈라고 하니 뒤에 나올 책들이 엄청 기대된다. 서루조당은 '책방'의 이름이다. 겉에서 보면 등대같이(?) 보이는, 바로 앞을 지나가도 여기에 책방이 있다고 인지하기 힘든 그런 위치의 그런 모양의 책방인 것이다. 


화자인 다카토는 몸이 안 좋아 요양차 집을 얻어 홀로 지내다가 몸이 나은 후에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고 홀로 지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자학하며 책이나 읽으러 다닌다. 


여섯챕터로 이루어져서 각각의 챕터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등장하여 그 사람만의 한 권의 책을 권해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첫번째 책은 임종, 두번째 탐서는 발심, 세번째는 방편, 네번째는 속죄, 다섯번째는 궐여, 마지막으로 '미완' 의 책을 추천 받는다. 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좀 더 있었더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이름만 얼핏 들어본 수준이라 그것이 아쉬울 뿐이다. 


시대상도 재미있다. 메이지 유신 후 근대화를 겪으며 고민하는 근대문학의 개척자들을 다룬다. 가장 좋아하는건 '근대 - 현대'이지만, 근대화를  겪어내는 걸출한 인물들, 그들에게 맞서(?) 한 권의 책을 찾아주는 책방 주인. 그사이에서 어쩔줄 모르는 다카토님. 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교고쿠 나츠히코 아니랄까봐, 모든 챕터에 '요괴' 이야기를 집어 넣었고, 그간 교고쿠 나츠히코의 장광설에서 어렵사리 볼 수 있었던 주제들을 걸출한 인물들을 통해 더 짧고 굵고 심오하게 풀어 놓고 있다. 


조당의 주인은 책은 무덤이고,사람에게 책을 파는 일은 책을 성불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독서가들의 꿈과 같은 '나만의 한 권' 이라는 것과 일생일대의 고민과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책'에서 답을 찾는다는 점에 있어 이 책의 컨셉트는 정말이지 책을 너무 좋아하는 책귀신들에게 그야말로 밀착형으로 딱 맞는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에 전혀 힘들이지 않고 공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각각의 챕터는 길지 않고, 여섯개를 다 합해도 그간의 벽돌같은 저자의 책들에 비교해 볼 때 짤막짤막한 내용들이지만, 각각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생각할거리들을 남겨줘서 재미에도 불구하고 읽는 속도는 더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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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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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을 좋아하지만, 이 책은 패스하더라도 그닥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은 이전에 봐왔던 글 실용 글쓰기이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못난 글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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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틈에 2015-04-3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한 내용을 저자가 어찌 풀어 썼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이드 2015-04-30 23:55   좋아요 0 | URL
음.. 유시민 팬인 저는 다 읽어본 이야기들었지만 또 읽어도 재미있었고, 다른 책들에 비해 좀 더 쉽게 쓰여져 있고, 책에 나온 리스트들도 유시민이 이전에 추천했던 책들이라 새로움은 없었어요.

하이드 2015-04-30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전에는 안 와닿았는데, 이번에는 `토지` 를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