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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게 흰 것은 고양이, 고양이 말로, 안 흰고양이의 하얀 양말, 흰 종이, 눈, 흰 칼라꽃, 흰 셔츠, 흰 그릇, 글을 쓸 목록 거리로는 재미 없다. 작가 한 강의 흰 것드은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처음 읽어보는 한 강의 책이다. 아직 다른 책들은 대기중이지만,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책들을 읽으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예쁘고 섬세한 문장들을 쓰는 작가구나 싶다. 차미혜 작가의 희거나 덜 희거나 희지 않은 사진들이 함께 한다. 잘 어울리는 콜라보이다.
짐을 정리한 다음날 흰 페인트 한 통과 큼직한 평붓을 샀다. 도배를 하지 않은 부엌과 방의 벽에 크고 작은 얼룩들이 보였다. 특히 전기 스위치들의 주변이 까맸다. 혹여 페인트가 튀더라도 눈에 띄지 않도록 연회색 트레이닝복에 낡은 흰 스웨터를 걸치고 칠을 시작했다. 깔끔하게 마무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그렇게 무심한 자마음으로 더러운 자리만 골라 붓질을 했다.
앞서 만들었던 목록대로 차근차근 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쌓아간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 태어난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아기. '달떡처럼 얼굴의 힌 여자아이'
언니가 되었을 수도 있고, 아기가 죽어 내가 태어났을 수도 있는 얼굴이 달떡처럼 흰 아이.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에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어둠 속에서 흰 몸 위에서 유독 까매 보이는 애인의 손을 떠올린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는 늘 흰 몸과 까만 손이 신기하다.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었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가장 더운 여름이 예고 된 6월 중순의 초입, 웃통을 벗고, 까만고양이 한마리와 흰 고양이가 한 마리 자고 있는 고요한 일요일 오후, 흰 것에 대한 책을 두번째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