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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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의 단편집과 켄 리우의 단편집을 연달아 읽었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 기분이다.  


천선란의 책부터 이야기해보면, 읽자마자 확 와닿는 작가는 아니었다. 작가의 말을 보고 나니, 작가가 자신의 감정들을 책에 담았다는 말을 보고나니, 좀 다르게 와닿았다. 작가의 말이 좋아서, 어딘가에 적어둔 글을 예전에 본 것 같다. 


"나는 아이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이고, 내 10대는 무대 위의 아이돌과 함께 버무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정 시기를 추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그때 유행했던 아이돌의 노래와 춤이 있다. 어느새 나는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내가 선망했던 아이돌들은 은퇴를 했거나, 연기를 하거나, 혹은 세상에 없다. 한때 나의 영웅이었고, 내 시절이었던 그드른 왜 떠나야만 했을까. 인사 한 번 나눠보지 않았던 그들의 새벽이 서러워 덩달아 뒤척였던 새벽이 많았다. 어떤 말을 하고 싶다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해 한숨만 쉬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그 친구들과 또래라 힘들어 하는구나." 그 이야기를 들어쓸 때 딱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누구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일이구나. 또 하나는, 그렇다면 나는 이 감정을 잊지 말아야겠구나."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아닌 일들에 대한 깊은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작가는 감정들을 박제하고, 기록했나보다. 


'사막으로' 는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깝다고 한다. 거짓된 꿈이 척박한 현실보다 강하고, <너를 위해서>는 낙태죄 폐지를 외쳤던 2019년에 썼다고 한다. 이렇게 남기는 기록들 좋다. <래시>는 환경문제를 테마로 잡았다고 한다. 사실, 나는 어떤 이야기에서도 모성이 주된 테마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떤 물질의 사랑>은 사랑 이야기인데, '국경도 없는 사랑'이야기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햇빛이 드는 작고 한가한 독립서점에 작고 반짝이는 비늘이 떨어지는 장면이 맘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림자놀이' 같은 이야기가 켄 리우의 작품들하고 겹친다. 감정과 현실의 물질성을 거세당한 것 같은 그런 차갑고 매끈하고 이질적인 것들. 아무렴, 지금의 질척질척함 보다는 낫겠다만.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와 '마지막 드라이브'도 좋았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비무장지대에 등장한 싱크홀 비슷한 커다른 구멍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나고 나니, 계속 생각난다. '마지막 드라이브'는 센티멘탈한 분위기. 인간의 감정을 흉내낸 더미와 차에 흐르는 음악 같은 거.


이 작품집에서 가장 좋았더 건 '두하나'다. 

왜 아니겠어. 남자가 좀비 같은 바이러스 전파자고, 여자들이 연대해서 맞서 싸우는 이야기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지. 


" 차라리 지구상의 모든 생물학적 남자가 빠짐없이 전염됐다면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모든 남자를 구분 없이 죽이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지나는 언제나 연민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다며 그 무능력한 남자를 끌어안고 살았던 엄마도 연민이 문제였다. 그것을 여자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화낼 수 있는 대상은 언제나 서로가 전부였다.  (..) 어쨌든 그 연민은 추가적인 희생을 동반했다. 전염의 속도가 달랐음을 알지 못하던 때였다. 자신의 남편, 애인, 아들,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다고 울며 애원하는 여자들을 내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았다. 그녀들이 간절하게 붙잡고 있는 손을 차마 끊어낼 수 없었다. 대피소에 들어왔던 남자들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변했다. 그들의 첫 번째 희생자는 모두 그들을 대신해 울던 여자들이었다. 어쩌면 변하지 않은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적 이유를 뛰어넘은 숭고한 정신이 육체를 지켰을지도.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다 따지기에는 위험변수가 너무 많았다. 대피소는 굳게 닫혔다. 긴 다리를 건너온 여자들에게만 열렸다. 생존자들은 그 다리를 '고독의 다리'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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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전쟁 - 자신을 사랑하는 법 via 여성의 속옷 역사 가치관 컬렉션 1
앰버 J. 카이저 지음, 허소영 옮김 / 상상파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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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탄 디오르의 주장으로 리뷰를 시작해야지. 


" 남성들은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주머니를 사용하지만, 여성들에게 주머니는 장식용이다." 


중세 시대 속옷의 주요 기능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속옷은 보온 외에도 거친 소재로 만든 겉옷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속옷이란 뭘까. 지금도 속옷의 기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겉옷으로부터 몸을 보호한다. 남자만.

 

여자들에게 속옷의 기능은 추가된다. 몸매를 보정하기 위해, 가슴을 처지지 않게 하고, 돋보이게 하고, 골반을 커 보이게 하거나 엉덩이를 작아 보이게 하고, 다리를 날씬하게 보이게 하고, 군살을 감추고, S라인을 만들어줌. 사탕껍질 옷 입을 때 속옷라인 보이면 안되니깐, 엉덩이 사이에 끈만 달아서 끈팬티 만든다. 남자들에게 퍼커블하게 보여야 하니, 섹시한 장식품 역할도 해야 하고, "예쁜 속옷은 여성들의 자존심이니깐" 자존심 살려주는 역할도 한다. 아, 섹시한 속옷 입으면 kibun이 좋아지니, 자기만족 용도이기도 하다. 추가된 기능은 많은데, 위의 기능들을 넣느라 빠진 기능들도 있다.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조여서 소화불량을 일으킴. 피 안 통하게 해서 수족냉증이 생김. 겉옷과 몸으로부터 속옷을 보호해야 함. 


의복이 가진 권력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의복이 가진 무언의 권력 때문일까. 의복착용권을 박탈함으로써 피지배층을 통제했던 역사적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로마, 초기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사람을 사고파는 행위는 노예시장에서 빈번히 일어났다. 그곳 어디에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노예는 없었다. 모두 벌거벗겨진 채, 구매자가 살펴보기 좋은 상품의 모습으로 진열되었다. 문화권이 달라지고 시대가 바뀌어도 노예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완전히 또는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강요된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남들 앞에서 벌겨벗겨진 상태가 노예임을 인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자신의 신체와 노동력조차 타인에게 통제된 노예들에게 이런 모습까지 강요한 것은 비인격적인 행위의 극단이다." 


완전히 또는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 직종들이 떠오른다. 


여자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던 치마를 덮는 그 새장같은 기구들. 이게 비싸서 돈 있는 사람들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는데, 1856년 기술 발달로 용수철 후프가 등장했다. 수십년동안 착용했던 엄청나게 무거운 크리놀린과 달리 후프는 가볍고 탄력 있고, 대량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격도 저렴했다. 실루엣도 훌륭하게 만들어냈는데, 단 한가지 부족한 점은 안정감. 스커트는 쉽게 뒤집혔고, 치마 속이 시시때때로 드러났다. 


이 당시 속옷은 가랑이 사이가 터져 있었는데, 치마 속이 시시때때로 드러나서 

후프를 포기하거나 속바지를 꿰매야 했는데, 


속옷을 꿰매다니! 상반된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고 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의복을 통한 성별 구분은 한층 강화되었고, 여성은 긴드레스가 공식이었는데, 1851년 제네바 출신 엘리자베스 스미스 밀러가 터키식 바지 비스무리한 블루머를 만들어냈다. 


1851년 뉴욕타임즈 편집국 

" 이미 미국 여성에게는 헌법이 공정하게 보장한 몫의 권리가 있다.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특권을 장악하려고 고집스럽게 몰입하는 그들의 행동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그렇다고 이 행동이 맹렬히 비난받을 만하거나 당장 억압되어야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남성들의 방식을 침해하려는 흐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성들의 방식 침해? 뭐라고? 


복장 개혁가와 여성 참정권자를 비웃는 한 남성의 글이 뉴욕타임즈에 실렸다. 


"주머니가 발명된 이후, 주머니를 가지지 못한 자는 결코 위대해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여성이라는 성별은 주머니가 없는 동안 결코 우리(남성)의 경쟁자가 될 수 없다." 


주머니.. 주머니.. 이게 특히 열받는건, 지금도! 2021년에도! 21세기에도! 여성들의 옷에 장식주머니가 달려있거나! 뭐 넣지도 못하게 얕거나! 하는 게 너무 많아서! 전쟁이다! 장식주머니 아웃! 얕은 주머니도 아웃!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여성들의 지위에 변화가 온 건 다 알지. 미국과 유럽의 여성들은 군수품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버스나 기차에서는 차장으로, 전쟁터에서는 간호사로 일했으며, 경찰관과 소방관의 역할도 여성의 몫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드레스 차림으로 활동하기가 불편해져서. '일을 하기 시작하니' 마침내! 여성들은 난생처음 일상적으로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르셋에 들어가는 살대가 철로 만들어져서 여성들에게 코르셋 착용을 멈춰달라고 호소함. 

대의를 위해 조였던 끈을 풀어버린 여성들 덕분에 전함 한 척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2만 8천톤의 강철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들을 남성들처럼 편하게 둘 수는 없지! 이제 거들이 생김. 

1930년대 이상적 여성상의 모습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추가되었다. 예전에는 예쁘게 보이기만 하면 되어서 고통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코르셋으로 몸을 꽁꽁 묶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제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분노하게 되는건, 여성 속옷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 

아직도 여자 옷은 주머니가 얕거나 장식주머니라는 것이다. 

탈코르셋 물결을 타고, 일부, 한 줌의 한 줌 변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일부의 변화가 아니라 불씨이기를. 

꺼지지 않다가, 언젠가 활활 타오르기를 바란다. 코르셋 아웃! 



란제리를 착용하는 것만으로 여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지기도 했다. 광고는 이렇게 란제리의 새로운 이중적인 역할을 암시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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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1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생각나요.

하이드 2021-01-13 17:40   좋아요 0 | URL
그죠. 저 표지 사진도 되게 유명한 사진이래요. 모델 뒤에서 찍은 사진.
여튼, 지들 필요할 때만 코르셋 하지 말라고 하고. 진짜 코르셋 모아서 전함 만들었단 얘기 보고 놀랐어요.

2021-01-13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13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포스트잇 2021-01-13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었네요. 전 주머니 없는 바지나 치마는 사지 않습니다. 왜 주머니를 안만드는지.
그래서 여성들 손이나 어깨에 핸드백을 들게 했겠죠.

오라오라 2021-02-0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대로 주머니가 많은 바지는 기능성은 좋지만 심미성이 떨어지지요. 요는 기능이 먼저인가 디자인이 먼저인가 같습니다. 군용 택틱컬 팬츠보면 주머니가 제법 많습니다. 다 제각기 기능이 있지요. 주머니가 있는 옷, 없는 옷 다 제각기 목적이 있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박람강기 프로젝트 9
미카미 엔.구라타 히데유키 지음, 남궁가윤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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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블리오 고서당 사건수첩의 미카미 엔과 R.O.D.의 구라타 히데유키의 독서대담이다. 

대담이라기보다 만담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지만. 


R.O.D.는 뭐여, 거의 다 읽었을때쯤 찾아보는데, 줄거리도 없고, 뭔 얘기여. 페이퍼랑 리뷰 보다보니, 아, 내가 DVD 샀었구나. 아, 생각난다. Read of Die. 여튼, 책책을 낼만큼의 독서광들이다. 


와닿는 이야기들도 많고, 아, 저정도는 아니지 (별로 위안되지는 않음) 만담식이라 재미있었다. 

한 때, 일본 장르소설과 추리소설 많이 읽었어서 아는 이야기 많아 그나마 반절 정도는 이해하고, 나머지 반, 전혀 모르는 책이나 만화 등 이야기도 그냥 얘기가 재미있어서 잘 읽혔다. 기본적으로 독서'광'에 방점이 찍혀있기에. 책이야기가 재미 없을리가 없지. 


이 책을 읽은건 다음의 인용 


 "책을 정리하다가 도중에 또 책을 읽고 마니까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죠."


책정리하다가 눈에 띄어서 동병상련!하려고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확실히 동병상련되는 책인데, 동병이 병 맞긴한지는 모르겠지만,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건 맞는거 같기도 하고.


바다건너 이사오면서 책을 대부분 버려서.. 나는 이제 책 별로 없는 사람이고, 책 소장욕구도 없어서, 다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면 (대부분의 책) 미련없이 바로바로 팔아버리고 있다.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쪼오끔 빨라서 책이 좀 늘었나 싶긴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책 안 사고 있으니, 거의 안 사고 있으니, 계속 줄 일만 남았다. (진심)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이상 이 책에 나오는거 같은 독서광은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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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네임 - 이름이 지워진 한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너머 이야기
샤넬 밀러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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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사건은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뉴스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지만, 이 사건은 몇 년에 걸쳐 뉴스를 볼 수 있어서 기억한다. 그리고, 스탠포드 수영 선수의 강간 사건에 대한 피해자의 최후 진술서가 세계적으로 바이럴을 탈 때, 나도 읽었고, 책으로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이 책하고 김지은입니다.를 같이 묶어서 파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참 독한 책들이 묶여 있었구나 싶다. 

사람이 독하다는게 아니라, 책이 독하다. 


부조리를 뒤집은 글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판사는 탄핵되었고, 브록은 책 속의 누구 말마따나 성폭력의 얼굴이 되었다. 

진술서도 대단히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대필 의혹도 있었다고) 책 읽어보니, 글을 굉장히 잘쓰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작가로 커리어를 가꿔나갈테니, 작가라고 해도 되겠지. 회복하는 중에도 처음 간 코미디클럽에서 코미디 대본으로 대성공을 하는, 글도 잘 쓰고, 열정도 있고, 에너지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덤프트럭급의 사고에 내팽겨쳐져서 추스리는 몇 년간의 시간을 책으로 써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글을 너무 잘 써서, 5백페이지 넘는 피해자, 생존자의 이야기를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받은 오렌지색 서류철에는 이후의 반응에 대한 팸플릿이 있었다고 한다. 


" 0~ 24시간 : 무감각, 경미한 어지럼증, 알 수 없는 두려움, 충격. 나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카테고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주~ 6개월 : 건망증, 탈진, 죄책감, 악몽. 마지막 카테고리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6개월~ 3년 이상: 고립감, 기억이 갑자기 한 번씩 되살아남, 자살 충동, 일을 하지 못함, 약물 남용, 관계의 어려움, 외로움. 이건 누가 쓴거지? 누가 이 쓰레기 같은 종이에다 불길한 미래를 예언한 거야? 내가 이 얼굴도 모르는 우울한 사람의 시간표에 따라 살게 된다는 건가?" 


그리고, 독자는 그 시간표를 살아내는 샤넬을 읽게 된다. 


"나는 돈만 있으면 감방 문이 활짝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발생했을 때 여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이 여자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일어났을 때 남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사람들이 그 남자를 동정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내 끊긴 기억이 그에게 기회가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피해자가 된다는 건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 책을 오래 읽었는데, 사실, 이 책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것은 별로 없다. 강간이 있었고, 목격자도 피해자도 있었는데, 언론은 유망한 수영선수인 가해자의 편을 들고,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고, 유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가해자를 선해해서 고작 3개월 감방에서 있다 나오는 판결을 내린다. 판사는 나중에 탄핵됨. 판사가 탄핵되는 거 빼고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 너무 매일 보는 이야기라서.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피해자가 생존자가 되는 과정이다. 진술서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저자의 글쓰기 멘토였던 소설가 앤 라모트와 연결된다. 


" 저는 당신이 걷어붙였던 소매를 다시 풀어 내릴 거라고, 그러면 깊고 깊은 내면에서 무언가가 당신에게로 돌아가서 당신이 무엇을 추구하거나 도전하는 것이 합리적일지 알려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 위에서 부서져 내리려고 하는 파도 아래로 잠수하는 방법을 알지요?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혼란과 임박한 소용돌이에서 물러나고, 그 과정에서 한 조각 안식처를 찾기 위해, 기억을 상상을, 사색을 휘갈겨 적는 행위.."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단단해졌기를 바란다. 

우리는 사람이 서로 잘 맞는다고 할 때 남자가 자신을 여자에게 끼워 넣는다는 생각이나 하지 그 외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간과한다. 귀는 색종이처럼 얇아서 내가 그의 가슴팍에 내 얼굴 옆면을 기댈 수 있게 해준다. 손가락은 엉키지 않고 깍지를 낄 수 있다. 한 손은 하나의 턱ㅇ ㅔ자그만한 의자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 몸은 구부러지고 접히도록 되어 있어서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편하게 받쳐준다. 우리에겐 아껴주어야 할 작은 부위들이 아주 많다. - P100

루카스가 떠나자마자 나는 나의 하루 안에서 아픈 공허함을 느꼈다. 내가 복숭아씨 주위의 부드러운 곤죽이 되어가는 동안 가장 단단한 부분인 복숭아씨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 P139

사람들은 그의 미래가 마치 그가 그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우리 대부분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은 우리가 내리는 선택을 통해 하루하루 만들어진다. 미래는 노력과 행동을 통해 조금씩 획득된다. 거기에 맞게 행동하지 ㅇ낳으면 그 꿈은 흩어지고 만다.

처벌이 잠재력을 근거로 삼을 경우, 특권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게 될 것이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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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1-01-1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now My Name 이 번역되었군요. 글을 잘 쓰더라고요. 그래서 더 읽기 힘들기도 했지만요.
작가가 트레버 노아의 데일리쇼에 나왔었는데 조곤조곤 말도 잘하고 보면서 울컥하기도 하고... 감동적이었어요.

하이드 2021-01-12 16:21   좋아요 0 | URL
네, 글을 엄청 잘 쓰는데, 책은 또 엄청 길고, 내용은 힘들어서, 몇 번에 나누어서 읽어야 했어요. 트레보 노아 데일리쇼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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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하는 호러 단편집. 아이들이 끔찍하게 죽는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는데, 아르헨티나의 어떤 현실을 반영한걸까?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이런식의 소설이 나와 디지털 성착취 이야기와 학대, 혐오 이야기가 소재로 쓰인다면, 픽션이겠거니 하겠지만, 현실은 더 끔찍한 것임을 우리는 이제 알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현실에 이와 비슷한 조각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 조각들을 풍자하기 위한 픽션이라면, 너무 끔찍하니깐. 


호러 이야기인줄 알면 절대 사지 않았을텐데, 읽다보니, 호러 판타지 현실 풍자 단편집이다. 

첫번째 단편 '더러운 아이'부터 너무 분명한데,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살지. 저런 곳에 살러 들어가지. 결은 다르지만, 여기도 외부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되겠지. 


읽기 힘들어하는 장르와 남자가 썼다면, 갖다 버릴 소재지만, 

1973년생 여성작가가 예리하고, 환상적으로 잘 쓴 글들의 모음집이다. 


한녀문학이라며, 한국 여자들의 불행 포르노와 몽롱함, 체념의 정서 질색인데, 아르헨티나 여성 작가의 이런 장르와 소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글을 읽을즈음, 아르헨티나의 낙태 합법화 뉴스를 봤다. (작년 12월 30일) 책에는 낙태 이야기도 나온다. 


그냥, 아, 나, 호러 싫은데, 못 읽겠다. 소재 너무 끔찍하고, 아이들은 왜 자꾸 이렇게 끔찍하게 죽고, 사라지는거야. 라고 하기엔 소설을 둘러싼 겹겹의 현실들이 눈 앞에 선해서 다 읽어 버렸다. 


표제작인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에는 분신하는 여자들이 나온다. 


"이제는 분신 사건이 매주 한 건씩 일어났지만 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이를 막을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불을 지르고, 사고라고 했고, 여자의 실수였다고 했다. 여자는 살아남아 증언했다.  

그 일이 다른 곳에서 똑같이 반복되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불을 지르고, 사고라고 했고, 여자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또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고. 여자들이 정말로 분신하기 시작했다. 분신'당한' 여자들 옆에 서기 시작했고, 대상화되는 외모를 버렸다. (극단적이지만) 


"얘야, 불을 지르는 건 남자들이란다. 그들은 예전부터 우리 여자들을 불태웠지.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를 거란다. 그러지만 우리는 절대 죽지 않아. 이제는 우리 몸의 상처를 당당하게 보여줄 거라고." 


여자를 불태워 죽인 역사는 유구하다. 마녀로 몰고.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다. 라며 길바닥에 앉아 시위할 때, 

아르헨티나의 한 작가는 몸에 불을 지르는 이야기를 써낸다. 


이런 연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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