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문자화할 수 있는 모든 정보에서 나아가 디지털 콘텐츠로서의 eBook을 말하는 지금에는 문자뿐 아니라 디지털로 전환 가능한 모든 정보, 즉 음성, 소리, 영상 등 모든 정보를 편집하고 묶어서 출판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이라는 매체의 영역을 확장하고 재정의하기에 앞서 ‘책의 본령’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고집을 부린다. 책의 본령은 ‘문자 메시지의 편집과 전달’이다. 왜 여태 고집인가?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서는 남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따라 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독서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고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진정한 철학자는 남의 생각을 많이 읽은 자가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여기에 반만 동의한다. ‘독서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고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수동적인 행위’로 특징지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독서가 만일 수동적인 행위라면 독서는 한결 쉬워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독서는 쉽지 않다. 최소한 자신의 의식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저작을 읽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독자는 호흡이 길어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하고 집중해야 한다. 저자의 생각을 계속적으로 축적, 종합, 정리, 기억하여, 자신의 사고로 그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한다. 독자는 책의 외형적인 편집과는 별도로, 자신의 사고를 편집해야 한다. 독서는 선형적이다. 독서는 순차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독서는 독자의 의식적인 집중과 상상력을 요구하며, 따라서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독서는 독자의 관점에서 매우 능동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창조이다.
독서를 창조이게끔 하는 데는 책이 ‘문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작용한다. 만일 문자가 묘사하는, 또는 설명하는 대상들이 직접 또는 즉물적으로 제공된다면 독자 편에서 메시지의 수용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시각, 청각, 후각, 또는 이들의 조합을 동원하여 메시지와 대상의 거리를 좁힐 경우,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그만큼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과 독자가 실제로 이해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좁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 전달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독자의 능동적 참여가 개입할 여지가 줄어듦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해’는 없겠지만 동시에 집중과 상상도 없을 것이며, 독서 행위는 ‘창조’하는 것을 멈추고, 단순히 메시지를 ‘수용’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인간은 창조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창조에서 진정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고 희열한다. 무엇인가 없는 것을 만들어 내야만 꼭 창조가 아니다.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을 사고-편집력의 도움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지식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다른 지식 및 경험들과 관계맺음을 시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사고 체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것. 그런 것도 지적인 창조 행위일 수 있다. 최소한 창조적인 수용이라고 불릴 충분한 근거는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창조를 해 나가느라 힘겨워하고 동시에 창조이기에 깊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책이 인류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인 이유는 책이 촉발하는 ‘독서라는 창조 행위’ 때문인 듯싶다. 문자, 또는 사상이 문자로서 편집된 책은 디지털 매체와 비교해 볼 때 2차원적인 매체이다. 하지만 이 2차원적이라는 한계 덕분에 책은 독자에게 창조의 여지를 제공한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2차원적인 사고의 지도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3차원적인 현장으로 창조하는 사고 능력, 이것 때문에 인류의 지적인 발전이 이만큼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어려워야’ 하며, 항상 독자의 의식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힘겨운 과정이어야 한다. 아니, 바꿔 말해, 독자의 의식을 한 단계 끌어올리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서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문자 메시지의 단순한 소비일 뿐이다.
함부로 ‘독서’라는 말을 하지 말자. 천박하거나 즉물적인 사고, 동시대인의 고정 관념, 판에 박은 상상을 담고 있는 사상의 문자화된 다발을 ‘책’이라고 부르지 말 것이며, 그것을 소비하는 행위를 감히 ‘독서’라고 일컫지 말지어다. 책이 그런 형태로 전락하고 독서가 이런 방식으로 안이해질 경우, 500년 간 인류와 함께 해 온 책이라는 물건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 다른 화려한 ‘매체’들에 비해 ‘책’은 너무나 초라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글ㅣ 배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