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가니 낯익은 책이 매대에 올라와 있다.

 예쁜 표지가 기억나고,
 이 책을 괜찮게 읽엇던 것이 기억나고,
 인상적인 첫장이 기억나고,
 천원시장을 통해 방출했던 것도 기억난다.  

 리뷰들을 둘러보니 
 인용된 몇몇 장면들도 기억난다.

 서점에서, 이 책이 왠일로 매대에 올라와 있나, 하고
 들척이는데...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럴리가, 하며, 중간즈음을 펴보아도, 끝 즈음을 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이름도 낯설기만 하다.

전혀 생각나지 않는 이 책,

나는 이 책을 읽은 것인가? 읽지 않은 것인가?

다행히(?) 모든 책이 이처럼 하얗게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 말들과 사건들과 인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대부분의 경우, 중요한 장면들과 결말은 기억하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니 <황색방의 비밀>의 경우에는 밀실살인사건 트릭이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트릭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프랑스적인 삶>의 경우는 왜인지, 리뷰도 없다.
읽는 책의 대부분은 조금이라도 독후감이랍시고, 이 공간에 끄적거려 놓는데,
이 책은 어쩐일인지, 기억에서도 서재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이 책을 읽긴 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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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8-11-0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 님이 이 책을 읽었는지 어쨋든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지고 계셨다가 방출하셨던 것은 기억나요. 그때 어, 하이드 님도 저 책을 읽으셨구나,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어젯밤 꿈에 하이드 님이랑 도시락 싸가지고 나이트 클럽에 놀러 갔어요. 술 먹고 춤추거나 하지는 않고 다락방 같은 룸에서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같이 도시락을 까먹었다는. ㅡㅡ'

하이드 2008-11-0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 요즘 꿈이 아주 ;; 그제는 장근석이랑 데이트하는 꿈 꿨구요(현실에선 장근석 싫어함)
어제는 벤택시 타서 택시아저씨랑 싸우는 꿈 꿨어요.

아, 나도 도시락 싸가지고 나이트클럽가는 꿈 꾸고 싶다. ㅎㅎ

blanca 2008-11-03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새 이책을 읽었나,안읽어나 하면서 절망에 빠진답니다.그래서 목록이라도 작성해 두려구요..
 

아침에 분리수거 하러 나갔는데, 그 공기가 너무 상쾌해
오늘은 서점에 가기로 결정했다.

30분쯤 걸어 사당역의 반디앤루니스에 도착했다.




꽤 오래간만에 온 것 같은 기분인데, 눈에 띄는 신간은 없다.
반디앤루니스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이 서점이 얼마나 책정리를 우리집구석같이 해놓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혀를 내두른다.

내가 찾던 로트링펜이
"문의하신 제품은 로트링 제도용 래피도그래피펜입니다."
라는 답변을 들었지만, 분명 그렇게 비싸게 주고 샀던 것 같지 않은데, 망설이며, 전화주문만 가능하다느
그 펜을 파는 <베스트펜>의 전화번호만 저장해 놓고 본다.

주문하려던 시에라팬의 배송료가 2,500원인 것을 보고, 즉각 취소했던차
서점에서 내가 쓰는 '로디아'수첩을 꺼내놓고, 이것저것 볼펜을 테스트해보다가
'지브라의 사라사 0.4'를 골라냈다. 뚜껑도 없고, 얄쌍한 디자인에, 작은 이즈에 술술 잘 나온다.

오프에 가면, 늘 책 몇권을 건져 오곤 했는데, 오늘은 눈에 들어오는 책이 거의 없다.

있다면 요 책.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이다.
왜 독일프랑스냐, 프랑스독일이 아니라, 고 묻는다면, 독일 원서를 번역하고,
프랑스판은 참조했기 때문일까?

무튼,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역사교과서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해 보인다.
번역말고는 거의 손댄게 없이 그대로라고 하는 것을 몇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러기에는 이 화려한 자료들은 무어란 말이지!
내가 지금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재미있게 역사공부를 했을지도 모른다.(대신, 과목은 예전에 하던 것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반으로 뚝 줄여주고)

역사를 배우는 것,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왜 '흥미'에서 출발할 수 없었나?
세계 곳곳에서 실재로 있었던 일들인데, 얼마나 흥미롭나.
이 책은 남의 나라 교과서지만, 이런 교과서라면, (과목은 반으로 줄고, 클래스메이트는 얼마전에 본 프랑스 영화'아름다운 연인들'에서처럼 잘생긴 남자애들로 채워주고) 나는 얼마든지 고등학교로 눈 딱감고 돌아갈 수 있다.
역사교과서는 엄청난 크기에 눈이 호강하는 각종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격도 엄청 비싼 3만7천원의 남의 나라 교과서에 (진짜 교과서, 교과참고도서도 아니고, 교과서를!) 욕심이 나다니, 뭔가 좀 부끄럽고, 자존심 상한다. (그래도 여전히 욕심남)

펴낸이는 '한중일 공동 역사교과서'를 꿈꾸며.. 라고 서문을 썼다.
우리가 만드는 우리 교과서만으로도 삽질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일은 말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꿈'으로만 여겨진다.

 이책은 독일의 어느 남녀가 이메일로 주고 받는 이야기들이다.
 띠지에 어느 독서섹션 맞고 있는 기자가( 이름이 가물가물, 낯익은 이름이였는데, 김광일이던가,  아무개던가)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다' 고 적혀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독서관련 무슨 기자거나 평론가거나 그랬는데,
이 단순솔직한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다' 는 그 띠지를 본 순간 여러가지 생각이 마구 떠오르게 만들었다.
'혹시, 올해 1월에 읽으셨삼?'
'혹시, 올해 한정 지병으로 이 책 읽을때까지 책을 못 보셨삼?'
'그럴듯한 말 적어 줬는데, 출판사에서 이 무식단순한 말만 뽑은거죠?'
'혹시, 나같은 독자들을 예상하고, 일부러 낚으려고 일곱살 조카나 썼을법한 말을 띠지에?'

그런 이유로, 나온지만 알고 있었던 이 책이 보관함에 들어갔다.
아직, 읽지도, 사지도 않았지만, 재미 없음 두고보자 하는 심정이다.(뭐, 재미없어서 두고 본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 평론가인지, 독서 관련 기자인지를 열라게 알라딘에 까는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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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1-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반디앤 루니스 오프 매장은 온라인의 사랑스러움을 못 갖췄군요.(아, 사당점!)
최근에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이 책에 관한 페이퍼를 곧잘 본것 같아요. 다락방님하고 웬디양님 서재였나보다.
저는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책이 바로 하이드님 서재에 걸려 있어요. ^^ㅎㅎㅎ

하이드 2008-11-03 10:54   좋아요 0 | URL
<화차>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

마노아 2008-11-03 22:07   좋아요 0 | URL
어머, 딩동댕!

Joule 2008-11-0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브라의 사라사 0.4는 제 다이어리 전용 펜이에요. 깨끗하게 참 잘 써지죠. 일할 때는 0.5나 0.7도 쓴다는. 반가워라.

하이드 2008-11-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5도 사려다가 일단 0.4부터 써보자.고 집었어요. 좋아요 좋아- ㅎㅎ

blanca 2008-11-0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브라의 사라사 0.4 저의 완소펜인데^^ 그것 막 두개씩 사서 쓴다는...저 공동 역사 교과서 또 마구 구매욕 자극하는데요...
 

오래간만에 집어 던지기도, 계속 읽기도 고민가는 책을 잡아 들었다.
마이클 그루버의 <바람과 그림자의 책>이 바로 그 책인데, 이 책은 촘촘한 글씨에 600여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
소재는 셰익스피어와 고서, 저작권 변호사, 영문학 교수, 살인 등으로 굉장히 먹음직하다.

너무나 산만하고(이건 읽을수록 더함), 무엇보다도 재미 없어서, 별의별 책을 다 읽는 나이지만,
뒤에 남은 분량을 보니, 이건 '시간낭비닷' 하는 종이 머리 속에서 계속 울렸다. 

읽기 시작한 책이 지독하게 지루하고 재미없음을 발견했을때 나의 자세 :
1. 책날개와 책띠, 책 뒷면의 과장된 선전문구를 보며, 앞으로 어떤식으로 재미있어질 것인가를 예상한다.
예를 들면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 '대문호의 창작 과정에 얽힌 비화를 흥미진진하게 파헤친다' '마이클 그루버는 자신이 진짜 물건이며, 또한 그 이상임을 증명해보였다.'  오케이, 앞으로 그런 비화와 추격전과 작가의 물건이 나온단 말이지? 하며, 기운을 내서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2. 컴퓨터를 켜고 독자리뷰를 본다. 
59개의 리뷰중 (꽤 많은걸?) 구매자 리뷰는 단 두개. (의심스럽다.) 이 책과 궁함도 안 맞는 사람들의 리뷰가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더 의심스럽다.) 아, 이 책 서평단 도서였구나. 기억해낸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독자리뷰는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읽을 가치 없뜸. 으로 결론, 땅땅. 보통의 경우에, 독자리뷰를 읽으면서 스포일러를 찾는다. 아, 이래서 이래서 이렇게 되는구나, 어디 더 읽어볼까나- 하는 식.

3. 그대로 책을 덮고 멀티리딩을 한다. (다른 책을 읽는다.)
워낙에 한번에 두 세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나로서는 (이건 꽤 적극적이어서, A책 50쪽까지 읽고, B책 읽던거 50쪽 더 읽어야지. 그리고 B책 50쪽 더 읽고, A책 챕터 4까지 읽는 뭐, 이런 식.) 책을 읽다가 덮고, 다른 책을 시작한다고 해서 찜찜할 이유없다. 비록, 그 책을 언제 다시 읽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런식의 소극적 멀티리딩하는 책들은 아마도 적극적 멀티리딩하는 책들의 열배정도는 족히 되지 않을까.  

4. 마구 화내고, 집어 던지며, 나를 낚은 출판사나 알바 리뷰어들을 저주한다.
성질 부리고, 남탓하는 본색이 나온다.

5. 책의 다른 용도를 생각한다.
깊은 책장 뒤에 쑤셔놓거나, 다리 하나가 빠진 사방책장의 다리로 괴어 놓거나, 불쏘시개로 쓰거나(아, 우리집에는 벽난로가 없구나), 냄비 받침이나, 컵라면 뚜겅 덮는 용으로.. 


+++

완전 무고는 아니지만, 마침 읽고 있던 '재미없을랑 말랑한' 책인 덕분에 <바람과 그림자의 책>이 도마위에 올랐다.  
버뜨, 위의 페이퍼를 쓰기로 마음먹은 후에 책은 조금이나마 재미있어졌다. (자신의 운명을 예지한 것인가, 책이여!) 여전히 산만하다. 사건이면 사건, 역사면 역사, 캐릭터면 캐리터, 시대사면 시대사, 뭐 어느 것 하나에 집중을 해야 책이 술술 읽힐텐데, 아니면, 작가가 천재라서 그 모든걸 하나로 잘 버무려내거나( 불행하게도 이 작가는 흥미로운 바이오그래피를 지녔지만, 천재작가는 아니다.) 해야 하는데, 쓰고 싶은 얘기를 다 써내까렸으니, 분량 많은 책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그래서 분량이 많은 거였어' 속은 느낌. 뭐, 책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지 않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주어듣는 소스가 되어 버린다면, 그럭저럭 진도는 나간다. 끝까지 다 읽고는 스토리도 정리되겠지, 하는 마음. 그, 끝까지 다 읽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 셰익스피어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이나 책쟁이들 이야기들, 주인공이 저작권 변호사인만큼 저작권 관련 이야기들과 저작권과 소설, 허구, 뭐 이런 것과 '최고' 인 셰익스피어 와 연결한 것은 꽤 인상적이었다. 그런저런 매력들을 발견해나가면서 나는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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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미없는 추리소설을 대했을때 매니아의 자세
    from little miss coffee 2008-11-21 19:47 
    결국 재미없을랑말랑했던 <바람과 그림자의 책>은 아직도 그 때 읽었던 그대로다. ++ 재미없는 책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의 결론은 '읽지 않는다' 혹은 잘 말해주어야 '영원히 읽는 중' 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질문 '재미없는 추리소설을 대했을때 매니아의 자세' 에 대한 답변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추리소설 매니아.라고 거창하게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추리'의 요소를 지닌 책들을 편애하는 편인 것은 분명하다.
 
 
hnine 2008-11-02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런 페이퍼 한 편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군요.
어떤 책일까, 그렇게 재미없이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음에도 호기심까지 생겨나네요.

이매지 2008-11-02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의 그림자의 책>에 리뷰를 쓴 기억이 있어서 찾아봤더니,
전 서평단으로 받은 책임에도 별 셋 줬군요.

마노아 2008-11-0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덕분에 바람과 그림자의 책이 궁금해지네요. 하이드님표 책 페이퍼 재밌어요^^ㅎㅎㅎ

하이드 2008-11-02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hnine님, 딱 짚으셨습니다. 안그래도 그문항을 넣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습니다.
이매지님, ㅡㅜ 서평단책으로 꼭 읽고, 리뷰 써야 했다면, 더 괴로웠을 것 같아요.
마노아님, 다행입니다. ^^ 제가 워낙 책 다 읽기 전에 이런식으로 설레발을 떠는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ㅎㅎ

비연 2008-11-0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주로 멀티리딩..;;;;

곰탱이 2008-11-04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그런 책은 수소문해서 빌려 본 다음에 '역시나...'하며 마음놓고 집어 던집니다. ㅎㅎ
왠지 안 읽으면 또 그렇더라고요 ㅡ,ㅡ

무해한모리군 2008-11-04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로 멀티리딩
잼있는 책을 동시에 읽으며 저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

별족 2008-11-06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가' 재미없게 읽은 책은 남 주기도 부끄러바서, 가끔 책 찾다가 좌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을 빌려주고 못 받고, 이상한 책들만 책꽂이에 남아 있어서-
 
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기리노 나쓰오를 <아임쏘리마마>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작가를 지금보다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 읽은 <아웃>, <다크>, <그로테스크>, <잔학기>까지 다 좋았는데, <아임쏘리마마>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도 거슬렸는지, 기리노 나쓰오는 역겨운 여자주인공을 만들어내는 작가로 한동안 박혀 있었다.

그녀가 역겨운, 눈을 피하고 싶은 등장인물을 만들어내는건 맞다. 그 추악함은 행동의 하드코어보다는 마음의 하드코어로 피와 살이 난무하기 보다는 베일듯한 차가운 마음과 짬밥같은 욕망과 순도 높은 이기심때문이다. 그건, 어떤 잔인한 장면보다 더 구역질난다.

<잔학기>는 중편 소설정도의 분량이다. '나'는 열살때 겐지라는 지저분하고, 머리가 모자란듯한 남자에게 1년 넘게 유괴되었다가 풀려난 끔찍한 과거를 가진 소설가이다.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과 직관에 의해 재구성하여 쓴 소설의 제목이 바로 '잔학기'이다. 소설속의 소설인셈이다. '겨우 열살이던 내가 가진 지혜와 체력과 의지, 있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살아남고자 한 경위를 어떻게든 나타내고 싶다는 뜻'으로 자신 안의 독毒을 쏟아내듯 써 낸 글이다.

열살 소녀의 눈으로 본 겐지와 옆방 남자 야타베씨, 그리고 그들이 머물던 공장의 사장과 사장 부인. 
열살에 그 방에 들어가서, 열한살에 나오지만, 그녀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다. 사건의 경위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런저런 경우의 수들도 생각할법한 이야기들이고, 반전이나 대단한 스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담담하게 때로는 독하게, 이야기는 진행된다. 범인을 위한 변명들은 쓸데없이 수다스럽고 작위적인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런저런 눈에 보이는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짧은 분량에 소녀와 주변인들의 심리를 잘 담았다.

기리노 나쓰오는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좋은쪽이든, 나쁜쪽이든)쉽게 감정이입 되도록 하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을 읽는 것이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후련하다. 

열살 여자 어린이가 어른 남자에게 1년 넘게 납치되어 한 방에 지내다가 구출된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한다. '자유라는 이름의 속박이 있고, 속박이라는 이름의 자유도 있었다. 이 사실이 아직 열한 살이었던 나라는 인간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릴 것 같았다.' 구출된 그녀가 느끼는 부모에 대한 위화감, 그녀에게 다가오는 정신과 의사니, 형사니, 검사니 하는 어른들, 어디를 가든지 따라오는 그녀에 대한 속되고 저열한 관심들.

미야베 미유키가 친절하고, 따뜻하게 사건과 사건 속의 다양한 인물군상을 그리고, 독자는 그 중 어디 속하나를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면, 기리노 나쓰오는 사건의 진실을 힘으로 까발려 독자 앞에 던지며 비웃는듯하다. 옮긴이가 기리노 나쓰오를 만났을때 '박력'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녀를 글과 사진으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왠지 이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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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11-02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통 여류작가들을 좋아하지 않는것같아요. 저도 여자이지만, 뭐랄까. 여자에게서 기대할수 있는 것들이 나온다고할까...그런 기분 때문에 왠지 한계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뭐 그렇게 따지면 남자들의 글역시 어느정도 한계성이 있는 건 당연하지만...왠지 완전한 여성성이나 모성애같은 감정은 저에게 버겹더라고요.)
그런데 기리노 나쓰오는 그런 부분에서 뭔가 파격적이었달까. <그로테스크>를 처음접했을때의 그 박력이란...
다분이 여자의 얘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주인공들을 사랑할수 없게 만드는 그 박력(?)때문에 반했어요..^^
<잔학기>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소설이었어요. 읽으면서 막 무섭고 슬프고 애매모호한 감정이 들더라고요..ㅠ ㅠ

하이드 2008-11-02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한 이야기를 와닿게 만들었을때 그 감동이 배가 되는 것 같아요. 몇가지 눈에 보이는 단점들도 다 덮어둘만큼의 박력이죠.

그나저나 여류작가에게서 여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나오는것은 남자작가들한테서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어떤거 이야기하시는지는 어렴풋이 알것 같긴 해요. 저는 아마도 비슷한 이유로 히가시노 게이고룰 무지 싫어해요.그가 묘사하는 천편일률적인 여자캐릭터들;;

Apple 2008-11-03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하시네요.^^; 무지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닥 안끌리더라고요..정말 여자캐릭터들의 모습이란 대단하죠..이건 뭐 여주인공들이 거의 물체같다는 생각이 들기도..=_=;
 
시소게임 작가의 발견 1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열다섯가지 각기 다른 단편들인데, 장편 하나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것이 연작집이거나 해서가 아니라, 주제와 등장인물의 일관성 때문이다.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는 그 일관성을 '인간'과 '죽음'에서 찾았지만, 일개 독자인 내가 보는 일관성은 악처와 그 악처를 살해하는 남편이다. 딱히 유쾌할 것도, 불유쾌할 것도 없는 설정이긴 한데, 계속해서 반복되니 머리가 좀 아파졌다. 악처는 말그대로 악처인 경우도 있고, 악독한 애인일 때도 있고,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작은 변화들을 심어 놓고, 이야기에는 나쁜 아내와 지친 남편과 때마침 생기는 예쁘고 순종적이고 젊은 불륜녀를 주축으로 한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마초적이라던가 한건 아니다. 왜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등장인물들의 유형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열다섯편의 단편이 조금이라도 지루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아토다 다카시는 같은 틀을 가지고서 그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채 무궁무진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죽음'은 추리소설에서도 일반 문학소설에서도 가장 거대한 주제이다. 좋은 추리소설은 좋은 추리소설에 그치지 않고, 좋은 소설이고, 좋은 문학작품이다. 코넬 울리치를 에드가 알랜 포에 비유하며 시적이다고 말하듯이, 아토다 다카시의 미스테리 단편들도 문학적이다.  첫 단편 <사망 진단서>의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어느 작품 속 한 구절이라고 해도 쉽게 믿을만큼 환상과 심리의 절묘한 결합이다. 작품의 표제작이기도 한 <시소 게임>은 특히 재미있게 봤다. 교진과 다이요와의 경기장이다. 교진의 광팬인 그는 특별지정석 암표를 사게 되는 바람에 3루쪽인 다이요 응원석에서 소심하게 교진을 응원하게 된다. 경기는 교진이 리드하고, 응원의 즐거움마저 반감된 경기장에서, 그의 생각은 자꾸 뒤에 앉은 남자에게로 흘러간다. 그는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교진의 자리에서 자주 보던 교진의 광팬이였는데, 올해는 갑자기 다이요를 응원하고 있다. 야구 경기의 진행과 '나'의 추리는 교차되어 보여지며, '시소 게임'이라는 기가막힌 결론을 이끌어낸다. <과거를 운반하는 다리>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살인도 복수도 없지만, 오싹함을 남겨주며, 첫문장을 곱씹어보게 한다. <부재증명>과 <파인벽>도 좋아하는 작품. 트릭은 이미 어디선가 보았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작가의 문학적인 터치가 이 작품들을 즐겁게 읽게 해준다.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 도 인상 깊었던 작품.  

그는 노력형일까, 천재형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으로서는 전자일 것 같다. 소설의 첫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말끔하고, 완벽하게 작품으로 내 놓는 그 모습은 99% 노력형일 것 같다. 독자로서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나올 아토다 다카시 총서가 무진장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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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