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와 온다 리쿠를 열광적으로 맞이했던 독자들 중에 하나고, 적극적으로 마음 돌리고 욕한 독자들 중 하나다.
안 읽으면 그만이지, 욕은 왜 하나. 라고 한다면, 좋아했던 마음이 기대 이하의 범작들로 인한 실망으로 지속적으로 무너져갈 때 겪게 되는 배신감 때문일 것이다. 플러스, 정말 많은 작품이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고, 그 중에는 진짜 시간 아깝고, 돈 아까운 책들도 많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건 정말 괜찮아라고 해도 돈 주고 사기 싫어지는 지경까지 와 버렸으며, 내가 열번 속지, 열한번 속냐. 하는 심정으로 기대치를 확 낮추어 놓은 상태이다.

잡설은 그만하고, 꽤나 평이 좋은 작품인 <악의>를 읽게 되었다.
꼬인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좋은 이야기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치고는 지루하고, 히가시노 게이고 치고는 진중했다. 고 평하고 싶다.

이야기는 노노구치의 수기로 시작한다. 
학교 선생이다 그만두고 동화작가의 길로 들어선 노노구치와 손에 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에 문학성까지 인정 받은 히다카는 어린시절의 죽마고우다. 부인이 죽고 5년이 지나 재혼한지 한달이 된 히다카는 이제 곧 캐나다로 떠나 휴식기를 가지려 한다. 노노구치는 그를 방문해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돌아오는데, 그 날 밤 히다카의 전화를 받는다. 의논할 일이 있으니 와달라는. 마침 출판사 직원이 방문중이라 8시경에 찾아가기로 하는데, 막상 찾아가자 집안에 불이 모두 꺼져 있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듯하다. 부인에게 전화를 하고, 근처 찻집에서 기다렸다가 부인을 만나 집으로 들어가자, 히다카가 교살된채 죽어 있는데...  

노노구치는 사건을 조사하는 과거에 같은 학교에서 교사를 했던 가가형사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평생 겪기 힘들 사건에 대한 수기를 쓴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가가형사는 그 수기를 보여달라고 한다. 사건의 진행에 따른 노노구치의 수기와 가가형사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면서 밝혀지는 진실, 아니 똘똘뭉친 인간의 악의惡意

이 책에는 정도가 각각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음기인 악의가 등장한다.
'악의'는 아주 어릴적의 학교 왕따 문제부터 시작한다. 왕따를 하던 대장겪의 못된놈은 '아무튼 그애가 싫었어요' '아무튼 그애가 싫었어요' 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유 없이 치솟는 나쁜 감정 '악의' 못된놈이 무리를 모아 그 악의들을 한 아이에게 쏟아 붓고, 그 악의는 또 다른 곳으로 더욱 증폭되어 전달된다.

도대체 이 이유없는 나쁜 감정 '악의'는 어디에서부터 생기는 것일까? 질투, 시기, 열등감, 등등의 밭에서 자라난 '악의'라는 재료를 히가시노 게이고는 훌륭하게 요리했다. 개인적으로 마침내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 탐정역의 인물이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사건 해결을 설명하는 것에 지루해하는 편인데,(이미 독자는 다 아는 얘기라구.) 이 책은 결말까지 나같이 성급한 독자의 눈을 놓치 않는다. 사건을 해결함에 있어서 who done it? why done it? how done it? 을 다루게 된다면, 이 책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why done it?이다. 범인은 진작에 밝혀졌는데, 왜? 범죄를 저질렀는가, 즉. 범죄의 동기는 무엇인가? 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과정에서 사건의 진정한 전말을 파악하게 된다.    

'세상에 시시한 책은 없다. 시시하고 편협한 마음의 독자만 있을 뿐이다' 라는 어느 일본 작가의 저자 후기를 본 적이 있다. 그런 얘기를 '저자'가 해봤자.. 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시시한 책은 열라 많고, 쓰레기 같은 책도 열라 많다고 생각하지만, 편협한 마음의 독자는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나도 가끔 '편협한 마음'의 독자가 된다는 것도 인정해야겠다. 이름만으로 사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이름만으로 절대 안 사. 했던 작가들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온다 리쿠가 그 둘. 이제 그 둘에 대한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좋은 작품'을 엄선해서 읽어봐야 겠다고 반성했다.

*리뷰 제목은 <닥터 노먼 베쑨>중 닥터 노먼 베쑨의 연설문 중 따옴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냐 2009-02-0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완독. 아직 후끈. 저 역시, 살짝 식었다가, 이 책은 아주 맘에 들었담다.

하이드 2009-02-09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까지 흠잡을데가 없더군요. (막 흠잡으려고 작정하고 봤음에도 불구하고요 ^^;)

Beetles 2009-02-2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하이드님의 추천은 절 실망시키지 않는 듯..이스트사이더의 남자까지 최근 읽었네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작의 발단은 잘못 보낸 이메일이었다. 모든 사랑에 빠지길 원하는 여자들의 로망인 '우연'에 의해,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에미는 <라이크> 잡지의 구독을 중지하기 위해 메일을 보내는데, 몇번이나. 그 메일은 i 앞에 항상 e를 쓰는 그녀 특유의 자판 버릇 덕분에( 이 버릇에 대한 그녀의 장광설이 나를 바로 사로잡았다.) 레오라는 연령미상 남자에게 메일을 보내게 된다. 예의 바르게 수정해주는 레오의 이메일이 오고, 예의바르게 사과하고. 그렇게 '우연'은 그들의 만남을 엮어주었다.

여기 두 번째 '우연'이 다가 온다. 잘못된 주소가 잘못 저장되어, 레오에게 '판에 박힌' 연말 메세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우연에 남자와 여자는 대화를 시작하고, 서로의 메일에 작은 스파크를 느끼게 된다. 일년 동안, 그들이 주고 받는 이메일로만 이 책이 이루어져 있고, 그걸로만도 넘치게 가슴 떨리고, 흥미 진진한 러브스토리를 보여 주었다는 것. 과연 에미와 레오는 만나게 될까? 를 궁금해하며, 게걸스럽게 책장을 넘기고,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은 남자와 여자의 상황에 지독한 현실성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는 그가 아마도 아주 매력적인 남자고, 그녀가 아마도 아주 매력적인 여자라는 전제에서 비현실적이고, 소설같다. (아참, 소설이지.)  세상에 아주 매력적인 여자가 지역에 사는 아주 매력적인 남자에게 두 번이나 우연히 메일을 (세상에 메일 주소가 몇개나 될까? 수억개? 수십억개? 아니 그 보다 더 많이?) 보내는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그 점이 그들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지속시켜 줬다고 한다면, 한 쪽이 덜 매력적이었을때, 홀딱 깨면서 그 관계가 일장춘몽 박살 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다음 수순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나도 에미처럼 외모지상주의? 

에미에게는 단란하고 완벽한 가족이 있고, (남편을 포함한다!) 레오에게는 헤어지지 못하고 자꾸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다.

설정은 평범하다.

이 소설을 한 번 잡으면, 끝장까지 넘기게 하는 힘은, 그들의 재치이다. 그리고, 이메일에 글로만 드러난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 잡아 일년이 넘게 유지하게 것은 어쨌든 우리가 보고 있는 바로 이 메일들이다. 공평하군. '새 메일이 도착할 때 들리는 그 짧고 무덤덤한 신호음에, 툴 바의 그 코딱지만한 편지봉투 아이콘에 제 인생이 달려 있었어요.' 아, 독일어로도 유머가 가능하군. 키득거리게 만드는 유머 아닌 유머의 향연. '온라인 연애'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준 그 글들이 에미 앞에서와 똑같이 내 앞에도 펼쳐져 있다.  

때로는 말도 못하게 유치하고, 때로는 창피할만큼 성급하고, 또, 때로는 후회를 불러오는 액션과 노액션들. 
그런 후회와 유치함들이 안타깝게도, 현실에서의 사랑과 꼭 닮아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레오건 에미건 둘 중의 하나를 불러 앉혀 놓고, 와인 한 잔(이라고 말하고, 한 병이상이라고 읽는다.) 마시면서 연애 어드바이스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물론 조언을 해 주는 쪽이 레오라면, 조언이고 나발이고 덮쳐 버릴 확률도 높다. '나의 강아지 이름도 레오에요. 하지만 그녀는 여자에요. 왜 여자에게 레오라는 이름을 붙여 줬는지 들어볼래요?' 하면서 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9-02-0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로맨스는 유치해지지 않기가 힘들다 생각했는데 이 소설은, 너무 좋아서 차마 아직도(!!!!) 마지막 장을 못넘기고 있습니다. 여름엔 독일어로 읽으려는 중이어요.

하이드 2009-02-0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어로!! 저도 읽고 싶어요! 독일어로도 유머가 가능했구나!란 깨달음을 얻었지요.
대단하세요. 마지막장을 참고 있으시다니! ㅎㅎ

마노아 2009-02-0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장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그걸 참으시다니! 아, 그나저나 리뷰 마지막 단락이 너무 재밌어요. 하이드님은 선수!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포스트잇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독서의 역사> 올 1월 1일에 읽기 시작하여, 책 읽는 중간중간 야금야금 한 챕터씩 읽어내, 이제 막 마지막 챕터를 덮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이렇게 이상한 표지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것에 전혀 후회는 없지만( 후회라니! 감동이라구!!), 책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보다 더 딱딱하고, 역사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제목이 독서의 '역사'라는 건 뭘로 본건지;)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끝나지 않는 <독서의 역사>' 에 이 책의 컨셉이 잘 나와 있는 말이 있어 옮겨 본다.

'쉽게 접근할듯 하면서도 학구적이고, 정보를 제공하는 듯하면서도 사색적이다.'

이 말이 꼭 맞는 것이, 보르헤스의 말년 보르헤스의 책읽어 주는 아르바이트를 한 것으로도 유명한 망구엘은 자신의 책과 관련된 재미난 일화나 단상들로 챕터를 시작하여, 역사 속의 인물들과 독서에 관한 갖가지 행위들을 끌어내어 분석하고, 고찰하는 것으로 챕터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보르헤스와의 일화들도 나온다.('누군가에게 대신 책을 읽게 하기') 

독서 행위의 '역사'에 관해, 저자는 종이가 생기기 이전의 시대 이야기부터 릴케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까지 '독서'라는 광대한 주제 아래, 자유 분방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나간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몇가지는 다음과 같다.

'금지된 책읽기'챕터에서는 농장주들이 극구 막았던 노예들의 책읽기가 나온다. 노예들이 노예로 남아 있지 않게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교육'이고, 그것을 담당하는 것이 '책' 이므로, '읽고',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여자들의 책읽기에도 해당된다. 이 책에서도 여러부분 나오지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도 책을 몰래 몰래 읽어야 했던 여자 독서가들의 역사가 묘사되고 있다.  처음 책이 나와서 귀족들의 고급문화로만 여겨졌을 당시 - 그도 그럴것이, 당시의 책은 화려한 장정에 필사자들이 일일히 한 글자씩 옮겨야 했으며, 종이 또한 귀했고, 글을 아는 자는 소수였다.-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나오고, 더 많은 대중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때, 책은 단순히 글자들이 찍힌 종이 모음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여파를 몰고 오는 혁명의 가장 큰 수단이었다. 당시의 혼란에 관하여 이야기한 챕터도 있다.

'독서가로서의 번역가' 챕터에서는 릴케가 프랑스 시인의 시를 번역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불어와 독어 원문도 등장한다. 프랑스 시인의 그저그런 시를 릴케가 아름다운 독일어의 특성을 백이십분 발휘하여 최고의 시로 거듭나게 했다는 이야기는 재미나면서도 이런저런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혼자만의 은밀한 독서' 챕터에서는 침대 위에서 책읽기. 이야기가 나오고, '책 훔치기'에서는 희대의 책도둑과 책 도둑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에 남아 있는 저주문구들이 나온다.(몹시 유용하다. .. 응? )

이와 같은 독서와 관련된 여러가지 주제들이 역사 속의 실존 인물들과 사건들과  어우러지고,  인용되는 이야기들은 물론, 흑백이긴 하지만, 풍부한 관련 도판들은 이 책을 놓칠 수 없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인 '끝나지 않는 <독서의 역사>' 가 유독 와 닿는 것은, 이 책을 아끼고, 아껴서 다 읽은 다음에도 여전히 허기지기 때문이다.  나의 독서는 계속되고, 그와 함께 나의 '독서의 역사'도 계속되리라. 수많은 독서가들의 역사와 함께 말이다. 침대 머리맡 책장에 얌전히 놓여진 <독서의 역사>는 외로운 독서가의 많은 동지들이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기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독서의 역사>에는 끝이 없다. 위의 저자는 이 책 말미에 독자 여러분들이 아직 미래에 일어날 독서 행위와 놓쳐 버린 주제, 적절한 인용, 사건과 등장 인물에 대한 더 많은 사색을 덧붙일 수 있도록 백지 여러장을 남겨 두었다. 거기에는 약간의 위안이 담겨 있다. 나는 그 책을 내 침대 곁에 놓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오늘 밤, 아니면 내일 밤, 그것도 아니면 모레 밤에 그 책을 펼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모습도 그려 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산책 대표 정은숙의 <편집자 분투기>를 읽고, 책 꽤나 읽었다고 자부했던 저자가 편집자의 길에 들어서며, 선배들의 독서 리스트에 좌절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서 저자 가쿠타 미쓰요는 후기를 빌어. '어릴때 부터 책 읽는 것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는데, 문학과를 들어가니, 나보다 다들 50배쯤 많이 읽은 선배들이 있었고, 출판사에 가니 500배쯤 많이 읽었더라'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50배, 500배는 당연히 기억에 남는다.

그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나는 책을 얼마나 읽는 것일까? 책을 많이 읽는 순서로 독서가들을 줄 세워본다면,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책을 많이만 읽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둥, 어떤 책을 읽냐가 중요하다는 둥의 초딩적인 이야기들은 제껴놓자.

내가 한달에 읽는 책이 2-30권 정도 되고, 1년이면 300여권 정도를 읽는다. 책 구매는 그 .. 두배에서 세배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 (아, 왜 갑자기 속이 쓰리는가;;) 그리고, 읽는 책들중 열에 아홉은 방출한다. 300권을 읽으면, 30권을 남기고, 270권을 방출하는 꼴이다. 내가 진짜 진짜 좋아하는 책들의 엑기스만 모아 모아서 평생 가지고 가야지. 라는 몽상에 빠져, 그 엑기스를 얼마나 찐하게 뽑아 내는지가 내 평생의 책읽기의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이 진짜인가?' 싶은 책만 읽어도 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게, 재미로 술술 넘기는 책들을 읽는 것도 주전부리로 즐기고 있으니, 에센스 오브 에센스를 찾아 가는 길은 더디기만 하다. 물론, 더딘것도 나쁘지 않다. 

하나의 책을 읽어냄에 있어서,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있는만큼, 그 책을 읽을 때 작가가 알았던 것들, 몰랐던 것들을 다 알고 볼 수록 책을 잘 알아볼 수 있으므로, 일단 이런저런 관련도서들은 많이 읽어 놓는 것이 좋다. 거기에 나의 경험치와 감수성치도 더해진다. '책은 독자와 작가가 반반씩 쓰는 것이다' 라고 누가 그랬더라. 보르헤스? 에코? 무튼,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저자의 노고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서의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고, 스무살 때 읽은 데미안과 서른살 때 읽은 데미안, 그리고 마흔살 때 읽을 데미안은 다르게 다가올 수 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독자의 경험치와 감수성치는 그 책을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무척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해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새로 읽고 그때마다 감동을 글로 남기면 그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들의 자서전을 기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인생 경험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인생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해석도 그만큼 더 절실하게 와닿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 인생의 책들의 에센스들을 모아 해마다 읽어나가는 것이 나의 독서생활의 로망인데, 새로 알게 되는 책들, 새로 발간되는 책들, 이미 사 둔 책들을 허겁지겁 읽어나가느라 재독의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나는 나의 독서의 정점이 청년기였으면 하고 바란다. 가장 감수성 예민한 시절에 더 많은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걸. 나의 독서 생활의 현재까지의 정점은 항상 '바로 지금'이다. 아주 아주 조금씩, 새 발톱의 때만큼씩 과거와 세상과 이치를 알아나가고, 그것은 그마만큼 나의 독서를 풍부하게 해준다. 청년시절 부지런히 쌓아 왔던 것을 지금쯤은 누리며 책을 읽어도 좋으련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엄청난 착각일까?), 나는 이제야 조금씩 쌓아가고 있으니, 이걸 누리며, 책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을 척하면 척 알아채는 독서가가 되는 날이 언제나 찾아올까.  

독서가에게 답이 없는 질문들 중 하나다. 얼마나 책을 맣이 읽으면 많이 읽은 걸까? 라는 멍충한 질문은.
어쩌랴, 그저 앞에 있는, 손에 닿는 책을 하나 뽑을 밖에. 

지금 내 앞에는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 놓여 있다. 열렬히 나를 초대하고 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09-02-0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도시 서울의 1인당 평균 독서량 0.6권(월간이 아니고 연간, 음 일단 성인 대상)
여기에 비하면 하이드님은 제일 앞줄이십니다. ^^;;

마노아 2009-02-0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왕성한 독서와 또 글을 쓰다니, 정녕 배는 아니 고픈건지요!

하이드 2009-02-0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뒷줄 저 까마득히 있다고 느껴진는건 이 동네에서뿐인가요? ㅎㅎ

이매지 2009-02-0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1년에 200권 남짓 읽는 것 같아요.
이 동네는 워낙 편차가 심해서 ㅎㅎ
보기만 해도 졸음오는 책들만 읽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

ris 2009-02-07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신간이 영남카디날에서 출간되었네요^^

하이드 2009-02-0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제가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좋아하는 걸 기억해주시는군요- 저 사서 오늘 도착했습니다. 따끈따끈 - ^^

무해한모리군 2009-02-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년에 한달 보통 7,8월쯤엔 제일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어요.
옛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그어놓은 밑줄들을 보며 다시 사랑에 빠지곤 해요 ^^

비로그인 2009-02-0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여름이 되면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를 독일어판으로 읽을테여요. 휴가 기간이면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한국소설이면 재독을 하고 외서의 경우에는 원문을 읽기로 했습니다.

카스피 2009-02-07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모두들 대단하십니다요.년 300권이라 점 꿈도 못꿀 얘기네요 ㅜ.ㅡ

marine 2009-02-11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하이드님. 1년에 300권이면 꽤 많이 읽는 축에 속하시네요. 전 대략 150~200권 사이?
 
닥터 노먼 베쑨 역사 인물 찾기 1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먼 베쑨의 평전을 읽기 시작했던 것은 김갑수의 책에서 그가 성질이 무척 나뻤다. 라는 글을 읽고 나서였으니, 그닥 지적이거나 선한 의도는 아니였는지도 모르겠다.

인물, 평전을 즐겨 읽는데, 실천문학사의 평전들은 인물 뿐만 아니라, 인물이 치열하게 살아 낸 현대사에 대해서도 비교적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조명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책은 노먼 베쑨의 업적과 글, 일화를 위주로 마흔 아홉의 나이에 일흔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훨훨 태우고 가기까지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노먼 베쑨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의 전반부는 노먼 베쑨의 예술가와 지적인 의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스페인과 중국에서의 후반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온 몸과 마음을 던지고, 아마도 자신의 남은 수명까지 다 던져 산화한 휴머니스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먼은 다양한 모습을 지닌 복잡다단한 인간이었다. 성마른 성질은 환자들 앞에서만 틀림없이 누그러졌다. 뛰어난 외과의였고, 그림을 그리는 뛰어난 예술가이자 시인이자 명연설이자 과학자이자 설계자이자 사업가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폐결핵으로 죽을 자리를 찾아서 요양원으로 들어가서 거의 죽다 살아난 이후로, 더욱 불타오른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닥터 노먼 베쑨이라는 인간 양초 앞에서, 그가 사랑했던 용감하고 꿋꿋한 인민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있는 그 세상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처음으로 스페인 전장에서 헌혈을 시도하였고, 헌혈대를 조직하였으며,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  전반부에서 노먼 베쑨이란 사람의 다혈질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 의사로서의 지적이고, 앞서나가는 것을 보았다면, 후반부에서는 전쟁의 발톱에 상채기난 시민, 혹은 시민들의 틈에서 의술이 아니라 인술을 행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은 그를 더욱 인간적이고, 한가지 목적에 포커스를 맞춘 강렬한 인상으로 보여주는데, 그 주에서도 의사 봉의 이야기는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노먼 베쑨이 백구은 동지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전설적인 존재로 자리잡고 있을때, 노먼 베쑨과 그의 의료대가 전장 근처의 산간 마을에 방문하여 그 곳의 의료대와 환자들을 본다. 그 중에 한명이 부목처치가 안되어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처지인 것을 보고, 특유의 벼락같은 성질을 내며, 그를 담당한 의사 봉의 잘못을 장군에게 보고한다고 하며, 큰 망신을 준다. 다음날 노먼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하며 아꼈던 통역사 동이 봉의 이야기를 해주는데, 봉은 오지산간마을의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도 없어 글도 못 배우고 물소를 치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나고, 오지의 마을에도 군인들이 스쳐지나가게 되며, 세상 이야기를 듣고, 군대에 입대하여, 자력으로 읽고 쓰기를 배운다. 읽고 쓰기를 깨치고 나서 간호병이 되고, 수석 간호병의 자리까지 오르자, 이번에는 대학 나온 군의관들의 어깨너머로 그들의 수술 동작을 배우고, 비웃음을 받으며 라틴어 단어들을 한문으로 적어서 외우며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노먼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고질병인 성질을 반성하며, 봉을 돕게 된다. 

중국에서 그는 '인민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인민의 학생이 되어야 한다' 고 했던 모택동의 말을 인용하며, 그들에게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존재로 받들어지면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겪는다.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감격스럽고 코끝 찡한 에피소드들은 그 중심이 되는 닥터 노먼 베쑨이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에서 할 말을 잃게 한다.

도저히 한 사람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을 해 내느라 그는 그의 수명을 20년쯤 당겨썼나보다. 건장했던 그가 불과 2년만에 20년은 늙은 듯 체중 100파운드도 채 안 되는 고목과도 같은 모습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양초처럼 자신을 훌훌 태우고, 중국에 큰 감동을 주고, 생명과 희망의 씨앗을 뿌린 그는 커다란 슬픔을 안겨주고, 중국에서 백구은으로서의 인생을 마친다.   
장대한 역사의 물결 속에서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라면 말이다.

성질 나쁜 의사라며, 하고 읽기 시작했던 노먼 베쑨 이야기의 마지막은 경건하고 벅찬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