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주 내려와 처음으로 함덕을 벗어나 서쪽에 다녀왔다. 아름다운 수목원을 걸었고, 예쁜 수국들이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다보니, 낮잠도 놓치고, 강기사가 사 준 연어회와 멍게회로 각각 연어장과 멍게비빔밥을 만들었다. 남는 연어와 남는 멍게는 회로 먹었다. 연어 먹을까 멍게 먹을까 하다가 둘 다 사서 둘 다 한꺼번에 처먹다니, 참 나..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라. 연어는 연어장 만들거였는데, 양이 많았다고. 라고 핑계를 대 보지만.

 

연어는 회로 먹으나 연어장으로 먹으나 맛있을게 틀림없다. 그러나 멍게는?

멍게 회를 즐겨 먹지는 않고, 멍게젓갈은 좋아한다. 멍게젓갈 맛있어. 멍게비빔밥도 맛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집에 있는 풀떼기는 그제 닭똥집 튀김과 함께 다 쓸어 먹었고, 비빔장과 참기름과 김을 잘라 넣었고, 대부분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내 입에도 맛 없었다. 대부분의 음식을 맛있게 먹다 가끔 맛 없는데, 그게 다 내가 한 거. 젠장젠장! 여튼, 먹다가 포기하고, 이를 닦아도 기분이 나빠. 아이스커피나 마셔야지. 하고 있었는데, 잠이 들었고, 깨 보니 열두시 반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다시 잤겠지만, 오늘은 저녁때 맛없는 멍게비빔밥 먹다 남은게 생각 나서 안 자고, 그냥 침대 옆의 책 들고 읽기 시작했다. 밤 새게 되면, 내일부터는 잘 자겠지 뭐. 하는 마음으로다가.

 

그리고, 멍게비빔밥을 살려보기 위해서 파랑 마늘 볶고, 양송이버섯 (1끼 1양송이버섯 하고 있다.나의 요즘 최애 식재료) 한 개 자르고, 양파 썰어 놓은거 넣고, 볶다가 멍게비빔밥 투하, 고추장 추가해서 먹어도 멍게향은 여전히 진하다. 음. 멍게 너 이런 맛이었구나. 고추장 너무 많이 넣어서 짤까봐 계란 후라이도 얹었더니, 그럭저럭 먹을만하다. 맛 괜찮은 거 같아. 이것도 맛 없으면, 튤립햄이랑 미국 소세지도 넣어보려고 했지. 하하

 

아니, 이건 멍게에 대한 페이퍼가 아니라, 1만 시간에 대한 페이퍼였지.

 

침대 옆의 책은 '마녀체력'이다. 선물 받은 이 책 너무 좋았고,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선물하기 전에 한 번 더 읽어보려고 읽던 중에 만시간 이야기 나와서, 아! 하고 벌떡 일어나 멍게볶음밥을 ..

 

정말 좋은 책이고, 나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좋은 영향을 이 사람도 받았으면 좋겠어서 멀리서 선물해 준 마음 너무 알 것 같고, 나도 같은 마음으로 이 책을 선물하려고 한다. 이 책을 처음 선물 받고 읽었던 때가 올해 여름이다. (06-17이라고 페이퍼에 나와 있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또 꽤 다르고, 이 책은 또 다르게, 더 좋게 읽힌다. 좋은 책 선물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해요!

 

다시 메모하면서 읽다가 이 부분을 당장 얘기하고 싶어서 이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나 멍ㄱ..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전문가의 1만시간

 

" 작곡가, 야구 선수, 소설가, 스케이트선수, 피아니스트, 체스선수, 숙달된 범죄자, 그밖에 어떤 분야에서든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이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 1만 시간은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

 

나는 이 책을 2010년 2월에 읽었다 (역시 알라딘에 나옴) 지금으로부터 8년 8개월 전이다.

이걸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루에 세 시간씩 십년이면 전문가가 된다고? 그럼, 나는 일본어를 세시간씩 하고, 또 뭐는 몇시간씩 하고, 막 이렇게. 8년전만해도 시간이 무한한 것 같았고, 무모한건 지금이나 그 때나 같다. 그 때 뭐라도 시작했으면, 나는 만시간은 아니라도 만시간 가깝게 뭔가를 해서 전문가가 되어 있을텐데 말이다.

 

2010년 2월의 나는 몰랐을테지만 그해 가을 나는 꽃을 시작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꽃만 하던 시간들이 몇 년이고 쌓였으니 전문가인가? 라고 하기엔, 음..

 

이건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몰라서 몇 년에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전에 만시간 이론을 다시 접했을 때, 만시간 이론을 인용한 저자는 하루 세시간이건 열시간이건 수동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도움되지 않는다. 공부하고, 연습하고, '어제보다 낫게' 발전하는 그런 시간들이 모여야 한다. 는 글을 봤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난 오늘 (사실 몇 달 전에도 이 책을 읽었지만, 그냥 지나갔던) 1만시간 이론의 '십년동안 하루 세 시간'이 처음으로 무겁게 다가왔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아서.는 아니고, 하루의 시간을 쪼개서 잘 쓰는 것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고, 모든 걸 뒤엎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 시작해서일 것이다.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노력한 시간들이 있었고, 이제 나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쓰자마자 오랫동안 나의 한심한 꼴들을 봐왔던 사람들이 응원을 해주고 있고,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큰 힘이 된다. 말하지 않아도, 부담될까봐 말하기 힘들어도 마음으로 응원 해주는 사람들 마음까지 나 혼자 막 짐작하고, 힘내고 있다.

 

책 속의 비유 문장들을 아, 이런 뜻이구나,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장 최근에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는 말을 아, 이럴때 쓴 말이겠구나. 깨닫게 되었고, 요즘은 '날개를 단 것 같다' 는 말이 이 비슷한 기분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40에 운동을 시작해 10년을 한, 저자의 모토는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였다.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죽는 순간까지 건강하게 움직이고 싶기 때문이고, 언제라도 손짓하며 지나가는 기회를 확 잡아챌 수 있는 몸 상태를 준비해 놓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53살? 저자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사십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준비된 나이고 싶다. 오늘의 서쪽 방문은 어쩌면 나에게 찾아온 기회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해보려고 한다. 내가 여기 내려온 것만으로도 이미 준비는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 일이 그냥 작게 끝나던, 커지던간에 다음 기회를 위해 지금 당장부터라도 꾸준히 준비를 시작해, 어제의 나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가겠다.

 

일 뿐만 아니라, 책읽기도 그렇다. 책은 시간이 많을 때가 아니라, 내가 열심히 살 때 가장 잘 읽힌다. 나는 그랬다.

책이 안 읽히는 건, 그냥 숨쉬는 것만큼 쉬운게 책읽기였는데, 책이 안 읽혔던건 나에게 충분히 내가 뭔가 잘못 됐다.는 신호였던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리고, 이제 다시 무의식적으로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내가 책읽는 것을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내내 마음에 남았었던 것 같다.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했었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은 도피가 아니고, 내가 잘 살고 있는 증거라고.

 

하루 세 시간씩을 무언가에 내 줄 수 있다는 거. 무거운 하루 세 시간. 24시간, 7일의 일상을 가꾸는 중의 가장 농축되고 소중한 시간일 것 같다. 맨날 쉬는 날 없다고 엄살 떨며 징징댔지만, 내게는 그  세시간이 있다. 내가 뭘해도 좋을 세 시간. 그건 나의 소중한 시간자산이고, 이제 나는 그걸 잘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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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9 0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울 촌년티 제대로 내고 있는데,
제주 와서 처음 맞는 귤 철이다. 제주 사람들은 귤 안 산대. 귤밭이 있거나(아는 사람 얼마 없는 내 주위에도 꽤 많다!) 아는 사람이 귤밭을 한다. 그러니 파는 상품까지는 아니라도 파치라고 부르는 팔지 못하는 상품들을 엄청 나눠주거나 아주 저렴하게 판매한다.

계속 하우스귤만 팔다가 며칠전부터 노지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격이 반값이라 막 사봤다. 근데, 좀 더 있어야 맛있대. 근데, 엄마가 파치를 다섯 컨테이너쯤... ! ( 한 컨테이너 20키로) 사왔다. 오늘 다섯박스쯤 포장해서 이모할머니, 할아버지, 숙모, 이모 등 보냄. 얼마전에 마트에서 산거보다 훨씬 맛있었는데, 대흥분하니깐, 좀 더 있으면 더 맛있어진대. 오오!

엄마는 제주 내려온지 삼년인데, 이제 막 내려온 나의 흥분에 처음으로 동참하여 봄에는 고사리도 처음 따 보고, 귤 철에 막 파치귤도 사며( 제주 사람들은 별 관심 없었다는..) 같이 막 업되어 있다. ㅎㅎ

지난 몇 달, 사람 때문에 힘들었는데, 정말 거짓말 같이 사람 때문에 하루의 순간들이 즐겁도, 웃기고 그렇다. 이제 돈만 벌면 됨..(중요!) 그렇다.

지금의 평온과 행복, 늘 이럴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파도처럼,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왔다가 가고, 다시 왔다가 가는 거겠지.

요즘 치매 관련 기사들을 봐서 그런지, 엊그제는 문득 내가 치매 걸리면 나는 정신 있을 때 신변정리하고 죽어야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엄마랑 귤박스 만들다가 너무 자연스레 이 얘기 나왔고, 일상 얘기처럼 했다. 엄마, 아빠는 돈 모아서 요양원 가고. 솔이나 나나 제 앞가림도 버거운데, 집에서 돌보면, 서로 미워하게 된대. 내가 그런거 못하는건 알지? 엄마가 나보고도 요양원 가라길래, 내가 자식도 없고, 내 정신도 아닌데 뭐하러.

사는 동안 잘 살아야지! 생각한다.

귤 철에는 귤 까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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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에서 쓴 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

 

2016년 가을

허수경

 

 

+++

 

힘든거 지나면 정신 차려야지. 한 것이 벌써 올해 내내인 것 같다. 정신 차려야지.라는 말은 좀 이상하지. 시간에 끌려다니지 말아야지. 정도가 맞겠다. 최근에는 관광지의 관광철에 알바 하며 미치게 힘들어서 뒤집었고 (다행히 좋은 결과), 여름이 더워서 수국정원에서 죽어나가는 수국 살리려고 물고생 했고, 추석에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올데이 알바했다가 앓았고, 전산 바꿨고.. 알바 하는 곳에서는 가장 이상하던 둘 짤리고, 그 다음으로 이상하던 사람은 입원해서 수술 앞두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직원들은 가장 좋은 두 사람이라 정말 참고 견디니 이런날도 오는군. 의 마음이다.

 

어제는.. 이렇게 계속 힘든거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쉴 거 다 쉬다가 아무것도 못하겠군. 생각하고, 집에 오자마자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백만년만에 수국 업데이트를 했다. 올해 안에 하기로 마음 먹은 여성학책 열 권 읽기도 지지부진한데, 열흘에 한 권 정도로 계획 잡았지만, 이 페이스면, 두 달에 다섯권씩! (무리무리) 읽어야할 판이라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 마지막 두 챕터를 남겨두고 (뒤로 갈 수록 진도 안 나감) 잘 읽힌다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는 전애인에게 처음으로 이별을 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주를 찾은 오랜 친구와 한라산을 마시며 마음을 정리했다.

한 번에 되지는 않았고, 엊그제야 참았던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고, 이별을 고했다. 너의 힘으로 정신 차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나타나. 당신이 처음부터 말했듯이 나는 나의 인생을 살테다. 우리는 서로만을 바라 보지 말고, 자신을 더 사랑하면서 함께 '같은 곳을 보는 것'으로 좋았을텐데.

 

얼마전 알라딘에서 메일을 받았다. 블로그를 이용하는 사람이 급감해서 TTB2 광고를 종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 그래도 서재 블로그에 책장 있는건 없애지 말지. 광고는 아니라도. 십년 전에도 알라딘 블로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줌이었는데. 아쉽다.

 

내가 요즘 하루를 의탁하는? 140자 미만의 단문들로 이루어진 트위터는 과정보의 공간이라 정신을 혹사시키지만, 내가 어떤 탐라를 만드냐에 따라 알려줘서 고마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얼마 전 허수경 시인님이 돌아가신 것도, 그 전에 암투병을 하며 편지를 띄운 것도 트위터에서 제일 먼저 봤다. 시인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담고 있던 시인의 글들을 올려줬고, 나도 마음에 담았다. 시인이 새로 빛을 보여주고 싶었다던 산문집이 알라딘 서재에서 1위겠군. 하고 들어왔는데, 음.. 

 

허수경의 책들을 읽어봐야지.

 

그 전에 사람들이 꺼내 보여 준 시인의 글들을 옮겨둔다.

 

+++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을 기어이

보지 못했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정든 병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

어둑 대책없습니다

 

+++

 

잘 가, 라고 했는데 꼭 잘 자, 라고 한 것 같다

 

- 포도메기-

 

+++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있는 듯 없다.

 

- 불취불귀-

 

+++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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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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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표지의 우아한 제목,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이혼을 했다'

 

라는 첫문장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40대 이혼남이 된 출판사에 다니는 남자가 이혼을 하고, 혼자가 되고, 스토리가 있는 오래된 집을 구하고, 그 집을 고치며, 고양이를 만나고, 전 애인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남자 이야기를 많이 읽어왔던 내 세대의 독자들은 (아니, 어떤 세대인들) 남자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력이 탁월한데, 그 중에서도 일본중년남에 대한 감정이입을 잘 한다. 왜? 하루키가 있어서. 현실에서 보는, 그리고, 현실을 극대화한 남자 작가들의, 아니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남녀작가들의 한국남자 주인공들에 비해 하루키는 얼마나 산뜻했던가.

 

고양이를 좋아하고, 재즈를 좋아하고, 마라톤을 하며, 좋은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위스키를 마시고, 양배추 샐러드 등등을 스스로 만들어 먹는 남자. 최근에야, 여고생 젖가슴 이야기 좀 그만하란 말이야. 질색하게 되었지만, 여튼, 지난 과거의 책읽기에 일본중년남, 그러니깐 20대부터 나와 함께 나이 들어와 이제 중년남이 된 그들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다.

 

청소 하는 이야기, 밥을 해 먹는 이야기들이 너무다 싶게 디테일하게 나와도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여자고 남자고, 청소하고, 음식을 만드는 것. 자신을 위해서. 그런 이야기들에 늘 홀린다.

 

"오늘은 다진 고기를 재료로 쓴 음식이 먹고 싶다. 만두를 잔뜩 빚어 저녁으로 먹을 분량만 내놓고 냉동하자. 두부와 토마토, 물냉이를 넣은 중국식 계란탕, 갓 지은 밥, 오늘 저녁은 그렇게만. 내일 아침은 버터를 듬뿍 바른 하얀 식빵에 계란 프라이, 온야채 샐러드. 밀크티가 제일 맛있는 계절이 돼서 기쁘다. 점심은 갓을 넣은 볶음밥에 꿀에 절인 매실 장아찌, 계란탕 나머지. 저녁은 가나가 가르쳐준 주점까지 걸어가서 파와 뱅어 샐러드, 새끼 양고기 구이, 돌김 리소토를 먹자."

 

이런 걸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좋다. 마음과 몸과 통장의 여유가 있어야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정도의 여유가 일본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에게는 늘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책을 읽을까 말까 하고 있을 때, 어느 분이 이 책을 읽고 행복해졌다고 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한동안은 집 꾸미고, 음식 만들고 뭐 그런 잔잔한 이야기들만 나오고, 뭔가 이 허영심에 가득찬 된장남... 이야기에 질릴까 말까 했지만, 뒤로갈수록 맘이 따셔지고, 울고, 웃고, 행복하게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일본의 요즘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부모세대 부양 이야기. 점점 늙어가고, 나를 돌보지 못하게 될 때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가족의 해체에서 시작된다. '이혼을 했다.' 라며.

 

하나뿐인 아들은 미국에 가서 일찌감치 독립했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부는 헤어져 남자는 혼자의 삶을 준비하고, 시작한다.

우연히 만난 전애인, 전애인은 남자가 구한 오래된 집 근처에 아버지와 살고 있다. 굉장히 깔끔하게 룸메이트처럼 살고 있던 아버지와 딸은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변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 하는 여자를 돕는다. 남자의 도움이 필요한 여자. 이런 그림은 아니다. 여자는 독립적이고, 신파는 없다. 그렇게 할법한 조치들을 취하고, 현실은 더 그악스러울텐데. 싶을 정도로 담백하다.

 

남자가 집에 드나드는 고양이 후미와 관계를 맺는 이야기. 가나 (전애인)와 그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이야기, 그리고, 그제야 안 아들의 미국에서의 새로운 연인 이야기까지. 팬시한, 그러나 중년의 팬시함이라서 뭔가 상큼함과는 거리가 먼 오래묵은 이야기 같았는데, 맘에 젖어드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의 나라서 더 와닿았던 부분들이 많았다. 여러 부분에서. 서너가지쯤? 그래서 이 책이 맘에 많이 남을 것 같다.

남자와 여자와 아버지와 그리고, 오래된 집의 주인인 소노다 메아리씨까지 모두모두 응원한다. 잘 되었음 좋겠다.

 

그들은 우아하지 않은 삶도 우아하게 견뎌낼 것 같다.

 

굳세고, 강하고, 안전한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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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니나 2018-10-03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 저도 읽어볼래요!
 
이제 고양이와 살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고양이를 알게 된 후의 나

 

여기서 고양이는 여느 고양이가 아니라 특별하고 특별한 나의 첫 고양이 '말로'다.

열한살 애기 고양이 말로.

 

마라톤 하는 작가로 하루키를 떠올리지만, 와이 낫 가쿠다 미쓰요. 물론.. 하루키처럼 본격적인 사람과 같이 이야기하기에는 작가 본인도, 팬인 나도 좀 염치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마라톤을 합니다. 싫어하지만 합니다. 싫어한다는 건 뭘까요? 좋아한다는 건 뭘까요? <이제 운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를 읽어보시면 압니다.

 

<종이달>을 읽고, <아주 오래된 서점> 도 읽었지만, <이제 운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에서 이 작가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고, 다음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그래서 읽기 시작한 책이 <이제 고양이와 살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다.

 

고양이 집사가 읽는 고양이 초보 집사 이야기에 흠 잡을 곳이 없다면 거짓말이고, 일단 토토가 사이바라 리에코씨 댁에서 일곱번째로 줄 서서 가정분양 받은 고양이라는 것. 왜 중성화 안 시키지요? 이런 저런 맘에 안 드는 점들을 감안해도, 이 책은 역시 작가, 역시 내가 좋아하는 작가. 라고 할만한 마음 깊이 공감 가는 이야기들이 많아 웃고 울며 책을 읽었다.

 

토토가 집에 온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을 대이고, 토토는 좀처럼 울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는데, 토토가 없는 집은 음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 음산하고 고요한 집에서 나와 남편은 우리 집에 온 아이가 토토여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운동신경이 둔하고 심장이 나쁘고 스포이트를 감추고 그렇게 작은 소리로 화를 내는 그 고양이여서 정말로 다행이다. 하고 완전 바보처럼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

 

말로여서 다행이다. 나에게 와 준 아이가 말로여서 다행이고, 리처여서 다행이고, 코비여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이 마음 너무 뭔지 알지. 모든 고양이들은 다 특별하지만, 내 고양이가 가장 특별하다. 볼수록 예쁜 구석밖에 찾아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못생긴 것도 예쁘고, 예쁜 것도 예쁘고.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노는 것도, 가만히 멍때리는 것도, 우다다 하는 것도, 똥 싸는 것도 (젤 예쁨. 잘 먹고 잘 싸는 고양이) 다 예쁘고, 이 예쁜 고양이가 나에게 와서 다행이지 싶은거지.

 

'어느새 꾹꾹이, 발라당 같은 귀여운 말을 쓰고 있다'

 

어떤 말을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꾹꾹이, 발라당 같은 말이 일본어에도 있는거겠지. 그리고, 사료 씨븐 모습을 카리카리라고 해서 밥 줄 때 카리카리라고 하나보다. 귀엽. 아는 사람은 '맘마미' 라고 해서, 나도 언젠가부터 맘마미 먹을까. 그러지. 혹은 고양만국공통어 '츄르 줄까' 추르추르 .. 하지만, 나는 추르를 거의 안 주는 집사.

 

내 고양이들은 아무도 꾹꾹이 안 하는데, (말로는 에어 꾹꾹이만 한다) 정원냥인 노랑이가 본격 꾹꾹이 해줘서 첨으로 꾹꾹이 받아봤는데 .. 아파.. 좋은데, 아파.. 하지만 참는다. 좋으니깐. 하지만 아프다.

 

" 침대에 뒹굴고 있으면 토토가 와서 내 옆에 앉아 꾹꾹이를 한다. 가장 자주 하는 곳은 배다. '내 배가 그렇게 부드러운가.... 다른  부분보다...' 그런 슬픈 마음이 들지만, 용서하겠다. (..) 꾹꾹이는 내게만 하고 남편에게는 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명백히 지방 문제여서 슬픈 마음이 들지만, 그러나 "내게만 한다"라고 생각하면 좀 의기양양한 기분도 든다."

 

정말 너무 웃겼다. 정원냥 노랑이가 꾹꾹이를 할 때는 다리에 하는데, 그 작은 노란 찹쌀떡으로 꾹꾹이 하면, 뼈만 있는 인간이 아닌 이상 지방을 확인하게 된다... 괜찮아. 아파도, 지방을 확인하게 되도. 고양이가 꾹꾹이를 해준다면.

 

"고양이가 사람과 똑같이 숨소리를 내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야 물론 생물이니 호흡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깨어 있을 때의 고양이 호흡은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하다. 그래서 잘 때도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줄 알았다. 쿠, 피, 쿠, 피, 등 굉장한 숨소리를 내며 잔다. 사람보다 크지 않나 싶은 그 호습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잠든 고양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느낀 어떤 것이 서서히 온몸에 차 나갔다.

 

그 '어떤 것'은 무언가 인제 이걸로 완전 오케이, 같은 기분이었다. 인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 이것만으로 좋아, 하는 만족감. 당연하지만, 고양이 자는 숨소리를 듣고 자는 얼굴을 보고 있어도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다. 내일이 되면 또 바라는 것이 잔뜩 생긴다. 그래도 지금, 아,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몽땅 여기 있습니다. 라는 생각이 든다. 이 느낌, 기존의 말로 한다면 '너무 행복해' 에 가장 가까울 것 같다."  

 

고양이가 편하게 자고 있으면, 내가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행복해' 와 가까운가?

 

이제 고양이와 살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고,  이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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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18-10-03 07:34   좋아요 0 | URL
이것저것 겨울 작업들을 구상중이에요. 올해부터는 힘들고, 내년에는 잘 준비해보려고요. 이케아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 요즘 온라인도 가능!

무레 요코 책 좋아요! 고양이 이야기 담번 구매리스트에 올립니다!

수국의 첫 사계절을 보고 있어요. 책 준비하고 있는데, 계절 이야기가 빠질 수 없지요.

제주는 춥기보다 스산해요. 바람에 얻어 맞는 느낌. 겨울대비 단단히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