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6, 529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
노동건강연대 기획, 이현 정리 / 온다프레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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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에 진실이 있습니다. 말해지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하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일 때 비로소 진실은 '사건' 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라도 그것을 해결하려면 먼저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우리는 매일 단신에서 일터에서 죽는 이들의 뉴스를 스쳐지나간다. 한 해 동안의 매일의 단신을 모아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드러나는 것 아래에 더 많은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일을 하는 나의 일이고, 일을 하는 가족이 있는 나의 일이다. 이 책에 누워 있는 죽음들은 평소에 상상하기도 힘든 죽음들이다. 


책을 읽는 내내 반복되는 단어들은, 문장들은 


" 중장비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 "화물용 리프트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 지상 13 m 아래로 떨어져",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석탄 운송대에 몸이 끼이는", "플라스틱을 부수는 파쇄기에 몸이 끼이는", "프레스에 눌리는 압착 사고를 당해", "오피스텔 공사장에서 노동자가 추락해", "공사 현장에서 40대 남성 인부가 추락해", "잔도 공사를 하던 중 추락해", "측면 골프망 고정 작업 중 떨어져(높이 10 m)" , " 후진하는 로우더에 깔려", "상판이 불시 하강하면서 상판과 하판 사이에 끼여", "유압이 누설(추정)되어 하강하는 포크에 깔려", "5톤 무게의 콘크리트 파일이 전도돼", "콘크리트 옹벽이 무너져", "공기저장 탱크 내 압력 소실로 공기 공급이 중단되어",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 "압축기계에 빨려들어가" ... 


골라서 쓴 것이 아니다. 앞에서부터 적은 것이고, 이렇게 끝까지 날짜와 기사들이 이어져 있다. 


현장에서의 위험이, 죽음으로 드러나는 반복되는 위험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안전에 무감하고, 타인, 노동자들의 목숨을 인간의 목숨이 아닌, 망가진 부품 정도로 취급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는 일이다. 반복되는 죽음의 뉴스를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럴수가' 탄식하지만, 나부터도 돌아서서 잊고, 그 이상을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나에게는 먼 일 같아서 실감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일을 함으로써 사회가 돌아가고, 나도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린다. 나 역시 일하는 누군가로 묶이는 사람이다.   


책 뒤에 실린 해설에서 양경언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의 일기가 이렇게 씌어지고 있었다 " 고 말한다. 사건은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새벽이나 아침 시간에, 24시간 돌아가는 현장에서 노동자는 밤샘 노동을 감당하다가, 주말에도, 휴일에도, 명절에도 일어난다. 사고가 일어나는 시간은 그들이 한참 일하는 시간일 것이다. 


박희정의 또 다른 해설에서는 김현경이 '사람, 장소, 환대' 의 내용을 빌려서 말한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사람으로 인정받을 때 사람으로 살 수 있다. " 그렇기에 이야기를 가질 때 사람이 되고, 사람의 세계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고. 


나와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를 가진 그들의 세계는 지금 내가 사는 세계와 같은 세계이다. 


"죽음을 말하는데 삶이 없다. 누군가의 죽음이 이렇게 다루어진다는 건, 우리 사회가 그 누군가의 삶을 이렇게 다루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게 아닌가. 어떤 이는 매일 스쳐가는 단신 속의 그 텅 빈 곳에 눈길을 던진다. 이 글이 부고가 되지 않음에서 이 세계의 부정의를 인식한다." 


불행한 사고는 일어날 수 있지만, 준비 없이 일어나는 불행한 사고는 사고가 아니라 정해진 인재다. 하청노동자들은 이 사고들이 조장되거나 방조된 채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이 문제로 보여지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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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02-28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다 읽으셨네요. 저는 조금씩 읽고 있어요.. 이 책에도 실리지 못한 더 많은 죽음을 애도합니다..

하이드 2022-03-01 06:04   좋아요 1 | URL
정말 끔찍한 이야기들을 이어 읽는 것이 쉽지 않은데 뉴스 단신들이라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 건조하고 틀에 맞춘듯한 문체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죽음들이요.

Clou:Do 2022-03-01 0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의 삶을 보지 못하고 비용으로 보는 시각들이 너무도 소름 끼칩니다. 부디 사람의 마음을 잃지 말기를…

하이드 2022-03-02 16:08   좋아요 0 | URL
그들은 사람의 마음은 이미 잃은 것 같고, 시스템이 얼른 갖춰져서 사회적 안전망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2146, 529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
노동건강연대 기획, 이현 정리 / 온다프레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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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2021년 산재로 죽은 노동자의 숫자. 매일의 산재 기사로 책 한 권이 만들어졌다. 추락하고 기계에 끼어 죽고, 으깨져 죽고, 갈려 죽고, 치어 죽고, 유독가스 마시고 죽고, 익사하고, 불타 죽고. 평소 상상도 하기 힘든 끔찍한 죽음들이 일터에서. 주말과 휴일에도 한밤중에도 일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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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무얼 할까? 비룡소의 그림동화 296
티나 오지에비츠 지음, 알렉산드라 자욘츠 그림, 이지원 옮김 / 비룡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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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 사랑스러운 책이다. 



호기심은 뭐 하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즐거움은 트램플린에서 뛰고 있어. 


31가지 감정이 무얼 하는지 글과 말로 보여주는데, 각각의 감정을 읽고, 보며 딱딱한 마음이 그 감정대로 꿈틀거리는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이 읽어도 너무 신나고 좋을 것 같고, 어른이 읽으면 다양한 감정 운동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라도 선물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부정적 감정들도 있고, 긍정적 감정들도 있다. 부정적이라거나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도 있다. 그런 감정들을 찬찬히 헤아려볼 수 있는 책이다. 


아이들은, 그리고, 어른들도, 한 가지 말에 모든 감정을 담아 뭉뚱그려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짜증나' 같은 것, '죽겠네' 라던가. '미치겠네' , '답답하네' '이상해' 등등 

그 말 안에 있는 다양한 감정을 파악하는 것이 안팎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에도, 내 말을 듣는 외부에도. 

그런 걸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크게 도움될 것 같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나의 다양한 감정들은 다 '짜증나' 로 수렴되어 '짜증나'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력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여행을 떠나. 

너무 좋아. 상상력, 나랑 친구해. 



희망은 여행길에 도시락을 준비해. 

도시락 만들자! 


 

만족은 찻잔을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아 있지. 

고양아, 물 끓여라. 


여기 나온 그림들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그림은 이거다. 




기쁨은 새로 발견한 책을 들고 친구에게 달려가.


알라딘에 많잖아.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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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1-26 13: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거야말로 알라디너를 위한 책이 아닌가요?!! 😍

하이드 2022-01-26 16:0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새로 산/빌린 책을 들고 알라딘으로 달려와 페이퍼를 올리는 알라디너들, 기쁨!
 
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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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관을 삽입하는 겁니까?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머니를 괴롭히는 거죠?" 

그는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는 물을 밀치면서 들어가 버렸다. (36) 


시몬 보부아르의 사르트르에 대한 애도의 책 <작별의 의식>에 이어 엄마와의 이별을 쓴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게 되었다. 사르트르도 엄마도 (엄마가 먼저지만)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죽음을 숨기고, 그에 죄책감을 가지는 부분이 나온다. 이 책을 읽고나니, 이 때 한 번 겪었으면서 왜 또?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에 대한 변명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불행해질 것이고, 죽음의 공포를 겪게 될 것이라는 거였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땠을지는 영원히 알 수 없지만, 정작 본인이 죽음을 알리기를 무서워했음을 읽을 수 있다. 


보부아르의 엄마는 딸들을 통제하고자 했고, 딸들과 불화했다. 죽음을 한 달 앞두고, 희망 없는 수술로 얻게 된 한 달의 유예기간 동안 딸들의 간병을 받게 된다. 보부아르는 엄마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회고하며,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고 말한다. 그 때 수술하지 않고 바로 돌아가셨다면 심리적 타격이 더 컸을 것이고, 죽음 앞에서 그의 부재가 세계만큼 거대한 존재가 되고, 극단적인 경우 삶 전부에 해당하는 존재로까지 여겨지게 되는 대신 그 역시 다른 이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엄마를 피했던 과거에 엄마 곁에서 헌신했던 그 한 달의 시간들 덕분에 엄마가 느낀 마음의 평화, 엄마와의 불화로 인해 엄마를 등한시하고 피했던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른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을 생각해볼 때 

" 사실 엄마는 비교적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 라고 결론 짓는다. 


" 전문가들이 내린 진단과 예측, 그리고 결정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악순환에 갇힌 셈이었다. 환자는 의사들의 소유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니 그들의 손아귀에서 환자를 빼내 와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수요일에는 수술과 안락사 중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굳어 가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게 되면 엄마가 장폐색증을 견디면서 지옥을 맛봐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게 뻔했다. 의사들이 안락사를 거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용기를 내서 N 박사에게  "그대로 돌아가시도록 어머니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머니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N 박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자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나를 냉대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어머니에게서 몇 년 더 사실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셈입니다"라고. 내가 엄마를 죽게 내버려 두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핑계를 대 보아도 내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 가장 이입하면서 봤던 것은 안락사 vs. 연명, 죽음 vs. 고통의 이야기였다. 보부아르도 거기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엄마가 죽고 싶다고, 얘기햇으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보부아르의 선택은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삶을 너무나 사랑한 사람이었고, 보부아르를 비롯한 가족과 친구들, 병원의 모두는 환자의 암을 복막염으로 속이고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만한다. 삶을 사랑하는 죽어가는 사람은 그 희망에 매달린다. 


오늘 하루를 살지 못했구나.

며칠을 버리게 된 셈이잖니.

엄마에게 매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죽어 가고 있지 않은가. 엄마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를 대신해서 나는 체념하지 않고 있었다. (119)


몸이 썩어가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의학 기술에 연명하는 삶. 


동생이 문을 열다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향해 돌아서서는 흐느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엄마의 배를 봤어!" 

나는 그 야에게 줄 진정제를 가지러 갔다. P박사가 병실에 들어왔을 때 동생이 말했다. 

"엄마의 배를 봤어요! 끔찍했어요!" 

그는 조금 당황해하면서 "천만에요, 정상적인 겁니다"라고 답했다. 

푸페트는 내게 "엄마가 산 채로 썩어 가고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애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엄마의 머리맡에 가 앉았다. 하얀색 실내복 위에 얹힌 검은 색깔의 가느다란 끈이 숨을 쉴 대마다 아주 조금씩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할 뻔했다. 6시경에 엄마는 눈을 떴다. (118)


내가 죽어가는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할까. 내가 죽어가는 사람의 보호자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닥쳐야, 경험해야 알게 되는 일이 있고, 죽음이 그럴 것이다. 각각의 삶과 죽음은 또 달라서 영원히 면역되고, 알게 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죽음의 앞에서 화해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죽음을 앞에 두고, 연민의 여지를 넓혔다고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엄마의 이름을 세상에 책으로 불러낸다. 


프랑수아즈 보부아르는 책읽기를 좋아했고, 한가롭게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영어 실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다양한 강연을 들으러 다니고, 쉰 넷의 나이에 출퇴근을 위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시험과 실습을 거쳐 자격증을 땄고, 사서로 일했다. 책을 다루고 덮개로 씌우고 분류하고 색인 카드를 적고 독자들에게 조언해주는 일들을 좋아했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살았지만, 그것을 참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몸과 마음을 억압당했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 받았다. 내면에는 불같은 정열을 지녔으나 뒤틀리고 훼손되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는 놀랄 만큼 용기 있는 모습으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남편의 죽음에 무척 슬퍼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 속에 매몰된 채 있으려 하지 않았다. 다시 자유로워진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재정비했다. 아빠는 땡전 한 푼 남기지 않은 채 돌아가셨고 그때 엄마의 나이는 쉰넷이었다. 엄마는 몇 차례의 시험과 실습을 치르고 나서 자격증을 하나 땄고, 그 덕분에 적십자에서 보조 사서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출퇴근용으로 자전거 타는 법을 다시 배우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집에서 삯바느질을 해 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가로운 생활은 엄마에게 맞지 않았다. 기어이 자신의 방식대로 살길 원한 엄마는 수많은 활동을 찾아냈다. 파리 근교에 있는 결핵 예방 의료원의 도서관에서 무보수로 일하기도 했고, 그 다음에는 동네에 있는 한 가톨릭 단체의 도서관에서도 일했다. 엄마는 책을 다루고, 덮개로 씌우고 분류하고, 색인 카드를 적고, 독자들에게 조언을 해 주는 일을 좋아했다.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영어 실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수예실에서 수를 놓기도 하고 자선 판매 행사에도 참여했으며, 여러 가지 강연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다.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아버지의 우울증 때문에 멀어졌던 옛 친구 및 친척들 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도 했다. 가장 간절히 바라던 일 중 하나를 이루기도 했는데 바로 여행하기였다. 엄마는 다리를 뻣뻣하게 만드는 관절 경직증에 결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24)


" 엄마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게 된 것은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희로애락 속에서 인생의 가장 거친 풍파를 겪어야 했던 시절의 엄마에게는 자기 삶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견도, 생각도, 언어도 없는 상태였다. 기겁하면서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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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나의 3천 엔
하라다 히카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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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생은 3천 엔을 어떻게 쓰는지에 달려 있단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3천 엔 정도의 소액으로 사는 것, 고르는 것, 하는 일이 쌓여서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간다는 뜻이지." 


첫 페이지부터 재미있을 것 같았고, 3천 엔, 그러니깐, 내가 3만 원을 어떻게 쓰는지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이 소설, 다양한 세대와 형편의 여자들의 돈 이야기로 초반부터, 이것은 금융계몽소설인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소설에 주인공이 화장실 한 번 안 가듯, 이런 현실적인 돈 얘기는 늘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키우는 식물에 물 주듯, 돈 이야기 심상스레 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야기 또한 재미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미호는 티포트가 진열된 잡화점 선반 앞에서 예전에 할머니와 3천 엔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혼자 살기 시작하며 티포트가 없어서 티백 홍차를 마시거나 편의점에 들러 차를 사는 미호가 사려던 유리로 된 심플한 티포트는 딱 3천엔이었다. 다섯 살 위인 주부인 언니 마호는 법랑으로 된 커피용 주전자를 쓴다. 엄마는 친구들에게 선물 받은 북유럽 브랜드의 티포트를 쓰고, 할머니는 청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로열코펜하겐의 도자기 포트와 여행지에서 사 온 예술가의 수제 다관을 쓴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가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당연하지. 


회사에 만족하며, 비싼 월세를 내고 좋은 동네에서 살던 미호는 자신의 인생에 만족했지만, 사수였던 유능하고 상냥한 마치에 선배가 정리해고 되는 것을 보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언니 마호는 동갑과 결혼하여 아이 하나 있다. 소방관 남편의 박봉으로 아이를 키우며 짠테크하며 살아간다. 미호에게 고정비를 줄이고, 이사로 집세를 아끼는 등의 팁을 준다. 앱테크 하는 모습도 나온다. 


미호는 어느 날 공원을 산책하다 유기견 입양 행사 하는 것을 보고, 강아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동물과 같이 살 수 있는 집은 미호의 월급으로 힘들고, 미래가 불안정한데, 개를 데리고 길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여기 적힌 조건들은 유기견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사육할 수 있는 '집', 건강한 '신체', 거기에 물론 '돈'까지. 이 전부는 유기견을 기르든 말든 필요한 것들이다." 


그렇게, 미호는 각성! 반려동물을 기를 수 있는 아파트나 단독주택을 구입하는 목표를 세운다. 


식물을 키울 때도 환기 잘 되고, 햇빛 잘 드는 곳에서 물 잘 주면서 키우면 되는데, 환기 잘 되고, 햇빛 잘 드는 곳은 식물 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언니는 미호에게 하루에 100엔씩만 모아보라고 하고, 미호는 바보 취급 당한 기분이었지만, 일단 따르기로 하고, '집에 가는 길에 저금통 사야겠다' 하고, 언니한테 '멍청아, 그걸로 또 돈을 쓰면 어떡해' 잔소리를 듣는다. 


아.. 너무나 낯익은 풍경, 다음 날 미호는 스타벅스에서 프라푸치노를 마시면서 100엔은 모을 수 있지! 생각하고, 보통은 커피 마시고 편의점에서 음료수 사가지만, 휴대용 보온컵에 차를 담아왔으니 150엔 세이브. 하고, 150엔을 아낀다. 그리고 나서 새삼 프라푸치노, 단 한 번도 끝까지 마시지 못했던 프라푸치노의 가격을 확인한다. 420엔.. 하루에 100엔씩 모을거라면, 이 돈도 크다. 끊지는 못해도 두 번에 한 번은 아이스커피 280엔 마셔봐야지 생각한다. 


돈 멘토인 구로후네 스코 선생도 한 번씩 나온다. 

'8x12는 마법의 숫자'라는 책을 쓰고 절약 강연을 한다. 미호는 3천 엔을 내고 강연을 듣는데, 매 달 8만 엔씩, 보너스 때는 2만 엔씩 더 저축하면 일 년에 100만 엔! 와아아아 일 년에 100만 엔씩 모을 수 있으면 삼십대는 예순 살 정년까지 3천만 엔, 이십대는 4천만 엔을 모으게 됩니다. 그걸 3% 복리로 운영하면 세후 약 4900만 엔과 7760만 엔, 노후 걱정 노노. 


"여러분은 지금 제 주문, 아니 마법에 걸렸습니다. 한번 이 숫자를 들으면 마음속으로 어떻게든 8만 엔을 기억하거든요. 자기도 모르게 한 달에 8만 엔을 저축하려고 마음먹게 되죠. 지금은 무리더라도 가능한 그 액수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게 된답니다!" 


지난 몇 년, 트위터에서 내내 봤던 이야기들이 캐릭터들의 입을 빌려 나오니 재미있었다. 

작가의 캐릭터 설정이겠지만, 뒤로갈수록 의식 못하고 읽었다. 미호와 마호의 엄마인 도모코는 친구인 지사토가 이혼하게 되며 이혼한 후의 연금과 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황혼이혼의 경제학) 일흔 세살인 할머니 고토코는 저축액 천 만엔을 간병비로 생각하지만, 연금으로만은 생활이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결국 일을 하게 된다. 아들이 싫어한다거나, 가족들에게 연금이 모자란다고 얘기하기 꺼려하는 부분, 일을 해서 돈을 벌게 되서 즐거워하는 것, 가족들은 할머니의 간병비를 걱정하는 것 등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하나 아쉬운 것은 70대, 50대, 20대 세대의 이야기, 다 기혼이거나 결혼을 계획하고, 비혼으로 사는 딸은 간병을 준비한다. 그냥 여자 혼자 사는 이야기도 읽고 싶지만, 금융 계몽 소설이라도 가족 소설이어서 그후로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까지는 아니고, 불행하기도 하지만, 행복하기도 하다. 불안하기도 하지만, 살아나갈 수 있다. 상황들이 맞아떨어져서 잘 풀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까지 이야기해주는 것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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