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쏘다

버마의 남부에 위치한 물메인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내 생애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이런 일이 일어날만큼 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나는 당시에 이 도시 한 파출소의 경찰관이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별 목적도 없이 하찮은 반유럽 감정이 유난히 강했다. 어느 누구 하나 폭동을 일으킬 만한 배짱도 없으면서, 유럽인 부인이 혼자 시장을 지나가면 누군가가 입에 품었던 구장즙을 그녀 옷에 뱉어버리곤 했다. 경찰관인 나 역시 그들의 목표물이 되었고, 그들은 자기에게 별 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범위 안에서는 언제나 나를 못살게 굴었다. 발빠른 버마인이 축구장에서 내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 심판(물론 버마인이다) 은 보고도 못 본 체했고, 군중은 엄청나게 웃어댔다. 한두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가는 곳마다 나를 만나는 젊은이들은 누런 얼굴에 조소를 머금다가 안전한 거리까지 떨어지면 뒤에서 내 신경을 거스르는 온갖 모욕을 퍼붓곤 했다. 젊은 승려들이 가장 심했다. 거리에는 수천 명의 승려들이 있었는데, 별로 할 일이 없는지 길모퉁이에 서서 유럽 사람들을 비웃곤 했다.

이런 모습이 모두 나를 당혹케 만들었고 또 비위를 거슬렀다. 그 당시 나는 이미, 제국주의는 죄악이므로 되도록 빨리 이 직업을 집어치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론적으로는-물론 비밀이었지만-나는 전적으로 버마 사람들 편이었고, 억압자인 영국 사람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제국주의 경찰관을 하게 되면 제국주의의 추악한 수법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다. 악취가 풍기는 감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죄수들, 장기수들의 창백하고 겁에 질린 얼굴, 대나무 몽둥이로 흠씬 얻어맞은 남자들의 시퍼렇게 멍든 엉덩이..... 이런 것들이 모두 견딜 수 없는 죄의식으로 나를 괴롭혀왔다. 그러나 나는 미래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었다. 당시에 나는 젊었고, 또 교육도 잘못 받았다. 나는 동양에 와 있는 모든 영국인들에게 부과된 절대적 침묵 속에서 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했다. 나는 대영제국이 망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으며,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하는 신생 제국주의 국가들보다는 그래도 영국이 더 낫다는 생각은 더욱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봉사하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와 경찰관으로서의 내 일을 훼방놓으려고 하는 사악한 작은 짐승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내가 그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영국의 식민 통치를 파괴시킬 수 없는 전제로서, 억압받는 피식민지인들의 의지를 영원히 꺾어버리는 완강한 어떤 것으로 간주했고, 또 한 편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승려들의 창자 속으로 총검을 찔러넣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감정은 흔히 생겨나는 제국주의의 부산물이다. 하루 근무를 마친 인도의 영국 공무원들 중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어느 날 순찰을 돌던 중 정신이 번쩍 든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작은 사건이었지만, 제국주의의 실상-전제정부가 행하는 일들의 진짜 동기-을 전보다 더 잘 들여다볼 기회가 되엇다. 어느 이른 아침 이 도시의 한쪽 끝에 있는 경찰서의 부서장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코끼리 한 마리가 시장을 부수고 있으니 거기에 가서 무슨 조치를 좀 강구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조치를 강구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어쨋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작정하며 조랑말을 타고 출발했다. 나는 구식 0.44 구경 윈체스터총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이 총은 코끼리를 죽이기에는 너무 작았지만 소리만 내어 위협하기에는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버마 사람들이 현장으로 가고 있는 나를 불러세우고는 코끼리의 행동에 대해 말해주었다. 물론 야생 코끼리가 아니고 '발정기'에 접어든, 사육되는 코끼리였다. 발정기가 시작된 코끼리는 항상 쇠사슬로 묶어놓는데, 전날 밤에 사슬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난폭해진 이런 코끼리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코끼리의 사육사뿐인데, 그 역시 코끼리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방향을 헛짚어 걸어서 열두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나가 있었다. 오늘 아침 그 코끼리가 돌연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이었다. 버마 사람들은 무기가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그놈은 이미 대나모루 만들어진 누군가의 오두막집을 박살냈고, 소를 죽이고, 노점 과일가게를 습격하여 과일을 다 먹어치웠다. 또 시의 쓰레기차를 만나서는 운전사가 뛰어내려 도망치는 순간에 차를 뒤엎고 난폭하게 뭉개버렸다는 것이었다.

버마인 부서장과 인도인 경찰관 몇 사람이 코끼리가 나타난 지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매우 가난한 구역으로, 종려나무 잎으로 이엉을 여껑 덮은 대나무 오두막집이 늘어서 있고, 미로 같은 길이 가파른 언덕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뻗어 있었다. 우기가 시작될 무렵이었고 구름이 낀 수텁지근한 아침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코끼리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흔히 그렇듯 확실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이런 경우는 동양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한 것 같은데, 현장에 가보면 내용은 달라진다. 코끼리가 이쪽으로 왔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쪽으로 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코끼리 다위는 아예 보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꾸며낸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려고 할 때, 좀 떨어진 곳에서 고함 소리가 났다. " 애들은 가라, 썩 꺼지거라" 하는 욕지거리가 들렸는데, 손에 회초리를 든 한 노파가 한 떼의 벌거숭이 아이들을 몰아내며 오두막집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몇몇 여자들이 혀를 차고 무어라 말을 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분명히 아이들이 봐서는 안 될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두막집 뒤로 돌아가 보니 남자의 시체 하나가 진흙탕 속에 뻗어 있었따. 검은 드라비다인 쿨리로 거의 벌거벗은 상태였다. 죽은 지 몇 분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코끼리가 갑자기 집 모퉁이에서 나오더니 그를 코로 휘어감고 다리로 등을 누른 후 땅바닥에 짓뭉갰다는 것이었다. 때는 우기라 땅이 물러서 그의 몸은 깊이 1피트, 길이 2야드의 움푹한 자국을 만들어 놓았다. 양팔은 열십자로 벌려졌고, 머리는 한쪽으로 홱 돌아간 채로 땅에 엎드려 있었다. 얼굴은 온통 진흙으로 뒤덮여 있고, 두 눈은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낸채 고통을 참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죽은 자의 얼굴이 평온하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지금까지 본 시체는 대부분 악마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의 다리로 짓뭉개놓았기 때문에 등가죽은 벗겨놓은 토끼 가죽처럼 깨끗이 벗겨져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을 보자마자 가까운 친구 집에 사람을 보내 코기리 사냥총을 가져오게 했다. 코끼리 냄새를 맡고서 겁에 질려 나를 내동댕이칠까 봐 내가 타고 온 조랑말은 이미 보내버렸다.

 심부름을 보낸 사람이 몇 분 후에 총과 다섯 개의 탄알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던 중 몇몇 버마인이 코끼리가 아래쪽 논바닥, 바로 2백-3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준비를 하고 출발하자, 그 일대의 전 주민이 집에서 나와 내 뒤를 따랐다. 그들은 내 총을 보고서는, 내가 코끼리를 쏠 것이라고 서로들 흥분하여 외쳐댔다. 코끼리가 자기네 집을 부술 때는 별 관심도 보이지 않더니, 코끼리를 쏜다고 이렇게 야단법석을 피웠다. 영국의 구경꾼들에게도 그렇지만 이들에겐 이것이 일종의 구경거리였다. 게다가 코끼리 고기도 탐이 났을 것이다. 나는 다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코끼리를 쏠 생각이 없었다. 나는 필요시 내 몸을 보호하려고 총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졸졸 뒤따라오는 것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나는 멍청한 모습으로 생각에 잠긴 채 어깨에 총을 메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 서로 밀치면서 따라왔다. 언덕 아래 오두막집을 벗어난 곳부터 자갈로 다져진 길이 나왔고, 그 너머에는 몇 차례 내린 비로 수렁이 되고 군데군데 억센 잡초가 난 1천 야드 가량의 황폐한 진흙탕 논이 뻗어 있었다. 코끼리는 도로에서 약 8야드 떨어진 곳에서 왼쪽 배를 우리 쪽으로 향한 채 서 있었다. 다가가는 군중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놈은 풀 뭉텅이를 뜯어 무릎에 대고 흙을 비벼 털고는 입 안으로 쑤셔넣고 있었다.

나는 길에서 멈추었다. 코끼리를 목격한 순간, 쏘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분명히 들었다. 부려먹는 코끼리를 죽인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그것은 값비싼 거대한 기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은 거이다. 그래서 피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죽이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멀리서 저렇게 평온하게 풀을 뜯어먹고 있으니, 황소보다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발정기'의 난폭성도 이미 누그러지고 잇으니 사육사가 돌아와서 붙들어 매어놓을 때까지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해도 별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나는 코끼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놈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난폭해질 기미가 없는지를 확인한 후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 뒤를 따라오던 군중을 힐끗 쳐다보았다. 적어도 2천 명은 족히 되어 보였으며, 계속 불어났다. 군중은 길 양쪽을 저 멀리까지 꽉 채우고 있었다. 나는 번쩍거리는 색깔 옷들 위에 떠 있는 누런 얼굴의 바다를 보았다. 이 조그만 구경거리에 들떠 있는 행복한 얼굴들, 그들은 코끼리가 곧 사살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마술을 시작하려는 마술사를 보듯 나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마술과도 같은 총을 들고 있으니 잠시 동안 지켜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 갑자기 나는 결국 코끼리를 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니 그 일을 수행해야만 했다. 나는 2천여 명의 사람들이 나에게 압박을 가하는 기운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총을 든채 공허함, 다시 말해 동양에서의 백인 지배의 무익함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총을 든 백인인 내가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들의 무리 앞에 서 있다.  겉으로는 연극 한 토막의 주인공을 맡고 있지만, 사실은 내 뒤에 있는 누런 얼굴의 무리에 의해 우왕좌왕하는 어리석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 순간 백인이 전제 군주가 되면 파괴되는 것은 백인 자신의 자유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백인은 속이 텅 빈 채 거드름을 피우는 허수아비, 즉 샤히브라는 인숩의 형상이 되어버린다. 원주민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평생을 보내야 하고, 또 위기에 처할 때는 원주민들이 기대하는 바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 백인들이 지배하는 조건이다. 백인들이 가면을 쓰면, 그들의 얼굴은 그 가면에 맞도록 변하는 것이다. 코끼리르 쏴야 한다. 총을 가져오라고 시켰을 때, 나는 이미 이 일을 수행하도록 스스로를 구속했던 것이다. 영국 나리는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 단호하게 보여야 하고, 결심을 하면 확고하게 일을 수행해야 한다. 손에 총을 쥐고 2천여 군중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물러선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군중은 나를 비웃을 것이다. 나를 위시해 동야에 와 있는 모든 백인들의 생활은 원주민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놈이 할머니 같은 자태로 코끼리 특유의 일에 여념이 없는 듯 풀더미를 무릎 위에 놓고 비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코끼리를 쏘는 것은 어쩐지 살인을 저지르는 느낌이었다. 그 나이에 동물을 죽이는 일이 그리 꺼림칙하지는 않았지만, 그때까지 나는 코끼리를 쏜 일도 없었고, 쏘고 싶지도 않았다. ( 하여튼 큰 동물을 죽이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코끼리의 주인 생각도 해야 한다. 살아 있는 코끼리는 적어도 1백 파운드의 값은 나가지만 죽으면 엄니 값으로 기껏해야 5파운드밖에는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신속하게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이미 그곳에 있었던, 경험이 많아 보이는 몇몇 버마인들에게 코끼리의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냥 내버려두면 아무 일도 없을테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덤벼들 것이라고 했다.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명백했다. 코끼리 쪽으로 25야드쯤 다가가서 놈의 반응을 시험해 보았다. 놈이 덤벼들면 총을 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사육사가 돌아올 때까지 내버려두어도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총을 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었다. 나는 사격이 서툴렀고, 게다가 땅은 진창이어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발이 빠졌다. 만일 그놈이 덤벼들고 내가 실수라도 한다면, 롤러 차 밑에 깔린 두꺼비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서도 나는 나 자신의 안전보다는 뒤에서 지켜보는 누런 얼굴들을 생각했다. 군중이 나를 지켜보는 순간에는 내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보통 의미의 공포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백인은 '원주민들' 앞에서 겁을 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백인은 일반적으로 겁을 먹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는 오로지 이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만일 내가 실패하면, 저 2천여 명의 버마인들은 내가 쫓기고 잡히고 짓밟혀서 언덕 위에 죽어 있는 그 인도인처럼 이빨을 드러낸 시체로 변하는 꼴을 볼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몇몇 사람들은 그저 웃고만 있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총알을 장전하고 조준하기 좋게 땅바닥에 엎드렸다.

군중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마침내 연극의 막이 오르기를 지켜보고 있는 관중처럼, 나직하고 행복한 깊은 한숨이 수없이 많은 목구멍에서 새어나왔다. 어쨌든 그들은 그저 좋은 구경거리를 만난 셈이었다. 총은 열십자 조준기가 붙어 있는 훌륭한 독일제였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코끼리를 쏠 때는 이쪽 귓구멍에서부터 저쪽 귓구멍을 잇는 선을 하나 마음속에 그어야 한다. 코끼리가 옆을 보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귓구멍을 겨냥했어야 했는데, 나는 놈의 뇌가 좀더 앞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귓구멍보다 몇 인치 앞쪽을 겨냥했다.

방아쇠를 당겼을 때, 나는 총소리도 듣지 못했고 충격도 없었다. 명중할 때는 아무것도 못 느끼는 법이다. 그러나 군중이 토해내는 악마와 같은 외침을 들었다. 총알이 코끼리에 명중되는 데 걸리는 것보다도 짧은 순간에 이상하고도 무서운 변화가 코끼리의 전신을 엄습했다. 놈은 쓰러지지도 않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몸뚱이의 모든 윤곽선이 변해갔다. 놈은 갑자기 얻어맞은 충경에 한없이 오그라들고 노쇠해 버린 것이다. 마치 총탄의 무서운 충격이 그를 넘어뜨리지 않고 그대로 마비시켜 버린 것 같았다. 한참 후라고 생각되는데-사실은 5초 정도 되었을 것이다-마침내 코끼리는 흐느적거리다가 무릎을 꿇었다. 놈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무시무시한 노쇠가 그를 집어삼킨 것같이 보였다. 수천 살의 나이를 먹은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같은 곳을 쏘았다. 두 방을 맞고도 놈은 아주 쓰러지지 않았고, 머리를 축 떨군 채 비틀거리며 필사의 힘을 다해 서서히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세번째로 총을 쏘았다. 그 한 방이 모든 것을 끝냈다. 그 고통이 전신을 흔들어 사지의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소진된 것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쓰러지면서 한순간 일어날 듯하더니 뒷다리가 몸뚱이에 깔려 무너지자, 상체는 넘어지는 큰 바위처럼 솟아오르고 코는 한 그루 나무같이 하늘로 치솟았다. 코끼리는 처음으로 단 한 번 포효하고는 배를 내 쪽으로 향하고 내가 엎드려 있는 땅을 뒤흔들듯 '쿵'하고 쓰러졌다.

나는 일어섰다. 이미 버마인들은 내 옆을 스쳐 지나 진흙탕으로 뛰기 시작했다. 코끼리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은 분명했지만, 아직 죽지 않았따. 산더미 같은 옆구리가 고통스럽게 기복을 그리면서 율동적으로 길게 헐떡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놈은 입을 딱 벌렸다. 창백해진 연분홍빛 목구멍의 동굴이 들여다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죽기를 기다렸지만, 숨소리는 가늘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심장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남은 두 발을 발사했다. 뻑뻑한 피가 붉은 벨벳처럼 솟아나왔지만, 여전히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총알을 맞고 꿈쩍도 하지 않았고, 거친 숨결만이 끊임엇ㅂ이 흘러나왔다. 놈은 엄청난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고 잇었다. 총탄도 더는 상처를 줄 수 없는, 동떨어진 아득한 또 하나의 세계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무서운 신음 소리를 그치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일 힘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힘도 없이 축 늘어져 누워 있는 거대한 동물을 보면서 완전히 죽여버리지 못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내 소총을 가져오게 하여 그의 심장과 목덜미 밑을 연발로 쏴버렸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고통을 못 참아 헐떡거리는 소리가 벽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처럼 지속되었다.

결국 나는 더 지켜볼 수 없어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뒤에 들은 바이지만, 반 시간이 지나서야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었다. 버마인들은 내가 그곳을 떠나기 전부터 칼과 소쿠리를 가져와 오후까지 살을 완전히 발라내 뼈만 앙상하게 남겨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그 일이 일어난 뒤 코끼리를 쏜 데 대한 끝없는 논의가 이어졌다. 코끼리 주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인도인이라서 별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한 일은 법적으로도 정당하였다. 왜냐하면 미친 코끼리는 주인이 다루지 못하면 미친개와 마찬가지로 죽이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내 행동이 옳았다고 했으며, 젊은 층은 쿨리를 죽였다고 해서 코끼리까지 쏴 죽인 것은 미친 짓이라고 했다. 오ㅐ냐하면 코끼리 한 마리는 쿨리보다 값이 더 많이 나가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쿨리가 죽었따는 소식을 듣고 안심했다. 그의 죽음은 내가 코끼리를 쏜 행위의 충분한 구실이 되었고, 내 행동은 법적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때 내가 단지 바보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코끼리를 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차렸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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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3-18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손까락이야 헉헉.
조지 오웰의 이 책을 읽고 있다. 나는 조지 오웰이 훌륭한 사람인줄 알았다. 에세이들로 이루어져있는 이 책은 상당히 역겹다. 글을 아무리 잘 써도 이런 내용이 끝도 없이 나오면, 이건 상당히 불쾌하고 거슬리고 구토가 난다니깐. 조지 오웰의 이 글을 보고 어느 누가 그를 동정이라도 할까. 박쥐보다 나쁜 놈. 1984와 동물농장을 읽어봐야겠다.
일단은 8시에 이태원까지 가려면 서둘러야겠다~~~~


하이드 2005-03-18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야, 누가 금새 추천을 ^^ 그러니깐, 손가락이 덜아픈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꾸벅

마늘빵 2005-03-18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 소설만 보고 에세이는 안봤는데 그런가요? 역겨울 정도로...

마태우스 2005-03-18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 대단하십니다...이걸 언제 다 치셨어요. 저 이책 선물로 받았어요. 대기 중인데, 석달 안에는 읽을 거예요^^ 근데 선물한 분에 따르면 별로라는데...전 님이 안읽으신 1984와 동물농장을 읽었답니다.

노부후사 2005-03-1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세기 영문학 에세이 10선을 꼽으라면 오웰의 에세이가 그 중 하나로 들어가곤 하지요. 그의 작풍을 본받아서 orwellian 말도 있어요. 그리고 <<코끼리를 쏘다>>에 나오는 글들은, 대부분 오웰이 대가의 반열에 올라서기 전에 쓰여진 것들이라더군요. 박홍규 교수 말에 따르면 이 책 번역이 시원찮다고도 하고요. 전 공부 못해서 버마경찰로 쫓겨간 오웰의 일상이 꽤 살갑게 다가오던데요. ㅋㅋ 아, 하나 덧붙이자면 '금새'가 아니라 '금세'가 맞는 표현이랍니다. '금세'는 '今時에'의 줄임말이거든요.

하이드 2005-03-1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금새' 가 디게 이상하네요. ^^;;; 그러니깐, 그게 참 불분명한 것이 역겨움과 계속 읽게 되는 무언가와 중간을 맴돌게 되더라구요. 진짜 싫었으면 그냥 책 덮었겠지요. 아마도 ,암튼, 리뷰 쓸때 더 잘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John Knowles  의 ' Seperate Peace 샀다우 ^^

David Mitchell의 Cloud Alert 의외로 영국판이 표지가 더 예뻤지만;;

                                  데이빗 미첼의 소설. 기대됨.

Symphony 9 Choral


Symphony 9 Cho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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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오더가 되어버려 불안하긴 하지만,

너세네이얼 웨스트 아직도 못받았다! 한달 반이 지나고 있다. 음.... 메일도 한 번 보냈는데, 3/1에서 4/1일이 예정일이라고 기다리래나? 음.... 보통 이주면 오는게, 왜 두달이나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전화로 난리치기도 끕끕하고, 그냥 4/1까지 기다려본다. -_-a

Tchaikovsky: Symphony No4, Op36; Francesca da Rimini Op32Tchaikovsky: Symphony No4, Op36; Francesca da Rimini Op32


Van Gogh's House : A Pop-Up Experience

Van Gogh's House : A Pop-Up Experience

반고흐 하우스의 팝업북이래~ 흐흐 역시, 재고 없어서 셀프마켓에서 산건데, ( 사실 이건 지난번 주문분이기는 하지만, 슬슬 올때가 되었다.) ㄱ ㄱ ㅑ~

음. 저 위의 CD 2개는 내가 평소에 주문하던것들과는 좀 거리가 있다 ^^;;  내가 음악을 안 좋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별로 기회가 없었다.( = 게을렀다)

선물이라는둥 이따위소리, 분명 하려고 했는데(원래 내가 좀 통이 크다. 으하하), 주소를 아는 관계로, 굳이굳이 뭔가를 주어야 하겠다면, "유명 예술가들의 소품집" 을 골라서 주었으면 좋겠다. 새것보다는 듣던거, 괜히, 구하기 쉽지 않은거 말고( 그래봤자, 받아도 모를테니;;) 구하기 쉬운거. 그러니깐, 소품집이 아니라도, 좋은 음악 권해주시면 감사히 받아야지.

( 아, 그냥 좋은거 알아서, 이 말이 얼마나 끕끕할까. 예를들어 누가 내게 그냥 좋은 책 권해줘요. 그러면, 난 아마 그 사람은 이미 나에게 질문한거 잊을때까지 고민할테야. 그..그러니깐, 단편모음집이요? 어느나라책이요? 장르는요? 추리요? 역사요? 로맨스요? )

음. 그러면 저는 몇가지 산 중에서 이런게 좋더라구요.

Gil Shaman, Goran Sollscher- Schubert For Two

Hans Hotter - Schubert : Winterreise D 911

Glenn Gould - ... And Serenity

그러니깐 어떤분의 페이퍼에서 보기를 서양고전음악을 듣고 싶은데 뭘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페이퍼같은거 퍼 놓고 있었고, 그 분 리스트들의 ( 대략 품절된 -_-a)cd 들도 내 보관함에 고이 들어 있었대나 뭐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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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5-03-18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하하하-_-;;;;;;;;;;;;;;;;;;;;;;;;;;;;;;;;;;;;;;;;;;;;;;;;;;;;;;;;;;;;;;;;;;;

하이드 2005-03-1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호호호호 ^^;;;;;;;;;;;;;;;;;;;;;;;;;;;;;;;;;;;;;;;;;;;;;;;;;;;;;;;;;;;;;;;;;

mannerist 2005-03-18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싸, 매너가 땀 두 방울 더 흘렸다. v-_-z

panda78 2005-03-19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하고는 다른 책인 거 같죠? ^^

받으시면 사진 올려 주셔요----


하이드 2005-03-19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 판다님 넘 예뻐요. 같은거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워낙 반 고흐 팝업북이 막 흔한건 아닌거 같은데요? 기대기대

비츠로 2005-04-0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노란 색 Deutshe Grammophon! 만약 제가 추리소설을 모으지 않았다면 아마 저 CD 수집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클래식에 심취하던 오래전 시절이 그립군요.
 

그러니깐 주문한 책들. 오늘. 퍼즐 주문하면서 마구 손가락이 돌아가서 마구 주문 버튼을 눌러버리다.

 

 

 

 

 

 

 

 

 

 

 

 

 

 

 

 

 

 

 

 

 

 

 

 

새로주문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책무더기들이 나를 보며 울고 있지만,

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우울한 청춘은 결국 손가락을 놀려 질러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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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03-1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으, 부러워요- ^^ 미녀란 과연 뭘까, 궁금하네요. ^^
고품격 유머란 책을 보니 마태님이 떠오르는데요? 흐흐...

하이드 2005-03-1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미녀.. 오프라인에서 봤을때는 괜찮았거든요? 받으면 잽싸게 읽고 얘기해드릴께요 ^^

mannerist 2005-03-17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조만간 물건너에 손 대시겠군요. (지르세요~ 지르세요~ ^_^o-)

2005-03-17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보 2005-03-1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땐 혼자란것이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러움으로 아줌마가.......

2005-03-1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3-18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03-18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한번에.. 이게 대체 몇 권이랍니까? 하이드님.. 흐흐
 

 

 

 

 

 




뛰어난 유머 감각의 작가 테리 프래쳇. 우리 나라에는 <멋진 징조들>로 소개된 바 있다. <디스크월드> 시리즈는 그를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히트작으로, 1983년 첫 권이 발표된 이후 올해 30번째 권이 나온 판타지 시리즈. 연간 판매량 2천만 부를 자랑하는 인기 시리즈이다.

마법사, 요정, 마녀, 드래건 등 서양 동화에서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자유자재로 비틀어 이야기 속에 담아낸다. 시리즈 제목인 '디스크월드'는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부르는 말로, 거대한 거북이 등 위에 코끼리 네 마리가 서서 받치고 있는 원반 같은 세계. 세계관 설정은 힌두신화에서 빌려왔으며, 여러 서양신화와 설화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엘프, 드라이어드 등의 환상적 존재들을 창조적으로 각색했다.

이번에 출간된 시리즈 1권과 2권은 불의의 사고로 마법을 못 쓰게 된 마법사 린스윈드와 환상의 세계를 동경하여 관광을 온 보험조사원 두송이꽃이 등장한다. 주된 줄거리는 이 두 사람이 디스크월드를 여행하며 신과 요정, 드래건과 만나고 싸우고 도망치는 모험 이야기. 번뜩이는 재치와 날렵한 유머감각, 짓궂은 풍자와 말장난이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는 작품.
 
 
드디어 샀다.  1권만 나왔을적에는 영 모자란 느낌에 안 샀었는데, 2권 나온거 보고 잽싸게 일단 장바구니로. 문제는 문제인게, 아직 '멋진 징조들' 작년 여름에 산;; 도 안 읽었다는거.
 
 
 
 
 
 
 
 
 
 
 
그리고 아마존에서 산 원서 몇개도 딩굴고 있다는 거.
 
아무튼. 디스크 월드 도착하면 슬슬 읽기 시작해야겠다.
 
그러니깐, 책 소개에 '올해 30번째' 라는건?! 많이 사주면 우리나라에서도 30권까지 번역되어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대단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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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03-1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징조들이요. 전 빌려봤는데, 한 3분의 2까지는 꽤나 재밌게 술술 읽히다가, 그 뒤부터는 약간 물리더라구요. 디스크 월드도 그럴까봐 안 사고 있는데, 어떨지..

미세스리 2005-03-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언니 서재에만 오면- 읽고 싶은 책 투성이..옆에 있는 이책도 마저 못읽고 ^^:;
 
 전출처 : balmas > [퍼온글] 책벌레 멘델 - 슈테판 츠바이크 (꼭 읽어보시길!)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단편소설은 1979년 고려원에서 출판된 <유태인 대표작가 단편선> - 소올 벨로우, 이윤기 옮김, 에서 옮긴 것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이라는 희소성도 그러하지만 책 내용이 책을 좋아하시는 분에게는 진한 감동을 줄 것이라 생각이 들어 옮깁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이 단편을 읽으셨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철자법이나 띄어쓰기 등은 현재의 문법에 맞게 수정했음을 알립니다.

 

                                     책벌레 멘델

                           Buchmendel


                                                                             -  슈테판 츠바이크


  궁벽한 시골을 여행하다가 비엔나로 돌아온 나는 정거장에서 집 쪽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워낙 억수같이 퍼부었기 때문에 행인들은 서둘러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나대로 억수도 피할 겸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비엔나 같은 대도시 거리라 구석마다 카페가 있었고, 나는 모자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어깨가 흠씬 젖었지만 가까운 카페를 골라잡을 수 있었다. 재미없는 음악(독일식의 판박이)에다 도시 중심에서나 볼 수 있는 댄싱 플로어는 구식이었고, 그 안에 가득한 노점 상인들과 노동자들은 커피나 빵 대신 오히려 신문을 더 찾았다. 이미 밤도 늦은 시간이었다. 카페 안의 공기도 날씨 탓이긴 했지만 그래도 담배연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새틴을 씌운 의자라든지 번쩍이는 금전등록기 하며, 그런대로 깨끗하여 애써서 치장한 흔적이 보였고 전체적으로도 그럴 듯했다. 비를 피하려고 허둥대다 보니 나는 그 카페 이름도 읽지 못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따뜻하고 안락한 그곳에서 쉬었다. 그러나 나는 조바심이 나서 파랗게 색칠한 유리창을 통해 소나기가 멎었는가 하고 밖을 내다보았다. 나대로 갈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기 앉아 다분히 전형적인 비엔나 카페의 최면적 분위기를 따른 실내장식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둠침침한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해보았다. 인공 조명 아래서 보이는 그들의 눈은 어딘가 음산한 빛을 띄고 있었다.

카운터에 있는 젊은 여자를 관찰했다. 자동인형처럼 그녀는 웨이터가 가져온 커피에다 설탕을 퍼넣고 있었다. 별 관심도 없이 벽에 걸린 광고 문안을 읽기도 했다. - 이런 멍청한 직업이 유쾌할 수도 있음직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막연한 졸음에서 깨어났다. 내부에 이상한 동요가 일어났다. 이따금씩 고개를 들지만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아래턱인지 위턱인지 모를 치통과 같은 동요였다. 이 무감각한 긴장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정신적 피곤으로 인한 막연한 감상 같은 것이었다. 그 이유를 모르면서도 나는 의식할 수 있었다. 나는 몇 년 전에 틀림없이 이 카페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의식에 떠오르는 연상이 벽, 테이블, 의자, 생소하게 보이는 자욱한 실내의 추억을 상기시켰다.

  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것은 집요하게 내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의식이 심연에서 번쩍거리지만 미끄러워 붙잡을 수 없는 해파리 같은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검토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확실한 것은 내가 이전에 왔을 때는 카운터가 대리석판이 아니었고 또 금전등록기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벽도 모조 장미의 숲으로 치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최근에 만든 것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틀림없이 20년도 더 지난 옛날에 여기 와본 적이 있었다. 이 네 귀퉁이의 벽 안에 못으로 단단히 박아놓은 것처럼 먼 옛날에 내 자아의 일부분이 거기 걸려 있었다. 잃어버린 인연을 찾고자 실내뿐만 아니라, 내 내부의 의식까지 반추해보았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그 깊이를 잴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하고 있었으리라. 이해가 손끝을 빠져나가 정신력의 불안이 드러날 때 사람들이 유머를 잃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실마리를 잡아보려고 애썼다. 좋고 나쁜 양면성을 지닌 내 기억력은 기묘한 형태여서 가느다란 실이면 충분하리라. 한쪽 끝은 집요하게 믿을 수 없고 또 한쪽은 믿을 수 없이 신뢰할 만하다. 내 기억은 중요한 세부사항, 즉 구체적인 사건이나 사람들의 얼굴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임의적인 노력은 의식의 심연에서 그것을 토해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퍼덕거리며 대항하는 물고기에게 낚시를 먹인 낚시꾼처럼 나도 이 잃어버린 기억을 낚아올리는 데는 몇 가지 하찮은 미끼 - 그림엽서, 봉투에 씌어진 주소, 신문의 스크랩 - 면 충분하리라. 나는 한 번 본 사람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그의 입모양이며 툭 튀어나온 송곳니 왼쪽으로 난 틈새며 억지로 만들어낸 너털웃음소리, 기분좋을 때 턱수염을 잡아당기는 버릇, 그리고 즐거울 때의 표정의 변화까지도. 내 기억에 떠오른 것은 이런 신체적 특징뿐만 아니다. 나는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내게 한 그의 대답이라든지 내 말의 어조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과거를 이처럼 소상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연상의 흐름을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접점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내 기억이 추상적인 평면 위에서는 그리 만족스럽게 작용해주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내 물고기를 잡을 낚시를 제대로 걸기 위해서였다. 쓸데없는 일이었다. 헛일이었다. 낚시가 없거나 물고기가 물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성미 급한 사람이 삼키기만 하고 내뱉지는 않는다고 해서 슬러트 머신을 흔들거나 발길로 냅다 차버리는 것처럼, 내 양쪽 관자놀이 속의 사고 기관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데 화가 난다고 해서 한 대 쥐어박아줄 수도 있었다.

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데 실패한 나머지 화가 나서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안을 서성거렸다. 내가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 내 기억이 반짝거렸다. 나는 금전등록기 오른쪽에 창문도 없는 방으로 연결되는 복도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거기에 켜진 것도 보조등이었다. 그렇다, 틀림없이 그런 곳이 실재했다. 장식은 달랐지만 구조는 그대로였다. 바아 뒤의 4각형 간막이는 카드 룸이었다. 그 방의 가구를 기억해내자 내 가슴이 뛰었다. 나는 드디어 연상의 궤도에 들어선 것이었다. 기억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엔 조그만 당구대가 놓여 있어쓴데 마치 이끼가 덮인 조용한 연못 같았다. 구석에는 카드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중 한 테이블에는 수염이 터부룩하고 직업 도박사인 듯한 사내 둘이서 체스를 하고 있었다. 난로 옆으로 <전화>란 딱지가 붙어 있는 문이 있고 그 옆에 또 하나의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섬광처럼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그것은 멘델, 야콥 멘델이 쓰던 테이블이었다! 그곳은 바로 저 책벌레 멘델, 바로 그 멘델이 쓰던 곳이었다. 나는 카페 글루크에 온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야콥 멘델을 잊을 수 있었던가? 내가 몇 년간이나 그를 잊고 있었다니! 마치 우화의 나라에서 온 듯한 특이한 사람, 이 세계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 대학과 몇 안되는 추종자들 사이의 명물, 책장수의 마술사, 숙명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기 앉아 있던 사람, 서지학(書誌學)의 상징, 카페 글루크의 영광을? 그 물고기를 낚아올리는 게 왜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내가 어떻게 저 멘델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상상력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그의 얼굴과 모습이 생생하게 내 앞에 보였다. 나는 마치 책과 원고뭉치가 쌓인 대리석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정물처럼 앉아 그는 책장에다 눈을 박고 있었다. 그러나 꼭 정물처럼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겐 나지막한 소리로 책을 읽으며 깨끗하게 벗겨진 대머리를 앞뒤로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고향인 갈라시아의 유태인 학교에서 얻은 습관이었다.) 유태인 소년들이 탈무드를 읽을 때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는 거기에서 흥얼거리며,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카탈로그와 책을 읽었다. 랍비는, 아기가 요람에서 흔들릴 때 더 깊이 잠드는 것처럼, 이 성스러운 책의 경건한 내용도 그같이 리드미컬하고 최면적인 동작에 의해 더 깊이 스며든다고 믿고 있었다. 마치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 멘델은 아무것도 듣고 보지 못했다. 그는 틱택거리며 부딪치는 당구공도, 오고가는 웨이터들도, 울리는 전화벨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는 바닥을 닦을 때도, 난로에 석탄을 다시 채울 때도 몰랐다. 한번은 빨갛게 단 석탄 덩어리 하나가 난로에서 떨어져 멘델의 바짓가랑이를 몇 인치나 태운 적이 있었다.

  실내는 연기로 자욱했고 손님 하나는 불을 끄려고 물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연기도 냄새도 손님의 그런 소동도 그의 주의를 책으로부터 돌려놓지 못했다.

  그는 기도하듯이, 노름꾼들이 돌아가는 루울렛을 들여다보듯이, 술꾼들이 빈병을 기웃거리듯이 책을 읽었다. 그가 그런 집중력으로 책을 읽는 것을 본 이후로 다른 사람들의 독서는 그저 소일거리쯤으로 보였다.

  갈라시아인인 중고품 책장수 멘델은 예술가, 학자, 철인과 바보를 특정지우는 절대적 집중력의 신비를 나에게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완전한 집중의 비극적인 행복과 불행에 익숙해지게 해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를 그에게 소개해준 것은 상급학년의 친구였다. 그 당시 나는 오늘날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최면술사 메스머의 인생과 행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내 연구는 신통치 않았다. 내가 손에 쥘 수 있었던 책은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 도서관에 도움을 청했지만 그곳 직원은 풋내기 대학생에게 자료를 찾아주는 게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대학친구가 멘델을 만나보라고 제안한 것이었다.

  “책에 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게 없어. 그러니까 자네가 보고 싶어 하는 책을 구하게 해줄 수도 있을 걸세. 이 비엔나에선 가장 유능한 사람이고, 게다가 독창적이지.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적계의 도마뱀이야. 즉 멸종된 동물의 태고적 생존자란 말일세.”

  그래서 우리는 카페 글루크로 갔고, 거기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조금 전에 쓴 것처럼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앞뒤로 머리를 흔들고 있는 멘델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의 침입을 무시하고 머리를 끄덕거리는 중국 인형처럼 하고 앉아 책만 읽고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고리엔 검은 오버코트가 걸려 있었는데 그 주머니에도 원고와 책과 카탈로그 뭉치가 불룩하게 들어 있었다.

  내 친구가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멘델은 이것을 무시해버렸다. 할 수 없이 슈미트는 마치 문을 노크하는 것처럼 책상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멘델이 안경을 이마 위로 밀어올리고 기계적으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진한 잿빛 눈썹 어래서 검고 커다란 두 눈이 빛났다.

  내 친구는 나를 소개했고, 나는 대학 도서관 직원에게서 퇴짜맞은 궁상을 조심스럽게(슈미트가 지시한 대로) 설명했다. 멘델은 경멸하는 듯이 웃으면서 의자 뒤로 몸을 젖히고 투박한 갈라시아 억양으로 말했다.

  “퇴짜라, 그렇게 생각하나? 그 친구는 도서관의 부적격자였어. 그게 문제야. 바보 같은 녀석이지. 나는 그 녀석을 20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지만(그것도 죄야) 그동안 공부한 건 하나도 없어요. 월급이나 닦아먹는 것, 그런 녀석을 다 그 모양이야. 책 앞에 앉아 있지 말고 도로공사나 하라지.”

  이 호통은 마치 얼음장이나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 책벌레의 손이 자리에 앉으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그와 의논할 문제를 다시 반복해서 설명했다. 동물의 최면 현상에 대한 연구자료와 메스머의 이론에 대한 찬반 양론의 서적이나 소논문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을 마치자 멘델은 왼쪽 눈을 깜박거렸다. 마치 눈에 들어간 먼지를 닦아내려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나서는 눈에 보이지도 앉는 카탈로그를 읽는 것처럼 2, 30개의 논문 제목과 출판 날짜, 출판사 이름과 가격까지 줄줄 이야기해주었다.

  슈미트의 말을 잘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나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내가 깜짝 놀란 것이 그의 자부심을 간질여놓은 모양이었다. 그는 또 한번 그 놀라운 기억력의 단추를 눌러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서지학적 난외(欄外) 문제를 풀어놓았다. 몽유병자, 퍼킨스의 금속견인장치, 최면술에 대한 선배들의 실험, 브레이드, 가스너, 마법으로 악마 부르기, 기독교적인 과학, 접신학(接神學), 마담 블라바트스키 같은 것은 내가 바라지도 않던 것이었다. 각 아이템 별로 또 한번 우박 같은 책 이름과 출판 날짜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야콥 멘델이라는 사람이 대영 박물관의 도서관에 있는 일반 목록처럼 살아 있는 사전이지만 두 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는 게 다를 뿐이란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서지학적인 귀재(鬼才)를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누추한 갈라시아 중고품 책장수로 변장했을 뿐인 것이다. 자그만치 80권이나 되는 책 이름을 따르르 쏟아내놓고 (그것도 별로 어렵잖게, 의외로 끗발이 좋았던 노름꾼처럼 느긋한 표정으로), 한때는 흰색이었을 법한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았다.

  나는 되도록 놀라움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이 많은 책 중에서 어느 책이면 어렵잖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 어디 보자. 내일 다시 오면 몇 권 구해주겠네. 그 나머지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는 시간 문제야.” 하고 그가 대답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내가 바라는 책의 리스트를 적어줄 수 없겠느냐고 덧붙이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슈미트가 주의를 주느라고 내 옆구리를 찔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멘델은 나를 힐끗 바라보고난 다음이었다. 그것은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다가 모욕을 당한 표정으로 경멸과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멕베드가 싸울 것도 없이 항복하라고 소리치던 멕더프에게 한 대답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거칠게 웃었다. 후골(喉骨)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는 모멸감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확실히 그로서는 화낼 이유가 충분했다. 처음 보는 무식꾼이 감히 야콥 멘델에게 마치 그가 서점의 점원이나 공공 도서관의 하급 직원인 것처럼 리스트를 적어 달라고 한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나의 이 자칭 공손이 얼마나 이 천재의 비위를 거슬려버렸는가를 깨달았다. 지저분하고 평번하게 보이는 이마 뒤에다 이 세상에 인쇄되어 나온 책 이름은 모조리 기록해놓은 강력 무쌍한 기억력의 소유자에게 말이다. 하루 전의 신문에 나온 것이든, 몇 백 년 전에 나온 것이든 그는 출판사, 저자의 이름, 그리고 가격까지 모조리 꿰뚫고 있었다. 마치 인쇄된 페이지에서 읽어내는 것처럼, 그는 자기 기억 속에서 그 내용이며 그 삽화까지 고스란히 읽어내었다. 자기 수중에 있는 책뿐만 아니라 서점의 진열대에서 잠깐 본 것까지 그는 그대로 기억할 수 있었다. 마치 아직 캔버스에 그리지 않은 사물에 대한 화가의 기억처럼 그는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로젠스부르그 서적상에 의해 책이 6마르크에 들어오자 그는 2년 전의 일인데도 그는 그 책이름을 고스란히 외웠다. 그와 같은 책이 비엔나 경매에서 4크라운에 주인을 바꾸자 그는 그 구입자 이름까지도 기억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멘델은 책제목이나 모양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모르는 식물이 없었다. 모르는 적충류(滴虫類)가 없었다. 그는 모르는 별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돌고 쉴새없이 변화하는 책이라는 우주의 질서에 정통했다.

  각개의 학문적인 전문분야에서, 그는 전문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도서관의 실태를 도서관 직원보다 더 잘 알았다. 그는 출판업계의 당사자들보다 각 출판사의 책이름을 더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에겐 불가사의하지만 확고부동하고 정확한 기억의 마력밖에는 그 자신을 인도해줄 힘이 없었다.

  이 한계를 모르는 능력은 그의 특수한 집중력 때문인 것도 사실이었다. 책에서 떨어지면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유형별로 분류, 정돈, 수집되고 말하자면 소독되어 책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모든 실재하는 현상이 그에게 아무 현실적인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가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이 주는 의미와, 그 내용을 적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흥미와 주의를 끄는 것은 제목과 가격과 형식과 표지였다.

  이 천재의 고물 취향의 기억력을 가진 야콥 멘델에 대한 이 마지막 평가는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인 그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만일 그의 뇌리에 가득한 것이 도서목록이 아니라 포유동물의 두뇌에 축적된 지력(智力)이었다면 야콥 멘델이라는 인간의 독특한 가치는, 골상학(骨賞學)에 대한 나폴레옹의 선물, 언어학에 대한 메쪼판티의 재능, 장기대회에서의 라스커의 재주, 부조리의 음악적 재능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의 이 재능이 교사로서 쓰여졌더라면, 그 놀라운 두뇌는 수백만 학생들을 가르쳐내었을 것이고, 일반인을 가르쳤더라면 우리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보물창고를 위해 그야말로 학식있고 가치있는 인재를 길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받은 교육이라고는 탈무드 학교뿐인 이 보잘 것 없는 갈라시아 유태인 책장수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류 문화세계가 자기로서는 넘어갈 수 없는 울타리였다. 그래서 그의 놀라운 기능은 겨우 카페 글루크의 골방 대리석 덮개를 낀 테이블 위에서만 쓰여졌다.

  미래에 한 위대한 심리학자가 나와 뷔퐁이 동물의 종(種)과 속(屬)을 효과적으로 분류한 것처럼,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마력의 유형을 분류하다가 한 사람이 수많은 세부 사항을 기억하는 것을 보고 야콥 멘델을 위해 특별한 분류방법을 찾아야 하리라. 15세기의 요랍기의 목록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책값과 서명을 꿰뚫고 있는 잊혀진 서지학의 대가라고.

  책의 매매나 일상 생활에서, 야콥 멘델은 소규모의 중고책장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요일마다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쎄>, <노이에스 비엔너 타블라드>에는 판에 박힌 그의 광고가 게재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고서 고가 매입. 오베레 알세르스트라쎄. 멘델>

  그 아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바로 카페 글루크의 전화번호였다. 그는 털보 짐꾼을 대동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게를 열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이곳을 거점으로 귀중한 자료만 옮겨오고 나머지는 버린 것이다. 그로서는 서점을 낼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봇짐 장수로 물러앉게 되었고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학생들이 그에게 교과서를 팔았다. 그 책이 몇 년 뒤에 다음 세대로 옮겨지면 거기서 얼마의 이익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는 남의 충고는 거의, 혹은 전혀 무시했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 돈이란 설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 닳아빠진 검은 코트 이외의 더 나은 옷을 입은 걸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그는 우유 한 잔과 빵 두 조각을 먹었다. 점심 때 먹는 음식은 근처 식당에서 배달되었는데 그게 그래도 가장 음식다웠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카드 노름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눈이 안경 뒤에서 끊임없이 구르고 있고 그의 수수께끼 같은 머릿속에는 책 제목이 쉴새없이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으리라. 마치 기름진 목장처럼 그의 두뇌는 이 풍부한 수도에서 쉴새없이 물을 빨았다.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흥미없는 것이었다.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의 열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장 보편적인 허영이었다.

  가는 곳마다 허탕친 나머지 지쳐버린 누군가가 그에게 도움을 청하면,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자화자찬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비엔나나 그밖의 지방에서 그의 지식을 존경하고, 그가 줄 수 있는 도움을 값비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지방이라고 부르는 이 단위에는, 그 단위를 반영하는 세분화된 작은 면이 있기 마련이다. 거기에다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찬가지 재주와 마찬가지 정열을 가진 감식가가 있는 것이다. 서적 시장의 애호가들은 야콥 멘델을 알고 있었다. 악보를 해독하기 어려울 때 음악계의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를 찾아간다. 그는 회색 두건을 쓰고 여러 가지 악보가 펼쳐진 곳에 버티고 앉아 이 난해한 악보를 풀어주려고 미소로 내방객을 맞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의 비엔나 극장과 문화 전반에 대한 자문을 구하려면 서슴치 않고 박학자(博學者) 글로시 신부를 찾아간다. 이와 같은 신뢰는 비엔나의 서지학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카페 글루크에 가서 야콥 멘델 앞에다 보퉁이를 풀어 놓으면 되는 것이다.

젊고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 있는 나에게 그런 자문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자칭 책장사라는 사람이 보통 책을 가져오면 겉장을 깔보는 듯이 툭툭 두드리며 “오 크라운.”하고 말한다. 만일 희귀본이거나 정본이라면 그는 자리에 앉아 이 보물을 원종이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핀다. 이럴 때 그는 더럽고 잉크얼룩이 진 손가락과 때낀 손톱을 부끄러워한다.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건하게 그는 이 보물을 한 장씩 넘겨본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기나 하는 듯이 그 순간에 그를 다치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가 차례에 따라 책을 살펴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고 무게를 가늠해보는 것은 엄숙한 종교적 의식을 방불케 한다. 이런 일에 열중하는 그의 구부러진 등은 쉴새없이 들썩거리고 이따금씩 혼자서 찬탄하느라고 “아!”하고 외치거나 어쩌다 책벌레가 갉아먹어버린 페이지나 찢어져나간 페이기가 있을 때마다 “이런!”하고 안타까워했다.

  그의 손이 책을 다루는 모습은 마치 그 책이 순금처럼 극히 작은 무게 단위로 거래되기나 하는 것처럼 조심성스러웠고, 그가 책을 냄새 맡는 모습은 마치 소녀가 장미꽃 냄새를 맡는 것만큼이나 감상적이었다. 물론 이 의식과 같은 책의 검토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책주인에게는 더없는 불행한 일이었다.

  책의 평가가 끝나면, 그는 기꺼이, 아니 열심히 이 물건에 대한 정보를 들려주었다. 거기 관련된 일화나 경매, 혹은 개인 거래에 오른 그와 같은 책값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럴 때면 그의 얼굴은 밝아지고 더 싱싱해지고 젊어보였다. 그런데 그를 굳어지게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이 풋내기 고객이 전문가인 그의 의견을 돈으로 사례하려고 할 때였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물러섰다. 마치 미국인 여행자가 팁을 내밀 때의 유능한 박물관 관리인 같았다. 야콥 멘델에게 있어서 책을 대한다는 것은 신성한 것으로, 마치 여자가 아직 순진한 젊은 남자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순간은 플라토닉한 사랑의 밤이었다.

  책이 그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신비였다. 그러므로 유명한 수집가들이 (그 가운데는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교수도 있다) 이 멘델을 그 도서관의 사서(司書)로 채용하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이런 제의를 감사의 말을 덧붙여 거절했다. 그는 카페 글루크에 있는 정든 사령탑을 떠날 수 없었다.

  33년 전 턱 끝에 수염이 가무스름하고 관자놀이 아래로도 제법 구레나룻이 날 즈음 그는 겁 없는 젊은이로 갈리샤에서 비엔나로 왔다. 랍비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가혹하고 질투심이 많은 여호와 섬기기에 진력이 났다. 그는 보다 생기발랄한 책이라는 다신교적(多神敎的) 의식을 택했다. 그러다 카페 글루크를 발견하고 자기 가게로, 사령탑, 자기 우체국 그리고 자기 세계로 차례차례 만들어갔다.

  천문대에 홀로 앉아 매일 밤 망원경을 통해 수많은 별들의 신비한 운행이며, 변화무쌍한 난전(亂戰)이며 그리고 사라지는 광경을 관찰하는 천문학자처럼, 야콥 멘델도 자신의 안경을 통해 책의 우주, 우리들 일상생활을 넘어서 존재하는 그 우주, 별들의 우주처럼 변화무쌍한 주기를 지닌 책의 우주를 관망했다.

  카페 글루크에서의 그의 가치는 높이 평가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명성은 비공식적인 직업의식에서라기보다는 <<알체스티스>>와 <<이피게니아>>의 작곡자인 유명한 음악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대부의식(代父意識)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낡은 벚나무 카운터나, 여러 군데 꿰맨 자국이 드러난 당구대, 놋쇠 커피 항아리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의 테이블은 성역으로 통했다. 그의 수많은 고객과 단골손님들은 <그 카페를 위해> 한 잔쯤은 마시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방대한 지식에 대한 과외 이익금은 웨이터인 도블러의 허리에 달린 커다란 가죽 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인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멘델도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전화는 언제나 무료로 써도 좋았다. 그는 편지도 카페에서 받았고 소포도 그쪽으로 배달되었다. 화장실 담당인 늙은 여자는 그의 코트를 손질해주고 단추를 꿰매주며 매주일마다 속옷을 빨아주기도 했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배달되는 음식을 먹는 유일한 손님이었다. 게다가 매일 아침 그 카페 주인인 스탄트하르트너씨가 그의 테이블로 찾아와 “안녕하세요.”하고 아는 체 했다. 그러나 멘델은 책에 몰두해 있다보니 대답하는 일이 드물었다. 정확하게 7시 30분에 그는 카페에 도착했고 어두워지기까지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고 신문도 읽지 않았으며 주위의 변화를 주시하는 일도 없었다. 한번은 스탄트하르트너씨가 정중하게 냄새나고 희미한 등유램프보다 자기가 갈아단 전등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멘델은 이 백열등을 보고 놀라는 것이었다. 이 시설 때문에 며칠간이나 망치소리가 났지만 백열등의 출현조차도 그의 주의를 끌지 못한 것이었다. 안경의 동그란 두 구멍, 오직 이 반짝거리며 빨아들이는 두 렌즈만이 그의 두뇌로 들어오는 수억 마리 적충류와 같은 글씨의 여과장치였다. 그 밖의 일들은 그 의미없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30년간이나 이 테이블에서 잠잘 때만 제외하고, 끊임없이 읽고 비교하고 산정해온 것이다.

  카페 글루크의 바아 뒤에 있는 방을 본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야콥 멘델이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던 그 대리석 덮개의 테이블이 마치 묘석처럼 싸늘하게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이후로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그런 사람이 수없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며, 그런 지루한 단조로움 속에서 독특한 인간의 고귀한 가치가 생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뿐이 아니라, 철없는 나의 청년시절의 직관이 책벌레 멘델을 좋아하게 했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위대한 업적과 뛰어난 능력은 정신이상에 가까운 극도의 외골수의 정신적인 집중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저 수수께끼 같은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도 그를 관찰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위대한 시인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의 내부적 영감뿐만 아니라, 이 천재적인 중고품 책장사의 살아 있는 본보기가 나로 하여금 순수한 정신의 생활, 이데아에의 완전한 몰두, 인도의 요가 수행자나 중세기의 수도승들에게나 볼 수 있는 절대적인 몰아의 경지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닫게 했다. 나는 이 가능성을 전화박스 옆의 조그만 백열등의 카페에서 그 가능성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전쟁과 내 자신의 일에 몰두하느라고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비어 있는 테이블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동시에 거기 앉아 있던 사나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웨이터를 불러 물어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유감입니다만 멘델씨라고는 잘 모르겠는데요. 카페 글루크의 단골 손님 가운데엔 그런 분이 없습니다. 수석 웨이터라면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멘델씨라구요?”

  얼마간 생각해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름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혹시 만들씨 아닙니까? 플로리아니가쎄에서 철물상 하시는?”

  나는 입맛이 썼다. 되찾을 수 없는 과거로 인해서였다. 우리가 지나가자마자 바람이 그 모래 위의 발자국을 지워버린다면 인생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30년간 아니 40년인지도 모른다. 한 사나이가 이 작은 방에서 숨쉬고 읽고 생각하고 말했다. 3, 4년이 지나가고, 이집트에는 새로운 왕이 일어서서 요셉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카페 글루크에 있는 사람은 이제 저 책장수 야콥 멘델의 이름을 들은 적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안타까워 스탄트하르트너씨나 옛날에 여기 있던 직원에게 물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수석 웨이터에게 제의했다.

  “전 주인이던 스탄트하르트너씨 말씀입니까? 몇 년 전에 팔았어요. 그 뒤 돌아가셨지요. …… 전 수석 웨이터요? 이제 쉴 만큼 벌어가지고 크렘스에서 행세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전에 있던 사람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한 사람, 그렇죠. 스포르쉴 부인만은 아직도 화장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압니다. 그 부인은 전 주인에서부터 수십 년을 여기서 일했죠. 아마 그 부인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멘델씨를 기억하고 있지 못할 거예요. 손님이라면 별로 기억하지 못하는 할마시거든요.”

  내 생각은 달랐다.

  “야콥 멘델이라면 그리 쉽사리 잊혀질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어쨌든 스포르쉴 부인과 이야기해줄 수 없을까? 조금만 짬을 내면 되니까.”

  <화장실 담당>이 지하실에서 올라왔다. 백발인데다 나이가 들어 발걸음이 무거운 이 부인은 수건에다 젖은 손을 닦고 있었다. 청소하다 불려 올라온 부인은 카페 객석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혁명 후 관헌들에게 시달리던 습관 때문에 비엔나의 시민들은 <높은 사람>이 물어볼 게 있다고 말하면 경찰관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부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겸손했다. 그러나 내가 야콥 멘델에 대해 묻자 그녀는 긴장했지만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불쌍한 멘델씨…… 그런데 아직도 그 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니……”

  늙은 사람들이란 흘러간 시절이나 그 시절 사람들을 기억해내는 일만으로도 감정이 쉽사리 격앙되는 법이다. 나는 그녀에게 멘델이 아직 살아 있느냐고 물었다.

  “하나님 맙소사. 아닙니다. 불쌍한 멘델씨는 5, 6년 전에 죽었습니다. 아니 7년쯤 됐던가? 참 좋은 분이었지요. 내가 그분을 아는 게 몇 년이나 되더라? 25년이 넘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일을 시작할 시각이면 그는 언제나 자기 테이블에 이미 와 앉아 있었지요. 그 사람을 죽게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어요. 암, 부끄러운 일이고말고요.”

  흥분한 이 부인은 내가 그의 친척이냐고 물었다.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 일을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냐고 반문했다.

  “모릅니다. 그래서 부인께서 좀 말씀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젖은 손을 닦았다. 그녀는 카페의 밝은 불빛 아래서 자기의 더러운 앞치마와 흐트러진 백발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혹시 웨이터가 자기 이야기를 엿듣지 않을까 하고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드 룸으로 가실까요? 멘델이 있던 방입니다. 거기서 이야길 좀 들려주십시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내가 이해해주어서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뚱거리며 안쪽에 있는 간막이로 나를 인도했다. 그녀를 따라가면서 나는 손님들과 웨이터들이 기묘하게 어울리는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그 대리석판의 테이블 양쪽에 앉았고 거기에서 그녀는 야콥 멘델의 몰락과 죽음을 이야기해주었다. 여기에 그녀 자신의 말과 그 뒤 여기저기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되도록이면 그대로 옮겨보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도 그는 아침 7시 30분에 여기 와서 이 테이블에 앉아 전처럼 책을 읽었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가 전쟁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답니다. 사실 그는 신문도 읽지 않았고 책 이야기가 아니면 남들과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신문팔이들이 (전쟁초기니까요. 당국이 그걸 금지시키기 전입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동부전선에 결전이 벌어졌습니다.” 라든지 “끔찍한 살육전이 계속된다.” 라고 소리쳐봤자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모여앉아 수군거려도 그는 자기 일만 했답니다. 그는 저기 저 당구대에서 점수 놓아주던 프리츠가 첫 번째 전투에서 쓰러져 거기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스탄트하르트너씨의 아들이 프르제미슬에서 러시아군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답니다. 빵맛이 점점 없어지고 아침저녁으로 뜨거운 우유 대신에 대용커피를 마셔야 했지만 그 양반은 쓰다 달다 소리 한번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한번은 카페로 찾아오는 학 생들이 줄어들었다고 그게 왜 그러냐고 놀라더군요. 책 빼놓으면 세상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그 양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오. 어느 날 아침 열한 시쯤엔가  경찰관 두 사람이 찾아왔어요. 한사람은 정복을 하고 또 하나는 평복 차림으로. 그 사람들은 똑바로 멘델의 테이블로 갔어요. 이 순진한 양반은 그 사람들이 책 사러온 사람이나 책 이야기 들으러 온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 양반을 체포한다고 말하고는 데려가버렸다오. 그게 카페의 이야깃거리였습니다.

  모두가 경찰관 사이에 서서 안경을 이마 위로 걷어올리고는 영문을 모르고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멘델 이야기를 한 거라오. 이건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멘델씨는 파리 한 마리도 해칠 양반이 아니다, 하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랬더니 경찰관이 화를 벌컥 내면서 제 할일들이나 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멘델을 데려가버렸고 우리는 그 뒤 2년간 그를 카페에서 볼 수 없었다오. 그 사람 죄목이 뭔지 몰라도 나는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죽기를 한하고 맹세할 수도 있어요. 멘델씨가 나쁜 일을 할 수는 없었어요. 죄라면 그처럼 순진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다루는 거야말로 죄죠.“

  이 스포르쉴 부인의 말이 옳았다. 우리의 친구 야콥 멘델은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내가 뒤에 안 바에 의하면) 똑똑하지 못한 짓을 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그의 사람됨을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립국으로 내왕하는 우편물을 검열하던 군 검열기관이 하루는 해외 발송의 우표가 붙은 엽서 한 장을 입수했다. 야콥 멘델이란 서명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엽서에는 적국인 파리의 그레나르 가에 있는 도서관의 쟝 라보아데씨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일년의 정기 구독료를 미리 불입했는데도 여덟 달치의 월간 <프랑스 서지학보>가 배달되지 않았다고 항의하고 있었다. 이 엽서에 하급 직원 (로만스어를 공부한 전직 고교 교사였는데 참호에서 재능을 썩힐 게 아니라 검열기관을 위해 특별히 차출된 사람이었다.) 은 놀라고 말았다. 농담이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혹시 첩자들이 이용하고 있지 않나 하고 주의깊게 매주 약 2천 통의 편지를 검열해야 했다. 그러나 1914년 10월 이래의 규정을 무시하고 적국의 주소를 쓴 엽서를 수도나 지방의 우체통에 넣는 멍청한 오스트리아인은 없었다. 서로가 철책을 두르고 총과 총검,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참호에서 상대를 쥐처럼 죽이는 데 최선을 다하던 참이다. 독일을 위시한 중구제국(中歐諸國)은 러시아와 프랑스 전 지역과의 교신을 금지시켰었다. 국민병으로 동원된 이 전직교사는 이 엽서를 대단찮게 생각하고 상관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그저 호기심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주일 뒤엔 야콥 멘델 발신인 또 하나의 엽서가 나왔다. 이번엔 런던의 골든스퀘어에 있는 서적상 존 알드릿지에게 보내는 것으로 <고물 연구>의 과월호(過月號) 몇 권을 엽서에 선명하게 씌어진 비엔나 주소로 발송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푸른 군복의 검열관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누굴 놀리나? 엽서가 암호로 쓰여진 거나 아닐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상관의 자리로 가 뒷꿈치를 소리나게 붙이며 경례하고 나서 이 의심스러운 엽서를 적당하게 거만을 부리는 소령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이상한 일이었다.

  상관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주소와 같은 장소에 실제로 야콥 멘델이란 사람이 있는가 알아보고, 있으면 연행해오라고 지시했다. 한 시간 후 멘델은 체포되어 소령 앞으로 끌려왔다. 아직도 충격 때문에 멍한 상태였다. 소령은 그에게 엽서를 보여주며 직업군인다운 덜 된 태도로 그 엽서를 알아보겠느냐고 다그쳤다. 그 같은 말대접과 또 그처럼 중요한 책의 주문서가 거기 있는 데서 화가 난 멘델은 시덥잖게 대답했다.

  “물론 엽서는 내가 썼소. 내 글씨고 서명도 내 겁니다. 정기구독한 정기간행물은 발송을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닙니까?”

  소령은 회전의자를 반바퀴 돌려 그 옆에 있는 중위와 의미있는 시선을 교환했다.

  “이 친구는 돌아도 제대로 돈 모양이야.”

  이것이 그들 사이로 오고간 말이었다.

  소령은 이 친구를 주의깊게 다루어야 할 것이지 아니면 보다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 생각했다.

  사무실이면 어디나 그런 양자택일의 문제가 생기면 동전을 던져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보고서를 내어버리는 게 상례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기 책임에서 손을 씻어버리는 것이다. (풀이 :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심판하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기 책임을 회피했다. 마태복음 27장 25절) 보고서야 어쨌든 자기에게만은 별 해가 될 일이 없고, 수백만 장에다 헛일삼아 그저 한 장을 덧붙이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순간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이들의 결정은 무방비 상태인 이 천재에게는 중대한 일이었다. 이 보고서가 수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제 삼자는 구체적인 혐의를 굳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야콥 멘델.”

  “직업은?”

  “서적 중개인입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멘델에게는 가게가 없다. 중개인 면허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출생지는?”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멘델의 출생지는 페트리카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소령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페트리카우, 혹은 피오르코프는 러시아령 폴란드의 전선을 가로지르고 있는 곳이었다.

  “당신은 러시아 태생이군. 오스트리아 국적은 언제 취득했소? 서류를 보여주시오.”

  “서류라니? 증명서 말입니까? 내가 가진건 서적상 면허증밖에 없는데요?”

  “그럼 당신의 국적은 어디요? 당신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인이오, 러시아인이오?”

  멘델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러시아지.”

  “그럼 당신은?”

  “러시아 병역을 기피하려고 33년 전에 국경을 넘었소. 그때부터는 쭉 비엔나에 살고 있소.”

  소령에게 있어서 사태는 점점 어렵게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 국적 취득 절차를 밟지 않았던가?”

  “왜 해야 하나요? 그런 걸로 걱정해본 일이 없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러시아 국적인가?”

  멘델은 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 귀찮았다. 그래서 간단하게 대답해버렸다.

  “그런 것 같소.”

  놀라고 화난 소령은 삐걱거릴 만큼 난폭하게 의자 뒤로 몸을 젖혔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적의 대공세 이후로 전쟁은 치열한, 1915년 말의 이 마당에 오스트리아의 소도인 비엔나를 러시아인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활보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에다 편지를 쓴다! 경찰도 이 음모를 모르고 있다니! 그런데도 바보들은 신문에다 콘라드 폰 훗첸도르프와 7개국 연합군을 거느리고 바르샤바로 진격하지 않느냐고 쓰고 있다. 군 고위층들은 군대의 동향이 하나하나 러시아에 염탐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중위가 발소리를 내며 방을 가로질러 소령의 자리에 왔다. 지금까지의 친밀하던 대화가 일변하여 심문으로 변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왜 적국 사람이라고 신고하지 않았나?”

  그때까지도 사태의 심각함을 모르고 있던 멘델은 유태인 사투리로 대답했다.

  “신고하다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소령은 이 대답을 도전으로 간주하고 위협하듯이 물었다.

  “아무데나 붙어 있는 경고문을 읽지 못했단 말인가?”

  “못 봤소.”

  “그럼 신문도 읽지 않는가?”

  “안 읽소.”

  두 장교는 마치 하늘에서 자기네 사무실로 달덩이나 떨어진 것처럼, 거북살스럽게 땀을 흘리고 있는 야콥 멘델을 보았다.

  그리고 나선 전화기가 울렸고 타이프라이터가 틱택거렸으며 전령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멘델은 보초의 감시 아래 가까운 막사로 옮겨졌다. 거기에서 집단 수용소로 보내어지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두 병사가 따라오라고 명하자 그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금빛 레이스의 칼라에 목소리가 거친 그들이 그를 어쩔 셈이었던가?

  멘델이 살고 숨쉬고 존재하던 책의 세계에는 전쟁이 없었다.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있는 것은 이름과 저자 이름의 나날이 더해져가는 지식뿐이었다. 그는 군인들을 따라 기꺼이 층계를 내려갔다. 그들의 임무는 우선 경찰서로 데려가는 일이었다.

  거기에서 경찰관이 그의 주머니에 든 책을 빼앗고 수백 가지의 중요한 메모와 고객의 주소가 적힌 서류를 조사하자 그는 이성을 잃고 주먹을 휘두르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의 두 손을 묶어야 했다. 이 싸움으로 그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없으면 하루도 저 책의 놀라운 세계를 볼 수 없는 이 마법의 망원경은 바닥에서 박살이 났다. 이틀 뒤 변변치도 못한 차림 그대로(입은 거라고는 가벼운 여름 외투뿐이었다), 그는 코모른에 있는 러시아 민간인 유치장으로 구치되었다.

  야콥 멘델이 책과의 인연을 끊긴 채, 돈 한 푼도 없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인간 쓰레기들과 지낸 2년간의 유치장 생활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하나도 없다. 새장에 든 독수리의 고통으로 이 기간의 멘델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 주정뱅이 같은 발작 이래로 세계는 전쟁 중에 휘두르는 권력의 횡포와 잔인성과 더불어 군대에 복무한 시기를 놓친 자들, 남의 나라를 고향으로 알고 살아가는 이방인들, 그리고 퉁그스족이나 아로카니아 (풀이 : 칠레 중부의 중남미 토인들)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던 저 권리 - 시간이 허락하면 도망칠 수도 있는 권리 -를 박탈당하고 신성한 보호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는 철조망 뒤의 이 수백만의 무리가 사실은 가장 쓸모없고 구제할 여지없는 무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런 반문화적 죄악은 프랑스나 독일, 영국, 그리고 광란에 빠진 모든 유럽의 교전 국가에서 뻔뻔스럽게 자행되었다.

  최학의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에 그를 다시 이 정신세계로 돌아오게 하는 기회가 없었더라면, 야콥 멘델도 다른 무고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외양간 같은 유치장에서 사라지고 말았거나, 미쳐버리고 말았거나, 이질이나 체력고갈, 아니면 뇌연화증으로 죽고 말았으리라. 그가 사라지고 난 뒤 굉장한 고객들의 편지가 카페 글루크로 배달되었다. 그 중에는 쇤베르 백작도 있었고 스티리아의 주지사(州知事)에게서 온 것도 있었다. 그는 문장학(紋章學) 계통의 수집광이었다. 신학대학의 전임 학장인 지이겐펠트도 있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틴의 주해서를 쓰고 있었다. 에들러 폰 피세크는 80 고령의 퇴역 제독으로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들과 그밖의 유명인사들은 멘델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의 전 거주지로 편지를 보냈다. 그 가운데 몇 장은 코모른에 있는 유치장으로 온 것도 있었다.

  그들은 유치장의 소장에게도 손을 썼다. 이 인정 많은 소장은, 안경이 깨어졌지만 돈이 없어 새 안경을 사 쓰지 못해 거의 장님에 가까워 마치 두더지처럼 가엽고 멍청하게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이 더러운 러시아계 유태인에게 그런 저명인사의 편지가 날아오는 걸 보고 크게 놀랐다. 꼴이야 어떻든 그런 저명한 고객이 있는 걸 보면 상당히 중요한 사람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소장은 앞을 제대로 못 보는 멘델에게 편지를 읽어주고 해답을 써주었다. - 해답은 멘델에게 유리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 저명인사들은 수집가의 단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군 당국에 줄을 대어 (이 적국인의 행동을 보증한다는 것이었다.) 1917년 멘델을 다시 비엔나로 풀려나게 할 수 있었다. - 코모른에서 2년 이상을 보낸 다음이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었다. 매일 경찰에 자신의 행동거지를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건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시 한번 그의정든 다락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다시 책을 만질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카페 글루크의 테이블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유치장에서 돌아온 그의 모습은 스포르쉴 부인의 말을 직접 인용하기로 한다.

  “어느 날 - 아이고, 예수님, 마리아님, 요셉님. 제 눈이 어떻게 됐습니까? - 문이 조금 열리고 (그 양반의 문 여는 버릇은 선생님도 아실 겁니다.) 그 사이로 불쌍한 멘델씨가 들어왔어요. 그는 형편없이 낡은 군복을 입고 누가 버린 것인 듯한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칼라도 없었어요. 얼굴은 꼭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머리카락도 얼마 남지 않은 채였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똑바로 자기 테이블로 걸어가 군복 저고리를 벗었습니다. 그러나 전처럼 민첩하지는 않았다오. 힘이 없어서 헐떡거렸으니까요. 책도 하나도 없었어요. 아무 말없이 자리에 앉아 움푹하고 표정이 없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지요. 우리가 독일에서 그 양반 앞으로 온 인쇄물을 한 꾸러미 갔다줬더니 그걸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옛날 같지 않았다오.”

  그렇다. 그는 옛날의 마술적인 도서목록의 천재는 아니었다. 그 시절에 멘델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물겨운 이야기만 내게 들려주었다. 무엇인가 회복불능이었고 그도 파면이었다. 전쟁이라는 핏빛의 혜성이 그의 조용한 책의 세계로 날아온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인쇄물만 보아온 그의 시력은 철조망이 쳐진 인간의 마구간에서 형편없이 감퇴되어 있었다. 책 속에다 그처럼 열렬하고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던 그의 눈엔 이미 한꺼풀의 베일이 씌어져, 조심스럽게 새로 맞춘 안경 속의 눈은 핏발이 서고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을 그처럼 정교하게 돌던 기억의 톱니바퀴는 부서져버린 것 같았다. 그의 기능은 전과 같지 않았다.두뇌의 구조란 정교한 것이다. (극히 부서지기 쉬운 물질로 만들어진 배전판이나 쉬 망가뜨려지는 정밀기계와 같은 것이다.) 소동맥 하나의 폐색, 신경총 한 가닥의 혼란, 세포 하나의 노쇠, 심지어는 미분자 하나의 전위조차도 두뇌의 톱니바퀴를 정지시켜 제대로 조화된 동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멘델의 기억 속에서, 지식의 배전판 위에서 실마리는 풀려나가지 않았다. 혹은 심리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연상이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씩 고객이 멘델을 찾아왔지만 야콥 멘델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대답하기도 전에 질문을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마치 세계가 전과 같은 세계가 아니었듯이 멘델은 옛날의 책장수 멘델이 아니었다. 그는 읽는 일에다 정신을 완전히 집중시킬 수 없었고 전처럼 고개를 앞뒤로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꼿꼿하게 앉아 인쇄물에다 눈을 주고 있었다. 읽는 게 아니었다. 그저 명상에 잠기는 것이었다. 스포르쉴 부인은, 멘델이 이따금씩 책 위에다 머리를 떨어뜨리고 대낮에도 잠이 들거나 몇 시간이고 멍하니 백열들에서 대체된 아세틸렌 등불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석탄 기근으로 전기는 쓸 수 없었다.)

  멘델은 옛날의 책장수 멘델이 아니었다.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도 아니었다. 이제는 늙고 지치고, 그러나 아직은 숨쉬고 있는 수염과 낡은 누더기의 늙은이로 거기 옛날의 델피 탁선(託宣)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카페 글루크의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운 허수아비, 재수없는 기생충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은 카페의 새주인 플로리안 구르트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 중에 밀가루와 버터로 돈을 번 사람이었는데 스탄트하르트너에게서 그 당시 급속하게 평가절하하던 그라운화(貨) 8만에 카페 글루크를 사들인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식으로 고쳤다. 낡은 부분을 새로 장식하고 새틴 천을 씌운 의자를 들여왔으며 대리석 포치를 만들고, 카페를 확장하고 댄스홀을 만들 수 있는 땅을 사려고 이웃과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이같이 카페의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그가 기생충같은 장애물인 데다가 전쟁 중에는 당국에 고발되고, 아직도 적국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갈라시아의 더럽고 늙은 유태인 야콥 멘델을 좋아할 턱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커피 두 잔과 빵 너댓 개 밖에 먹지 않았다. 스탄트하르트너는 이 장기 고객에 대해, 멘델이야말로 중요한 인물이고 이 카페에서 영원히 보호해야 하며, 부담이기는커녕 재산 목록으로 생각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하며 새주인에게 인계했다. 그러나 플로리안 구르트너는 새가구와 최신형 금전등록기를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이윤 추구와 전후(戰後)의 까다로운 분위기를 노려 전 주인의 완고한 경영 방침에서 멋진 커피하우스로 탈바꿈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제거했다. 그는 이런 요소를 자기 업소에서 몰아내는 데 핑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좋은 핑계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야콥 멘델은 이미 철저하게 몰락해 있었다. 남아 있던 예금 잔고는 전후의 인플레이션으로 곧 바닥이 났다. 그의 단골손님들은 전쟁 중에 전사하거나 알거지가 되었거나 실종되었다. 그는 옛날처럼 책을 짊어지고 집을 방문하며 팔아볼 생각도 했다. 그러나 책을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내릴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거지가 되었다는 징후는 면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레스토랑에서 배달해주는 점심도 먹을 수 없었고 카페 글루크에서 먹는 점심과 저녁도 거르기 시작했다.

  그의 지불은 3주일간이나 늦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석 웨이터는 구르트너에게 “멘델의 보따리를 싸게 하자” 고 말했다. 그러나 스포르쉴 부인이 끼어들어 지불 보증인이 되었다. 그가 갚지 못할 경우에 부인의 임금에서 제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악의 경우는 면하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나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언젠가 수석 웨이터는 빵이 계산보다 더 빨리 없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혐의는 자연히 멘델에게 갔다.

  수석 웨이터는 난로 뒤에 숨어 감시하다가 이틀 수 현행범으로 멘델의 덜미를 잡았다. 이 불청객은 카드 룸에 있는 자기 자리 앞쪽의 카운터 뒤로 숨어들어가 빵 바구니에서 롤빵 두 개를 들고 다시 카드 룸으로 돌아와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혐의가 굳어졌지만 멘델은 빵없이 커피만 마셨다고 주장했다. 손해액이 추정되었고 웨이터는 이를 주인에게 보고했다. 멘델을 제거할 구실에 기분이 흡족해진 구르트너는 공개적으로 그를 도둑으로 몰고 경찰에 넘기지 않은 것만도 자기 마음이 좋기 때문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당신 발로 여길 나가시오. 두 번 다시 이 카페 글루크에서 당신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하고 플로리안은 소리쳤다.

  야콥 멘델은 부르르 떨었지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물건을 그대로 두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고 말았다.

  “무서운 일이었어요.” 하고 스포르쉴 부인은 말했다.

  “그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그는 우뚝 서서 안경을 이마 위로 밀어 올렸어요.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지요. 코트를 입을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1월이었어도 말입니다. 모질게 추웠어요. 선생님도 전쟁이 끝난 그해 겨울의 모진 추위를 기억하실 거예요. 너무나 당황한 그는 읽고 있던 책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둔 채 사라졌어요. 처음에는 저도 그걸 보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책을 집어 그를 따라 나섰어요. 그러나 이미 문 앞에서 사라진 뒤였어요. 따라갈까 했지만 구르트너씨 때문에 겁이 났어요. 구르트너씨는 문 앞에 선 채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어요. 군중이 모여들었죠. 나는 지금까지도 부끄러워요. 전 주인 같았으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지요. 스탄트하르트너씨 같았으면 배고플 때 빵 몇 개 들어다 먹었다고 해서 그를 쫓아내진 않을 거예요. 오히려 얼마든지 먹으라고 했을 거예요.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영악해졌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손님이었던 사람을 그렇게 간단히 내쫓다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짓은 하나님 앞에서 대답할 성 싶지도 않아요!”

  이 선량한 노부인은 흥분한 나머지 특유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우며, 스탄트하르트너씨가 카페를 팔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막으려고 멘델은 어떻게 되었으며 그 뒤에 멘델을 다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 질문이 그녀를 더욱 흥분하게 했다.

  “선생님도 이해하시겠지만, 매일 그 테이블을 지날 때마다 자꾸만 그쪽으로 눈이 간다우. 그때마다 저는 생각하지요. ‘이 불쌍한 멘델씨는 어디로 갔나.’ 하고. 여기 있었더라면 나라도 그를 불러 따뜻하게 먹을 걸 장만해줄 수 있을 텐데 - 어디서 돈을 구해 먹을 걸 사들이고 방을 따뜻하게 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는 한, 그에겐 이 세계를 온통 다 뒤져봐도 친척이 없어요. 그리고도 세월이 얼마간 흘렀지만 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가 이제 이 세상을 하직했으며 이제는 다시 그를 볼 수 없으리라고 믿기 시작했다오. 나는 그 영혼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25년간이나 사귀어왔지만 그는 한결같이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월 달의 어느 날, 아침 7시 30분, 그때 나는 창문을 닦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며 멘델씨가 들어왔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웃거리며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어요. 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의 눈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의 두 눈을 번쩍거렸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보아버리려는 것처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수염과 피부에 뼈밖에 안 남은 형색이었어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지난 날, 여기에 있던 걸 모조리 잊어버리고 있구나, 서성거리는 모양이 꼭 몽유병자 같다. 그는 구르트너씨에 의해 수치스럽게 쫓겨난 것도, 저 빵 사건도 모조리 잊어버린 것이구나.’ 다행히도 구르트너씨는 출근하기 전이었고 수석 웨이터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나는 멘델씨에게 달려가 주의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일에 저 악당을, (하고 그녀는 누가 엿듣고 있을까봐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고쳐 말했다), 아니, 구르트너씨 말입니다, 또 만났다간 또 한번 길가로 쫓겨날 판이거든요. “멘델씨” 하고 내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무서운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해낸 것 같았습니다. 그는 기가 질려 떨기 시작했어요. 손뿐만 아니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와들와들 떠는 것이었어요.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으나, 나가자마자 포도 위에 그대로 쓰러져버렸어요. 우리는 전화를 걸어 엠블런스를 불렀습니다. 같이 온 간호부는 그가 고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사는 양폐렴(兩肺炎)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카페 글루크에 왔을 때부터 그랬지만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는 꼭 몽유병자처럼 카페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30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앉던 책상이 고향처럼 그의 발길을 끌고온 것이랍니다.”

  이 이상한 사람, 멘델을 마직막까지 기억하는 두 사람, 스포르쉴 부인과 나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이 갈라시아의 책장수에게서 최초의 정신 세계에 모든 것을 바쳐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카페 화장실의 청소부이며 평생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한 이 늙은 여자는 우연히 멘델을 알게 되어 25년간이나 오버코트를 손질해주거나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었다. 우리 두 사람 역시 묘한 인연이었다. 그러나 스포르쉴 부인과 나는 버려진 그 대리석판의 테이블 앞에서 우리가 나누는 잊혀진 공동의 추억담으로 꽃을 피웠다. 모두가 사랑스러운 추억들이었고 우리들의 옛이야기는 언제나 일치했다. 이런 이야기 도중에서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내 정신 좀 봐. 구르트너씨가 내쫓을 때 그가 책상 위에 펴두었던 책은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어요. 어떻게 할까 망설였지만 아무도 그 책을 찾는 사람이 없어서 큰마음먹고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있었다오. 잘못한 건 아니지요, 선생님?”

  그녀는 자기 일에 필요한 도구창고로 달려가 책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책과의 대면은 한 인생의 조그만 아이러니와의 대면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고서 수집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하인의 탁월한 저서였다. 사라져버린 마술사의 유산인 이 책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기도서가 아닌 바에야 어떤 인쇄물이든 그렇게 철저하게 낡아 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 표정은 당황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고귀한 영혼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랐으니까.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책은 제가 가져도 좋은 거지요. 선생님!”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물론입니다. 간직하십시오. 우리의 옛 친구 멘델은 자기 책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겸손하고 단순하게 이미 고인이 된 학자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늙은 부인에게 나 자신을 비교해보고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배우지 못한 여인은 적어도 추억의 징표로 그의 책을 가지고 있지만 소위 교육받은 사람이며 작가라는 나를 몇 년 동안이나 그 멘델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적어도 한 사람이 책을 쓴다는 것은 사후에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인생의 가혹한 운명인 무상과 망각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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