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주은래 발언 전문] "영토침탈행위, 조상을 대신해 조선에 사과"

 "고조선-고구려-발해 모두 한국역사" 
  [주은래 발언 전문] "영토침탈행위, 조상을 대신해 조선에 사과"
  
 
  프레시안/ 2004-08-13 오전 9:58:38   
 

  모택동(毛澤東)과 함께 중국혁명의 양대 지도자로 꼽히는 주은래(周恩來:1898-1976) 전 중국총리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하며, 중국의 팽창주의로 고대 한국의 영토가 침탈된 데 대해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 발언록이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은래 전 총리는 중국인들이 마오쩌뚱보다 더 존경하는 역대 최고지도자로,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현재 중국지도부가 추진중인 <동북공정> 등 역사왜곡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지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역사"
 
  이같은 사실은 현재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연수중인 설훈 전 의원이 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중국연수중 발굴한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을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설훈 전의원에 따르면, 이 문건은 주은래 전 총리가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발언을 기록한 것이다.
 
  주은래 당시 총리는 우선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주은래 총리는 구체적으로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말해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서기 644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시 양만춘 장군이 안시성에서 이를 격퇴한 일을 언급함으로써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또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주은래 "영토침탈, 조상을 대신해 당신들에게 사과"
 
  이처럼 중국 국수주의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질타한 주은래 총리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 행위를 사과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이같은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이처럼 주은래 총리 생전에는 한-중 고대사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분명한 인식이 존재했기에 역사왜곡 갈등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중국지도부는 경제력 팽창에 고무돼, 선배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정부차원의 조직적 역사왜곡에 나서 큰 갈등을 빚고 있다. 현 중국지도부가 자신들의 역사왜곡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우선 중국인민이 최대 존경하는 주은래 총리부터 '인민재판'에 붙인 뒤 역사왜곡 행위를 할 일이다.
 
  다음은 설훈 전의원이 공개한 주은래 총리의 발언 전문이다.
 
  주은래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금년(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환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제2시기는 혁명의 시기이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가 우리를 침략해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고, 일본은 또다시 동북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이 시기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은 혁명적 동지관계를 구축했다. 이 단계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풍부하다.
 
  큰 단계로 구분해 보면, 10월혁명 이전은 우리나라 구민주주의혁명의 시기였다. 조선 또한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이 때는 갑오전쟁에서 10월혁명까지 20여년의 시기였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은 바로 하얼빈역이었다.
 
  10월혁명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두 나라에서는 공산당이 탄생했으며, 그 당시 조선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던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왔다. 조선동지들은 중국의 각 지역 어디나 있었지만 동북지방에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이후 중국혁명의 모든 역사단계에 조선동지가 참가하게 되었다.
 
  최용건(崔庸健)위원장 말에 의하면, 당시 조선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와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고, 이 성공이 조선혁명을 성공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10월혁명 초기 조선동지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군사학을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동지들이 중국에 와 군사관련 업무를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방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운남강무당이 있었다. 이후 손중산 선생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적잖은 조선동지들이 입교하였다. 그 때가 1924-1927년으로 최용건, 양림동지가 당시 교관이었고 많은 동지들이 학생으로서 군사학을 배웠다. 대혁명 때 혁명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던 날 밤 광주(广州)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조선동지들이 희생되었다. 최용건 위원장은 그 때를 아직도 기억하는 데, 당시 160여명의 조선동지들이 광주 사하(沙河)와 한하(韓何)의 진지를 결사적으로 지켜내다 거의 대부분이 용감하게 희생되었다. 당시 최용건 동지가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차례 합의를 거쳐 광주의 그 진지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광주열사능원리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중국대혁명 실패 이후 즉 1928년 이후 조선동지들은 중국에서 비밀공작에 많이 투여되었는데, 상해, 동북 등지의 노동운동에 참가하거나 농민운동과 학생은동에 뛰어들었다.
 
  확실히 10월혁명 초기에는 조선동지들이 이런 혁명사상을 품고 중국에 왔다. 공개투쟁, 비밀투쟁, 정치투쟁, 무장투쟁을 막론하고 모두 참가하여 중국혁명을 도왔다. 중국혁명투쟁이 승리한 이후, 다시 조선혁명 승리를 추동하였다. 1931년 "9.18"포성 이후 상황이 변했다. 조선은 일본식민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동북 역시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는 비록 동북에 괴뢰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적일 뿐이고 실제로는 조선과 동북은 모두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동북에서 시작한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동지가 중국혁명투쟁에 참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공동투쟁이며 연합투쟁으로 이것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내가 이번에 새로 얻은 지식이다. 당시 김일성동지 영도하의 항일유격전쟁은 역사적 상황과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연합투쟁이고 공동투쟁이라 인정해야 한다. 동북항일연합군과 같은 경우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일연합군으로 해석해야 되고 사실 역시 이와 같다.
 
  내가 이번에 최용건위원장과 이효순(李孝淳)부위원장 그리고 박외상(朴外相)과 함께 동북 하얼빈, 장춘, 심양 등을 가서 항일혁명의 노전우들과 얘기를 통해 이런 견해를 실증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세가지 노선이 있었는데, 왕명(王明)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의 지도아래 소위 당시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방침은 바로 도시폭동이었다. 그러나 도시에는 역량이 안됐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동시에 농촌무장투쟁도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동북농촌에서 일어난 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조선동지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당시 동북으로 망명한 조선동지들은 농촌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농민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거나 혹은 조선족 거주지역에 살았다. 그래서 농민을 봉기시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가 용이했다. 그리하여 "9.18"에서 항일전쟁 승리 때까지 10여년간 많은 항일부대가 창설되었고 거의 모든 부대에 많은 조선동지들이 있었다.
 
  현재 이 역사단계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항일연합군은 중국과 조선 인민의 연합군이고 기념관은 모두 이 같은 해석에 따른 것이다. 과거처럼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조선동지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이며, 더우기 조선동지를 중국의 조선족으로 간주하면서 다수가 조선에서 망명해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며 왜곡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망명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은 혁명대오 중에 나타난 대국쇼비니즘 잔재의 하나이다. 만약 항일전쟁 역사단계를 새롭게 쓰려고 한다면 동북에 참가했던 항일연합군에 대해 --- 북경에도 있지만--- 연구반을 조직하여 어떤 때는 조선에 가서 관련자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제의한다. 반대로 조선동지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공동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만 역사적 진실성을 회복하고 전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역사단계 이외도 해방전쟁과 반장개석 투쟁과정에서도 많은 조선족동지를 흡수하여 조선사단을 구성하였는데, 항미원조(抗美援朝) 이후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중국의 해방전쟁에 영웅적으로 참가했고, 이후에 또 항미원조에 참가하여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혁명역사 단계에서 쌍방은 서로를 지지한다. 또한 조선동지가 중국동지의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중국동지가 조선을 지원하는 것보다 많으며 시간 역시 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의의에서 본다면, 혁명박물관과 군사박물관에 진열된 물건들은 아직도 더 보충되어야 하며 수정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지난번에 최용건위원장을 모시고 동북에 갔을 때, 나는 박물관을 관장하는 동지를 찾아 이미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제3시기는 현재를 말하는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심화단계에 있어 보다 서로를 배우고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상 뿐만 아니라 혁명투쟁중에서 쌍방은 이미 제국주의와 현대수정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경험했고 양국은 정확히 인식의 일치와 행동의 일치를 경험했다. 더 적확하게는 피로써 맺어진 전우이자 동지적 우의를 맺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여기고 있는데, 중국의 전선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진영의 동방전초기지로 간주하고 있다. 당신들은 당연히 중국을 당신들의 후방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특히 동북은 당신들의 근거리 후방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배우고 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와서 참관하거나 우리들이 여러분들에게 가서 참관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미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다. 다만 지금 목전의 일을 보면, 여러분들이 역시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다. 방금 우리는 예를 들면서 그들(중국과학원 □□夫원장을 가리키며)을 비판하지 않았느냐? 여러분들은 20여명이 42일 동안 방문했는데, 그들은 겨우 7명만이 조선에 가서 30여일만 머물렀다. 바로 이런면을 여러분에게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 동북국, 동북3성 성위원회가 금년 겨울 참관단을 구성하여 여러분에게 찾아가서 도시공작활동과 농촌활동, 당내 활동, 총노선, 천리마운동, 청산리활동 방법과 대안활동체계를 배울 것을 결정했다.
  우리 동북의 동지들이 여러분들에게 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동북에 사람을 파견해 연락을 직접 취할 수 있다. 평상시에 이렇게 밀접한 연결이 있어야만 일단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간주하고 여러분들도 우리를 여러분의 후방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야만 장벽이 생기지 않고 협조가 원활하지 못한 결함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당 공작활동이나 도시공작, 농촌활동, 공업교통공작 뿐 아니라 여러분의 분화활동 역시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이번에 조선대사관 대사와 이야기를 마쳤는데, 영화공작단을 파견해서 적색선전활동가의 창작경험을 배우고, 농촌에 가서 진정으로 배우고, 이선자(李善子)의 진짜 이름인 이신자(李信子) 방문하고, 청산리에 가서 또한 배우고자 한다. 이런 사본과 영화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선인민의 공작을 배우고, 힘들지만 소박한 농촌생활의 작풍과 설득경험 그리고 생산투쟁과 계급투쟁의 경험을 배우고자 한다. 그런후에 연극무대와 은막에 선보이려고 한다. 중국예술가의 소개를 통해 중국인민에게 조선인민의 실제생활과 전투생활을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들의 노래와 춤 또한 배울 가치가 있다. 여러분들은 주체사상으로 음습한 기풍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의 춤과 노래는 민족화가 그렇게 강하지 못해 좀 잡다하고 뒤죽박죽인 편이다.
 
  최용건위원장이 동북의 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세차례의 만찬을 준비했는데 장춘에서 가장 실패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는데 조선의 풍격같지가 않았다. 또한 "동방홍(東方紅)"을 들어도 서양풍이 너무 강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홍군 춤"이라는 무도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노인과 젊은이가 등장했다. 이를 민속무용으로 알았으나 사실은 발레였다. 젊은 홍군은 여성이었는데 발을 뾰쪽하게 세우는 춤이었으나 이도저도 아니었다. 조선동지들이 보고나서도 반응이 시원잖았고 우리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진이 원수가 문화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었다.
 
  조선동지가 매우 솔직하게 우리의 어떤 것들은 주체사상이 없이 동쪽에서 하나 끌어들이고 서쪽에서 하나 가져온 것에 불과하며, 침구나 먹거리 또한 옛것, 새로운 것, 중국 것, 외국 것이 구분되지 못하고 중구난방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지금도 대외문화위원회도 어떤 동지가 있는데, 가지고 나갈 작품에 주체사상이 없어 밖으로 가져가지 않으려고 한다. 많은 동작이 있기는 하지만 주의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면서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조선양국 문화협정>의정서가 체결됨에 따라 우리는 가무극단을 조선에 파견하려고 한다. 하나는 역사혁명사극으로서 태평천국시대에 상해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이로 <소도회(小刀會)>이다. 여기는 당연히 시대풍격이 있다. 다른 하나는 신화인데 유럽의 신이 아닌 중국의 신으로 역시 풍격이 있다. 우리의 신의 모습은 하느님과도 다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의 문화예술은 많은 부분이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또하나의 문제는 문자에서 발생하는 간극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다. 나는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황장엽(黃長燁)동지가 이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조선글에는 세 종류의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평양과 서울 그리고 연변이 그것이다.
 
  평양의 표준은 당연히 전형적인 표준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선동지 조선인민이 모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이 이 표준에 따라 말하고 문장을 써야 한다. 평양에도 주음(注音)이 있지만 이미 한자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과거에 인용했던 여러 중국성어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 인용하는 조선성어는 민족화되었다.
  서울의 표준은 여전히 한자이다. 남조선은 여전히 한자로 된 책을 읽고 중국성어 인용을 좋아해서 북조선인민이 알아듣지 못한다.
 
  연변의 표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부 말하는 방법조차 바꿨다는 데 있다. 듣기로는 조선말과 일본말이 말하는 방법에서 상당히 가깝다고 한다. 예를 들면 "我吃□"을 "나는 밥을 가지고 먹는다"고 한다. 연변말은 중국말을 받아들여 변화되어 왔다. 어떤 말은 이렇게 중국말처럼 바뀌었다. 두번째는 일본통치시기에 소위 협화어라는 일본인이 썼던 한자가 복잡하게 섞였기 때문에 연변의 말이 깨끗하지 못하다. 세번째는 보다 많은 것은 많은 중국한자성어를 끌어다 쓰다보니 소리음마저도 중국음으로 발음한다. 이렇게 되어 조선동지들조차도 그들이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가 <홍기>라는 잡지를 조선말로 출판해서 평양에 가지고 가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특히 경제용어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문자 이 문제를 해결해 말하는 것을 알아듣게 해야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늘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을 제대로 통역했는지 하는 것이다. 역시 여러 동지를 평양에 파견에 심도있게 배우도록 해야겠다. (대외문화위원회 증영(曾瑛)동지를 가리키며)당신들이 연출하는 가무극의 자막은 반드시 평양의 표준적인 사람을 찾아 번역토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제3시기의 관건은 말하고 쓰는데 있다. 배워서 통하지 않으면 손해다. 그래서 먼저 번역대오를 정비해야 한다. 조선동지와 내왕하려면 반드시 평양표준을 따라야 한다.
 
  여러분은 이번에 자연과학을 참관했는데 대략 적잖은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자연과학 자체는 계급성이 없다. 다만 우리들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을 대하는 태도와, 여러분을 접대하는 일 그리고 유람과정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대국쇼비니즘 잔재가 남아있는지 여부를 살피도록 해 주었다. 생활, 문화오락에 주체가 조금 없이 표현된 점이나 말이 평양표준에 맞지 않는 것 등은 아마도 다음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만 대국쇼비니즘이 없기를 바라지만 개별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는 이를 면하기 어려움도 있다. 여러분이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서로 비교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태견/기자
출처/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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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이라크 전쟁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유리병편지>사회/ No. 116. 이라크 전쟁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바람구두

대한민국은 지금 새로운 역사 앞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뉴스에서 고건 신임 총리가 전화 인터뷰를 통해 "한미동맹의 강화와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때와 마찬가지로 공병과 의무 부대를 중심으로 이라크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며 UN결의 이전에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동의하는 의사 표명을 해야할 것이다." 라는 요지의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공병과 의무, 수송부대의 파병은 물론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보병부대나 기갑부대, 전투헬기 부대를 파병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일 게다. 그러나 이는 공병과 의무, 수송 부대를 엄호해줄 경비부대의 파병도 동시에 의미한다. 문제는 우리가 전세계 양심적인 시민들이 부도덕한 전쟁이라 지탄해 마지않는 이라크 전쟁에 우리 병사들을 내보내야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정치, 사회적 현실이 이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앞장서서 UN 결의 이전에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외교를 해야할 것인가?

며칠 전 친구와의 통화 중에 나는 이것이 21세기에 재현되는 "제2의 아편전쟁"이라 했고, 그는 "무장 해제" 하라 해서 무장해제했더니 그래도 안되겠다며 카르타고를 침공해 초토화시켜 버린 "제3차 포에니 전쟁"에 비교했다. 그렇다. 이라크 전쟁은 그 전쟁의 부도덕함으로는 "아편전쟁"에 비유될만하며 그 전쟁의 잔혹함과 냉정함, 그리고 치사함으로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버금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 전쟁 위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전쟁의 미국측 명분 중 하나이자 뿌리가 된 걸프전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중동에서의 국지전 - 석유(Oil)자원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각축, 걸프전

중동의 국경선은 19세기 유럽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려졌다. 그리고 한 때는 서구 유럽이 아랍의 독립을 지원한 적이 있다. 우리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유럽(그중에서도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위해 아랍의 지원이 필요했으므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식민지였던 아랍의 독립을 지원했다. 1915년 아랍의 총독이었던 맥마흔은 전후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1917년 전쟁에서 유태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민족 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것이 발포어 선언이다. 한편 1916년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맺는데 이것은 전후 시리아와 쿠웨이트를 연결해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갖는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이 전통적으로 서구에 대해 갖게되는 반감의 뿌리는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이기는 하나 근대에 이르러서도 지속되는 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중동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두 차례의 중요한 정치적 혁명을 겪었다. 1958년 이라크에서 영국 제국주의를 대변하던 왕정이 붕괴되는 군사혁명이 있었고, 1979년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정이 회교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강화를 위해 값싼 원유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미국은 중동에서 안정적인 석유자원을 공급해 줄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후 고조되는 아랍 민족주의는 서구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자국의 석유자원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도모하고자 했다. 1951년 이란의 총리가 된 모하메드 모사데그는 영국-이란석유회사(현재 브리튼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이란의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며 국왕의 전제적인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이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1953년 미국 CIA의 지원(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2000년 3월 17일.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올브라이트는 미국-이란 협회 연설에서 미국이 1953년 좌파 성향의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미 CIA가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고, 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편을 드는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을 받은 장군 자헤디의 군부쿠데타를 통해 실각하고 만다. 그는 체포·구금되었다가 1956년 석방된다.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중간의 이해가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자 미국은 중동지배 전략을 간접지배방식으로 전환하고, 이 지역에 다국적 석유기업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보수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이라크 왕정 역시 이런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1958년 압둘 카림 케심 대령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붕괴된다. 군사쿠데타 당시 이라크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이라크 공산당이었다. 이 시기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이집트 등에서 개혁 시도는 1차적으로 석유산업의 국유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이라크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나간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바트당이었다. 바트당은 1963년 짧은 집권 이후 잠시 실각하기도 했으나 우익 군부와 연대하여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이라크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주의'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바트당은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이라크에서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이었으나 1973년 쿠르드족 진압을 위해 일시적으로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한 기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철저히 실천에 옮긴 일은 공산당 탄압이었다.

1978년 이란에서 미국과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던 팔레비 왕정이 민중혁명에 의해 붕괴된다. 이란 팔레비 왕조의 제2대 국왕이었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석유 국유화와 왕권 제한을 추진하던 모사데그 총리와 대립하다가 1953년 로마로 망명했으나 망명 3일 뒤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귀국한다. 그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통한 공포정치와 미국과 군사협정을 맺으며 급격한 서구화(백색혁명)을 추진한다. 중동 지역은 세계 석유 수요의 60% 이상을 공급하는 현대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연료 구실을 하고 있다. 미국은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중동의 급격한 변혁을 원치 않았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립을 원한 아랍 민중의 이해를 배신하고 그들의 파이프라인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보수 왕정과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해왔다. 이란에서의 민중혁명은 미국이 과소 평가해 온 아랍 민족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해 미국은 크게 당황한다. 그동안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던 보수왕정을 통해 저유가 시대의 호황을 누리던 세계 경제는 급전직하 곤두박질쳤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의 걸프만 일대의 왕정 국가들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 자본주의는 이란 회교 정권을 제거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고 이 지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여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을 일으킨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아랍 왕정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이라크에 무기를 수출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8년에 걸친 전쟁이 이들 국가에 남겨준 것은 막대한 사상자와 전쟁 부채였다. 이 전쟁을 가리켜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슬람 내부의 전쟁,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수니파 국가인 이라크의 전쟁으로 표현했으나 이것은 전쟁의 원인을 오도한 것이다. 실제 이라크의 종교 분포는 시아파가 55%, 수니파가 20%, 쿠르드족이 20%로 되어있다. 다만 이라크의 지배 권력인 바트당의 기반이 수니파였고, 급격한 도시화로 농촌에 뿌리를 둔 대다수 시아파 농민들의 삶의 물적 토대가 붕괴되면서 이라크 내에서도 이슬람 민족주의의 움직임이 불어오자 이런 내적 긴장을 외부로 발산한 것이다. 8년간의 소모전이 끝난 뒤에 이란과 이라크에 남은 것은 폐허였지만 민중의 의지를 토대로 수립된 이란의 이슬람 정권은 호메이니의 사후 유연한 정책을 바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갔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독재를 강화시키는 일환으로 아랍 민족주의를 다시 들고 나오면서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중동 지역의 국경선은 석유 자원을 탐낸 서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을 부추겨 독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투르크의 패배로 독립한 이들 국가들은 다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보호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보호국, 독립국을 오가게 된다. 쿠웨이트 역시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오래 전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동일한 행정구역상에 속하는 등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지역에서의 석유 자원을 탐낸 영국에 의해 분리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이라크의 후세인은 자신을 아랍민족주의자, 반제국주의자라고 부르며 쿠웨이트 알 사바 왕가를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며 아랍민족주의의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1990년 8월 개전 5시간만에 쿠웨이트를 완전히 장악한다. 한동안 미국은 이런 이라크의 영토 확장욕을 비밀리에 부추겼으나(1990년 쿠웨이트는 이라크 영토와 연결된 지역에서 암암리에 원유를 뽑아냈다.) 쿠웨이트 침공 일주일 전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에프릴그라피스는 사담에게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훈령을 받았다. 미국은 이라크-쿠웨이트 국경분쟁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 없다"고 여러번에 걸쳐 거듭 밝혔다. 그리고 침공 이틀 전 국무차관 존 켈리는 "미국은 쿠웨이트 방위의 감시자가 아니다"라고 하원에서 강조함으로써 사담에게 청신호를 보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이라크는 새로운 국경설정안을 포함해서 여러차례 협상제의를 했으나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44일간의 단기전에서 이라크 군인 10만 명(그것도 대부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군인들)이 전사했고, 민간인 약 20만 명이 사망해서 모두 30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이에 비해 동맹군은 미군 148명, 영국군 47명을 포함해서 모두 211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마저도 1/3은 미군의 오포 공격으로 인한 것이다. 걸프전 후 국제연합식량기구(FAO)의 1995년 보고서에 의하면 이미 56만명의 이라크 어린이들이 사망했고, 국제보건기구(WHO)는 현재 이라크에서 아이들의 불필요한 죽음이 6분마다 1명꼴로 진행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에는 "어떤 전쟁도 시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대상은 공격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미국은 이라크의 식량부문과 농경지, 상수도, 댐, 발전소 등 사회 전부문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다. 미국은 UN을 통해 신속하게 이라크 제재를 결의하고 이라크의 패권주의와 아랍민족주의에 위기를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일부 아랍 국가까지 포함된 33개국의 다국적군을 편성 1991년 1월 17일부터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한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그 뒤 1백 시간의 지상작전을 통해 지상작전 개시 4일 만에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걸프전은 베트남전 이후 실추된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한 전쟁이자 미국이 앞으로 추진할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이 TV 수상기를 통해 안방까지 전쟁의 참상이 생생히 방영된 결과 반전여론이 조성돼 전쟁에서 패했다고 보고, 걸프전 전기간을 통해 언론 보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걸프전쟁에 나타난 미국 언론통제전략의 실상을 연구한 룬 오트슨(Rune Ottoson)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3가지 언론통제전략을 처음부터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가능한 언론을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2)동시에 가능한한 오랫동안 취재, 보도를 할 수 없도록 하고 3)최대한의 보도 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 미군 당국은 엄밀한 선발과정을 거쳐 미국과 세계에서 특파된 약 192명의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들을 몇 그룹으로 나눠 각각 다른 미군기지에 주둔시켰다.  전세계 175,000명의 기자를 대표하는 국제기자연맹(IJF)은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현재 실시하고 있는 기자풀제는 명백한 언론 자유 침해이다. 또한 중요한 정보는 차단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비영국, 비미국 기자들을 차별하고 있다." … 걸프전 당시 세계 방송사에서 방영된 미군에 의한 바그다드 군사시설 정조준 폭격장면이 미군당국에 의해 신중하게 선택된 방영물이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방송은 이 전쟁에서 미군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이라크 군사기지만 포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라크의 무고한 국민들이 얼마나 미군의 포격에 희생됐는지는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십자사의 조사로는 걸프전으로 이라크의 시민 15~20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 김창룡, 「신문의 2001년 미국테러사건보도와 문제점에 관한 연구」에서)했다.

또한 이 전쟁은 철저한 하이테크 전쟁으로 이라크 사망자 15만 명에 비해 다국적군 사망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걸프전의 결과로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오사마 빈 라덴이 '알 카에다'를 건설한 이유를 보자. 그는 테러 조직 알 카에다를 만든 이유 중 하나로 성지 메카가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현실을 들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쿠웨이트의 사바 왕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위축돼 걸프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명실상부한 의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재산피해는 750억 달러, 전쟁 전 1,000억 달러 이상의 해외자산은 550억달러로 감소했고, 계속되는 다국적군의 주둔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돼 1997년까지 경제성장률은 1%였다. GDP의 12.8%인 35억 달러를 첨단 무기 구입 등 국방예산에 쏟아 부으며 전력강화에 힘쓰고 있다. 그들이 구입하는 무기의 대부분이 걸프전을 통해 놀라운 성능을 입증한 미국제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중동 지역에서 긴장이 유지되는 동안 오일달러는 계속해서 무기를 구입하는데 지불될 것이다.

걸프전의 전후 처리 문제에서 불거져 나온 대량살상무기 파괴와 명분 없는 전쟁 도발

걸프전이 종결된지도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지금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였던 부시 대통령이 이끌었던 전쟁은 개전 초판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군의 정예 공화국 수비대를 휩쓸면서 전쟁이라기 보다 대량 학살극에 가까울 정도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초토화시켜 버리는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의 애초 목표였던 쿠웨이트와 이라크 국경선의 재확립에는 성공했다. 그들의 애초 계획에는 사담 후세인의 축출도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후세인 현 이라크 대통령의 축출 이후에도 그를 대체할 만한 정치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친미적인 세력으로의 정권 교체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사담 후세인의 권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우리는 물론 사담 후세인이 결코 훌륭한 인물도, 그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대로 이라크, 나아가 아랍 민족의 지도자일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미국은 걸프전의 전후 처리에 있어 이라크의 군사력을 억제하고, 중동 지역의 평화 정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에 임의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이라크가 스스로 대량 살상 무기를 폐기하도록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현재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겠다는 표면적인 명분은 바로 지난 10여년 간 미국이 묵인해온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이라크를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거기엔 20세기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이었던 석유 자원을,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니 좀 더 확고히 거머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숨겨져 있다. 미국은 지난 10여년간 이라크를 경제적 압박해 자체적인 붕괴를 이끌어내겠다는 전술을 구사해 왔으나 결과적으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기는커녕 이로인해 이라크 민중의 삶의 터전만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현 부시 대통령은 밥 우드워드와의 인터뷰에서 '북의 김정일에 대한 원초적인 증오의 감정을 표출하며 그가 국민을 굶주리게 하고 있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그러나 이라크 국민을 굶주리게 하는 것은 바로 미국이다. 유니세프와 세계식량기구는 UN의 경제봉쇄로 이라크의 5세 미만 어린이가 매달 4,500-6,000명씩 죽어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작 미국 언론은 자국민들에게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

이라크는 미국의 이런 표면적인 전쟁 명분을 감쇄시키기 위해 UN의 무기 사찰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이에 대해서는 UN을 비롯한 IAEA 등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유일한 명분이랄 수 있는 대량 무기 제거에 대한 이라크의 미흡한 조치가 문제라면 UN의 결의 없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전쟁이 아니라 명분 없는 테러 범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째서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려는 것인가?

미국은 지난 9.11테러로 촉발된 미 국민의 분노를 배출할 적당한 출구로 이라크를 선정했다. 이는 높아진 전세계의 반전여론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시행된 미국의 여론 조사에서도 다시금 입증된다. 미국인의 55%가 UN결의 없이 미국 단독으로 이라크 침공을 했을 때에도 이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현 부시 대통령은 내년 재선을 위해서라도 이미 군사력 배치가 완료된 상태에서 이라크 전쟁을 중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 부시가 걸프전에서 승리했음에도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지금 이 시점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재선 승리를 포기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재 이라크는 세계 제2위의 원유 보유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라크의 석유 채굴권의 3분의 1에서 2 가량을 미국계 석유회사가 아닌 프랑스계 석유회사가 가지고 있다. 프랑스가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는 원초적인 이유는 물론 프랑스 국민의 강력한 반전 의지가 뒷받침되기 때문이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자국이 보유하고 있던 이라크 석유 채굴권을 미국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정세 판단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동 전략의 기반을 친이스라엘, 반아랍에 기초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산유국들은 친미라는 정치적 기반에 의해 아랍 민중의 정치적 의지(민주화를 비롯한)를 억누르는 형태로 정치 체제를 보장받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랍의 맹주를 자임하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제거함으로써 아랍 민중에게 힘으로 유지되는 중동의 질서를 다시금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이라크 전쟁 계획

미국 역시 세계의 반전 여론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미국 내 반전 분위기 역시 지난 베트남전 이래 최대 규모로 표출되고 있음을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이번 이라크 전쟁을 사상 유례없는 고강도 전쟁으로 끌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현재 발표되고 있는 미국의 전쟁 수행 계획은 자체가 매우 비인도적인 설정 아래 놓여 있다. 미국은 자국의 반전 분위기를 염려하여 월남전 이래의 모든 전쟁에서 미국의 지상군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그들이 목적하는 바의 승리를 거두는 전략을 채택하여 실천해 왔다. 그 결과 미군의 인명 손실은 최소화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그런 전술로 목숨을 담보로 전투에 참가한 자국 군인의 인명 손실은 극소화되었으나 그로 인해 아무 죄 없는 비무장 민간인 피해가 참전 군인의 인명 손실을 상회하는 결과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라크 전쟁의 양상은 대규모 폭격에 의한 공중으로부터의 초토화 작전으로 시작될 것이다. 개전 초반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미사일 공격과 공중 폭격을 통해 이라크 측으로 하여금 이에 반항할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초전에 기세를 장악한 후 지상군을 투입하여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전쟁 계획이다. 최근 <조선일보>는 이라크 전쟁에 미군측 종군기자 진영에 자사의 신문 기자가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를 홍보하고 있다. 과연 미군의 진격에 따라 이동하며 미군의 브리핑을 받아 내 보내는 기사가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미군의 지난 파나마 침공 당시부터 미군이 얼마나 엄격한 보도 관제를 실시하고 있는지, 그들의 필요에 따라 어떻게 언론을 조작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파나마의 실권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의 집 주방에서 발견된 밀가루를 마약이라고 보도했고,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하는 전폭기의 촬영 장소와 촬영 각도까지 면밀하게 검토한 뒤 허가해주는 형편이다. 이런 형편인데 당신은 CNN이 전쟁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률이 더 큰 전쟁을 우리는 인도주의적인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전쟁을 과연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한 테러를 멈추게 하기 위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이며, 정의를 바로 세우는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국의 민간인 일부가 희생당한 것을 빌미로 석유자원의 독점을 노리는 미국의 전쟁에 희생당하는 민간인 대량 학살극에 우리는 과연 우리의 소중한 아들, 딸들을 내보내야 하는가?

과연 우리들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의 미사일인가? 아니면 미국의 넘치는 증오인가?(걸프전 당시 이라크는 이스라엘에 약 30발의 스커드미사일 공격을 가했으나 3명을 살상하는데 그쳤다. 오히려 미사일을 보고 심장마비로 죽고, 생화학무기가 장착되었을 것이라며 방독면을 오랫동안 쓰고 있다가 질식해서 죽은 사람들이 더 많다.)

"한 세대가 조용히, 그리고 무자비하게 사라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은 불구자가 되고 있으며,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이 미친 짓을 끝내야 한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끝내고, 전쟁을 끝내자.
어느 누구도 이라크 어린이들의 미래와 살아갈 권리를 짓밟을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의 더러운 전쟁에서 흘릴 피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이 개시된다면....

- 전쟁이 개시된 주 토요일 오후 2시 마로니에 공원에서 항의 집회가 있을 것이라 한다.

바람구두

윗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전쟁 지지 선언과 파병 선언은 없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노무현 대통령은 전쟁을 지지했고, 파병을 결정했다. 이제 노무현은 없고, 대통령만 남았다. 그리고 그의 참여정부에 참여한 개혁 성향의 각료들 중 누구 하나 이에 항의하여 사표를 던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전쟁 당사국인 미국에서도 이에 항의하는 관리가 있건 만 이 나라의 관료들 중엔 그만한 양심과 의기를 지닌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나는 서글프며, 우리가 그토록 비난해 마지 않던 미국,일본의 민간인 학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민간인 법정에서 전범 재판 결과 유죄 판결에 환호했던 것이 부끄럽다.

이제 우리는 전범 대통령, 전범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나의 본의던 아니던 나역시 전범인 것이다.
나는 엊그제 이 <문화망명지> 사이트에 올릴 표지 그림을 제작하다가 그만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저 불쌍한 이라크 어린이의 눈동자가 마치 말없이 나를 힐문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노트북에 고개를 처박고 정말 울고 말았다.

2003/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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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08-0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병에 대한 투표가 있었다면 저는 반대에 표를 던졌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도덕성 때문만이 아니고 (전쟁에 대한 도덕성은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것이 못 된다.) 국익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왜 국익에 전혀 도움에 안되는 전쟁에 기를 쓰고 참여하려 하는지 한심합니다. 전쟁에 관해서는 이면에 깔린 이유가 중요한데, (대부분의 전쟁은 말도 안되는 대의명분으로 시작되므로) 이에 대한 충분한 통찰력이 필요하며 위 글을 그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하느님과의 인터뷰







I dreamed I had an interview with GOD

하나님을 인터뷰하는 꿈을 꿨습니다.





"so you would like to interview me?" GOD asked.

"If you have the time," I said.

"네가 나를 인터뷰 하고 싶다고 했니?"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내가 말했습니다.





GOD smiled.

하나님은 미소지었습니다.





"My time is eternity... what questions do you have in mind for me?"

"나의 시간은 영원이다... 무엇이 묻고 싶니?"





"What surprises you most about humankind?"

"사람들을 보면 뭐가 제일 신기하지요?"





GOD answered.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That they get bored with childhood, they rush to grow up,

and then long to be children again."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지루해 하지. 그래서 빨리 자라길 바라고

그리고는 늙어서는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길 바라지."





"That they lose their health to make money...

and then lose their money to restore their health."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 버리고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 버리지."





"That by thinking anxiously about the future, they forget the present,

such that they live in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잊어버려.

마치 사람들은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않는 것 같이."





"That they live as if they will never die,

and die as though they had never lived."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지."





GOD's hand took mine and we were silent for a while.

하나님이 나의 손을 잡아 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죠.





And then I asked,

그리고 난 물었습니다.





"As a parent, what are some of life's lessons

you want your children to learn?"

"아버지로서 자녀들이 어떤 것들을 배웠으면 하시나요?"





"To learn they cannot make anyone love them.

All they can do is let themselves be loved."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단지 자기가 사랑받게끔 놓아두는 것 뿐이라는 것을."





"To learn that it is not good to compare themselves to others."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To learn to forgive by praticing forgiveness."

"용서함으로 용서를 배우기를"





"To learn that it only takes a few seconds to open profound wounds in those they love.

and it can take many years to heal them."

"사랑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눈 데는 단지 몇 초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상처가 아물기에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To learn that a rich person is not one who has the most,

but is one who needs the least."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To learn that there are people who love them dearly,

but simply do not yet know how to express or show their feelings."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도
너희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To learn that two people can look at the same thing and see it differently."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서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To learn that it is not enough that they forgive one another,

but they must also forgive themselves."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용서해야 된다는 것을."





"thank you for your time," I said humbly.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겸손히 말했습니다.





"Is there anything else you'd like your children to know?"

"당신의 자녀들이 알았으면 하는 다른 것들은요?"





GOD smiled and said...

하나님이 미소지으며 말했습니다...





"Just know that I am here."

"내가 너희와 함께 여기에 있다는 것."





"Always."

"언제나."





"Always."

"언제나."

-----------------------------------------------

당신이 정말 늘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언제나,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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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펌] '쿠데타' 주장은 용서해도 되는가

'쿠데타' 주장은 용서해도 되는가

2004. 7. 20. 중앙일보 '내 생각은'

송두율 교수 사건 이래 긴 침묵을 깨고 지난 15일 전국 대학의 철학과 현직 및 비정규직 교수 257명이 송 교수의 무죄 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탄원서를 제출했다. 철학과 교수들의 이런 행동에는 수준 이하의 논증으로 점철된 1심 판결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1심 판결문은 송 교수가 후보위원이라는 '증언'과 그가 노동당에 가입했었다는 '정황'이 있는 반면 송 교수가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다는 요지로 송 교수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결론내렸다. 이제 누가 나서서 나를 노동당 정치국원이라고 고변하더라도 그게 '아니라는' 증거를 대지 못하고, 내 행적에서 수상한 정황 몇 가지만 있으면 꼼짝 없이 정치국원이 될 것이다. 철학에서 이런 식의 추론은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다.

송 교수의 저작 활동에 대한 평가는 더욱 불합리하다. 그의 서적 대부분이 노동당 간부의 지도적 업무로 규정됐다. 그런데 그 활동이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력'이라는 것이 기막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를 읽는 국내 독자들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어렵게 하고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하는 등 대한민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즉 책을 읽는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는 게 '상당히 큰' 영향력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판결이 과연 현행 국가보안법의 취지에도 맞는가? 이 사건의 1심 판결에서 전혀 적용되지 않은 국보법의 핵심 조항으로 제1조가 있는데, 그 1항에 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2항은 바로 이런 목적의 달성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경우에만 이 법에 저촉되는 행위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달아놓았다.

자, 그럼 분명히 판단하자. 송 교수의 저작들이 국가 안전을 위태롭게 했는가? 노동당 후보위원의 지도적 업무 결과가 겨우 독자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국가 안전을 위태롭게 했는가? 아하! 우리 판사님들, 이건 개그다.

지난 3월 이화여대 김용서 교수가 200여명의 퇴역 장성들 앞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성립된 좌익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복원하는 방법에는 군부 쿠데타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게 이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탄핵으로 정국이 요동치던 정황을 고려하면 이런 발언은 송 교수의 저작 활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당장의 위험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군사 반란 및 내란 선동죄로 고발된 이 사건을 조사한 경찰 보안수사대는 자유민주주의의 정당한 절차를 명백히 부정한 김 교수의 이런 발언이 '학술 강연 목적'으로 행해졌으며 내란 선동을 의도하지는 않았다는 송치 의견서를 검찰에 보냈다고 한다.

설사 이 과정에서 김 교수가 치유 불능의 반민주적 파시스트로 확증된다 하더라도 나는 김 교수를 '처벌'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폭력을 의도해 선동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때문에 '명백하게 현존하는' 폭력적 위험이 발생하지 않는 한 그것은 김용서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다. 위험한 사상을 가진 자는 국가기관에서 '주목'할지언정 법적으로 '처벌'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바람직한 활력이 작동하지 않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쿠데타 동조 전력자들이 상당수 포함된 청중 앞에서 현 정권 전복의 길이 있다고 '분석'했을 뿐이라고 강변하는 학자도 풀어준다면 상당기간 관찰한 북한 정권의 내부를 불특정 독자에게 '공개'해 온 다른 학자를 풀어주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법 때문에 그렇게 못한다면 그 법을 없애야 한다. 그것은 김용서와 송두율을 다 같이 끌어안아야 하는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족쇄다. 그래서 외친다. 판사를 바보로 만드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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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 > 통일국호 Corea

“C-코리아, 통일조국의 지름길”
 COREA 되찾기 연대회의 첫 포럼 가져
COREA 국호개정운동의 의미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29일 오후 2시 서울 경희대 종합강의동 509호에서 열린 ‘통일국호 COREA되찾기연대회의 제1차 포럼’ 참가자들은 국호개정운동이 제국주의 잔재로부터 벗어나 민족적 자주성을 발현시키려는 운동이며 조국의 통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운동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COREA 국호개정운동은 8천만 민족의 운동

박인주 서울 흥사단 대표는 COREA 국호개정운동에 대해 “남과 북이 통일이후 구호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운동이며 남.북.해외를 아우르는 8천만 민족의 한민족 공동체를 구성하여 통일뿐만 아니라 문화공동체, 역사공동체로서 이 지구촌에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는 운동이다”고 설명했다.

첫 발제자로 나선 김승국 평화운동가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옛 국호, 지명 되찾기 운동에 대해 역사청산을 통한 통합, 통일,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의미 있는 운동이라고 평가하고 “북조선을 조센징이라 부르거나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에 대한 일본인들의 위협감을 담아 ‘북’이라 부르는 등 조선인을 폄하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의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칭하는 이름은 일본인들의 세계관을 담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 김승국 평화운동가의 설명이다.

이어 COREA란 명칭이 중립통일국가의 국호로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단일기에 COREA를 새겨 아테네 올림픽에서 사용한다면 멋진 운동이 될 것이라 제안했다.

오정윤 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COREA 국호개정문제를 역사회복과 결부지어 발제했다.

오정윤 소장은 일제시대를 살아왔던 역사가들이 사대적인 역사관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해방이후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은 친미세력들에 편승해 북한의 역사를 배제한, 반 쪼가리 역사서를 기술해왔다고 지적하고, COREA 국호개정운동을 시작으로 남북 시대사를 새로이 정리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어 “K-코리아가 과거를 상징한다면 C로 시작하는 코리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새로운 흐름을 주장하는 사람, 즉 미래의 코드”라 설명하고 기존의 친일, 반공, 친미의 역사의식과 그들 세력의 비호아래 누렸던 권력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주류가 국내문제와 주변국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COREA 국호개정운동은 고구려사를 기본 축으로 한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대륙사의 복원을 의미하며 이는 속국의식, 패배주의, 소아주의를 버리는 첫 걸음인 동시에 동북아 허브를 지향하는 움직임이란 것이 오정윤 소장의 주장이다.

COREA를 되찾아야 하는 이유는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에 맞서기 위한 것

장의균 민예총 남북문화예술교류위원장은 국호 COREA를 되찾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에 맞서기 위함이라 설명하고 인터넷이 사회전반을 이끄는 ‘신 유목사회’를 맞아 우리 문화의 원류인 유목문화의 바탕에 깔려있는 시스템을 되살리기 위해 먼저, 우리의 본디 영문 표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현석 COREA 연대회의 실무위원장은 한국사회가 시민들이 주도 하에 민주주의를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이 다시 제도권으로부터 편입되면서 ‘위로부터의 민주화운동’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하고 광화문 촛불로부터 다시금 시작되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사회의 담론들이 COREA 국호개정 문제로 모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화운동의 발전과정을 잘 계승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 주체성들을 미래에 맞게끔 재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COREA 국호개정운동을 봐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7천만 겨레가 함께 고민하는 생활 속 운동으로 자리잡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현석 실무위원장은 국호개정 문제를 북측과 함께 논의하기 위하여 북 민화협과 금강산에서 공동행사를 하자고 합의한 바 있으나 룡천역 사고로 중단되었으며, 이후 북측이 이 문제를 오는 8.15 행사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했으나 남측은 아테네 올림픽에서 단일기에 COREA를 새기고 함께 응원하는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과 북은 COREA 공동행사를 2005년 다시 제안키로 했다.

송 위원장은 이외에 서명운동 등의 일상 캠페인, 정기적인 COREA포럼 개최, COREA운동의 취지를 대중과 교감하는 교육사업, 강연회 등의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성근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사무차장은 이에 덧붙여 2003년 8월 남북학자들이 모여 학술회의를 열고 COREA가 고유 국호였으니 통일국호로 사용하자고 합의한 바 있으나 그 이후 긴밀한 협조가 이뤄지지 않아 진척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베이징 등 제3국에서 모여 학술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는 ‘전국대학생 5월 한마당’에 참가중인 학생들과 통일연대 한상렬 대표 등 시민사회단체 인사 40여명이 참여했으며, COREA 연대회의 첫 포럼을 계기로 이후 포럼을 활성화 시켜 국호개정운동이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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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07-10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북아 공정에 맞춰 고구려 역사를 중국 변방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이 시점에 (학술서에서 본 것이 아니므로 틀린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생각나서) - 고구려가 번영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타 민족 국가 번성하는 것 즉 고구려高句麗를 시기하여 고구려 대신 구句를 빼고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구는 현재 글귀paragraph를 뜻하기도 하지만 언덕의 의미로 세력의 중심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stella.K 2004-07-1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