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스크랩] 신 십계명

출처 : high blue sky

1997년에 영국 정확히 말해서 the United Kingdom에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 정권이 들어서고 학생들의 literacy(읽기)와 numeracy(셈하기)에 중점을 둔 지식 교육과 더불어 whole person education(全人敎育)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학생들의 인성교육의 신(新) 십계명 시안(試案)을 마련, 발표한 것을 신문에서 읽었다. 즉 전(全) 국가 구성원의 합의를 거친 가치(value)를 도출 하려고 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인성교육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시안을 기술하면:

1.       honesty(정직성)

2.       Respect for others(타인에 대한 존경심)

3.       Politeness(정중함)

4.       A sense of fair play(페어플레이 정신)

5.       Forgiveness(용서)

6.       Punctuality(시간엄수)

7.       Non-violent behaviour(비폭력적 행위)

8.       Patience(인내)

9.       Faithfulness(성실성)

10.   Self-discipline(극기)

 

폭력 등 온갖 범죄가 난무(亂舞)하는 작금(昨今)의 실정을 감안할 때 매우 적절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모 월간 잡지에서 무서운(?) 글을 읽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뭣 해서 나의 의견을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돈을 잘 번다고 소문 난, 몇 군데 기업 집단의 사람 뽑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가 실려 있는데, 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보다는 독한 사람이 좋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면접 시 말 하는 태도를 보면 집안을 알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하고 자기가 관상쟁이라고 덧 붙였다. 소름이 끼치는 말이다.

근래에 고용기회가 적어 대졸 청년 실업자가 늘어나서 사회 문제가 되어 있는 때니까 사람을 쓰는 측에서는 콧대가 좀 높아 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원래 얕은 내는 촐랑거리며 흐른다고 했으니까. 

 

한 국어사전에서 독하다를 찾아 보았다. (마음이) 모질고 잔인하다.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힘이 굳세다. 두 가지 설명 중 좋게 보아 후자를 뜻 한다고 본다. 그래도 위에 열거한 인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성실하고 독한 사람이라고 해야 좀 부자연스러워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또 왜 하필이면 어감이 좋지 않은 독하다는 말을 써야 하는 지도 궁금하다. 아마 이런 엉뚱한 말을 해야 매스 컴을 탈 수 있어서 일까?

또 다른 기업 집단 사람의 말-말 하는 태도를 보면 집안을 알 수 있고 미래를 예측 할 수 있고, 자기가 관상쟁이라는 말-얼머전 뉴스에 취업을 위한 성형수술이 유행이라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그 후 신문에 채용자가 선호하는 구직자의 머리스타일, 체형, 의상에 관한 구체적인 예시가 보도되어 더욱 더 나를 놀라게 했다. 이 사람들의 말씀(?)에 크게 자극을 받은 모양이다.

 

단언하건대, 이는 과장된 근거없는 말(exaggerated groundless remarks)이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우리 나라 전래(傳來)의 속담이 대변해 준다.

지금 수 백만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독한 사람이 되려고 가 아니다. 모두가 기업 집단의 돈 벌어 주는 기계 부속품이 되기 위해서도 역시 아닐 것이다. 길어서 한 시간 정도, 말 하는 태도를 보고 그 사람의 집안을 알 수 있다는 그 오만한 태도(arrogant attitude)부터 먼저 고쳐야 한다.

만의 하나, 정말 만의 하나, 그들의 말이 옳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그런 말을 함부로 뱉어내서는 안된다.

 

영국의 교육이 직면한 고민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이상적인 인성교육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독한 사람보다는 성실한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날을 고대한다. 말하는 태도를 보고 집안을 알 수 있다고 호언하는 를 벗어나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다려 본다.

 

Tact consists of how far we go when we can go as far as we want to go.(기지機智는 원하는 만큼 얼마던지 멀리 갈 수 있을 때 어디까지 가다가 중단하느냐에 달려 있다.) 말도 마찬가지다. 명사, 대명사에 토씨를 부쳐 적절히 나열하면 말이 된다. 그러나 낱말의 남용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 명심하자. 아마 지금쯤은 이런 말을 한 그들도 후회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Never judge by appearance.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라.

Appearances are deceptive.외모는 거짓일 때가 있다.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부분부정)

All are not thieves that dogs bark at.개가 짖는다고 다 도둑은 아니다.(부분부정)

 

우리 모두 위에 열거한 전인교육의 신 십계명 시안을 한 번 소리 내어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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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11-1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2: 29-31

 "The most important one," answered Jesus,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tthew 12:29-31

 

* 신 십계명이나, 새 계명 두번째나... 그게 그거 아닌가?


stella.K 2004-11-1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잘못햇어요. ㅠ.ㅠ

마립간 2004-11-20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엉, stella09님이 잘못했다고 하시니... 꺽꺽. 아닙니다. 좋은 글을 올리신 겁니다. 엉엉엉..

진/우맘 2004-11-20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마립간님 것부터....^______^
그나저나, 마태우스님이 언제 저렇게 멋진 말을 하셨담? =3=3=3

stella.K 2004-11-20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진우맘님, 이거 마태우스님 글 아닌데...?
마립간님, 저도 알아요. 근데 님 너무 귀여우세요. 힝힝.^^

진/우맘 2004-11-2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 글이 수정되었나? 마태복음 어쩌고...하는 구절이 있었는뎅???
 

* 2004년 11월 15일자 연보라빛 우주님의 <끌리는 이성>과 11일자 바람구두님의 <펫 메이너디 - 가사노동의 정치학>을 읽고 생각하는 글이 있어 올립니다. 번역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원문을 올리고 간단한 내용을 댓글에 달았습니다.

* Why I Want a Wife
    by Judy Syfers

 I belong to that classification of people known as wives. I am A Wife.


 And, not altogether incidentally, I am a mother. Not too long ago a male friend of mine appeared on the scene fresh from a recent divorce. He had one child, who is, of course, with his ex-wife. He is looking for another wife. As I thought about him while I was ironing one evening, it suddenly occurred to me that I too, would like to have a wife. Why do I want a wife?


 I would like to go back to school so that I can become economically independent, support myself, and if need be, support those dependent upon me. I want a wife who will work and send me to school. And while I am going to school I want a wife to take care of my children. I want a wife a wife to keep track of the children's doctor and dentist appointments. And to keep track of mine, too. I want a wife to make sure my children eat properly and are kept clean. I want a wife who will wash the children's clothes and keep them mended. I want a wife who is a good nurturing attendant to my children, who arranges for their schooling, makes sure that they have an adequate social life with their peers, takes them to the park, the zoo, etc. I want a wife who takes care of the children when they are sick, a wife who arranges to be around when the children need special care, because, of course, I cannot miss classes at school. My wife must arrange to lose time at work and not lose the job. It may mean a small cut in my wife's income from time to time, but I guess I can tolerate that. Needless to say,  my wife will arrange and pay for the care of the children while my wife is working.


 I want a wife who will take care of my physical needs. I want a wife who will keep my house clean. A wife who will pick up after my children, a wife who will pick up after me. I want a wife who will keep my clothes clean, ironed, mended, replaced when need be, and who  will see to it that my personal things are kept in their proper place so that I can find what I need the minute I need it. I want a wife who cooks the meals, a wife who is a good cook. I want a wife who will plan the menus, do the necessary grocery shopping, prepare the meals,serve them pleasantly, and then do the cleaning up while I do my studying. I want a wife who will care for me when I am sick and sympathize with my pain and loss of time from school. I want a wife to go along when our family takes a vacation so that someone can continue care for me and my when I need a rest and change of scene. I want a wife who will not bother me with rambling complaints about a wife's duties. But I want a wife who will listen to me when I feel the need to explain a rather difficult point I have come across in my course of studies. And I want a wife who will type my papers for me when I have written them.


 I want a wife who will take care of the details of my social life. When my wife and I are invited out by my friends, I want a wife who take care of the baby-sitting arrangements. When I meet people at school that I like and want to entertain, I want a wife who will have the house clean, will prepare a special meal, serve it to me and my friends, and not interrupt when I talk about things that interest me and my friends. I want a wife who will have arranged that the children are fed and ready for bed before my guests arrive so that the children do not bother us. I want a wife who takes care of the needs of my quests so that they feel comfortable, who makes sure that they have an ashtray, that they are passed the hors d'oeuvres, that they are offered a second helping of the food, that their wine glasses are replenished when necessary, that their coffee is served to them as they like it. And I want a wife who knows that sometimes I need a night out by myself.


 I want a wife who is sensitive to my sexual needs, a wife who makes love passionately and eagerly when I feel like it, a wife who makes sure that I am satisfied. And, of course, I want a wife who will not demand sexual attention when I am not in the mood for it. I want a wife who assumes the complete responsibility for birth control, because I do not want more children. I want a wife who will remain sexually faithful to me so that I do not have to clutter up my intellectual life with jealousies. And I want a wife who understands that my sexual needs may entail more than strict adherence to monogamy. I must, after all, be able to relate to people as fully as possible.


 If, by chance, I find another person more suitable as a wife than the wife I already have, I want the liberty to replace my present wife with another one. Naturally, I will expect a fresh, new life; my wife will take the children and be solely responsible for them so that I am left free.


 When I am through with school and have a job, I want my wife to quit working and remain at home so that my wife can more fully and completely take care of a wife's duties.


 My God, who wouldn't want a w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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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11-1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 요약 : 나는 아내이고 어머니이지만 나는 아내가 필요하다. 내가 공부를 할 때 돈을 벌고 돈을 벌기 시작할 때 청소, 빨래, 육아 등을 포함하여 집안일을 해 줄수 있는, 나를 배려해주고 같은 이유로 나의 친구를 배려해 주는, 성적 요구도 맞추어 주고, 필요에 따라 이혼이 필요할 때는 이혼까지 해 주는 아내... 누구인들 아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마립간 2004-11-17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나는 이런 남편이 되고 싶다.     마립간 저


 나는 미혼 남자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겠지요. 결혼 전에는 멋진 애인이고 싶습니다. 데이트 장소는 경치가 멋있고 맛있는 음식이 준비된 곳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애인과 시간을 보냅니다. 아내가 공부를 하고 싶다면 공부를 도와주고, 직업을 갖고 싶다면 역시 직장을 얻도록 또 직장을 얻은 후에는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줍니다. 가사는 분담을 하고 아내가 힘들어 할 때,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사를 아내 몫까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사는 청소, 육아, 요리 등. 요리 솜씨도 좋아 우리 가족은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항상 즐깁니다. 주말에 여행도 자주 가고, 취미 생활도 아내와 가족과 같이 합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여유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안정적인 수입이 있습니다.


 아내가 학교 동창회가 같은 모임이 있을 때는 일찍 퇴근하며, 아내의 몫인 가사를 전담하기도 하며, 아내의 친구들이 집에 방문했을 때는 깨끗하게 정돈된 집과 차와 과일을 대접하기도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아내의 덕택이라는 이야기까지 잊지 않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아이의 학교 공부, 친구의 관계에 대한 조언과 자녀들과 조깅, 축구 등과 같은 운동도 같이 해 줍니다.


 아내의 성적의 요구에 의해 잠자리를 같이 하지만 아내가 그럴 기분이라 아니라면 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권태기에 있다면 이벤트을 마련하고 여행을 하는 등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 어느 남자가 좋은 남편이지 않고 싶겠습니까?


stella.K 2004-11-1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님은 꼭 좋은 남편이 되실 겁니다.^^

근데 전 결혼에 대한 이상을 너무 크게 잡지는 않습니다. 내가 좀 게을러도, 살이 좀 쪄도 괜찮아. 봐 줄만 해. 건강하면 됐지 뭐.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좋은 거 같아요. 나도 같이 살면서 내 남편 화장실 가는 거 안 보고 살 수는 없잖아요.

우주님과 바람구두님이 뭐라고 쓰셨는지 모르겠는데, 부합이 되는 댓글인지 모르겠습니다. 흐흐.

아, 맞다. 님이 제 생일에 보내 주신 책 조금 조금씩 읽고 있어요. 요즘 책 읽을 게 넘쳐나서 아주 천천히 읽고 있다는...ㅠ.ㅠ




마태우스 2004-11-1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야 마립간님, 정말 좋은 남편이세요!!

호랑녀 2004-11-1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했죠.

나도 마누라 있었으면 좋겠다. 야근하고 늦게 들어가면 따뜻한 미소와 함께 맞아주고(아이들 숙제는 내가 신경쓸 필요 없이 이미 마쳐져 있고), 집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으며, 나는 마치 껍질을 벗듯 훌훌 벗어던지고 따뜻한 물이 미리 받아진 욕조에서 몸을 푼 다음 침대로 들어가는...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고, 나는 그 밥을 맛있게 먹고 (치울 걱정 없이) 출근하는...



마립간님... 저는 진짜로 아내를 원하시는 글을 올리신 줄 알았습니다.

마립간님처럼 생각하시면 오히려 결혼생활이 힘들어지십니다.

결혼은 현실이라, 아이들 빽빽 울어대고, 김치국물 묻은 마누라는 바가지 박박 긁어대며, 욕실엔 긴 머리카락 수채구멍에 엉켜 있고, 집값 대출금, 카드값 갚을 걱정에 월급날도 즐겁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고 아이들을 보면서 살아가는 뭐 그런 거던데요?

마립간 2004-11-17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저는 호랑녀님 서재에 드를 때마다 호랑녀님이 댓글에 쓰셨던 호랑녀님 후배 생각이 납니다. 그때 저의 감탄사는 '세상에 그럴수가'가 아니고 '그렇구나, 그런 것이었구나!'였습니다. 아마 평생 못 잊을,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하얀마녀 2004-11-1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하나님, 어느 남자가 좋은 남편이지 않고 싶겠습니까? <- 마립간님은 분명히 그리 되실거에요. ^^

수수께끼 2004-11-18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는 다른 생각들이셔서 잘못 말씀드렸다가는 몽둥이 세례를 받을것 같지만....마립간님 그 어느 남자도 남편은 되어도 좋다거나 만족한 남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결혼은 반쪽의 결합이라고들 합니다만 그 반쪽이란 최소한 같은 형태의 반쪽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그라미면 동그라미의 형태로...세모면 세모의 형태끼리...그리고 네모는 네모의 형태라야 서로를 포용할 수 있답니다. 비록 그 크기가 다르다 한들...같은 형태라면 누가 더 크던 큰 가운데 작은것을 담을 수 있으니까요...

반대로 동그라미와 세모라고 한다면 동그라미던 세모던 다른 형태를 껴안고 보듬으려면 그 크기가 엄청나야 하겠지요...

공으로 치자면 탁구공은 비슷한 크기의 골프공 정도의 반쪽과 만난다면 좋을 것이고 농구공은 또 비슷한 크기의 축구공의 반쪽이 만난다면 어느 정도 갈등의 폭이 좁아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들 말하듯 누가 좋은 남편, 사랑받는 아내가 되고 싶지 않겠습니까만....결혼전의 이상을 버리고 삶속에서 함께 고락을 나누지 않는다면 아무리 부부라는 이름으로 맺어진다한들 결국은 영원한 철길의 행로를 걷게 될것입니다.

보들레르의 말처럼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면......저 같으면 하지 않고 후회를 하는 쪽을 택할것 같습니다. ^^~ 그래도 님은 좋은 남편이 되실수 있으실겁니다~~

sweetmagic 2004-11-19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건 퍼가야 한다는 !!!! 그리고 추천해야 한다는 !! ^^

파란여우 2004-11-22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의 댓글 같은 그런 남자분 있으면 소개 시켜 주세요. 만날 용의 아주 많습니다.^^

연우주 2004-11-22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시네요. 저도 마립간님 댓글 같은 분 소개시켜 주세요..ㅋㅋ

마냐 2004-11-22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매직님 방에서 퍼갔는데, 마립간님 요약도 마립간님 버전도 넘 멋잇어요....(속으론, 저런 남편이 가능할까....마립간님이 결혼한뒤 5년쯤 될 무렵, 싸모님께 여쭤봐야하는거 아닐까...싶은 딴지정신도..^^;;)

마립간 2004-11-2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女宇님, 저의 서재에서는 처음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희망사항을 쓴 것이므로 해당사항이 없고 주위 여자에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고 파란女宇님과 연보라빛 우주님을 위해 남자에도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

마냐님, 제가 결혼하게 되면 안해에게 꼭 물어봐 주세요.
 
 전출처 : 바람구두 > 박노해 - 이불을 꿰매면서

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 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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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여성해방’시로 평가받는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는 부부가 같이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담당해온 아내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절절히 읊고 있다. 이 시는 ‘당시 남성으로서는’ 선진적이었지만, 시의 주된 내용은 “앞으로는 내가 이불을 꿰매겠다”가 아니라 “나를 깨우쳐준 아내에게 감사한다”이다. 시의 화자는 ‘주인’과 ‘노예’의 자리를 바꾸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주체의 성찰과 각성을 위해 타자의 ‘훌륭함’을 동원하고 찬양한다. 이미 많은 남녀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적 성별 관계의 특징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기대라는 남성의 이중 시선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처럼 이 시는, 여성을 착취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여성에게 의존적인 한국 남성 무의식의 ‘80년대 진보 버전’이다.

얼마 전 미혼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증명되었듯이, 한국 남성들은 현모양처형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모양처는 기본이고, 현모양처에다 똑똑하고 돈 잘 버는 여성을 배우자로 원한다. 아마 한국 남성의 여성 팬터지가 가장 잘 재현된 티브이 드라마는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다모>일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밥 잘하고 정숙하면 됐지만,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밥만 잘해서는 어림도 없다. 밥 잘하면서 돈도 잘 벌고, 정숙하면서도 섹시해야 하며(물론, 섹시해야 되지만 섹스를 해서는 안 된다), 예쁘면서도 지적이고, 똑똑하면서도 겸손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앞에 나서지는 말아야 한다. 드라마 <다모>의 여주인공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며, 게다가 무술까지 잘한다.

성별 분업은 여성의 경험을 드러낼 언어가 없어서 서구·남성의 언어인 실증주의를 빌린 표현이다. 성별 분업은 남자는 ‘바깥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계급 문제로 인한 남성 집단 내부의 차이로 인해, 생계 부양이라는 성역할을 모든 남성이 잘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성의 일이라고 간주되는 공적 영역의 임금노동을 못하는 남성은 많지만, 가사노동에서 제외된 여성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여성들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두 영역에서 이중노동을 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억압받는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논리도 억압 세력의 이해 관계에서 구성된다. 앞의 시에서처럼, 타자의 고통은 주체를 위해서 제기될 때만 받아들여진다. 여성의 노동권은 생존권 차원에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노동력 활용 차원에서 주장되거나(활용할 필요가 없을 때는 제일 먼저 해고된다), 여성의 정치 세력화는 여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패 정치를 청소하기 위해, 동성애 커플의 결혼 합법화는 동성애자의 당연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이성애 결혼 제도의 다양성을 위해 옹호된다. 타자화의 내용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때만큼은, 피해자 여성은 억압자 남성을 위한 구원 투수가 되어 ‘좋은’ 타자가 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영혼을 장식하는 컬러 물감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의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져….” 초현실주의에서 좌파로 돌아선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미래의 시>의 한 구절,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낯설지 않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전히 주인공은 남자다. 여성은 설명하는 주체가 아니라 설명 대상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 문명의 선후에 있을 뿐, 현재를 사는 같은 시민이 아니다. 남성에 대한 기대는 격려를 동반하지만, 여성에 대한 기대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여성이 인류의 미래이고 대안이라는 높은 도덕적 기대가 아니라 동시대에서 차별 받지 않는 것이다. 정말 여자가 남자의 미래라면, 지금 모든 권력을 미래를 이끌어갈 여성에게 이양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남자의 인생은 남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 남자의 미래는 남자의 과거다. 피해자에게 해결사의 역할을 요구하지 말라.

출처 : 한겨레 2004-05-26 17:36


바람구두의 중언부언 ------ 이 사람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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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6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가을산 > 마립간님께.... 3

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덕분에 오늘은 자전거 출근을 하지 못했습니다.
퇴근 전에 지난 몇개의 글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도덕의 정치, 좌파/우파,  아버지의 원리/어머니의 원리  

우선, 도덕의 정치라는 책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을 놓고 분석한 책입니다.
이성적인 해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정책이나 선거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의 가치가 국가에 투영된 아버지의 원리와 어머니의 원리라는 설명을 도입했습니다.

(그런데,  '이성적인 해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대중의 반응'에 대해 우리 나라 정치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바람 (風)'이라고 부르지요. ^^  )

제가 보기에 도덕의 정치에서 아버지의 원리/어머니의 원리는 좌파/우파의 원리보다는, 바람구두님 서재의 정치성향 평가에서 제시된 '권위주의 - 자유주의'에 해당하는 구분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분석한 미국의 민주당만 하더라도 '좌파'라 볼 수 없지 않나요?   

도덕의 정치의 저자 조지레이 커프가 뒷부분에, 어느 원리가 더 '옳으냐?'에 대해 쓴 부분에서 여러 가지 설명을 했지만, 저는 그 사람의 전공 분야 - 인지과학 - 로는 힘에 부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을 파해치다보면 교육, 가정, 문화..... 를 거쳐 또다시 '인간의 본성' 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 합니다.

그래서 우파와 좌파의 문제보다는 권위주의와 자유주의를 놓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파든 좌파든 권위주의를 싫어합니다. -- 이건 가치판단이나 논리가 아니라 그냥 제 감정입니다. 제가 어떤 행동이나 가치를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 없이 강요당하거나 따르는 것이 싫습니다.   
물론, 종교나 가정의 연장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이나 신뢰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런 존경과 신뢰를 담보로 '규제화 된' 표현과 강제는 싫어합니다.

2. 종교와 권위, 자발적 가난,   

마립간님의 종교관을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종교의 권위 - 아버지의 세계관 - 를 인정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선택하신 것처럼 나타납니다. 
마립간님의 종교관이나 초창기에 올리신 독서 이력에 대한 글을 보면, 사고나 관심의 방향이 저와는 거의 반대순서로 섭렵하시는 것 같습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성당에 신실하고픈 신자였으나, 지금은 불가지론자, 혹은 다원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의 개념도 어려서는 당연하게 여겼으나, 지금은 그 존재에 대해 판단을 유보했습니다. 굳이 지금 답을 말하라면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업(業)'의 개념이 제게는 더 합리적으로 다가옵니다.

마립간님께서 개신교를 택하신 이유들을 보면, 이성적인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드는 믿음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이렇게 이성적인 분석과 대화가 가능한 경우조차 정말 드물어요.... ) 

마립간님의 글에서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네번째 이유, 즉 배중률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선택을 요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마도 계속 회색지대에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신의 뜻을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불가능 하듯,  이 우주와 생명체의 신비를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불신하거나, 무조건 믿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 이런, 저는 미적분이나 통계도 잘 이해 못합니다 그려.... ^^  )

'내가 아버지로서 너에게 충분히 너를 위한 유익을 행할 것이다' 라고 하는 아버지 원리의 대전제...
저도 부럽습니다.  받아들이고 의탁하면 그야말로 '천국'일텐데요...  
그래서 전에도 썼듯이 '주의 기도'는 공감합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소서'
하지만.... 아마 마립간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사도신경' 을 identity로 하는 기독교에는 영영 귀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추신: 마립간님, 십계명의 네번째, 다섯번째 계명이 무엇인지 외운지 하도 오래 되어서 가물가물합니다.
게다가 개신교와 천주교의 번호에 따른 계명이 조금씩 차이가 나서 더욱 헤깔립니다.
(이런 차이는, 원래는 번호가 매겨지지 않은 계명을 10개로 묶으면서 나타난 차이라 생각합니다만..)

3. 제 친구요. 아직도 독신입니다.
그 친구 학생때 같이 노숙자 진료도 하고, 달동네 공부방 어린이도 돌보고 했었는데,
요즘은 정신분석 쪽에 심취해 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들 중에서도 정신분석을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이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신분석자들끼리도 서로를 분석해주고, 분석 받고 한답니다.  마치 도를 닦는 것 같아요. 
'분석을 마친 사람'이 - 제가 듣기에는 마치 '득도했다'는 것과 비슷하게 들리는데 - 아직 우리 나라에는 없다고 할 정도네요.

'누구는 분석을 마쳐가고 있다더라' 라고 말하던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반박은 못했지만, 속으로는 '방이 어질러져서 말끔히 치워놓았는데, 그 방이 다시 어질러지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더라구요.   ^^;;

어쨌든.... 이 친구, 저도 분석을 받아볼 것을 권하더라구요.
일주일에 두번씩, 서울에 있는 분석가를 만나서 분석받으라구요.
제게 하는 말이, '분석을 받으면, 너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돼.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겐 오히려 이기적으로 보이게 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너 자신을 찾는 것일 수도 있어.' 

음... 저도 제 속에 있는 것이 궁금하기는 해요. 하지만, 한편으로 제 안에 꽁꽁 눌러놓았던 것들이 드러날 때 도질 아픔이 두렵기도 하구요. 

이런 친구이다보니, 자발적 가난 여부는 이 친구 관심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결혼한다고 배우자 가치관을 따라 갈 사람도 아니지만, '사랑'하게 된다면 혹시....  ^^

4. "맹목적 추종이 아닌 무정한 압박"

노빠들이 노무현을 지지한다면, 
개혁을 이루고 노무현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맹목적으로 노무현을 추종하기 보다는
비판과 압력을 넣는 것이 더 도움이 될거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 흐흐. 이 지점도 시민단체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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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1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님의 답글 밑에 저의 답글을 달아놓았습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비폭력주의 ― 연민의 과학

2001년 바야흐로 21세기의 첫 해를 맞이한 인류는 더 이상 '묵시록의 네 천사' - 원래는 성서의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말이지만, 1916년 이바녜스(Vincente Blasco Ibanez)의 소설에서 흰말은 전쟁, 붉은 말은 학살, 검은 말은 굶주림, 푸르스름한 말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 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리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의 21세기, 그 첫해가 미처 저물기도 전이었던 9월 11일의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이 테러에 의해 붕괴되었고,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죄 없이 희생당했다. 그로부터 우리는 21세기가 결코 20세기와 다르지 않으며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20세기에 미처 풀지 못했던 산더미 같은 과제들이 누적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이제 그 1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또 다른 전쟁의 염려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국은 9.11 테러 1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가 반대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을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이라크로 확대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겠다는 명분 아래 시작된 '걸프전' 그리고 계속되는 미국의 이라크 경제 봉쇄 조치로 이라크에서는 오늘날 6분에 1명 꼴의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다. 그 동안 최소 75만 명에서 1백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미국의 공습과 영양실조, 의약품 고갈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라크 정부측의 주장이 아니라 국제보건기구(WHO)가 공식적으로 밝힌 수치이다.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비난한다. 물론 모든 근본주의는 인류의 화합에 있어서 가장 나쁜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자행된 인류에 대한 모든 범죄가 갖은 도덕적 명분을 들이대었던 것처럼, 미국이 신세기에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세계화란 것은 결국 미국 근본주의와 다르지 않다.

우리 인간들은 시계가 12시를 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황급히 촌각을 다투어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은 종이 울린 뒤에 해결하기엔 너무 늦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진정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진정 무엇이 옳고 선한 것인지 판단하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정의는 먼저 윽박지르기에 앞서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9.11 테러를 당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죽음으로 항거하는 방법 이외에는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락하지 않은 그들의 오만에 있었음을 깨우쳐야만 한다. - 바람구두

비폭력주의 ― 연민의 과학

마이클 네이글러(Michael Nagler)

  독일의 덴마크 점령통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하운동은 잘 조직되고 대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함으로써 점령당국을 심히 곤혹스럽게 하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덴마크인들은 나치의 유태인정책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 정책은 1943년 가을 어느 날 절정에 달하였는데, 독일 함대가 덴마크 거주 유태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코펜하겐 항구로 들어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들 모르게 누군가가 지하조직에 이 사실을 알렸고, 밤새 7천2백 명의 유태인들 ― 사실상 덴마크 유태인들의 전부에 해당하는 ― 이 대기중인 함대의 코밑에서 중립국 스웨덴으로 빼돌려졌던 것이다. 고기잡이배들과 온갖 뜰 것들로 구성된 잡다한 소형 선단은 험한 바다 위에서 솟구치고 떠밀리면서도 이튿날 아침까지는 혼잡과 배멀미에 지친 승객들을 스웨덴으로 데려다놓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스웨덴 국왕은 유태인들에게 망명을 허가해주고 싶었지만, 나치의 존재에 겁을 먹고 있었다. 아마도 국왕은 스웨덴의 중립성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그때 덴마크의 저명한 물리학자가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유태인들이 처한 딜레마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국왕에게 조용히 자신의 말을 전달하여, 만일 유태인들에게 망명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 자신 자진해서 나치의 손에 스스로를 넘겨줄 것이라고 했다. 그 저명한 물리학자는 닐스 보어였고, 스웨덴 국왕은 즉각 유태인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내가 보어의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여기에서 그의 과학과 그의 인간적인 용기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어는 양자물리학에 있어서 '코펜하겐 해석'의 배후에 있는 천재였다. 아인슈타인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물리학의 성과는 실재의 본질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실재는 지극히 이상스러운 것이다. 새로운 물리학의 우주와 초시간적인 신비체험가의 우주 사이에는 매우 흥미롭고 암시적인 평행관계가 있다. 상호연관성에 대한 깊은 감각과 물질에 대한 의식의 우월성은 ― 간접적으로 ― 비폭력주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견고한, 덩어리진, 딱딱한, 꿰뚫을 수 없는, 움직이는 입자들"로 구성된 뉴턴의 우주는 필연적으로 지금 우리가 벗어 나오고자 애쓰는 자연과 생물들에 대한 폭력의 세계를 초래한다.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과 매스 미디어의 공식적 과학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그러한 물질적 역학의 세계는 ― 물질은 제한되어 있고, 우리를 만족시키는 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 희소성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관은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폭력을 낳는다. "내가 너에게 해를 끼쳐도 나 자신을 포함한 보다 큰 전체는 해를 입지 않는다. 또한,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것이 충분히 주어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아래에 있는 그림은 그 그림이 창조된 세계가 갖고 있는 중심적 모순을 아름답게 포착하고 있다. 이 그림은 1768년에 조셉 라이트라는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때는 산업시대의 시초로 서구세계에서 땅과 인간의 오래된 연결의 전통이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우리를 마주보고 있는 사람은 떠돌이 과학교사인데, 그는 한 개의 진공펌프를 홀린 듯한 구경꾼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펌프질을 통해 유리로 된 새장에서 공기를 빼고 있다. 그리고 새장 안에는 새 한 마리가 있다. 사람들은 새가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말해 새장 안에 공기가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기술의 힘에 감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관객으로서 우리가 달리 받는 인상은 무엇인가? 그림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진정한 극적 흥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펌프와 공기에 대한 설명을 따라가지 않는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한 남자어른이 작은 새 한마리를 죽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이 드러내는 진짜 이야기는 청중에게 주술을 걸고 있는 과학자와 당혹해하는 아이들 사이의 대조에 있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그들은 '다만 어린애들일 뿐'이며, 그래서 어른들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자연에 손상을 가할 때 우리들에게 경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민감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가슴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들 ― 라이트의 그림 속의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 ― 을 우리들이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지금 라이트가 진공펌프의 힘을 과시하는 근대기술의 사제 ― 그럼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내세우는 ― 를 묘사했을 때 시작되었던 호(弧)의 다른 쪽 끝에 서있다. 근대기술 ― 기술주의라고 해도 된다 ― 은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 중 일부는 그 결과에 너무나 기막혀하고 있다. 우리가 환경에 대하여 저질러놓은 것은 1768년이나 1968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민감성으로써 생명을 지켜보고, 가장 계몽된 어른들의 지혜로써 생명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과학은 지난 백년 동안 뉴턴의 '원시적 입자들'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왔다.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그와 보어의 놀라운 발견을 통하여 물리학은 이제 사물을 물질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의식에 관여하는 에너지의 변화로 본다.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에 함께 관여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상호연관성에 대한 관점 ― 뜻밖에도 우리 문화의 가장 이른 신화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 이 오늘날 비폭력주의와 에콜로지의 배후에 있는 상호연관성의 윤리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아직 그러한 직관을 우리의 합리적인 마음으로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과학자 보어를 자기의 동포가 위험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기를 거부한 인간 보어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근거가 거기에 있음을 느낀다.
  
1938년 여름 스웨덴으로 피신하기 직전 닐스 보어는 코펜하겐에서 열린 한 물리학자들의 국제적 모임에서 연설을 한 바 있다. 이 '양자역학의 할아버지'는 그의 유명한 상보성이론으로 일반청중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이론은 인간이 외부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내재적인 한계가 있어서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두가지 상호배제적인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드는 예로서, 빛의 광자 또는 그밖의 다른 양자 실체는 입자도 파동도 아니지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입자나 파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날 이 국제물리학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개념을 전자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에 적용시켰다.

  우리는 진실로 다양한 인간문화들이 서로서로에게 상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각각의 문화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있어서 조화로운 균형을 대변하며, 그러한 조화를 통해서 인간 삶의 내재적 가능성이 발전하여 무한히 풍부하고 다양한 새로운 삶의 모습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발언에 독일대표들은 퇴장하였다. 결국, 그 독일인들은 우선적으로 나치당원들이었고, 그 다음 순서로 '과학자들'이었던 셈이다. 보어의 발언이 드러낸 세계관은 나치당원들의 가치에 완전히 적대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불관용(不寬容)이라는 나치의 교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적인 차이들은 우리가 존중해야 할 자연적 계획의 일부이고, 개별 민족과 공동체와 개개인들은 저마다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기의 소임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누구라도 하나의 전체 가족으로서 자기실현을 이루려면 서로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아이디어는 파시스트들에게는 쓰디쓴 독초였다. 모든 유정물이 저 나름의 귀중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파시스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치의 유럽점령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야만적인 폭력을 쓰려는 의지에 결부하여 몇 가지의 불쾌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존재에 대한 이미지이다. 히틀러는 이 점에 있어서 노골적이었다. 그는 어느 날 윌리엄 쉬러 ― 히틀러와 간디 두 사람 모두를 실제로 잘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 와 점심을 함께 나누며 자기가 거둔 성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알다시피, 사람은 저마다 가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엔 그 가격이 매우 낮다는 걸 알면 놀라실 겁니다."
  인간존재를 하찮게 보는 데에서 폭력이 나오고, 인간존재를 높이 보는 데에서 비폭력이 나온다. 폭력은 우리를 갈라놓는다. 비폭력은 우리들 모든 사람들 사이의 신비스러운 통일성 ―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숨겨져 있는 영광이다 ― 에 직접 호소한다.

  나치 과학자들을 쫓아냈던 닐스 보어의 발언은 1938년 당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그는 파시스트의 세계관이 '획일성을 통한 분열'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질서개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았다. 파시스트들은 오직 하나의 민족과 정치질서만이 ― 그러니까, 오직 한사람만이 ― 가치있고, 진정하며, 깨끗할 뿐이고, 나머지 것들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열등하고 위험한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유일한 올바른 길'에 복종하지 않으면 지배하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대한 해독제는 헤겔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고 부른 아이디어였다. "인간 삶의 내재적 가능성이 스스로 발전하여"라고 한 보어의 표현을 보라. 이 표현은 나중에 또 한사람의 북유럽인인 요한 갈퉁이 이어받아 비폭력주의에 대한 오늘날 잘 알려진 정의가 되었다. 갈퉁에 의하면, 비폭력은 "각 개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의 실현"을 돕지만, 그와 반대로 폭력은 그러한 실현을 방해하는 힘이다.

  이러한 정신적 맥락에서 달라이 라마는 1993년 유엔 NGO 인권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창조적 잠재성을 사용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기본특성의 하나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 우리 사회의 가장 재능있고, 헌신적이며, 창조적인 구성원들이 인권남용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 너무나 흔합니다. 그런 식으로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은 인권침해를 통해 좌절되는 것입니다.

  나는 느낌과 개념 사이에 연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태초이래 가족과 사회와 행성을 유지시켜온 정신적 깨달음의 깊은 원천인 연민의 마음과 모든 생명을 그 다양성 속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 개념 사이에는 연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물다양성이라는 개념의 합법적 연장으로서 우리는 문화적, 개인적 다양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겉보기에 모순적인 이 개념은 비폭력주의와 나란히 간다. 말하자면, 그것은 연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 인간의 영혼의 특성을 좀더 분명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람들 사이의 너무나 커다란 차이에 우리는 당혹해진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변별성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목표, 즉 세계의 완전함을 향하여 각자의 고유한 재능에 따라 이바지하는 데에 모두 통일되어 있다"라고 랍비 에이브럼 이삭 쿠크가 말했다.

  인간가족은 50억 개인들을 넘어 점점 커져가고 있다. 각자는 측량할 수 없이 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적인 통찰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안락사운동, 사형제도의 부활, 기괴한 인권침해의 만연, 가족의 쇠퇴,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기르는 부양체계의 쇠퇴 ― 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삶의 신성함을 손상시키는 것들이다.

  언제나 비폭력을 주창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간디에게도 생명은 신성하고, 무한히 값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명제였다. 모든 생명의 총화가 어떤 점에서는 주어진 개별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일지라도, 또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것들은 똑같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각각의 것은 좋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어우러짐도 매우 좋다."

  전통적인 힌두교의 신자로서 간디는 견고한 형이상학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금언의 하나를 즐겨 인용했다. "작은 파편 속에 우주가 있다." 양자물리학자나 신비가들, 그리고 세계의 여러 정신적 전통에서, 또 우리 모두의 좀더 성찰적인 순간에 이러한 비젼은 되풀이하여 다가온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살생을 금하는 명령 이상의 것이다. 그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살생을 해서는 안되는 적극적인 근거를 말해주는 데 있다. 즉, 각각의 개인으로 된 작은 소우주는 전체 세계질서의 씨앗인 것이다. 우리의 몸이 DNA라는 우스울 정도로 작은 조각에 기초하고 있지만,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우리 각자는 하나의 세계를 재생시킬 수 있는 '정보' ― 믿음, 통찰 ― 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민족적, 준민족적 증오심으로 찢겨있는 이때, 이러한 진리는 되풀이해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민이라는 낱말은 문자 그대로 타자와 고통을 함께 하고, 느낌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아픈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성을 고립, 차단시켜 그 속에서 죽게 하는 것보다는 타자와 고통을 나누면서 인간성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히브리말에서, 연민에 해당하는 말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낱말의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이 누군가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연민이야말로 이 시대의 급진주의"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비폭력주의는 연민의 과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녹색평론』, 제43호, (1998년 11-12월호)>

필자/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 명예교수. 1980년대 초 평화 및 갈등연구 프로그램을 설립하여 그 이후 비폭력주의에 관해 강의해왔다. 이 글은 YES!:A Journal of Positive Futures 1998년 가을호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비폭력은 '현실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어쩌다가 한번씩 행하는 말쑥한 습관이 아니다. 비폭력은 하나의 과학, 삶의 방식, 세계관 ― 무엇보다도 하나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녹색평론 홈페이지 - http://www.greenreview.co.kr/
<200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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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09-0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의 글을 너무 퍼오는 것 같습니다.

2004-09-04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06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