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역사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영화는 역사다 - 한국 영화로 탐험하는 근현대사
강성률 지음 / 살림터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참 영화에 빠져들 청소년기에도, 이십대가 되어서도 또래의 거의 모두가 봤다는 영화를 보지 않고도 무던하게 잘만 지내곤 했었으니까. 그러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책을 파고들기보다는 영상이 보여주는 그 화려함과 엄청난 상상력에 빨려들어가듯이 빠져 한때는 런닝타임을 줄이기 위해 영화관에서 임의로 필름을 삭제해버리기 전에 영화를 보려고 기를 쓰고 첫 날 첫 상영을 기를 쓰며 볼 정도였다. 한때 키노라는 영화잡지까지 구독하면서 왠만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영화까지 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영화를 이해하며 보는것보다는 그저 많이 보면서 조금씩 영화를 보는 공부를 했던것이었겠지. 영화는 내게 딱 그정도까지였다. 가장 크게 다가왔던 부분은 물론 그 넘쳐나는 상상력. 

그런 내게 '영화는 역사다'라는 제목은 영화속에 재현되는 과거와 현재의 투영과 그에 상응되는 미래까지 떠올려보는 것 정도의 이미지일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로서의 영화만을 떠올렸나보다. '영화는 역사다'라는 강한 어조의 이 책은 영화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안에 담겨있는 역사의 깊이와 무게가 느껴지는 우리 근현대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래서인지 조금은 무거운 느낌으로 쉬이 읽히지 않았다.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주로 '근현대사'에 중점을 두어 다뤄진 다큐멘터리와 상업영화는 우연찮게도 거의 봤던 영화들이었다. 특히 고향인 제주에 대한 영화인 4.3의 역사증언 '레드헌트'와 '이재수의 난'은 저자가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있게 역사인식을 하며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경우는 좀 더 친절한 설명이 들어가지만, 제주사람조차 관심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이재수의 난은 기대에 못미쳤고, 그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도 느낄수있는 것이었다. 영화감독으로서는 최선이었겠지만 그 역사에 대해 알고있는 관객의 입장에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는 영상매체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볼만큼, 다큐멘터리와 영화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한것만 같았다.  
더구나 거의 텅 비다시피한 영화관에서 '송환'을 보며 함께 웃고 울고 영화속 그들의 모습이 바로 현재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현재진행형인 우리의 현실은 역사의 올바른 과거청산없이 덮어버리려 하고 있으며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영화를 지금 보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며 그 역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과거의 영화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결국 역사와 영화의 문제는 해석의 문제이며, 해석의 문제는 시각의 문제이고 시각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귀결된다. 감독이 있고 과거의 관객이 있고 그 영화를 바라보는 현대의 관객과 비평가가 있다. 그 안에서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상처를 보듬는 자세가 필요하며 그것은 결국 '소통'의 문제로 귀결된다.
상대에 대한 소통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소통도 중요하다. 역사와 영화의 문제는 과거의 현재화 문제이고, 과거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할 여지는 아직도 많다.
유럽의 경우 한가지 예를 들자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과거의 기억은 덮어버리고 모른척해야 할 치욕의 역사로만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과거사를 인식하며 그것이 현재 혹은 미래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실을 보여주고 잘못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영화를 통한 그 화해의 손길은 사실 그대로를 말해주고 있는 역사이야기보다는 조금 더 따뜻함이 담겨있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 100년은 고스란히 우리의 현대사 100년을 담고 있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는 일제 강점기의 영화를 넘겨 분단과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담은 영화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안에 담겨있는 영화의 '진심'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가 너무 무겁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영화'를 바라보는 나의 느낌은 많이 달라졌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끈이 되어주고 있으며 그 연결끈은 과거와 현재의 화해를 이끌어주고 있다. 영화안에 담긴 역사는 수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결국 내가 느낀 가장 큰 것은 그런것이다. 역사안에 담겨있는 진실을 담담하게 혹은 강렬하게, 슬프게 혹은 즐겁게, 때로는 분노하며 또 때로는 판타지로... 그리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은 역사를 살아온, 역사를 만들어갈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역사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안에 담겨있는 진실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안에 담긴 진실을 바라보고 진심을 다해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가야한다. 문학을 통해서도 역사의 진실을 느끼고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하고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지만 영화 역시 - 어쩌면 영화가 더 강렬하게 소통을 이루고 있는것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으면 읽을수록 문제제기만 가득하지 정리되는 것은 없다. 내가 꽤 도덕적인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버린지 오랬기에 그나마 문제제기가 가능한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적어도 한 챕터정도는 읽어줘야 조금씩이라도 정리를 할텐데 겨우 한쪽을 읽는 것도 버거워 그와중에 졸고앉았다. 아, 이번주는 좀 힘든 주간이었어..월요일 오후부터 벌써 금요일같은 느낌이었다니까 라고 변명을 해 봐도 소용없다. 내용이 정리되지 않아 무슨 말을 읽고 있는지 몰라서 더 졸고 있다는 걸 나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글을 쓰다가 손가락질 한번의 실수로 화면이 사라지고, 임시저장된 글을 불러오니 쓴 글의 반이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겨우 1분도 안된 시간에 내가 무슨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있다니. 어쨌거나. 난 정말 철학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놀이하는 인간도 아닌데. 뭐냐.. 인간이 아닐수도? 

도덕,이라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것만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기까지 꽤 많은 사유가 필요한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오로지 나 혼자만 하고 있는것인지? 

  

 

 

개인의 권리와 공공선, 무엇이 우선인가 

: 개인의 특정한 권리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공동선을 고려하더라도 그러한 권리를 무시할 수 없다면 그 권리는 어떤 권리인가.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가 기본적인 시민적, 정치적 자유를 비롯해 시장경제가 부여한 노동의 대가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 따라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겨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재분배정책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인 사회, 경제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시민적, 정치적 자유를 유효하게 행사할 수 업다고 주장. 따라서 정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 소득, 주택, 의료 등 제대로 된 혜택을 권리로 보장해야 한다. 

권리지향적 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정의가 정당성을 갖추려면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칸트, 롤스 그리고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에서 중심이 되는 이러한 생각은 옳음(권리)이 좋음(선)에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217-2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드라마에서는 화가 나면 주먹으로 벽을 칠까, 생각해본적이 있던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서 책상을 쳐버렸다. 앉은상태여서 주먹질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손바닥으로 책상을 쳤는데 무의식중에 너무 세게 쳐버려서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손이 얼얼하네. 

이주일동안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수정해서 지침서를 만들고 인쇄소에 넘기려 하는 오늘.- 지난 회의에 지들이 그리하자고 결정을 해 놓고는, 그걸 순식간에 말을 바꿔 협의가 안됐으니 원상복구하라고 한다.  

오늘 오전중으로 넘겨야 직원연수전에 지침서책자가 나오는데. 지금와서 다시 그것의 일부를 수정하라고 하면. 

모든게 다 말 한마디로. 그리고 자기들 편한대로. 이 개념도 없고 현실도 모르고. 에이씨. 

 

남은건.  

아직도 손바닥이 얼얼하다는것뿐. 그러고보니 정말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벽으로 쳤을 때 주먹에서 피가 흐를정도일까 궁금하긴 했었는데 그럴수있겠구나라는 깨달음. 드라마속 연기의 재발견...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감은빛 2010-11-1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거울을 주먹으로 쳐서 깨뜨리고, 손에서 피가 철철 흐리잖아요.
저 그런 경험 있어요.(이거 왠 자랑모드?)
그렇게 오버해서 감정을 표출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나봐요. ^^

chika 2010-11-16 01:02   좋아요 0 | URL
헉,,, 갑자기 피를 연상하니 속이 거북....제가 피에 좀 약하거든요 ㅠ.ㅠ

근데 정말 그게 무의식적으로 감정이 화악 올라오면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손이 한참동안 얼얼했는데, 옆 사무실 직원이 쾅,하는 소릴 듣고 놀래서 찾아오기도 했답니다. ㅠ.ㅠ
힘이 좀 더 셌거나 주먹으로 내리쳤거나 그랬으면 책상위 유리가 깨졌을까요? 에혀.. 아무튼 엄청난 감정의 폭발은 무서운거예요;;;;;

그나저나 감은빛님은 차분한 느낌인데 그런 감은빛님을 폭발시킬만큼 엄청난 일이었었나봅니다 ^^;;;
 
너는 나다 -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
하종강 외 지음, 레디앙, 후마니타스, 삶이보이는창, 철수와영희 기획 / 철수와영희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너는 나다,라는 책을 받은 날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강론글을 읽었다. 용산참사와 관련한 시국미사에 참례한 사제의 이야기였는데 미사가 있었던 성당의 주임신부님은 비록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미사를 끝낸 다른 사제들을 위해 빵과 음료수를 준비해두고 있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생각과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함은 똑같은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인간에 대한 예의가 내게, 당신에게,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바빴다는 핑계로 날짜가는 걸 몰랐다고 하지만 2010년 11월 13일, 어제가 전태일 열사의 사십주기였음을 잊고 있었음에 대한 변명은 할수가 없다. 전태일, 그가 뭐 대단하냐고? 당신이 전태일에 대해 안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할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그에 대한 글을 읽었을때 나는 그의 위대함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 외치며 분신자살을 한 그는 살신성인의 느낌은 있었지만 내게는 현실적인 느낌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살아온 세월이 쌓여갈수록, 인간에 대한 예의가 절실해질수록, 내가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무뎌져가는 걸 느끼게 될수록 전태일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알것만같다. 그같은 사람은 또 찾기 힘들것이다.
그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정말 세상을 사랑했고, 우리 모두를 사랑했다. 이 세상의 모든 전태일을 위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의 사랑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시대의 전태일을 응원한다는 부제가 달려있는 '너는 나다'는 전태일 열사의 사십주기를 기념하며 4개의 출판사가 공동기획하여 출판한 책이다. 실제 이름이 전태일인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또 하나의 전태일을 만난다. 나태일과 전태일의 만화를 통해 이기적이고 자신만 아는 이들의 냉소적인 비난이 당치않은 것임을 말해준다. 열사 전태일이 그저 사람을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일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배고프면 타인도 배고픔을 느낄것이고 내가 노동의 고됨에 힘들어하면 타인 역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체험하고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십년전 전태일이 그토록 친구가 되고 싶어하던 대학생은 지금 넘쳐나지만 그들 역시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노동은 고되기만 하다.
이 책의 네번째꼭지는 청소년에게 쉽게 풀어 이야기하듯 설명한 하종강의 노동백과이다. 직장생활을 2,3년쯤 하게 되면서 서점에 꽂혀있던 근로기준법을 사들고 읽으면서 그 옛날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쳤던 전태일 열사의 그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것만 같았던때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슬픈 현실이지만 그로부터 십년이 더 지나도록 노동현실이 많이 바뀌지도, 노동법이 더 나아지지도 않았다. 물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태일 열사의 사십주기를 기념하는 그날 나는 현실의 벽이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지를 깨달아야 했다. 지금 내가 이 벽 앞에서 느끼는 분노와 절망이 이러한데 사십년전의 그는 어떠한 마음이었을까.

책의 첫머리에서 손아람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습니까?'
...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노동은 고귀하며 값진 것이고 당신의 노동은 값싼 싸구려다,라는 생각을 버리자. 노동만큼 신성한 것은 없으며 그것은 우리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잊지말자.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는 인간의 존엄성만큼이나 소중한것이다.
지금 나는 그것을 제대로 깨닫고 있는지,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그저 사람을 너무도 사랑했던 전태일의 그 마음을 닮아가려고 하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은 좀 깨지는 날인것같아 기분이 안좋지만. 입다물고 있으면 본전이라도 찾는걸 괜히 말을 꺼내서 욕이나 먹게 되는 날인것같지만. 사제와 평신도의 차이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날이기때문에 깨지는건 당연한 결과라는 걸 떠올리며 그냥 까발려버리고 싶은. 또한번저지르고만다.내가.  

........ 글을 쓰다가 결국 지운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냥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달은거다. 언급할 가치도 없고, 꽉 막혀있는 벽에다 대고 외치는 것도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으로 끝없이 부딪쳐보는 것인데 희망을 둘 수가 없다. 내가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 가치를 헌신짝버리듯 버렸기때문이다. 

 

 

며칠 전 전태일열사의 사십주년 기념 책 '너는 나다'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날, 정의구현사제단에서 발행한 빛두레의 강론글을 읽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인간에 대한 예의는 무엇일까.  

사제소득과 관련해 엄청난 말들이 많았고 또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그들은 하느님께 봉헌된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거룩함을 기대하지만... 하지만 중세교회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제들의 사리사욕은 사라져본적이 없다,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을뿐이다. 자신들의 소득이 연간 천만원도 아닌 백만원, 아니 크게 봐서 이백만원의 차이가 나게 줄어든다고 해도 그들의 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백만원의 가치는 소득에 비례하다고 판단했을때. 그런데 그 줄어드는 금액을 갖고 문제삼는다. 사제생활 삼십년차가 넘는분이. 그분은 사제와 평신도를 비교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비교하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먹고자고싸고노는것. 다 똑같다. 그들은 성무활동을 한다고 한다면 그래 알겠다. 하지만 성무활동에는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 내가 간과하고 있었구나. 사제들은 청빈서원을 하지 않는다. 사리사욕을 채워도 되는거였다. 아니, 그건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그런 욕심이라는 것은 없애기가 쉽지 않다. 열사 전태일은 위대한 사람이었으니 별개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은. 자신의 것을 챙긴다면 그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국미사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형제라고 생각해 미사 후 먹을 간식거리를 챙겨주는 엄청난 배려가 있는 반면, 자신들이 받아드는 한달 급여가 적은 것은 알면서도 그보다 더 적은 금액으로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교회업무종사자들에 대한 배려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 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이유로.  깨졌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너는 나다,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습니까? 라는 물음은 나를 너무 부끄럽게하고 있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물음은 나를 아프게 한다. 욕심에 가득찬 나를 부끄럽게 하기만 할뿐, 그걸 사제들에게 되물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있는 내가 아프다. 아니, 비겁하다.  

정말 비겁한건 이런것이다. 나는 여전히 직장을 다닐것이고, 주는 월급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해야하는 일만 할 것이다. 해야하는 일도 하지 않는 자보다는 그나마 조금 낫다고 생각하고 마는 그런것들. 나는 비겁하게 세상을 살아가기로 하고 툭, 털어버리고 있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