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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폴 코트라이트 지음, 최용주 옮김, 로빈 모이어 사진 / 한림출판사 / 2020년 5월
평점 :
어떤 이야기로 시작을 해야할까...
이 책은 80년 5.18 당시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직접 겪었던 미국인의 회고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당시에 남겼던 개인의 기록이 이제는 역사속에서 증언이 되고 증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5.18에 대해서는 더 깊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속마음이었다. 그 끔찍한 이야기들, 제주 4.3의 증언들도 너무 무서운 이야기가 많아 이제는 그 증언들을 그만 듣고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알만큼 안다고 생각을 했었던 이야기들은 화수분처럼 끊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역사의 진실 규명에 다가서고 있지만 '학살 원흉'들에 대한 공식적인 재판과 그들의 만행에 대한 사죄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여전히, 광주 5.18과 제주 4.3은 진행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 평화봉사단에서 파견되어 온 폴 코트라이트는 나주의 호혜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80년 5월 14일부터 26일까지 광주를 오가며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일들을 풀어놓고 있는데, 광주의 중심은 아니더라도 그 주변부에서 시작할 줄 알았던 이야기가 나주에서의 일상으로 시작하고 있어서 조금은 5.18과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의외로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고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관찰 카메라처럼 폴 코트라이트의 시선을 따라 사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책의 중간에 실려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 택시 운전사로 잘 알려진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인터뷰를 했던 일행 중 한명이 바로 이 책의 저자 폴 코트라이트였다.
그의 이야기에서 광주 5.18이 참상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을 원하는 수준높은 정치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중에 그는 보호 대상으로 군인 한명이 배치되어 감시를 당했고 한국에서 추방당할 위험에까지 이르렀지만 평화봉사단 책임자의 강력한 사실증명 요구로 추방당하지 않고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라 생각했는데 이 기록들을 읽으며 새삼 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전두환은 광주에 첩자를 심어놓았을거야. 여기에 스파이를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어제 도청광장에서 시민들이 한 명을 잡았대. 하지만 여전히 많은 스파이들이 있을거야. 분명해"(112)
우연이었을까? 오늘 아침 뉴스에서 5.18 당시 군의 스파이로 도청에 잠입하고 시민군을 잡아 고문을 했던 군 장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순간 좀 부끄러웠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내가 광주 5.18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빙산의 일각이며 당시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은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때문이다.
"당시의 내 노트, 편지. 사진 등 자료들을 꺼내 이 책을 쓰기까지 40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광주를 기억한다는 일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일에 몰두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181)
그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광주 우체국에서 우연히 마주친 할머니가 '증인이 되어 진실을 알려달라'고 했던 그 약속을 40년만에 지키게 된 그는 이제 그 당시의 고통과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을까...
이런 증언과 증인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사실을 부인하고 광주 5.18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떠들어대다 결국 실형까지 받았으면서도 뻔뻔하게 다시 거짓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고,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외면하는 그 인간들에게 이단옆차기를 한번 해보고 싶어진다. 아니, 심정으로는 정말 심한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참는다. 반드시 죄의 댓가를 받게 되기를. 인간이기를 거부한 그들의 살이 썩어 문드러지기를 바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