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를 처음 읽은 건 학부 시절이었다. 전공이 러시아문학이다 보니 이후 학교 수업에서는 다룰 일이 없었다. 그런데 2016년부터 맡아온 창작 강좌에서 간혹 극 장르를 시도하는 학생들이 있어 작년 2학기에 커리큘럼에 넣어보았다. 처음이라 걱정도 욕심도 컸다. 청신경초종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남동생을 보러 가는 고속열차 안에서 수업 준비를 했다. 부산에 가 있는 동안에도, 서울로 올라올 때도 <고도>를 붙잡고 있었다. 수업이 있는 날, 아홉 살 아이가 한밤중에, 이어 새벽에 경련을 했다. 119로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체온이 40도가 넘었다. 얼마나 호된 악몽이었는지 날짜와 요일을 기억한다. 108일 화요일. 3시간 연강, 마침 잡혀있던 점심 약속까지 이행한 다음에야 입원한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 사이 초등학생의 엄마이기도 한 지인이 얼마 전 유방암 재발 및 전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편 아이는 사나흘 뒤에 퇴원했으나, 훗날 되짚어보니, 독한 후유증이 생겼다.

 

2020년은 결과적으로 21세기 페스트가 된 코로나와 함께 왔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지난 4, 1948년생 아버지가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5월 초 연휴, 항암을 앞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부산에 갔다. 역병 창궐기라 KTX 대신 남편의 차를 이용했더니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이동 중에 책을 한 자도 볼 수 없었다. 도착한 그 날 읽은 책이 또다시, 하필이면 <고도>였다. 신선한 가을과 완연한 봄, 개천절과 어린이날, 남동생의 뇌종양과 아버지의 대장암. <고도>와 나는 또 이렇게 만났다. 이 무슨 황망한 인연인가. 악몽이 반복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동영상 강의를 녹화하고 탑재했다. 비대면 쌍방향 수업이 있는 날, 아이와 나는 건강한 아침을 맞이했고 각각 긴급돌봄에, 학교에 갔다. ZOOM 수업은 무사히 끝났다. 특별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날의 <고도>무소식이 희소식이었나 보다. 그럼에도 나는 올해의 108일이 너무 무섭다.

 

고도가 하나의 사건이라면,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어떤 정황 내지는 양상이고 그 기록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그런데 무대화된 <고도>(브로드웨이, 2014)를 보면 노련한 배우들의 늙은 부랑아-노숙자 연기에서 달관과 초월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폐허, 몰락, 불모, 부조리 같은 부정적인 낱말이 유쾌하고 유머러스할 수 있음을 알겠다. 어쩌면 그래야 한다는 당위의 산물일까. 모종의 증상, 각종 검사와 진단, 수술이 사건이라면 이후의 치료는 개 구충제 복용 같은 자가 임상이든 각종 의료적 처치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연 치유든 일상이다. 건강 검진은 고도의 도착 시점을 점쳐 보는 일인 듯도 싶다. 고도는 언젠가는 꼭 올 것이다. 그러나 고도가 오기 전에 다른 식으로, 느닷없이 기다림의 행위가 종결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 즉 내가 고도의 출현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고도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또한 고도는 와도 좋고 오지 않아도 좋다. 목을 매도 좋고 안 매도 좋다. 기껏해야 모든 죽어가는 것일 뿐인 우리는 고도가 올 때까지 이 삶이라는 무대 위에 실컷 존재하면 된다. 소녀 시절에 외운 한 청년의 시구는 중년에 더 깊은 맛이 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 序詩)

(월간에세이 2월호)

 

 

 

 

 

 

 

 

 

 

 

 

 

 

 

 

 

* 10월 8일이 오기 전에 쓴 글이다. 지난 해 가을은 10월 8일은 물론 11월까지, 심지어 12월도 방학 전까지 쭉 '고도'가 없었다. 이어 다른 재앙이 찾아왔고, 감지되었고 지금도 진행형으로 보여 아주 힘들다. 힘든 사람한테 힘내라, 라니, 글쎄, 힘이 없다니까! -_-;;

 

* 소설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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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자먀틴(-찐)의 <우리>(We)를 읽어보려고(논문을 쓰려고) 했는데, 흐억, 벌써 겨울이 끝난 기분이다. 클리어런스^^; 세일차 연일 이월 겨울 상품을 주문하고 공부라곤 정말이지 조금씩, 야금야금 하고 있다. <우리>는 레퍼런스가 비교적 많은, 또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설이다. 소설 자체도 어지간히 재미있고 분량도 만만하고, 아무래도 주제의 유의미성이 큰 이유인 것 같다. 위의 저 두 작품과 엮기도 좋다. 물론, 비교 연구를 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러기에는 저 두 작품이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특히 헉슬리 소설은 SF, 즉 사이언스 픽션의 함정에 빠진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한다. 뭐냐면, 사이언스가 너무 강해서 픽션을 이겨버렸다. 아마 그건 헉슬리가 H. G. 웰스의 과학소설(유토피아 비전의)을 너무 염두에 둔 탓, 그다음,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과학에 대한 강박이 좀 강해서가 아닐까 싶다. 허버트 조지 웰스(웰즈)는 자먀틴도 읽고 많이 배운(-것으로 얘기되는, 심지어 에세이도 하나 쓴) 작가이다.

 

 

 

 

 

 

 

 

 

 

 

 

 

 

국내 자료 중 홍성욱이 쓴 <크로스 사이언스>에 저 두 작품이 나온다.(자먀찐 소설은 아무래도 지명도가 낮아서 빠진 것이 아주 당연해 보인다.) 해당 부분만 찾아보려고 했는데, 정보량도 많고 재미도 있어서, 또 구성도 좋아서(한 학기 강의 커리큘럼) 다 읽어버렸다. 찾아보니, 하, 역시 저런 유의 책은 하루 아침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꽤나 내공이 많은, 기존에 저서가 많은 분. 내 주제와 관련해서는^^; 디스토피아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유토피아에 대한 얘기를 (비록 양은 적더라도) 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또한 그 챕터의 맨 마지막 부분에, 우리가 디스토피아(안티-유토피아)의 위협에 빠지지 않으려면, 간단히 총체적으로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위의 저 소설에서 예언하는 것들을 피하면, 조심하면 되는 것이다. 그밖에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 얘기, 이른바 프라이버시의 개념과 그 역사와 현재 그 정황 등에 대한 얘기도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최근 영화 버전

МЫ - официальный тизер - YouTube

독일 버전도 있는 모양.

Фильм-антиутопия "Мы" (1982 г.) - YouTube

 

 

 

 

 

 

 

 

 

 

 

 

 

 

 

<우리>를 다시 읽은지 오래 되었다. <1984>를 얘기하며 살짝 붙인 적은 있다. 이번에 여러 학자들의 선행연구 도움을 받아 다시 정독해보려고 한다. 다른 한편, 우리문학도 가히 SF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사회성과 환상성, 두 마리 토끼가 다 잡히는 것 같다. 적어도, 지난 학기 잠깐 훑어본 인상은 아주 좋았다. 김초엽, 정세랑. 박보영 신작이 나온 걸 읽지 못한 채 종강해서 아쉽다. 

 

 

 

 

 

 

 

 

 

 

 

 

 

 

 

덧붙여 최근 시간을 통해 김초엽 작가 청각장애 3급임을 알게 되었다. 장애 종류 상관 없이 통상 1-3급이면 정도가 심한 것, 우리가 손쉽게 장애라고 할 만한 정도이다.(한 번은 센터관에서 시각장애 6급인 분이 그걸 큰 불행, 비극인 양 얘기하는데, 다들(모두 그보다 위중한 상태이다 보니)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그 자리에는 자폐 2급 아들을 둔, 거의 전맹인 분도 계셨다 -_-;;) 아무튼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지난 학기 읽고 또 강의 영상도 찍었던 소설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나도 1년이 넘도록 (새로 올라온) 뇌전증으로 고생 중인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고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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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8세.)  

 

 

<무질서한 이야기들>

 

"네 멋대로 자고, 담배 피우고 입 다물고, 우울한 채 있으려므나"

출처를 잃어버린 인용을 좋아해

단단한 성벽에서 떨어진 회색 벽돌을 좋아해

매운 생강과자를 좋아해

헐어가는 입과 커다란 발을

(....)

 

(사족: '출처를 잃어버린 인용'^^; '좋아해', '뭐뭐해'라는 비교적 경쾌한, 그런 느낌을 주려는 어미, 기괴한 듯 말이 안 되는 듯하면서 또 말이 되는 언어 조합. "네 멋대로 자고, 담배 피우고 입 다물고, 우울한 채 있으려므나." 아, 그리운 '무질서한'! 시절.  밑에 <나는>도 언어 조합이 좋다.  

 

<나는>

 

너무 삶은 시금치, 빨다 버린 막대사탕, 나는 촌충으로 둘둘 말린 집, 부러진 가위, 가짜 석유를 파는 주유소, 도마 위에 흩어진 생선비늘, 계속 회전하는 나침반,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는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노란 풍선 꼭지, 어느 입술이 닿던 날 너무 부풀어올랐다 찢어진

 

<러브 어페어>

 

그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

아메리카 국경을 넘다

사막에 쓰러진 흰 셔츠 멕시코 청년

너와

결혼하고 싶다.

바그다드로 가서

푸른 장미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크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

우리는 함께 누워

물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은빛 물고기에게,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사족: 어쩌면 에로틱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도 진은영 특유의 매력인 듯. 특히 여성 시인들로만 논의를 한정하면 더더욱 그런 듯. <훔쳐가는 노래>의 '가난한 아가씨'^^; / "크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 /(...) 함께 누워" 이런 이미지, 사랑, 러브 어페어의 이미지로 참 좋다. 나도 한때는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ㅋ)

 

*

 

철학 공부하는 사람답게 인용문도 좋다.

니체 인용: "나는 내 자신의 생각들로 너무 달궈져 화상을 입고 있다."

스피노자 인용: "나는 인간 행동을 조롱하지도 한탄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오히려 인식하기 위해 진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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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문지의 술집 모임에서 오다가다 마주쳤다. 몇 마디 대화도 했을 법하다. 길고 마른, 굉장히 건조하고 지적인 느낌의 여자. 삼십대, 또한번 마주쳤다. 만났다, 라고 해도 될 만큼 그녀의 느낌, 말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아파서 담배를 끊었는데 다시 피우고 싶다고. "담배를 좋아했던 거죠."(-가봐요.) 나는 그때 완전 골초였다. 세월이 흘러흘러, 사십대 또 그녀를 봤다. 짧은 스침이지만 인상은 강렬했다. 그녀는 여전히 말랐고 길었고 건조하고 조용하고 이지적이고, 무엇보다도, 또 몸이 좋지 않았다. 많은 여성 시인들이 여성성을 한껏 뽐낼 때 진은영은 뭔가 딴 세상 사는 사람인 듯(실제로도 그런가?!^^;) 이런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두 시집 중 잘 쓴 걸 꼽으라면 <우리는 매일매일>일 테지만, 왠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 더 정이 가는 것은, 글쎄, 이십대의 치기^^가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몸의 느낌과 비슷하게, 손가락도 길고 가늘어 인상적이었는데, 시에도 곧잘 등장한다. 분석할 재간은 안 되고 스마트폰으로도 수시로 읽어 볼 수 있게, 여기다 옮겨둔다.   

 

 

 

 

 

 

 

 

 

 

 

 

 

 

 

 

(2003년, 33세.)

 

<서른 살>

 

(...)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봄이 왔다>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

나는 붉은색이 없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견습생 마법사>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나에게 맡기신 창세기

수리수리 사과나무 서툰 주문에,

자꾸만 복숭아, 복숭아 나무

(...)

복숭아나무 아래 떨어지는 분홍 꽃잎, 꽃잎

뉴턴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사라진다

(...)

그래도 나는 오늘,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

 

(사족: 말도 많고 장난기도 느껴지고 이른바 현학취도 보인다, 그녀에게도 이런 것이 있었나 보다.)

 

<대학시절>

 

내 가슴엔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

살고 있어

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

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

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

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

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

 

(사족: 처음에 '멜랑꼴리한'이라고 읽었는데 옮기면서 보니 '멜랑멜랑한'이다. '-꼴리'는 뒤에 따라오는 단어 '꼬리'에 표현된다. 꼬리, 우울, 염소, 시시한 시, 종이, 고흐, 담배 등 여러 이미지가 너무 좋다, 진은영스럽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목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사족: 이 시는 내용보다 제목이 좋다. 시인 자신의 길고 척박해 보이는, 그러나 또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과 잘 어울린다. 아무나 쓸 수 없는 시. 오직 손가락이(그리고 몸도!) 긴 시인만 쓸 수 있는 시. 겸사겸사, 사십이 넘으니 손가락(정확히 관절)이 상하는 일이 많아, 그것의 중요성을 알겠다. 사람이란 수족, 특히 손을 못 쓰면 제 뒤처리도 못하는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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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1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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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시집 세 권을 샀다. 이 중 한 권은 두번째 주문이다. <훔쳐가는 노래>부터 읽었다. 눈에 들어오는 시들이 몇 편 있지만, 단연코 웃겼던, 재미있었던 것은 <멸치의 아이러니>. 고급한^^; 말 속에 든 엄마의 한마디, 압권이오!

 

 

<멸치의 아이러니>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도시락..)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 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는 것

 

(....)

 

표제시 <훔쳐가는 노래>: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N개의 기억이 고요해진다> - 시 자체보다도 심보선의 무슨 시에 나오는 낱말들로 구성했다다니, 이런 시쓰기도 가능하구나 싶다.   <빌뇌브의 피에타> : 최근 시 <스타바트 마테르>가 생각난다. 이런 식의 이미지, 모티브가 계속 시인에게 있었던 것이다. 쭉 읽다가 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나 또(!) 시인의 말. 시인들은 자신의 책의 처음과 끝을 이렇게 장식(시작, 마무리)하는구나. "이 불미스러운 장수와 질 나쁜 불멸에 나는 곧 무감해질 테지."

 

서른살 무렵,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프카가 죽은 나이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로. 그리하여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 살고, 어쩌면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 불미스러운 장수와 질 나쁜 불멸에 나는 곧 무감해질 테지. 문학은 나에게 친구와 연인과 동지 몇몇 을 훔쳐다주었고 이내 빼앗아버렸다. (...) 2012년 8월 진은영

 

신문 기사를 보니 올해 작가의 신작 시집이 나오는 모양인데 그 전에 빨리 마저 읽어야겠다. 대체로, 시를 읽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 한 20년만인데 참 좋다. (유시민이 암시한 대로^^;) 가장 고급한, 수준 높은 글쓰기는 시, 그다음 소설, 그다음 에세이인 것 같다. 학술논문과 학술서는 그다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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