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죽기 전에 기도는 하지 않겠다.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나는 두렵다. 아름다움이 무엇을 숨기고 있기 때문일까? (...)

불타는 망각의 외투를 껴입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황혼에 취한 늙은 아이처럼

 

 

 

<산책자>

 

오늘 아침에 네가 사라졌다. 네가 나의 발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산책을 무의미하다.

 

오전에 차를 마셨다. 녹색 찻물을 우려 천천히 마셨다.

어제의 환멸이 미지근한 햇빛처럼 창문으로 들어와 발의 언저리에 머물렀다. 이젠, 발이 없구나.

 

오래된 시집을 펼친다. 잿빛 머리카락 같은 게 부스스 떨어진다.

유리컵에는 물이 화병에는 마른 꽃이 현관에는 검은 구두가 늙은 시인처럼 입 벌린 채 완강하게 잠들어 있다.

 

실내에 가득한 공기가 천천히 굳고 있다.

 

아침에 사라진 너는 밤에도 사라진 너이고, 나는 사라진 발을 어루만지면서 산책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

 

막간에 지난 번에 얻어온 시집들을 뒤적이다가 확 꽂히는 시(집)가 있어 옮겨둔다. 시인이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다. 내가 시를 잃지 않는 동안 이렇게 많은 이들이 시를 쓰고 있었다니! 한편, 지난 학기 아이들이 추천?^^해준 시들, 그 덕분에 알게 된 시들을 뒤적이는데, 확실히 사람의 취향이라는 것도 확고한 모양이다. 음,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많은 시들이 세일즈포인트가 낮다...^^;; 세대 감각도 있는 것 같다. 젊은 시들이 어렵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미 중년, 하. 오늘의 (반찬가게에서 주문한^^;) 김치찌개는 너무 맛이었고 그 덕분에 읽고 쓸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특히 이 '쓰다'가 중요한데, 이삼일째 손가락(오른손 중지)이 너무 아파(심지어 부어) 어제 병원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소위 삼점 잡기가 안 되는 아이의 고통도...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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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칼립투스에 기대어 

 

 

 

 

 

 

그날 밤 유칼립투스에 기대어

직립보행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 튼튼하고 발랄하고 관능적인 느낌에 대해,

절묘한 곡선을 품은 두 직선의 몸놀림에 대해

 

우리 집 유칼립투스는 너무 작고 연약해요  

그래도 그날밤 유칼립투스에 기대어 울었네요

내가 울면 유칼립투스도 아파서 울 것 같았지만,

아이의 두 다리도 더 흔들릴 것 같았지만요

울면서,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놀리며 꼿꼿히 서 있는 나무 몸통에 대해

무릎의 각도와 보폭을 유지하며 걷는 두 다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어요  

 

유칼립투스 섬나라에서 만나요

그곳에는 듬직한 나무와 새끼에게 똥을 먹이는 코알라가 가득하대요 

우리 집 유칼립투스는 내가  기대어 울기에는 너무 작고 연약하거든요 

 

 

 

*

 

 

 

 

 

 

 

 

 

 

 

 

 

 

<희망 대신 욕망>의 목차 중 하나. "직립보행의 섹시함에 대하여". 평소 아이의 비틀거리는 다리를 보며, 특히 지난 겨울(이제 정말 많이 돌아왔다, 넘나 다행이다 ㅠㅠ) 제대로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아이, 아이의 다리를 보면서, 동시에 멀쩡히 잘 걷는 대부분의 아이들, 청년들, 장년들, 심지어 건강한 노년들을 보면서 나 역시 '직립보행의 섹시함-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많이 생각한다.  '몸져눕는다'라고 하지 않는가. 걷던 사람이 걷지 못하면..., 흑. 

 

봄맞이 허브도 사고 유카리도 사고 아이비도 사고, 아, 텃밭에 당첨되어 벌써부터 꿈에 부풀어 있다. 아이는 오이를 심자고 하는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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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세상의 소풍

 

 

 

 

 

쉰 살에 장가를 갔어

쉰 한 살에 아이를 낳았어 

쉰 나이를 세며 육아라니

이건 분명 드문 일인데 늘 만감이 교차해

 

시옷 둘에 시나브로 시들시들 시어터지고

발음도 영 시원찮고 눈도 시답잖은 쉰 살에 

이건 분명 드문 일이라 딴 세상의 소풍 같아

29년 동안 피운 담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

 

 

 

 

 

 

 

 

 

 

 

 

 

 

 

"어린 토끼는 처음 맞는 이상한 광경에 어리둥절 달아나지도 못하고,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아마 딴 세상의 소풍일 거라 짐작했다."

 

- 어느 지인과 주고 받은 문자에서:  "... 이건 분명 드문 일인데 늘 만감이 교차..." 이런 사실도, 사용된 어휘도 재미있지만, '- 인데'라는 연결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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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개구리에게

 

 

 

 

 

그러게, 왜 벌써 나왔니?

너무 살고 싶어서 너무 빨리 죽었구나

올해 경칩은 3월 5일인데

 

(202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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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주문하여 읽고 있다. (나에게는^^;) 좀 권위 있는 분이 좋다고 하셔서 우선은 <빛그늘>부터 펼쳤다. '산문시'라던가. 이야기가 있는 시들이 좋았다, 그냥(?) 시보다. 다 옮겨 적으려니 힘에(-이) 부쳐 일부만 쓰지만, '이야기'가 좋은 '시'였다. 이야기가 좋으니 말맛(시의 맛, 시어의 맛)도 살아난다. 내용과 형식은 한 몸.

 

 

 

 

 

 

 

 

 

 

 

 

 

 

 

 

 

<이불 장수>

 

동대문시장 이불 장수가 나를 붙잡는다. (...)

 

사십년 이불 장사 베타랑의 수완에 말려들어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많은데 마음에 드는 게 없다니, 가격이 맘에 안 드나요? (....) 가격을 올린다. 어느새 둘둘 말아 포장을 한다. 카드를 내미니 현금 내면 십 프로 할인해준다고 한다. 호랑이도 장미꽃도 공작새도 다 가짜라는 거 안다. 이불 덮고 항우울제를 삼키고 눕게 될 것이다. 벌떡 일어나 소비자고발센터에 전화라도 해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꼼짝 못한다. 시장에서의 현급 결제는 반품이 안 된다고 했다.

 

이불 덮고 누워 곰팡이 코르디셉스를 읽는다. 코르디셉스는 왕개미 거미 속에 들어가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그러면 개미는 한낮에 나무로 올라가 나뭇잎을 물고 매달린다. 꼼짝 못하다 저녁 무렵 죽는다. 곰팡이는 밤사이 개미 머리를 뚫고 자라나 포자를 흩뿌린다. 포자는 나무 아래를 지나는 또다른 개미들에게 낙하 침투한다. 포자가 침투할 최고의 장소로 개미를 유혹해 나뭇잎에 매달리게 한 것은 곰팡이 코르디셉스. 어떤 화학작용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것일까, 호랑이 이불을 덮고 곰팡이 코르디셉스를 읽는다.

 

 

<기다란 그것>

 

그것은 논둑길을 가로질러 걸쳐져 있었다. 도망 중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길을 막고 쉬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서 비명을 지른 것은 나였다. 중학생 사촌이 그것을 막대 채찍으로 때리고 때리고 때렸다. 뱀은 아무 잘못이 없었으나 꼼짝하지 않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의기양양해진 사촌이 뱀을 막대기로 들어 올려 길가 물푸레나무 가지에 걸쳐놓았다. 그날 이후 그 나무 지나치지도 못하겠고 고개 들지도 못하겠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걸쳐 있던 뱀은 어딘가로 가고 없고 얇고 투명한 껍질만 걸려 나부끼던 그 장면, 죽은 척 살았던 그것, 죽어서도 살아 달아났던 그것.

 

베개 위에 누운 기다란 머리카락, 구부정 누운 한가닥, 지난밤에 죽은 듯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는, 잠시만 내 몸이었던 것, 당신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내게도 일어난다. 기다린 그것이 빠져나갈 동안 당신이나 나나 기댈 곳은 없고.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

 

산에 나무를 심으러 간다고 간 것이었는데 어린 토끼와 마주치게 되었다. 식목일이었고, 우왕좌왕하는 토끼 한마리를 향해 아이들이 고함치며 달려들고 있었다. 어린 토끼는 처음 맞는 이상한 광경에 어리둥절 달아나지도 못하고,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아마 딴 세상의 소풍일 거라 짐작했다. 누가 토끼에게 바위 밑 구멍을 가리켜준 듯 토끼는 재빨리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고, 귀에 고함 소리 가득했으나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 소리 다 흩어질 때까지, 그들이 다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졸업 삼십주년이 될 때까지. 누군가 구멍 속으로 연기를 피워 넣자고 했고, 젖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고, 그러면 토끼가 튀어나올 것이라 했다. 그러나 죽어본 적 없는 어린 토끼 뭐가 뭔지 몰라 무작정 굴속에서 기다렸다. 외롭고 어둡고 어지러운 이상한 소풍날, 기다리기만 하면 이 마술의 끝이 올 것만 같았는데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고, 빨간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그냥 죽었다.

 

구멍에 손을 뻗어 휘젓다가 축 늘어진 토끼를 꺼낸 것은 은기였다. 졸업 삼십주년 동창회에서 은기가 말했다. 학수는 선생들이 토끼탕을 먹는 것을 보았다고, 토끼가 펄펄 끓던 학교 가마솥을 누구보다도 잘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토끼를 마주친 것은 식목일이 아니라 눈발 날리는 초겨울이었다고 성만이 말했다.(....)

 

<물고기 얼굴>

(...)

유사성이란 별똥별처럼 휙 지나며 눈앞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던데 보고 싶은 대로만 보니 물고기 얼굴에 인간 얼굴이 찍히며 펄떡, 펄떡, 펄떡.

 

 

* *

 

기본적으로 정가가 아니라(백화점) 흥정을 해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을 많이 (따라) 다닌지라 <이불 장수>는 내내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지막, 곰팡이균 얘기, 흐억. <기다란 그것>의 뱀(을 목격한 아이들),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의 토끼(와 어른이 된 아이들) 역시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비슷한 느낌. 토끼 묘사, 너무 좋아! 공포나 고통보다는 당혹감, 공감된다. 그밖에 신문 기사에서도 많이 인용된 <1mg의 진통제> 같은 이른바 '병원시'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좋다. <참깨순> 같은 것.

 

 "참깨순 나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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