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이다 






오늘도 

두 다리로 거리를 걷는 나를,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는 나를, 

거울을 보는 나를, 사람들의 동공에 어린 나를, 

유리에 비친 나를, 아이들을 돌보는 나를,

시간 속에 봉인한다 


나는 눈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정작

나는 별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들 계신지?


나는 네거티브 필름에 봉인된

눈이다 






비비안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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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판타지- 50년생 유숙이의 시점  






1.



"엄마, 저어기 갈 때 우리 형우 술 버릇 좀 가져가줘요."

아흔 일곱 살 노인에게 한 부탁이 잘못 전달되었는지 

다음날 마흔 두 살 아들이 저어기로 갔고 

빨간 양귀비 머그잔이 손에서 툭, 와장창 깨졌다


2. 


이 세상에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고 

모든 문제는 살아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

죽음이란 딴 세상의 소풍일 뿐인걸,

이제는 아무 문제 없으리라 안심했건만  

이게 웬일인가 


일, 소 팔러 다니는 아비 손 잡고 야밤의 산길을 걷고  

이, 아무리 졸라도 어미는 장날 풀빵 하나 안 사주고

삼, 나뭇판자 얼기설기 이어 놓은 통시에 백열등이 뜨겁고

사, 업고 걸리고 똥 치우고 동생들은 언제 클지 까마득하고 

오, 두 딸은 밥 달라고, 아들은 젖 달라고, 남편은 술 달라고 보채고 

육, 따도 따도 담뱃잎은 무성하기만 하고 심어도 심어도 모내기는 끝이 없고

칠, 슬레이트 지붕 집 쪽방은 헐값에 내놔도 들어오는 사람 하나 없고 

이하, 중략할 수밖에 것은 

내 인생의 나지막한 네모칸은 텍사스의 모텔처럼 무한대로 이어지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고, 그럼에도

다시 저기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죽은 뒤에도 

인생은 진퇴양난, 아니, 새옹지마


3. 

  

죽으면 아무 문제 없으리라는 생각은 죽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신곡>조차 읽지 않은 우리의 천진난만한 바람일 뿐, 

저어기 들어가는, 여기 들어오는 우리는 모든 희망을 버릴 것,

이것이 바로 저승 판타지의 기본 전제올시다 




____________


딴 세상의 소풍... 최정례, 빛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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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가혹한 - 퇴폐미의 한 양상 






1


여름은 절화에겐 가혹한 계절 

모든 꽃이 살판나는 여름, 절화는 죽을 맛



2


장미 꽃대는 성냥개비처럼 연약하고 얼굴은 반쪽이고 

꽃잎은 겹겹이 습이 져 연갈색 누룩곰팡이를 피운다


리시안셔스는 얇은 꽃잎 속에 푸른곰팡이를 감추고

꼬물꼬물 애벌레들은 꽃잎을 뜯어 먹고  똥을 싸지


파스텔 거베라 얼굴 가득 저승꽃이 점처럼 박혀 있고 

핏빛 거베라 얼굴 따라 뽀얀 곰팡이가 벨벳처럼 부드럽다 


해바라기는 졸지에 모가지가 가늘어서 슬픈 꽃,

테디베어 모가지가 절로 댕강 잘린다, 노란 참사 


이건 일상다반사란다, 아이야,

안녕, 잘 가렴!



3


참수되기 전까지는 꽃대가 짓물러도 버텨야지,

그러게, 여름은 얼른 죽지도 못하는 가혹한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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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방학 때는 열심히 탐구생활을 했다, 1980년대였다 

정육면체를 단번에 그리지 못해 엉엉 울며 공책을 찢었다

소련 국기는 별과 낫과 망치, 미국 국기는 열세 줄 별 쉰 개

세계는 철의 장막과 냉전 중,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희망과 수면과 웃음이 넘쳐나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다

카프카의 도끼도 니체의 망치도 없이, 돼지 꼬리만 봐도 

웃음보 터져 내장과 횡경막과 허파가 아름답게 진동하니 

나는 매일이 꽃날, 쑥쑥 자라서 어느덧 어른이 되었답니다 


이제야 말인데, 

공산당 선언과 이기적 유전자, 영웅문과 이방인은 같이 읽어도 되는 책이거든요

인간이란 구강과 항문의 긴 파이프에 달라붙은 감각 기관의 총체일 뿐,

그래서 이번 방학 때도 탐구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한다, 2020년대다

(2022-08-06)



--

"그것은 자극-반사 시스템으로서의 인간, 즉 구강과 항문의 긴 파이프에 달라붙어 있는 감각기관의 총체로 이해되는 새로운 인간의 이미지다."(김홍중, 펠레빈 <P세대> 리뷰). /천경득 망치부인 / 유시민알쓸신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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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상이 없다 





나는 작가인데 

집에 책상이 없다 

나는 번역가인데 

집에 책상이 없다 

나는 인문학자인데

집에 책상이 없다


책상이 없는 집에는

내가 없다, 혹은

책상이 없는 집에 있는

나는 엄연히 다른 나다

책상이 없는 내가

나는 한없이 낯설다


급기야 

이것은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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