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날, 떡붕어 아저씨는 하루 종일 강을 끼고 살았다. 떡밥을 쓰지도, 그물을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수확은 형편없었다. 손에 넣은 몇 안 되는 물고기들은 모두 상처를 입은 채로 다시 강물 속으로 보내졌다. 다음날엔 비가 왔다. 떡붕어 아저씨는 속이 훤히 비치는 비닐 우비를 입고 강가로 나왔다. 물속으론 들어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자리를 옮겨가며 낚싯대를 지켰다. 떡붕어는커녕 입질 한 번 제대로 하는 녀석도 없었다. 다음날도 비가 왔다. 그래도 떡붕어 아저씨는 강가를 지켰다. 미꾸라지와 싱싱한 산 지렁이를 미끼로 준비했다. 운이 좋아 메기가 물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신이 났다. 하지만 정작 잡고 보니 아직 살날이 제법 많이 남은 녀석이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대로 풀어주었다. 다음날엔 날이 갰다. 이틀간 계속해서 내린 비로 강물이 눈에 뜨일 정도로 불어났다. 떡붕어 아저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맛보는 뜨거운 태양이 낚시의 맛을 돋웠다. 덩달아 떡붕어 아저씨의 온 몸이 휘청거릴 만큼 힘이 좋고 커다란 가물치가 걸려들었다. 아저씨는 가물치를 품안 가득 안고 강가로 나왔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구덩이 오막살이를 찾아갔다.

 

땅 속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길게만 느껴졌다. 구덩이도 그 사이에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마당에 이르러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덩이가 더 깊어졌는지 어째 하늘이 더 푸르러보였다. 떡붕어 아저씨는 구덩이 오막살이의 가장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소영이의 방이 보였다. 부엌문은 열려 있었고 소영이의 할머니는 문지방 앞에 발을 모은 채로, 대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생생한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다. 소영이는 그 석고상의 다리 위에 머리를 얹은 채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비스듬히 세워진 소영이의 등 위에는 할머니의 손이 얹혀 있었다.

아저씨!”

거의 절규하듯 외치면서도 소영이는 몸을 일으키진 않았다.

아저씨, 할머니가 차가워. 등을 쓸어주지도 않아. , 울 거야!”

그러고는 할머니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연탄집 아줌마가 나타났다.

소영아, 밥 먹어야지!”

소영이가 얼굴을 들었다. 눈물범벅이 돼 있었다. 연탄집 아줌마는 당황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몸에 선뜻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 사이에 떡붕어 아저씨의 품에서 커다란 가물치가 툭 떨어졌다. 살이 시커먼 흙바닥에 닿자 가물치 역시 당황하여 온 몸을 비틀어댔다.

 

어차피 오늘내일 하던 사람이었지만 있던 사람이 없어지는 일은 충격이었다. 구덩이 오막살이는 숙연한 가운데 분주해졌다. 배추집 아들이 냉큼 달려가 다슬기 할매를 불러왔다. 할매의 손에는 딸랑이 장난감 같은 물건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그 동안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소영이 할머니를 방바닥에 곱게 눕혔다. 전깃불도 켰다. 순식간에 방안이 밝아졌다. 할머니의 얼굴이 이렇게 환해 보인 적이 없었다. 소영이는 팅팅 부운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슬기 할매는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딸랑이를 울리며 할머니의 몸을 향해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현관 문 앞에 줄 지어 서서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다슬기 할매가 밖으로 나오자 다들 차례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영이 할머니에게 한 번씩 절을 올렸다. 그 일이 끝나자 연탄집 아저씨와 사과집 아저씨가 할머니의 몸뚱어리를 거적때기로 둘둘 감았다. 그들이 거적때기를 어깨에 들쳐 메고 나오자 구덩이 오막살이는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숨과 온기가 사라진 소영이 할머니는 구덩이 한 가운데의 뜰에 묻혔다. 쌀집 아줌마는 귀한 쌀알을 뿌렸고, 배추집 아줌마는 푸르고 싱싱한 배춧잎 하나를 얹었다. 연탄집 아줌마는 아직 태우지 않은 새카만 연탄을 곱게 부숴 그 가루를 뿌렸다. 조장집 아줌마는 아저씨가 뇌물로 받아온 막걸리 한 사발을 뿌렸다. 사과집 아줌마 역시 제일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를 한 입 베어 소영이 할머니의 무덤 위에 놓았다. 소영이는 평소와는 다른 왠지 모를 숙연한 분위기에 놀라 잠깐 울음을 그쳤다가 이내 곧 엉엉 울었다. 사람이 차가워지고 손을 움직이지 못하면 땅속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왠지 무섭게 느껴졌다.

바보, 울긴 왜 울어? 작년에 우리 할아버지도 여기 묻었잖아. 그래서 지난 가을에 감이 그렇게 맛있던 거야. 너희 할머니 때문에 올 가을에도 감이 맛있을 거야. 뚱딴지도 더 잘 자랄 테고.”

배추집 아들이 소영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오빠 바보야. 감이 맛있으면 뭐해! 뚱딴지 꽃이 예쁘면 뭐해! 우리 할머니 죽었단 말이야!”

소영이는 악을 쓰며 말했다.

여기 땅 속에 있는 거라니까. 네가 감을 맛있게 먹으면 할머니도 좋아할 거야.”

오빠는 똥쟁이, 똥자루야!”

소영이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동안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떡붕어 아저씨가 잡아온 가물치를 다듬었다. 얼큰한 가물치 매운탕 앞에서 다들 또 한 번 숙연해졌다. 밥상은 구덩이 오막살이에서 방이 제일 큰 조장집 안방에 차려졌다. 오늘 큰일을 치룬 다슬기 할매가 상석에 앉았다. 가물치의 머리와 살이 연한 가슴팍 부분은 할매 차지가 됐다.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국에 밥을 말아먹을 때 소영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

 

할머니가 죽은 뒤에도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소영이에게 밥을 주었다. 자기 아이들이 못 입는 옷도 갖다 주었다. 하지만 소영이의 방세를 내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주인이 등장했다.

 

구덩이 오막살이의 주인은 참 착하고 건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건물이 참 많았고 그의 일은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공장지대 옆에 지어진 5층짜리 아파트도 그의 것이었다. 구덩이 오막살이는 그의 건물 중 가장 저렴한 곳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자기 건물을 돌며 무슨 문제가 있나, 없나를 점검했다. 기물을 파손한 자는 문고리 하나라도 배상을 해야 했다. 야심한 시각에 건물 주위에서 노상방뇨, 고성방가 하는 사람은 한 시간씩 이어지는 그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이 설교가 너무 곤혹스러웠기 때문에 재범은 절대 없었다. 이렇게 그는 자기 건물의 안팎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방세에 관한 한, 그는 날짜를 어기는 일이 절대 없었다. 늘 정해진 날짜에 장부를 들고 세입자 앞에 나타났다. 세입자들도 그의 성실성과 꼼꼼함을 높이 사, 그가 나타날 시각에 하얀 돈 봉투를 준비해두었다.

 

주인은 시간표를 꼼꼼히 따져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시간에 구덩이 오막살이에 나타났다. 최근 구덩이 오막살이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어서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다. 자살도, 사고사도 아니었지만 사람이 죽어나간 방은 그 자체로 골치였다. 방 구석구석에 밴 산송장 냄새는 방향제를 아무리 뿌려도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구덩이 오막살이, 그 중에서도 지하 단칸방에 떨어지는 인생들이란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과 습기와 곰팡이는 그들이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슬픈 실존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세를 놓으려면, 눈 가리고 아웅 식이라도, 장판도 깔고 도배도 새로 해야 했다. 드디어 행동을 취해야 할 때가 왔다.

 

방세는 소영이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몇 달이나 밀려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독촉을 하지 않았다. 대신 보증금에서 월세를 꼬박꼬박 깎아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죽기 직전 이미 그 보증금도 바닥났다. 그런데도 주인은 무려 칠일을 그냥 참아주었다. 할머니가 죽은 뒤엔 애도 차원에서 무려 사일을 더 참아주었다. 이 정도면 죽은 자도 부활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 더 이상 사태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주인은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 소영이에게 이 원칙을 열심히 설명했다.

알겠지, 방세를 내지 않고 계속 남의 방에 사는 걸 패륜이라고 하거든. , 네가 여기 계속 있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겠지? 하지만 네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겠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냔 말이야?”

맞아. 다슬기 할매가 그랬어. 나는 시집도 못 보내고 식모살이도 못 보내고 학교도 못 보낸대.”

그래, 그래, 하지만 고아원에는 보낼 수 있거든.”

그게 뭐야?”

엄마 아빠 없는 애들이 가는 곳이란다.”

엄마 아빠는 원래 없었어.”

휴우, 엄마 아빠가 원래 없었을 수는 없거든.(여기서 주인은 한숨을 내쉬고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이런 것까지 너한테 설명해줄 시간이 없어서 유감이지만, 어쨌거나 너는 지금 고아원에 가야 해.”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너처럼 돌봐줄 어른이 없는 애들이 가는 곳이야.”

나는 돌봐줄 어른 있어! 할머니 있잖아!”

너희 할머니는 죽었잖아?”

우리 할머니 죽었어. 그래서 저기 있잖아!”

소영이는 구덩이를 가리키며 악다구니를 썼다. 그러자 기어코 다슬기 할매가 나섰다.

 

문디 가시나, 이년이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노! 이봐, 자네 말인데,”

다슬기 할매는 옆에 서 있던 떡붕어 아저씨에게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여태 장개도 못 갔제? 자 데려가서 좀 키우다가 색시 삼아. 자가 머리가 좀 모자라긴 해도 상이 좋다. 자 눈썹 안에 새카만 점 보이제? 저게 지금은 조그만 해도 커질 거야.”

저 점이 뭐예요? 돈 자루라도 갖다 줘요?”

떡붕어 아저씨 대신 주인이 관심을 보였다.

머시라, 돈 자루? 아니, 이 영감이 오뉴월에 씨불알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아이참, 할머니 아이들 앞에서 무슨 그런 쌍스러운 말을 하고 그러세요! 그리고 이 할머니 정신 줄을 놨나, 내가 왜 영감이에요? 아직 육십도 안 됐는데.”

주인은 버럭 화를 냈고 다슬기 할매는 대거리를 했다. 둘 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구덩이 오막살이가 들썩거렸다.

그뿐이 아니다. 사주에 경금이 있어, 경금이. 잘만 키우면 크게 될 기다.”

경금? 금이니 그건 돈이라는 거 아니요? 시치미 떼지 말고 좀 말해 봐요!”

또 다시 주인이 까불어댔고 다슬기 할매는 또 역정을 냈다. 그 사이에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 손을 잡고 구덩이 쪽으로 걸어갔다.

 

너 아저씨 집에 갈래?”

떡붕어 아저씨가 물었다. 소영이는 왠지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할머니 여기 있어. 나 아무 데도 못 가.”

여기 있어도 할머니는 다시 못 보는 거야.”

거짓말이야. 할머니 구덩이 밑에 있어. 좀 있다가 구덩이 밑에서 나올 거야. 할머니 일어나면 봐야 해. 할머니 안 일어나면 내가 구덩이 팔 거야.”

네가 여기 있어도 구덩이는 사라질 수 있어.”

에이, 또 거짓말이야. 구덩이가 어떻게 사라져?”

떡붕어 아저씨는 여기서 말문이 막혔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강가로 돌아갔다. 밤에도 그는 낚싯대를 걸어놓고 그 옆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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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과 초월의 철학

-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서 출발하여, 채찍질당하는 말을 껴안고 우는 니체를 애도하며 끝나는 철학 소설. 성과 사랑, 정치와 역사에 관한 소설이자 그런 모든 소설에 관한 소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바치는 체코 작가의 오마주.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시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9)

 

쿤데라의 해석은 이렇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einmal ist keinmal)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이 일회성은 가벼움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가치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한다!”(Es muss sein!), 즉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여 과연 그래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사건은 전부 단 한 번뿐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삶과 한 국가,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들까지 내팽개친 이혼남 토마시는 꾸준히 여자 사냥에 몰입한다. 그것은 관능의 욕망이 아니라 세계 정복의 욕망’, 지상에 머무는 육체를 메스로 개봉하고자 하는욕망의 산물이다. 이런 토마시 앞에 강에 버려진 아이처럼 테레자가 나타난다. 그의 침대는 졸지에 아이가 정착한 강변으로 바뀐다. 그리고 섹스는 하되 동침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이 와해된다. 이제 술을 마시지 않으면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갖기도 힘들다. 테레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롭던 돈 후안 속에 숨어 있던, ‘동정연민으로 고통 받는 트리스탄이 나타난다. 가벼움이 무거워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늙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녀만이 중요했다. 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es muss sein!”의 피안(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338)

 

토마시의 삶(개인사)은 그의 조국의 삶(역사)과 평행선을 이룬다. 체코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통감하고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왕처럼 제 눈을 찌를 것을 촉구한 기사가 직접적인 문제가 된다. ‘철회의 요구와 타인들의 웃음앞에서 그는 추락의 길을 선택한다. 프라하의 유능한 외과의사에서 도시 외곽 병원의 허름한 의사로, 유리창을 닦는 노동자로, 급기야 시골의 트럭운전수로. 한데 문제의 기사의 화두를 제공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테레자가 환기시킨 버려진 아기의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다시 개인사로 회귀한다. 쿤데라가 선보인 독특한 시간 사용법과 시점을 빌려 테레자의 경우를 보자.

 

그녀에게 토마시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다름 아닌 그가 내가 일하는 곳에 왔고 다름 아닌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에 앉고 다른 것도 아닌 책을 갖고 있고(상승 욕구를 가진 그녀는 책을 숭배한다). 테레자는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다. 프라하에 나타난 그녀의 손에 들린 책 <안나 카레니나>는 이 점에서 대단히 상징적이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난 날, 그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기차에 치여 죽는다. 소설의 마지막, 안나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지나치게 소설적인이 구성이 실은 우리의 삶의 실제 모습이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삶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Es muss sein!). , 무겁다. 이런 그녀에겐 가벼움이 오히려 고통이다. 그녀가 육체(섹스)와 영혼(사랑)을 별개로 생각하는, 그러고자 하는 토마시를 참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토마시와 테레자는 15여년의 세월을 함께 한다. 보헤미아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함께 프라하의 봄을 맞았으며 소련의 체코 침공 때 함께 스위스로 떠났고 다시 체코로 돌아온 뒤에는 역시나 함께 매장의 시기를 보냈다. 단 한 번뿐인 삶이 종결되는 순간도 공유한다. 그 직전, 그들의 사랑과 삶은 무거움을 한아름 껴안은 가벼움에 다다른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중략)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야!”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483)

 

이어 테레자의 감정에 대해 작가는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라고 쓴다. 실은 카레닌의 미소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 자체가 그러하다.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해 미리 알고 난 다음 그들의 슬픈 행복을 읽는 기분이 묘하다. 단 하나뿐인 삶, 단 하나 뿐인 나, 단 하나뿐인 너, 단 하나뿐인 카레닌. 어찌해도 이것은 가벼움이 아니라 무거움이다. 이 비극과 마주한 우리에겐 유아적인 자기 연민을 넘어선 뭔가가 필요하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긍정과 초월의 철학이다.

 

-- 네이버 캐스트

 

-- 무척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며 희한하게(?) 바뀐 이름들(토마스 - 토마시, 테레사 - 테레자 등)에 좀 놀랐으나, 대단한 수작이었다는 옛 기억이 새롭게 환기되더라고요. 소설 속에 숨어 있는 <안나 카레니나>, 니체의 영원회귀 등도 예전보다 더 잘 보이고, <프라하의 봄>에서 열연한 (이제는 늙어버린 ㅠ.ㅠ)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에트 비노쉬도 떠오르고... 어떻든 쿤데라의 다른 소설들도 다시 읽을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  마침 전집도 나오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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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도 강가의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다슬기 할매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은 채 탁한 물속에 코를 들이밀고 있었다. 간간히 외지 사람들이 보였다. 한 남자가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양복차림이어서 유난히 눈에 띠었다. 근처에 그의 승용차가 서 있었다. 무리를 지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강물에 다리를 깊숙이 담근 채 일렬로 서 있었다. 오른손에는 다들 견지를 들고 있었다. 떡밥을 뿌렸기 때문에 물고기들은 모조리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물고기가 걸려들 때마다 그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낚시를 끝낸 뒤에는 강가에 쳐놓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소주잔도 돌았다. 얼마 안 가 강 주변이 뿌연 연기와 고기 냄새, 술 냄새로 가득 찼다. 양복을 입은 남자는 툴툴 대며 낚싯대를 접었다. 곧 그의 차는 강가를 빠져나갔다. 소영이는 저들이 오늘 다슬기 할매의 해장국을 팔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

 

골이 난 건 떡붕어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은 이미 오래 전에 딱딱하게 굳어져 내면의 다채로운 감정을 담아낼 수는 없었으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떡밥에 대해 그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이때만은 그도 사심 없는 생태주의자가 됐다. 강물과 물고기 건강을 해치는 데 떡밥만큼 고약한 건 없었다. 덧붙여 저놈의 고기와 소주만큼 자연을 망가뜨리는 것도 또 없었다. , 그런 게 하나 더 있다면 바로 저런 인간들이었다. 떡붕어 아저씨도 바로 그 인간에 속하면서도 괜히 혼자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가 성질이 난 가장 큰 이유는 물고기들이 괘씸해서였다. 아침부터 지금껏 피라미 새끼 하나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이다. 직접 키운 미끼도 다 바닥났다. 떡붕어 아저씨는 마지막 남은 미끼통을 꺼냈다. 아까 다슬기 할매의 비닐하우스에서 공짜로 얻어온 것이었다. 그가 미끼통의 뚜껑을 열자마자 소영이는 야단스레 소리를 질렀다.

으악, 징그러워!”

조그맣고 불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속에는 자잘한 톱밥이 가득했고 그 안에서 구더기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더러 하얀 구더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새빨갛게 익은, 말하자면 이미 숙성한 구더기였다. 어떤 녀석은 몸에 벌써 날개가 돋고 있었고, 어떤 놈은 이미 완전해진 날개를 파닥거리며 파리로서의 첫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공짜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속으로 다슬기 할매를 원망했다. 그래도 제법 쓸 만한 두 놈을 골라냈다. 상자는 아예 엎어버렸다. 톱밥과 자잘한 구더기들이 주위로 흩어졌다. 아직은 도톰하고 뽀얀 구더기 두 놈은 떡붕어 아저씨의 제물이 됐다. 몸이 꺾이고 바늘에 끼워지는 내내, 녀석들은 바동거리며 괴상한 춤을 추었다. 그 동안 자갈 위에 널브러진 빨간 구더기들은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순식간에 어른이 됐다. 몸 옆에 점처럼 붙어 있는 날개를 파닥이는 순간, 녀석들은 파리가 되어 아저씨 주위를 맴돌았다.

으악, 아저씨는 저 구더기가 징그럽지도 않아?”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의 대답을 기다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이제야 소영이의 존재를 인지한 듯 잠깐 놀란 눈을 치켜 올렸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한쪽 팔을 크게 돌리며 낚싯대를 강물로 던졌다. 그래도 한 번 입을 뗀 소영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 징그러운 걸 어떻게 손을 만져, ? 아저씨 왜 말 안 해? 아저씨 벙어리야?”

갑자기 떡붕어 아저씨가 소영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축축하고 퀴퀴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영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의 호들갑엔 아랑곳하지 않고 자갈돌 위에 놓아둔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제멋대로 자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텁수룩한 수염 사이, 거무스름한 구멍에서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소영이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눈도 매워왔다. 저 쪽 천막에서는 아직도 고기, 술잔치가 한창이었다. 강가가 온통 매캐한 연기로 뒤덮였다. 오직 다슬기 할매만이 물이끼가 가득 낀 돌 위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소영이는 담배 연기를 피해 다슬기 할매 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슬기 잡는다는 핑계를 대며 물장난을 하고 놀았다.

 

 그날 밤 소영이는 할머니와 함께 툇마루에 앉아있었다.

아참, 할머니, 어제 그 아저씨 말도 할 줄 모르나봐. 나는 그래도 말은 할 줄 알잖아, 그치? 그러니까 나는 바보 아니야, 그치, 할머니?”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회색이 동공을 덮고 있어 할머니의 눈은 늘 흐릿했다. 간혹 빨간 핏줄이 자잘하게 번져있기도 했다.

할머니, 우리 이제 그만 자자, ?”

할머니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방에 들어가서 자라는 뜻이었다.

할머니는 또 고양이 잠, 토끼 잠 자는 거야?”

소영이는 이렇게 말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옆에 함께 눕지 않은 지 오래였지만, 쉽게 잠이 들었다. 왠지 할머니가 툇마루에서 자기를 지켜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소영이는 툇마루로 나갔다. 툇마루도 방안 못지않게 후텁지근했다. 구덩이 오막살이에는 빛이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도 좀처럼 머물질 않았다. 소영이는 수돗가로 나가 세수를 했다. 그 동안에도 할머니는 침침한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쌀집 아줌마가 쟁반에 아침을 담아왔다. 아욱 몇 장이 떠 있는 맑은 된장국과 흰 쌀밥이었다. 갓 담은 겉절이도 있었다. 소영이는 군침이 돌았다. 눈 깜짝할 새에 밥 반공기가 비워졌다. 그제야 할머니의 움푹 팬 두 눈에 미소 섞인 눈물이 고이는 걸 알아챘다. 소영이는 왠지 미안해졌다.

또 내가 나가야 밥 먹을 거야?”

할머니는 빙긋이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나가 놀라는 뜻이었다. 소영이는 구덩이 오막살이를 나왔다.

 

 

*

 

날이 푹푹 쪘다. 강가에는 여기저기 천막이나 파라솔이 쳐져 있었다. 물놀이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를 찾기 위해 한참을 걸었다. 그는 물살아 가팔라 인적이 드문 곳에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다. 낚싯대 위에 걸쳐진 그의 손에선 여전히 톱밥 썩는 냄새가 났다. 강 너머 어디로 던져 놓은 시선도 여전히 멍했다. 자갈 위에는 요사스러운 물건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아저씨도 나처럼 바보야? 여기는 물고기 없어.”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기 더러운 물엔 많이 살아..”

.”

여기는 물이 너무 맑아서 아무것도 안 살아. 살아도 덜 떨어진 물고기만 살아.”

.”

떡밥 뿌려, 아저씨. 그럼 물고기들이 몰려와.”

 

갑자기 떡붕어 아저씨의 손이 퍼뜩 움직이는가 싶더니 눈에 광채가 일었다. 그는 팔을 휘두르며 챔질을 시작했다. 낚싯대 끄트머리에서 작은 생명체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날 오후의 햇빛을 받아, 은빛 비늘이 총천연색으로 반짝였다.

우아! 물고기다!”

소영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미끼를 문 물고기를 낚시 바늘에서 떼어 냈다. 또 떡붕어였다. 그는 투덜대며 물고기를 다시 강물에 풀어주었다. 소영이가 옆에서 왜 풀어 주냐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아저씨 바보야? 이러니까 그물이 텅텅 비어 있는 거야!”

떡붕어 아저씨는 신경질이 났다. 후텁지근한 뙤약볕에 온 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그럴 듯한 참붕어가 올아 와도 뭣 할 판에 계속 떡붕어만 걸려들었다. 옆에서 앵앵거리는 꼬맹이 소리가 짜증을 더 부채질했다. 벌써 며칠 째였다.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은 계집애였다.

 

잠시 뒤 또 신호가 왔다. 이번에도 상황은 똑같았다.

우아, 또 붕어다! 아저씨, 이 붕어 가지고 붕어빵 만들 거야?”

탱자만큼 크고 동글동글한 두 눈에서는 호기심이 데굴데굴 굴러 다녔다. 그는 소영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막 잡은 떡붕어를 강물 속으로 획 집어던졌다.

에이, 왜 또 놓아줘? 그럴 거면 뭐 하러 잡아? 왜 한마디도 한 해? 아저씨 벙어리야? 에잇, 벙어리! 꼬마 소영이는 바보고 아저씨는 벙어리다!”

소영이의 조잘거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저씨는 미끼통의 뚜껑을 열었다. 지렁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영이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꿈틀대는 지렁이 한 마리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어 낚시 바늘에 꽂았다. 낚시 바늘이 몸속으로 들어오자 지렁이는 너무 고통스러워 허공을 사방팔방으로 휘저으며 몸부림을 쳤다. 그래도 그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지렁이 몸을 세 번을 꺾어, 꼭 넓적하고 긴 어묵에 꼬챙이를 끼듯, 굵은 바늘땀으로 천을 누비듯, 낚시 바늘에 꿰었다.

으악!”

지금껏 씩씩대며, 무엇 때문인지 입가로 침까지 흘러가며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소영이가 드디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떡붕어 아저씨는 천연덕스럽게 낚싯대를 물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아저씨, 이제 보니 나쁜 사람이었구나! 지렁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응수를 안 해주자 소영이는 그의 팔을 콕콕 찌르면서 대들기 시작했다.

지렁이가 피를 흘리잖아? 물에 담그면 숨 막힐 거 아니야?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야.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기 눈에 피눈물 나. 아저씨 눈에 피눈물 날 거야.”

떡붕어 아저씨는 한 손에 낚싯대를 쥔 채, 다른 한손으로 능수능란하게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아저씨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첫 담배 연기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소영이의 얼굴을 뒤덮었다.

으악! 담배 연기 싫어!”

소영이의 새된 비명에 떡붕어 아저씨도 폭발해버렸다.

거참, 고기도 안 잡히는데 조그만 게 되게 귀찮게 구네.”

그는 무척 아깝다는 듯 한 모금을 더 깊이 빨고는 담뱃불을 껐다.

우아! 역시 아저씨 말 할 줄 아는구나. 그런데 아저씨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담배 피우면 바보 낳는대. 우리 엄마가 나 가졌을 때 담배를 많이 피워서 내가 바보가 된 거래.”

, 너 집에 안 가냐? 엄마 아빠가 걱정하시잖아.”

엄마 아빠 없어.”

소영이의 말에 잠깐 뜸을 들인 뒤 그가 물었다.

그럼 누구랑 살아?”

할머니랑.”

할머니 좋아?”

소영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지만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자주 울어. 내가 바보라서 그래. 내가 바보라서 엄마 아빠가 밥을 안 먹었대. 대신 술만 먹었대. 엄마는 담배만 더 많이 피웠대. 그래서 빨리 죽은 거래. 요새는 할머니도 이상해. 말 하는 법을 까먹었어. 걸음마도 못해. 그래도 밥은 먹어. 잠도 자, 고양이처럼, 토끼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

떡붕어 아저씨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아저씨가 집까지 데려다줄까?”

소영이는 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떡붕어 아저씨는 낚시 장비를 챙겼다. 그러곤 소영이의 손을 잡고 구덩이 오막살이로 향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따라 구덩이 오막살이로 들어섰다. 돌계단에 이르렀을 때 바로 옆 변소 문이 열리며 사내애가 하나 나왔다.

저 오빠는 배추집 아들이야. 똥을 하루에도 두 번씩, 세 번씩 싸. 미워 죽겠어!”

소영이는 못 생긴 소년을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배추집 아들은 혀를 한 번 내밀곤 자기 집으로 뛰어갔다.

현관문은 오늘도 열려 있었다. 하지만 툇마루가 텅 비어 있었다.

할머니!”

목소리가 불안했다. 소영이는 조심스레 툇마루 위로 올라갔다. 열린 방문 너머로 형상 하나가 보였다. 그것은 방구석에 발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잔영처럼, 앉은 자세로 그대로 잿더미가 돼 버린 늙은 신부처럼. 하지만 소영이가 품안으로 안겨들자 몸을 움직였다. 손녀를 보듬어 안으려는 몸짓으로도 보였다. 삭정이처럼 마른, 검버섯 가득 한 거죽으로 뒤덮인 할머니의 손이 소영이의 등짝에 닿았다. 위아래로, 좌우로 움직이는 손길에는 힘은 없었지만 따사로운 온기가 뿜어져 나왔다.

 

소영이 왔냐? 밥 먹으러 와!”

연탄집 아줌마가 마당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할머니는?”

아까 죽 드셨어. 너나 얼른 와. 밥 식겠다.”

!”

소영이는 할머니의 품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아저씨 밥은 없어. 나는 바보라서 사람들이 밥을 주지만 아저씨는 바보가 아니잖아.”

그러곤 호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떡붕어 아저씨에게 건넸다.

대신 이거 가져가. 선물이야.”

떡붕어 아저씨는 사과를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절반 정도를 도려낸 사과였는데, 칼질을 서툴게 해서 썩은 과육 냄새가 났다. 떡붕어 아저씨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사과집 아줌마가 준 거야. 썩은 사과도 팔면 돈이야. 그런데 일부러 나 먹으라고 줬어. 귀한 거니까 맛있게 먹어야 해.”

말을 마치자마자 소영이는 연탄집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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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셰익스피어, <맥베스>

 

 

 

 

 

 

고운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고웁다. / 탁한 대기, 안개 뚫고 날아가자.(1, 14)

 

<맥베스>11, 세 마녀들이 퇴장하며 내뱉는 말이다. 첫 문장은 일차적으론 날씨의 맑음과 흐림을 가리킨다. 하지만 보다 넓은 맥락에서는 이 작품 속의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담고 있다. , 아름다움과 추악함, 깨끗함과 더러움, 선함과 악함, 강함과 약함 등 우리가 모순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온갖 가치의 충돌의 장이 곧 세계이며 인간의 내면이다.

실제로 <맥베스>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절대 악이나 절대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덩컨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왕이지만 그 자신의 고백대로 사람의 얼굴에서 마음씨를 알아내는 기술은 없, 어리석은 인물이다. 맥더프는 훌륭한 장군이지만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림으로써 죽음으로 내몬다. 뱅코 역시 의로운 인물이지만 은연중에 맥베스의 행운을 질투하며 어두운 욕망을 키운다. 말하자면 다들 적절히 이중적이다. <맥베스>의 상황 역시 인간의 이런 본성이 극도로 발현될 수 있도록 설정돼 있다. 중세 스코틀랜드의 왕권다툼, 간단히, 정치 말이다. 물론, 이것이 맥베스의 거듭된 악행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이 인물이 극악한 죄인이면서 동시에 고귀한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맥베스는 그 자체가 모순의 극단이다. 덩컨 왕의 충신이자 명장으로서 반역자를 성공리에 진압했던 그가 도리어 갑자기 반역자로 바뀐다. 여기에 구태여 무슨 이유가 있을까. 마녀들의 선동도 직접적인 자극에 가깝지,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코더의 영주가 된 그가 국왕의 자리를 노리는 것도 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욕망이란, 특히 검고 깊은 욕망이란 그 속성상 모순덩어리에 염치없는 대식가이기 때문이다.

 

“(방백) 컴벌랜드 왕자라! - 내 길을 막았으니 / 이건 내가 걸려 넘어지든지 아니면 / 넘어야 할 계단이다. 별들이여 숨어라! / 빛이여, 검고 깊은 내 욕망을 보지 마라. / 눈은 손을 못 본 척하지만 끝났을 때 / 눈이 보기 두려워할 그 일은 일어나라.”(1, 29-30)

 

하지만 욕망이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은 두껍다. 맥베스에게 그 벽이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별들”, 즉 도덕률이다. 맥베스 부인이 그에게 살인을 부추길 때 사용하는 무기도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우유부단함을 질책하며 남성의 최고 가치인 용기를 들먹인다. “욕망은 있으되 행동력과 용맹심이 없는 자는 비겁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윽박지른다. 결국 맥베스로 하여금 처음 칼을 들게 만드는 것은 왕위 찬탈의 야망이라기보다는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은 자존감이다. 이로써 아비와 다름없는 왕을 죽이는, 이 크나큰 죄악이 용기라는 최고의 덕목에 의해 장려되는, 적어도 양해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3막에 이르면 맥베스는 이른바 피의 권좌에 앉아, 피는 피를 부른다는 공식을 그대로 실천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맥베스가 악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관객이 보는 맥베스는 잔혹한 살인마가 아니라 타인의 피로 인해, 동시에 제멋대로 뻗어가는 욕망으로 인해 고통 받는 숭고한 인물이다. 그의 고뇌는 실상, 단순한 도덕과 윤리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 죄의식은 절대 죄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크기에, 윤리 의식의 크기에 비례한다. “아멘을 외치고 싶은 마음과 피 묻은 손을 씻고 싶은 마음이 역설적으로 죄를 만드는 셈이다. 여기서 이미 실현된 욕망()과 새로 생성된 욕망(속죄) 간의 긴장이 발생한다. 최후의 심판은 맥베스의 내부에 자리 잡은 법정, 말하자면 내 안의 법정에서 행해진다. 죄의 주체가 벌의 주체이자 객체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맥베스가 정녕 비극의 주인공이자 명실상부한 영웅일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 운명에 도전장을 던진 만큼, 몰락을 코앞에 두고 자살을 하는 것도 비겁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왜 얼간이 로마인 행세를 하면서 / 내 칼로 죽어야 해? 산 놈들이 보이는 한 / 멋지게 베어주자.”(5, 129)

 

이렇게 맥베스는 불면과 환영의 고통을 고스란히 껴안은 채 끝까지 자기 자신과 맞선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맥더프의 칼이었으나, 이러한 최후야말로 맥베스 스스로 선택한 자기 응징의 방식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그의 죄는 대체 무엇인가? 어두운 욕망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 무모함? 마녀들의 예언을, 즉 자기 안의 속삭임을 맹목적으로 믿은 어리석음? 실현된 욕망을 견뎌내지 못한 나약함? 혹은 세속 권력의 쟁취에 덧붙여 도덕적인 완성까지 거머쥐려 했던 탐욕스러움? 아마 전부 다일 것이다. 다만, 그것은 각각 정반대되는 긍정적인 가치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실로 아름다운 것은 추악하고 깨끗한 것은 더럽다. 물론, 그 역도 참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모순이 곧 인간의 본질이며 그 흐름이 곧 인생이다. 말하자면, 드넓은 연극 무대에서 한껏 설치다가 덧없이 꺼져가는 촛불!

 

꺼져라, 짧은 촛불! /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 사라져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 의미는 전혀 없다.”(5, 124)

 

 

--  네이버 캐스트

 

 

-- 인용되는 문장의 원문은"Fair is foul, and foul is fair."입니다. 일차적으론 날씨를 설명하는 어구일 수도 있겠습니다. (cf. 김정환 번역) 흠, 원서를 찾아보고서 beautiful, dirty 뭐, 이런 단어가 아니라서 좀 놀랐더랬지요 -_-;;

--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토시로 미후네 주연의 <거미집의 성>(1957: 蜘蛛巣城 The Throne of Blood)은 <맥베스>를 번안한 것인데, 과장 좀 보태면(^^;) 원작 보다 더 뛰어납니다. (BBC에서 만든 <셰익스피어 리톨드> 시리즈 중 <맥베스>도 볼 만하고요.) 대체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문학의 걸작을 영화하는 데 천부적 재능을 지녔는데, 언제 또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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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관념론자의 고백:

말과 사물 사이의 심연을 뛰어넘다

- 사르트르, <말>

 

 

 

 

 

사르트르는 <구토>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실상 세기의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아깝지 않은, 철학과 문학의 육화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고맙게도 자서전을 한 권 써주었다. 경쾌하고 까불까불하는 문체 덕분에 사르트르라는 이름이 주는 위화감도 잠시나마 불식되는 것 같다.

 

 

 

 

 

 

 

 

 

 

 

 

 

 

 

여느 자서전처럼 <말>은 유년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조부 집에서 기식한 만큼 할아버지 놀이를 즐겼던 외조부, 누이와 같았던 젊은 엄마에 관한 얘기가 많다. “나와 인사를 나누는 기쁨마저 베풀지 않고 살그머니 달아나 버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제법 양가적이고 때론 무척 냉소적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을 두어 줄로 요약하는 그의 문장은 담백하면서도 눅눅하다. “그 역시 사랑했고 살려고 애썼고 그러다가 죽음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만하면 한 인간의 역사는 충분히 이루어진 셈이다.” 어떻든 이 책 속의 모든 얘기가 결국 하나의 주제로 귀결된다. 바로,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다. 이 점이 기존의 자서전과 <말>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말>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각각 읽기쓰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다소 도식화하면 전자는 공부의 과정을, 후자는 습작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총아, 착한 아이신동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던 어린 사르트르는 엉터리 꼬마 작가로 거듭난다. 이 과정의 핵심은 무엇인가. 달리 말해, ‘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축자적으로 접근해보자.

보통의 경우 아이는 현실 속의 사물을 먼저 인지하고 그 다음에 말을 배운다. , 내 눈앞의 구체적인 꽃 한 송이, 꽃이라는 말, 책 속의 그림-글자 꽃, 하나의 원형으로서의 꽃, 이런 식의 이월 내지는 확장을 경험한다. 명징한 구체의 세계(사물)와 모호한 추상의 세계() 사이에 놓인 간극을 좁혀가며 후자에 가까이 가는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을 배운 방식은 정반대이다.

 

나는 그 속에서(<라루스 대백과사전>) 진짜 새집을 털고 진짜 꽃 위에 앉은 진짜 나비를 잡았다. 사람과 짐이 모두 진짜로거기 있었다. 삽화는 그들의 몸이고 글은 그들의 영혼이며 독특한 본질이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짐승은 그 원형(原型)과 다소간 닮은 점은 있지만 원형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는 흐리멍덩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동물원의 원숭이는 진짜 원숭이답지 않고 뤽상부르 공원의 사람들은 진짜 사람답지 않았다. 정신 상태로 보아 플라톤주의자가 된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56)

 

그에게는 실제의 꽃 이전에 원형-관념으로서의 꽃이 먼저 있었다. 마찬가지로 책 속의 원숭이와 사람이 진짜였고, 현실 속의 그것은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의 눈에 비친 그림자처럼 가짜에, 어설픈 모조품에 불과했다. 말의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결렬, 이것이 곧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세상을 배운 사르트르의 관념론의 기원이다.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라고 그는 고백한다. 이 관념론에 침윤된 채, 어쩌면 그것과 사투를 벌이며 쓴 작품이 <구토>일 터이다.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267-268)

 

우리는 로캉탱이 아무 이유 없이 수시로 경험하던 구토를 기억한다. 가령 바닷가에서 아이들을 따라 물수제비를 뜨기 위해 조약돌을 집어 들 때 그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참을 수 없어한다. 그의 구토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은 것은 우리 대부분이 사물의 세계에서 말의 세계로 옮겨가며 성장한 탓이다. 반면, 일찌감치 플라톤주의자였다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말이 구축한 이상(理想), 그 합리와 논리에 맞서 사물은 무질서와 부조리를 부르짖는다. 사물과 말은 두 평행선처럼 아슬아슬한 접근만을 반복할 뿐, 절대 완벽하게 만나지 못한다. 그 결렬을 목도하는 순간, 구토는 불가피하다. , 그럼 어찌할 것인가.

<말>을 쓸 무렵 사르트르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안짱다리에 짜리몽땅하고 사팔눈에 퍽이나 못 생겼던 남자. 이 희대의 추남은 말과 사물 사이의 심연을, 그리고 그로 인한 구토를 처음 발견했을 뿐더러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이보다 더 숭고한 실존이 있을 수 있을까.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270)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사르트르 사진입니다. 유명한 사진이지요? 사르트르는 얼굴 자체가 철학인 것 같습니다(나는 -- 철학이다!) ^^; 

 

 

- 네이버 캐스트  

 

 

* 개인적으로 <구토>에 원한(!)이 있습니다. 너무 어려웠던 기억 때문이지요. <말>의 유려한 번역에 탄복했는데, <구토>도 좋은 번역으로 새로 출간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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