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눈을 뜬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해산물 시장으로 갔다. 상인들과 손님들이 북적댔다. 막 잡아 올린 생선들이 신선한 비린내를 풍겼다. 곳곳에 물이 가득 담긴 대야가 보였다. 연체동물은 대야에 갇혀 있기 싫어 가끔씩 물을 거슬러 밖으로 기어 나왔다. 문어, 낚지, 오징어, 꼴뚜기, 주꾸미 등이 발에 채였다. 저쪽에선 해삼과 멍게가 쥐죽은 듯 잠자고 있었고 또 저쪽에선 대게들이 집게발을 꽁꽁 묶인 채 서로들 싸우고 있었다. 새우들은 수족관 안에서 유유자적하게 헤엄을 치며 놀았다. 난생 처음 보는 경관에 소영이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덩이 오막살이를 떠난 날부터 계속 만화경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마침내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데리고 바닷가로 나왔다. 바다 바람을 맞으며 둘은 선착장을 향해 걸었다. 바람 한 점 없이 화창하고 아침녘의 신선한 기운이 유쾌했다. 바다가 곁에 있는 남쪽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여름날이었다.

아저씨 저것도 강이야?”

소영이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떡붕어 아저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아이가 아예 말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줄곧 두려웠던 것이다.

저건 바다야.”

바다?”

그게 뭐야?”

저거.”

그것은 구덩이 오막살이 근처의 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넓고 크고 푸른 물, 아니, 물의 땅이었다.

우리는 저기를 건너갈 거야.”

으악! 정말? 어떻게?”

저걸 타고 건너는 거야.”

아저씨는 저 멀리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조그만 장난감 같은 것을 가리켰다.

저건 또 뭐야?”

.”

그게 뭐야?”

저거.”

치이, 아저씨 바보야. 말하는 거 잘 못해. 이제 아저씨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어볼 거야.”

정말 그러기로 다짐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궁금한 것이 생겼다. 소영이는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쌓아둔 얘기를 한꺼번에 다 풀어놓겠다는 듯.

아저씨, 아저씨, 아까 거기 사람들 많은 데, 물고기도 정말 많은 데, 거기 말이야, 그거 그 사람들이 직접 다 잡은 거야? 아저씨처럼 낚시해서 잡는 거야, ?”

아니, 그건 다 그물로 잡은 거야.”

그물? 그게 뭐야?”

저거.”

떡붕어 아저씨는 조그만 어선 위에 드리워져 있는 그물을 가리켰다. 그러곤 소영이를 안아 올렸다.

우아, 세상이 높아졌다! 하늘도 가깝다!”

소영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떡붕어 아저씨의 품안에서 까불어댔다. 그는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여객선에 올랐다.

 

파도가 거의 일지 않아 운항하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배는 금방 P항을 떠났다. 저 멀리로 철제다리와 해산물시장이 아스라이 보였다. 햇빛이 은근히 환하게 들어, 객실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선창 밖으로 보이는, 너울처럼 일렁이는 쪽빛 바다의 움직임도 다정스러웠다. 떡붕어 아저씨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해 봤다. 더불어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상상해 봤다. 마땅히 그 어떤 것도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떡붕어 아저씨는 습관적으로 한 손을 들어 수염을 쓸었다. 잡초처럼 무성한  것이 그 속에서  벌레들이 우글거릴 것 같았다. 아저씨는 옆에서 곤히 잠이 든 소영이를 남겨두고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로 갔다.

 

소영이는 오랜 시간 잠에 푹 빠져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햇빛이 선실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느닷없이 찬물 세례를 받은 양 온 몸이 서늘해졌다. 소영이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떡붕어 아저씨의 짐이 보이자 그제야 안심이 됐다. 소영이는 조그만 선창에 코를 박고 바깥을 내다봤다. 시퍼런 물이 출렁거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구덩이 오막살이도, 가짜 대궐도, 강가도, 아무것도! 소영이는 울컥했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떡붕어 아저씨가 사색이 되어 소영이 곁으로 달려왔다.

으악!”

? 무슨 일이야?”

아저씨는누구야?”

소영이는 한참동안 들여다본 뒤에야 떡붕어 아저씨를 알아봤다.

, 아저씨였구나. 난 아저씨가 나 버리고 가버린 줄 알았어!”

소영이는 또 다시 울음을 쏟아냈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다독이며 선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갑판 위로 뜨거운 햇빛이 무자비하게 꽂혔다. 갑판이 물결의 흐름을 타며 조금씩 흔들거렸다. 짭짤한 바닷바람의 움직임이 몸으로 느껴졌다. 하얀 갈매기들이 떼 지어 창공과 바다를 갈랐다. 잔잔한 바다를 보며 떡붕어 아저씨는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은 온통 낚시로 가득 차 있었다. 올 여름이 끝나기 전에 통통배를 탈 생각이었다. 갑자기 자기 허벅지에 몸을 바싹 붙이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너무 신기해서 눈을 깜박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잠깐 이 아이의 앞날에 대해 생각했다.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어 또 다시 낚시 생각에 잠겼다. 이쪽은 성과가 많았다. 통통배를 타고 사량섬으로 들어가 사흘을 머무른다, 갯지렁이와 크릴새우를 준비한다, 우럭과 도다리가 많이 잡힐 거다 등등. 그의 알찬 명상을 소영이가 깨버렸다.

 

아저씨, 지금까지 아침이 몇 번이나 왔어?”

?”

그 동안 아침이 몇 번이나 왔냐고?”

떡붕어 아저씨가 대답을 못하고 뭉그적댔다.

치이, 아저씨 바보야. 내가 말해줄까, ? 세상의 모든 아침이 한꺼번에 다 왔어. 아저씨, 나 목말라.”

조금만 참아, 이제 다 왔어.”

목말라!”

자꾸 말하면 더 목마르니까 좀 참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우아, 저건 뭐지?”

 

배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조그만 점 하나가 보였다. 점은 급속도로 커져, 어느새 청신한 초록빛 섬이 됐다. 초록빛 곳곳에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박혀 있었다. 그 지붕들 뒤로, 푸른 숲 한가운데 높게 솟은 성채가 나타났다. 배는 그리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마다 소영이는 몸이 쑥쑥 늘어나는 걸 느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뼈마디가 콕콕 쑤시고 살갗이 팽팽하게 땅겼다. 눈도 아려왔다. 머리카락도 쑥쑥 자라는 모양이었다. 고무줄로 묶어놓은 꽁지머리의 끄트머리가 어느새 등을 건드렸다.

앞으로 저기서 살 거야.”

, 아저씨 나 죽는 거 아니었어?”

햇볕이 따가워 반쯤 감겨진 아이의 눈에는 침착하고 평온한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

, 아니었구나. 나는 내가 죽는 거라고 생각했어.”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의 손을 잡고서 섬에 첫발을 내디뎠다. 떡붕어 아저씨는 선착장의 매점에서 노란 보리차 한 잔을 사주었다. 소영이는 찬 보리차를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켜고 조막만한 손으로 입을 훔쳤다. 그리고 남은 보리차를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아저씨도 마셔. 왜 돌멩이 밖에 없어? 배에서 볼 때랑 너무 다르잖아!”

떡붕어 아저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자갈들이 발에 채였다. 소영이는 또 칭얼댔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등에 업었다. 소영이는 또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아, 세상이 높아졌다! 하늘이 가깝다!”

 

다시 초록빛 세상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짙은 초록색 벽돌로 지은 높은 성채가 보였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업었다 안았다 걸렸다 하면서 며칠 밤낮을 쉼 없이 걸었다.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의 등에서, 또 품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아침이 시작됐다. 성채는 여전히 멀리 있었다. 그 때문에 여전히 웅장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          *         *

 

 

1부가 끝났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2부가 이어집니다.

소박한 밥상, 찾아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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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인가에서 는 누구인가'로:

앎을 향한 인간의 열망, 자기 단죄의 숭고한 비극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프로이트 덕분이겠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함의와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이 실제로 겪는 비극은 사뭇 다르다. 오이디푸스는 아비를 증오하고 어미를 취하려는 욕망을 품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내용을 담은 섬뜩한 신탁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으나 그 희생양이 됐던 자이다. 실상 막이 열릴 때 이미 사건-죄악은 종료돼 있다. 그는 테바이의 왕이며 왕비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고 있다. 문제는 나라의 환란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비명횡사한 선왕 라이오스 얘기를 들으면서 시작된다. , 그의 행동의 시발점은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그가 전에 가졌던 왕권도, 그의 침상과 씨 뿌릴 아내도 이어받았으니 (중략) 그러니 나는 이것을 위해, 마치 내 아버지의 일인 양 / 싸워 나갈 것이고, 그 살인을 저지른 자를 / 잡고자 찾으며 모든 곳을 뒤질 것이오.”(36) 극이 진행되면서 설마 그 살인자가 나인가?”라는 물음이 대두되고 그것은 이내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치명적인 물음을 낳는다.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밝히는 과정은 곧, 그가 자신의 정체와 더불어 신탁의 실현 여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테이레시아스: (중략)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그대가 진작부터 라이오스의 / 살해자라 선언하고 위협하며 찾는 / 그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소. / 그는 명목상으로는 이방 출신의 거주자이지만, 나중에는 / 태생부터 테바이 사람임이 드러날 테고, 그 행운에 /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눈 뜬 자에서 장님이 되고, / 부자에서 거지가 되어 이국 땅을 향해 /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가게 될 것이오. / 또 그는 자기 자식들의 형제이자 / 아버지로서 함께 살고 있으며, 자신을 낳은 /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고, 자기 아버지와 / 함께 씨 뿌린 자이자 그의 살해자임이 드러날 것이오.(48-49)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의 말이 너무나 두려워 그것을 처남(동시에 외숙부이다) 크레온의 정치적 음모로 돌린다. 하지만 이오카스테, 코린토스의 사자, 라이오스의 갓난 아들의 처리를 맡았던 목부(牧夫) 등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축적되는 말들은 모두 동일한 진실을 겨냥한다. 죄악을 피하고자 행했던 일들이 역설적으로 그 죄악의 완성에 기여한 셈이다.

 

오이디푸스: 아아, 아아,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구나, 명백하게! / , 빛이여, 이제 내가 너를 보는 게 마지막 되기를! /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서 태어나서, 어울려서는 안 될 / 사람들과 어울렸고, 죽여서는 안 될 사람들을 죽인 자라는 게 드러났으니!(95-96)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척 보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 ‘무지에서 으로의 이월, ‘발견과 급전’,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연민과 공포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더욱이 그는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오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사람”, 서사시의 영웅과는 달리 덕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는않으나 적어도 보통보다 더 나은 고상한 인물”, 간단히 인간의 전형이다. ,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신의 아들은 아니었으나, 스핑크스를 무찌른 영웅이자 나라의 역병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한 훌륭한 왕이며 왕비의 옷에 브로치를 꽂아주곤 한 자상한 남편이자 파국 앞에서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인자한 아버지이다.

 

 

 

 

 

 

 

 

이런 그의 운명을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꿔놓은 과오란 어떤 것인가. 세 갈래 길에서 마주친 행인을 말다툼 끝에 살해한 것과 미망인이 된 왕비를 그 나라와 함께 취한 것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됐다. 아비인 줄 모르고 살해했으며 역시 어미인 줄 모르고 동침했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의 과오는 그가 인간인 이상 도대체 피해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신탁이 예언한 과오를 피하기 위해 고향과 부모를 떠나 오랜 세월 방랑의 길을 걸었으나, 결국 그 운명의 덫에 여지없이, 멋지게 걸려든 셈이다.

 

코로스: ,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이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로다. /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쓸려 들어갔는지. /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과연 이 비극의 메시지는 운명 혹은 신 앞에서 겸손할 것을 촉구하는 것인가. 어떻든 두 눈에 피를 줄줄 흘리며 무대 위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물론 그가 눈을 찌르는 사건은 이오카스테의 자살처럼 무대 뒤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숭고의 절정을 맛본다. 죄악을 비껴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무참히 조롱하는 변덕스럽고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는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비극작가들이 활동하던 무렵,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이후에 찾아온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가장 참혹한, 나아가 숭고한 비극이 쓰이고 공연됐던 것이다. 또한 소포클레스는 걸출한 비극작가였지만 90년에 육박하는 그의 인생은 상당히 순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일까, 말년에 이르러 그는 오이디푸스 왕의 후일담을 담은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를 쓴다. 저주와 파멸이 아닌, 구원과 안식의 신탁을 받아 영면에 이르게 되는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 속에 은근히 자신의 노년을 투영한 것일까.

 

 

-- 네이버캐스트

 

 

-- 요즘 '운칠기삼'이라는 말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운'이 '7', '기'가 '3'. 삶의 여러 국면에서 나의 재주와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개인사든 역사든 우연론과 인과론 중 어떤 것이 더 의미가 있을까. 뭐, 이런 것들인데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얘기하는 것도 결국은 '운명'과 '인간'의 싸움/화해니까요.  지면이 부족해 많이 쓰지 못했는데, 이 점에서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늙은 오이디푸스 옆에는 효녀 안티고네가 붙어 있는데(역시 딸이 대세?^^;) 노년은 썩 나쁘지 않은 셈이지요. 운명의 위로랄까요. 뭐, 이런 식으로 읽는다함은 그만큼 늙었다는 것이기도 할 테고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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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는 열흘이 넘도록 침침한 방안에서 혼자 잠들었다.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있어 주는 것과 구덩이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무척 달랐다. 소영이는 한밤중에 곧잘 깨어났고 어둠 속에서 엉엉 울었다. 똑같은 방인데 느낌이 너무 달라졌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어둠이 싫었기 때문에, 또 밝은 빛을 더 오래 보기 위해 소영이는 일찍 일어나려고 애썼다. 눈에는 핏대가 섰다. 얼굴 가득 희뿌옇게 피어있던 마른버짐은 이제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밥알은 꺼칠꺼칠한 흙 알갱이 같았다. 뱃속은 늘 따끔거렸다. 며칠 째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소영이는 성냥개비처럼 깡말라버렸다. 밤에도 낮에도 어떤 무섬증과 허함이 기승을 부렸다. 7년도 안 되는 인생에 처음 맛보는,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오늘 주인이 남긴 말은 밤새도록 뾰족한 가시처럼 소영이의 머릿속을 쑤셔댔다. 소영이는 어서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구덩이 오막살이의 아침은 떡붕어 아저씨의 등장으로 시작됐다.

아저씨! 왔구나!”

소영이는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뱃속과 목구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질문이 터져 나왔다.

아저씨 집 변소엔 구더기 안 살아?”

우리 집에선 구더기는 톱밥이나 신문지 속에만 살아.”

아저씨 방에는 낮에 햇빛이 들어와?”

눈이 부실 정도지.”

밤에 전깃불 켜도 돼?”

낮에도 켜도 돼.”

그럼 나 아저씨 집에 갈래. 어디야?”

좀 멀어.”

강 너머야?”

아니, 더 멀어.”

! 절벽 너머에 있구나?”

아니, 그보다도 더 멀어. 가면 여기는 다시 못 올 지도 몰라.”

?”

왜냐고? 너무 머니까.”

할머니 보고 싶으면 어떡해?”

여기 있어도 다시는 못 본다니까.”

? 왜 자꾸 거짓말해?”

거짓말이 아니니까 더 문제다, 요 녀석아.”

아저씨는 소영이를 납득시키는 걸 포기하고 방을 둘러봤다. 챙길 짐이라곤 전혀 없었다. 서랍의 옷가지와 물건을 다 꺼내도 배낭 하나면 충분했다.

 

이들이 구덩이 오막살이를 나서기 직전에, 기적처럼 주인이 또 나타났다. 그는 떡붕어 아저씨에게 조그만 종잇장을 내밀었다. 며칠간의 방세와 물세, 전기세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명세서였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주인은 이 돈을 받지 않겠노라고 생각했지만 떡붕어 아저씨의 낚시 장비를 보고서 마음을 바꿨다. 그의 명민한 판단력은 전적으로 옳았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 자리에서 주인에게 돈을 쥐어주었다. 주인은 3570원을 정확히 거슬러 주었다. 떡붕어 아저씨가 됐다고 거부해도 소용없었다. 돈 계산에 정확을 기하고 또 그 내역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이 주인의 인생의 가장 보람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구덩이 오막살이를 떠나며 소영이는 훌쩍거렸다. 저 멀리, 다슬기 할매의 가짜 대궐이 눈에 들어오자 또 훌쩍댔다. 마침 비닐하우스 가게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할매의 모습도 보였다. 걸음을 뗄수록 할매는 점점 더 작아져 마침내는 조그맣고 새카만 다슬기로 변해버렸다. 소영이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꼭 쥔 떡붕어 아저씨의 손을 놓지도 않았다. 이제 자기에게 밥을 줄 사람은 이 사람 밖에 없었다.

 

*

 

한참을 걸어서야 소영이와 떡붕어 아저씨는 신작로 길에 도착했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먼지를 뒤집어써서 회색 옷을 걸친 깡마른 거인처럼 보였다. 둘은 거기서 한참을 기다렸다. 소영이는 다리가 아파 떡붕어 아저씨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침내 언덕 너머에서 뽀얀 먼지가 일면서 버스가 나타났다. 떡붕어 아저씨가 소영이를 안아 올렸다. 난생 처음 타보는 버스에 소영이는 온 몸이 울렁거렸다. 기름 냄새가 코를 찔러댔고 버스는 심하게 덜커덩거렸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들어 오는 산바람이 시원했다. 이제 구덩이 오막살이는커녕 그 근처의 공장 굴뚝도, 아파트 옥상도 보이지 않았다.

 

읍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정말 장날이었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땀을 뻘뻘 흘렸다. 장터에 깔린 물건들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탐스럽게 익은 사과와 토마토가 쨍쨍 내리 쬐는 햇볕 아래서 바싹바싹 말라갔다. 오늘 새벽 밭에서, 또 산에서 캐온 푸성귀들은 축축 늘어져 갔다. 나무판자 위에 놓인 자반고등어에서는 짜디 짠 비린내가 진동했다. 수내 마을에서 내려온 한 농부는 파장 무렵, 그 자반고등어 한 손을 최대한 헐값에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려면 돼지고기가 팔려야 했다. 토막을 내놓은 그의 돼지고기 위에는 파리들이 새카맣게 붙어 있었다. 농부는 종이부채와 손을 수시로 써가며 파리를 쫓았다.

 

아들 녀석은 아비의 근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난생 처음 구경하는 장터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발을 뗄 때마다 쓰레기와 돌멩이가 툭툭 걸려들었다. 그 어느 것도 이 새카만 시골 소년의 활약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발밑에 뭔가 물컹하고 큼직한 것이 밟혔다. 소년은 얼른 발을 떼고 고개를 숙여 보았다. 생쥐 치고는 너무 크고 들쥐 치고는 좀 작은, 짙은 회색 쥐였다. 소년은 신이 나서 쥐꼬리를 손으로 잡았다. 그러곤 쥐꼬리를 빙빙 돌리며 시장 바닥을 누볐다. 어른들이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질렀지만 누구 하나 다가갈 생각도 못했다. 그때 소영이가 떡붕어 아저씨와 함께 그 곁을 지나갔다.

! 말라깽이! 성냥개비! 바보야!”

소년은 뭣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희죽거리며 이렇게 외치더니, 소영이를 향해 죽은 쥐를 획 집어던졌다.

으악!”

소영이는 잽싸게 몸을 피했다. 너무 놀라 대거리를 할 엄두도 못 냈다. 죽은 쥐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주위로 파리와 날파리가 잔뜩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그 쥐를 밟고 지나갔다.

 

시외버스터미널은 장터를 가로 질러, 조금 더 걸어간 곳에 있었다. 도로 주변에 노점상들이 일렬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삶은 계란과 귤을 그물망에 넣어서 팔았다. 군밤도 보였다. 소영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도 났다. 떡붕어 아저씨는 터미널 안에서 김밥과 우동을 사주었다. 배가 좀 꺼져갈 때 아저씨는 조그만 약병을 건넸다. 처음 맛보는 독한 약물에 소영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르스름한 액은 목구멍을 넘어가기도 전에 곧장 게워버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찼다.

 

먼 길이 시작됐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를 태운 버스는 도중에 5분 여 정도 정차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소영이는 거의 목숨이 끊어진 사람처럼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먹은 것을 다 토했다. 그렇게 기진맥진하여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버스는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고 있었다. 잘 자란 푸른 벼들이 가득한 논이 소영이 곁을 재빨리 훑고 지나갔다. 창밖 구경도 잠시, 소영이는 또 한 차례 멀미를 하고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고 버스는 어둠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번에는 음식물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싯누런 물만 나왔다. 헛구역질을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잠이 쏟았다.

 

상쾌한 햇살이 막 쏟아질 때 버스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원래 오늘 저녁에 바로 배를 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좀 가혹한 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를 잃은데다가 난생 처음 동네 밖을 떠나 이 머나먼 길을 온 소녀에겐 말이다. 소영이는 작은 진흙 인형처럼 오그라들어버렸다. 사실 떡붕어 아저씨도 지쳐버렸다. 그는 선착장 근처 여관에서 방을 하나 빌려놓고서 우체국을 찾아가 낚시 장비를 소포로 부쳤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떡붕어 아저씨는 완전히 뻗어 버렸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어쩌자고 선뜻 이 아이를 데려 왔을까. 앞으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아니, 남자 혼자 계집애를 키우는 것만큼 엄청난 지옥이 어디 있을까. 이런 생각들은 모두 떡붕어 아저씨의 길게 자란 턱수염 속에 묻혀 버렸다. 산골에 머문 한 달간 면도날 한 번 대지 않고 내버려뒀더니 그야말로 괴기스러운 신선의 몰골이 됐다. 소영이는 잠꼬대를 하고 몸부림을 치며 그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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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실이요 진리인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1892-1927), 「라쇼몬」(1915) / 「덤불속」(1922)

 

 

어느 해질 무렵, 일자리를 잃은 한 사내가 비를 피해 라쇼몬[羅生門]의 누각 밑에 서 있다.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은 밤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누각의 사다리를 오른다. 소문대로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앙상한 백발의 노파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다. 사내는 악을 향한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노파에게 덤벼들지만 가발을 만들려고 그랬다는 ‘평범’한 대답에 실망한다. 흥미로운 것은 차라리 노파의 변명이다. 지금 이 시체는 토막 내 말린 뱀을 건어물이라고 속여 팔다가 역병에 걸려 죽은 여자라는 것. “이 여자가 한 짓거리가 나쁘다고는 안 하겠어. 안 그러면 굶어죽을 테니 어쩔 수 없이 한 짓이지. 그러면 방금 내가 한 짓도 나쁜 짓이라고는 못하는구먼. 이렇게 안 하면 당장 굶어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짓이야.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이 여자는 내가 한 짓도 너그럽게 봐줄 것이구먼.”(17-18)

 

 

 

 

이 말에 사내 역시 아까의 고민을 가뿐히 내던지고 잽싸게 노파의 옷을 벗겨 사라진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악행쯤은 허용된다는 논리에 따라 악이 또 악을 양산한다. 그악하고 처절한 순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면, 노파는 사기꾼 여자 덕분에, 사내는 또 이 노파 덕분에 살아남는 공생 관계가 유지되는 셈이다. 윤리와 도덕이란 동병상련에 기반한 것, 그토록 상대적이고 위태로운 것인가. 「라쇼몬」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스물세 살 때 쓴, 사실상 처녀작인데, 인간 본연의 이기주의와 선악의 이율배반성에 대한 서슬 퍼런 묘사는 실로 충격적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이요 진리인가. 서른 살에 쓴 단편 「덤불 속」은 더 극적이다.

 

 

한 무사 부부가 길을 가던 중 강도의 습격을 받아, 무사의 아내는 강도에게 능욕당한 이후 도망치고 무사는 사망한다. 일견 간단해 보이는 사건이지만, 연루된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논리와 기억에 따라 서로 엇갈리는 말을 늘어놓는다. 강도의 자백을 보자. 첫 눈에 무사의 아내에게 반한 다조마루는 고총(古冢)을 미끼로 무사를 산 속 깊숙이 유인하여 덮친 다음 밧줄로 삼나무에 묶어놓고 여자를 데려온다. 그렇게 목적을 이룬 다음 그만 떠나려하는데, 여자가 울면서 매달린다. 두 사내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자기는 살아남은 남자를 따라가겠다, 라는 것. 여자의 말에 따라 강도는 싸움 끝에 무사를 죽이지만 그 사이에 여자는 도망쳐 버린다. 이런 흉악범도 자기 합리화의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우리는 사람을 죽일 때 허리의 검을 쓰지만, 당신들이야 칼 대신 뭐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아니면 그럴싸하게 위해주는 척하는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 않습니까.”(128) 남자를 결박에서 풀어 정정당당히 겨룰 기회를 주었음을 강조하고 자기와 스물세 합이나 맞선 적수의 실력을 칭찬하기도 한다. 끝까지 당당하게 굴며 극형에 처해달라고 호기를 부리는 ‘위대한 죄인’, 이것이야말로 다조마루가 꿈꾼 자신의 이상적 모습이었을 터이다.

 

 

 

 

 

무사의 아내의 말은 어떤가. 능욕을 당한 이후 그녀는 자기를 멸시하는 것 같은 남편의 시선에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자신의 치욕을 목격한 남편을 먼저 찔러 죽인다. 그녀의 어머니의 말대로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기가 드센”(126) 여자답다. “남편을 죽인 저는, 도둑놈에게 능욕당한 저는,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요?”(135) 이런 흐느낌, 즉 ‘약함’에의 호소는 남성적 논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본능적으로 선택한 생존 전략일 것이다. 한편, 무사는 무사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능욕 이후 강도는 무사의 아내를 감언이설로 유혹했고 그녀는 그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렇듯 아내를 부정하고 뻔뻔한 여자로 몰아감으로써, 또 자신은 아내의 단도로 자살했다고 말함으로써(사실일 수도 있다!) 그는 사무라이로서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 심지어 부차적 인물인 나무꾼의 말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들 언급하는 여자의 단도가 현장에 없었다는 것은 최초의 목격자인 그가 절도를 범했음을 말해준다. 어떻든 가장 흥미로운 존재는 ‘덤불 속’ 너머에 있는 포청(捕廳)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각종 말을 유도하고 이야기의 판을 짜는 자(혹은 그런 자들), 작가의 은유이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스스로를 “빈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프티 부르주아”(「다이도오지 신스케의 반생(半生)」)라고 했으나 그렇게 가난한 편은 아니었다. 덧붙여 도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였으며 일찍이 나쓰메 소세키의 인정을 받아 백 편이 훌쩍 넘는 단편소설을 남기기까지 비교적 무난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세기말과 황혼녘의 분위기, 묵직한 우수와 고뇌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의 어머니는 광인이었다.”(「점귀부」) 광기의 유전자를 의식한 탓인지 생명에 대한 공포, 심지어 혐오는 거의 병적인 수준에 이른다. 진정한 예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아끼는 딸의 목숨마저 희생한 다음 자살하고 마는 화가(「지옥변」)는 물론 작가의 분신처럼 읽힌다. 도저한 탐미주의와 예민한 죄의식, 현대식으로 변용된 설화(모노가타리)와 새로운 서사 양식처럼 읽히는 독특한 사소설(私小說) 등 아쿠다가와의 문학은 그의 삶이 서른다섯에 자살로 마감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 “인생은 보들레르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어느 바보의 일생」)

 

 

-- <책&> 10월호

 

 

 

 

 

 

-- 작품 인용은 <지옥변>(양윤옥 옮김, 시공사)에 근거합니다. 일본 근현대 작가 중 제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최근에 새 번역본이 나와서 무척 반가웠지요^^; 

-- 아쿠다가와는 기존 텍스트(각종 설화 포함)를 새롭게 쓰는 데 재주가 있었던 것 같은데(어쩌면 이것만이 재주?!) 그만큼 각종 고전에 박식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겁니다.(위에 보들레르를 언급한 문장, 유명하죠!)  러시아 문학도 꽤 많이 읽은 것 같아요. '동화'로 소개되는 <거미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그루셴카의 얘기에서 가져온 겁니다. 흔히 사소설 하면 다자이 오사무를 많이 떠올리겠지만, 저는 이 경우에도 아쿠다가와 쪽이 좀 더 잘 접수되더라고요.

--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나생문>(1950)은 <나생문>의 틀 속에 <덤불 속>을 끼워 넣은 식으로 진행됩니다. 강도 역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가 맡았지요. 오래 된 흑백 영화임에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하긴 재미로야 <7인의 사무라이>만할까마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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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렛 2012-10-29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쇼몽은 고전으로 인간심리를 잘나타냅니다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지하로부터의 수기>

 

 

 

 

 

 

 

 

 

보통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주인공을, 또 그가 주변 인물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사건을 추적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런 관성을 철저히 배반하는 소설이다. 특히 1지하는 마흔 살의 한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늘어있는 말들의 향연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그는 한 시절 외톨이 관리였고 사벨을 절거덕거리는 한 장교 때문에 화를 내기도 했을 만큼 관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러던 중 한 친척으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받게 되자 오롯이 지하에 틀어박혔다. 그 이후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화자의 물리적 정황이 최소화됐고 사회와의 접촉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소설적 사건도 있을 수 없다. 진눈깨비를 매개로 한 회상, 2진눈깨비에 관하여는 좀 수월한 편이다. 이른바 줄거리는 이 부분을 토대로 정리될 수 있겠다.

 

(중략)

 

2부만 놓고 보자면 소설적 인물로서 화자의 형상은 낭만적 주인공-영웅과, 다분히 고골풍, 즉 초기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희극적 얼뜨기 사이에서 진동한다. 우선, 가히 낭만주의가 창조한 주인공의 후예답게(바이런, 푸시킨, 레르몬토프 등 낭만주의자의 작품이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그는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목말라 한다. 이것이 곧 그의 이념이자 이상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화자는 비극적 갈등, 긴장 어린 결투, 거국적 화해, 매춘부와의 교감 및 구원 등 책을 통해 학습한 것을 현실에 그대로 이식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숭고한 몽상은 페테르부르크의 비루한 현실과 부딪치면서 기괴한 불협화음을 낸다. 그의 열변은 좌중의 무관심에 묻히거나 기껏해야 비웃음만 사고, 그가 내민 화해의 손짓은 때와 장소에 전혀 맞지 않는 광대놀음에 가까워진다. 대체로 지하에서는 낭만주의와 이상주의를 양식으로 한껏 고양되었던 화자였지만 지상에서는 볼품없는 외모와 사회적, 경제적 지위로 인한 콤플렉스, 괴상한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우스꽝스러운 낙오자로 전락한다.

 

 

 

 

 

 

 

 

이 희비극의 핵심은, 리자가 간파한바, ‘책을 따라한다’(책에 따라 말한다/산다)라는 것에 있다. 달리 말해, ‘살아 있는 삶’(지상)이념’(지하)의 대립 구도가 문제이다. 둘 사이의 충돌로 인해 철저히 망가진 젊은 날의 지하 인간(2)으로부터 모종의 진화 작용을 거쳐 마흔 살의 지하 인간(1)이 나온다. 이는 또한 1840년대 러시아를 풍미했던 이상주의와 낭만주의로부터 1860년대의 허무주의로의 이동이기도 하다. 어떻든 이제 그는 살아 있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채 오직 이념(관념), 만으로 존재한다. 그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닌 종이 인간’, 자연의 품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태어난 인간이다. 지하의 달콤한 몽상은 악몽으로 변하고, 그 악몽은 중년의 역설가’, 차라리 요설가의 말로 가득 차 있다. 1, 나아가 이 소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1864년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형과 발행한 잡지 <<세기>>에 발표되었을 때, 평단은 이 작품을 급진세력(‘60년대 세대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풍자이자 패러디로 받아들였다. 도스토예프스키 형제의 잡지는 보수를 표방했기도 했거니와, 체르니셰프스키의 장편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피력된 급진적 이데올로기, 즉 맹목적인 합리주의와 공리주의, 그에 기초한 낙관적이지만 동시에 기만적인 역사관이 여러 모로 도스토예프스키를 불편하게, 심지어 불안하게 했던 같다. 그는 체르니셰프스키가 사용한 몇몇 모티브를 그대로 가져와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가령, 지하 인간의 입을 빌어, 1851년 영국 런던의 무역박람회에서 선보인 수정궁은 이성과 과학이 창조한 지상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산술적 계산에 종속시켜 인위적으로 축조한 개미집’, 가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활동가라면 수학 공식(‘2x2=4’)과 자연 법칙(‘돌 벽’)에 무조건 복종하지만, 대체로 인간이란 ‘2x2=4’가 어찌할 수 없는 불변의 원칙을 알면서도 ‘2x2=5’에 탐닉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오로지 자신이 피아노 건반이나 오르간 스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런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익이란 완전히 무의미하다. 왜냐면 인간은 실용적 관점에서는 무슨 이익은커녕 오히려 해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고 파탄적인 쪽으로 치닫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급진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년 보수 작가의 비판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그 목적이 우선적이었다면 분명히 보다 더 직설적이고 논리적인 화법을 택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의 문체는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면 그와 무관하게 말이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은 것이든 어쨌거나 혼돈의 미학을 구현하는 것 같다. 지하 인간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즘적 기법이 무색할 정도로 과잉된 의식과 조장된 분열을 뽐내며 일견 무의미하고 서로 모순되는 말을 마구 뒤엉킨 상태로 고스란히 기록해 나간다. 심지어 루소의 <고백>과 그에 대한 하이네의 평가를 예로 들어가며 그 기록의 목적을 또렷이 명시하기도 한다. 글쓰기를 통한 도덕적 징벌과 교화, 글쓰기가 갖는 미학적 효과, 끝으로, 무위와 권태를 달래는 수단으로서의 글쓰기 등.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쾌감이다. 그것은 정치 이데올로기나 철학 사상, 도덕적 교훈의 설파는 물론이거니와 촘촘히 짜인 이야기-서사의 축조조차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 전적으로 무목적적이고 무관심적인 쾌감, 오직 지하에서만 가능한 쾌감이다.

 

 

 

 

 

 

 

 

실제로 지하란 개연성과 인과성에 기초한 모든 논리와 맥락에 반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중력의 시공간이다. 여기서 지하 인간은 사회와 개인, 전체성과 개별성, 몽상과 환멸, 꿈과 현실, 이성과 욕망, 합리와 부조리, 상식과 광기의 경계를 오가며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성의 요소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본질적으로 무정형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를, 나아가 자연 법칙에 대한 부조리한 반항(치통!)을 찬미한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떤 이익도 주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억지로 지어낸 가짜일 수도 있지만, 세계로부터 나에게 폭력적으로 주어진 ‘2x2=4’와는 달리, 내가 의식하고 내가 창조한 세계이다. 그것이 또한, 우리 내부의 깃들어 있는 침침하고 눅눅한 지하이기도 하다. 지하 인간은 지하가 비참하다는 것을 또렷이 의식할수록 더더욱 지하에 침몰한다. 지하는 책에 따라 말하는(사는) 과 마찬가지로 그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러고 싶지도 않은 그의 실존이기 때문이다(“지하 만세!”).

 

하지만 <지하로부터의 수기>에는 지하 찬미와 더불어, 병적으로 비대해진 자의식의 전횡, ‘그들(모두) () (홀로)’라는 공격적이고 자폐적인 대립구도, 세계를 향한 허무주의적 냉소 등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물음이 동시에 들어 있다. , 작품 바깥에서 작가는 주석을 통해 이런 인물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다분히 부정적인 현상임을 암시한다. 실상 건전한 상식과 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실존의 한 양상으로서의 지하 인간의 반항과 부정(否定)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낙관적 전망도 담보하지 못하며, 이런 병적인 실존을 작가는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로서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이 괴상한 주인공은 어쩌면 작가가 의도했을 법한 여러 가능성을 넘어선다.

 

지하 인간은 끊임없이 이성에 반기를 들지만 정작 그가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이성이 만들어낸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집요한 욕망과 의지, 이른바 이성의 광기’(쿤데라)이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내부에 지하를 담은 채 지상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념에 사로잡혀 노파를 죽이고 또 자기 자신을 죽이며, 현실 속에서 정치 혁명을 꿈꾸는가 하면 몽상 속에서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꾸며, 나아가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면서까지 돌 벽에 저항한다. 말하자면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지하-지상의 내적 메커니즘을 최초로, 더욱이 응축적인 형태로 보여준 기념비적인 작품인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이 그 자체로 갖는 놀라운 매력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하 인간은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8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동안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혹은 시도는 했으나 분별의 논리에 복종하느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선보인다. 미학적, 시학적 실험은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을 수 있지만 그의 소설가적 직관과 본능은 기존의 소설 문법과 세계 인식의 틀을 배반하면서 소설 장르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 작품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표 장편보다 훨씬 더 난해하고 모던한 것, 나아가 가장 문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게다가 이 는 주인공-영웅이 되기는커녕 ()주인공’, 심지어 ()주인공, 그야말로 무위도식하는 백수에 불과하지만 오직 쓰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내 안에 담은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바로 이것이 발자크적 리얼리즘에 지배되던 19세기 소설 문법을 비켜나가 <지하로부터의 수기>만이 보여준, 심지어 발견한 우리 의식과 실존의 새로운 지평이기도 하다.

 

* * *

  (중략)

* * *

   

대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손에 들었다. 시집처럼 얄따란 두께가 만만해 보였을 것이고 특이한 문체에 끌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실험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것에 목매던 시절, 나의 첫 소설 습작은 이 작품의 패러디였다. 나는 대학 노트에 연필로 나만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써나갔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위장이 아픈 것 같다. 연일 속이 더부룩하고 신물이 올라오고 트림이 난다. 하지만 절대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 과외비를 받아도 병원만은 가지 않겠다! 의사 따위는, 내시경 따위는 엿 먹으라지! 삼십만 원으로 매일 밤 라면을 끓여먹고 위장을 더 망칠 테다!”

말들은 끝 간 데 없이 계속 이어졌다. 탈고를 한 뒤에는 어느덧 유명인사가 된 모 선배에게 일독을 부탁하는 호기까지 부려보았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렇기에 더 소중한 첫 소설을 되살려내듯,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한 자 한 자 우리말로 옮겼다. 번역의 시간은 곧, 이 소설을 향한 나의 살가운 감정을 어루만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하 인간 못지않게 지하에 탐닉했던, 문자 그대로 대학가의 반지하방에 틀어박혀 오직 문학을 향한 꿈만을 먹고 살았던, 정녕 그것이 가능했던 내 청춘의 진눈깨비를 기록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청춘의 찬치는 진즉에 끝났고 살아 있는 삶이념의 변증법도 이미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수기-기록은 이렇게 남아 있다. 지하 인간은 그것을 발표하지도 않을 것이고 독자 따위는 필요도 없다며 악다구니를 썼지만, 책의 모양새를 갖춘 이상 그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의 역자이자 이 번역본의 첫 번째 독자인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한다.

, 페테르부르크의 음습한 지하, 그 지하의 몽상에, 그 달콤한 악몽에 한 번 빠져보시길!

 

 

-- <지하로부터의 수기>(민음사: 역자 해설) 

 

-- 최근 세계문학전집(물론 이 말 자체가 역설이지만!)이 많이 나오고 덩달이 이 작품도 많이 번역됐는데요, 여전히 마뜩치 않은 것은 제목입니다...ㅠ.ㅠ 숙고 끝에 저렇게 뽑았지만 <지하의 수기>, 뭐 이래도 좋았을 것 같고, 여전히 아쉬움은 남습니다. 무엇보다도, '지하생활자'라는 말이 너무 익숙하여(또 문예출판사판을 무척 좋아했던 까닭에) 저부터 잘 고쳐지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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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