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아름다워라

-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은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영어를 제외한 네 과목에서 모두 낙제를 하여 퇴학을 당한 후(벌써 네 번째다!) 겪는 23일 동안의 일을 1인칭 시점으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길다고 하면 한없이 길 수 있는 성장이라는 사슬의 한 고리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변호사 아버지에 헐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시나리오 작가를 형으로 둔 이 부유층 자제의 불만은 대체 무엇인가. 왜 그는 스스로 문제아, 시쳇말로 루저를 자처하는가. 친구 샐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학교가] 싫어.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어해. 그뿐만이 아니야. 모든 것이 다 그래. 뉴욕에서 사는 것도 싫고, 택시니, 메디슨 가의 버스들, 뒷문으로 내리라고 고함이나 질러대는 운전기사들, 런트 부부를 천사라고 그러는 멍청이에게 소개되는 일이나, 밖에 잠깐 나가려고 해도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일이나, 브룩스에 가서만 바지를 맞추는 놈들, 언제나 사람들은…」 (중략)

자동차는 어떤지 생각해 봐난 목소리를 낮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동차에 미쳐 있다구. 조금이라도 긁힐까 봐 걱정하지를 않나, 모이기만 하면 1갤런으로 몇 마일이나 달릴 수 있나 하는 얘기들을 하지. 새 차를 사놓고도 금세 새로 나온 차를 갖고 싶어 하고 말이야. 난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아. 관심조차 없지. 자동차보다는 차라리 말을 갖고 싶어. 말은 적어도 인간적이잖아. 게다가 말은…」.(175-176)

 

그 나름으로 지적인 대화”(183)를 꿈꾼 콜필드는 상식적인대구만 해주는 샐리에게 괜히 역정을 낸다. 속물적인 가치 추구에 혈안이 돼 있고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중상층의 삶에 대한 혐오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콜필드에게 마땅히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막연한 이상을 찾자면, 태어나서 줄곧 뉴욕과 그 근처에 산 소년답게 센트럴파크 공원 연못의 오리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것을 좀 더 낭만적으로 표현하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229-230)

 

콜필드가 지키고 싶은, 또한 붙잡아주고싶은 것은 이 귀여운 소녀 피비가 보여주는 때 묻지 않은, 해맑은 순수의 세계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저 멀리 서부로 가서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돈을 모아 숲 가까이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오빠를 만나러 나온 피비가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서부행의 꿈은 좌절된다. 물론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콜필드는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같은 장황한 소설에는 관심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밝힌다. 실제로 <호밀밭의 파수꾼>19세기 유럽문학이 사랑한 엄숙하고 진지한 산문 서사시와는 거리가 멀다. 발표 당시에는 금서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 이 불량한, 아니 껄렁껄렁한책이 오늘날에는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을 능가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청춘의 특권이기도 한 방황과 일탈, 영원히 호밀밭에 머물고 싶은 꿈을 절묘하게 포착한 덕분이리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에 암시된 건강한 실용주의이다. 이제 한 살 더 먹은 콜필드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퇴원 후 9월 학기에는 또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도록 되어 있다. 결국 서부에서의 은둔 생활은커녕 동부의 중심을 벗어나기도 힘들지 않을까.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48)

 

앤톨리니 선생이 인용하는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스테겔(슈테겔)의 말을 빌자면 홀든 콜필드는 이제 막 성숙한 인간의 문턱으로 들어섰다. 성장의 한 고리가 완성된 만큼 미성숙한 인간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마땅하리라.

 

-- 네이버캐스트

 

 

-- 어릴 때 참 감흥없이 읽은 책인데, 머릿속에 남아있는 인상과 저 작품의 인기 사이의 괴리를 메워보려고 다시 읽어봤더랬지요. (파인딩 포레스트> 같은 영화에서도 샐린저가 거의 신화적 인물처럼 나오는데요.) 그 결론이란... -_-;; 아무래도 성장소설의 지존(!)은 헤세의 소설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 다시 읽을, 그래서 그의 소설에 대해 쓸 기회가 생기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 교묘하게 비켜가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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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가를 나온 떡붕어 아저씨는 P시의 여관에서 방을 빌렸다. 침대 시트가 싯누렇게 변색되고 이불 곳곳에 얼룩이 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저것 살필 틈도 없이 뻗어버렸다. 사흘밤낮을 연이어 잔 뒤에는 동이 트기 전에 여관을 떠났다. 그리고 사흘밤낮을 P시의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면서 보냈다. 첫날 잡은 물고기는 죄다 회를 쳐서 먹었다. 근처 횟집에 파닥거리는 광어와 우럭을 주고 상추, 깻잎, 마늘, 초고추장, 쌈장에 소주까지 받아왔다. 단골거래처라 조개탕까지 덤으로 얻었다. 바닷가에 앉아 혼자 소주를 자작하며 살아 있는 물고기를 뜯어 먹는 이 순간은, 말하자면, 그가 누리는 일상의 행복의 극점이었다. T시에서의 고된 노동 뒤에는, 이렇듯, P시 바닷가에서의 만찬이 뒤따랐다.

둘째 날, 떡붕어 아저씨는 그날 잡은 물고기를 죄다 풀어주었다. 이 역시 그가 전업 강태공을 선언한 시점에서 스스로에게 정한 나름대로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셋째 날, 그날 잡은 물고기를 담아놓은 어망을 보며 그는 망설였다. 원칙에 따라 풀어줄 것인가, 아니면 가져갈 것인가. 고개를 한 번 돌릴 때마다 쑥쑥 자라는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떡붕어 아저씨는 지난 5년간 고수해온 원칙을 수정했다. 어망 속의 물고기들은 다음날 오후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게 됐다. 어망이 컸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포로의 몸이라는 것도 모른 채 바다 속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날 밤 문득 여기서 전철을 타면 불과 20분도 안 되는 거리에 부모님이 살고 있다는 것이 상기됐다. 그는 벌떡 일어나 전화를 걸었다. 머릿속에서는 까맣게 잊힌 숫자들이었지만 손가락은 용케도 기억을 해냈다. 신호음은 오래 지속되었다.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자정에 가까웠다. 그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아침, 떡붕어 아저씨는 어망을 한 번 살펴본 뒤 해장술을 한 잔 걸치고 백화점에 갔다. 35년 평생 첫 걸음이었다. 더군다나 여자 아이의 옷과 신발을 사기 위해서라니. 어리바리한 떡붕어 아저씨는 물건을 잔뜩 산 만큼이나 바가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백화점을 나왔다. 그 다음엔 아이스박스와 칼, 도마를 챙겨서 바닷가로 갔다. 어망 속의 물고기들은 천진난만하게 바다와의 마지막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차례차례로 내장과 아가미를 박탈당한 채 얼음 속에 생매장됐다. 떡붕어 아저씨는 아이스박스를 등에 지고 선물 꾸러미를 품에 안은 채 배를 탔다. 비가 제법 내리고 파도도 제법 거셌지만 어느 시점부터 일 년의 절반을 배안에서 보낸 그였기에, 천하태평하게 곯아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지구를 하룻밤 새에 한 바퀴 다 돈 기분이었다.

 

*

 

소영이는 움푹 파인 구덩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방문이 열리면서 떡붕어 아저씨가 나타났다. 흉악하고 묵직한 악몽에서 막 깨어나 환한 햇빛을 맞은 것처럼 소영이는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아저씨! 아저씨!”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영이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가 떡붕어 아저씨의 다리에 매달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기분이 묘했다. 제 아무리 손을 뻗어도 그의 가슴팍에도 닿지 못할 이 조그만 존재가 이번 여행 내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감지도, 빗지도 않은 머리카락에서 냄새가 피어올랐다. 고무줄로 묶어놓은 꽁지머리는 썩은 참기름을 발라놓아 뭉쳐놓은 것 같았다. 이런 아이를 성 안에 혼자 방치해두었던 것이다.

소영아, 너 세수하는 법 몰라?”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살짝 떼놓으며 물었다.

얼굴이 간지러우면 가끔 해.”

어라, 이렇게 지저분한 숙녀가 다 있나. 양치질은?”

그게 뭐야?”

이는 닦냐고?”

이빨? 이빨을 왜 닦아? 이빨이 방바닥이야? 물 먹으면 다 깨끗해져. 이건 다 뭐야? 이리 내놔! 내가 다 검사할 거야.”

 

소영이의 눈엔 조금 전에 쏟아냈던 눈물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 눈은 호기심과 기쁨에 달떠 있었다. 선물 꾸러미가 풀어졌다. 갑자기 방한복판에 태양이라도 떨어진 듯 사위가 찬란해졌다.

우아, 이게 다 뭐야? 이거 다 내 거야, ?”

그래, 그건 다 네 건데, 방은 왜 이 모양이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소영이는 어느새 선물은 내팽개치고 떡붕어 아저씨 옆에 붙어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땅 속 구경, 하늘 비행, 방 키우는 놀이 등 소영이의 얘기는 두서도 없고 산만했다. 한참 뒤에야 하늘이 무너진 사건과 문지기의 등장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아저씨, 문지기 아저씨는 생각이 많대.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래.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헛소리지. 그 친구는 아무 생각도 없어. 매일 부실한 장비로 괴물이나 때려잡는 주제에.”

 

떡붕어 아저씨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그는 소영이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커다란 자루를 낑낑대며 끌고 왔다. 자루를 풀자 새카맣고 차진 흙이 나왔다. 양분도 많아,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자잘한 벌레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 흙으로 구덩이를 메운 다음 다시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드디어, 떡붕어 아저씨가 시멘트를 갖고 옷장에서 나왔다. 구덩이는 금방 말끔하게 사라졌다. 스팀다리미로 힘껏 다림질을 하자 우그러졌던 장판도 바로 펴졌다.

우아, 아저씨 대단하다! 아저씨 마법사야? 저건 어떡해?”

소영이가 천정의 구멍을 가리켰다. 떡붕어 아저씨는 등을 곧추 세우고 천정을 바라봤다.

 

또다시 옷장 여행이 시작됐다. 이번에 옷장을 나왔을 때는 빈손이었지만 떡붕어 아저씨의 몸이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아저씨는 조금 전에 있던 구덩이 바로 곁의 에어컨을 번쩍 들어 구멍을 향해 옮겨갔다. 대충 얼개는 맞추었지만 안쪽의 선을 연결하느라 여간 낑낑대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거인처럼 커졌기 때문에, 어느덧 맺힌 땀방울이 자잘한 우박처럼 툭툭 떨어졌다. 우박이 차가운 만큼이나 그의 땀방울은 뜨거워, 소영이는 얼른 창가로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벽을 살짝 건드렸다. 순간, 그 쪽 벽이 뒤로 밀려나면서 방이 또 커져버렸다.

 

사고가 수습되자 떡붕어 아저씨는 커다래진 몸을 추스르며 옷장이 아닌 욕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우박 같은 땀방울도 사라지고 몸도 원래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그 동안에도 소영이는 계속 아저씨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줄곧 싱크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스박스가 열렸다. 등 푸른 물고기들이 주둥이를 옆쪽을 돌린 채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푸른 몸통에서 은빛 광채가 났다. 하얀 원 안에 박힌 검은 원은 왠지 서글플 정도로 멍해보였다. 아직도 꿈틀대는 아가미 껍질도 왠지 애처로웠다. 하지만 떡붕어 아저씨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놀리며 반쯤 살아 있는 물고기를 냉동고에 차곡차곡 쌓았다. 몇 마리는 냉장고에 들어갔고, 두 마리는 바로 도마 위에 올라갔다.

아저씨 쟤네들 안 불쌍해?”

요 녀석, 나중에 밥 먹을 때도 그 소리 하나 보자, 어디.”

떡붕어 아저씨는 곧바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영이는 방으로 들어왔다. 풀다 만 선물 꾸러미가 보이자, 뒷전으로 밀려났던 흥분이 되살아났다. 눈앞으로 칫솔, 솔빗, 머리 방울과 핀, 옷가지들, 양말 몇 켤레, 하얀 운동화와 감색 운동화가 와르르 쏟아졌다. 강바닥의 다슬기도, 흙속의 벌레도 아니고, 뭔가 물건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소영이는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프릴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와 감색의 멜빵 주름치마였다. 목이 긴, 위쪽에 꽃송이가 붙어 있는 양말도 신고 머리핀도 꽂았다. 거울에 비친 소영이에게는 더 이상 구덩이 오막살이의 소영이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소영이는 거울 앞에서 빙그르 한 바퀴를 돌았다. 다시 거울 앞에 똑바로 섰을 때는, 그러나, 또 다시 얼굴에 하얀 마른버짐이 피고 덩어리진 머리카락 틈새에서 이와 서캐가 활보하는 그 소영이로 바뀌어 있었다. 소영이는 얼른 옷을 벗었다. 그때 아까까지는 없었던 하얀 종이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소영이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빨간 구두였다. 애나멜 칠이 돼서 반짝반짝 윤이 났고 구두코는 동그랗고 발등과 발목 사이에 끈이 달려 있었다.

아저씨, 이것도 내 거야?”

떡붕어 아저씨가 잠깐 얼굴을 내밀어 힐끔 봤다. 아무래도 빨간 구두를 고르거나 산 기억은 없었다.

사은품으로 끼워 줬나? 발 맞으면 그냥 신어.”

무성의한 한마디와 함께 아저씨의 얼굴이 사라졌다.

 

소영이는 조심스럽게 빨간 구두에 발을 넣어보았다. 맞춘 것처럼 꼭 맞았다. 소영이는 발뒤꿈치를 살짝 들면서 몸을 좌우로 흔들어봤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신이 난 소영이는 춤이라도 출 기세로 제 자리에서 발걸음 뗐다. 그러자 정말로 춤이 시작됐다. 빨간 구두는 소영이의 마음을 한 발짝의 속도만큼 먼저 읽고서 온 방안을 오가며 멋진 왈츠를 추었다. 그러곤 제가 알아서 옷장 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우아한 발레가 시작됐다. 다음 방에서는 라틴 댄스가, 그 다음 방에서는 밸리 댄스가, 그 다음 방에서는 재즈 댄스가, 그 다음 방에서는 봉산탈춤이, 그 다음 방에서는 테트리스 댄스가 펼쳐졌다. 저 멀리서 떡붕어 아저씨가 식칼을 든 채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수십 개의 옷장 문이 열렸다 닫히는 풍경이 한 편의 화려한 부채춤을 연상시켰다. 떡붕어 아저씨는 용수철이 달린 손을 길게 뻗어 소영이의 발목을 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휴우, 아저씨가 내 발목을 자르는 줄 알았지, 뭐야.”

방으로 돌아왔을 때 소영이가 말했다. 그제야 떡붕어 아저씨는 자기 손에 들린 식칼의 존재를 인지했다. 마침 무를 썰던 중이었다.

앞으론 구경만 하고 신지는 마.”

? 구두도 예쁘고 나도 신났는데.”

소영이의 발을 떠난 빨간 구두는 얌전하게, 다소곳이 하얀 종이 상자에 들어갔다. 내가 언제 난동을 부렸냐는 듯 얌체같이 새침을 떨기도 했다.

 

저녁상이 차려졌다. 무와 고등어가 고춧가루와 간장 양념을 듬뿍 머금은 조림이었다. 우거지까지 들어가 있었다. 볕 좋은 데서 요령껏 잘 말리고 또 잘 삶아서 연하면서도 달달한 게 감칠맛이 났다. 고등어는 살점이 탱탱하고 씹는 맛이 쫄깃쫄깃했다. 잔칫날에나, 기껏해야 장날에나 운 좋게 한두 점 맛볼 수 있었던 자반고등어와는 천양지차였다. 하얀 살과 푸른 등껍질에 사이에 삼각 꼴로 길게 박혀 있는 고동색의 속살도 결에 따라 톡톡 갈라지는 맛이 독특했다. 고등어를 먹는 동안에는 아이스박스에 산 채로 쌓여 있다가 그 상태로 냉동실에 안치된 고등어의 모습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대신, 배가 반쯤 차오르자 구덩이 오막살이의 땅속에 묻혀 있을 할머니가 떠올랐다. 아니, 할머니와 살았던 시절의 습관이 되살아났다. 떡붕어 아저씨는 내장 부분의 가시를 열심히 발라내 소영이의 밥그릇에 얹어 주었다.

나 그만 먹을래.”

왜 벌써 배불러? 그래도 그것만 먹어. 제일 맛있는 부분이야.”

제일 맛있는 데라서 남기는 거야.”

음식 남기면 못 써.”

우리 할머니도 먹어야 살아.”

떡붕어 아저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고 짜증마저 배어나왔다.

소영아, 할머니 죽었다고 했잖아!”

맞아, 할머니 죽었어. 그래서 구덩이에 묻혔어. 하지만 할머니도 먹어야 살아.”

어휴, 아예 매일 제사를 지내라, 제사를.”

제사? 그게 뭐야?”

그건 내일 얘기해줄 테니까, 얼른 이나 닦자. 칫솔 갖고 와.”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 뒤에 무릎을 굽히고 섰다. 그리고 소영이의 오른손을 같이 잡은 채로 양치질 하는 법을 가르쳤다. 소영이는 처음엔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지만 금방 싫증을 냈다. 떡붕어 아저씨는 양치지질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온갖 불길한 결과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가 썩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이빨이 어떻게 썩어? 사과야? 이빨은 썩지 않아.”

소영이는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이렇게 닦지 않아도 이는 충분히 하얗고 음식물이 잇새에 끼지도 않았다. 이가 시리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잇몸이 붓거나 곪아 터진다는 것이 도무지 가능한 일인지 통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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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공포증혹은 진부함의 공포

 

 

체호프의 단편 공포(Страх: рассказ моего приятеля,1892)에서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은 광장 공포증(боязнь пространства)과도 유사한 삶 공포증(боязнь жизни)을 호소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가 정확히 무엇이 그렇게 무섭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전부 무서워요. 나는 타고나길 깊이가 없는 사람이고(не глубокий) 사후 세계라든가 인류의 운명이라든가 하는 문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대체로 저 높은 하늘의 문제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저 진부함(обыденщина)인데요,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서 몸을 피할 수 없거든요.”(8: 131)

 

실린이 두려워한 진부함은 불륜으로 구체화된다. 그와 친분 관계를 유지해온 는 오래 전부터 그의 아내 마리야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이 애매한 삼각관계는 와 그녀의 밀회로 이어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흠모해온 여인을 손에 넣은 의 느낌은 불편함과 부담스러움(8: 137)에 가깝다. 한편 실린 쪽에서는 아내와 친구의 불륜을 사실상 그 자리에서 목격했음에도 결혼 생활을 지속한다. 이들 부부의 묵직한 권태도, 와 마리야의 심드렁한 불륜도 우리 삶의 한 흐름일 뿐이다. 실린의 말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뜨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이다. 자신이 타고나길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양보적인 전제에는 그와 반대되는 자질을 가진 뛰어난 사람의 존재가 상정된다. 만약 진부함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그 출구를 깊이를 가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어떨까.

 

 

 

 

 

 

 

 

 

 

 

 

 

 

 

 

 

 

베짱이(Попрыгунья, 1892)의 여주인공 올가 이바노브나는 예술가를 동경함에도 정작 결혼은 의사와 하게 된다. 결혼식 날에도 남편 드이모프의 단순함과 평범함이 못마땅하고 그 이후에도 예술에 무관심한 남편이 불만스럽다. 그러다 화가 랴보프스키와 연애에 빠지자 로돌프의 유혹에 넘어간 엠마 보바리처럼 그 동안의 설움설욕한다. 보바리 부인의 소설 같은 삶이 올가에게서는 그림 같은 삶으로 실현된 것이다. 고요한 7월의 달밤, 볼가 강의 증기선, 터키옥처럼 짙은 푸른빛 바다, 무엇보다도 기껏해야 생활인에 불과한 남편 대신 진짜 위대한 사람, 천재,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8: 15), 무한한 재능을 타고난 화가와 함께 하는 삶! 그러나 이 대단한 사랑도 시간의 저력 앞에서 환멸을 피하지 못한다.

 

겨울, 남편이 학위논문이 통과되고 강단에 서게 됐음에도 그녀는 완전히 무관심한데 랴보프스키에게 새 애인이 생긴 탓이다. 그 와중에 드이모프가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사망하는데, 전염될까봐 무서워서 아직 단 한 번도 남편의 서재에 가지 않았다고 하느님이 이 순간 자기를 벌할 것만 같”(8: 28)은 그녀의 순진한 죄책감이 실현된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상, 또 올가의 성격적 특수성상 드이모프의 천재성에 대한 그녀의 깨달음(8: 30)은 무척 자연스럽다.

 

드이모프!” 그녀는 큰소리로 불렀다. “드이모프!”

그녀는 그에게 실수가 있었다고,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고 설명하고 싶었다, 인생은 아직도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다고, 그는 드물고 비범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평생 동안 그 앞에서 공경심을 품고 기도하고 성스러운 공포(священный страх)를 느낄 것이라고(8: 31)

 

그러나 올가의 깨달음을 조롱하듯, 문밖의 거실에서는 코로스첼료프가 하녀에게 후처리를 지시한다. 그의 어조는 앞서 올가 앞에서 드이모프의 위대함에 대한 장황한 찬사를 늘어놓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 실무적인 말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올가의 각성이 그녀의 연애만큼이나 찰나적이고 한시적인 것임이 강조되는 듯하다. 이제 와서 남편이 의학사에 남을 위대한 천재였다는 것이(혹은 아니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코로스첼료프가 하녀를 채근하며 하는 말대로 여기에 묻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8: 31)

 

대체로 그녀의 희비극은 그녀라는 존재가 에피고넨(랴보프스키)의 모방, 말하자면 아류의 아류, 패러디의 패러디(‘제곱 패러디’)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베짱이가 수작인 것은 위대한 사람’(великий человек)베짱이’(попрыгунья)의 이분법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엄정한 인과론적 고리(가령 올가가 예감한 인과응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엉성하게 비켜가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교묘하게 핵심을 찔러버리는 미지의 메커니즘에 종속된다. 바로 이 비의(秘義)삶 공포증’, ‘진부함의 공포의 진앙이기도 하다.

 

 

 

 

 

 

 

 

 

 

 

 

 

문학 선생(Учитель словесности, 1894)의 주인공 니키친은 사랑하는 마뉴샤를 아내로 맞지만 행복하기는커녕 자신을 옥죄는 범속함 때문에 질식할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론 결혼 전에 문학 애호가인 셰발진이 던진 질문(“레싱의 <함부르크 연극론>을 읽어보셨습니까?” 8: 316)에서 시작된, 명색이 문학 선생인데 그런 것도 읽지 않았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레싱을 읽고 싶은 마음, 혹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것을 읽지 못하게 하는 속된 현실이 대립각을 세운다. “속물적이고 또 속물적인 것(пошлость и пошлость)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지루하고 한심한 인간들, 스메타나 단지, 우유병, 바퀴벌레들, 바보 같은 여자들속물적인 것보다 더 무섭고 모욕적이고 서글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도망칠 것, 오늘 당장 도망칠 것, 안 그러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8: 332) 니키친의 이 일기로 소설이 끝나기 때문에 이후 그의 행로는 알 수 없다. 레싱과 속물적인 것 사이에 낀 문학 선생 못지않게 더 흥미로운 인물은 지리-역사 선생 입폴리트이다.

 

이 노총각은 교사임에도 전혀 지식인답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불그죽죽한 턱수염, 들창코, 좀 거친 얼굴 등)이며 지리 선생으로서 지도 그리는 것을, 역사 선생으로서 연대를 아는 것을 중시한다. 무엇보다도, 화자가 수차례 강조하듯, 주로 침묵하거나 아니면 이미 오래 전부터 다들 아는 말만”(8: 318)한다. , 좀처럼 말을 하지 않다가 간혹 내뱉는 말은 무척 식상한 얘기이다. 그의 말을 모두 정리해보자.

 

1) “, 좋은 날씨입니다. 지금은 5월이니까 곧 진짜 여름이 올 겁니다. 여름은 겨울과는 다르지요. 겨울에는 난로를 떼야 하지만, 여름에는 난로가 없어도 따뜻합니다. 여름에는 밤에 창문을 열어놔도 따뜻하지만, 겨울에는 이중창을 해도 춥지요.”(8: 318)

2) “일어나요, 출근해야지요.() 옷을 입고 자면 안 돼요. 그러면 옷이 망가지잖아요. 잠은 침대에 자야지요, 옷을 벗고서”(8: 319)

3) “그 애(마뉴샤)는 김나지움 다닐 때 우리 반이었어요. 나는 그 애를 알아요. 지리 공부는 무난했지만, 역사는 나빴어요. 수업 시간에는 산만했고요.”(8: 323.)

4) “결혼은 진지한 일보(шаг)입니다.() 모든 것을 곰곰 생각하고 잘 따져봐야지, 그냥은 안 돼요. 현명하게 굴다가 손해 볼 일은 없는데, 사람이 독신 생활을 접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결혼에 임해서는 특히 더 그렇지요.”(8: 323)

5) “지금까지 당신은 결혼한 몸이 아니어서 혼자 살았지만, 이제는 결혼한 몸이니 둘이 살게 될 겁니다.”(8: 325)

6) “사람은 음식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8: 326)

7) “볼가 강은 카스피 해로 흘러갑니다말은 귀리와 건초를 먹습니다” (8: 328)

 

1)은 날씨가 좋다는 니키친의 말에 대한 응수이며 2)는 문제의 레싱을 읽다가 옷을 입은 채 소파에서 잠든 니키친을 깨우며 하는 말이다. 3)은 마뉴샤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는 말인데, 다소 무례한 동문서답처럼 들린다. 같은 맥락에서 나온 4)는 당신은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니키친의 질문에 상당히 심사숙고해서 내놓은 대답이다. 5)는 니치킨의 결혼식 날 입폴리트 나름의 감동을 담아 건네는 축하 인사이며 6)은 흰 빵 하나로 점심을 때우는 그가 아내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먹는 니키친을 보며 하는 말이다. 끝으로 7)은 임종 직전에 내뱉는 말이지만 화자의 암시대로 인생에 대한 어떤 통찰도 담고 있지 않다. 이렇듯 입폴리트의 말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그 나름의 진정성을 담고 있음에도 기계적인, 따라서 그로테스크한 동어반복에 가까워 한 학자의 지적대로 정녕 부조리극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소한 만큼이나 철학적인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의 말이 지녔던(혹은 그러고자 했던) 의미와 무게, 그 지나친 있음에 대해 없음으로 맞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매일 학생들이 그린 지도를 고쳐주고 연대기를 작성하는 하는 것이, 숙고 끝에 흔한 말만 내놓는 것이 그토록 한심한가!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도 뭔가 깊은 생각을 한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대단히 큰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필요악과 같은 환상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입폴리트의 동어반복과 같은 삶이 니키친보다 더 열등할 것은, 적어도 딱히 더 지루할 것은 없다는 점이다. 굳이 말하자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다는 사실(입폴리트는 단독(丹毒: рожа головы)으로 죽는다)에 저 진부함의 공포와 비극이 환기될 뿐이다.

 

대체로 지식인이자 작가로서 체호프가 속물성 앞에서 느낀 우수는 고골의 경우보다 더 암담한 것으로 보인다. 고골에게 그것은 이 인간의 원초적인 작음’, 그 옹색함에 근거한 것으로서 더 높은 이상과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극복해야 하는 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영웅이 사라지고 작은 인간(위대한) 인간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체호프의 세계에서 그것은 살아 있는 이상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저 진부함의 동의어가 된다. 그 때문인지 속물성을 그려 보이는 작가의 시선에서는 우수와 나란히 씁쓸한 자기 연민과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

 

 

 

-- 논문 <체호프의 우수: 지루한 이야기(1889)검은 수사」(1894)를 중심으로>의 1장. 

 

원래 체호프의 소설을 읽을 때는 저 대목, 즉 체호프식 속물성의 소설화 방식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논의의 편의상(-_-;;) 지식인 소설, 관념 소설을 집중 분석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여하튼 위에서 언급한 세 소설 중, 아니, 여러 인물 중 가장 인상적인 놈은 입폴리트입니다...^^;;  이 인물의 존재를 상기시켜준 건 석영중, <뇌를 훔친 소설가>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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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예술, 사랑에 관한 영화-소설

-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26세의 좌익 혁명가이자 정치범 발렌틴 아레기 파스, 37세의 동성연애자이자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자 루이스 알베르토 몰리나. 무료함을 달래려고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자기가 본 영화 얘기를 들려준다. 갑갑한 감방 안에서 여섯 편의 영화가 재생되는 동안 두 남자는 연인이 된다. 실제로 문제의 영화들은 세부적인 차이(로맨스, 호러, 판타지, 정치선전물 등)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서 사랑에 대한 몰리나의 몽상을 담고 있다. “여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31)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여자로 여겨 평생 동안 한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싶어”(65)라고 말하는 남자. 이렇게 부르주아적인’, 심지어 퇴폐적인데다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몰리나를 발렌틴은 경멸한다. 반면, 대의명분과 사상에 투신한 혁명가, 정치범으로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난 현재의 순간을 위해 살 수는 없어. 정치투쟁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야. 그래, 정치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알아듣겠지? 내가 이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것도 모두네가 만일 고문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하지만 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어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어

아니야, 넌 그걸 상상할 수 없어내가 이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은계획이 있기 때문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혁명이고, 감각적인 기쁨 같은 것은 부차적인 것이야.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아니 아마도 내 일생 동안 계속될 투쟁을 하면서 감각적인 기쁨을 느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야. 알아듣지? 그런 기쁨은 사실상 내게는 부차적이기 때문이야. 위대한 기쁨은 다른 것이야. 가령, 내가 가장 고귀한 명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그러니까 바로 내가 가진 모든 사상이…」

네 사상이 무엇인데?

내 이상은한마디로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야. 난 그 사상의 기쁨을 어느 곳에서나 느낄 수 있어. 이곳 감방에서도 느낄 수 있고, 심지어는 고문 받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야. 이것이 나의 힘이야.(43)

 

하지만 영화-소설이 진척될수록 일종의 반전이 보인다. 가령 설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지독한 복통도 감내하던 발렌틴이 마르타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혁명과 이데올로기에 투신한 자가 부르주아 여성을 사랑하다니, 그는 스스로를 반동분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계급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상류계급만 좋아하는 이 세상의 개만도 못한 놈들처럼 말이야.”(194-195) 여기서 그는 사랑과 정치가 가장 노골적으로 결합된 나치 영화(두 번째 영화) 속의 여가수 레니와 은근히 겹쳐진다. 좀비 영화(다섯 번째 영화)에 반응하며 마르타를 떠올리는 발렌틴 역시 소명의식에 불타는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다.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졌어. 당신만이 날 이해할 수 있을 거야당신도 깨끗하고 편안한 가정에서 자랐고, 인생을 즐겨왔기 때문이야.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순교자가 되고 싶진 않아. 마르타, 난 순교자가 된다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난 훌륭한 순교자가 될 수 없어. 지금 이 순간 내가 했던 모든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중략) 마르타난 아프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거야. 내가 죽을지도 모르고모든 것이 여기서 끝날지 모르며, 내 인생이 이 조그만 감방 안에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 너무 겁나. 이런 것은 너무 불공평해. 난 항상 관대했고, 그 누구도 착취한 적도 없으며세상을 이해하게 된 후부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착취에 대항해 투쟁해 왔어그리고 난 모든 종교를 욕했어. 종교가 사람들을 멍청이로 만들어 평등을 위해 투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나는 신의정의가 있기를 갈구해 왔어. 난 부디 신이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어몰리나, 신을 하느님으로 바꿔줘. 부탁이야…」(236-237)

 

소설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발렌틴은 더욱더 감상에 젖는 반면 몰리나는 남성적인 담대함을 보여준다. 가석방 직전 몰리나는 발렌틴의 부탁을 무섭다는 이유로(!)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들이고, 자신의 목숨이 극도로 위협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의 동지들과의 접선을 시도한다. 이렇듯 몰리나는 수감 중에는 이야기 사슬을 엮어감으로써 친구-연인의 목숨을 연장해주고(적어도 고문의 순간을 늦추어주고) 석방 이후에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는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혹독한 고문 끝에 의사가 몰래 놓아준 모르핀을 맞고 환각 상태에 빠진 발렌틴의 의식 속에서 되살아난다.

 

 

(중략) 그럼 내가 섬에서 잠을 깨면 넌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영원히 있고 싶지 않아요?>, 아니, 이젠 됐어, 충분히 쉬었어, 음식도 모두 먹고 한잠 푹 자고 나니 다시 기운이 솟아나, 내 동지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날 기다리고 있어, <당신 동지들 이름, 그 말이 바로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에요>, 마르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이 말만은 당신한테 할 수 없었어, 당신이 그것을 물어볼지 몰라 두려웠고, 그러면 당신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어, <아니에요, 사랑하는 발렌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369)

 

197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 작가가 쓴 <거미여인의 키스>는 각종 금기와 억압, 나아가 각종 혁명(성 혁명, 정치 혁명, 미학 혁명)에 관한 소설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양성애든 사랑의 논리와 이상은 비슷하다. ‘짧지만 행복한 꿈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것!

 

-- 네이버캐스트

 

 

 

 

 

 

 

-- 저 글을 쓸 때 처음 읽어본 책입니다. 중남미 작가는 거의 읽은 적이 없네요. 그나마 보르헤스나 마르께스 정도를 읽었지만, 난해하다는(혹은 지루하다?) 느낌을 받은 듯합니다.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을 때 영화도 함께 봤는데요, 몰리나 역을 맡은 윌리엄 허트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의 다른 작품도 함께 읽어보고 싶은데, 라틴아메리카도 특색이 강한 것 같아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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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천정에서 불어 내려와 방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소영이는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연못이 쏘아 올린 푸른 하늘이 보였다. 하얀 연꽃과 붉은 연꽃마저 하늘 위로 쏘아, 구름처럼 둥둥 떠다녔다. 갑자기 연꽃이 터지면서 꽃잎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방바닥이 흔들리고 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소영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천정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구멍 어디에서 시커멓고 두툼한 줄이 내려왔고 거기에는 뭔지 모를 물건이 앙상한 골조의 형태로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줄은 징그러운 구렁이처럼 꿈틀대며 허공에서 요사스럽게 움직여댔고, 앙상한 물체는 고문이라도 당하는 양 처참하게 낑낑댔다. 덩달아 짙은 회색의 먼지덩어리가 솜처럼 뭉텅뭉텅 떨어졌다. 소영이는 어리둥절해하며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가 벨 눌러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고, 절대 밖에 나가지도 말고!” 떡붕어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지만 소영이는 이미 복도로 나와 있었다.

 

복도 끝에서 희미한 불빛이 비쳐왔다. 불빛이 점점 더 커지는가 싶더니 한 남자가 불빛을 등에 지고 섰다. 그는 슬리퍼 끄는 소리도 내지 않고 나긋나긋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으악! 아저씨 뭐야?!”

하지만 상대방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도 멍했다. 그저 가로 지름이 넓은 타원형의 두 눈만이 잃어버린 초점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불안한 기색 없이 고요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현관 안으로 발을 들여 놨다. 소영이는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마냥 남자의 허벅지에 달라붙어 그를 꼬집고 물어뜯고 두들겨 팼다. 그제야 상대방은 반응을 보였다.

그만 좀 하면 안 되겠니? 아프잖아.”

아저씨 뭔지 말해! 사람이야, 귀신이야?”

나는 문지기야.”

그는 나긋나긋한 고양이 걸음을 자랑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답지 않게 가느다란 몸과 팔다리가 움직이는 모양새가 꼭 바람에 팔랑이는 나뭇잎 같았다.

 

방 안을 보자 문지기는 얼음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한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점검을 빙자하여 사태를 관망했다. 에어컨이 떨어지다가 중간에서 멎었다. 땅바닥에 닿지도, 고로 박살이 나지도 않았다. 그건 오직 배수관이 순간적으로 천정과 벽 사이의 돌출부에 찍혀 고정된 덕분이었다. 여기서 문지기는 질문을 던졌다. 저 비좁은 틈새에 어떻게 돌출부가 있을 수 있지? 저렇게 허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에어컨을 붙들고 있을까? 그나저나 저게 언제 생겼지? 문지기는 이 성에서 태어나 성과 함께 자라났으며, 이 성의 영원한 문지기였다. 오늘 발견한 성의 새로운 구조에 그는 상당히 달떴다. 그리고 이 하찮은 사실이 대단한 의미라도 지니는 양 오랫동안 상념에 잠겼다. 그 시간은 허망하게 뚫려 버린 거대하고 시커먼 심연에 경의를 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드디어 문지기가 몸을 움직였다. 지금껏 쳐들고 있던 고개를 다시 내리자 목뼈가 뻐근해왔다. 그는 목을 앞뒤, 좌우로 천천히 숙였다 펴더니 방을 나갔다. 지금껏 옆에서 계속 떠들던 소영이는 숫제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어디 가? 그냥 가면 어떡해? 뼈다귀들이 울잖아! 뱀도 싫단 말이야! 에이, 나 여기 싫어! 구덩이 오막살이로 돌아갈래!”

 

한참 뒤에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의자와 펜치, 빈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의자를 사고가 난 지점 밑에 갖다 놓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고개를 두 손을 뻗으며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혔다. , 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에어컨 덩어리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 자리는 운석을 맞은 양 움푹 파였고 그 주위로 에어컨의 파편이 흩뿌려졌다. 문지기는 조용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운석 자국을 오랫동안 바라본 뒤 그는 쪼그리고 앉아 부서지고 토막 난 잔해를 봉지에 주워 담았다. 그러다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갔다. 언뜻 그의 손끝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불꽃이 인 것도 같았다.

 

으악, 아저씨 왜 이래? 아저씨, 아저씨! 정신 차려!”

소영이는 문지기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겨드랑이를 깨물었다. 그래도 문지기는 죽은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영이는 문지기의 배 위로 올라가 콩콩 뜀박질을 시작했다. 처음 발바닥에 닿은 것은 물렁하고 보드라운 쿠션이었지만 발을 뗐다가 다시 붙이자 딱딱하고 가느다란 뼈다귀의 감촉이 느껴졌다. 소영이는 문지기의 배에서 다시 내려왔다. 이제는 발바닥을 간질이고 사타구니를 깨물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소영이는 주먹을 꽉 쥐고 씩씩대다가 홧김에 사타구니 사이의 둔덕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문지기는 회생한 좀비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괜찮아? 뭐야 손바닥이 왜 이리 시커매?”

소영이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문지기는 예의 그 초점 없는 눈을 전선 토막에 고정시켰다. 이미 죽어버린 전선에 전류가 남아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공포의 잔영 때문에 문지기는 섣불리 거기에 손을 대지 못했다. 손바닥을 뒤덮은 검은 색이 그에겐 무척 불길하게 느껴졌다.

아저씨 뭐해? 뼈다귀 시체를 치우란 말이야, 빨리! 빨리! 저 천정 구멍은 또 어떡해?”

문지기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역시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마도 이 말을 하기가 무척이나 아깝다는 듯 조용조용, 조심스러웠다.

이 아저씨는 말이야, 생각이 아주, 아주 많단다. 너무, 너무 많아서 문제야.”

어라,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

 

또 시련이 시작됐다. 소영이가 아무리 안달복달해도 문지기는 유유자작하게 느릿느릿 방을 나갔다. 소영이는 종종 걸음을 치며 문지기의 뒤를 좇아갔다. 이미 복도를 절반 이상 지나왔다. 복도의 끝이 아득히 먼 불빛 속으로 함몰하는 중이었다.

그건 비밀이야.”

함몰하기 직전, 문지기는 이런 답을 남겼다. 이번에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보물을 꺼내 보여주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문지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소영이는 투덜대며 방으로 돌아왔다. 떡붕어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

 

소영이를 성에 남겨둔 채 떡붕어 아저씨는 지루한 여행을 감행했다. 섬을 벗어나, 소영이와 함께 밟았던 선착장에 도착했다. 일렁이는 바다를 보자 손끝이 찌릿하고 손발이 저려왔다. 곧 온 몸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신경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욕망을 억누르고서 의연히 기차역을 향해 걸어갔다. 상상 속의 그는 미지의 적수를 향해 낚싯대를 던져놓고 한판 승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 속의 그는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1125, 떡붕어 아저씨는 T역에 도착했다. 땅덩어리가 널찍하고도 둥그렇게 파인 분지였다. 첫 발을 떼놓을 때부터 우울해졌다. 어느 새 그는 환골탈태하여, 말쑥한 직장인 내지는 관록이 좀 쌓인 젊은 사업가 차림이었다. 텁수룩한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정돈돼 있고 손에는 서류 가방과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졸라맨 넥타이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고 양복에 갇힌 몸은 갑갑증을 호소해왔다. 사방팔방 어딜 보나 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대신 나른하고 촌스러우면서도 부산스러운 소도시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이 들진 않았다. 역사로 들어선 그는 조그만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했다. 그의 단골 메뉴는 시원한 우동 국물과, 유독 어묵에만 고추장 양념을 한 김밥이었다. 동시에 이것이 그가 T시에 머무는 동안 사심 없이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피비린내 나는 접전을 앞두고 여유롭게 치루는 만찬은 황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 시작됐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무수히 많은, 하지만 형식적인 말이 오가고 무수히 많은 서류에 도장이 찍혔다. 그동안 T시는 점점 더 더워졌다. 닭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해 집단적으로 폐사했고, 기왕지사 죽을 날을 세고 있던 노인들의 명줄이 마침 올 여름에 탁탁 끊겨버렸다. 이제 막 태어난 것들, 절찬리에 삶의 향연을 즐기고 있는 것들, 삶의 황혼을 맞보기 시작한 것들 모두 푹푹 찌고 활활 타는 무더위 속에서 허덕였다. 버스와 택시조차도 짜증나는 열기를 온 몸으로 뿜어냈다. 덕택에 도로는 온통 갑갑하고 불만스러운 매연으로 가득 찼다. 떡붕어 아저씨는 T시의 거리를, 사무실과 매장을, 학교와 연구소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 흐름에 따라 보이지 않는 돈이 역시나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그의 계좌에 정착했다. 그 동안 수많은 냉수와 수많은 냉커피와 냉홍차가 그의 몸을 거쳐 땀으로 증발했다. 땀이 다 빠져버리자 이제 피가 공기와 부딪쳐 산화됐다. 공기는 그와 같은 인간들, 동물들, 곤충들의 땀과 피에 절어, 혓바닥을 축 늘어뜨리며 헉헉거렸다. 그의 몸속에는 필요 이상의 당분과 염분이 수북이 쌓였다. 반대로, 수분과 혈액은 거의 다 빠져 나가버렸다. 몸의 인내력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그는 다시 T역에 와 있었다.

 

이미 해는 넘어갔지만 잔혹하게 데워진 지표면은 식을 생각을 안 했다. 공기도 여전히 텁텁하고 눅눅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횡단보도를 건너 역사를 향해 걸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는 뛰기 시작했다. 불과 1분 사이에 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그 몸으로 그는 기차에 올랐다.

 

P역에 도착했을 때는 도시의 불빛이 어둠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막 노숙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얼굴은 시뻘건 구릿빛이었고 몸뚱어리는 둔하다 못해 슬퍼 보일 만큼 두툼했으며 행색은 몹시 초라했다. 무엇보다도 불가피하게 강요된 노동 이후에, 그 특유의 고약한 제취가 더욱더 고약해졌다. 사람들은 힐끔힐끔 그를 훔쳐보면서 피했다. 그는 무뚝뚝하고 음울한 얼굴을 한 채 밤 시장으로 갔다.

 

어둠이 자욱이 내린 가운데, P시 슬럼가에는 다양한 가게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붕어빵과 호떡, 혹은 떡볶이와 어묵, 혹은 순대와 닭발, 돼지국밥과 수육을 파는 곳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그밖에 갓 태어난 아이를 파는 곳, 살아 있는 동물을 파는 곳, 죽은 동물의 고기를 파는 곳, 젊고 건강한 남자의 노동력을 파는 곳, 젊고 예쁜 여자의 몸을 파는 곳, 나이와 성별과 신선도가 등급별로 나눠진 장기를 파는 곳, 마음에 들지 않는 헌 몸 틀을 대체할 새로운 몸 틀을 파는 곳 등 이곳의 밤거리는 꽤나 다채로웠다. 그곳에는 그가 매년 두 번씩 들르는 단골 가게가 있었다. 금괴를 사고파는, 평범하고 건전한 곳이었다.

 

주인이 그를 맞으며 눈인사를 했다. 그는 떡붕어 아저씨가 내민 지폐 뭉치를 오랫동안 세고 또 살폈다. 돋보기는 물론이고 현미경까지 동원되었다. 위조 여부가 확인된 뒤에도 거쳐야 되는 과정이 있었다. 주인은 지폐 뭉치를 들고서 특수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폐들은 지문감식까지 거쳤다. 마침내, 밖으로 나온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칼부림이 좀 심했던 모양이지요?”

평생 동안 검이나 창을 두들겨 온 일급 장인의 표정과 어조였다. 떡붕어 아저씨 역시 졸지에 검술사로, 창술사로 바뀌었다.

딱히 유별날 것도 없지요. 늘 그렇잖습니까.”

아시다시피 요즘 어디나 기운이 좋질 않습니다. 다슬기 할매가 죽었습니다. 구덩이 오막살이도 그대로 묻혀 버렸지요. 그 아이는 어떻습니까? 정신도 성치 않은 여자아이를 돌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주인은 음흉하게 눈을 찡긋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값을 쳐 주시지요.”

주인도 잡담을 계속할 마음을 접었다.

 

그는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가게로 나온 그의 손에는 가짜 비단으로 싼 크고 굵은 금괴가 들려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지난번보다 무게가 적었다. 하지만 군말은 하지 않았다. 금괴의 무게는 그가 넘긴 지폐의 무게에 비례했고, 나날이 불어나고 있는 그의 체중에도 비례했다. 이 속도로 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T시를 오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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