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그 부조리에 바치는 희비극: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 사뮈엘 베케트(1906-1989), <고도를 기다리며>(1952년 출간, 1953년 초연) -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의 명성과 인기는 셰익스피어의 여느 희곡에 맞먹을 법하지만 실제 내용은 허망하기, 심지어 한심하기 그지없다. 1, 어느 시골길, 고목(枯木) 같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가 차례로 나타나 고도를 기다린답시고 각종 시답잖은 놀이를 한다. 이어, 포조가 끈에 묶인 럭키를 앞세우고 등장한다. 이 둘이 퇴장하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는 내일 올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고 사라진다. 무대에는 고고와 디디만 남는다. 2막의 내용도 대략 비슷하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고도가 초연된 1953년은 물론 지금에 와서도 제법 충격적이다. 통상 희곡의 사건은 인물-성격이 서로 부딪치는 와중에 발생하여 모종의 위기와 절정을 거쳐 파국(혹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데, 그 원동력이 되는 것은 주인공-영웅(hero)의 의지와 욕망이다. 그러나 고도에는 마땅히 주인공도 없을뿐더러 주인공 비스름한 고고와 디디는 더 이상, 어떤 의미에서도 영웅이 아니다. 제각기 다른 이름과 그 나름의 차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가령 고고는 곧잘 구두를 갖고 놀고 자신을 예수에 비유한다) 서로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 일견 주인과 노예로 엮인 포조와 럭키는 여차하면 전복될 것 같은 괴상한 주종 관계를 보여준다. 1막과 2막의 말미에 잠시 등장하는 소년()은 형제지간인지 동일인인지 끝까지 헷갈린다. 르네상스 이래 지난 세기의 문학이 이룩한 -자아의 신화는 이렇게 무너진다.

 

 

 

 

 

 

 

 

 

 

 

 

 

 

시공간 역시 특이하다. 어딘지 불명확한 장소에 시간은 정지돼 있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무한대로 흘러간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객관적인 시간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고고와 디디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수시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 것 같으나 구체적인 정황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사정은 럭키와 포조, 소년도 마찬가지. 등신 같은 떠돌이 어른 네 명은 더 늙을 것도 없음에도 시종일관 더 늙어가는 반면, 소년은 시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에(그래서 더 소름끼친다) 아예 자라지도 못한다. 시계와 달력이 없는 공간이랄까. 여기서 고도는 시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와 시간은 기다림의 형식으로 서로에게 손발이 꽁꽁 묶여 있다. 이 경우 기다림은 삶의 동의어로서, 행위(순간)라기보다는 어떤 양태(지속)이다. 고고와 디디는 오지 않는 고도때문에, 더 정확히 고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를 흐르며 모든 것을 느긋하게 해치워버리는 저 무자비한 시간을 두고 포조는 절규한다. “어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럭키)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중략)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150) 그러니 디디의 말마따나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 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134)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래 시간과 공간과 행동의 엄정한 일치는 희곡(특히, 비극)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체호프를 기점으로 극 장르는 각종 의미론적 요소를 지워가는 쪽으로 진화하다가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 극을 거쳐 베케트의 이른바 부조리극에 이르면 인물 아닌 인물과 사건 아닌 사건으로 한 편의 극이 완성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사유의 틀을 바꿔놓은 대사건이다. 고도한 불문학자의 표현대로 사물과 육체를, 언어와 정신을 차례로 소멸시켜 나가는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력”(이인성)을 통해 불확정성과 상대성의 원칙, 존재와 세계의 부조리를 비단 내용이 아니라 형식 그 자체로 담아낸다.(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사실성의 환상을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연극이 고수해온 각종 조건성과 인과율이 사라지자 오히려 무대는 무대 바깥, 실제 우리의 삶과 놀랍도록 닮았다. 2막이 끝날 무렵 고고는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디디는 다들 하는 소리지.”(158)라고 응수한다. 결국 둘은 가자는 말만 할 뿐, 럭키가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듯(혹은 그러지 않듯)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이 황량한 정체(停滯)와 불모의 세계에서 오직 나무만 1막에서 2막을 거치면서 이파리 몇 장을 달고 있다. 기적과 구원의 상징인가, 아니면 그저 허망한 디테일인가. 글쎄다.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물음에도 작가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지 않는가.

 

고도를 발표했을 때 베케트는 이미 세 편의 장편을 내놓은 소설가, 특히 해체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유명한 <몰로이>의 작가였다. 은둔과 방랑의 삶 속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소설과 희곡을 넘나들며 문학에 매진했으며 한때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던 이 아일랜드 작가에게 고도는 정녕 고고와 디디의 당근(순무) 놀이, 모자 놀이, 목매달기 놀이처럼, 또 럭키의 썰렁한 춤과 황당한 생각놀이처럼 이 지랄”, 일종의 호작질-손장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프랑스어로 쓴 이 작품을 영어로 다시 쓰면서 그는 두 막짜리 희비극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베케트의 개인사든(가령 1938년 파리에서 길을 걷다가 어느 청년의 칼에 찔려 죽을 뻔한 일) 역사든(2차 세계 대전) 진정한 비극은 비극의 진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어쩌면 그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데 있다. 포조는 자기와 럭키의 처지를 두고 팔자소관운운한다. 이 세상의 눈물과 웃음의 총합은 동일하다는 식의 말도 덧붙인다. 과연 웃지 않고서야 이 당연한 부조리를 어떻게 견뎌내랴.

 

-- 책&

 

 

-- <산울림>의 <고도...> 공연을 보지 못해서 늘 죄지은(?) 느낌인데요, 유투브 검색하다가 이언 맥컬린이 출연하는 공연의 일부를 보고 즐거웠습니다. 링크할 줄 몰라서(-_-;;) 사진을 긁어봤습니다. 후줄근한 늙은이들이 찐따 같이(!), 등신 같이(!) 춤추고 웃고 하는 장면이 진짜 웃깁니다. 우울할 때 보면서 한껏 웃고 그렇게 웃으면서 우울해할 수 있는 장면이랄까요.

 

-- 베케트의 작품,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작가는 위에도 인용했지만 소설가 이인성입니다. 그 다음은 소설가 정영문인데요, 베케트에 대한 그의 사랑(?!)은 유명하죠(물론 이 문장은 정말로 정영문스럽지 않습니다만-_-;;). 올해 동인문학상을 탄 <어떤 작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더 많이?) 베케트 냄새가 나더군요. 베케트와 함께 일독을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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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섬은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자갈길의 종착지는 연못이었다. 흐르는 강물과 달리 몹시 탁하고 적막했다. 그 위로 푸른 연꽃 이파리들이, 또 그 위로 흰색과 자주색 연꽃들이 동동 떠 있었다. 연못 가두리의 물은 개구리밥으로 덮여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부들도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수초들은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 마냥 수면 아래서 흐느적댔다. 그 위를 물방개와 장구애비들이 휘젓고 있었다. 연못 건너편으로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높은 성채가 서 있었다. 하지만 볼품없이 높기만 할 뿐, 애매하게 방치된 폐가처럼 씁쓸하고 서글퍼 보였다. 담쟁이 넝쿨이 담벼락을 뒤덮어 벽돌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벽돌의 틈새에는 눅눅한 이끼들이 음침하게 끼여 있었다. 대체로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참 초라한 성채였다.

 

, 이제 구경은 그만 하고 내리렴.”

떡붕어 아저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이렇게 무거워진 거냐?”

땅바닥에 두 발을 내딛자 소영이도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새로운 몸을 얻은 기분이었다. 길게 자란 머리채를 흔들며 길어진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성큼성큼 걸음도 내딛었다. 이제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저씨 우리 저기서 사는 거야?”

왜 마음에 안 들어?”

소영이는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빛도 들어온다며? 변소에 구더기도 없다며? 그럼 됐어. 아저씨, 이제 우리 헤엄쳐야 돼?”

연못가에서 걸음을 멈춘 소영이가 물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연못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를 더듬었다. 볼록하고도 거칠게 돋아난 옹이 위에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château d'if’라는 문자도 있었지만 보호색을 입은 곤충 같아 간신히만 알아볼 수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을 집게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성 저 편에서 거대한 다리가 내려왔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저쪽 하늘에서 이쪽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리는 소영이 바로 앞에서 철커덕 내려앉았다. 소영이는 아저씨를 한 번 올려다 본 뒤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진홍색, 하얀색, 검정색의 커다란 물고기들이 소영이 곁을 지나갔다.

우아! 물고기 되게 많다! 아저씨 쟤들도 잡아먹으면 맛있어?”

쟤들은 저렇게 놀라고 있는 거야.”

왜 어떤 물고기는 잡아먹고 어떤 물고기는 그냥 놀게 내버려둬? 불공평하잖아?”

떡붕어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얼굴의 살갗이 아주 미세하고 재빨리 경련을 일으켰다.

 

둘은 이미 다리를 다 건너왔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저절로 열렸다. 두 개의 문짝이 밖으로 쩍 갈라지면서 성의 내부가 드러났다. ‘우아!’를 외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소영이도 당혹스러울 만큼 누추한 공간이었다. 천정은 나지막하고 군데군데 페인트가 떨어져 나가 지저분했다. 홀 바닥에는 여기저기에 해묵은 먼지와 쓰레기가 눈에 뜨였다. 청소를 하다 말았는지 물동이와 밀대걸레도 한쪽 벽에 세워져 있었다. 그 맞은편에 다양한 크기의 종이 박스가 쌓여 있었다. 그곳에는 조그만 방이 하나 있었다. 방문의 절반이 유리로 되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탁자 위에 먹다 남은 과자와 커피 잔, 꽁초가 가득 담긴 재떨이가 보였다.

저 방엔 누가 살아?”

아무도 안 살아.”

그럼 빈 방이야?”

아니, 관리실이야.”

그게 뭐야?”

관리인이 있는 곳이고, 관리인은 이를 테면 문지기와 같은 거야.”

이 말에 소영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반문했다.

문지기라면서 왜 문을 안 지켜?”

그때 성문이 열리면서 우체부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여러 개의 소포가 들려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떡붕어 아저씨가 P항에서 부친 낚시 장비였다.

그거 307*호에 온 거죠?”

, . 그럼 그쪽이 떡붕어 아저씨? 소포 왔습니다!”

우체부는 이렇게 외치면서 무척 기뻐했다. 두드릴 대문이 없어, 당장 옆에 있는 관리실 문을 탁탁 두드리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거구에 한꺼번에 80킬로그램 정도는 거뜬히 들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어릴 때는 거인이라며 놀림과 따돌림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도 그의 꿈은 가로수가 호젓하게 심어진 포장도로 위에서 천천히 시간을 음미하며 낙엽을 쓰는, 몸집이 왜소한, 심지어 여자처럼 가녀린 청소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그가 거구여서도 아니고 이곳에 가로수길이랄 것이 없었던 까닭에 실현할 수 없는 꿈이었다. 대신 그는 이 섬의 유일한 우체부가 되었다. 지나치게 큰 몸집에 대한 해묵은 열등감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아침부터 그는 불끈 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리며 우체부 아저씨요!”라고 목청껏 외쳤다. 초인종이 버젓이 있는데도 이러는 건 그의 습관이었다. “최도승씨, 편지 왔습니다!” “한훈탁씨, 소포요!” 이런 말을 덧붙일 때 그의 얼굴에선 흐뭇함이 배어나왔고, 온 몸에선 생기가 샘솟았다. 사람들이 편지나 소포를 건네받을 때는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상대방이 몸을 돌린 뒤에는 그 뒷모습을 5초 정도 감상했다. 우체부의 빈틈없는 하루일과에서 성은 늪과 같은 것이었다.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소포나 편지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우체부를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다들 집을 비웠거나 혹은 비운 척했다. 무엇 때문인지 작당이라도 한 듯 우편물을 받는 일만은 문지기가 해야 된다고 암묵적인 원칙을 세웠다.

 

, 이건 됐고, 젠장, 또 아무도 없군.”

우체부는 매번 겪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또 화를 냈다. 그는 투덜거리며 관리실 옆 벽에 박힌 버튼을 눌렀다. 저쪽에서는 즉각 응답이 왔다.

누구세요?”

우체부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요!”

문 앞에 두십시오.”

아니, 그러다가 도둑이라도 맞으면 어떡합니까? 분실도 분실이지만 누구든 수령자가 사인을 해야 되는데요?”

직접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우체부 아저씨가 직접 사인을 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지 말고 잠깐 내려 오셔서,”

우체부는 말이 길어졌다. 문지기는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했다. 결국 우체부가 제풀에 지쳐 꼬리를 내렸다. 우체부는 내키지 않는 듯 우편물을 관리실 앞에 내려놓으며 툴툴거렸다.

대체 뭐 하는 양반인지, .”

하지만 떡붕어 아저씨는 무사히 배달된 낚시 장비를 매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신인의 행복과 감사에 전 표정을 보자 우체부는 관리인으로 인한 짜증이 싹 녹는 기분이었다.

 

성을 마지막으로 오늘 그의 일과도 끝났다.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몸집이 어린 계집아이만큼 작고 지능도 딱 그 수준인 아내가 해주는 밥을 배불리 먹고, 점점 아비 못지않게 덩치가 커지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흘리고는 죽은 사람처럼 잠들었다.

 

*

 

소영이가 성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른 아침부터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달랬다. 출장을 가야 된다는 것이었다. 소영이는 자기 혼자 집을 지켜야 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넌 다 컸어. 충분히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는 나이라고.”

이 말에 소영이는 의젓한 척 굴며 눈물을 닦았다.

아저씨, 또 배 타고 가?”

.”

그 다음엔 또 멀미나는 버스 타?”

아니, 기차.”

그거는 멀미 안 나?”

글쎄, 그건 모르겠다. 태어나서 차멀미 하는 사람은 너밖에 못 봤거든.”

아저씨, 나 기차 탈래. 나도 데려가줘.”

소영이의 얼굴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다음번엔 꼭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서 성을 나갔다. 소영이는 처음에는 훌쩍 거렸지만 금세 그의 존재를 잊었다.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의 집이 좋았다. 낮이면 햇빛이 환하게 들고 밤이면 검푸른 하늘빛이 포실한 이불처럼 깔리는 아늑한 집이었다. 소영이의 방은 벽에 손을 댈 때마다 조금씩 커지더니 급기야는 운동장처럼 넓어졌다. 소영이는 방을 빙빙 돌며 뜀박질을 했다. 방구석에 놓여있던 줄넘기를 들고 놀기도 했다. 벽을 향해 공도 던졌다. 공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벽은 또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때마다 방은 세로로, 혹은 가로로 조금씩 더 넓어졌다. 소영이는 모서리를 향해 공을 힘껏 던졌다. 이번에는 그 쪽 모서리만 저 혼자서 뒤로 쑥 빠지면서 방이 사다리꼴 모양이 됐다. 정확히 맞은편 모서리를 향해 똑같은 힘을 써서 공을 던져봤다. 그러자 이번엔 그쪽으로 방이 확장됐다. 졸지에 방은 평행사변형이 돼버렸다. 소영이는 방을 키우고 넓히는 놀이에 흠뻑 빠졌다.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선반도, 옷장도, 창문도, 장판도 다 소영이를 따라 키득키득 웃어댔다.

 

다음날, 소영이는 옷장 문을 열었다. 옷 대신 텅 빈 넓은 공간이 나왔다. 소영이는 옷장 안으로 들어가 봤다. 안쪽 벽에 손을 대자마자 벽이 문으로 바뀌었다. 곧 소영이의 방과 똑같은 방이 나왔다. 그곳에는 아직 뒤집기조차 할 수 없는 갓난아이가 손발을 놀리며 누워 있었다. 그 아이에게 세상은 얼굴위로 보이는 천정이 전부였다. 소영이는 살그머니 다가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자기를 10년 전으로 되돌려 놓은 것 같았다.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아이의 눈썹 위에 보일 듯 말 듯 자그마하고 연한 점이 그려져 있었다. 왠지 그 점이 소영이를 무척 슬프게 만들었다. 소영이는 얼른 옷장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다시 옷장 문을 열자 톱밥과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가득, 구더기와 지렁이가 꿈틀대고 있었다. 소영이는 얼른 옷장 문을 닫고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갓난아이는 온데간데없고 파스텔 톤의 타일이 깔린 텅 빈 욕실이 나타났다. 욕실 벽 위쪽엔 조그만 창문이 뚫려 있었다. 햇빛과 바람을 맞는 곳이었다. 소영이는 의자 위로 올라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팔꿈치 부분까지 창틀을 넘어버리자 갑자기 온 몸이 바깥으로 확 빨려나갔다. 겨드랑이가 가려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날개가 돋아났다. 소영이는 두 팔을 쫙 뻗고 손을 구부려 날개 끝을 살짝 잡았다. 그렇게 손으로 날개를 움직이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고개를 높이 쳐들자 성의 꼭대기가 보였다. 그것은 날카로운 바늘 모양새로 하늘을 꿰뚫고 있었다. 소영이는 그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힘껏 손짓을, 날갯짓을 했다. 아무리 해도 몸이 그리로는 비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영이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움직였다. 급기야 균형을 잃고 밑으로, 밑으로 끊임없이 추락했다. 추락의 최종 지점은 욕실의 타일 바닥이었다. 성탑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당장은 목이 너무 말랐다.

 

소영이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신선한 우유와 여러 종류의 과일 주스가 있었다. 반찬도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야채박스에는 참외와 포도, 딸기가 가득 들어있었다. 이제 냉장고에선 어떤 놀라운 일이 있을까. 소영이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얼굴이 시려올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영이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놀랍게도, 이건 그냥 냉장고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 물건보다 더 신기한 건 없었다. 10년 평생 냉장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소영이는 잠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 덕분에 꼬박 일주일을 잠 속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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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변할 뿐,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한한 생성과 순환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세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천지 창조에서 시작해 신과 인간이 빚어내는 온갖 사건, 특히 트로이 전쟁을 거쳐 트로이아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의 로마 제국 건국 신화를 들려준 다음 카에사르(카이사르)의 죽음과 승천으로 끝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피테르(제우스)에 비유되기도 한다. “신들이 유피테르에게 보내는 사랑은, 카에사르 사후(死後), 로마의 신민(臣民)들이 아우구스투스 황제께 보낸 사랑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함의에도 변신 이야기는 통상적인 건국 서사시와는 사뭇 다르다. 오비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추방된 이유도 그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때문이었다. 실상 이 두툼한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결사(結辭)를 보면 신-황제에 대한 은근한 도전이, 적어도 시인 특유의 오만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 대신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 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 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不死)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신화적 공간에서 신은 우선 인간을 둘러싼 제반 현상, 무엇보다도 자연의 의인화이다. 자연 속 만물이 두루 평등하듯, 자연-신 사이에 권력적 위계질서가 설정되어 있긴 하되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갖는다. 가령 제 아무리 유피테르라고 할지라도 플루토(하데스)에게 납치당한 자신의 딸 프로세르피나(페르세포네)를 무작정 빼 올 수는 없다. 유피테르의 말을 빌면 (플루토)는 이 세상을 상속받을 때 제비를 잘못 뽑아 이 천궁을 나에게 양보하고 저승 왕이 된 것뿐이므로, 서로의 관할 영역은 존중되어야 한다. 신들의 세계에서, 한 신이 매긴 죗값을 다른 신이 벗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원칙하에 신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아무래도 생산이다. 변신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랑을 다루고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거니와 이 무수한 이야기들을 엮어 주는 요소인 변신/둔갑역시 대부분 사랑의 쟁취 혹은 회피, 그와 관련된 응징이나 복수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 경우에도 가장 역동적인 신은 물론 유피테르인데 그의 애정 행각은 사랑을 성취하려는 마음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은 원래 조화도 양립도 불가능한 법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비단 애욕만이 아니다. 유노(헤라)의 정조 관념과 가정 수호의 의지는 때때로 지나친 질투와 잔혹함을, 베누스(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과 자유분방함은 허영과 방탕을 낳는다. 디아나(아르테미스)는 목욕 중인 자신의 알몸을 보았다는 이유로 죄가 있다면 길 잃은 죄밖에 없었던 악타이온을 잔인하게 응징한다. 이쯤 되면 처녀성과 신성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거의 병리적인 수준이다. 말하자면 오비디우스가 창조한 신들은 자연의 은유인 만큼이나 인간의 은유이다. 그들은 인간처럼 오류를 범하고 쉽사리 감정의 격동에 휩싸이고 항상 보상과 대가를 바란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신에 대한 도전과 불경은 최고의 죄악으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다.

 

감히 신과 겨루려 했거나 겨룬  인간 중 단연코 눈에 뜨이는 것은 아라크네이다. 베 짜는 재주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의 오만함이 도를 넘어서자 미네르바가 친히 찾아와 조용히 그녀를 타이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결국 신과 인간 사이의 한판 승부가 펼쳐지는데, 그들이 자신의 베에 그려 넣는 그림이 시사적이다. 미네르바는 12신을 중심으로 신의 권능을 강조하는 반면 아라크네는 유피테르와 여러 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조롱한다. 하지만 여신이 분노한 더 큰 이유는 아라크네가 짠 베가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그 베를 찢는 걸로도 부족해,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살하려는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들어 버린다. 미네르바의 행위에는 분명히 옹졸한 면이 있다. 그러나 신-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세계 속에 공존하는 이상, 이 역시 불가피한 일이다. 헤브라이즘의 세계라면 애초에 신이 인간과 솜씨를 겨누는 일 자체가 없었을 터이다. 변신 이야기의 저변에는 헬레니즘 특유의 자유롭고 건강한 민주주의가 깔려 있으며, ‘변신이란 자연의 구성원인 온갖 생명 간에 무한한 생성과 경계 이월, 활기찬 낙관주의의 표현이다. 15장에 느닷없이 삽입된 퓌타고라스의 가르침을 보자.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 짐승의 육체에 있다가 인간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이고, 인간의 육체에 있다가 짐승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돌 뿐,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말랑말랑한 밀랍을 보십시오. 이 밀랍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면 거기에는 그 전의 형태가 남지 않을뿐더러, 그 전의 형태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양만 변했을 뿐, 밀랍은 여전히 밀랍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가든 처음의 영혼 그대롭니다. 다만 다른 형상에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세계는 종말론이 얘기하듯  시작에서 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흐름처럼 끊임없이 순환한다. 따라서 “<태어남>이라는 말은, 하나의 물상이 원래의 형상을 버리고 새 형상을 취한다는 뜻이고 “<죽음>이라는 말은, 그 형상대로 있기를 그만둔다는 말일 뿐, 이것이 변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될지언정 그 합()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무자비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공포, 인간 개개인의 생로병사에 대한 허무감에서 비롯됐을 터이다. 하지만 과학이 이토록 발전했음에도 자연의 힘, 탄생과 죽음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전율한다. 이것이 자연-신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의 기운을 한껏 뽐내는 변신 이야기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 네이버캐스트

 

 

(티치아노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죠? 후덜덜-_-하는 그림입니다!)

 

-- 분량상 쓰지 못한 여러 얘기 중 지금 언뜻 생각나는 것은 아폴론과 겨루었다가 산 채로 살 가죽이 벗기는 벌을 받은(정녕 희랍 신화는 헨타이, 하드고어, 하드코어입니다 -_-;;) 마르시아스입니다. 예술은 창조이고 창조는 신의 영역인데, 그것을 넘본다는 것 자체가 반역인 셈이고  창조-창작의 고통은 불가피하겠지요. 산고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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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1983, 미송 양은 여덟 살이었다. 미송 양의 아빠는 농산물공판장에서 일했다. 집과 공판장 사이에는 무척 넓은 시장과 무척 큰 공원이 있었다. 점심때마다 미송 양은 아빠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기 위해 머나먼 길을 걸어갔다. 이 일이 미송 양은 참 좋았다. 동네 밖을 벗어날 수 있는,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미송 양의 가족은 마당이 넓은 집에 혹처럼 붙어 있는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다. 주인집은 방이 세 칸이나 되었는데, 주인아줌마와 영신이 언니 단 둘만 살았다. 주인아저씨는 선원이라서 늘 바다에 나가 있다고 했다. 미송 양은 그를 본 적이 없었지만 왠지 덩치가 크고 얼굴이 시커멓고 턱과 목에 수염이 잔뜩 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집채만큼 커다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일에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먼 바다를 가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아빠의 도시락을 들고 살가운 봄바람을 맞으면서 시장을 가로질러, 또 공원을 에둘러 공판장에 가는 것과 비슷할까.

 

언니, 아빠 따라 바다에 나가본 적 있어?”

언니는 한 번도 없다고 말했고, 미송 양은 실망했다. 바다라는 곳은 공판장과는 전혀 다른 곳인 모양이었다.

에이, 언니 따라 멀리, 멀리 나가보고 싶었는데.”

이 말에 영신이 언니는 피식 웃었다.

그럼 교회에 가볼래? 거기도 무척 멀거든.”

정말? 얼마나 먼데?”

버스 타고 한참 가서 또 한참 걸어야 되지.”

우아!”

미송 양은 어서 빨리 일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일요일 아침, 미송 양은 엄마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예쁘게 묶어 올리고, 어깨 끈이 달린 주름치마를 입었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양말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도 신었다. 영신이 언니와 함께 289종점까지 가는 내내 미송 양은 달떠 있었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낯선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미송 양의 눈을 훑고 지나갔다. 울긋불긋한 간판들의 행렬도 끝이 없었고, 거리를 오가는 낯선 사람들의 무리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미송 양은 커다란 눈 안에 집어넣겠다는 듯, 작은 머릿속에 아로새기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뜯어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미송 양은 차들이 앞뒤로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길 위에 섰다.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 저도 모르게 영신이 언니의 손을 꼭 잡게 됐다. 모든 것이 너무 크고 너무 넓고 또 너무 많았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마당은 미송 양의 집 마당의 서너 배는 족히 돼 보였다. 건물도 무척 높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신이 언니는 미송 양을 교회 안, 2층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초등반 예배실 앞에서 미송 양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네가 더 빨리 끝날 거야. 어디 가지 말고 등나무 밑에 얌전히 앉아 있어. 알겠지?”

미송 양은 영신이 언니를 올려다보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이 언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목사님이라 불리는 할아버지의 말은 길고도 길었다. 설교와 기도와 찬송가 사이로 아이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꾸지람을 했다. 아이들은 웃음을 참아야 하는 상황이 웃겨 더 많이 웃어댔다. 미송 양은 이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 그랬기에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함께 떠들고 웃을 친구가 없는 미송 양은 심심하다 못해 외로워졌다. 미송 양에게 필요한 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3층에 있는 것이 확실한 영신이 언니였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미송 양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등나무 아래, 벤치 주변은 낯선 사람들로 북적댔다. 당연히, 영신이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미송 양은 언니와 한 약속을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를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길기만 했다. 마음이 초조해지자 집에 가고 싶어졌고, 그 바람이 커지자 오줌이 마려웠다. 미송 양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1층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어둡고 길었다. 간신히 화장실을 찾아낸 뒤에는 줄이 길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미송 양은 3층으로 올라갔다. 중등반 예배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자, 말꼬리처럼 묶어 올린 머리채가 통째로 위로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미송 양은 자기 옆에 서 있던 한 아줌마에게 물었다.

저어기요, 중학생 언니들 벌써 끝났어요?”

방금 끝났는데, ?”

미송 양은 황급히 고맙다는 말을 하고선 다시 등나무 벤치로 달려갔다.

등나무 주변의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신이 언니는 이번에도 없었던 것이다. 언니가 자기를 버렸든, 길이 어긋났든 어쨌거나 이제는 혼자 힘으로 집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7년을 간신히 넘긴 미송 양의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었다.

 

*

 

홀로 걷는 낯선 길은 어딘가 서늘했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이 쌀쌀해지고 세상의 색깔이 약간 흐릿해진 까닭인지도 몰랐다. 미송 양은 앞만 보고 걸었다. 오직 ‘289’라는 숫자만이 미송 양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교차로가 나오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도 가도 길은 낯설기만 했고, 또 동시에, 가도 가도 제자리인 것 같았다. 바다 위를 헤매는 선원 아저씨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조그만 미송 양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들끓었다. 여동생과 실잣기 놀이를 할 때처럼 그 생각들을 순서대로 붙잡아 예쁜 모양으로 엮어보려고 했지만, 이 역시 실잣기 놀이처럼 도무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미송 양의 눈앞에는 초록색 버스들로 뒤덮인 새카만 아스팔트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하지만 미송 양이 감당해야 할 인생은 실로 길고 험난한 것이었다. 아스팔트길은 찾았지만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른쪽 왼쪽 모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난감했다.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고 발바닥과 종아리가 사정없이 아려왔다. 미송 양은 계속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달려오는 버스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미송 양이 몇 걸음을 떼놓기가 무섭게 버스는 이내 저만치 멀리 가버렸다. 미송 양은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절로 숙여진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미송 양의 맞은편에서 어떤 아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덩치가 무척 크고 얼굴이 시커멓고 턱은 물론 목덜미까지 시커먼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꼭 상상 속의 선원 아저씨 같았다.

 

미송 양은 그에게로 달려가 다짜고짜 물었다.

아저씨, 289버스 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289? 아니, 어린애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영신이 언니 아빠가 선원이라서 늘 바다에 나가 있는데요, 나도 멀리 나가보고 싶어서 영신이 언니 손잡고 교회에 왔는데요, 우리 집은 289종점이구요

다 좋은데, 그 영신이 언니는 어디 있어?”

 

오랜 고독과 불안에서 해방된 미송 양은 울먹이며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미송 양의 손을 잡았다. 엄마와 아빠가 늘 조심하라고 했던 모르는 사람과 함께 걷는 낯선 길은 뜻밖에도 어딘가 따사롭고 포근한 구석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은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나왔다. 버스가 도착하자 아저씨는 미송 양을 안아 올려 버스에 태워주었고 버스 운전수에게 동전 하나를 건넸다.

애가 길을 잃은 모양인데, 종점까지 좀 태워다 주세요.”

그러곤 미송 양을 쳐다보았다.

종점까지만 가면 혼자서 찾아갈 수 있겠지?”

!”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미송 양은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잠에서 깼을 때 버스는 이미 종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미송 양은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달려갔다. 남동생을 등에 업은 엄마가 여동생과 함께 대문 밖을 초조하게 오가고 있었다. 영신이 언니는 그 옆에 힘없이 서 있었는데,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금 막 경찰서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우리 딸 기특하기도 하지! 그 먼 길을 혼자 어떻게 찾아왔을까!”

 

미송 양은 굶주린 배를 채운 뒤에야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제야 중대한 사실이 상기되었다.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 어떡하지, 엄마?”

미송 양은 속이 상해, 양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옆에서 미송 양의 치마를 개고 있었는데, 호주머니에서 오십 원짜리 동전 두 개가 절묘한 화음을 내며 앞을 다투어 떨어졌다.

! 차비도 있었구나! 그 아저씨 만나면 꼭 고마웠다고 말하고 오십 원, 아니 백 원 다 줘야지!”

 

하지만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05/ <서울대동창회보> 20106월 제 387

 

 

-- 가장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 

  고전적인 형식의 성장소설-가족소설의 초고를 잡아놓은 터에, 정확히 그 초고를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터에 콩트 청탁이 들어왔고, 그 버리기로 결심한 초고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건져냈다. 분량을 맞추기 위해 말들을 많이 버려야 했다. 그 당시에는 좀 아까웠지만 지금 보니 지금의 크기가 딱 제격인 것 같다.  '미송'이란 이름은 2010년 2월에 태어난 조카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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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의 실체:

바보로 죽을 것인가, 속물로 살 것인가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던지는 여러 물음은 결국 하나로 요약된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소설의 시점과 형식상 닉 캐러웨이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겠다. 그는 톰의 대학 동창이자 데이지의 먼 친척임에도 출신 성분(서부 출신으로서 출세를 위해 동부로 옴)과 내적인 성향에 있어 개츠비 쪽에 가깝다. 이런 그의 눈을 통해 보아도 개츠비는 알쏭달쏭한 인물이다. 가령 개츠비의 첫 고백을 보자.

 

하나님께 맹세코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그는 신의 처벌을 멈추게 하려는 듯 갑자기 오른손을 쳐들었다. “나는 중서부의 어떤 부잣집에서 태어났지요. 가족들은 모두 죽고 없습니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교육은 옥스퍼드에서 받았어요. 선조 대대로 그곳에서 교육을 받아왔거든요. 집안 전통이죠.”(94-95)

 

이어, 가족의 죽음으로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고 오래 전에 있었던 매우 슬픈 일을 잊으려고유럽을 떠돌아다니고 등. 닉조차 대번에 거짓말임을 알 수 있는 소리를 개츠비는 천연덕스레 늘어놓는다. 죄책감은커녕 모종의 불편함조차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 실제의 그는 이렇다. 서부의 가난한 노동자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살아 있고(그의 말에 따르면 개츠비는 아비에게 새 집을 사줄 만큼 효자이다!) 종전 후 잠시 옥스퍼드에 머무른 적이 있고 귀국 후 조직 폭력업계의 거두 울프심과 손잡고 밀주 유통을 비롯한 여러 일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등. 간단히, ‘제임스 개츠제이 개츠비로 바뀌면서 거의 페이스오프에 가까운 성형과 신분 세탁이 행해진다. 이 과정의 중심축이 돈-물신(物神)이며 데이지는 그 상징이다.

 

그녀는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멋진여자였다. 그는 숨겨진 다양한 능력을 발휘해 상류층 사람들과 만나긴 했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철조망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가 몹시도 탐났다. 처음에는 캠프 테일러의 다른 장교들과 같이 그녀의 집에 놀러 갔지만 나중에는 혼자서 찾아갔다.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209)

 

 

데이지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천상의 베아트리체와는 거리가 멀다. 개츠비는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라고 말한다. 실상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돈 칠갑이다. “()가 가두어 보호하는 젊음과 신비, 그 많은 옷이 주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발한다는 것.” 그녀에게 돈이란 뼛속까지 밴 부르주아 근성의 총체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놈”, 즉 개츠비와 시카고 부호의 아들이자 예일대를 졸업한 톰 뷰캐넌의 차이는 당시 흑인과 백인의 차이만큼이나 어마어마하다. 따라서 그녀가 개츠비의 구애에(더 정확히 그의 화려한 저택과 무도회에!) 살짝 마음이 흔들리지만 결코 톰을 떠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자유와 평등의 대륙인 아메리카의 실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개츠비는 정녕 순수와 낭만의 화신인가. 가령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미 유부녀가 된 옛 여자주변을 부나비처럼맴돌고 그녀의 남편까지 동석한 자리에서 어설프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비상식적일뿐더러, 뷰캐넌 부부의 반응을 고려한다면 애처롭고 우스꽝스러운 행위이다. 그의 최후 역시 비극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처구니없다. 이 경우에는 동정도 이래저래 톰의 희생양이 된 자동차 정비공 윌슨에게로 가는 것이 더 마땅하리라.

 

아무래도 개츠비는 그 정체가 드러날수록 신화가 아니라 희화가 된다. 속물들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큰 저택과 많은 옷과 가구를 소유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활계획표를 짜가며 아등바등, 애면글면 살았던, 심지어 어두운 일도 서슴지 않았던 바보! 이런 그를 닉은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개츠비는 내가 드러내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약 개성이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는 뭔가 멋진 것을, 마치 1만 마일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기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략)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일찍이 발견된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짧은 슬픔이나 숨 가쁜 환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11)

 

그럼에도 개츠비란 인물이 정녕 위대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동시대의 다른 작가, 가령 헤밍웨이나 포크너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지닌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작가인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묘파해낸 우리 삶의 부나비 같은 풍경을 보라. 밤마다 개츠비의 저택을 장식하는 불빛과 재즈 소리, 이른바 개츠비 룩으로 단장한 미녀들의 현란한 춤, 무도회가 끝난 뒤 수북이 쌓이는 오렌지 껍질. 이것은 비단 1920년대(재즈의 시대!), 대공황 직전의 미국의 풍경만은 아니다.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우리는 무작정 소비하고 향유하며 무작정 어리석은 꿈에 젖는다. 이 질펀한 향연의 끝은 웨스트에그(신흥 부촌 - 개츠비의 저택)와 이스트에그(토착 부촌 - 뷰캐넌 부부의 저택) 사이, 재의 계곡이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 미국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런 경우에 자주 그렇듯!) 깊이가 없다는 (원래 편견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근거 없는-_-;;) 편견까지 있습니다. 오랜만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었는데 정말 잘 쓴 소설이어서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러니까 더더욱  정이 안 가더군요. (ㅠ.ㅠ)  속물스러움(!)의 문학화에 유달리 깊은 관심을 보인 러시아문학과 비교를 하게 되니 더 그런 것도 같고요. (그래서인지 악플이 잔뜩 달렸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ㅠ.ㅠ)

최근에는 헤밍웨이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이것도 조만간 올리겠지만), 어쩜, 어릴 때의 감동이 거의 살아나질 않아 좀 울쩍했더랬지요. 여하튼 소설가로서는 헤밍웨이보다야 피츠제럴드가 한 수, 두 수 위인 것 같아요.  최근에 영화화되기도 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도 재미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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