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문학으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 <안데르센 메르헨>

 

 

안데르센이 쓴 동화는 총 156편인데, 하나같이 인간 개개인의 속물성과 이중성,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세태를 놀랍도록 잘 묘파한다. 인물 역시 전통적인 우화와 달리 또렷하고 개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동화 속의 환상 세계와 동화 밖의 현실 세계가 닮았다는 느낌은 우선 그가 인간의 차이-다름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심지어 오리와 오리, 나이팅게일과 인조 새 등)의 이분법은 물론 부자와 빈자, 왕족(귀족)과 천민(평민) 19세기사회의 신분-계급 틀의 의인화된 버전이다. 갈등과 사건은 주로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의 상승 욕망과 복수 욕망, 이른바 원한의 심리학에 의해 형성된다. 문제는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과 방식이 전혀 동화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흔히 작가의 전기를 고스란히 반영한 입신출세의 스토리로 읽어온 못 생긴(미운) 아기 오리를 보자. 이 동화의 첫 부분에서 조명 받는 것은 흥미롭게도 아기 오리가 아니라 엄마 오리이다. 다른 알들은 다 부화됐는데 유독 알 하나만 아직도 소식이 없는 터라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칠면조 알이니 그만 품으라는 충고도 있지만 엄마 오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온 오리는 그러나, 너무 크고 못 생겼다. 엄마 오리는 아이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물에 풀어놓았다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 아이가 틀림없다며 기뻐한다. 머지않아 예뻐질 거라는 남들의 인사치레에도 담담하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요. 쟤는 별로 예쁘지가 않아요. 하지만 성격은 좋고 헤엄도 다른 아이들처럼 잘 친답니다. 어쩌면 더 잘 치는 것도 같아요! 곧 나아지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작아질지도 몰라요! 알 속에 너무 오래 들어 있어서 모습이 좀 이상해졌을 거예요.() 게다가 얘는 사내아이니까 조금 안 예뻐도 괜찮아요. 힘이 아주 세질 거예요. 벌써부터 저렇게 거침없이 나다니잖아요.”(95)

 

결국 아기 오리는 주변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가출이라기보다는 난 세상으로 나갈 거야.”라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엄마 오리의 믿음과 격려는 그 자양분이 되었을 법하다. 간난신고 끝에 우리가 익히 아는 반전이 펼쳐진다. “못생긴 아기 오리였을 때 이런 행복이 오리라고는 꿈도 못 꿨어!”(105) 과거의 원한은 이렇게, 말하자면 우아하게 설욕된다.

 

차이-다름은 물론 같음을 배면에 깔고 있다. 웅숭깊은 해학이 돋보이는 연애 동화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의 두 연인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쓴다. “서로 잘 어울렸는데요, 둘 다 젊은이들이었고, 똑같은 도자기였고, 둘 다 부서지기 쉬웠지요.”(188) 젊은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숫염소다리(소녀를 열두 번째 색시로 데려가려고 한다)와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늙은 중국인 인형을 피해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굴뚝 밖을 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중국 영감이 그들을 쫓아오다가 산산조각 난 상태이다. 그는 다시 붙여졌지만 목에 죔쇠를 달아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게 되고 고로 숫염소의 청혼에 답을 못해주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두 도자기 인형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어요. 둘은 할아버지의 죔쇠에 감사하면서, 깨질 때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았답니다.”(193) 못 생긴 아기 오리와는 전혀 반대로 분수/주제를 알고 착하게 살라는 전언이 전해지는 듯하다.

 

 

 

 

 

 

 

 

 

 

 

 

 

이런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동화가 적지 않음에도 우리에게 안데르센은 여전히 슬픈 동화의 대명사이다. 인어 공주의 비극은 인어’(동물-천민)로서 왕자’(인간-왕족)의 사랑을 갈구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필멸’(물거품)의 운명을 타고난 인어 공주가 불멸’(영혼)의 지위를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치르는 노력은 필사적이다. 제일 잔혹한 것은 한 푼의 에누리도 없는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막대기같은 두 다리를 얻는 대가로 인어 공주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놓고(마녀는 그녀의 혀를 싹둑 잘라간다)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반드시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예쁜 얼굴”, “하늘거리는 걸음과 말을 하는 듯한 눈으로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왕자는 그녀를 왕비로 맞을 생각이 전혀 없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공주의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왕자는 썩 내키지 않음에도 이웃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정략결혼의 상대가 기억 속의 그 공주였음이 밝혀지는 반전이야말로 인어 공주에겐 크나큰 비극이다. 그들의 결혼식 날, 인어 공주가 얻은 또 한 번의 기회(다섯 언니들이 머리카락을 대가로 얻어온 칼날로 신혼 초야를 치룬 왕자의 심장을 찌르고 그 피를 다리에 묻히면 다시 꼬리가 돋아나 인어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더 큰 시련이 된다. 신방으로 들어간 인어 공주가 보는 것은 꿈결에도 신부의 이름만 부르는 왕자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사라진 인어 공주를 찾는 왕자와 공주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선함이 강조된다. 요컨대 불행은 있으나 악역은 없고, 고로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이것만도 서러운데, 물거품이 된 인어 공주에게 공기의 딸들의 세상(연옥)에서 3백 년 동안 열심히 착한 일을 해서 영혼을 얻으라는 판결이 떨어진다. 일말의 정상참작도 없는 이 등가교환의 원칙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안데르센은 덴마크가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실상 그는 뛰어난 동화작가라기보다는 동화를 문학의 지위로 올려놓은 최초의 작가라고 정의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 이전의 페로나 그림 형제가 주로 민담을 수집, 정리, 편찬했던 것에 반해 안데르센은 낭만주의의 후예를 자처하며 명실상부한 창작 동화를 썼다. 하지만 그의 시와 소설, 희극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서전을 쓰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내 인생의 동화>는 젊은 구두수선공과 세탁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전 유럽의 유명 인사가 된 동화같은 이야기를 세밀하게 기록하는데, 전반부는 가난과 역경과 그 속의 행복, 각종 후원자들의 은혜와 교육의 과정을, 중후반부는 출세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덴마크와 유럽의 각종 유력, 유명 인사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읊어주고 밥을 얻어먹는 삶, 즉 진정한 매설’(賣說)의 삶이 펼쳐진다. 이런 그를 두고 하이네는 재단사처럼 추레한 행색과 충성을 바치려고 안달복달하는 행동거지며 모든 시인의 완벽한 전형, 왕이 딱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안데르센의 출신과 유산계급을 향한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은 물론 그의 동화의 저변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잭 자이프스)

 

실상 동화 작가로서는 너무도 많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위대한 인물이 자서전 속에서는 한평생 출세를 위해 아등바등 살았던 선량하되 속된 인간의 전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신분 체제를 고려한다면 그의 아첨은 일종의 생존 전략, 즉 기법이자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동화를 쓸 때만큼은 그는 이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한껏 포장해놓은 외로운 떠돌이에 출세한 촌놈의 모습과, 그가 창조한 동화 세계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과연 좋은 문학이란 그것을 창조한 작가를 뛰어 넘어 불멸하는 것이다.

 

- <책앤> 2015년 ??월

 

- 아이 때문에 동화를 많이 읽는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 최근에 가장 유명세를 떨친 것은 아마, 심하게 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얼음왕국>(프로즌)의 밑텍스트인 <눈의 여왕> 일 터.

개인적으론, <어머니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어릴 때 텔레비전 만화 영화로 봤던 듯하다. (<안개 속의 고슴도치>에도 삽입했다.) 그리고, 간혹 <안데르센 동화 전집>에나 실리는, 별로 안 알려진 , 이루어지지 못한 슬픈 러브 스토리인 <한스와 크리스티나>.  초등 3학년 때 책이 아주 많았던 어느 친척집에서 몰래(?) 읽은 기억이 있다. 동화의 초반에 점쟁이 할머니가 호두인가 뭔가를 가지고 두 남녀 아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부분, 마지막, 한스가 크리스티나가  죽은 다음 그녀를 꼭 닮은 어린 딸과 함께 그녀의 무덤을 찾는(맞나??) 장면 등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아주 슬픈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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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최근에는 일찍 일어나던 아이가 오늘은 웬일로 9시가 넘도록 퍼질러 잤다. 하긴 이렇게 기습적으로 가을이 왔으니.(정녕 사람 놀리냐!) 자다 깨면서 경기를 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곤히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차마 못 깨웠다. 비까지 주룩주룩 오는 가운데 아이를 데려다 주고(아, 운전 면허증 좀 따둘 걸!ㅠ.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뭐, 거의 11시다. 그럴 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건만, 역시 공부(=일)란 (잘)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무한히 하기 싫은 어떤 것이다. 음, 그럼에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나도 <내 인생의 동화>를 꿈꾸어 본다.

 - 기적 한 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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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신작 소설집을 샀고, 반 정도 읽었다. 재미있다. 헐, 내가 그녀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다니 뜻밖이다. 왜 그런 작가 있지 않나, 별로 재미 없다고 툴툴 대면서 간헐적으로 자꾸 책을 사고 또 읽게 되고 또 투덜대곤 하는. 조경란도 내겐 그런 작가인데, 이번 소설은 어딘가 발랄하다 못해 껄렁(?)해보이는 낯선 출판사, 화사한 삽화 등을 감안해도, 그저 소설만으로도 재미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얘기를 바꾼(혹은 그 후일담) 이야기, 아버지가 토끼로 변한 이야기 등 다 좋다.

 

 

 

 

 

 

 

 

 

 

 

 

 

 

 

 

내가 이번에 그녀의 소설책을 산 것은, 위에서 잠깐 구시렁댄 습관 때문이기도 하고, 짧은 소설(엽편 소설, 장(손바닥)편 소설, 콩트)을 읽고 싶어서였다. 장르는 곧 영혼의 형식. 긴 것이 맞는 작가도 있고 짧은 것이 맞는 작가도 있다.

 

가령, 체호프는 정말로 한 장짜리 소설로 문학사에 입문했다. 그리고 참 잘 쓴다! 하지만 도-키와 특히 톨스토이의 후예로서 그가 느낀 열등감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긴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 그것이 때론 (거의 명백히 실패작인 ㅠ.ㅠ) 중편(요즘 개념으론 경장편)을 쓰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뭔가 길어질 때, 구구절절이 늘어질 때 그에게 적합한 장르는 소설(산문)이 아니라, 바로 드라마, 즉 희곡이다. 그 희곡을 그는 항상 희극-코미디로 완성하고자 했다. 몇 번 말한 것 같은데 나는 그의 <벚꽃 동산>을 무척 좋아한다.      

 

 

 

 

 

 

 

 

 

 

 

 

 

 

 

 

짧은 소설이 제격인 또 다른 작가는 물론 카프카와 보르헤스이다. 그들에 대해 많이 썼지만, 언젠가 지면이 주어지는 대로 또 쓰고 싶다. 그런데 카프카는 자기 주제를 좀 몰랐던 것 같다. 장편을 쓰려 하다니! 물론 이 주제를 모름에, 바로 그의 문학의 핵심(고뇌^^;;)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이라기보다는 미완의 장편 세 편('고독' 삼부작')은 그의 문학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줄 법하다. 언제 또 다시 탐독할 기회가 오길.  

 

 

 

 

 

 

 

 

 

 

 

 

 

 

그에 반해, 아르헨티나의 귀족 가문 출신인 보르헤스는 일찌감치 '체념'을 문학으로 승화한 듯하다. 굳이 장편을 쓸 필요도 못 느꼈을 법한데, 그가 문학을 통해 추구한 세계는 기본적으로 서사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구질구질 할 말이 별로(전혀) 없었던 듯. 그러니 그토록 황량한 것이다. 또한 구질구질함이 없으니 유머와 위트도 없는 것이다.

 

 

 

 

 

 

 

 

 

 

 

 

 

 

애매하긴 하지만, 카뮈에 대해서도 나는 장편이 잘 맞지 않는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제일 아끼는 그의 소설 <이방인>도 사실, 분량이든, 구성이든 전통적 의미의 장편은 아니다. <페스트>가 좀 두껍긴 하지만 워낙에 관념적이고 이념적이서, 역시나 서사에 기반한 정통 장편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에세이적 장편이랄까. <전락>은 도..키의 <지하>의 카뮈 버전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많은 부분, 그는 (철학자, 사상가라고 하긴 그렇고) 고급한 에세이스트였던 듯한데, 초기(아마 첫?) 산문집 <안과 겉(밖)>(<표리>라고 번역된 적도 있는 듯하다)부터 이런 재능이 보인다. 나중에 <시지프 신화>, <반항인>에서 더 잘 쓰게 된다.  

 

 

 

 

 

 

 

 

 

 

 

 

 

 

어딘가 날렵한 재능 덕분에 카뮈의 단편도 다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덧붙여, 그는 희곡 <오해>를 쓰기도 했다. 극작을 향한 끌림, 이 또한 흥미롭다. 그만큼이나 흥미로운(또한 이해가 되는!) 끌림이,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고자 하는 끌림이기도 하다. 까뮈는 워낙 인물이 출중했던 터라, 도-키의 <카라마조프>를 무대에 올리며 이반 역을 맡기도 했다.

 

 

 

 

 

 

 

 

 

 

 

 

 

 

 

짧으나 기나 다 잘 쓰는 징그런 작가도 있다. 아무래도 사랑할 수 없는 그대, 톨스토이다.

 

 

 

 

 

 

 

 

 

 

 

 

 

 

어쩌면 천만다행으로 이런 거물은 한 나라의 문학사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 이전의 한 작가는 장편을 써가는 도중에 반쯤 광기에 사로잡혀 단식을 시작, 거의 스스로를 체계적으로 굶겨 죽였다. 그의 장르 역시, 그로테스크하고 환상적인 단편(중편)이었던 듯. 큰 장르를 감당하지 못한  작가의 딜레마와, 시작은 했으되 끝나지 못한 이 장편(<죽은 혼>)의 미학이 맞물린다. 차라리 극작이 장편보다는 더, 그를 '구원'했을지도.

 

 

 

 

 

 

 

 

 

 

 

 

 

 

 

 

 

러시아와 비슷한 '대륙적' 스케일, 심지어 한 시절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 루쉰은 고골의 <광인일기>에 영향을 받아, 사회 비판적 요소가 농후한, 심지어 거의 그것만 있는 <광인 일기>를 쓴다. 아무래도 나는 러시아문학 전공자라 고골의 소설이 훨씬 더 훌륭해 보인다. 그의 단편들을 쭉 일별하며 많은 감동을 받았지만, 워낙에 지식인, 투사, 사상가 등 다른 이름이 많은 터라 루쉰은 좀처럼 소설가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하긴 이런 요소까지 포함하여 그는 소설가이긴 하다.

 

 

 

 

 

 

 

 

 

 

 

 

 

 

 

루쉰은 말년에 다시 한 번 고골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의 <죽은 혼>을 번역한다. 아니, 그러다가 죽는다. 그런 운명의 소설(책)이 있는 듯하다. 고골은 정녕 이 소설을 쓰지 말아야 했던가. 지난 금요일, 그에 대해 강의하면서 한 번 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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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살 것인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나귀 가죽>(1831)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인 발자크가 서른두 살에 쓴 장편소설 <나귀 가죽>1(“부적”)는 극히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시작된다. 시끌벅적한 도박장, 자살을 결심한 한 청년이 돈을 잃고도 미련 없이 나가버린다. 센 강 주변을 거닐다가 마침내 골동품 가게에 들어선 그는 어딘가 마법사 같은 늙은 골동품상을 만난다. 놀라운 것은, 화자도 지적하듯, 이러한 환상과 마법이란 것이 불가능한 시간과 장소“19세기 파리의의 결합,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미학적 충격이다. 일찌감치 청년의 내면을 간파한 노인은 독특한 언어(아랍어)나를 가지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지만 너의 목숨은 나의 것이다라는 요지의 글이 쓰인 나귀 가죽을 보여준다. “자네의 자살은 다만 연기되었을 뿐이네.”(77) 소위 악마와 계약을 맺은 청년에게 노인이 던지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는 이후 소설의 복선 구실을 한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목숨을 조금씩 앗아가는 나귀 가죽의 이야기는 동화, 적어도 환상적인 고딕소설을 예고한다. 하지만 골동품 가게를 나온 청년이 친구들에게 아니, 라파엘이잖아.”하고 불리는 순간부터 19세기 파리의 청년들의 일상을 담은 세태 소설이 펼쳐진다. 2(“무정한 여인”)에서 라파엘이 친구(에밀)를 상대로 늘어놓는 과거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뜻에 따른 법학 공부, 사춘기의 방황(도박), 아버지의 파산과 사망 이후 1826년 현재, 22세의 라파엘은 파리에 홀로 남겨졌다. 자신의 불행에 도취된 라파엘은 자신의 진가를 몰라주는 세상과 여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식을 쌓기로 결심하고는 마담 고댕의 하숙집에서 3년 동안 디오게네스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희곡 작품과 해부학, 생리학 관련 책(<의지론>)을 쓴다. 한편으론 하숙집 여주인의 딸(폴린)과 오누이 같은 우정-사랑을 나눈다. 이런 라파엘 앞에 인생의 선배 라스티냐크(훗날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이 될 촌뜨기 법대생이기도 하다)가 등장한다. 이 능수능란한 청년은 라파엘을 천재인 동시에 얼간이취급하며 각종 처세술을 전수해주고 사교계의 여왕인 페도라 백작 부인에게 데리고 간다. 라파엘은 한 명의 여인 이상”, “한 편의 소설인 그녀에게 반하지만 이내 배신당한다. 극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연애 이야기를 에밀은 이렇게 비꼰다.

 

페도라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게 자네 이야기의 요점 아냐?”(280)

 

 그 다음 이야기가 바로 1부의 도입부, 즉 자살을 생각하던 중 나귀 가죽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에밀과 함께 가죽의 저력을(실제로 유산이 떨어지고 대신 나귀 가죽이 줄어든다) 확인하면서 라파엘의 운명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나귀 가죽>은 낭만주의자 발자크(청년)와 사실주의자 발자크(중장년)가 격하게 충돌하는 소설, 그래서 당혹스럽고 놀라운 소설이다. 이 소설의 핵심어인 욕망은 출세(성공)와 연애(사랑)으로 구체화되는데, 어느 경우든 문제는 이다. 모두가 졸지에 부자 혹은 가난뱅이가 되고 돈이 없으면 사랑도 할 수 없다. 페도라와의 다분히 낭만적인 연애에도 끊임없이 돈이 개입하고(마차를 빌릴 돈이 없어 집까지 걸어간다) 그녀와 대조되는 폴린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라파엘은 여인이 왕비의 풍모를 갖추려면 모름지기 부자여야만하고 가난한 상태에서는 숫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3부의 극장 장면, 파리의 사교계를 흥분시킨 미모의 미지의 여인이 과거의 그 폴린으로 밝혀지는 대목은 정녕 동화적이다. 남편이 백만장자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고댕 부인의 예감이 실현되자(돈의 마법!), 라파엘은 오랫동안 그를 흠모하며 그림을 그려서 팔면서까지 그의 우유 값을 대온 폴린과 열렬한 연애에 돌입한다. 그들의 사랑이 깊어지는 것도 두 인물이 공히 소유한 부 덕분인 양 묘사된다. 3부의 도입부에서는 손님을 맞이한 라파엘의 충복(조나타)의 입을 빌어 그가 식비로 하루에 천 프랑을 쓸 만큼 부자임을 강조한다. 초기자본주의의 물질만능주의를 대변하는 이토록 거친 직접 화법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그렇더라도 발자크가 묘파한 속물성은 <나귀 가죽>의 일부일 뿐이다.

 

3(“죽음의 고뇌”)의 라파엘은 부유한 발랑탱 후작이 된 대가로 그만큼의 목숨을 내놓았다. 폴린과 재회한 이후부터 나귀 가죽은 더더욱 급속도로 줄어든다. 두려워진 라파엘은 그것을 몰래 우물 속에 버리지만 정원사가 발견하여 다시 가져온다. 이어 그는 가죽을 처리하기 위해 과학(박물학, 생리학, 기계역학, 화학 등), 그 다음에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의학(유기체론, 생기론, 외과수술론)에 의존한다. 그 과정에서 장황하게 전개되는 각종 ‘-1부의 도박론골동품론을 비롯하여 발자크의 지식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 돈과 명예를 멀리하고 오로지 학적인 즐거움에만 탐닉하는 학자(플랑셰트)를 찬미하는 것도 그 예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숭고한 헌신에 있어 발자크 역시 만만치 않았다. 로댕의 조각상이 잘 표현해준 그의 짐승 같은 노동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노동, 끝없는 노동은 마지막 순간까지 발자크의 진짜 존재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노동을 사랑했다. 아니, 이런 노동을 하는 자신을 사랑했다. 창작의 고통 한가운데서 그는 비밀스런 기쁨으로 자신의 악마적인 에너지, 창작의 잠재력, 의지력 등을 즐겼다.”(스테판 츠바이크)

 

다시 라파엘로 가자. 1804년생인 그는 물론 욕망의 화신이었던 못 생긴 청년 발자크의 미화이다. 라파엘의 자살-욕망(타나토스)은 손쉽게 삶-욕망(에로스)과 등치되고, 그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요양 차 찾은 온천장에서 사소한 일로 결투(살인)까지 한 다음 라파엘이 택한 최후의 길은 그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역시 여의치 않아지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일종의 수면마취제를 꾸준히 복용하며 (그래도 살기 위해 중간에 밥은 먹는다!) 거의 하루 종일 잔다. 하지만 눈앞에 다시 폴린이 나타나자 억눌렀던 욕망이 불타오르면서 명줄이 탁, 끊기고 만다.

 

죽음의 순간은 극적이지만, 나귀 가죽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 시작된 삶-죽음의 과정(추정컨대 폐병에 걸린 듯하다)은 서서히 진행된다. 많이 욕망하면 빨리 죽는다. 하지만 욕망을 죽인 채 조심조심 영위되는 삶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출발점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에게 거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욕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이런 물음을 던졌다는 점에서 <나귀 가죽>은 과연 부제대로 철학 소설이라고 할 만하고 발자크의 거대한 문학 기획인 인간 희극의 첫 고리가 될 만하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다.

 

(=라파엘)는 문득 힘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아무리 그 힘이 막대하다 하더라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홀(王惚)은 어린아이에게는 한갓 장난감일 뿐이지만 리슐리외에게는 도끼요, 나폴레옹에게는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인 것이다. 힘은 꼭 우리만큼의 크기를 가지며 그래서 큰 사람만을 더 키우는 법이다.”(408-409)

 

- <책앤> 2015년 ??월 호

 

 

 

 

 

 

 

 

 

 

 

 

 

 

 

 

발자크의 소설은 재미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발자크 자신이 그토록 숭상한 공부-노동에의 욕구에서 읽는다.  나로서는 (가령 스탕달의 <적과 흑>과는 달리) 그냥 막 읽히지는 않으므로  초반에 집중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완독한 책들. 뜻밖에도(?!), <골짜기의 백합>이 고등학교 때 멋 모르고 집어든, 그리고 그 무렵엔 무조건 끝장을 봤으니, 완독한 발자크의 첫 작품이다. 그 이후 몇 권을 더 들춘 듯한데, 아무튼 도스토예프스키에게야 재미있는(그래서 번역까지 한) 작가였겠지만, 우리에게는 힘든  작가다.

 

 

 

 

 

 

 

 

 

 

 

 

 

 

 

작품이 이러니 연구서도 다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위에도 인용한 <발자크 평전>은 그의 소설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만큼 발자크는 흥미로운 인물. 그리고 소설도 썼지만 츠바이크, 그대의 장르는 전기였구나.

 

 

 

 

 

 

 

 

 

 

 

 

 

 

 

2016년도 사실상 저무는 셈이다. <책앤> 지면이 없어져 서운했는데 올 봄에는 너무 바빠 좀 가뿐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놀아서야 쓰나. 아무래도 지면이 주어져야 읽기-쓰기를 강제할 수 있을 법하다. 그거 안 하는 시간은 어디로 산화하는(-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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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거의 40도에 육박하는 열이 났으나 오늘은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은 아이를, 소아과를 거쳐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그 맞은편 커피숍에  앉아 있다. 혹시 열이 또 나거나 손발에 반점이 보이면(그 공포의 수족구!-_-;;) 즉시 데려갈 참이었는데(완전히 벌 서는 기분이다!) 별 탈이 없나 보다.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나와 논문 쓰는 작업을 계속 해본다. 체호프의 <결투>.

 

 

 

 

 

 

 

 

 

 

 

 

 

 

러시아문학만큼 결투가 많이 나오는 문학이 있을까 싶다. 내가 번역하기도 한 <우리 시대의 영웅>의 작가는 본인도 결투에서 죽었다. <벨킨 이야기>의 첫 작품 <그 일발>도 결투에 관한 고전적 틀을 제공한다. 그 작가인 푸쉬킨 역시 결투에서 사망. 18세기, 남의 나라(유럽)에서 들어와 본토보다 더 인기를 누렸으니. 이것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는 로트만의 책을 보면 된다. 역시 석학. 비단 결투뿐만 아니라 결혼, 청혼, 음식, 각종 풍습에 대한 연구가 돋보인다. 물론 전공자 아니면 굳이 읽을 필요, 이유는 없다 -_-;; 세상에 재밌는 책이 얼마나 많은데^^;;

 

 

 

 

 

 

 

 

 

 

 

 

 

체호프의 <결투>는 배수아식 화법을 빌려 말하자면 <결투의 없음>에 관한 소설이다. 완전 웃긴 결투가 된다, 궁극으론 없는 결투, 성사되지 못한 결투에 관한 이야기. 주인공 라예프스키는 러시아문학 특유의 '잉여 인간', 그것의 세기말(덧붙여 체호프식) 버전이다. 후텁지근한 카프카스, 권태와 나태, 덧붙여 2년 전 사랑하여 이리로 꼬셔온 유부녀 나제쥬다에 대한 사랑마저 식은 상태. 언제 소설 얘기는 나중에 더 할 수 있으리라.

 

겸사겸사, 이 참에 이 소설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던 한 선배를 짧게 회상한다.

 

대략 '지식인(인텔리겐치아'와 패러디'라는 주제였고, [결투]에는 잘 맞는 얘기였다. 논문을 꼼꼼히 다시 읽어보니 그 무렵 그 선배가 갖고 있었을 나태감과 권태감, 열등감, 무력감 등이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은근히 배어나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주 잘 쓴 논문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진정성(!)이 느껴지는 논문이다, 라는 평가를 독자로서 할 수 있을 법하다.

나보다 한 학년 높은 그 선배는 부산 사람이었는데, 대학 입학 직전, 1993년 1-2월, 다른 선배 두 명과 함께 나에게 전화를 하여 해운대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다 같이 어딘가에서 자장면을 먹었지 싶고, 유람선을 탔다. 그런 인연도 있고 하여, 학창 시절 내내 항상 좋은 느낌을 주는 선배(오빠^^;)였다. 

내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군복무중이었던 그가 폐암으로 사망했다. 병문안을 가지 못했던(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차가운 장례식장은 또렷이 기억된다. 지금 생각하니 그의 나이는 만 28세에 조로의 포즈를 취하는 <결투>의 주인공보다 더 어렸지 싶다. 

그의 논문은 물론, 도서관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아 보았다. 사람은 죽어 없는데 한 시절 그가 쓴 글(책)이 이렇게 있다는 사실이 왜 이리 새삼스러운지...

 

그밖에, <애도와 우울증>은 푸쉬킨과 레르-프를 다루는데, 유감스럽게도 결투 얘기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참고할 만하다.(지금 내 상황에 딱 맞는다!) 요즘은 '서평가'로 굳어진 듯한데 아무튼 그 '로쟈'가 러시아문학박사라니,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놈의 '박사'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절이 있었다니 이것도 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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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나보다 더 좋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건 모든 부모의 마음이리라. 하지만 꿈 깨시라. 아이가 태어난지 겨우 5년이지만 아이의 삶은 부모의 삶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그러리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요즘이다. 혹시 잠깐 진보(!)가 보인다면 그야말로 잠깐, 혹은 착시나 환각 같은 것. 결론은 똑같다. 하필 지난 학기에 쭉 다시 읽은 톨스토이는 그 점을 여실히, 아주 문학적으로, 문학적 사실주의(진실!)가 가닿을 수 있는 극점에서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생이다. 아버지는 기껏해야(?!) '백작'이었으나 어머니는 공작, 더욱이 무척 부유한 볼콘스키 가문의 영애였다. 그의 데뷔작인 소위 자전 삼부작은 그런 환경에서 자란 유년, 소년, 청소년기를, 훗날 더 빛을 보게 될, 톨스토이만의 균형 잡힌 객관적인 문체로 찬찬히, 세세하게 그려낸다. <소년 시절>의 핵심 대목은 어머니의 죽음. 그렇다, 소위 '엄친아'의 그에게 최고의 상실은 이것이다. 소설에서는 열살 넘어 엄마가 죽는 걸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아주 어릴 때(서너살?)였다.물론 이건 비극이다. 하지만, 저 정도의 집안이니 저 정도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가령 체호프처럼 (해방된) 농노의 아들이었다면??) 그럼 어느 정도의 집안이었나. 이후 톨-이가 쓰게 될 걸출한 장편들은 결국 자신의 집안과 그와 연결된 러시아 귀족 사회(이것도 은근 좁았으리라 생각된다, 우리의 재벌 사회가 은근 좁듯)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다. 그의 소설은 90퍼센트 전기적(=자전적) 소설이다.

 

 

 

 

 

 

 

 

 

 

 

 

 

 

 

<전쟁과 평화>. 물론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역사소설이다. 하지만 톨-이의 입장에서는 우선적으로, 어머니 쪽 볼콘스키 집안 얘기를 대거 다룬 소설이기도 하다.  노 볼콘스키 공작의 '박색'(-임이 엄청 강조된다!) 딸 마리야 볼콘스카야가 대략 톨-이의 어머니, 그 다음 그녀와 결혼하는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이 그의 아버지. 이들의 결혼 스토리는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편이다.

 

이 긴 소설은 셰레르 고관 부인(안나)의 모임으로 시작된다. 사교계 살롱, 그녀는 귀족사회의 '여왕벌'쯤 되는 듯하다. 여기에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나오고 인물들의 성격, 관계, (예상되는) 갈등 등이 다 제시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모스크바 굴지의(!) 부호인 베주호프 백작의 와병, 임종, 죽음이다. 다들 그 유산을 받으려고 애쓰는데, 결국 재산은 사생아인(그리하여 원래는 상속 자격이 없었던) 피에르 베주호프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톨스토이의 소위 구도적(=정신적) 자아를 반영하는 인물이다. 나중에 (옐레나와의 실패한 결혼 이후) 나타샤 로스토바, 즉 로스토프 백작 집안의 딸과 결혼한다. 둘이 엮어지는 건 물론 이들이 한 사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타샤 입장에서는 '피에르 삼촌'이었던 자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남자'로 보이고, 그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이 긴 소설의 맨 마지막을 장식한다.(더 마지막은, 정말 지루하다, 역사와 전쟁에 대한 장광설로 장식된다..ㅠ.ㅠ)

 

 다 건너뛰고, 니콜라이 로스토프와 마리야가 만나는 장면은 어떠한가. 나폴레옹 침공, 마리야는 아버지가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피난도 못 가고 영지의 저택에 거의 갇혀 있는 상태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로스토프 백작(장교)이 그녀를 구출하게 되는 것이다. 마리야의 시점, 평생 늙은 아버지의 변덕을 받아주고 또 자신의 못생긴 얼굴로 열등감을 느껴온 그녀에게 니콜라이는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이다.

 

로스토프가 공작 영애 마리아에게로 안내를 받아 홀로 들어가 보니 그녀[마리야, 노공작 사망 직후]는 허탈감에 빠져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왔는지, 또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답게 생긴 얼굴과 그가 방안을 들어설 때의 태도나 처음 입 밖에 낸 말씨로 보아, 그가 자기와 같은 사회 계급의 사람임을 안 공작 영애 마리아는   깊이 있고 빛나는 눈빛으로 손님을 보면서 흥분 때문에 토막토막 끊어지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스토프는 그녀와 만나는 순간 어쩐지 낭만적 환상을 느꼈다. ‘난폭한 폭도들 가운데 혼자 남겨진, 몸을 보호할 능력도 없는 슬픔에 잠긴 아가씨!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로스토프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얼굴빛이고 표정이고 어쩌면 저렇게 부드럽단 말인가! 그리고 어쩌면 저렇게도 품위가 있어 보일까!’ 그는 겁에 질린 듯한 공작 영애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 468-469 / 3, 2편 --> 이 번역본은 <범우사판>, 손때를 탄 아끼는 책이다.)

 

부유한 상속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지금 어떤 상황인가. 백작 집안이지만 사람 좋고 경영 못 하는 우유부단한 부모 때문에 재산이 거의 바닥인 상태, 그런데 그는 또 집안을 일으켜세워야 하는 장남이다. 한편 마리야는, 마침 오빠(안드레이 볼콘스키)도 전사했기 때문에(그의 부인인, 올케 리자는 둘째 낳다가 일찌감치 죽어줌), 거의 유일한 상속녀이다. 그 재산을 나눠 가질 유일한 사람은 오빠의 아들뿐이다. 얼마나 대단한 귀족인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영지 한 덩어리를 재산으로 받는다.

 

아무튼 시쳇말로 '땡잡았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니콜라이로서도, 무척 불쾌하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이 톨-이의 현실감각, 내지는, 그가 정말 천생이 귀족이라는 점이다. 니콜라이는 돈 때문에 마리야를 사랑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정말로 마리야를 사랑하고 (겸사겸사!) 그녀는 부유한 상속녀이다. 그의 눈에 그녀는 미녀는 아니지만 우아하고 기품있고, 그렇기에 매력적인 여성이다. 겸사겸사, 마리야는 수학적 재주가 뛰어나다.(아비가 딸에게 가우스 정리인가, 이런 거 가르친다 -_-;; 요즘 같으면 어디 수학과 교수 쯤 됐을 지도^^;) 결국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다가 둘은 결혼하게 된다. 모든 결혼은 정략결혼이다. 그렇지만, 그 정략결혼도 사랑(적어도 사랑의 환상)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안나 카레니나>는 전 세계가 오랫동안 사랑해온(앞으로 사랑할!) 최고의 연애소설이다. 물론 소설이 이렇게 긴 걸 봐도 알겠지만,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는 독자는 없을 터이다. 연애가 이리 길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안나 카레니아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나고 반하는 장면(1부)까지는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리라. 많은 빛나는 문장들, 장면들을 빼고, 이번에 새로 읽으니, 이런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브론스키는 차장을 뒤따라 객차로 들어가다가 어느 부인에게 길을 내주고자 객차의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교계 사람의 감각이 몸에 밴 브론스키는 그 부인의 용모를 보고는 한눈에 그녀가 상류사회의 여성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객차 안으로 들어가려다, 한 번 더 그녀를 꼭 보아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대단히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그녀의 모습 전체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겸손한 기품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에 유난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뒤돌아보자, 그녀 또한 고개를 돌렸다. 짙은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 누군가를 찾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군중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짧은 시선을 통해, 브론스키는 그녀의 얼굴에서 뛰노는 절제된 활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붉은 입술을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넘쳐흘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1, 137 / 118)

    

브론스키가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가 안나를 인지한 이유(?)를 설명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그녀가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점이다. 아, 물론, 이건 사랑이고 첫 눈에 반한 사랑이다. 그리고 안나의 아름다움이야, 앞으로도 많이 나오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까지, 저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작가가 이 점을 저렇게 지적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겸사겸사, 안나의 아들 세료쟈. 아이는 학교도 가지 않는다. 갈 필요가 없다. 과목별로 가정 교사(겸 보모 - 육아 도우미)가 다 있고 원어민(!) 교사가 다 딸려 있다. 아이가 9살이 되었을 때인가, '사회성' 함양을 위해 학교에 보낸다.

 

귀족 사회의 충실한 일원으로서, 또 부지런하고 경영 마인드가 (^^;;) 투철한 지주로서, 또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로서,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톨-이는, 왜 소설을 썼던가, 굳이  왜 써야 했던가. 이것이 지난 봄학기 내가 제일 많이 던진 물음이었다.(영원히 답이 나지 않는 -_-;;)  실상 그는 엄청난 양의 소설을 썼지만(희곡도 썼다) 자신을 결코 '직업 작가'로 여기지 않았다. 그건 그가 충분한 '프로'가 아니어서가 아니고, 내가 앞에 썼듯, 다른 정체성만으로도 너무 멀쩡, 심지어 멀쩡 이상의 멀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에 이렇게 재수 없는(!) 작가는 없을 법하다. 그에게 유일한 콤플렉스는 외모(얼굴)였지만, 중년 넘어가니 오히려 미남 작가들보다 더 낫다...^^;; 그가 문학-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철저한 환경결정론, 균형 잡힌 구성, 사물의 궁극을 추구하는 집요하고도 찬찬한 문체 등은 모두 이런 '신분-계급'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최고의 '갑'이었음에도 '베품'의 미덕까지 갖고자 했으니(재산도, 저작권도 결국에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남기게 되지만) 더더욱 재수 없나, 그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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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 얘기를 하고 싶었나. 그랬다. 하필, <톨스토이> 수업 전에 경제학 관련 수업이 있어서인지 PPT 파일이 떠 있을 때가 더러 있었는데, 한 번은 그 내용이 바로 저것이었다. 플래티넘 수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등. 다들 알면서 왜 그러나, 세상이 원래 그렇다! 다만, 보다 인간적, 문화적이려면 소위 '흙수저'도 먹고살만하게 사는 세상, 그게 멀쩡한 세상(=선진국)이다. 문제는 이 '먹고살만하다'의 정의가  참, 애매하다는 것.

 

부산의 허름한 동네, 불과 2킬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소위 흙수저로 사는 남동생 부부와 소위 핵금수저로 사는 여동생 부부를, 이렇게 멀리 서울의  역시나 허름한 동네에 살면서 지켜보는 마음이 참 묘하다. 우리 삼남매야 이미 인생의 절반을 지나왔지만, 그 아이들의 삶은 이제 겨우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임에도 너무도 다르게 전개된다. 고급한 영어 유치원, 그 다음, 아이가 힘드니 학원도 안 보낸다, 선생이 다 온다. 

 

 어느 날 여동생도 말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매달 건물세가 이렇게  들어오는데(액수가 너무 감이 없어서 까먹었다) 이게 멀쩡한 세상이냐, 고. 물론 그말도 맞다. (경제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열심히 연구하시라.^^; ) 소위 부자의 삶을 전혀 몰랐던 내가 여동생네의 삶을 보며 가장 절감하는 건, 부가 죄가 아니라는 것, 이다. 부자라고 쉽게 살지 않는다. 펑펑 쓰지도 않는다. 마구 살아서는 그 부가 유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 부를 되물림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재벌사회의 룰은 더 엄격하리라 생각된다.)  

 

흔히들 쉽게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정말 부도 죄가 아니다.  부자가 띠껍냐? 그래, 띠껍다, 더럽고 아니꼽다! 하지만 배알이 꼴리는 순간 우리는 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식의 태도로 나가는 것도 이미 우리 사회에는 맞지 않는다. 그거야말로 70년대, 새마을 운동 시절 얘기고. 또 출세하지도 못한다. 개천에서 난 용은 개천으로 돌아갑니다요^^;   

 

1975년 농부의 딸로 태어나 막노동꾼, 시장바닥 장사치의 장녀로 자란 나는 정말 배고프고 추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먹성이 유달리 좋은 여동생은 "밥 많이 주세요, 꾹꾹 눌러주세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듯.(그런데 지금 자기 말대로 "미꾸라지 용 됐으니" 로또인가?!) 대학 입학 전까지 삼겹살을 구워 먹어 본 적이 없다. 구워 먹을 고기가 어디 있나. 김치찌개도 호사였다.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피아노 학원을 못 다닌 것이 마흔이 넘은 지금도 아쉽다. 

 

가난한 남동생 부부와 부유한 여동생 부부를 속속들이 보면서 절감한다. 그래도 옛날과 비교하면 어지간히 먹고살만한 세상이다. 부자-갑의 횡포, 소위 '갑질'도 무섭지만, '을질'도 만만치 않다. 나 돈 없어, 어쩔래? 우리 애 띨빵해, 어쩔래? 나 성질 더러워, 어쩔래? 등등. 나도 요즘 '을질' 중인데, 좀처럼 착해지지 않는다.  인세가 들어와야지 착해질 듯, 에효.  돈의 노예인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돈을 많이 갖는 것 뿐이라는 슬픈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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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화요일인가, 애를 유치원에서 치료실로 데려가는 중, 엘리베이터 앞에서 찍었다. 여섯 살은 똘똘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잘 논다. "야, 너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하면 내 자리에 못 안 게 할 거야!" "야, 그러는 너는?" 우리 아이의 '놀이 수준'은 아직 '탐색'의 단계(그 다음 대략 '역할' 놀이, '상상-환상' 놀이 등)에 머물고 있으니 여기에 못 끼는 건 당연하다.  혼자서 띨빵한 소리 한다. "**(친구 이름)가 키가 제일 커." 웬 뜬금없는 소리? 당사자인 **도 못 알아들음 -_-;; 그래도 별 탈 없이 다녀주는 것만도 고맙구료.

 

 

이건 작년초, 심지어 3월. 다섯 살임에도 몸놀림이 엉성해서(오죽하면 '뇌성마비'라고 했을까!) 바보 같은데도 왜 이리 이쁘냐. 제 딴에는 그래도 노래와 율동을 해보겠다고 애쓰는 모양이 너무 귀엽다. 겸사겸사 다른 친구들도 아직 네 살이라 만만찮다. 그리고 제 내복들의 압박ㅋ 작년에 찍힌 사진들 중 제일 아끼는 사진이다. 저 때 달고 있는 명찰, 이제는 읽을 줄도 안다. 잘 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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