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부터 읽어온<닥터 지바고>에서 1차 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유리 지바고가, 남편 찾아 전선에 나온 간호사 라리사(라라) 기사로바(안티포바)와 처음 만나는 소도시의 이름은 '멜류제예보'였다. 번역하는 내내 그랬다. 지난 달에 교정 보면서도 놓쳤다. 논문 한 편 읽다가 아차 싶어 다시 찾아 보니 이렇다. 이런 맹목이. 정녕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다.

 

통상 지명(도시, 마을)은 '-o' 어미가 많아서('바르이키노', 이런 식) 이런 실수가 반복된 것 같다. 게다가 러시아어는 격이 변하기 때문에 통상 '멜-프'는 뒤에 다른 어미를 단 채 나온다. 주격(대격)으로 나오는 경우는 저 두툼한 책에서 딱 한 군데. 영역본도 마찬가지. 어찌 보면 '멜-보'나 '멜-프'나 뭐 그리 중요한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은 항상 성실하게, 까칠하게!^^;; 에효, 또 뭘 얼마나 많이 틀렸으려나. 어느 인터뷰에서, 혹시 다시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느냐, 있다면 뭐냐, 라는 식의 물음에 "전부 다요!"라고 대답한 정영목 선생님의 이 책들, 사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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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전공자로서 오랫동안 강의를 해 오면서 '문학과 윤리' 역시 많이 다루어온 주제였다. 소위 '정치범'인 도-키를 전공한 만큼 '문학과 정치(혁명)' 만큼이나 많이 얘기했던 것 같다. 교양 수업이라면 주로 수업 말미, 나보코프를 다룰 때다. 문학과 정치는 아무래도,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불가코프 등  소비에트 소설을 읽을 때 얘기된다.

 

 

 

 

 

 

 

 

 

 

 

 

 

 

 

 

 

 

 

 

 

 

 

 

 

 

 

오랜만에 여러 권을 가져와 봤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원래 나보코프는 대단히 지적이고 문학적인(!) 작가인데, 유독 <롤리타>가 문제적, 선정적이다. 이 소설 때문에 그는 응당 적잖은 스캔들에 휩싸였다. 얼핏 기억나는 에피소드로는, 당시 그가 일했던 학교(콘웰 대학이었나?)의 학부모들이 저런 놈한테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고, 저런 놈한테 배우도록 할 수 없다고 항의한 것이다. 얼핏 보면 <롤리타>는 소아성애를 다룬 소설이고, 자세히 봐도 물론 그런 요소가 없지 않다, 아니 출발점이기도 하다. 자, 이런 문제적인 소설을 쓸 때 작가에게 요구되는 가장 근본적인 자질은 무엇일까.

 

아, 물론, 문학적 재능이다. 그야 말해서 뭐하나. 하지만 소재와, 그와 맞물려 스토리의 전개가 그그렇다 보니, 이런 경우는 작가는 그 무엇보다도 윤리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더더욱 윤리적이어야 한다. 수업에서도 몇 차례 강조했거니와, 이건 러시아의 귀족작가이자 극히 지적인 작가였던 나보코프만이 감당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소아성애를 다룸에 있어 도덕성과 품격이 빠진다면, 그것은 그냥 포르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작가 자신의 전기. 그는 말하자면 정말 깨끗한(^^;;) 작가였다. 평생 공부하고 강의하고 소설 쓴 작가, 남는(?) 시간에는 테니스 치고 나비(인시류) 채집하러 다닌 학자였다. 이런 말하면 그렇지만, 사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비슷하게, 도-키. 존 쿳시(쿠체)의 소설에서는 도-키를 괴상히 병리적인 사람으로 그렸는데(그래서 그 소설이 싫었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 도-키는 우리가 흔히 갖는 몇몇 약점(자존심 강하고 발끈하고 속되고 등) 외에 큰 문제는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의 소설 속에서 암시, 때로는 묘사되는 성도착증은 전혀(!) 없었다.(그런 걸로 알려져 있다.) 소설 속에서는 가령 <악령>에서는 미성년자 강간, <미성년>에서는 비행청소년들 사이에서 약간의(?) 동성애 등이 나온다.

 

 

 

 

 

 

 

 

 

 

 

 

 

 

최근 '미투'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지만, 문학(예술) 쪽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사실 어떤 대목은 새로울 게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는 것이 더 참담하다. 한데, 놀라운 것은 엄연한 범죄인 행위들이 '문학-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미화, 권장된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이십대 초반, '너 소설 쓴다며? 소설 쓰려면 여러 남자랑 자 봐야 되는 거 아냐?' 라고 묻던 어떤 남자-아저씨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경우도 똑같은데, 아, 내가 행실이 옳지 못했구나, 만만하게 보였구나, 하는 자책 같은 것이 따른다.) 특히 이들은 '퇴폐-타락'을, 가령 보들레르나 툴루즈 로트렉의 경우 같은 미적 개념('데카당스')이 아니라, 현실 속의 도덕적 행위에 갖다 붙이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문학을 한다면 더 윤리적이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그것에 대한 더 민감한 자의식을 갖고 있어야지, 그걸 오히려 활용하려 든다면, 정녕 너무 추한 것이다.

 

*

 

이십대 초중반, 옛 남자 친구가 시인 지망생이어서 현대시를 많이 읽었다. 그 중 한 권. 내용은 거의 떠오르지 않지만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이미 역사가 된 이십대가 고스란히 소환되는 듯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최근 그의 모습을 보기가 참...ㅠ.ㅠ 

 

 

 

 

 

 

 

 

 

 

 

 

 

 

 

덧붙여, 김기덕. 그의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어도(우선은 <나쁜 남자>를 비롯해 보고 있자면 너무 힘드니까) 홍상수 감독과 더불어, 우리 영화계에 참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는데, 넘 슬프다...ㅠ.ㅠ (언젠가 동생이 가족 행사차 모호텔에 있다가 마침 부국제(?) 때문에 그곳에 와 있던 김기덕 감독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온 기억이 있다. 정말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쩝.) 혹자들은 '맨날 그런 영화가 찍으니까~~'이라고 말하던데, 그럼에도, 나는 저 나보코프나 도-키의 경우처럼 생각해왔다. 문학(영화도 마찬가지리라) 속 세계가, 작가의 사생활의 반영은 결코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우리 내면의 암흑을,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조건화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천재 아니다. 그리고 어떤 천재성도 기본적인 윤리를 뚫고 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남에게 피해주는 행동 하지 않기'는 초등생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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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8-04-06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쎄, '지적'이라기보다는 시건방지다, 발랄하다, 뭐 다른 수식어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요즘은 밥벌이용 책 말고는, 소설책을 빠른 시일 내에 완독하는 일이 드문데, 아, 재미있었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 이런 것이었구나.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멜리 노통브 책을 읽는 게 없나 보다 싶다. 헐, 놀라워라. 이 소설은 그녀의 데뷔작인데, 이십대 작가다운 발랄하고 오만한 총기가 넘친다. '그 후'가 궁금해지기도 하는, 즉, 작가가 나이 들어가면서 어떻게 변할지 귀추가 주목되기도 한다. 

내용 자체는 연골암, 이라는 희귀암에 걸린, 그래서 기고만장(^^;;) 한, 노벨상까지 받은 연로한(83세?) 작가가 두세번(?의 인터뷰를 한다. 첫 부분에서는 그냥(?) 지적인 소설,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읽혔다. 그런데 인터뷰와 인터뷰이의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 사실 맛만 볼 생각이었는데, 책장이 계속 넘어가는 것이었다. 노작가는 무척 괴팍하고 냉소적인 엄청난 뚱보로서 많은 작품을 썼는데, 일부러(!) 미완성작 하나를 남겨놓는다. 아니, 일부러 미완성으로 발표한다. 이게 나름의 키워드.

마지막 인터뷰(기자는 '니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갖고 있다)에서 드러나듯, 그 소설의 제목이 바로 <살인자의 건강법>. 동시에, 노작가의 유년(조실부모, 외가에서 성장, 외사촌 누이와의 미묘한 관계 등), 무엇보다도 살인과 방화 등이 얘기된다. 이 부분, 지나치게 신화적, 상징적인데, 너무 그래서 거의 판타지 같다.  롤리타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 신화적 공간 속의 소년 소녀처럼 사랑하는 사촌들, 그들은 성인이 되는 것을, 성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 독특한 '건강법'을 유지한다. 잠 안 자기(거의 두 시간만 잔다 ㅠ.ㅠ), 괴상한 음식만 먹기(가령 독은 없으되 얄궂는 버섯 등 - 왜 이리 사냐 ㅠ.ㅠ) 등등. 그러던 어느 여름날(년도까지 자세히 언급된다)  강가에서 수영을 하던 중 소년은 소녀가 초경을 시작한 것으로 발견, 그 자리에서(30분이라니, 헐) 소녀를 교살한다.  

다시금 인터뷰. 결말은 익히 예상 가능한 대로, 니나가 노작가를 교살해주는 것으로 끝난다.

스토리도 재밌고 문체도 마음에 든다. 이런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작위적(=판타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분량 역시, 조금 더 발라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독자로서는 좀 있다. 이후에 그녀는 어떤 소설을 썼는지. 

 

 

 

 

 

 

 

 

 

 

 

 

 

 

 

소설은 직접 읽어봐야 알 것이지만, 책 표지를 장식한 상당한 미모가 나이와 함께 양질전화되는 모습은 금방 확인된다. 중년이 돼도 '와쿠'는 남아 있다^^;; 그리고 저 레드립!

 

 

이 소설을 알게, 또 읽게 된 것은 어느 젊은 평론가 덕분인데,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최근 몇년간 읽은 (경)장편 중 제일 마음에 든 소설이다. 아멜리 노통브 소설을 읽은 뒤의 감상도 그렇다. 팔은 안으로 굽는 모양이다.  스토리도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인물군도 다양하고 생기롭다) 정말 발라낼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딱 필요한 말, 필요한 문장만 쓰였다. 작가가 얼른 새로운 경장편 한 편을 더 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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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8-04-06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자의 건강법... 제목부터 땡기네요..오호...

추천해 주시는거죠? ㅋ
 

<카라마조프>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쭉 수수께끼였다. 파벨 표도로비치 스메르쟈코프. 석사논문에서도 그에 대해 많이 썼다. 아마 이제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써보는 중이다. 아무리 '구원'하려고도 해도 도무지 구원할 수 없는 캐릭터다. 왜냐면 그가 그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그에 앞서 이반에 대해 썼으나, 뜻밖에도(-_-;;) <게재불가>를 받아, 그것도 심사결과를 너무 늦게 주셔서, 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게 나와야 스메르쟈코프 논문이 나가는데, 또 그래야 도-키 연구서를 꾸리는데.(음, 하지만 꼭 그래야 하나?) 아무튼 무척 의기소침했다. 그 여파도 있고 겸사겸사 날도 춥고 이삼일 자리보전하다가 일어났는데, 목디스크의 여파로 왼팔이 너무 아파 또 의기소침해졌다. 대학 시절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동기의 위암수술까지 전해듣고 더 의기소침해졌다. 앞으로 더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는 건 이 모든 것이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라는 것. 과연 (희망만큼이나 허망한) 절망.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의 정조를 써본다. 바로, 증오. 다 싫어! 스메르쟈코프는 그것의 육화인 것 같다.

 

 

 

 

 

 

 

 

 

 

 

어머니가 중증자폐(1급)였던 것을 상기할 때, 또한 그의 여러 자질을 볼 때 분명히 그런 성향이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자폐가 정신(지적)박약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게 더 무섭다. 변호사 페츄코비치의 성격화가 제일 적확하다.

 

저도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가서 그를 만났고 대화도 나눴지만, 그가 저에게 불러일으킨 인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건강이 허약하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성격이나 마음에 있어서는, 오 아니올시다, 이 자는 절대로 검사측이 단정 지은 것처럼 그렇게 허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저는 그에게서 겁이라는 것을, 검사가 우리에게 그토록 특징적으로 묘사해준 그런 겁쟁이 같은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순진무구한 측면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제가 발견한 것은 순진함 밑에 감춰진 무서울 정도로 의심이 많은 성격, 그리고 극히 많은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적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사생아라고 생각했던 만큼(그런 증거가 있습니다) 자기 주인나리의 정식 자식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처지를 증오했을 수도 있습니다.”(3, 479-480)

 

마지막, 그의 자살에 대한 해석. 아이를 보내고 머리를 감는데 저 마지막 문장을 떠올라, 아, 가슴이 서늘했다.   

 

하지만 검사측은 그렇다면 왜, 대체 왜 스메르쟈코프가 유서에서 자백을 하지 않았는가? 라고 외칩니다. “어떤 일에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또 다른 일에선 그렇지 않았단 말입니까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말입니다, 양심이란 이미 뉘우침을 뜻하는 것인데, 자살자에겐 뉘우침이 있었을 리 없으며 오직 절망만이 있었습니다. 절망과 뉘우침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절망은 일체의 타협을 거부할 만큼 악의로 가득 찬 것일 수 있으며, 따라서 자살자는 자기 목숨을 끊으려는 그 순간 자기가 평생 동안 질투해온 자들을 두 배로 증오했을 지도 모릅니다.”(3, 484-485)

 

뉘우침”(회개)이 아니라 절망”, 그리고 죽기 직전에 그 동안 질투해온 자들을 두 배로 증오했으리라는 변호사의 말이 너무 격하게 공감되어, 그래서 너무 격하게 슬프다. 조시마의 말대로 진정한 지옥은 '사랑의 부재'이다. 그 스스로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못하는) 것만큼 무서운 지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옆집 아가씨 마리야 콘드라-나가 스-프를 사랑하지만, 스-프는 그녀에게도 절대적으로 무관심하다. 그저 청자가 필요하고 거처가 필요하니 활용할 뿐. 이건 자폐와는 전혀 다른, 정녕 도-키만이 창조할 수 있었던, 우리 인간 본성의 아주 깊은 심연인 것 같다.

 

그냥 독자로서 세상에 어떻게 이토록 외롭고 무서운 인물이 있을 수 있는지 놀랍고, 연구자로서 이 인물이 시사하는 문제가 너무 흥미로워 놀랍고, 소설가로서 도-키는 어떻게 이런 인물을 창조할 수 있는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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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동이 보는 그림책 말고 이른바 '책-문학'이라고 할 만한 아동문학도 그 목록이 상당히 두툼하다. 어떤 것이 있을까. 북유럽의 이 작가, 많이들 꼽지 않나.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책을 많이 읽고 자란 아이들(제자들)은 보통 인생 최고의 동화책으로 이런 것도 많이 꼽았다.

 

 

 

 

 

 

 

 

 

 

 

 

 

 

 

보통 이 정도면 장편동화인데, 이런 책을 읽고 이해하고 느끼고, 심지어 그것에 대해 쓰는 수준이 되려면 평균 지능의 아이를 생각했을 때 초등 3, 4학년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 무렵 아이들이 주로 읽는 책들, 뭐가 있나. 

 

 

 

 

 

 

 

 

 

 

 

 

 

 

 

 

 

 

 

 

 

 

 

 

 

 

 

 

 

목록은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겠다. 내 입장에서 위의 책들의 공통점은,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ㅠ.ㅠ 앞서 지적한 그 나이, 즉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나의 독서범위는 너무도 한정적이었다. 도무지 책이라는 것이 없어서, 학교의 문고나 친척집이나 잘 사는 친구집에서 빌려보는 수준이었다. 그럼 그 전에는? 그림책 단계인데, 그때는 그나마도 없었다. 그림책 없이 곧장 글자책으로 돌입한 것이다.  문자의 세계는 그렇게 갑자기 나타났지만 엄청 빨리 친해졌다. 이런 책, 기억에 남는다. 그때 학교에서 강매(^^;;)한 정채봉의 동화집. 집에 책이 없어서 몇 번씩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보니 <오세암>이 대표작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아동(어린이)문학의 단계를 사실상 건너 뛰고 중학교 무렵, 바로 <세계문학전집>으로, 즉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 <부활>, <노인과 바다> 등으로 간 듯하다. 이미 다 지난 세월이지만, 그 틈새의 시간을 아동문학과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좀 좋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조금은 있다. 그래서 아이가 조금 더 크면 함께 읽으려고 미리(!) 사둔 <창비> 동화책들. 하지만 이런 책을 읽을 만한 수준의 '머리'를 갖추게 될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울쩍해진다.

 

 

 

 

 

 

 

 

 

 

 

 

 

 

 

 

*

 

지난 추석 연휴, 아이와 공연을 보러갔다. 아이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공연 관람(혹은 견학)을 가지만, 엄마 아빠랑 같이 간 건 처음이다. 우리가 본 건 뮤지컬 <보물섬>인데, 원작은, 다들 아시리라, 스코틀랜드 작가 스티븐슨이 쓴 동화이다.

 

 

 

 

 

 

 

 

 

 

 

 

 

 

 

다 아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책 역시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것이다. 앗, 줄거리, 너무 신선해! 뭐야, 주제는 우정이었나? 아니면 적은 내(-배) 안에 있다? 아니면 다 용서하라~ 아무튼 나는 너무 재밌었다. 그러고 보니 뮤지컬 공연 본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오 ㅠ.ㅠ

 

아이는 어떤가. 한 30분 정도 지나니 엉덩이가 들썩들썩, 혼자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한다. 다른 아이들(심지어 더 어린)과도 확연히 다름이 여실히 드러났다. 다행히, 공연장 안을 뛰어다니는 불상사는 없었으나(그럼 쫓겨남 - 옆에서 '형아'가 째려 보고 있음을 수시로 의식하고 자제하는 듯했다) 주의집중력도 짧고 내용 몰입도, 나아가(당연하지만) 이해도도 무척 떨어졌다. 왜 동굴이 무너져내리는지, 저 친구들이 왜 갈라져서 싸우는지 등 골조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배에 '영국국기'가 걸렸던 것만 계속 얘기했다 -_-;; 에공, 어쩔 수 없지.

 

좀 더 어릴 때는 이해방식의 독특성(?)이라고 생각했는데, 핵심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독해(나아가 모든 학습)의 출발점이지 않나. '불수능'(^^;;) 끝난 다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1점의 중요성, 다들 이걸 욕하지만 점수 따는 단계에서는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그 1점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있는지는 그것을 위해 노력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 물론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무의미한 차이지만 -_-;; 

 

*

 

"지난 주 알림장 내용은 일취월장이었고, 무슨 뜻이야?"

"매일 매일 발전한다~~"

"이번 주 알림장 내용은 뭐야?"

"이번 주는 수박껍데기야."

"어?"

"이번 주는 수박껍데기라고, 뭐를 대충 알고~"

"서준아, 수박껍데기가 아니라 수박 겉핥기 아니야?"

- 잠깐 띵~ 이건 무슨 말이지? 하고 생각하는 듯.

"엄마 생각에는 수박 겉핥기가 맞는 것 같은데?"

-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는 표정, 약간 자존심도 상한 듯.

"내 생각에는 수박껍데기가 맞는 것 같은데?"

 

*

 

"오늘 동화 특강은 뭐야?"

"파블로야."

"걔는 뭔데?"

"파블로는 돼지야, 수퇘(돼)지."

"여기 친구 베라도 있다고 돼 있네? 베라는 뭐야 암퇘지야?"

"아니, 베라는 수퇘(돼)지, 암퇘(돼)지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야."

"그럼 둘이 뭐해?"

"어, 어, 그건 동화 특강 종이를 봐야지(만) 알 수 있어."

에공,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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