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금!) 도스토예스키(특히 <카라마조프>, 역시나 다시금!) 공부를 하다가, 논문 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서 옛날 같으면 지나쳤겠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이 나와, 여기다 옮겨본다.  

 

"The Dostoevskys were now relatively well off, compared with their economic situation in the past, but they had been unable to amass any capital and were much concerned about the future of their children.”

도스토예프스키 부부는 과거의 경제 상황에 비하면 이제는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았지만, 어떤 거금(자본!)도 모을 수 없었던 데다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컸다.

 

 

 

 

 

 

 

 

 

 

 

 

 

 

(지금 보고 있는 건 저 시리즈 중 맨 마지막 권. 대학 시절부터 군데군데 읽어온 책. 너무 길어서 때려주고 싶다!)

 

지금 내 인생에 딱 들어맞는 문장이다. (정말 제일 중요한 건 책이 가르쳐주지 않는 모양이다!) 서른,  오랫동안 꿰차고 있던 학생증을 버리고 강사증(?)을 들었던 2004년 3월, 나의 월수입은 80만원 남짓, 방세는 세금 포함 28만원이었다. 사실상 50만원 갖고 한 달을 살았다. 그나마 방학 때는 수입이 없었다. 그때 나의 꿈은 월수입 2백.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러, 강사료도 제법 뛰었고(아, 그런데 왜 취직이 안 된 거냐,  흑흑 -_-;;) 애써 번역한 책들이 은혜 갚은 까치 노릇을 하고 있고,  간혹 연구비나 어디 기금을 받게 되는 해도 있다. 수입이 널뛰긴 하지만, 월 80만원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가난한가. 왜 네 평짜리 원룸-월세방에 살 때보다 더 돈에 허덕이는가. 

 

우선 '모아둔 돈'이 없다, 가 문제. Capital, 이라는 저 무시무시한 단어. 항상 읽고, 이해하고 싶지만, 좀처럼 읽히지 , 이해되지 않는 단어, 캐피털. 아마 영원토록 완독 못 할 저 책. 부자는 노력이나 뭐 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태어나는 것'임을 마흔 넘어서는 완벽히 깨닫는다. 애시당초 벌어지는 돈도 거금이 아니거니와 살아가면서 소비되는 돈이 또한 많기 때문에 영원토록 거금은 확보되지 않는다. 티끌 모아 소박한 티끌 더미, 태산이 아니라. 물론 그나마라도 긁어모아야지.

 

 

 

 

 

 

 

 

 

 

 

 

 

캐피털에 대한 집착은, 앞의 인용문의 마지막  어구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도-키는 사십대에 결혼했고, 당시로선 정말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되었다. 그는 조만간(<카라마조프> 출판 하고 일년도 안 지나서) 죽게 되는데, 그때 그의 두 아이는 열 살, 열 두 살(?) 등 그야말로 아이였다. 어린 자식을 둔, 나이 많은 부모의 고민은 다 비슷할 것 같다. 서른 여섯 늦은 겨울에 임신, 서른 일곱 한여름에 출산, 그리고 정신없이 아이를 키울 때는 몰랐으나, 아이가 대여섯이 되면서부터 아이에게 내가 너무 늙은 엄마라는 것을 의식한다. 앞으로 아이와의 세대 차이도 커질 것이다.  모든 걸 그나마 조금이라도 보상해줄 수 있는 건 결국 돈, 이더라니. 관리만 잘 하면 돈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리고 돈 관리가 피부나 몸매 관리보다 쉽다. 아니, 나이 들수록, 후자도 돈이다.

 

꼬박 2년, 아니, 8월이니 그 이상 치료실을 다닌다. 치료비가 아주 약간의 에누리를 붙여서 딱 백, 이다. 어느 항목에 매달 지출비가 이렇게 될 수 있다니 참 놀라운데, 이게 1년 넘었다. 대문자 C, 저 캐피털에 대한 유혹이 어느 때보다 크다.  한 번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다음은 점점 더 깊이 빠지는 일만 남았다. 그런 것 같다. 이게 또 캐피털의 마력. 캐피털은 결국 욕망의 동의어이다. 그러게 다시 한 번 이 지점에서 발자크의 위대성을 상기하게 된다. 내 안의 속-스러움이여!

 

 

 

 

 

 

 

 

 

 

 

 

 

 

 

 

 

시즌별로 업데이트 되는 FW, SS 신상품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나를 보면, 또 테레사 메이나 브리짓 마크롱(그밖의 알렉사 청, 엠마누엘 알트 같은 각종 셀럽들)의 패션을 '탐구'하는 나를 보면, 발자크 소설 속 남자주인공들과, 19세기 프랑스판 된장녀-촌년 엠마 보바리가 떠오른다.  "나 같으면 집구석에서 너처럼 그렇게 차려 입고 있으면 쪽팔려 죽겠다."(??) 대략 이런 식의 말을, 보바리의 시어머니가 던지는 장면도. 

 러시아에서 남이 버리고 간 옷을 주워 입고 살던 촌뜨기 대학원생-유학생의 남자 친구였다가 10여년 전 남편이 된 그가 한 날은 사심없이, 혹은 정말 한심하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사람이 (저렇게 힘들게 번) 돈을 저렇게 한심하게 (옷 사는 데나) 쓰다니! ㅋㅋㅋ"  그러는 남편은 정녕 소비-욕망을 잘 모르는, 좀 과장하면, 독일식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 같다. 거의 5년째 똑같은 휴양지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휴가를 보내는 앙겔라 메르켈의 느낌. 물론 그게 학창 시절 나의 모습이긴 했는데...-_-;;   

 

자본, 소비, 욕망, (순수한) 꿈 등을 생각하자면, 언젠가 이 소설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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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8-1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 여러 페이지를 할애해 설명한 작품이 <위대한 개츠비> 표지 그림이네요^^
 

잔느 모로 별세(이 단어가 서걱거린다!)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대학 초년 시절, 비디오방 죽순이 시절에 많이 봤던 얼굴. 프랑스 영화를 좋아했고 그녀는 (너무 판에 박힌 말인가!) '누벨 바그의 여신'이니 오죽했으랴.

언제부터인가 젊은 그녀보다 늙은(늙어가는) 그녀를 더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어디, 두툼한 배와 몸뚱어리를 트렌치 코트로 덮고 있는 '할머니' 잔느 모로가 쭈글쭈글한, 전형적인(?) 할머니 입술 사이로 담배를 꼬나물고 서 있던 장면이 떠오른다. <니키타> 어느 장면에서도 나왔던 것 같다.

 

지금도 충분히 늙었는데 앞으로는(도) 더 늙을 일만 남았다. 지금 나의 나이는 항상 새로운, 그래서 놀라운 나이. 몸과 마음의 건강을 다 같이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노년의 그녀를 영화 속에서 계속, 꾸준히 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담배와 참 잘 어울리는 듯. 설마, 흡연자로 89세까지 사셨나. 그 역시 부럽구나.

 

 

정신없이 바쁘던 와중에 그녀의 별세 소식을 알게 된 건 최근에 이런 산문집을 낸 분의 트윗을 방문했다가였다.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오는데 트레일러 챙겨(?) 보기도 힘들어 유감인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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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 문학 좋아하지 않고 특히 미국문학은 거의 문외한이다. 그나마 영국 문학은 공부를 좀 해보려고 한 것 같지만, 프랑스나 독일 문학에 느낀 열정은 없었다. 돌이켜보니, 내 인생의 '짝짓기' 시즌이었던 이십대 중후반 이후(그때 만난 자와 10년 사귀고 결혼했으니, 조금만 더 채우면 20년이다!)  간만에 달뜸을 경험한 만큼 기념 삼아 내가 읽은 영국 문학을 정리해본다.

 

아무래도 1번은 셰익스피어. 대학 시절, 초록색 표지의 아주 조그만 책으로 된 셰-어 전집에 도전한 기억이 있다. 그래봐야 별로 접수하지 못한 것 같다. 나이 들고 비극부터 차근차근 읽어가고 있다. 책으로 읽지는 않아도 BBC 드라마와 수준높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희극, 로맨스, 사극 등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명불허전이다. 셰-어는 지금은 치매로 요양원에 누워 계신 큰아버지의 전공이기도 하(했)다.

 

 

 

 

 

 

 

 

 

 

 

 

그 다음, 고등학교 때 읽으면 무척 -시피 봤지만 서른 넘으면서부터는 그 나름의 의미를 보게 된 작가. 제인 오스틴이다. 전집이 나온 건 지금 알았다, 깜놀. 책도 책이지만, 영화로도 익숙하다. <이성과 감성>에는 엠마 톰슨, 케이트 윈슬렛, 휴 그랜트, 알란 릭맨(지금은 고인이 된) 등의 배우들이 나왔던 듯하다. <오만과 편견>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영국의 사고방식, 생활 패턴, 성 모럴, 경제 관념 등등 모든 점에서 교과서인 것 같다.  

 

 

 

 

 

 

 

 

 

 

 

 

 

 

 

 

역시나 여성 작가들이지만 제인 오스틴과는 좀 다른 종류의(혹은 좀 떨어지는??) 재능의 소유자들. 그래도 우리는 이 두 소설을 아껴왔다. 헐, 앤 브론테가 번역된 건 지금 알았다.

 

 

 

 

 

 

 

 

 

 

 

 

 

 

 

 

그리고 19세기 문학, 혹은 소설사에서 빼놓으면 어딘가 미안한 작가, 찰스 디킨스. 살아생전에 그는 러시아 작가들에게도 모델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읽지 못한!) 그의 <픽윅(?) 클럽>은 도..키가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대표작인 <위대한 유산>은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고아소년 핍의 성장담, '젠틀맨-되기'의 드라마로 읽힌다. 귀국한 다음 30대 초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데이비드...>를 읽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19세기 영국 작가 중에 이런 자도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잊은 듯하다. 고등학교 때 읽은 <더버빌의 테스>를 쓴 토마스 하디인데, 언젠가 <주드>를 몇 장 읽다가 밀쳐둔 거 같다. 다시 보지는 못할 듯..ㅠ.ㅠ

 

 

 

 

 

 

 

 

 

 

 

 

 

 

 

그리고 요즘도 간혹 영화로 만드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연인)>과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아마 여고 시절 읽은 소설 중 최고로 야한 소설이었던 것 같다. 대학 들어온 뒤 <아들과 연인>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내친 김에 <무지개> 1권 읽고 유학간 듯.

 

 

 

 

 

 

 

 

 

 

 

 

 

 

 

 

20세기 영문학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과 함께 나에게 알려진 거 같다. 박인환의 저 유명한 <목마와 숙녀> 덕분인데, 그녀의 소설("등대로/세월", 이런 책이었다)을 찾아서 열심히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지루한 소설을 너는 중교등학 때 읽었니, 라며 한 선배가 놀라워했다. 요즘 그녀는 오히려 에세이(강연문) <자기만의 방>으로 더 유명한 거 같다.

 

 

 

 

 

 

 

 

 

 

 

 

 

 

 

 

본인은 영국(잉글랜드) 작가 아니고 아일랜드 작가라고 생각하려나. 아무튼 싫지만 읽지 않을 수 없는 제임스 조이스도 떠올려 본다. 대학시절 영작문 시간에 <더블린 사람들>에 들어간 단편들을 영어로 강독하곤 했다. <율리시스>는 여전히 완독 못 했는데, 영원히 그럴 거 같다..ㅠ.ㅠ

 

 

 

 

 

 

 

 

 

 

 

 

 

 

 

그밖에 어린 시절 동화(<행복한 왕자>)로 제일 먼저 알게 된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런 걸 고골의 <초상화>에 빗대어 보기도 했다. 이것도 영화로도 봤는데 헨리 경(?) 역을 중년의 콜린 퍼스가 잘 소화해냈다. 

 

 

 

 

 

 

 

 

 

 

 

 

 

 

 

 

왠지 느낌으론 20세기 작가인데, (지금 찾아보니-_-;;) 실은 19세기 작가에 스코틀랜드 출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보물섬> 등을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어릴 때 <지킬...>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 비교적 최근에 펭귄판으로 다시 봤는데 너무 시시해서 놀랐다 -_-;;

 

 

 

 

 

 

 

 

 

 

 

 

 

 

 

이런 고딕의 원조는 18세기 영문학인데, 그 대표자인 앤 래드클리프는 조신한(^^;;) 레이디였다. 유감스럽게도 국내에는 소개가 안 되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초기작을 연구하며 러시아어본으로 몇몇 소설을 읽고 탄복한 바 있다. /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아주 어릴(젊을) 때 쓴 작품. 여기서 잠깐 어릴 때 읽은 영국의 추리 소설도 떠올려 본다. 요즘 베네딕트 컴버비치가 열연 중인 <셜록>이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와 유관한지 모르겠다. (볼 시간이 없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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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편집자가 최근 영국을 다녀와, 사진을 투척해달라고 졸랐다. 아, 정말 따끈따끈한 사진이다! 흐리멍덩하고 꿉꿉해 보이는 날씨가 런던스럽다. 그 덕에 빨간 색이 돋보인다. 사진 속에 보이는 둥근 지붕의 건물이 세인트폴대성당, 저 다리가 밀레니엄 다리, 뭐 그런 모양이다. 원래 영국에 관심이 많지 않아, 지금 찾아보고 알았다. 실제 런던을 가면, 두 세 달 동안 내 시야를 어지럽힌, 젊은 날의 랄프 파인즈와 콜린 퍼스를 섞어 놓은 듯한 청년보다는 저런 노인들이 더 많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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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4월도 중순. 내 인생의 운이 바닥을 치다못해 바닥을 아주, 마구 뚫어버릴 것처럼 되는 일이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같은 것이 쓰이면 딱 좋겠는데, 나는 지금 지층 생활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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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신작 영화를 보지는 못했으나(못 볼 듯하다ㅠ.ㅠ) 어느 리뷰에서 이런 글귀가 읊어지는 장면이 있음을 알게(보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배우)를 앞에 두고 남자(감독)가 책의 한 구절을 읽어준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땐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선함과 약함의 분류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 소설은 수업 시간에는 잘 다루지 않으나 체호프의 단편 중 하나이다. 보다 더 대표작이고 교과서에 가까운 <상자 속 사나이(인간)>에 이어 '소(작은) 삼부작'으로 쓰인 소설 중 하나. 국내 번역본 중 하나는 아예 이 소설을 표제작으로 내걸었다. 표지 그림, 뜻밖에도(!) 추상화의 대가 칸딘스키가 그린 수채화이다.

 

 

 

 

 

 

 

 

 

 

 

 

 

 

사랑. 연애. 결혼. 쉽고도 어렵고, 또 어렵고도 쉽다. '개나 소나' 다 하는 것이면서(그야 짝짓기, 번식 이런 거니까 지렁이도 한다) 동시에 너무 고등한(!) 동물은 인간은 의외로 (잘) 하기 힘든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체호프의 저 아포리즘 같은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나 체호프의 재능은 실제 이야기를 써나갈 때 더 돋보인다. 아마 그가 쓴 최고의 연애소설, 즉 멜로는 이 작품이리라. 민음사 체호프 단편선에 실린 <공포>도 나름 재미있다.

 

 

 

 

 

 

 

 

 

 

 

 

 

 

 

이 소설은 수업 시간에도 많이 다루지만, 사랑-불륜에 대한 체호프 나름의 성찰이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체호프 나름의 화답이고, 중년에 바투 다가선 나이에 젊은 처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 작가 자신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하다. 소설에는 유부남으로 설정되었으나 그는 기실 미혼이었다. 이 소설이 상기된 것은 어젯밤에 (요즘 나쁜 버릇이 생겼고나 ㅠ.ㅠ) 또 영화를 본 탓이다.

 

 

 

 

 

 

 

 

 

 

 

 

 

 

 

다들 보셨겠지만, 소설도 꼭 한 번 읽어보도록 만드는 영화다. 막상 보니 '사랑-성장(늙음)'보다는 오히려 법과 정의, 죄와 벌의 문제에 더 천착한 듯도 싶었다. 작가가 법학자에 판사니까 더 그럴 듯. 한나와 마이클(미하엘?)의 사랑은 후자의 문제를 더 도드라게 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 그럼에도 이 부분 역시 무척 절절하고, 덧붙어 문맹(눈멂, 까막눈!)이 지니는 의미가 전체적인 주제와 너무 잘 어우러졌다.(결과적으로 "잘 몰라서"(무지) 행해진 범죄 역시 바로 그 '모름' 때문에 처벌받아야 마땅하다는 요지니까.) 나와 동갑인 케이트 윈슬렛의 훌륭한 연기로 표현된 한나의 고뇌(생계의 압박, 고독, 젊은-어린 연인에 대한 사랑과 질투, 열등감, 그럼에도 사랑 등)에 마음이 얼얼해졌다. 그럼에도 이건 독일이 배경이니까 독일 배우들이 연기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독일 특유의 거침, 척박함, 깊음, 이런 것들이 좀 더 부각되도록.

 

아무튼 이 영화에서 거의 뒷부분, 한 10년째(?) 감옥에서 책 낭독 테이프를 받아온 한나가 글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감옥 내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책의 이름. 바로 "The Lady with a Dog"였다. 자막 없이 알아듣는 둥 마는 둥 보다가(덕택에 재판 내용을 잘 접수 못함 -_-;;) 여기서 귀가 번쩍 뜨였다. 한나는 대출한 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글을 배운다.(처음 줄 친 단어는 the.) 그게 바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 ...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라는 소설이다. 그 다음, 유부남이자 소위 '선수'인 구로프와, 아이 없는, 아담한 체구의 유부녀 안나 사이에 연애가 전개된다.  

 

우리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 돈과 여자(남자). 즉, 돈이 아니라면 사랑이다. 물론 연구할 만한 주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가는 이광수, 염상섭, 이상이다. 이 세 작가는 각각 지사적 주체, 장인적 주체, 예술적(미적) 주체 등으로 정의되고 그들의 소설도 그 맥락에서 분석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상을 제외하면 대개가 장편인 실제 작품들에 대한 분석이다.) 앞부분에서 조금만 옮겨놓는다.   

 

이광수는 계몽적 계기를 민족주의와 이상주의라는 형식으로 실천했고, 염상섭은 현재에 대한 성찰의  방식으로, 또 이상은 투철한 예술가 의식으로 구현해 냈다. 이광수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적 글쓰기가 어떻게 민족적 주체의 보존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 곧 정당성의 문제고, 염상섭에게 중요한 것은 글쓰기를 통해 포착되는 개인의 진정성이며, 이상의 경우는 미학적 모토로서의 새로움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척도가 된다.” (28-29)

 

<무정>, <삼대>, <날개>(요것만 짧고나)만 읽어 봐도 세 작가의 사랑 묘사법이 그들의 개성만큼이나 또렷이 구분된다. 5월에는 <무정>을 꼭 완독하도록 한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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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노파 분장을 해 놔도 영롱한 눈동자가 아직 노년은 멀었음을 보여준다. "너, 다 컸구나..." 여기서 손 좀 더 오래, 정성껏 잡아주지..ㅠ.ㅠ 랄프 파인즈의 매몰찬(내적으로야 복잡하겠지만) 표정과 어투, 한 대 때려주고 싶더라.ㅋ  

 

 

케이트 윈슬렛. 보통 <타이타닉>으로 기억하지만, 내가 본 그녀 주연의 첫 영화는 토마스 하디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주드>였다.

 

 

여배우  치고는 참 안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삼십대 이후부터 돋보이는 듯.  강단 있고 자존심 강하고 어딘가 이지적으로 보이는(실은 문맹인데!) 얼굴이 (역시나 편견인가!) 영국 배우 같다. 백인의 장신이라  파란색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  예쁘다. 남자 친구랑 같이 있으면 엄마 소리 듣고 미래의 변호사가 될 모범생 앞에서 문맹이라...ㅠ.ㅠ 애들도 다 읽는 메뉴판도 못 읽으니..ㅠ.ㅠ 나 역시 두 번의 호된 연애에서 비스므리한 경험을 (때론 역으로) 해본 터라 더 격하게 공감되었던 듯.  본의아니게(?) 스무살 연하를 사랑한 탓에 졸지에 늙은 연인이 되어버렸지만, 이 무렵엔 케이트 윈슬렛도 삼십대 중반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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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욕망의 음화(陰畫) - 로맨스의 고전:

에밀리 브론테(1818-1848),  <폭풍의 언덕>(1847)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소설인 <폭풍의 언덕>의 인기가 오늘날도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를 소설 시학의 관점에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34장짜리 소설에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먼저 록우드는 외지에서 온 관찰자이자 기록자이다. ‘유령이 출몰하는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의 음산한 분위기에 이끌린 그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자는 또 다른 화자인 넬리(엘렌: 딘 부인)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언쇼 집안(워더링 하이츠)과 린튼 집안(트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충직한 하녀로 살아온 만큼 두 집안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뿐더러 그들에 대한 애정도 갖고 있다. 두 화자 모두 성격과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인물이라기보다 이 소설에 사실성과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까워 보인다. 과연 어떤 이야기이기에 증인이 둘씩이나 필요했을까. 익히 알려졌듯,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은 그 연원이 깊다. 워더링 하이츠의 지주가 외지에서 데려온 까무잡잡한 소년은 주인나리의 사랑에 더하여 주인집 딸의 사랑까지 얻어낸다. 하지만 캐서린은 고민 끝에 에드거 린튼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히스클리피는 족적을 감춘다. 3년쯤 뒤에 귀향한 그는 캐서린의 출산과 사망을 계기로 오랜 세월 축적한 원한을 설욕하기 시작하는데, 자신에게 반한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와 야반도주하여 결혼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 인연의 고리는 자연스럽게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의 아들(린튼 히스클리프), 힌들리의 아들(헤어튼 언쇼), 캐서린과 에드거의 딸(캐시 린튼), 즉 다음 세대로 넘겨진다

 

대체로 <폭풍의 언덕>은 작품의 길이와 시간대에 비해 등장인물도 단출하고 사건의 규모 역시 소박하다. 인물들은 극도로 폐쇄된 공간에 유폐되어 있고 그들 모두를 엮어놓은 연애와 결혼의 사슬은 근친상간의 흔적기관처럼 보인다. 한배의 쌍둥이 같은 느낌을 주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사랑을 이루지지 못했음에도 세계문학의 어느 연인보다도 더 강렬한 정염의 화신이다. 나아가, 캐서린과 이사벨라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임에도 한 남자를 공유하는 형국이다. 소설의 후반부, 캐시와 린튼은 엄연한 사촌(고종사촌-외사촌)임에도 결혼한다. 린튼이 죽은 이후에 결혼하는 캐시와 헤어튼도 마찬가지로 사촌지간이다. 이들의 의사(擬似) 근친상간은 18세기 앤 래드클리프와 그 아류의 고딕소설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 친인척의 위계질서가 정립되지 않았고 사실상 근친임에도 상간하였던 신화시대를 연상시킨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는 인물들이 엄밀한 동기화 없이 수시로 요절하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요컨대 <폭풍의 언덕>은 건전한 중산층(신사-지주)의 생활과 모럴의 사실적인 기록을 지향한 19세기 중엽의 규범적인 소설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 작품이다. 때문에 천재작가가 쓴 놀라운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영국문학사의 위대한 전통의 맥락에서 보자면 일종의 변종이라는 평(리비스, <위대한 전통>)이 지배적인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일탈적인 측면이 곧 매력인데, 그 핵심이 워더링 하이츠의 육화인 히스클리프(그리고 캐서린)이다.

 

그는 이름도, 나이도, 출신도 분명치 않을뿐더러 검은 얼굴과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항상 악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고 실제로 모든 재앙의 원흉이 된다. 에드거의 청혼을 받고 천국에 가는 꿈을 꾼 캐서린이 넬리에게 하는 말을 보자.

 

천국은 내가 갈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야. 나는 지상으로 돌아오려고 가슴이 터질 만큼 울었어. 그러자 천사들이 몹시 화를 내며 나를 워더링 하이츠의 꼭대기에 있는 벌판 한복판에 내던졌어. 거기서 나는 기뻐서 울다가 잠이 깼지. 이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내 비밀을 설명해줄 거야. 나는 천국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에드거 린튼과 꼭 결혼할 필요도 없는 거지. () 그러나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133)

 

자상한 미남인데다가 많은 재산의 상속자인 에드거 린튼은 천국인 반면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옥이다. 여기서 갈등구도는 신분과 계급 중심, 즉 무척 단순하다. 그리고 히스클리프의 악마성은 이런 계급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다. 캐서린의 말대로 그는 세련된 데라고는 없고 교양도 없는 야만인”, “메마른 들판과 같은 인간”, 간단히, ‘문화-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야만의 상징이다. 그런 그가 자본의 생리와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우선 그는 아내가 죽은 다음 서서히 술과 노름에 빠져든 힌들리의 재산을 교묘하게 빼돌리고(그리고 죽도록 방치하거나 심지어 직접 죽이고)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통해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고, 끝으로, 자신의 병약한 아들을 캐시와 결혼시켜 두 집안의 영지를 모두 손에 넣는다. 이런 세속적인 승승장구, 즉 완료된 복수극은 캐서린을 향한 그의 열정이 거의 광기에 가까웠음을 상기한다면(그녀의 무덤을 맴돌며 관 뚜껑까지 여는 것은 고딕소설의 시간(屍姦)의 변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초라한 종말처럼 여겨진다.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이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했건만, 막상 만반의 준비가 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자 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538)

 

록우드의 평가대로 이토록 지루하고 음산한 얘기의 작가가 이십대의 처녀였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에밀리 브론테는 다른 자매들, 남동생과 함께 요크셔 지방을 거의 떠나지 않고 살았는데, 그녀의 소설은 그 못지않게 유명한 언니의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불쌍한 고아 소녀가 간난신고 끝에 손필드 저택의 어엿한 안주인이 된다는 내용의 행복한소설이다. 왜소한 체구와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야무진 제인 에어는 샬럿의 분신이며 이십대 처녀의 사랑과 흠모를 받는 사십대 홀아비 로체스터는 샬럿의 이상형이었을 법하다. 반면,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들은 에드거와 넬리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상식과는 거리가 먼, 폭풍우 치는 언덕과 히스 꽃 같은 존재이다. 그것의 육화인 히스클리프(캐서린)는 작가이기보다는 여자로 살아야 했던 19세기 여성 작가의 정신세계를 반영한 페르소나일 것이다.

 

사춘기 시절이나 중년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이나 <폭풍의 언덕>은 환상적인 소설이다. ,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음에도 여전히 아리송한 우리의 욕망과 인생의 깊은 속살, 그것을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이십대 여성 특유의 거칠고 날선 야성의 문체로 포착한 음화(陰畫)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폭풍우와 히스 꽃, 연인들의 포옹과 키스, 심지어 브론테 집안을 점령한 요절의 유전자(어머니도 단명했다)와 성화(聖畫) 같은 분위기의 초상화까지 합세하여 이 소설은 우리 청춘의 영원한 노스탤지어로 남을 것이다.

 

2015년 ??월 <책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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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본 줄리에트 비노쉬와 랄프 파인즈가 나온 영화. 그 무렵 비노쉬를 정말 좋아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그녀는 그녀를 좋아했던 만큼이나 정말 별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랄프 파인즈 역시, 인상은 강렬했지만, 뭔가 잘 맞지 않는. 그런데 이 배우는 영국배우임에도 영국인 아닌 역할이 더 잘 어울리는 건 또 뭔지. 왠지 열정, 악, 광기, 파멸 등은 (정말 편견이지만!!!) 영국과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녕 이럴 때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임을 망각한다^^;;

 

브론테 자매는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듯한데, 영화에서는 오히려 평범한 배우를 찾기 힘드니(^^;;) 제각기 미모가 돋는다. 이자벨 아자니가 에밀리, 그녀와 동갑인 이자벨 위페르가 앤(막내)의 역할을 맡았다. (샬럿을 맡은 배우를 잘 모르겠다.) 미모로는 누구도 따를 자 없었던 이자벨 아자니, 있는 듯 없는 듯('레이스 뜨는 여자 뽐므'!) 매력적인 이자벨 위페르를 보는 재미로 본 것 같다. (자막이 없었다오..ㅠ.ㅠ) 

 

 

 

- 나에게 요크셔는 '요크셔테리어'의 고향이 아니라 이 소설의 고향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다시 볼 수 있을까?) 그가 성장기를 보낸 곳이기도 해서, 한 번 뒤져봤다. 지금 읽으면 조금 더 감상에 젖을 수도 있을 법하지만,  대략 정신이 차려지는 것을 보니 워더링하이츠의 산들바람이었나 보다.^^;; 이와 맞물려 거의 모든 리비도가 아이에게로, 즉 아이의 띨빵함에 집중되어, 차라리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바람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것도 곧 정신 차려지겠지. 아이가 유치원에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나도 겸사겸사 시작했는데, 마흔 셋에 처음 배우는 남의 말, 정말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든다. 최고로 어렵다 -_-;;

 

- "아빠, 왜 똥강아지는 있는데 쉬강아지는 없어?"

 

얼마 전 아이가 엄청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이의 발달 지연이 얼마나 심각한지 여전히 오락가락하지만(만 6세가, 즉 검사의 그 날이 멀지 않고나 ㅠ.ㅠ) 저럴 때는 정말 멀쩡해 보인다. "혹시 엄마가 아이에게 너무 많은 성취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라는, 애 둘을 다 키워놓은 후배의 말이 계속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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