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에 나온 <잉.페.>를 보니 배우들의 모습이 새롭다.

 

 

유명한 무도회 장면. 깍아지른 것 같은 머리, 즉 옆머리를 다 치고 앞머리를 위로 다 올린 스타일, 그에게는 참 매력적이다. 무엇보다도 저 엄정한 자세와 날카롭되 열정적인 눈빛이 압권.

 

 

남편 몰래(실은 그 남편이 호텔-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차 안에서 밤 샜다, 불쌍한 제프리(콜린 퍼스), 연인과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카이로의 시장. 이 장면 너무 좋다!

"Shall we be all right?" "Yes." 좀 있다가 한 번 더 "Yes". 다시 잠시 뒤 "Absolutely." 이 대답 패턴은 모래 바람에 갇혔을 때 알마시의 답과 똑같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흑발보다(이건 [네번의 결혼식...]) 금발이 더 잘 어울리고, 특히 이 영화에서 다소 긴, 옅은 웨이브 진 금발 머리를 묶은 저 하얀 리본이 무척 예쁘다. 처음 그를 찾아왔을 때도 (목이 깊게 파인 흰 원피스와 함께) 저 리본을 하고 있다. 백인이라 이런 화이트 원피스, 화이트 재킷도 잘 소화되는 듯.

 

 

이건 <쉰들러 리스트>에서의 랄프 파인즈. 배우와 배역 사이의 찰떡 궁합.

 

이랬던 그가 최근 <비거 플래쉬>에서는 정녕 안타까운 모습이다.(<해리 포터>는 그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ㅋㅋㅋ) 사십대까지는 그래도 괜찮더니(<더 리더>) 오십을 넘으며 M자 형 탈모가 진행, 아, 정녕 없어지는 머리카락을 막을 길 없구나. 하지만 놀라운 건, 저렇게 허물어지고 망가진(?!) 모습으로 당당히 자신의 맡은 바 역을 수행하는 그 프로 정신이다. 그 때문인가, 헐렁한 뱃살을 마냥 드러내고 즐겁고 명랑하게 헐렁한 춤을 그의 모습이, 묘하게, 위안을 준다. 사실 오십대가 이 정도 몸이면 정말 관리가 잘 된 것이라는 사실이 또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체호프의 희곡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기분. 마치, 얼마 전 포착된 디카프리오의 '물총' 놀이 사진이 그렇듯, 어쩜 그리 행복해 보이냐. 위의 저 무도회 사진과 너무 대조적이다.

 

 

<올란도> 시절부터 진짜 4차원 배우로 여겨지던 틸다 스윈턴과 함께. 진짜 4차원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늙음이 별로 안 느껴지는 정말 특이한 배우다.

 

 

노년.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을 향해가는 속도가 만만치 않다. 벌써부터 내 인생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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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던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얘기를 쓴 기억이 있다. 그대로 밀고 가고 싶었으나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바빠서는 물론 아니고(사랑할 시간은 언제든지 있다! 그러게 사랑이다!) 아무래도 짝사랑이어서 그렇다. 모선배의 지당한 충고대로, 스무살도 아니고(그런데 요즘 스무살이 누가 이렇게 연애함?-_-;;) 짝사랑 얘기는 소설에나 쓰는 것이 좋을 법하다. 하지만 요즘 진짜 너무 바빠서(남의 소설 읽느라-_-;;) 직접 쓰지는 못하고 그런 소설을 몇 편 골라본다. 혹여, 기회가 되면 이런 주제로 강의를 해도 좋겠다 싶어 리스트 겸 만들어본다.

 

아무래도 연애소설의 정전은 젊은 괴테의 이 소설. 길이도 짧아 너무 좋다. 청춘, 낭만주의, 열정, 자살 등 모든 것이 '짧음'(찰나)과 무관하지 않다. 궁정식 사랑 이후 낭만적 사랑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격 불륜(?)은 아니나 이 소설 역시 짝지 있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사랑-불륜 문제를 환기한다.

 

 

 

 

 

 

 

 

 

 

 

 

 

 

 

이 문제를 좀 진지하게 파고 들면, 언제나 재독하고 싶은 두 편의 프랑스 소설. [적과 흑]은 연애 소설이지만 [보바리]는 차라리 연애(욕망)의 환멸을 다룬 소설이다. 사랑의 격정을 더 맛보고 싶으면 전자를, 그 냉소를 연구(!)하고 싶으면 후자를.

 

 

 

 

 

 

 

 

 

 

 

 

 

 

 

 

결혼은 사랑의 무덤, 임을 실감한 석달이었다. 내 추억 속의 멋진 연인이 지금 나와 한 집에 살고 있는 이 남자, 라는 사실이 수시로 상기되었다.(그러려고 노력했다.) 사랑과 결혼의 문제 역시 소설이 즐겨 다룬 것인데,  그 초입, 즉 연애-청혼-결혼(식)은 아무래도 제인 오스틴을 따라갈 자 없겠다.  

 

 

 

 

 

 

 

 

 

 

 

 

 

 

 

 

 

정녕 영국식 정원-공원처럼 가뿐하고 경쾌한  우리 삶의 한 단면(연애, 청혼 등)은 결혼'생활', 즉 일상에 직면하면 전혀 다른 울림을 낸다. 아무래도 최고의 가정소설이자 불륜소설이자 사회소설이자, 뭐, 그냥 최고의 소설인 <안나 카레니나>. 그토록 정숙하고 도덕적인 여인(안나)마저 무너뜨린 그 대단한 사랑, 하지만 그 사랑조차 무참히 짓밟는 것은  결국, 연인의 배신 따위도 아닌, 시간-일상의 저력이다. (여기에 출산이 반드시 개입되어야 한다. 아이 낳은 여자, 즉 '아줌마'는 연애를 함에 있어 여러 모로 너무 골치이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참담하다...

곁들어, 불륜 소설의 경우, 아저씨(유부남)-처녀의 연애가 아닌 아줌마(유부녀)-총각의 연애가 성사되려면 절대적으로 총각이 부지런해야 한다. 아줌마는, 아줌마라는 말 속에 이미 육아와 살림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 바쁘고 너무 정신없다.

 

 

 

 

 

 

 

 

 

 

 

 

이어지는 최고의 연애소설을 꼽으라면 <롤리타>이다. 이제는 불륜조차 사랑의 힘을 증명(?)하지 못하는 어느 지점, 대단히 지적인 작가 나보코프는 소아성애라는 파격적인 주제로 사랑의 소설을 쓴다. 예술가소설이든 연애소설이든 나보코프의 키워드는 '맹목'이다. 눈 멀지 않으면, 그 정도로 격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비교적 현대소설 중 연애소설을 꼽으라면 혹자는 하루키를 기억하겠으나 나는 쿤데라의 학구적이고 분석적인 소설이 좋다. 젊은 날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줄리에트 비노쉬의 열연이 두드러졌던 영화 <프라하의 봄>까지.

 

 

 

 

 

 

 

 

 

 

 

 

 

 

 

 

--

 

아마 더 많은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닥터 지바고>, 뭐 이런 것도 넣어야 할 듯도 하다.) 로맨스는 우리를 영원토록 흥분시키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연애 소설의 새로운 문법을 확립하기 힘들다.

 

 

 

 

 

 

 

 

 

 

 

 

 

 

 

 최근 겸사겸사, 없는 시간 쪼개서 토막토막 (다시) 본(보고 있는) 영화. 

젊은 날의 비노쉬는 물론 매력 있지만, 나는 그녀가 프랑스 영화에서 프랑스어로 말할 때 더 좋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도 좋다. 그녀의 이지적이고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 오히려 이 배역에는 잘 맞는 듯. 미모가 너무 돋는(특히 관능적이고 섹시한) 여배우가 맡았다면 영화가 좀 천박해졌을 법하다. 예전엔 그냥 지나쳤던 듯한데 콜린 퍼스(미스터 다~시!)도 새롭게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건 랄프 파인즈. 이 배우를 처음 본 건 <폭풍의 언덕>(비노쉬와 함께 나왔는데, 뭔가 부조화스러운 영화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다음, 다들 그렇겠지만, <쉰들러 리스트>의 아몬 괴트. 그리고 <잉.페.>인데, 그의 눈빛이 스크린을 뚫을 것 같다! 콜린 퍼스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저음의 대단히 딱딱하고 날카로운 영국식 영어 발음,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는 짧게 깎은 머리가 무척 잘 어울린다. 아마 그래서 히스클리프보다는 아만 괴트, 알마시 등의 모습이 더 매력있어 보이는지도.  겸사겸사, 알마시와 캐세런의 뒷부분 정사 장면 어디에서 <안나 카레니나>가 언급된다. 역시, 연애소설의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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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영어(미국 말 영어 말고 영국 말 영어)를 좀 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한 시절 대영제국이라 불린 이 나라의 말을 실제의 대화 상황에서 (아주 조금이지만-_-;;) 경험하는 느낌이 무척 새롭다. 지금껏 영어권 원어민과 대화를 나누어본 경험이 전무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음, 역시 이건 사람-개인의 문제인 것 같다... But i didn't mean it!

 

그래서, 끝으로, 영국의 연애소설 두 편을 꼽아본다. 둘 다 너무 로맨스라 소설사적 의미가 잘 찾아지지는 않지만(그래서 위에서 빠졌다), 어쨌거나 우리의 성장기부터 함께 해 온 사랑, 심지어 (여성작가들이 써서 그런지) 소녀들의 연인이다. 개인적으론 히스클리프 쪽이 미스터 로체스터보다는 더 끌렸던 듯.

 

 

 

 

 

 

 

 

 

 

 

 

 

 

 

 

 

애 잠든 뒤 (정말 간만이다!!!) 밤에 영화를 봤더니 하루 종일 졸린다. 빨리 정신 차려야하는데 짝사랑도 사랑인지라(웃어야 하나?!) 잘 차려지지 않는다. 어디서 스팸 전화라도 한 통 와주면 좋겠다 싶은 오후. 이 또한 지나가겠지.

 

 

이건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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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4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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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5 1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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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1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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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혁명의 시: <닥터 지바고> 

 

겨울방학이다. 지난 반년 동안 방치해둔 번역원고 파일을 연다. 겨울에 잘 어울리는 소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57: 이하, <지바고>)이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마뜩치 않은 구석이 많지만 독자의 눈으로 보면 역시 20세기 러시아, 즉 소련 소설 중 가장 사랑받을 만한 작품이다.

 

 

 

 

 

 

 

 

 

 

 

 

 

 

<지바고>는 시대적으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두 혁명(19172월 멘셰비키 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과 내란, 부분적으로 양차 세계 대전을 아우른다. 이 보편의 역사와 맞물려 유라, 토냐, 라라, 파샤 등 주인공들의 삶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의사가 된 유라, 즉 유리 지바고는 많은 시간을 시를 쓰는 데 할애한다. 그의 삶을 침범한 역사적 사건에는 대체로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한다. 사생활 역시 그러한데 아내(토냐)를 사랑함에도 빨간 마가목 열매’, 즉 라라를 그리워한다. 역사와 사랑의 딜레마 앞에 선 그는 스스로를 햄릿’, 정확히 햄릿 역을 맡은 연극배우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편, 라라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숭배해온 파샤(안치포프-스트렐니코프)와 결혼하지만 혁명과 내전 중에 거듭된 해후를 통해 지바고와 비극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된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파샤의 운명은 더 절절하다. 구시대의 악을 척결하기 위해 그토록 사랑한 가족까지 내팽개치고 혁명에 뛰어든 그는 이후 토사구팽의 논리에 따라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그의 자살, 특히 바르이키노의 하얀 눈밭을 물들인 붉은 피는 혁명(이상)과 정치(현실)의 양립불가능성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하나같이 선과 미의 육화인 젊은 그들옆을 맴도는 늙은변호사 코마로프스키는 봉건제의 악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악역이 아니다.

 

모스크바의 유대계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파스테르나크는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이자,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었다. 무엇보다도 타고난 귀족적 성품상 소련이 요구한 과격한 이분법적 세계관과는 잘 맞지 않았다. 동반자 작가인 그가 스탈린의 저 악명 높은 숙청을 면한 것은 조용한 광기’, 아니 광기의 조용함덕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지바고>가 소련도 아닌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되어 이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 냉전시대의 역학관계에 힘입어 물의를 일으킨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이 소설은 어쨌거나 문학사의 심판을 거쳐 살아남았다.

 

 

 

 

 

 

 

 

 

 

 

 

 

 

(최근에 나온 '사람들과 상황'은 두 단어가 어차피 다 복수니까 그냥 '사람과 정황(혹은, 상황)'으로 번역하는 편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덧붙여본다.)  

 

1988년을 전후한 언젠가, 두 동생이 잠든 늦은 밤에 <지바고>를 읽었다. 애지중지한 빨간색 라디오에서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 <지바고>(1965)에 삽입된 라라의 테마가 흘러나왔으리라. 지바고와 라라의 피난처처럼 쥐가 들끓는 단칸방에서 이런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문학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적 망명에 처해진 시인이 쓴 소설을 무명의 아줌마 소설가가 번역하고 있는 이 정황 역시 그렇지 않은가. 그러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  서울대동창회보: <나를 움직인 책 한 권>

 

 

쓰기는 저렇게 썼지만 죽을 맛이다. 정말 죽도록 하기 싫어서, 그런 느낌이 들 여유가 없도록 죽도록 달리고 있다. 대략 12월부터 다시 시작, 아이 없는 시간에 죽도록 매달려그래도 꽤 많이 왔다. 말하자면 1차 초고는 오래 전에 나왔고 지금 작업은 2차초고(즉, 어지간히 쓸 만한 초고)를 만드는 것. 올 겨울, 더 욕심 내면 1월까지 쫑~하고 봄-여름에 최종 작업 하는 것이 목표이다. 

--  흠, 이렇게 쓰고 보니 유치원생의 <방학계획표>(--_-;;;) 같은 느낌이 든다. 

- "일찍 자요 ~ 일찍 일어나요~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요~ 골고루 많이 먹어요~"  

 

다시금, 정말 죽도록 하기 싫다.  번역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제발 나에게 다른 일감을 달라.  앗, 다른 일감을 만드는 일 역시 내가 할 일. 계속 바쁘다고 하다 보면 정말 바쁜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바쁠 일이 뭐가 있나. 나는 바르이키노를 달리는, 썰매 끄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죄와 벌>에서 두들겨 맞는 늙은 암말에 가깝나?? -_-;;

"올해가 러시아 혁명 100주년 되는 해니 (<지바고> 번역을)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다", 라고 한 선배가 충고해주었지만, 얼마나 고색 창연한 이름인가, 혁명이라니.  '혁명'보다는 차라리 버락 오바마의 퇴임연설이 '사랑과 시'처럼 와닿는다. 미셸, 말리야, 사샤~^^;;

 

사족. 홍상수와 김민희. 애 키우는 아줌마로서야 , 또 건전한 상식과 윤리를 가져야 하는 사회인-생활인으로서야 '버럭~'이지만, 그저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사랑과 시(영화)'가 참 부럽구나.  신작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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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정신-머리 구조'의 괴상함에 자주 놀라곤 했다. 그들의 역사 중 제일 극적인 대목은 아무래도 제정 말기일 텐데, 최근에 검색어 순위에도 오른 괴승(요승) 라스푸친의 등장과 전횡이 특히 그랬다. 얄궂은 땡중 하나가 나타나 황실을 뒤흔들었다, 왕자의 혈우병을 고쳐주어 단번에 황후의 신뢰를 얻었다,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아 죽이는 데 애먹었다 등. 생김새가 어떠하였을까. 늙은 사진. 아, 너무 못생겼구나. 젊었을 때는 좀 나았겠지, 그래도 황후를 후린 사람인데. 웬걸, 정말 너무 아닌 얼굴이다, 슬프다 -_-;; 마흔 넘으면서 진정한 외모지상주의가 돼 버린 내 눈에 그는 이 점이 제일 도드라진다. 그러게, 러시아. 

 

 이런 식의 참칭의 연원은 물론 깊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가짜 드미트리, 보리스 고두노프 등)이 등장한 동란의 시대가 대표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정치소설'(정치팜플릿) [악령]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메커니즘도 이것. 굳이 말하자면,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가짜 드미트리'인 셈이고 그를 움직이는 진짜 수장은 '악령 스타브로긴'. 그러나 그 '스타브로긴'마저 꼭두각시라면? 그렇다면 그를 움직이는 더 근원적인 힘은 무엇? 여기서 소설을 한층 복잡해지고 '정치소설'이라는 장르와 결별, 더 높은 층위로 이월한다.

 

 

 

 

 

 

 

 

 

 

 

 

 

 

 

<악령>에서 포착된 테러-혁명의 씨앗은 20세기 러시아역사에서 실제로 실현된다. 이 소설 속 쉬삐굴린사태는 1860년대 트베리 시의 소요를 모델로 했다. 밀린 품삯을 받기 위해 도지사 앞에 몰려든 '선량한'(!) 노동자들을 도지사(폰 렘브케 - 그는 못 됐다기 보다는(이게 더 무섭다!!!) 그저 띨빵하고 한심한 지휘관의 상징이다)는 '폭도'로 몰아버린다. 여기서는 '발포'까지는 등장하지 않으나, 이런 것이 1905년, 1917년 혁명으로 이어졌으리라. 간만에 상기해본다. 

 

 

 

 

 

 

 

 

 

 

 

 

 

 

 

결국,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 어쨌거나 이건 남의 나라 얘기인지라 오랫동안 학적, 미학적 호기심을 갖고 읽어 왔다.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 라는 표현이 자주 들리는데, 역시나 이런 것이 떠오른다.

 

마트료쉬카는 피스가, 속의 갯수가 많을 수록, 또 그림이 스티커를 붙인 것이 아니라 장인이 손으로 직접 그린 것일 수록 비싸다. 이런 조잡한 것도 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까야(열어야) 바닥이 보이는 거냐.

 

  

남의 나라 얘기인 줄 알았던 일들이 지금, 여기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어 놀랍다.

또한, 과거 얘기인 줄 알았는데 바로 지금, 어제오늘내일 일어나고 있어서 놀랍다.

('과거'라 함은 내가 요즘 현대문학사를 읽고 정리하는 중이라서 그렇다.) 

 

도무지 초현실주의 국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같다. '기생수'와 그 기생수에 먹힌 숙주의 나라. 그런데 그 기생수가 정녕 무시무시한 생김새의 만화 속 기생수도 아닌, 뭐뭐뭐 같이 생긴 뭐뭐뭐, 라니, 헐헐. 

 

 

텔레비전 없이 산 지 20년 넘었다. 당연히 티브이 뉴스를 따로 챙겨본 적이 없다. 어제는 뉴스를 보려고 컴퓨터를 켰다. 따뜻한 방안에 앉아 있는 것이 미안할 수밖에. 마음만은 나도 애 데리고 가서 말하고 싶었다. "관악구에 사는 아줌마입니다~ 우리 공주님이 '하야'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등등. 그리고 내가 낸 세금 다시 내놔,~ 이런 말까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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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너무 궁하던 차, 어제 수업 직후에 은행에 돈 빌리러 갔다가 나의 우수했던(!) 신용 등급이 하락하여 5백만원도 빌릴 수 없음을 확인, 아연실색하였다. (작년에는 그 자리에서 천만원을 빌려주더니!) '수신'(이런 어려운 용어란?!)이 꾸준히 5백은 되어야 한다나. 아니, 그 5백이 안 되니, 돈을 빌리려는 것인데! (같은 이유로 그 유명한 '마이너스 통장'도 안 된다니!) 하지만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뭐, 오래 곱씹을 것도 없이, 그들이야말로 옳은 것이고, 나야말로 (거지임에 덧붙여) 등신임이 금방 깨달아진다. 그리고 나만 아는 '등신-스러움'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이 모든 것이 전부, 소설 때문이라는 점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빌어먹고 (날도 추워지니!) 얼어죽을' 소설이다. 폐가망신하기 위해 소설 쓰나 보다. 흥, 그래도 계속 쓸 테다. 안 쓰고 수가 있나. 시시콜콜, 이런 정황 역시 너무 소설적이다.

 

 

 

 

 

 

 

 

 

 

 

 

 

 

 

 

소설이 언제부터 '돈'을 문제 삼나. 단순히 가난(빈곤), 기아 등등이 아니라 '돈' 말이다. 아무래도 자본주의가 있어야하고 대도시가 있어야 하고 또한 돈의 희로애락을 다 보여주려면 장편이어야 한다. 역시 발자크. 그의 인생 자체가 '돈 있음(넘침)'과 '돈 없음'의 시소 놀이임을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으면 알 수 있다.

 

 

 

 

 

 

 

 

 

 

 

 

 

 

 

 

대놓고 '돈 타령'하지 않으나 쥘리앙 소렐이 꿈꾸었던 그 부르주아(그 이전엔 귀족이었을 터) 사회 역시 결국 돈에 기반한 것. <마담 보바리>는 예의 그 시니컬한 플로베르의 세계관이 반영된바, 돈(=신용카드 빚)으로 신세를 망치는, 19세기판 프랑스 파리판 '된장녀' 스토리로 읽을 수도 있을 정도다. 엠마가 사랑 때문에 망했다는 사람은 소설 대충 읽은 거다. 소설(특히 연애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이 미모(치장)이고 거기에는 엄청나게 돈이 든다. 엠마는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 위해 옷을 너무 많이 산다(맞춘다). 굳이 돈이 화두는 아니지만, 내친 김에 에밀 졸라도 떠오른다. <인간짐승>은 유감스럽게도 읽지는 않았으나, 너무나도 '졸라스러운' 제목이다.

 

 

 

 

 

 

 

 

 

 

 

 

 

 

 

 

돈에 대한 가장 건전한(-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관, 말하자면, 근검절약하는 중산층의 세계관의 모델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이 청혼(심지어 연애, 라고 하기도 뭣한!)과 결혼(심지어, 결혼식)의 과정, 즉 '짝짓기'로 이루어진 그녀의 소설에서 결혼 상대들의 재산, 재력은 무척 중요한 요건이다. 문제는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 이런 문제를 꺼림칙하거나 불편한 어떤 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이게 그들 인생의 제일 중요한 화두이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물론 걸작임에는 확실하지만!) 이 소설은, 개츠비가 데이지에 대해 말하듯, 돈 냄새를 풀풀 풍긴다. 그것이 거의 푸짐한 똥냄새처럼 느껴졌던 소설. 역시 미국소설답다는 느낌을 비교적 최근에도 받았다. 데이지를 얻기 위해 돈을 펑펑 써대며 연일 화려한 파티를 여는 개츠비, 정녕 위대하다.  

 

 

 

 

 

 

 

 

 

 

 

 

 

 

 

 

러시아의 문학의 경우, 귀족-지주 작가는 돈 냄새가 자욱한 소설을 쓴다, 당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외모와 매너와 재력 때문에) 열등감을 많이 느낀 투르게네프의 소설이 시종일관 온건한 사상과 세련된 서정주의로 가득 찬 것도 돈 많은 여지주의 외아들(?)이었던 그의 태생과 무관하지 않다. 한데, 그보다 더 부자였던 톨스토이는 훨씬 더 사실적인(!), 말하자면, 생활밀착형 소설을 쓴다. (언젠가 그와 돈 얘기를 했다.)

 

 

 

 

 

 

 

 

 

 

 

 

 

 

 

 

소위 세기말의 작가, 체호프는 어떤가. 사실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체호프 때문인데, 그에 관한 논문의 최종 교정본을 고치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해서이다. 

 

(...) 이런 시작에 걸맞게 다음날 치러진 결투(19)는 시종일관 희극적이다. 무엇보다도, 새벽 5, 결투의 참여자들이 모두 모였고 위치도 정해진 상황에서 계속 꾸물대자 먼저 입을 연 의사의 말이 압권이다

 

- Вам, вероятно, еще не успели сообщить моих условий. Каждая сторона платит мне по 15 рублей, а в случае смерти одного из противников оставшийся в живых платит все 30.”(444) 

아무래도 여러분에게 저의 조건을 아직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군요. 양측 모두 저에게 15루블씩 지불하고, 적수 중 한 쪽이 사망할 경우 살아남은 쪽이 30루블은 모두 지불한다, 입니다.”

 

심지어 이 말을 꺼낸 것도 굳이 돈 때문이 아니라, 사모일렌코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온 까닭인지, 관련자들에 대한 증오(“просто из ненависти, 444) 때문이다. 이런 정황까지 포함하여 결투에 입회한 의사가 소위 수임료를 언급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유례없는 일일 법하다.

 

<결투>의 주인공들은 정말 한심의 극치다. 고등백수, 한량인 라옙스키는 빚이 맨날 놀고 먹느라(카드, 술) 최소한 7백루블이나 되고 그의 사실상의 아내인 나제쥬다 역시 (보바리처럼!!) 옷을 너무 질러서 역시나 옷가게에 3백루블이나  빚을 졌다. 이곳, 카프카스의 터줏대감인 마음 좋은 의사(사모일렌코)는 사람들한테 돈을 너무 많이 빌려줘서 완전히 빈털털이인데다가, 더 가관인 건, 이놈한테 돈을 빌려주기 위해 저놈한테 꾸는 식으로 살아와서, 그 자신도 빚쟁이라는 것이다. 정말 너무 체호프적인 인물들이다!

 

 

 

 

   

 

 

 

 

 

 

 

 

 

 

체호프 주인공들의 이런, 뭐랄까, 어딘가 초월한 듯한 극도의 한심함은 희곡에서 더 도드라진다. 돈 얘기가 정말 많이 나오는데(특히 <벚꽃 동산>은 부동산이 처분되는 이야기니 더더욱), 인물들의 어린애 같은 울음과 또한 역시나 어린애 같은 웃음이 독자를 역시나 울게도, 또 웃게도 만든다. 한 반 세기전, 고골은 바로 이 돈(=속됨, 속물성, 비루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미쳐 죽었다.

 

 

 

 

 

 

 

 

 

 

 

 

 

 

 

 

소설 속 돈, 의 테마에서 절대 빼놓은 안 되는 작가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다.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은 돈(혹은 가난)에서 출발, 그 흐름을 타고 이어진다. 가난해서 사랑도 잃고, 돈으로 사랑을 사려고 하고, 돈 때문에 아비 죽이고. 오죽하면 연구서 제목까지 이렇게 빠질 정도이다. 

 

 

 

 

 

 

 

 

 

 

 

 

 

 

 

물론, 출발은 돈이었을지언정 그 기나긴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돈은 저 멀리 밀려나고 세상에는 오직 쓰는 나와 쓰이는 소설 밖에 없었을 터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런 걸작을 갖게 되지 않았나.

 

 

 

 

 

 

 

 

 

 

 

 

 

 

 

 

한데 우리 문학에서 돈은 어떤가. 아, 정녕 우리는 너무 굶주렸던 것인가. 도무지 돈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 불가능했던 듯하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소설은 이런 것들. 특히, '해학'의 작가로 알려진 김유정의 <소나기>(아내에게 매춘시키는), <땡볕>(뱃속에 사산한 아이를 가진 채 죽을 것이 예견되는 아내) 등은 다시 읽어도 그 가난과 무지의 무게 때문에 너무 충격이었다..ㅠ.ㅠ 항상 굶주렸던 어린 아이가 떡을 많이 먹어 죽는(?) 결말의 단편도, 나의 유년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어, 울컥, 했던 소설이다.  

 

 

 

 

 

 

 

 

 

 

 

 

 

 

 

아마 그 다음은 지난 시절, 노동자 소설 같은 걸 꼽을 수 있을 터. 그런데 어째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나. 고작해야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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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렇지 않나. 헬조선이라고는 하지만, 더 이상 돈-빈곤은 우리의 문학적, 소설적 화두가 아닌 시대가 됐다. 덕분에 소재-주제를 찾기 더 힘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으려나. 여하튼 다른 의제가 필요한 때다. 차라리 지진? -_-;;

 

언젠가 여동생이 말하더라. 돈이 있으니 싸울 일이 없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물론 일상의 소소한 불행, 다툼이야 끊이지 않지만, 오히려 돈 덕분에 그것이 쉽게 무마된다는 것. 돈이 있어 보니, 우리 성장기의 많은 불운이 거의 99프로 돈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겠더라고. 심지어 육체적인 부분, 가령 차 멀미를 많이 하는 것 역시도, 소화기 장애와 자동차에 익숙치 않음(당연히 자가용이 없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다녔고 여행도 다니지 않았으니)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현재, 부유한 인세생활자에서 거렁뱅이 시간강사로 전락하니,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어디에 나오는 대사대로, 세상이 거의 통째로 나를 멸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역시나 체호프식으로 희극 비스므리하게, 받는다. 아웅, 어디선가 돈벼락이 떨어져야 할 텐데, 과연 어디서? 그러게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 않나. [고래]에서도 어느 장면에서 지붕에서(??) 돈이 떨어졌는데, 읽으면서 너무 행복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꿈과 희망'을 주는 소설이 필요하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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