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눅 9:28-36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 측근들을 이끌고 산행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습관은 예수님에게 배웠나 봅니다. 예수님도 중요한 순간에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유대 지방으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핵심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눅9:28)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이 산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있는 헐몬 산이거나 아니면 갈릴리 지방에 있는 다볼 산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산이 어느 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특별한 장소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출24:12이하)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왕상19:8이하) 시내 산과 호렙 산은 같은 산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장광영 전 감독회장님도 산 기도를 하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하산하는 길에 꼽추를 만났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간절히 기도했더니 반듯하게 펴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성경에서의 산도 오늘날의 산도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기도원을 보십시오. 대부분 산에 있잖아요? 요즘도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나라가 이 만큼이라도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중요합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이 변화는 내면에서 시작된 외면의 변화였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원래의 모습인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하시자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고 말씀하고,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고 옷이 빛 같이 희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통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 올 때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의 얼굴도 해 같이 빛났습니다. 다니엘서 7장 9절을 통해 하나님의 옷은 눈 같이 희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의 옷도 빛 같이 희어졌습니다. 옥시크린으로 빨래를 한 것보다 더 희었습니다. (저도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는데 옷이 빛 같이 희었습니다.) 그러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눅9:30) 여러분,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말씀했는데 그 선지자는 메시야입니다. 모세는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했고 그 메시야는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께서 묻어 주셨으나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신34:6)/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말라기 4장 5절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예언됐습니다. 그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엘리야는 또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승천한 인물이지만 이들 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과 함께 대화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중요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눅9:31) 여기서 ‘별세하다.’는 ‘떠난다.’는 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떠난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모세와 예수님이 다른 점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구원했지만 예수님은 열방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능가하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는 깊이 졸다가 아이가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듯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에 끼어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제안했습니다.(눅9:33)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장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을 짓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했듯이,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베드로와 엘리야가 나타나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기념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광이 있기 전에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간과했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전에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자기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고 합니다. 밥상은 차리려 하지 않고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헌신은 하지 않고 축복을 받으려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기초공사가 부실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는 영광은 반석위에 지은 집처럼 기초공사가 튼튼해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습니다. 진도 7의 강진에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성장 통입니다. 과정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 고난을 이기면 나중에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겁니다. 지금은 아주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질 겁니다.

하나님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출13;21),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도 구름으로 가득하게 임하셨습니다.(왕상8:10)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 호렙 산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듯이,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눅9:35)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예수님이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그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했던 모세와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한 엘리야와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조연이라면 예수님은 주연이고, 모세와 엘리야가 전령이라면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분을 알려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들으라.’는 듣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3장 22절을 통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고 신분만 알려주셨는데 9장 35절을 통해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고 신분도 알려주시고 순종도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 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은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하와는 뱀의 말을 들었고 아담은 하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피조물의 말을 들었기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구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게 되고 인생도 성공할 겁니다. 우리는 들어야 할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눅 4:1-13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가지 유혹을 받게 됩니다. 10-20대에는 젊다보니 이성에 관심을 가집니다.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30-40대는 필요가 많아지다 보니 물질이 아쉬워집니다. 아이도 학원에 보내야 하고 집도 장만해야 하고 수입의 한도 내에서 효과적으로 지출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50-60대는 생활이 안정되다 보니 명예를 얻는 데로 눈을 돌립니다. 은퇴를 준비하면서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봉사하는 게 현명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이성과 물질과 명예라는 유혹을 받는데 사람에 따라 이 유혹들이 하나씩 순차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섞여서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유혹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게 색칠할 수도 있고 지저분하게 덧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만 이런 유혹을 받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도 여러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겪는 시험이라면 어떻게 헤쳐 나갈지 두렵지만 예수님이 이겨내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언제 시험을 받으셨을까요?

시험은 좋을 때 찾아온다.
예수님은 좋을 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눅3:22)이라는 공인을 받고 성령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시험은 어려울 때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좋을 때 찾아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잘 나갈 때가 시험을 받기 쉬운 때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기 위한 연단(Test)이었다면, 마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한 유혹(Temptation)이었습니다. 시험은 우리를 튼튼하게 단련시키는 연단이기도 하고, 우리를 한순간에 좌절시키려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극복하면 연단이 되지만 좌절하면 유혹이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시험을 받으셨을까요?

첫 번째 유혹
예수님은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자그마치 40일 동안이나 금식하면서 시험을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목마르고 얼마나 배고프셨겠습니까? 아마 몸 안에 있는 모든 수분이 빠져나가 입술은 마르다 못해 갈라졌을 겁니다. 눈에는 오아시스가 아른거리고 코는 음식냄새를 맡으려 킁킁거릴 겁니다. 저도 사흘을 금식하니 저 멀리서 밥 짓는 냄새가 구스하게 풍겨오더라고요. 이때 마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금방 시험에 넘어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마귀는 선심을 쓰는 척 제안했습니다.(눅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가정했습니다. 달리 번역하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라는 인정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돌로 떡 다른 말로 하면 빵이나 밥을 만들어 굶주림을 면하라’고 유혹했습니다. 돌로 밥을 만드는 게 무슨 유혹이 되겠나 싶지만 예수님은 지금 금식하시는 중이라 밥을 만들라는 것은 유혹이 됩니다.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은 밥을 만들라는 경제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돌로 밥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로 밥을 만들어 먹는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자신의 육체적인 필요를 채우는데 사용하게 됩니다. 마귀는 먹고 사는 문제로 예수님을 유혹했듯이 우리에게도 돈을 줄 테니 죄를 저지르라고 유혹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라고 유혹합니다. 공금을 횡령하라고 유혹합니다. 돈을 착복하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여러분에게도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타이르셨습니다.(눅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시며 먹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마귀는 흠칫 놀랐습니다. 마귀는 돈으로 유혹하면 금방 넘어 갈 것이라고 자신했는데 예수님은 끄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면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돈을 섬긴다면 하나님이 돈으로 인해 망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이 필요한 돈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유랑할 때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었을 때 까마귀를 통해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두 번째 유혹
예수님이 끄떡도 하지 않자 마귀가 다른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귀가 달콤하게 속삭였습니다.(눅4:6)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마귀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2장 53절을 통해 지금은 마귀의 때요 어둠의 권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세상을 다스리게 될 거지만(빌2:9-11) 지금 눈 딱 감고 마귀에게 절한다면 천하를 지금 얻을 수 있습니다.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은 권력을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이었습니다. 마귀는 높아지라고 예수님을 유혹했듯이 우리에게도 감투를 줄 테니 신앙을 팔아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신앙을 타협하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여러분에게도 신앙을 감추라고 유혹합니다. 신앙생활하지 않는 척 하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응수하셨습니다.(눅4:8)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3절을 인용하시며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마귀는 명예를 주겠다면 솔깃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자신을 높이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상석에 앉았다가 주인이 말석에 앉으라면 무안을 당하지만 말석에 앉았다가 주인이 상석에 앉으라면 으쓱해지잖아요? 우리가 자신을 높이면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가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자신을 낮추십시오.

세 번째 유혹
예수님이 미동도 하지 않자 마귀가 히든카드를 꺼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저 아래가 까마득하게 보였습니다. 마귀가 비아냥거렸습니다.(눅4:9-1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마귀는 번지점프를 알았나 봅니다. 마귀는 번지 점프를 하면 밧줄을 몸에 감았기 때문에 아래로 뛰어내려도 바닥에 부딪치지 않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인기를 얻으라는 사회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열광할 겁니다. 왕으로 삼으려 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광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 고난을 당하시러 오셨습니다. 마귀는 인기를 얻으라고 예수님을 유혹했듯이 우리에게도 튀는 행동을 하라고 유혹합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사회적인 질서도 무너뜨리라고 부추깁니다. 인기는 돈보다 권력보다 한 차원 높습니다. 인기를 얻으면 CF를 찍어 돈도 벌 수 있고 유명해지면 정치인이 되어 권력도 얻을 수 있습니다. 마귀는 여러분에게도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꾸짖으셨습니다.(눅4:1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하시며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마귀는 그만 다운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스타를 만들어 준다면 굴복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너무도 초연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안달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사람이 만든 인기는 안개처럼 덧없이 사라지지만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인기는 영원토록 기억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시험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험에 탈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광야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이성과 물질과 명예라는 시험을 만납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쓰러뜨리려 하고 예수님은 신앙의 결승선을 통과하라고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를 이겨내기 힘겹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손쉽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쳤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면 가능해 집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주 수요일부터 40일 성경 파노라마를 시작합니다. 설교가 성경을 현미경으로 보듯이 부분적으로 보여준다면 성경 파노라마는 망원경으로 보듯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전체를 알면 부분도 더 잘 보입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유혹으로 신앙생활하기 힘든 때입니다. 운동선수는 슬럼프에 빠지면 기본기부터 다시 훈련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신앙의 슬럼프를 성경을 공부하는 것으로 극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마귀를 물리치는 필승전략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으로 무장합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눅 9:28-36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 측근들을 이끌고 산행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습관은 예수님에게 배웠나 봅니다. 예수님도 중요한 순간에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유대 지방으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핵심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눅9:28)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이 산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있는 헐몬 산이거나 아니면 갈릴리 지방에 있는 다볼 산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산이 어느 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특별한 장소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출24:12이하)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왕상19:8이하) 시내 산과 호렙 산은 같은 산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장광영 전 감독회장님도 산 기도를 하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하산하는 길에 꼽추를 만났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간절히 기도했더니 반듯하게 펴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성경에서의 산도 오늘날의 산도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기도원을 보십시오. 대부분 산에 있잖아요? 요즘도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나라가 이 만큼이라도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중요합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이 변화는 내면에서 시작된 외면의 변화였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원래의 모습인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하시자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고 말씀하고,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고 옷이 빛 같이 희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통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 올 때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의 얼굴도 해 같이 빛났습니다. 다니엘서 7장 9절을 통해 하나님의 옷은 눈 같이 희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의 옷도 빛 같이 희어졌습니다. 옥시크린으로 빨래를 한 것보다 더 희었습니다. (저도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는데 옷이 빛 같이 희었습니다.) 그러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눅9:30) 여러분,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말씀했는데 그 선지자는 메시야입니다. 모세는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했고 그 메시야는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께서 묻어 주셨으나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신34:6)/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말라기 4장 5절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예언됐습니다. 그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엘리야는 또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승천한 인물이지만 이들 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과 함께 대화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중요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눅9:31) 여기서 ‘별세하다.’는 ‘떠난다.’는 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떠난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구원했지만 예수님은 열방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능가하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는 깊이 졸다가 아이가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듯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에 끼어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제안했습니다.(눅9:33)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장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을 짓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했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기념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광이 있기 전에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간과했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전에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자기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고 합니다. 밥상은 차리려 하지 않고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헌신은 하지 않고 축복을 받으려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기초공사가 부실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릅니다. 고난이 있는 영광은 반석위에 지은 집처럼 기초공사가 튼튼해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습니다. 진도 7의 강진에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성장 통입니다. 과정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 고난을 이기면 나중에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겁니다. 지금은 아주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질 겁니다.

하나님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출13;21),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도 구름으로 가득하게 임하셨습니다.(왕상8:10)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 호렙 산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듯이,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눅9:35)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예수님이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그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했던 모세와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한 엘리야와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조연이라면 예수님은 주연이고, 모세와 엘리야가 전령이라면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분을 알려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들으라.’는 듣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3장 22절을 통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고 신분만 알려주셨는데 9장 35절을 통해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고 신분도 알려주시고 순종도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 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심판을 하십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들었고 아담은 하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피조물의 말을 들었기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도 성공하고 인생도 성공할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눅 5:1-11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는 4명의 성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석가모니, 공자, 예수, 마호메트를 4대 성인이라고 말하고,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를 4대 성인이라고 말합니다. 4대 성인은 동양에서 먼저 정했는데 서양에서 마호메트를 빼고 소크라테스를 넣고 이것이 맞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마호메트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성인으로 인정합니다. 아무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른 성인들과 동격으로 이해합니다. 오늘날은 종교다원주의의 영향으로 모든 종교는 똑같은 종교지 우월한 종교가 없다고 단정합니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여겼다.
베드로는 갈릴리 지방 가버나움 마을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마을을 선교의 베이스캠프로 삼으셨기 때문에 베드로와는 접촉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날은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으면서 시작됐습니다.(눅4:38) 그 당시는 말라리아에 감염돼 열병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열병이라는 단어는 불이라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습니다. 말라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흔한 질환으로 열병이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버나움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해열제를 처방하신 게 아니라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떠났습니다.(눅4:39) 베드로의 장모는 곧바로 원기를 회복하고 예수님에게 수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 35절을 통해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셨고 4장 39절을 통해 말씀 한 마디로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장모님의 열병이 낫는 기적을 목격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분을 파악하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 나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그날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으면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지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면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오늘은 허탕을 쳤지만 내일을 위해 그물을 손질했습니다. 그물에 묻은 수초를 떼어 주고 돌에 찢긴 그물을 기웠습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몰려왔고 예수님은 해안가로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고 아침에는 그물을 손질하느라 피곤했지만 예수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었습니다. 그 당시 어선은 길이가 4-6미터 정도 됐고 어부 4명이 탔는데 중앙에는 돛이 있어 바람이 불면 돛으로 움직였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육지에서 배를 떼라고 했는가 하면 갈릴리 호수는 지표면 보다 200미터가 낮았고 주변에 언덕이 병풍처럼 쳐져있어 말씀을 전하면 멀리서도 잘 들렸습니다. 베드로는 눈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는지 꼬박꼬박 졸면서도 자리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지시하셨습니다.(눅5:4)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밤새 고기를 잡고 온 어부에게 배를 빌려 달라고 하시더니 이제 집에 가서 아침 먹고 눈 좀 붙이려 했는데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베드로는 기분이 상했습니다. 예수님은 탁자를 만드는데 전문가였고 베드로는 고기를 잡는데 전문가였습니다. 목수가 어부에게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니 주제가 넘어도 보통 넘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코칭도 엉뚱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고기는 밤이 되면 물가로 나와 신나게 놀았습니다. 어부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저인망 그물을 던졌습니다. 저인망 그물은 한쪽에는 추가 달려 있어 아래로 가라앉았고 다른 한쪽에는 코르크가 달려 있어 물위에 떴습니다. 어부들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그물을 던져서 원을 그리며 그물을 모아 아래쪽과 위쪽의 끈을 잡아당겼습니다. 고기들은 그물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서 고기들이 쉬려고 강 아래로 깊이 숨었습니다. 지금 그물을 던져봐야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게 뻔했습니다. 베드로의 동료들은 인상을 찌푸렸고 베드로도 잠깐 망설였습니다. 베드로는 어차피 자는 시간도 놓쳤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결심했습니다.(눅5:5)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 이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존경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예수님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전후좌우를 재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따르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게 어디 이성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나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존 웨슬리도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있는 신도회에 나갔는데 윌리엄 홀랜드가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처럼 베드로와 동료들도 힘겹게 노를 저어가 길이가 90미터 정도 되는 그물을 던지기가 무섭게 고기들이 걸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보통 때라면 고기들이 수면 아래에서 쉬고 있어야 하는데 이날따라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보통 때라면 그물을 피하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데 이날따라 그물에 걸리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많이 걸렸는지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고 베드로와 동료들이 끌어당길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육지에서 구경하고 있는 다른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동료들은 힘차게 그물을 끌어당겼고 고기는 두 배가 잠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잡혔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은 이래 이렇게 많이 잡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동료들은 기뻐했지만 베드로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을 다시 주목해 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도저히 고기를 잡을 수 없는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고 저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환상 중에 부르시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워집니다. 중세시대 때 성당을 크게 짓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위엄 앞에 인간을 굴복종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베드로는 장모님의 열병이 낫는 기적을 목격하고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한낮에 두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고는 고꾸라졌습니다. 인간은 버티어봤자 하나님께 항복하게 되는데 더 고집을 피운다면 채찍을 맞게 됩니다. 베드로는 맞기 전에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안심시키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눅5:10)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조금 전에 엄청난 고기를 잡았는데 이제부터는 엄청난 사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잡은 고기는 베드로가 구원할 사람들을 암시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기를 많이 잡아 처자식을 배불리 먹이는 게 인생의 목표였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님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 다시 말해 그 많은 고기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적 가치는 작아지고 신앙적 가치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 누군가의 인도로 교회를 나왔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어린아이가 젖을 먹듯이 보살핌을 받지만 어린이로 커가면서 밥을 먹듯이 스스로 신앙 생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신앙이 자라면 어른이 되듯이 교회를 처음 나온 교인들을 보살펴주게 됩니다. 사람이 자라듯이 신앙도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성장할 뿐만 아니라 성숙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했다고 베드로처럼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에만 부르십니다. 그것보다도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르게 산다면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듯이 다른 사람들을 주님 품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됩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눅 4:16-30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자기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전과 오늘날의 예배당과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세 번씩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 절기(명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소나 양을 제물로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은 짐승을 제물로 잡아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어요. 그러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면서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었고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나라는 멸망했지만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회당을 세웠고, 회당에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랍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헤롯 대왕이 증축한 성전이 하나 있었고 마을마다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1년에 세 번씩 방문하여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성전이 라기 보다는 매주 모여서 예배드리는 회당에 가깝습니다. 성전과 회당과는 규모가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한 반열(그룹)에 천 명으로 이루어진 제사장들 24개 반열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2만 4천 명이나 있었어요. 제사장들은 1년에 두 차례씩 일주일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1년에 14일을 근무하였죠. 마을 회당에는 회당장 한 사람이 사환 한두 사람을 데리고 관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인원이 많다보니 제사를 직접 주관했지만 회당장은 인원이 적다보니 랍비를 초청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요청받으셨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나사렛 마을에서 목수로 사시다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요한에게 찾아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인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님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게 악을 행하게 만들기 위한 유혹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순종하셨고 마귀는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갈릴리 지방을 돌아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세가 있었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마7:29)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칭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는 고향인 나사렛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회당장이 예수님에게 성경을 읽고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서서 두루마리 성경을 한 손으로는 말고 한 손으로는 펴면서 이사야서 61장 1절과 58장 6절을 찾아서 읽으셨습니다.(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은 50년 마다 희년이 됐는데, 희년이 되면 모든 부채가 탕감되었고, 남에게 팔았던 재산이 원 주인이나 후손에게 돌려졌고, 이스라엘 노예들은 자유민으로 해방되었습니다. 희년은 회복의 해였습니다. 희년이 회복의 해였듯이, 성령님이 임하시면 가난하고 눈멀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이 자유와 구원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령님은 회복의 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두루마리를 말고 앉아서 말씀하셨습니다.(눅4:21)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메시야가 오셨다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하셨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원래 희년이 되면 부채가 탕감되고 재산이 후손에게 돌려지고 노예가 자유민으로 회복되듯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로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귀환하고 나서 메시야가 오시면 가난하고 눈멀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에게 응했다 다시 말해 지금 메시야가 오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가르침을 듣고 놀라워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은혜롭고 능력 있었지만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라 자기 마을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고 폄하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가르침을 거부하자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인용하셨습니다.(눅4:23) 의사가 병을 고쳐주겠다고 하자 환자가 당신의 병이나 고치시오 라고 핀잔하듯이 고향 사람들은 지금 메시야가 오셨다고 말씀하시자 예수님에게 당신은 선지자가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잖소 라고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고.’ 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눅4:24)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선입관을 가져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우(遇)를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도 그 사람을 너무 잘 알다보면 그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들립니다. 그 사람이 나와 사이가 좋다면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롭게 들리겠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의 단점이 생각나 그의 메시지는 위선자의 메아리로 들립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에 담긴 보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고후 4:9) 사람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보배처럼 귀중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볼 것이 아니라 보배처럼 귀중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영혼이 삽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사례를 언급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살던 당시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큰 흉년이 들어 수많은 과부들이 굶주렸지만 이방인 지역인 시돈 땅에 사는 사렙다 과부 한 사람만이 밀가루 통에 가루에 떨어지지 않고 올리브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눅4:25-26) 엘리사 선지자가 살던 당시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이방인인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 한 사람만이 어린아이 피부처럼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눅4:27-28)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만 구원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구원받았다고 자신했는데 예수님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시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과격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만 구원받았다는 ‘내가 복음’에 빠져 남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도 이렇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남이야 죽든 말든 나면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생각에 빠진 요나 선지자에게 박 넝쿨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니느웨 성읍을 멸망하시자 않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에게 박 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셨다가 시들게 하셨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뜨겁다고 불평하자 하나님은 네가 하룻밤에 낫다가 말라버린 이 박 넝쿨조차 아꼈는데 하물며 하나님인 내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큰 성읍 니느웨 백성들과 수많은 가축들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도 구원받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착한 사람도 구원받고 악한 사람도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은 구원 받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지만 아버지는 저 사람도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아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열차에 동승시켜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