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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29:19-21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예전에 사극을 봤는데 이런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병상에 계신 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맵니다. 아들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어머니의 입속에 떨어뜨립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신음소리를 내며 의식을 회복합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아들의 피 한두 방울로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가 살아날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피를 생명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성경도 피를 생명으로 여겼습니다. 성경은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피를 신성시하였습니다.(레17:11)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피를 나눠 마시면 의형제가 되고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에게 먹여주면 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피를 먹어서는 안 되고 제단에 뿌리거나 몸에 발라야 했습니다.

제단에 뿌리는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속죄 제물로 가져 왔습니다. 제사장은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짐승을 잡아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뿌리고, 향단 뿔들에 바르고, 나머지를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의 피를 뿌려 죄를 용서받고 또 죄를 짓고를 반복했습니다. 몸에 바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사장을 임명할 때는 피를 몸에 발랐습니다.(레14:14) 19-20절을 봉독합니다. “너는 다른 숫양을 택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지며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것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 아멘! 하나님은 제사장을 임명할 때 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가져와 송아지는 속죄제로 드리고 숫양 한 마리는 번제로 드리고 다른 숫양은 머리에 안수하여 그 사람의 죄를 숫양에게 전가시키고 나서 숫양을 잡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레위 지파 아론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통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이 되려면 숫양이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듯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기 위해 어린 양되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숫양의 피를 오른쪽 귓불과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발랐습니다. 피를 오른쪽 귓불에 바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 17절을 통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4-5절을 통해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유혹했습니다. 하와는 뱀의 꾐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어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기쁨을 상실하게 됩니다. 에덴에서 추방되고 나서 하와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는 심판을 받았고 아담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마귀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라고 속삭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마귀의 말을 듣는다면 마귀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27절을 통해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귓불에 양의 피를 발랐듯이 우리도 귓불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오른쪽 귓불에 예수님의 피를 바르는 퍼포먼스를 합시다. 십자가에서 피를 찍어다 오른쪽 귓불에 바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습니다. 피를 엄지손가락에 바르는 이유는 하나님과 동역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37-38절을 통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추수할 일꾼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눈에 띄는 게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봉사할 일입니다. 찬양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 사람이 찬양인도를 하면 됩니다. 어린 영혼들이 소중해 보인다면 교회학교 교사를 자청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초청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역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냥 따라 다니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제자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무리보다는 제자에게 더 큰 상급을 주실 겁니다. 제사장이 엄지손가락에 양의 피를 발랐듯이 우리도 엄지손가락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야 예수님과 동역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찍어다 엄지손가락에 바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동역할 수 있습니다. 피를 엄지발가락에 바르는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6절을 통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을 통해 내가 너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고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는 여기까지 도우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고(삼상7:12), 현재에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고(마1:23), 미래에는 우리의 길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창22:14) 제사장이 엄지발가락에 양의 피를 발랐듯이 우리도 엄지발가락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찍어다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귓불과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숫양의 피를 바르고 나서 피와 관유를 옷에 뿌렸습니다. 여기서 숫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이고, 관유는 깨끗한 기름인데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말씀합니다. 제사장이 피를 옷에 뿌렸듯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도 예수님의 보혈을 옷에 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씻고 우리를 지켜줍니다. 제사장이 관유를 옷에 뿌렸듯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기름 부으심은 ‘어노인팅’입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이고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 인데 둘 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듯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내적인 기름 부으심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기름 부으심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찬양을 올려드리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외적인 기름 부으심입니다. 내적인 기름 부으심은 반드시 필요하고 외적인 기름 부으심은 덤으로 필요합니다. 내적이고 외적인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귓불에 발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 엄지손가락에 발라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우리 엄지발가락에 발라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피와 관유를 옷에 뿌리듯이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반대말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연말이 되면 분위기에 휩쓸려 죄를 짓는 경우가 많은데 죄를 지으면 기쁨을 상실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여 죄와 타협하지 않고 거룩하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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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17:11 보혈의 능력

삼국지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백마와 흑우의 피를 섞어서 나누어 마시고 향을 피우고 천제를 지내고 의형제를 맺습니다. 동양에서는 피를 나눠 마시면 형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 말씀할까요? 하나님의 말씀 레위기 17장 1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아멘! 성경은 피를 신성시합니다. 성경은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피를 신성시합니다.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성경은 새나 짐승이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고 말씀합니다.(레7:26) 동양에서는 피를 나눠 마시면 형제가 되지만 성경에서는 피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합니다.(레7:27) 여러분은 피가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하더라도 먹지 마십시오.

성경에서는 피를 마시면 안 되고 제단에 뿌려야 합니다. 피를 제단에 뿌리면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속죄 제물로 가져 왔습니다. 제사장은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짐승을 잡아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뿌리고 향단 뿔들에 바르고 나머지를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짐승의 피를 뿌려 죄를 용서받고 또 다시 죄를 짓고 짐승의 피를 뿌리고를 반복했습니다.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었고 반복적이었습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죄를 짓고 짐승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면 동물애호가들은 교회를 폭발시키려할 것이고 교인들은 죄를 큰 마대자루에 담아놨다가 한꺼번에 용서받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을 예수님이 해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12절을 통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 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짐승의 피는 그 죄만 용서하는 일시적인 피였지만 예수님의 피는 영원히 죄를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습니다./ 짐승의 피는 죄를 씻고 용서하고를 반복하는 피였지만 예수님의 피는 단번에 죄를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할부처럼 여러 차례로 나눠서가 아니라 일시불처럼 단번에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죄를 씻는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짐승의 피도 속죄의 능력이 있는데 예수님의 피는 얼마나 속죄의 능력이 크겠습니까?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13-14절을 통해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짐승의 피로도 우리 죄를 정결하게 씻었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피로는 우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씻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죄가 있다면 주저하시 마시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용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2절을 통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씻어줍니다. 여러분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됩니다.(사1:18) 여러분의 죄가 깨끗하게 씻깁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죄를 씻는 능력도 있고 우리를 보호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출애굽기 12장 1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여 년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국무총리인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이민을 갔지만 요셉을 모르는 다른 왕조가 들어서면서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가 너무 힘겨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바로는 터무니없다고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는 9번째 재앙까지는 버텼지만 10번째 재앙을 당하자 무릎을 꿇었습니다. 10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람의 장자는 물론이고 짐승의 첫 새끼도 죽는 재앙이었습니다.(출11: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흠 없고 일 년 된 숫양이나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불에 구워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자를 보내서 장자를 치실 때에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묻어 있으면 그 집을 넘어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유월절을 영어로 Passover라고 하는데 Pass over는 '넘어가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다가 피가 묻은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짐승의 피도 보호의 능력이 있는데 예수님의 피는 얼마나 보호의 능력이 크겠습니까? 하나님은 요한일서 5장 18절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지켜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보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편 121편 5-6절을 통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이라 낮의 해도 사람을 상하게 하며 밤의 달도 사람을 해롭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늘이 되셔서 몸에 해로운 따가운 햇살과 환한 달빛을 가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짐승의 피로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켰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피로는 우리를 얼마나 안전하게 보호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이 두렵다면 주저하시 마시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보호를 받으십시오. 예수님의 피는 세콤보다도 더 안전하고 보디가드보다도 더 안전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등교하는 자녀를 덮으십시오. 예수님의 보혈로 출근하는 남편을 덮으십시오. 보혈로 덮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이루신 구원사역을 수용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보혈로 덮으면 자녀가 그리고 남편이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저는 운전하면서 우리 교인들 집을 지나칠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귀가 가렵다면 제가 기도한 줄 아십시오.

지난번 사택에서 예배드릴 때 이연지 집사님이 교회 오다가 약간의 접촉사고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날 저는 집에서 예배를 준비하다가 예감이 좋지 않아 설교문을 덮어놓고 우리 교인들이 안전하게 차를 몰고 예배 참석하도록 무릎 꿇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뭔가 불안하다면 모든 일손을 멈추고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보혈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감당할 방법을 주십니다. 마귀는 우리를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혈안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주적이 마귀인 것을 알고,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과 가족을 덮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는 예수님의 피 한 방울이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예수님은 피는 우리의 죄를 씻는 능력도 있고 우리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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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19 엎드리어 감사하니

뜨거운 햇살아래서 일하던 농부가 호두나무 그늘아래서 땀을 닦았습니다. 농부는 호박넝쿨에 달린 호박을 보고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무거운 호박을 약한 넝쿨에 매달리게 하셨담! 호박이 무거우니 땅에 닿을 것 같잖아.”하며 중얼거렸습니다. 농부는 그 자리에 누워 호두나무 가지에 달린 호두를 보고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튼튼한 호두나무 가지에 조그만 호두가 달리게 하셨담! 하나님이 잘못 만드신 거 아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다 농부는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딱!” 호두 하나가 농부의 이마에 떨어졌습니다. 농부는 아픈 이마를 만지며 “아이쿠, 저 큰 호박이 나무에 매달렸다 떨어졌다면 큰일 났겠군! 하나님, 이 큰 호두나무에 작은 호두가 달리게 하신 것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하고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이 농부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지 못해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알게 된다면 결국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이 농부처럼 매사에 불평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이라 날은 더워 땀은 흐르지 물은 적어 자주 씻을 수 없다보니 피부병이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자주 씻지 않아 종기가 많이 났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얼룩이 생기면 혹시 나병인가 싶어 제사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사장은 피부를 살펴보고 나병이 아니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나병이면 ‘부정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제사장이 검진하다 보니 악성피부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고, 진짜 나병인 한센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습니다. 나병으로 판정하면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손가락으로 코밑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쳤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나병환자는 병에 걸려 육체적으로도 고통 받았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어 사회적으로도 소외당했고, 회당에도 갈 수 없어 종교적으로도 버림받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마을 밖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소록도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병은 암처럼 전염될 확률은 적었으나 신종플루처럼 격리되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은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렇게 원망하던 나병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나병환자들이 사는 지역을 지나가셨습니다. 나병환자 10명은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습니다.(눅17:12-13)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멀리서 목이 터져라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눅7:14)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 13절을 통해 나병환자에게 병이 낫도록 안수 기도도 해주시고 병이 나았다고 선언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지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개떡같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나병환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병이 나았으니 제사장들에게 가서 진단을 받아라.’로 이해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찾아갔습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출발해서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걸어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영화 [벤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와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적시는 순간 나병이 나았습니다. 벤허 가족은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가족들에게도 돌아가고, 친구들에게도 돌아가고, 회당에도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찾아 갔습니다.(레14:2-4) 제사장은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의 질그릇 안에서 잡고 피를 빼고 다른 새와 홍색 실과 백향목과 우슬초를 핏물에 찍어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정하다.’고 선언하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나병환자 9명은 ‘정하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1명은 제사장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 돌아갔습니다. 제사장에게 ‘정하다.’는 선언을 듣기보다 예수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온 1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간 9명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이 결혼해서 낳은 혼혈인입니다. 유대인은 혼혈인을 경멸했습니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는 요즘도 국제결혼을 통해 낳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은근히 차별하는데 민족주의가 강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을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겠습니까? 사마리아인은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예수님에게 감사하다 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잊은 유대인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눅:17-18)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이 기특하셨습니다.(눅17: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9명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다가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1명의 사마리아인은 말씀을 믿고 육신도 고침 받았고 감사를 하여 영혼도 구원 받았습니다. 육신의 치유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합니다. 9명의 유대인들은 작은 것은 얻었지만 1명의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하여 큰 것도 얻었습니다. 황수관 박사에 따르면 감사하면 부교감 신경을 자극시켜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감사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비타민입니다. 우리가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던 비타민을 먹듯이 감사는 감사한 일이 있든지 없든지 감사해야 합니다.

영국 국교회에 매튜 헨리 목사라는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성경주석을 쓴 학자였습니다. 그가 쓴 주석은 30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팔리고 있습니다. 그가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매튜 헨리 목사는 ‘나같이 유명한 목사가 강도를 만나다니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이 분명해!’ 하고 불평하지 않고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다음의 것들에 감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첫째, 전에는 한 번도 강도를 만나 적이 없는 것에 대해 둘째, 강도가 지갑을 빼앗아 갔을 뿐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에 대해 셋째, 저의 전부를 빼앗아 갔지만 그것이 별로 많지 않은 것에 대해 넷째, 제가 강도질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강도를 당한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매튜 헨리 목사는 강도를 당했지만 그래도 감사할 거리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거리가 있을 때 감사하지만 감사할 거리가 없어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감사할 거리를 주십니다. 우리는 간구는 많이 하지만 감사는 적게 합니다. 간구와 감사는 보트를 젓는 두 개의 노입니다. 한쪽으로 기울면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우리가 간구만 많이 하면 신앙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자라지 않습니다. 간구와 감사에 균형을 이뤄야 신앙이 전진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를지라도 감사부터 한다면 반드시 감사할 일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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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4:13-5:11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여러분 다미 선교회를 기억하십니까? 다미 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성도들은 하늘로 들림 받는다고 현혹하여 멀쩡한 사람들이 집을 팔거나 전세금을 빼서 바치고,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한참 공부할 학생들이 가출하여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다미 선교회가 얼마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는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까지 했는데 휴거가 불발하자 기자들은 코미디라며 허탈해 했고 성도들은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서울지방 검찰청은 이장림을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고, 서울남부지방법원 항소심에서는 징역 1년과 2만 6천 달러 몰수 형을 선고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미 선교회가 시한부 종말론자으로 국민들을 현혹했는데 오늘 본문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잘못된 종말론으로 흔들렸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신앙생활하다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죽으면 영생을 얻지 못할까요? 그것은 아니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미 선교회가 말한 것처럼 어떤 특정한 날에 오실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질문을 받고 그 대답으로 데살로니가 전서를 썼습니다. 신약성경의 ‘서’가 들어간 성경은 교회에 보낸 편지이거나 사도가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종말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신앙생활하다 죽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도 바울은 4장 13-14절을 통해 답변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도 바울은 ‘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했는데 자는 자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합니다. 잠자는 사람은 다시 잠에서 깨어나듯이 교인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통곡하지만 교인들은 죽음은 잠깐의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별세하셨는데 장례식이 아니라 천국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인들은 죽더라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 살아나고 지금은 헤어지더라도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에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거나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도 예수님과 우리를 갈라놓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만나기 위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를 궁금해 했는데 사도 바울은 5장 1-3절을 통해 답변합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은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쓸 것이 없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정확한 날짜와 시각을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 지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 자신도 모르고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마24:36) 예수님도 모르는데 사람이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이단들의 요설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른다는 말씀을 ‘밤에 도둑 같이 온다.’고 비유합니다. 우리나라는 도둑이 낮에도 들어오지만 이스라엘은 밤에 흙벽을 뚫고 들어와 도둑질해 갔다고 합니다. 도둑은 괴도 루팽처럼 언제 도둑질하겠다고 통보하지 않고 갑자기 들어오듯이 예수님도 우리가 알지 못한 때에 갑자기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른다는 말씀을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이른다.’고 비유합니다. 요즘은 무통주사가 있어 산통을 거의 느끼지 않고도 출산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산통 때문에 초죽음을 당했습니다. 임산부가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산통을 겪어야 하듯이 예수님도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재림하시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5장 6절을 통해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사도 바울은 잠은 밤에 자고 낮에는 깨어 있어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에 집주인은 언제 도둑이 들어올지 몰라 언제나 집단속을 하듯이, 임신한 여자는 언제 아이를 낳을지 몰라 베넷 저고리를 비롯해 출산 준비물을 미리부터 준비해 놓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깨어 있는 거고 어떻게 하면 자고 있는 걸까요? 깨어 있는 거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이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겁니다.(마24:45)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하는 겁니다. 주님이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셔서 깨어 있는 성도를 보시면 어떠실까요? 흐뭇해하십니다. 주님은 깨어있는 성도를 칭찬하시고 더 많은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여러분이 사장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처럼 간식을 사갔는데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사장의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날 저녁 회식을 시켜주고 싶습니다. 깨어있는 것은 현재의 생활에 충실하면서 하늘나라 시민답게 사는 겁니다. 현재의 생활에 충실 하느라 하늘나라를 잊지도 말고 하늘나라를 생각하느라 생활을 외면하지도 말고 하늘과 땅을 조화시키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고 있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자고 있는 거는 악하고 어리석어서 주님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 동료를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리는 겁니다. 동료를 때리는 것은 맡겨주신 사명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성도를 비난하는 겁니다.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직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세월을 허송하는 겁니다. 주님은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셔서 자고 있는 성도를 꾸중하시고 벌을 내리십니다. 여러분이 기분이 좋아서 간식을 사갔는데 직원들이 농땡이를 치고 그제서 일하는 척 합니다. 사장의 마음이 탐탁지 않습니다. 봉급을 올려주고 싶은 마음이 달아납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자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목이 터져라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혹시 재림불감증에 걸리지는 않았습니까? 재림불감증에 걸리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동료를 때리고(성도를 비난하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십니다.(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낭비합니다.) 옛날엔 열심히 봉사했는데, 재림불감증이 걸려 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과거에 아무리 열심히 봉사했어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놀고 있으면 허사입니다. 과거의 수고가 감안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은 사골 곰탕이 아닙니다. 사골 곰탕도 어지간히 우려야 국물 맛이 나지 너무 우리면 맹탕이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맡겨주신 직분을 충성으로 감당합시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서보다 더 많은 상급을 받읍시다.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소서. 오실 때까지 직분을 감당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실 때에 기쁘게 맞이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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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13-35 눈이 밝아져

우리나라 격언 중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듯이 기대치가 크다보면 실망감도 커지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습니다. 국민들은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16강을 당연시합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갤럽에서 여론 조사를 했더니 무려 93.2%가 16강 이상을 할 걸로 예상했습니다. 기대가 커진 겁니다. 결과는 1승 1무 1패 조 3위로 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기대가 크니 실망도 컸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여론 조사를 했더니 78.9%가 16강 이상을 할 걸로 기대했습니다. 지난번보다는 기대가 낮아졌습니다. 다행히 1승 1무 1패 조 2위로 16강이 됐습니다. 기대는 항상 커지기 때문에 실망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축구 대표 팀에 기대를 걸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제자들은 장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 되기는커녕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실망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명의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돌아갑니다. 13-14절을 함께 봉독합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여기서 ‘그 날’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주일에 ‘그들 중 둘’은 예수님의 12제자 말고 다른 제자 두 명이 예루살렘에서 왼쪽으로 11km 떨어진 엠마오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들 중 둘이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는 두 제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부활주일 새벽에 여자 제자들이 무덤에 갔더니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졌고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남자 제자들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며 여자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자 제자들이 갔더니 시신을 쌓던 세마포는 있는데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졌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믿어봐야 별 볼이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제자들은 출세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교회를 다니다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듯이 우리도 교회를 섬기려고 다녀야 행복하게 됩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다녔다간 실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죄악 가운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교회에 다녀야 하겠습니다.

두 제자가 서로 이야기 하면서 걷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산속에 강도가 숨어있었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안전을 위해 무리를 지어 다녔습니다. 16절을 함께 봉독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두 제자는 눈이 가리어져서 그들 사이에 끼어드신 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두 제자는 눈은 있으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습니다. 신체적인 맹인이 아니라 신앙적인 맹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욕심을 충족하려고 교회를 다니다 보면 신앙의 눈이 뜨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신앙의 눈이 뜨이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되면 교인들을 낭떠러지로 이끌고 갑니다.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의 눈이 뜨이지 않은 사람이 장로가 되면 교회가 혼란스러워 집니다. 기도하지 않고 자기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을 달라고 기도할 게 아니라 신앙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눈이 떠져야 섬기게 되고 섬겨야 복의 문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신앙의 눈이 떠질까요?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셨습니다. 27절을 봉독합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성경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두 제자는 설교를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32절을 봉독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우리가 신앙의 눈이 떠지려면 첫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다면 아직 신앙의 눈이 떠지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0장 17절을 통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듯이 매일 말씀을 묵상한다면 신앙의 눈이 떠지게 됩니다.

두 제자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손님이 오면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떡이 나오면 집주인이 기도를 하고 떼어주는데 이 날은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두 제자에게 떼어주셨습니다. 30-31절을 봉독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성경에서 나오는 떡은 쌀로 만든 떡이 아니라 밀가루나 보리로 얇고 넓고 둥글게 만든 게 꼭 피자처럼 생겼습니다. 학자들은 이 날의 식사를 애찬식으로 봅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이 떠지려면 둘째 애찬식을 하며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친해지려면 같이 밥 먹으면 됩니다. 싫은 사람과는 같이 밥 먹기 싫잖아요? 하나님은 사도행전 2장 42절을 통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같이 예배드리고 같이 애찬을 나눴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그냥 집에 가는 것 보다 애찬을 하면서 교제를 나누면 더 친해지게 되고 신앙의 눈도 더 빨리 떠지게 됩니다.

두 제자는 신앙의 눈이 떠진 다음 어떻게 했을까요? 두 제자는 위험을 무릎 쓰고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했습니다. 35절을 봉독합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두 제자는 신앙의 눈이 떠져서 강도의 위험을 무릎 쓰고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했습니다. 신앙의 눈이 떠진 사람은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누군가 복음을 전해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0장 15절을 통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신앙의 눈이 먼저 떠져야 합니다. 신앙의 눈은 말씀을 자꾸 들어야 떠지고 애찬을 자주 나눠야 떠집니다. 저는 말씀을 읽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의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별로 믿음이 없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다 학생 때는 안 다니다 청년 때부터 다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녀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통성 기도하는 것이 어색해 밖으로 나가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땅콩을 먹으면서 고소한 땅콩을 먹으려면 딱딱한 껍질이 필요하듯이 교회에도 믿음이 있는 알곡 교인도 필요하고 저 같은 껍데기 교인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나는 기꺼이 껍데기 같은 교인이 되어 알곡 같은 교인들을 뒷받침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믿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저는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저는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을 원하시는 구나, 껍데기 같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알곡 같은 신앙생활을 원하시는 구나, 깨닫고 교회만 다니는 교인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4장 12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우리의 신앙적인 눈을 뜨게 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기초를 튼튼하게 해야 하듯이 우리가 신앙이 튼튼해지려면 말씀을 훈련받아야 합니다. 묵상훈련은 여러분이 날마다 먹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새가족 훈련은 여러분의 신앙을 튼튼하게 다지는 기초공사입니다. 제자훈련은 여러분의 신앙을 아름답게 수놓은 인테리어입니다. 우리 창대교인들은 묵상훈련과 새가족 훈련과 제자훈련을 통해 신앙의 눈이 떠져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전도자로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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