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눅 4:14-15 성령님의 권능으로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숨을 쉬어여 살 수 있듯이, 교인이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신앙생활의 활력소입니다. 성령님을 체험하면 구원의 확실한 증거를 가지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지만 성령님을 체험하지 않으면 신앙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도 하고, 우리가 신앙의 회의를 느낄 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기도 합니다. 성령님은 히브리어로는 ‘루아흐’이고, 그리스어로는 ‘프뉴마’인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특히 많이 언급됩니다. 누가복음에는 20회 정도 나오고 사도행전에는 60회 정도 나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누가복음에 나오는 성령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성령님은 누가복음 1장부터 나오는데 갈릴리 지방 나사렛 마을에 사는 마리아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이신 이의 능력이 덮으시자, 처녀인 마리아는 남자가 없이 아기 예수님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눅1:35) 성령 하나님은 남녀 간의 성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도 임신을 시킬 수 있으십니다. 성령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으십니다. 마리아가 사가랴 제사장의 아내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엘리사벳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아 마리아도 복이 있고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도 복이 있다고 축복하였습니다.(눅1:41-42) 성령 하나님은 임신하지 못했던 엘리사벳도 임신시키셨습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도,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삼손의 어머니도 임신하지 못했던 여인이었지만 성령님의 능력으로 임신하였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도 없으실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충만하면 영적인 감각도 탁월해 집니다. 엘리사벳은 성령님이 충만하여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요 태중의 아이는 주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엘리사벳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사가랴 제사장도 성령님이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구세주를 보내셨으며 그의 아들인 요한은 주님 앞에 앞서 가서 그의 오실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눅1:67-79) 성령님이 충만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들을 구원하고 싶어 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철이 들면 부모님의 은혜를 알게 되듯이, 교인이 성령님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은 누가복음 2장에도 나오는데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란 할아버지는 의롭고 경건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성령님이 머물러 계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성전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탄생한지 40일이 되어 정결예식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요셉과 마리아와 그들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시므온 할아버지는 그 아기가 한눈에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눅2:25-32) 성령님이 머물러 계시면 영적인 시각이 열립니다. 시므온뿐만 아니라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던 안나 할머니도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한눈에 메시야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눅2:36-38) 성령님이 머물러 계시면 영적인 시각이 열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인 세계도 볼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세미한 음성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누가복음 3장과 4장에도 연이어 나오는데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은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셨습니다.(눅3:21-22)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모두 참석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식은 예수님의 신분선포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세 개의 위격을 가지고 있으시지만 본질은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님에게 이끌리시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눅4:1-13) 예수님의 시험은 마귀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게 악을 행하게 만들기 위한 유혹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지를 시험받았듯이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하나님의 목적에 전적으로 헌신하는지를 시험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셨고 마귀는 얼마동안 떠났습니다. 마귀는 언젠가는 또다시 시험할 겁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눅4:14)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고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해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셔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셨다고 설교하셨습니다.(눅4:16-19) 이스라엘은 50년 마다 희년이 됐는데, 희년이 되면 모든 부채가 탕감되었고, 남에게 팔았던 재산을 원주인이나 후손이 되돌려 주었고, 노예는 자유민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가난하고 눈멀고 포로 되고 압제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구원을 주고 생명을 주십니다. 희년이 회복의 해라면 성령님은 회복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누가복음 10장에도 나오는데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눅10:21) 성령님이 임하시면 기쁨이 넘칩니다. 성령님은 누가복음 11장에도 나오는데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지 않고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님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눅11:13) 성령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중에서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작은 선물만 구할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선물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누가복음 12장에도 나오는데 성령님을 모독하면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10)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겁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박해를 당할 때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11-12)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동행하십니다. 성령님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으시지만 예수님을 시인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림자는 없어질지라도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24장에도 나오는데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24:49)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행1:8) 성령님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고, 능력을 받으면 지금 이 자리부터 시작해 지구촌 전체까지 나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은 오순절에 다 같이 한곳에 모여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임하셨습니다.(행2:1-4)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님을 부어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도 성령님을 사모합시다. 성령님을 경험합시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됩시다. 성령님은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싶어 하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 2:1-11 물로 된 포도주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 지방 가나 마을에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가나 마을은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나사렛 마을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졌습니다. 잔치가 열리면 바깥주인은 손님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하인들을 보내서 날짜를 알려주고 당일에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잔치가 열리면 안주인은 음식을 장만하였습니다. 잔치를 일주일동안 하다 보니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잔치 집에 일을 거들어주러 왔습니다. 잔치 날이 되면 손님들은 예복을 입고 잔치 집으로 갔습니다. 어른들은 그 동안 땀 흘려 일하다가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날이요, 어린이들은 그 동안 먹지 못하던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는 날이었습니다. 잔치 집은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토니 캄폴로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는 파티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파티처럼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혼인잔치를 통해서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았습니다. 

잔치가 한 참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요2:3)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라 식수가 부족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농사를 지으면 포도 1에 물 2 내지 3의 비율로 포도주를 담갔습니다. 보통은 음료수처럼 마셨으나 잔치 집에서는 알코올 도수를 높여서 술처럼 마셨습니다. 포도주는 잔치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습니다. 손님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시다 보니 금세 바닥이 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들을 초청해 놓고 음식이 떨어지면 주인이 망신을 당했습니다. 바깥주인이 호랑이 같다면 안주인에게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안주인은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든지 도와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다보면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처럼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합니다. 사람들은 좋을 때는 친구처럼 대하다가도 어려울 때는 남처럼 모른 체 합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람을 찾아가서 시간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주님께 찾아오길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야박하게 대답하셨습니다.(요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여자여는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아직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가 아니라, 포도주가 떨어졌어도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님이 틀림없이 도와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요2:5)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우리가 낭패를 당해서 주님께 찾아가도 도와주시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만 계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들어주길 바라지만 주님은 ‘가장 적당한 때’에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려면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릴 때 뛰어들었다가 사고자가 붙잡고 늘어져 구조자도 죽을 수 있습니다. 구조자는 사고자가 힘이 빠졌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로 돌아가서 끌고 나와야 둘 다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능한 구조대원처럼 가장 적당한 타이밍에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위를 둘러보시자 유대인들의 정결 예식에 쓰는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있었습니다. 돌 항아리는 돌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고 시장에 다녀와서는 목욕을 하기 위해서 비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생상 손을 씻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과 접촉하여 죄가 옮았을지 몰라서 종교 관습상 손을 씻고 목욕을 하였습니다. 돌 항아리는 손님들이 손을 씻어서 그런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2:7)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인들은 지금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돈을 주면서 포도주를 구해오라면 얼른 움직였을 텐데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니 무슨 소린가 싶어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인들은 마리아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당부가 생각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을 길어다가 아귀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항아리는 두 세 통 드는 항아리였는데 한 통은 약 40 리터라 두세 통을 채우려면 480 리터에서 720 리터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하인들이 물을 채우자 예수님은 이 또다시 엉뚱한 지시를 하셨습니다.(요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인들은 예수님이 물을 채우라고 하더니 이제는 물을 떠다 주라고 하자 도대체 무슨 심산인가 싶어 궁금했지만 어쨌든 하라는 대로 주전자에 물을 담아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연회장은 잔치를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포도주가 부족하면 더 갖다 주라고도 하고 과하면 그만 마시라고도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지배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낭패를 당하면 주님께 찾아가고, 주님께서 들어주실 줄을 믿고 기다려야 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기적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믿기는 하는데 순종하지는 않기 때문에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끝까지 붙잡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품에 안기지 못합니다.

하인들이 연회장에게 물을 갖다 주었더니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는 감탄하였습니다.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서 칭찬하였습니다.(요2:10) "사람마다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이스라엘은 잔치가 일주일 동안 진행되다 보니 처음에는 질 좋은 포도주를 내놓았다가 손님들이 취하여 미각이 둔해질 때쯤 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포도주는 정반대였습니다. 처음보다 더 질 좋은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연회장은 신랑을 칭찬하였으나 기적을 목격한 하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가지고 순식간에 최상급 포도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가나 마을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은 첫 번째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기적과 표적은 다릅니다. 기적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표적은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제자들은 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물은 유대교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 물이 변화된 포도주는 기독교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면서 율법의 시대는 지났고 은혜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았을 때는 물 같은 신앙인이었습니다. 물은 맛도 없고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습니다. 물 같은 신앙인은 내 이성을 의지합니다. 내 머리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 둡니다. 내 이성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키 작은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힘없는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도와두실 수 없는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상어를 수족관에 가두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내 이성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내 이성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는 포도주 같은 신앙인이 됩니다. 포도주는 맛도 있고 색깔도 있고 냄새도 있습니다. 포도주 같은 신앙인은 매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키다리 하나님이 됩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힘 있는 하나님이 됩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됩니다. 상어를 바다에 풀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하나님을 가두었을 지라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나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물 같은 신앙인이었을 지라도 이제부터는 포도주 같은 신앙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맡겨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눅 3:18-22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성경에는 2,930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저는 그중에서 세례자 요한을 가장 좋아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듯이 저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2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자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렸습니다. 우리도 몇 주간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갈급해 지잖아요? 유대 백성들은 죄를 지적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줄 선지자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때 요한이 등장했습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잔잔한 물가에 떨어진 바위가 물을 뒤집어 놓듯이, 말씀에 굶주려 있던 유대 백성들의 영혼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설교했는데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언행심사’란 화살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과녁에 쏘았을 때 빗나가기 일쑤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유대 백성들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회개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듯이, 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해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회개는 죄를 고백했다는 내적인 정결이라면 세례는 죄를 씻었다는 외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요한은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주문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일까요? 요한은 유대 백성들에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요구했습니다.(눅3:10-11) 유대 백성들은 옷을 한 벌 밖에 갖지 못했고, 오늘 먹을 양식도 부족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남는 것을 움켜쥐지 말고 나눠주는 겁니다./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눅3:13) 세리들은 로마제국에서 부과한 세금보다 과중하게 거둬들여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세리들을 매국노요 흡혈귀라고 증오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사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세금을 거두는 겁니다./ 군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요구했습니다.(눅3:14) 여기서 군인들은 로마 군인이 아니라 치안을 담당했던 유대 군인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경찰관입니다. 군인들은 권력을 악용해 백성들을 착취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비록 부족할지라도 지금 받는 급료에 만족하는 겁니다. 결국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바른 삶을 가리킵니다. 신앙을 가졌으면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고 설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분(예수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과 그분을 비교했습니다. 요한과 그분과는 능력이 달랐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겁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를 씻었다는 상징이었지만 그분의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체험이었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그분의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준비했습니다./ 요한과 그분과는 신분이 달랐습니다. 요한은 천한 종이었고 그분은 귀한 손님이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샌들을 신었는데, 날이 덥다 보니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고 사막이다 보니 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었습니다. 발이 지저분하고 더럽다 보니 신발은 종중에서도 천한 종이 들고 다녔는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해 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보다 능력과 신분이 다른 그분이 오시면 무엇을 하실까요? 심판을 하십니다. 요한은 심판을 ‘나무뿌리에 놓여있는 도끼’와 ‘손에 들려있는 키’에 비유하였습니다. 농부가 도끼를 들고 과수원에 갑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그대로 두고,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버립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땅만 버리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키를 들고 타작마당으로 갑니다. 키는 갈퀴인데 도리깨로 두드리고 나서 쭉정이를 골라내고 알곡을 남게 합니다. 콩을 두드릴 때를 생각하면 됩니다. 키질을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립니다. 쭉정이는 불쏘시개로 적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곳간은 천국을 상징하고, 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면 농부가 도끼로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나누듯이, 키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듯이 의인과 악인을 가리십니다. 심판을 하십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유대 백성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를 씻었다는 상징이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도 죄를 지으셨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요8:46,고후5:21,히4:15,요일3:5)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개미에게 사과하려면 개미가 돼야 하듯이 사람들의 죄를 씻으려면 사람이 돼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시기 위해 하늘보좌를 떠나 이 땅으로 내려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시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눅3:21-2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에게만 보였습니다.(마3:16)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자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하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도 보았고 요한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심증은 가졌지만 물증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물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임하는 사람이 성령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요1:33)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자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도 들었고 요한도 들었고 백성들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식은 예수님의 신분선포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독생자입니다. 외아들입니다. 우리는 양자이고 예수님이 친자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자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임하셨고,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위격이지만 하나의 본질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람의 말로 설명하기 힘든 하나님의 신비입니다.(삼신론은 세분의 다른 하나님이 있다는 주장하고, 양태론은 하나님이 다른 역할을 한다고 주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시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추시자 하나님이 높이셨고, 예수님이 겸손하시자 하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교만하라고 부추기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상석에 앉으라고 유혹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석에 앉으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지만 사람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높이시는 기적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 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저는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서문을 꼼꼼히 읽는 버릇이 있습니다. 서문 다시 말해 머리말에는 지은이가 책을 쓴 목적을 설명하고 책의 내용도 간추려서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서문은 조감도와 같아요. 우리가 건물의 조감도를 보면 이 건물을 어떻게 짓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서문을 읽어보면 이 책이 어떻게 전개되겠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8절까지는 요한복음의 서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문을 읽어보면 요한복음 21장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문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나와 있습니다. 여러 개가 나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절-3절을 통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 유대적인 개념과 헬라적인 개념에서 로고스는 모두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말씀인데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은 다른 성경구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1장 15절을 통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을 통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광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의 모습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고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자 사람이란 말씀에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오 빛이시다.
하나님은 1장 4절-5절을 통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인데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뿐만 영원한 생명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통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생명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빛이 비춰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빛을 비추셨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주고 빛을 비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고 빛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둠에 머물다보니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죽음은 헬라어로 ‘다나토스’인데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세주로 환영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요1:12) 권세는 권한이나 허가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둠에 머물러 죽음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빛으로 나아와 생명을 얻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둠에 머물지 마시고 빛으로 나아와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하나님은 1장 14절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라는 말씀은 다른 성경구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2장 9절을 통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7절을 통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으시지만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유랑할 때 성막에 머무셨듯이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자기 백성들 가운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셨습니다. 영광은 헬라어로 ‘세키나’인데 성막 안에서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시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은혜와 진리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셨습니다.(요1:18)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을까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신학 용어로 incarnation, 다시 말해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신비중의 신비인데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집에 성육신을 알기 쉽게 설명한 예화가 나오더라고요. 인도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님이 어떻게 하면 힌두교 인에게 복음을 전할까 고민하다 어느 날 함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실수로 개미집을 밟았습니다. 그 바람에 개미집이 부서졌고 수많은 개미들이 발에 밟혀서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힌두교 인이 안타까워하였습니다. "당신 때문에 수많은 개미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선교사님은 너무 미안해서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고 저도 모르게 실수로 그랬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저 개미들에게 사과할 수 있을까요?" 힌두교 인이 정색을 했습니다. "당신이 개미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거든 죽어서 개미로 태어나야 할 거요." 힌두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윤회설을 믿잖아요? 그들의 사상에 의하면 개미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개미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선교사님의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주신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선교사님은 힌두교 인의 말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군요. 개미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개미로 태어나야 하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씻기 위해 짐승들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속죄의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고자 사람이 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