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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18 내가 주를 보았다.

오늘은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인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성탄절보다 큰 명절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보다 부활이 중요합니다. 저는 부활절이 될 때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왜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자를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믿기가 수월했을 텐데 여자인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지만 수제자인 베드로가 아니라 여자인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8장 1절에서 3절을 통해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다고 말씀합니다. 일곱 귀신은 귀신 들린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귀신이 심하게 들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나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 주셔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자와 함께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5장 11절을 통해 예수님의 핵심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8장 3절을 통해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는 예수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교회를 다녔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교회봉사를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여자 제자들 중에서도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다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에서 56절을 통해 예수님에게는 남자 제자가 12 명이 있었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하였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칼을 들고 저항하다가 대제사장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혀 가자 해코지를 당할까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여자 제자들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릴 때 자신들도 쇳조각과 뼛조각이 살에 박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다 넘어지실 때 자신들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넘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드는 상처를 겪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망치질을 할 때 자신들도 팔목과 발목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 자신들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지는 공포를 느꼈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냈을 때에 자신들도 돌무덤에 매장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부터 12절까지를 통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모든 것이 멈추어집니다. 형광등도 켤 수 없으니 장례식도 치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일 장을 치르기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은 서둘러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다른 사람을 장사하지 않은 새 무덤에 매장하였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물로 닦고 기름을 바를 텐데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향품을 바르지 못했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마포(수의) 사이에 향품을 바르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새벽같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산허리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막았고 돌을 노끈으로 묶었고 옛날 집에서 시루떡 찔 때 밀가루로 틈을 메우듯이 빈 공간을 점토로 봉인했습니다. 돌문이 단단하다 보니 여자들이 밀어 가지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덤에 도착해보니 육중한 돌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여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에 무덤을 도굴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무덤을 파헤치거나 시체를 가져가거나 무덤을 봉인한 돌문을 바꿔 놓거나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남자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10절을 통해 시신을 쌌던 세마포(수의)는 흩어져 있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개어져 있었습니다. 누에가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예수님은 세마포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셨습니다. 만약 도둑이 들어왔다면 시신은 그대로 두고 값비싼 세마포만 벗겨갔을 겁니다. 시신을 훼손하려고 들어왔다면 피로 범벅이 된 세마포를 벗기지 않고 통째로 옮겨갔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신을 도둑질해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산허리에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입구가 하나였고 그 입구를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경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했습니다. 시신이 도둑맞지 않은 게 분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무덤을 들여다보고 돌아갔지만 요한복음 20장 11절을 통해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세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남자 제자들보다 나았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리아는 섬겼고,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마리아는 함께 했고, 남자 제자들은 무덤을 보고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빈 무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을 통해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처음에는 500명의 제자가(고전15:6)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했으나 기도해도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자 120명만 남았다고 추측합니다. 성령님은 마가의 다락방을 끝까지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빈 무덤을 끝까지 떠나지 않은 마리아에게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상가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기다린다면 우리 창대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날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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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44-49 휘장이 찢어지더라.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멜 깁슨 감독이 10여년에 걸쳐 만든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예수의 수난, 2004)’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12시간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풍경을 고증을 통해 완벽하게 되살렸고,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인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충격을 안겨줬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를 사용하여 영화의 실감을 높여주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신문 기자 출신인 리 스트로벨 목사님이 [예수님의 수난을 체험하기(우리나라에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번역)]라는 책을 썼는데 저는 이 책을 참고하여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신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반역자나 사람을 죽인 살인자에게 시행하는 잔인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사형수는 낚시 바늘 같이 생긴 쇠와 뼛조각이 박힌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채찍을 맞으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습니다. 사형수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길이가 180센티미터 무게가 14킬로그램인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어깨에 지고 사형장까지 걸어갔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에서 성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지고 올라가셨습니다. 사형장에 도착하면 길이가 18센티미터인 굵은 대못을 사형수의 양손에 박고 몸을 지탱하기 위해 팔에 밧줄을 감았습니다. 한쪽 무릎을 조금 밀어 올리고 발을 겹쳐서 박았습니다.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면 사형수에게 압력이 가해져 숨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사형수의 몸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갈증이 났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내리 쨌습니다.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사형수는 빨리 죽고 싶지만 쉽게 죽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보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사형수는 보통 36시간이 지나서야 죽었다고 합니다. 저녁이면 피 냄새를 맡고 들짐승들이 나타나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의 살점을 뜯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려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6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
누가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긴 가룟 사람 유다일까요? 예수님을 구출하지 않고 도망간 제자들일까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일까요?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른 유대 백성들일까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압력에 굴복해 사형선고를 내린 로마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일까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은 로마 군병들일까요? 아니면 모든 악한 일의 배후에 있는 사탄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5장 8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위의 본문들을 보면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시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음을 선택하셨을까요? 저와 여러분의 죄를 씻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씻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
예수님은 무슨 죄를 저질러 사형선고를 받으셨을까요? 재판은 심문과정을 거쳐서 최종판결을 내립니다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려고 작정해 놓고 형식적인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말씀을 문제 삼았습니다.(마27:61)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단7:13-14)라고 했다고 트집 잡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죄(하나님께 불경스런 말)를 지었다고 몰아붙였습니다.(마26:63-66)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죽이려고 모의한 종교지도자들이 진짜 신성모독죄를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이 비록 신성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의 종교법으로는 사형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로마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으며 자칭왕이라고 주장했으니 죽여야 마땅하다고 압력을 넣었습니다.(눅23:2)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란을 피우자 할 수 없이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가?
예수님이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진짜라면 예수님은 진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겁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만약 거짓이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들통 났을 겁니다. 신약성경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는 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했나?
예수님은 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3장 23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저질러서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을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죄를 저지르고 속죄제물을 드리고를 반복하였습니다. 속죄제물의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려고 단번에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더 이상의 속죄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27:51) 하나님과 사람과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가게 되었습니다.(엡2:13-14)

부활은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목격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본 경우도 있지만 오백 여명이 한꺼번에 본 경우도 있었습니다.(고전15:6) 한 사람이 한번만 보았다면 의심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여러 번에 걸쳐서 보았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부활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와 영광의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를 미련하게 보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멸망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옥으로 던져집니다. 지옥은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살아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계20:10)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습니다.(계21:3-4)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귤을 먹을 때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먹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껍데기처럼 지식으로 알지 않고 알맹이처럼 마음으로 믿으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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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1-8 향유를 발에 붓고

예수님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 친구인지 알았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가깝게 오래사귄 사람이 친구라고 하네요. 나이가 달라도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이 친구라는 뜻이죠. 친구에 대한 속담도 여럿 있더라고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은 너무 잘 알려진 속담이죠.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속담도 공감이 가네요. ‘술친구는 친구가 아니다.’는 속담은 새겨둘 만하네요. 술 마실 때 어울리는 친구는 참된 친구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고슴도치도 살친구가 있다.’는 속담도 중요하네요. 누구에게나 친하게 사귀고 지낼 친구가 있다는 뜻이죠. 고슴도치도 친구가 있는데 사람이 친구가 없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거겠죠? ‘좋은 친구가 없는 사람은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와 같다.’는 속담도 의미심장하네요. 좋은 친구가 없으면 위급할 때에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될 수 있다는 속담이네요. 자신이 남을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도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거겠죠? 여러분도 좋은 친구를 사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예수님에게는 서로 도와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였어요. 삼남매 모두가 예수님의 친구였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셨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절이 되면 고향을 방문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명절이 되면 남부인 유대 지방 예루살렘 마을을 방문하였어요.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절에 고향에 가서 조상들에게 제사도 드리고 선산도 둘러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어요. 우리나라는 조상을 섬겼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겼어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를 때마다 동쪽으로 3Km로 떨어진 베다니 마을을 방문하셨어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가 베다니에 살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시면 언니인 마르다가 나가 예수님 일행을 맞이했습니다.(요11:20) 마르다는 부엌으로 들어가 눈코 뜰 새 없이 음식을 장만했어요.(요12:2) 마르다는 종갓집 맏며느리처럼 손님 접대를 중요시했어요. 오빠인 나사로는 예수님을 귀한 손님으로 환영했습니다.(요12:2)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방문하면 종이 발을 닦아주는데, 종이 예수님의 샌들을 벗기고 땀과 먼지로 범벅 된 발을 닦아주면 나사로는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붓고 볼에 입을 맞추고 포옹을 했습니다. 거실에는 좌탁이 'ㄷ‘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고 소파가 놓여있어 예수님이 중앙에 앉으시면 손님들은 자기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고 왼손으로는 소파를 기대며 비스듬하게 누웠고 오른손으로는 음식을 집어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인 나사로를 살려주셨다.
예수님은 삼남매와 친구이기도 했지만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통해 오빠인 나사로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요. 삼남매만 사는데 오빠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도와달라고 사람을 보냈죠. 삼남매가 도와달라면 예수님이 당장 달려가실 텐데 이번에는 차일피일 미루셨어요.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운 나라라 당일 장을 치르는데 예수님은 나흘 만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흘간 머문다고 생각했기에 나흘이 지났으니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어요. 친구가 도와달라는데 나 몰라라 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그들이 우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서 돌문을 열라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나사로는 손과 발이 베로 동인체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풀어서 다니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어요.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보여주셨습니다.(요11:25-26)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고 알려주셨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11:45) 죽은 사람이 살아났으니 안 그러겠어요? 그러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예수님이 두려워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요11:53) 마르다와 나사로는 생명의 은인인 예수님을 더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고 나사로는 귀중한 손님으로 환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곤 했던 마리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눅10:39) 마리아는 어디를 갔을까요?

마리아는 친구인 예수님을 왕으로 섬겼다.
마리아는 자기 방에서 지극히 비싼 향유를 들고 나왔습니다. 향유는 인도에서 자라는 나드의 뿌리에서 추출한 향기 나는 기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부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수인 클리브 크리스천스 임페리엘 메이저스티를 수입하려고 하듯이 이스라엘 부자들은 값비싼 향유를 수입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금의 시세차익을 노리고 재테크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향유의 시세차익을 노리고 사재기했어요. 마리아는 그렇게 귀중한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의 발을 물로 닦아 주었는데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발라주었습니다. 보통 한 병이 1온스인데 한 근이면 12온스나 됩니다.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붓는데 마리아는 왕에게나 바르는 순전한 나드를 발라주었습니다.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마르다와 나사로는 친구인 예수님을 귀중한 손님으로 대접했지만 마리아는 친구인 예수님을 위대한 왕으로 섬겼습니다.

가룟 유다는 친구인 예수님을 이용해 먹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마리아의 헌신에 놀랐으나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낭비를 나무랐습니다.(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삼백일치 품삯입니다. 일 데나리온을 오만으로 환산하면 천 오백만원이나 됩니다. 가룟 유다는 천 오백만원어치 향유를 발에 붓지 말고 부자들에게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룟 유다의 말은 실용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한 말이 아니라 향유 판돈을 빼돌리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말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돈궤를 맡고 있었는데 가끔씩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을 위해서도 돈을 빼갔습니다.(요12:6) 가룟 유다는 친구인 예수님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마리아가 친구인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을 위해 친구의 금고를 털어갔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인 마리아를 두둔하셨다.
예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셨을까요? 당연히 마리아겠죠. 예수님은 마리아를 두둔하셨습니다.(요12:7-8)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신을 물로 닦고 기름을 발라 세마포 수의를 입혀서 동굴 무덤에 묻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바른 것은 시신에 바른 것을 예시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바랐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러 오셨습니다. 이 일은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났고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셨으니 마리아가 향유를 바른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한 것이죠. 예수님은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나중에라도 도울 수 있지만 지금은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돌아가셨을까요? 친구를 위해 돌아가셨어요. 우리들을 위해 돌아가셨어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3-14절을 통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돌아가셨고 우리도 친구를 위해 헌신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마리아도 친구를 위해 헌신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마리아가 친구를 위해 헌신하자 예수님은 마가복음 14장 9절을 통해 “온 천하에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친구를 위한 헌신을 칭찬하신 거죠. 그러나 가룟 유다는 친구 돈을 훔쳐간 것도 모자라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듯이 돈을 받고 친구 몸을 팔았어요.(막14:10-11)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룟 유다처럼 친구인 예수님을 팔겠습니까? 아니면 마리아처럼 친구인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마리아처럼 친구인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고, 친구를 위한 가장 큰 헌신이 우리 친구를 예수님의 친구로 만드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의 친구들을 예수님의 친구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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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5:11-24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한계에 도달한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묵묵히 집안일을 했으나, 둘째아들은 집안일은 고사하고 어떻게 하면 집을 떠날까를 궁리했습니다. 어느 날 둘째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요구했습니다.(눅15:12)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재산을 상속했는데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버지도 물러 터졌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호되게 나무라지 않고 큰아들과 둘째아들에게 율법의 규정에 따라 유산을 분배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큰아들은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유산을 상속받았습니다.(신21:17) 아들이 둘인 경우 큰아들은 3분의 2를, 둘째아들은 3분의 1을 물려받았습니다. 둘째아들은 며칠이 안 되어 유산을 처분하고 현금으로 바꾸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미리부터 집을 떠날 계획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수중에 돈이 들어오자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들떠서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썼습니다. 둘째아들이 돈을 쓰자 물고기가 먹이를 찾아 몰려들듯이 아첨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조폐공사 사장이라도 되는 듯이 돈을 흥청망청 썼습니다. 둘째아들이 기분을 내면낼수록 돈도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다 돈이 바닥이 났습니다. 둘째아들이 돈을 쓸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달라붙던 무리들도 돈이 떨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몰차게 떠나갔습니다. 돈 때문에 모인 사람은 돈 때문에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게 사람의 인심인가 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먹을거리가 떨어졌습니다. 둘째아들은 돈은 없지 배는 고프지 어쩔 수 없이 그 나라의 지주에게 몸을 의탁했습니다. 지주는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만 이스라엘 사람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여겼습니다.(신14:8)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제물로도 드리지 않습니다. 돼지를 만지지도 않는 이스라엘 사람이 돼지를 친다는 것은 엄청난 굴욕이었습니다. 막장 인생도 이런 막장 인생은 없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돼지치기가 됐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부족해 굶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둘째아들은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둘째아들은 하나님을 떠난 불쌍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둘째아들이 아버지에게 구속받기 싫어 집을 떠났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숨을 쉬려고 아가미를 헐떡거리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조만간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의 문제가 생깁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든지 아들이 속을 썩이든지 집안에 걱정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니면 건강의 문제가 터집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그동안 안 먹고 안 입고 모은 돈을 고스란히 병원에다 갖다 바치게 됩니다. 둘째아들이 이 지경이 됐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둘째아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한계에 도달하면 정신을 차리게 된다.
둘째아들은 주린 배를 끌어안고 들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았습니다. 둘째아들은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해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둘째아들은 그제야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눅15:17-19)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둘째아들은 돈이 있을 때는 집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막장에 떨어지다 보니 꿈속에서 고향 집이 보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일꾼이 여럿 있는데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나 둘째아들은 돼지가 먹는 음식도 부족해 배를 곪기 일쑤였습니다. 둘째아들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됐습니까?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었다면 부자 집 도련님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텐데 아버지에게 구속받지 않으려고 받은 복을 걷어찼기 때문입니다. 둘째아들은 배도 고프고 아버지께 사죄도 하기 위해서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 가면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써달라고 부탁할 요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떠나보내고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둘째아들은 삼시세끼를 거르지 않는지 걱정을 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둘째아들은 편히 쉬는지 염려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떠나보내고 마을 입구에 나가 저 멀리 떨어진 지평선을 바라보는 게 하루일과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도 지평선을 바라보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힘겹게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인가 싶어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둘째아들은 명품으로 치장하고 큰 소리 치며 떠났는데 그 사람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었고 몸이 불편한지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둘째아들이라고 직감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들이 먼저 사죄하면 아버지가 마지못해 용서해주는 게 관례인데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사죄도 받지 않고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눅15:20)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일꾼으로 맞아주기만 해도 감사할 텐데 아버지가 마중까지 나오자 너무나 황송했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눅15:21)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둘째아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불순종했고,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유산을 달라고 무례를 저질러 도저히 아들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없다고 뉘우쳤습니다. 둘째아들이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써 달라고 부탁할 틈도 없이 아버지가 종들에게 일렀습니다.(눅15:22-25)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둘째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했습니다. 좋은 옷은 귀한 손님에게 내주는 옷입니다. 아버지는 가락지를 끼우라고 했습니다. 반지는 아들로서 맞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는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신발은 일꾼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표시입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이 진심으로 뉘우치자 다시 아들로 맞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들이 다시 살아나고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되찾은 것이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지시했습니다. 살진 송아지는 들에서 풀을 먹으며 방목하지 않고 우리에서 곡식을 먹으며 자란 귀한 송아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말수가 적지만 속 깊은 정을 가지고 계시듯이 우리 영혼의 아버지도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로봇인양 리모컨으로 조종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자유의지를 선용하길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침반의 N극이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듯이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혹시 하나님을 떠났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는 버선발로 마중 나오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손을 잡고 따뜻한 안방으로 이끌고 들어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푸짐하게 잔치 상을 차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기 원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면 열렬히 환영하시고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창대교회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환영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교회가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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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3:1-9 회개하지 아니하면

2010년 1월 12일에 아이티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해 23만 여명이 숨진데 이어, 2월 27일에는 칠레 서쪽 태평양 연안에서 규모 8.8의 초대형 강진이 발생해 사망자가 800 여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월 2일에 공군 F-5 전투기 2대가 추락해 조종사 3명이 순직한데 이어, 3월 3일에는 육군 헬기가 추락해 조종사 2명이 순직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인 어 대위는 만삭인 아내와 5살짜리 딸을 남겨 놓고 순직했고, 헬기 조종사인 박 준위는 4,200시간 무사고 조종사였는데 부인과 삼남매를 남겨두고 순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사건 사고가 있었다.
오늘날만 이런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 사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인데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 이스라엘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았듯이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은 군인 출신인 ‘본디오 빌라도’였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제국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의 총독이다 보니 자존심도 상했고, 진급 가능성도 없다 보니 미래도 불투명했습니다. 빌라도는 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혹하게 통치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빌라도가 가혹하게 통치할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들을 열심당원이라고 하는데 열심당원들은 우리나라의 독립투사들이 만주에 거점을 두고 항일운동을 벌였듯이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에 본거지를 두고 로마제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거나 로마 군인들을 살해했습니다. 빌라도는 눈에 가시 같은 열심당원들을 토벌하려고 별렀습니다. 그 즈음에 열심당원들 중 몇 명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빌라도는 군대를 보내 열심당원들을 살해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에 그들의 피가 틔었습니다. 짐승의 피와 사람의 피가 섞였습니다.(눅13:1)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반대하던 바리새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죽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하다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인부 열여덟 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당시는 엄청나게 큰 사고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벌이던 열심당원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적국을 도와 부역을 했기 때문에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이 겪는 고난은 개인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과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자기가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논리로 따진다면 아이티나 칠레에서 지진이 발생해 안타깝게 죽은 사람들도 그리고 전투기와 헬기가 추락해 아깝게 순직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그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사고로 죽었다고 그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니고, 살았다고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고 의인이라고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처럼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 있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3: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육체적으로도 죽을 수 있고 그것보다도 더 무섭게 영적으로도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이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육체적으로 한 번 죽고 영적으로도 또 한 번 죽게 됩니다. 영적인 죽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20장 15절을 통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겁니다. 지옥 불에 던져지면 죽지도 않고 밤낮으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두 번 태어나면 한 번만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화과나무가 삼 년이 됐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자 포도원 지기에게 찍어버리라고 지시했습니다.(눅13:7)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목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저도 과실수를 심었었는데 삼 년이 되니 열매를 맺더군요. 삼 년이 됐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파트 베란다에 화분을 만들고 고추 모종을 심었는데 여름이 됐는데도 고추가 열리지 않는다면 뽑아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주인도 열매를 맺지 않고  땅만 버리니 차라리 찍어버리라고 지시했던 겁니다. 포도원 지기는 일 년만 더 기다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눅13:8-9)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를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포도원 지기는 일 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포도원은 세상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말해 교인들이 죄를 짓는 겁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사람들이 세상을 악하게 더럽혔습니다. 주인은 더 이상은 볼 수 없어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니 찍어버리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어두운 세상에 동화되어가자 심판을 하시겠다고 나서신 겁니다. 그러자 포도원 지기가 말렸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포도원 지기가 두루 파고 거름을 줄 테니 기다려달라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교인들을 회개시킬 테니 심판을 미루어 달라는 부탁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탁을 들으시고 심판을 유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3장 9절을 통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셔서 심판을 미루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임신한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겪듯이 반드시 재림하시고(살전5:3) 밤에 도둑이 들어오듯이 갑자기 재림하십니다.(살전5:2)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나면 늦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번 태어났으니 한 번만 죽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잠에서 깨어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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