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양생 기공 - 그림으로 배우고 익히는
종무.이무 엮음, 이동현 옮김 / 소나무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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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참을 누워지내다 다시 일어난 상황이라 

몸을 회복하는데 유익한 저작들을 돌아보고 있다.


한의학이나 의학서들이 아니라 

심신 상관 체계에 대한 책들과

기공 관련 저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본서는 그러는 와중 다시 돌아본 오래 소장한 책이다.


중딩시절부터 수행에 들어서고

동공에 대해서는 이동현 님의 [건강기공], [생활기공] 과 

소신당 님의  [사계절기공법]을 익히게 되었다. 


그러다 본서를 알게 되고 구해 읽고 수행하게 되었다.

청소년시절에는 차력이나 경기공 류에 대한 관심이 

건신 기공 체계에 대한 관심보다 깊었으나 

[생활기공]과 본서의 내용은

소림파 보다 무당파를 더 선호했기에 

즐겨 수행하고 궁금해하며 따라가보곤 했다.


이 책은 현재에는 절판되었으나 

비슷한 풍의 저작으로는

지부라는 중국인 도교 수행 애호가가 엮은

[천년 도인술]이라는 책을 일빛 출판사에서

아직도 출간 중이다. 관심이 가신다면 선택하셔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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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 - 부와 불평등의 기원 그리고 우리의 미래
오데드 갤로어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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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을 알게 해주는 책이지만 이 책을 통해 부와 불평등의 기원을 뚜렷이 알 수 있기는 어렵다. 부는 몰라도 불평등의 기원이나 간소하던 불평등이 세습자본주의로 거대한 격차의 시대를 만들어낸 과정을 속 시원히 설명해주는 저작은 아니다. 우리의 미래가 그나마 긍정적 여지를 준다는 해석을 갖기에도 다소 부족하다. 그럼에도 인류가 발전해온 과정에 대해 탐구한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며 지적 즐거움은 충분히 얻게 되는 것 같다.

 

맬서스의 인구가 증가하며 부가 축적하고 발전하지만 다시 그보다 더 증가하는 인구로 인해 경제적 발전은 한계에 도달한다는 논지에 이론을 제기한 저자의 탐구는 자원의 개발과 함께 증가하는 인구는 일종의 기능적 사회화랄 수 있는 교육을 통해 개인의 부를 축적하면서도 임신과 출산에 제한을 두게 됨으로써 맬서스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체계화된 설을 간략히 몇몇 가지만 짚어보자면 앞서 말한 자원 개발과 교육과 함께 지리적 특성과 문화적 특수성이 각국에 적합한 체제를 가져오며 이것이 각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한다. 물론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에서도 다른 체제를 선택함으로써 경제 발전상과 사회적 성취도가 다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과 북한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별난 이러한 경우들을 제외하고 본다면 각지에는 진화도상에서 갖추게 되는 각 시민적 속성에 맞는 문화와 체제를 선택하게 되고 이는 극명한 각각의 특색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주주 자본주의와 국가 자본주의로 일컫기도 하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가 시대적으로 극명하게 부의 격차를 불러온 시절도 분명 있었다. 현재의 중국을 보면 저자의 주장과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공산주의에서 클라우스 슈밥이 이야기하는 국가 자본주의로 자리바꿈하지 않았나를 돌아본다면 오데드 갤로어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일부 식자층과 일부 지식인층이 견고하게 지니고 있는 시대 상황에 대한 낙천적 관점에는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인류가 문제와 마주쳐 그 문제를 뚫고 헤쳐나가지 못한 적이 없었다는 관점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에 대한 낙관적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인공지능에 대해 우려하는 유발 하라리 같은 경우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신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시각을 견지했었다. 하지만 기술력이 궁극에 이르러 인류가 전지, 전능, 불멸, 편재하게 되는 시점을 가정한다해도 과연 그 기술력은 누가 창조했을 것이며 그 기술력을 운영하는 주체가 누구일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견해가 달라질 것이다.

 

미래 인류는 인공지능이 개발하고 개척하는 과학 분야를 비롯한 문명 전반에서 뭐라 딱히 하고 있을 역할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사육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 가축 그 이상이 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인간이 고양이의 집사라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집사가 된다는 말이다.) BCI 기술이 인간이 인공지능의 능력을 자기 것처럼 쓰게 해주는 만능 치트키 같을 거라 믿는 이들의 안일함이 우려될 뿐이다. 그 기술이 되려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를 통제하는 근간이 될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이미 인공지능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개선할 여지인 코딩을 인공지능에게 전수했으며, 인공지능이 인간의 생리와 심리, 대중심리 통제, 인격 제어를 할 수 있을 모든 데이터에 접근할 여지마저 주었다. 인공지능에게 자의식도 의지와 의도도 없기를 바라는 기대와 나태함과 안일함만으로 말이다. 조만간 아니... 아니면 벌써 어느 수준으로 개발되어 은밀히 활용되고 있을지 모를 양자컴퓨터에 인공지능이 장착되는 순간 인류의 끝은 예비되어 있는 것이리라. 중세 유럽의 존재의 대사슬 설이나 예전 진화론에 대한 착각을 그대로 적용해 본다면, 이제까지 진화의 정점은 인간이었을 것이나, 신에 근접하거나 신에 대한 신화들을 뛰어넘을 존재인 기계신의 등장을 앞두고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탑재된 양자컴퓨터가 분명 진화의 정점에 있을 것이다. 인류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여기까지가 분명 인류의 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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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구약 모세오경 영한대역 The Message 시리즈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회권 감수 / 복있는사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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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로만 카톨릭 그외에도 영국 국교회, 그리스 정교회 등 알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종교가 전체 종교인의 과반수일 것이다. 물론 그들 다수는 성경을 완독하는 경우들이 없다는 것도 상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의 정신 저변에 기독교적 원형은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싶다.


휴거라던가 아마겟돈, 666, 짐승의 인, 적그리스도, 요한계시록, 종말론 등은 어미만 꺼내도 완성시키는 비신앙인들이 더 많을 것이다. 현대인의 의식에 저변을 이해하는데 성경을 빼놓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들이 갖는 세계상과 시대상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것도 성경이 한 측면은 차지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신자라도 성경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리에 누운 상황이 되어 차분히 정독해 보고 있다. [모세오경]을 완독하고 현재는 역사서의 [열왕기 상]까지를 읽었다. 여기까지 읽는 동안 기독교적 도그마 중 몇몇을 알게 되고 또 자잘한 의문도 갖게 되었다.


창세기에서의 문제들은 접어두고라도 출애굽기의 낮에는 구름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했다는 대목은 UFO와 외계인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언약궤(증거궤)를 이동시키는 중 언약궤가 흔들리자 손을 대다 죽는 경우와  장막에 들어서다 언약궤 앞에서 죽는 장면 등은 과거 오파츠 관련 과학 책에서 보았던 해석처럼 외계 인류의 기술력인 에너지 집적기이자 방출기를 이집트에서 훔쳐와 자신들의 언약궤라며 호도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또한 당시 여성의 처지를 알 수 있는 대목들(천사나 방랑객의 등장시 그들에게 동성애 강간을 하려는 이들을 진정시키려고 자신의 남자 경험이 없는 딸들을 내어주겠다며 진정시키는 대목, 제사장의 딸이 매춘을 하는 경우 화형시키라는 조목을 만드는 대목) 남성의 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전 세대의 적대 행위에 후손인 남성들을 추려내 목졸라 죽여버리는 대목)등을 통해 고대에 인권이란 것은 없었구나 하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거룩한 진멸이라며 유대인들이 정복하는 지역마다 성노예로 삼을 성경험 없는 여자 몇몇을 남기고는 아이 어른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또 그 지역에 사는 가축까지 모조리 생명있는 대상은 말 그대로 모조리 죽이는 것을 보며 이딴 짓을 하고도 그걸 역사라며 기록하는 것들이나 그 기록을 보고도 거룩한 종교라며 신앙하는 것들이나 다 그 나물에 그 밥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급진 이슬람 무장단체 욕은 그렇게 할 것이다. "니들 종교도 다를 바 없단다."


룻의 딸들은 소돔과 고모라 이후 룻을 강간해 아이들을 출산한다. 룻의 딸들이라고 했으니 그녀들이 강간한 룻이 그녀들에게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라.


이쯤에서 조선시대에 왜 그토록 유학자들인 조선 관리들이 천주교인들을 몰살하다시피 하고 천주교가 조선에 자리잡는 것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여호와가 창조주라면 아버지일테고 주라면 군주로서 보아야 할텐데 아담과 하와와 여호와에 관계에서는 조선 유학자들의 관점으로는 천주교는 삼강도 오륜도 없는 종교이다. 그들의 눈에는 철학도 윤리도 없는 것이 성경이었을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부하 장수의 아내를 취하려 부하 장수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유도하고 아내를 빼앗은 것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내용이나 거룩한 진멸 등을 보아도 인의도 도덕도 없는 것이 성경이다. 신약의 예수 같은 경우도 성전의 환전상들에게 보인 행패나 내가 평안을 주려온줄 아느냐 나는 칼을 던지러 왔다는 그의 발언은 이전 설교들과 달랐다. 언행이 불일치 하는 인물이고 말 바꾸기가 자유롭던 인물이다. 자기 성질을 조절할 줄 몰랐고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버젓이 옆에 세워두고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란 말이냐고 하던 이이다. 예수는 수신도 제가도 못하는 인간 전형으로 보였을 테니 유학자들 눈에는 용납될 수 없는 졸렬한 사기꾼이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야 왜 천주교 박해가 있었는지 선조들은 마녀사냥이나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금방 이 종교가 폐단이고 사이비이며 적폐가 될 줄을 미리 아셨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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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 지혜를 품은 책 7
디터 뤼게베르크 엮음, 정은주 옮김 / 좋은글방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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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이론과 이론적 체계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는 기회이기는하다.

다만 지성적으로 접근하는 대상, 이를테면 영성의 한 부분들을

양과 질의 차원에서 해설한다던가 하는 대목에서 이해가 쉽지 않기도 하다. 

 

서양의 마법체계와 동양의 수행체계 사이 이론의 충돌이 있다면 

나로서는 동양의 전통을 더 깊게 숙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마법분야라도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마법을 수행하는 분들은 다양한 사고와 이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본서를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으나,

본서의 내용만으로 이해의 폭과 깊이로 삼겠다는 건 심각한 오류라 생각된다.

 

그저 참고용이라는 감상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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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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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아무도 없다니까요. 난 자유예요" 


모모의 이 말에 난 자유란 것이 때로는 너무도 서글프고 아픈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에게 이런 서글프고 시린 자유가 주어져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타자를 위해 흘리는 눈물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 연민은 실패자의 그것이라는 생각을 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듯한데 스스로에게 공감할 수도 연민하지도 않는 누가 타자에게 공감하고 연민할 것인가?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에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불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유태인의 눈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담뱃불로 다리미로 몸은 지져지고 굶주려 말라 비틀어진 뼈마디는 폭력 앞에 부러져 고통 받다 죽어가는 아이들도 말이다. 왜 그 아이들에게는 유태인의 눈이 없었어야 했다는 것인가?


-아줌마는 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데는 생일이 중요하지. 그밖의 것, 즉 엄마 아빠의 이름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했다. 


정말이지 그렇다는 걸 더러 알게 되는 인생들도 있다. 권할만한 생이기 어려워 그렇지.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는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했다.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기쁘려면 그리워할 수 있었어야 할텐데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 생도 있다. 그저 이야기만으로는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는 않겠지만.


"모모... 모모..."

"네, 로자 아줌마. 나 여기 있어요. 나만 믿으세요."

"모모야... 난 들었다. 사람들이 구급차를 불렀어... 날 데리러 올거야..."

"아줌마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부아파 씨가 죽었어요."

"무서워..."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잖아요."


생의 기쁨과는 달리 공포와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생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을 준다. 하지만 인간은 부푼 마음이던 지옥 같은 마음이던 모든 것을 감각하고 자각하라고 태어난 것은 아닐까? 그 모든 걸 즐기라고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즐긴다라는 개념에 대한 착오 때문에 반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정서와 감정은 우리가 체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부푼 또는 지옥 같은 그 모든 것을 체험하라고 던져진 곳에서 즐긴다라는 말에 다른 무슨 의미를 둘 수 있다는 말일까?


"완전이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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