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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슬람은 서구의 적이 되었는가
타마라 손 지음, 김문주 옮김 / 시그마북스 / 2017년 5월
평점 :
이슬람 관련 저작들을 연이어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을 마지막으로 중동 관련 저작들은 좀 쉬려고 한다. 비슷한 주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접하며 오는 재미와 유익도 크기는 했지만 좀 물리는 감이 있어서다. 중동 관련서들을 이 책까지 4권째 읽었는데 독서 순서를 나름 잘 정해서 읽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추린 중동사로 시작해, 중동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을 접하고, 그 정체성을 지속하는데 정치성이 연계되어 있으며, 최종적으로 이슬람과 서구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게 된 까닭으로 정리되니, 연이은 독서가 제법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본서는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로서는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정리되었다. 이슬람이 서구를 적으로 인식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테러리즘에 대한 이슬람 주류의 인식은 어떤가, 이슬람과 그 반대 진영의 공존 가능성은 있는가 하는 세 가지 관점에서 독서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슬람이 서구를 적으로 인식하게 된 배경은 세계대전들 이후 이슬람 각국의 국경선이 다시 구획 지어지면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 이상의 페르시아나 오스만 제국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서구와의 갈등과 충돌이나 이슬람 내부에 갈등의 시작점은 서구가 이슬람 각국의 국경선을 자신들의 의도와 이점에 맞게 나뉘도록 모의한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이슬람은 민족 갈등에 놓이게 되었고 서구의 삼중 협약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도 야기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서구와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슬람 각국에서 반정부적인 무장 단체들을 지원하거나 육성하기도 하고, 각국 정부를 지원하거나 타국가를 침략하기 위해 이용하기를 반복해왔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과 이라크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식적으로도 그 대략을 알고 있기도 하다.
서구와 미국의 역사적인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기에 그 중 대표적인 한 국가의 사례만 예를 들자면 이란을 견제하고 침략하기 위해 이라크를 이용한 경우를 예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이란을 견제하려 이라크를 지원한 미국은 이란-이라크전을 유도했으며 전쟁 이후에는 팽창하는 이라크를 제압하기 위해 제재를 가했고 이 제재로 인해 이라크의 어린이만 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질의를 받은 당시 미 국무부장관 올브라이트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했다가 전 세계적인 지탄과 이슬람 전체의 공분을 샀다. 어린이만 50만 명이 굶어 죽은 상황을 보고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라니 신중하지 못한 대꾸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할 생각 자체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타국의 제삼자인 나로서도 이런데 이슬람 사람들이 어찌 공분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이라크의 말로는 미국 정보계의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보고로 인한 이라크 정권의 궤멸과 사담 후세인의 처형이다. 아시다시피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첩보는 착오였거나 모략이었다. 착오였을 가능성보다는 이라크 정권 궤멸을 위한 미국의 모략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미국인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의 상식일 것이다.
상징적인 단 한 나라를 사례로 들었지만 이슬람이 서구와 미국에 분노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장 집단을 지원해 이슬람 각국을 견제하거나 정권을 바꾸는 것도 일상인 미국이었고 이란의 역사적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으나 이란 혁명 당시에도 혁명의 반대 극부인 팔라비 왕조를 지원한 것이 미국이다. 이쯤이면 이슬람이 미국과 서구에 저항하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미국과 서구측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이슬람의 정권들이나 자신들에게 무력으로 저항하는 무장단체들을 통해 자신들의 안정에 위협이 가해진다는 다소의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도 911 테러나 프랑스 테러처럼 일상에서 어느 순간 마주칠지 모르는 돌발적이고 강렬한 타격으로 다가오는 불안이고 말이다. 서로의 시민들은 상대 국가나 상대의 무장 단체들이 불안하고 심각하게 거슬리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더구나 서구와 미국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와 대전략에 있어 이슬람 원리주의는 동요와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 서구와 미국은 이슬람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외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문명에게는 공존 가능성이 없을까? 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일반 무슬림들의 테러리즘에 대한 상식부터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미국법상 테러리즘은 민간인을 위협하거나 정책이나 정부의 행위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로 행하는 무력행위를 포함한다. 이슬람 율법상 테러리즘은 불특정 피해자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며 이들이 테러리즘을 이야기하는 ‘히라바’는 불특정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을 이야기한다. 이슬람의 인사인 ‘앗살람 알라이쿰’이라는 말은 ‘그대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평화는 전쟁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함과 행복함을 느끼는 상태로서의 평화를 의미한다. 저자는 그렇기에 ‘히라바’는 이슬람의 대척점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신과 이슬람이 중시하는 모든 것에 역행한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과는 다르게 사실 그들의 비판 중 “누구든 살해나 부패 이외의 죄를 벌하기 위해 인간을 살해하는 자는 인류 전체를 살해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구한 자는 인류 전체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라는 (코란 5장 32절)을 인용한 조항은 부패한 자는 죽여도 된다고 해석되기에 테러의 피해대상을 부패한 자와 부패한 집단으로 지목한다면 그들의 테러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조항이기도 하다.
“죄를 짓지 않은 자는 다른 이의 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코란 17장 15절)의 조항도 피해 대상이 죄인이라고 정의해 버리면 그 효용성이 없어져 버리기에 테러 행위근절에는 무용지물인 조항이기도 하다. 그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는 반기독교적 해석을 주는 용도로나 쓰일 법한 조항이 아닌가 싶다.
다만 그럼에도 저자가 해주는 일반적인 이슬람 시민들의 관점과,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아닌 이슬람 지도층들의 테러에 대한 견해와 종교적 관점은, 작지만 공존의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러나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이나 확전 양상으로 중동전쟁으로 나아가는 현실을 보며 이상을 현실화하기란 쉽게 내뱉는 말만큼 쉽지는 않겠구나 싶기만 하다.
그럼에도 본서는 이슬람과 서구의 관계와 테러집단의 영향력, 그에 대한 서구와 이슬람의 대응과 반응, 서로가 공존할 수 있을지 가능성 등을 돌아보게 만드는 양서이다. 중동의 역사만이 아니라 이슬람과 서구의 대립을 이슬람의 입장이자 이슬람학 전공자인 미국인의 입장에서 들어볼 기회가 되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 세계사적 대립 상황에 대하여 서구의 입장에서도 또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들어보았다면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그들의 입장에서도 들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까닭에 적은 분량이지만 양서라고 느껴지는 책이다. 중동 관련 저작을 읽어보신다면 이 한 권도 눈여겨보셔야 하리라 말씀드려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