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김형민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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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긴 한글 제목보다 [Underdog]라는 영어로 된 부제가 이 책의 주제와 스토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책 같다. 평소 역사 분야의 저작들을 좋아는 하지만 학술적인 저작보다 대중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에 책들이 비슷한 주제를 비슷한 방식으로 풀어나가다 보니 역사를 통해 할 이야기가 이것뿐일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이라는 본서의 출간과 함께 서평 제의가 들어와 기다렸다는 듯 응하게 되었다.

 

본서는 무엇보다 역사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들의 스토리라는 것이 너무 끌렸다. 역사의 꼭지를 맡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마이너의 이야기이니 역사를 좋아하면서도 너무 비슷한 서사들의 연속에 답답한 분들이 계시다면 남다른 시각의 본서에서 다른 감흥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본서는 전략, 용기, 결의, 지혜, 신념이라는 5개의 주제 의식으로 각 장을 이루며 여러 나라와 여러 인물로 역사의 변곡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구려, 스페인, 핀란드 등 나라가 굴욕을 감당하다가 당당히 골리앗에게 대항하고 자신을 지켜낸 역사를 읊기도 하고 히틀러를 암살하려 한 목수 게오르크 엘저나 관동 대학살에 맞선 오카와 쓰네키치, 그리고 한 시대의 문화이자 부조리인 기업의 횡포에 맞서 매치스틱 걸 스트라이크를 만들어낸 영국의 성냥공장 여직공들, 또 노동조합을 만들며 회사의 횡포에 당하면서도 옳음을 지키고자 하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그들의 편에서 사진사 이기복, 문명의 힘 앞에서 부서져 가면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굽히지 않은 사우디의 공주 미샬 빈트 알 사우드, 식민지 개척 시대에 포르투갈을 상대로 협상과 전쟁을 하면서도 자국의 백성들이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을 막은 은징가 음반데 공주(후에 여왕이 됨), 격동하는 파리에서 자신의 옳다는 것을 위해 굳건히 저항한 여성 운동가 루이즈 미셸, 묻혀버린 과거의 과오를 바로잡은 청소년 헨리 스콧의 이야기 등이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본서의 주제와 결이 맞는 이야기로 기억에 깊이 남았다. 아마도 역사적 인물이나 관료 등의 영웅보다 소시민들의 저항이 문명이란 거대한 바퀴 앞에서 버티고 선 사마귀 한 마리 같은 느낌을 주기에 더욱 그런 듯하다.

 

본서는 첫 장을 펼치고는 얼마 안 되어서는 약자가 강자를 상대할 때 갖추어야 할 점들을 이르는 거라 생각되어 병법서나 책략에 관한 책과 같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마지막 장을 덮고는 그 깊이와 무거움에 감동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 책은 낱낱의 이야기들 속에서 과연 약자인 개인이 강자를 이기기 위한 처신은 어때야 하는지 국가가 강대한 타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국가나 문명 앞에서 한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은 어떻게 자신을 지켜나가야만 하는지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가벼운 제목의 책인데 깊은 인문학적 물음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시대 앞에 인류는 또 문명 앞의 개인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하는 그 넓고 깊은 물음에 독서 후 참 남다른 감동이 밀려오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저자의 책은 처음 대하는 것이었는데 앞으로 이 책을 쓴 저자 김형민 씨의 저서들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다른 시각의 역사 대중서를 찾거나 깊은 사유를 안겨줄 만한 저작이지만 대중적인 책을 찾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셔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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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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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알아가기 위한 저작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까지 3권째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스티븐 J. 맥나미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의 [능력주의는 허구다]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이후 저술된 저작으로, 집필 기간만 20년에 이른다는 책이며 도서 표지에도 있듯이 상당히 논쟁적인 저작이다.

 

저자 자신이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능력주의가 문제라는 결론인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상당한 자기 성찰과 자기비판이 뒤따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사회적인 허상이라거나 가진 자들의 자기 합리화라는 비판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역량과 기량에 따른 보상이란 게 능력주의의 미화라며, 사회적 이점을 독점하고 있고 그 독점적인 이점 역시 세습된다고 볼 수도 있으며, 사회적 기준 자체가 엘리트에게 유리하게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엘리트들 자신이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을 사회적으로 정립해 나갈 수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또 능력주의 사회가 격차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중위소득 계층의 존폐에 위협적인 상황을 가져오고 있다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서가 엘리트 계층의 노력과 업무를 과소평가하거나 깎아내리는 주장을 하고 있지는 않다. 엘리트 계층의 수입과 중산층과 하위 소득 계층의 격차가 세월을 지나며 더욱 덕 현격하게 커지는 것은 사실이고 노동자가 회사 간부로 승진한다거나 할 가능성이 원천 차단된 것도 사실이지만, 일반 노동자의 업무량과 업무 시간이 줄어들 때 엘리트층의 업무량과 업무 시간은 과도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 내의 제도적인 엘리트 옹호 양상이 [능력주의는 허구다]라는 저서에서는 동문 자녀 특례입학(Legacy admission) 등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본서에서 사회가 능력주의 중심이 되며 엘리트 계층이 자녀의 교육에 절대적인 관심과 열정을 기울여 엘리트 계층의 교육 양상과 하위 소득 계층의 교육 양상이 현격한 격차를 보이고 있으며, 상위 학업 성취를 보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혜들은 이미 극부층인 엘리트 계층이 선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엘리트 교육을 받는 이들이 진학하는 학교들에 하위 소득 계층 자녀들이 비집고 들 틈은 전혀 없다는 걸 통계로서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노동자 계층의 아들들이 서울대 입학한 사례나 학생 당사자가 막노동을 하면서 공부해 서울대에 진학한 사례 등을 들며 능력만 있으면 성취는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데 이런 비슷한 사례가 미국에서도 있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이상을 보여주는 사례가 어느 정도의 확률이냐는 문제일 것이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자신은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그걸 이겨내고 이렇게 부자가 되었다며 능력만 있으면 성공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의 삶이 열등한 것이 되어버린다면 이건 엄연한 구조적 모순이다. 이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능력주의 사회와 기술 발전이 어우러져 엘리트층이 갖추어야 할 기준 역량은 증가하고 중위층의 업무는 기술로 대체 가능한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중위층의 위기가 타파하기 어려운 시점에 이를 것이라는 게 저자의 예견이기도 하고 현재도 그러한 상황이라고 한다. 경제적으로 엘리트층이 주요 거주지역의 부동산가와 그들의 수입, 그들의 자녀 교육 과정에서의 비용과 자녀들의 성과 그리고 그들이 보는 사회적 이점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준 등 능력주의 사회에서 엘리트층이 보이는 노력과 그들이 이루어낸 기량으로 인한 타 계층과의 격차는 이제까지 능력주의 사회니까 당연하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이 격차는 세습되는 과정을 따르며 불평등과 재분배에 대한 필요로 중요도가 옮겨가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저작에서도 보이듯이 이는 극부층과 하위 소득 계층의 정치적 충돌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다. 박탈감을 느끼는 하위 소득 계층이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며 갈등 양상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샌델 씨의 직언이다. 본서에서는 엘리트층이 민주당을 지지하고는 있으나 재분배 문제에 있어서는 효율을 저하시킨다는 관점이라고 한다.

 

더욱이 본서에서는 엘리트층과 그 이외 계층의 격차는 비단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자기들에게 이로운 기준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느냐)만이 아니라 수명에까지 관계되고 있었다. 엘리트층의 사망률이 하강하고 기대 수명이 상승하고 있을 때 중위 소득 계층과 하위 소득 계층의 사망률은 상승하고 기대 수명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층적으로 상위 2%의 아이들이 친부모의 품에 살 때, 하위 계층으로 내려갈수록 대부분이 재혼 가정에서 살고 그보다 아래는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랄 확률이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엘리트 계층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정된 배경과 교육환경이 뒤따르고 아주 높은 확률의 성취와 생존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죽는 날까지 그러한 배경이 지속될 가능성 또한 높고 질병에 걸릴 가능성 또한 적으며 게다가 장수까지 하다 가는 것이다.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 다른 운명이 탄생부터 정해진다는 것이 능력주의의 폐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계층 간의 격돌이 예비되어 있는 것은 능력주의 사회의 운명일 것이고 말이다.

 

저자는 나름의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엘리트 교육에서의 포용성, 그리고 재분배를 들고 있다. 본서에서 저자가 지적했듯 부자의 세율이 낮아지고 누진세가 사라져버린 세상을 가져온 것은 엘리트층이 후원하는 정치가들이다. 이런 세계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 한 명이 나서서 변화를 요구한다고 변화가 찾아올까 싶다. 엘리트들 모두가 저자의 관점에 동조하던가 아니라면 사회적 권리를 주도하는 게 피라미드 최하위의 다수 계층이 되던가 하는 경우의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둘 다 가능성은 거의 없고 사회의 변혁은 더욱 초극부층의 손길이 닿는 데로 그들 자신을 위한 황금으로 변해갈 일만 남아 보이지만 말이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의 부상]이란 과학소설이 가장 먼저 현실화된 사례이고 현재라면 이제 초입으로 들어선 [1984]는 근미래에 완전한 현실화가 될 것이고 [멋진 신세계]도 유전자 기술이 완비된 이제 현실화를 앞두고 있다. 과학소설은 모두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화되지 않나 싶다. 이런 현실을 바꿔 놓는 미래를 담은 이야기는 없는지 모르겠다. 이런 소설 속에 살고 있다니 참 낙담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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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허구다 - 21세기에 능력주의는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가
스티븐 J. 맥나미.로버트 K. 밀러 주니어 지음, 김현정 옮김 / 사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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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과 함께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인데 같이 대여한 책으로 [엘리트 세습]도 있다. 능력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며 이 사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선택하게 되었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라는 본서는 정치철학적인 [공정하다는 착각]보다는 일상에서 겪는 몸에 와닿는 실제 사례들을 근거로 철학적인 사유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으로 다가서도록 했다면 본서는 술자리에서 쌍욕하며 세계 비판하는 느낌이 다소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의 과연 이 세계의 능력주의란 게 공정하게 작용하고 있느냐는 접근보다, 본서와 같은 세계는 차별적인 곳이구나라는 감상이 좀 더 피부에 와닿고 실제적이지 않나 싶다. 저자가 이 세계를 능력주의라고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태생적인 특권과 계층이라는 출신 성분에 따른 특혜들이 만연하는 곳으로 특정 계층의 자녀이기에 갖는 환경적인 특혜, 교육 기회와 수준의 차이, 저자가 말하는 사회적 자본(인맥), 문화적 자본(어느 계층이며 어디 소속이냐 또 무슨 자격을 갖추었느냐에서 오는 이점)이 더해지며 출발선이 같을 수 없는 사회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솔찮게 들리는 대통령 사위의 취업 특혜와 모 정치인 자녀의 부정 입학, 또 다른 정치인 자녀의 취업 특혜 등의 사례 등 우리는 이 사회가 운영되는 방식이 능력주의를 겉으로만 내세우며 대중을 속이고 있는 구조일 뿐이란 것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미국과 같은 동문 자녀 특례 입학 같은 제도(Legacy admission은 점수로 환산할 때 1600점이 만점인 SAT에서 무려 160점의 이점을 본다고 한다. 오바마 정부 시절의 저작인 본서의 저자와 같은 이들의 문제 제기들이 있으며 현재에는 SAT 점수 반영이 적어졌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아직도 이런 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와 기부 입학제도가 국내에는 없다고는 하지만 취지가 좋은 특례 입학 제도가 한국 사회에서도 능력주의를 냉소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보훈 특혜 같은 건 납득가지만 민주유공자 특혜라며 운동권 정치인들 자녀들에 대한 특혜는 과연 국민 가운데 몇 퍼센트나 공감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 외국인 자녀 특혜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귀화 외국인들이 저소득층도 아니며 외국인 자녀 특혜에는 불법 체류자의 자녀도 포함된다. 이런 제도들은 직설적으로 말해 역차별이지 절대 공정이라고 볼 수 없는 제도들이다.

 

화살표 부분은 안 읽고 넘어가셔도 됩니다 :::::::::::::::::::::::::::::::::::::::::::::::::::::::>

 

역차별을 이야기했으니 잠시 본서의 논지에서 벗어나 이야기하자면 외국인 의료보험 특혜 같은 것들로 한해 대부분의 의료보험비가 의국인 그 중 특히나 중국인들에게 대거 쓰이고 있다. 중국인 255만 명이 한국 건강 보험을 이용해, 지난해 지출된 외국인 건보 지출액 17206억 중에서 중국인에게 지출된 비용만 11809억이라고 한다. 과연 이러한 혜택을 한국은 중국을 비롯한 타국가에서 받고 있는가 말이다. 외국인에 대한 혜택은 상호주의에 입각해 우리 국민이 타국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해당 국가의 국민에게만 부여하면 되지 않겠나? 외국인 투표도 마찬가지다. 이것 역시 상호주의에 입각해서만 한다고 해도 문제가 적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한국의 합계 출산률과 인구감소 문제를 외국인 유입과 이민자로 풀어나가려고 하고 있다. 한국의 인구 감소분을 감안할 때 해마다 한해 30만 명씩의 외국인을 유입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그들의 대응안이다. 미친 작자들이다. 앞으로 점진적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을 상용화하며 초대량 실업자가 증가 추세일 것이고 이건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답이 될 수 없는 상황을 불러올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라는 것도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할 텐데 새로운 업무에 특정 시한의 적응 기간이 필요한 인간과는 달리 인공지능은 단 몇십 초에서 몇 분 만에 숙련 근로자의 업무능력을 보이며 비교 불가의 업무량을 소화할 테니 일자리 창출이라는 것으로는 답이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에 사람이 잉여인간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초극부층이 잉여인간이 된 대다수의 국민을 부담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대중은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던 것들을 과거와 같이 누리며 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 시대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전쟁과 질병이 만연되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다. 인구의 절대적인 소멸을 단계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특권층의 부담을 감소하는 게 될 테니까 말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가진자들이 자신들 사이에서만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대다수의 대중에게는 사회주의적 상황을 강요하는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생각을 아무리 해 봐도 다른 대안적 세계 상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앞두고 외국인의 대거 유입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한다? 그건 미친 짓이다. 외국인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된 프랑스의 경우 특정 지역의 교도소 수감자 중 이민자와 이민자 2세가 70%를 넘는 경우가 있고, 복지 국가이며 안정적인 치안과 환경을 자랑하던 스웨덴은 강간 천국, 범죄 온상이 되었다. 외국인 유입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별문제 없을지 몰라도 유입된 외국인이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을 때는 그들 문화 자체가 우리와 다른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이라면(이를테면 여성인권이란 없고 남자라면 여자를 강간할 수도 있다는 통념을 가진 국가의 사람들, 그리고 종교적 저항을 위해 폭력과 성전이 당연한 국가의 사람들인 경우) 그들이 범죄화되는 건 시간문제란 걸 유럽의 현재가 증언해 주는 것이다. 모든 외국인을 범죄자 취급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미 유럽의 사례를 직시할 수 있으며 그 사례를 교훈 삼을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인구감소에 대한 대응은 무대책이 대응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인구가 적을수록 대중에게 유익한 국가로 인식될 것이다. 이민자 유입은 뇌가 없어야 가능할 대응안이라는 말이다. 이민자와 이민자 2세까지 내국인과 경쟁하게 만드는 정책은 살아갈 여유를 잠시 남겨둔 (리뷰어인 나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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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사회라고 하면서도 출생에 따른 차이와 사회적 문화적 자본(인맥, 학맥, 출신, 인종, 외모) 등이 능력보다 앞서는 것은 미국은 이미 말한 동문 자녀 특례 입학 Legacy admission 외에도 추천인 제도가 있어서 더 부각되는 면이 있을 것이다. 대학 입학부터 취업이나 이직에서도 추천인이 있어야 하는 미국의 제도적 특성이 더 이런 차별을 부각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우리나라 역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취업에서 자신이 가족(출신)이나 인맥이나 학맥을 통한 특혜를 볼 수 있는데 뿌리치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래서 더 정치인들과 특권층 자녀들의 부정 입학이나 비리 취업을 용인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러한 차별의 여지를 계층과 성별과 인종에서도 그러하다며 지적하고 있는데 본서를 읽으며 우리가 능력주의 사회라고 믿던 사회는 허상이었구나 하는 감상만이 들 뿐이었다. 거의 10년 전 저작이라 10년 사이의 변화가 물론 있겠지만 아직도 남성과 여성이 선호되는 일자리는 분명 다를 것이고 인종에 대한 선입견이 각 인종인 당사자에게 득이 되거나 불이익이 되는 상황들이 즐비할 것이다. 인종 차별에서 예외적인 것 같은 한국이지만 이제 해마다 30만 명의 외국인들 유입을 앞둔 상황에서 인종 차별 문제가 불거질 내일은 자명하지 않은가 싶다. 사회가 더 나아지기 위해 변화의 계기와 과정이 필요할 텐데 딱 부러진 대응안이 나와주는 날은 아직 요원하지 않은가 싶다.

 

저자의 시선은 능력주의라는 허구를 비판하는 데 차별과 불공정에서 시작해 불평등으로 이르는데 결국에 저자의 주장은 불평등을 타파하는 데 누진세가 역할을 할 것이라고 귀결한다. 출발선이 다른 데 대한 대안으로 지대한 누진세로 출발선의 차를 대폭 줄이자는 주장이 아닌가 싶다. 상속세와 증여세 등에서만 이런 조항이 붙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세금 추징에서도 현재 부자일수록 과한 세금을 납부한다는 인식이지만, 상위 계층이 누리고 얻는 이익을 고려한다면, 세금의 퍼센티지에서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사실 부유층의 자녀들은 그들이 살아오며 남다르게 누릴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누리고 살아왔다. 미성년자 보유자산을 보아도 알 수 있고 그들에게 들어가는 생활비와 교육비, 문화생활비 등을 따져본다면 이미 서민층의 자녀들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출발선이 달랐고 어쩌면 출발선만 다르면 다행인 것이다. 이들이 사회의 출발선을 만드는 사람들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을 만들고 게임 자체를 운영하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이들과 대부분에 사람들의 차이는 누구의 자녀인가 하는 것이 가장 우선한다. 우리 사회를 능력주의 사회로 보고자 한다면 진짜 절대적인 능력주의 사회로 만들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출발선을 그들이 만들게 두어선 안되는 것이다. 출발선을 긋고 있는 그들을 강제로라도 출발선에 세워야 한다. 부가 절대 세습되게 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마도 부가 세습되어온 그 결론을 이번 세대들은 자신의 생애의 중반에 이르기도 전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대중이 지금보다는 먼저 관심을 갖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결론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깊이 든다. 끝난 경기에 아쉬움이 남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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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연습 2 - 기억의 치유 감사연습 2
해담.해나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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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영성 관련 도서도 종종 읽는 편인데 본서는 감사를 통한 치유를 논하고 기억을 정화하는 치유를 말하기에 선뜻 관심이 간 책이다. 감사로 기억을 정화한다는 개념은 호오포노포노가 연상되었고 책 소개 글에서 읽은 면면이 에너지 힐링 체계를 담아 전하는 듯해서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저자는 해나인 센터라는 에너지 힐링 단체 소속인 분인데 해나인은 해처럼 밝은 나로 살아가는 사람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해나에서 보는 나는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체적 나(의식)’는 에고마인드와 서브마인드로 구성되고 그 상위로 영혼’, 그 상위로 참나’, 그 근원은 나자신이며, 나자신은 최초의 빛인 해나로부터 나왔고, 해나는 모든 것의 근원에서 왔다고 보고 있다. 인도 요가 철학이나 카발라나 신지학 그리고 여느 에너지 힐링 체계와 유사한데 그런 영적 분류에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살짝 양념한 듯한 구조다.

 

본서의 서두는 기억으로 시작하는데 기억은 뇌의 작용이기도 하면서 그 본질은 에너지로 보고 있다. 기억은 또 과거의 기억만큼 미래의 기억도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미래의 기억을 가져다 현재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의식은 에고마인드와 서브마인드로 나뉘는데 서브마인드는 잠재의식, 무의식, 본능을 함께 아우른다. 에고와 서브라는 이름이라서 그렇지 자아, 초자아, 이드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애초에 기억은 에너지라고 주지했듯 우리 육체 외부의 에너지장에 기억은 맺히며 아픈 기억은 상처가 되어 일상에 장애를 가져오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에너지 힐링의 장이 시작되는데 서브마인드의 기능 중 본능의 면을 설명할 때 본능을 수용본능, 정화본능, 존재본능, 영역본능, 모성본능, 번식본능, 방어본능, 균형본능, 치유본능으로 나누어 각 본능의 기능과 그 기능이 완수되지 못할 때의 부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카르마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카르마를 6가지로 분류하며 영적 카르마, 혈통적 카르마, 생애 카르마, 맹세 카르마, 탄생 각인 카르마, 점성학적 카르마로 나누어 각기 어떤 역할을 하며 카르마가 영적 상승과 함께 해소되어야 하고 카르마에서 풀려나지 못할 때의 부작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영적 장애라는 소항목은 빙의나 다른 영가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장애들을 다루고 있다. 세계가 에너지 게임의 장으로 이러한 에너지의 영향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와 해법들을 다루기도 한다. 세 번째 장은 CTS 힐링을 이야기하는데 CTS는 갈등, 트라우마, 스트레스를 통칭한 말로 기억의 정화로 이런 맺혀진 문제들을 해소하는 내용을 다룬다. 다음 장인 안전 공간 힐링도 여러 에너지 힐링 체계에서 마음의 안식처라던가 하는 다른 이름으로 설명하는 예와 다르지 않다. 마지막 5장에서 해나인의 프로그램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치유기법의 핵심은 편안한 심신을 갖추고 다양한 상황 전제와 함께 감사로 정화한다는 핵심어로 감사를 보냄으로써 완성된다. 저자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절대적인 창조자로 자신의 환경과 내외적 모든 것들은 자신이 창조해낸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다. 나로서는 자신이 자기의 현실을 만드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해도 그 역시 외부적인 환경 말고도 내부적인 신념과 가치체계의 형성에도 외적 자극이 절대적인 영향을 형성해 사람의 내면이 조성되는 바가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호불호의 모든 면은 출생과 함께 자라나는 모든 시기에 주어지는 외부 자극이 그대로 아로 새겨지던가 아니면 그 자극에 반응함으로써 형성된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해도 아이들마다 반응이 제각각이다라고 누군가 말한다 해도 실제로 자극이 다시 달라졌다면 다른 반응을 하며 아이의 인격은 다른 영향을 받았을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에너지 힐링 체계나 영성 체계들에서 말하는 자신이 자기의 절대적인 창조자라는 전제에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은 우리가 어떤 운명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건 모두 출생 이전에 상위 차원에서 자기가 계획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부모에게 맞아서 죽었던 여행지에서 원거주자들에게 윤간을 당하건 모두 탄생 이전에 자기가 계획한 운명을 살아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것은 누구나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의 모든 과정을 차원 밖에서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에 반박만큼이나 수긍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본서는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과 Q & A 처럼 상담으로 내담자의 문제를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다룬 장이 있다. 이런 영성 체계들은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어 치료 프로그램을 따르거나 이 이론들을 믿는 것으로 어느 정도 내적 안정을 주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에 주어진 무게를 감당하며 느낀 것은 이론이나 체계가 주는 영향보다 모든 것을 겪으며 풀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멍에는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않고는 풀리지 않는 것 같다. 스타니슬라프 그로프 씨의 말씀처럼 영적 위기 상황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기도 한다. 너무 아플 때도 지나가리라 믿고 기다리거나 체계화된 영성 가르침들에 주목해 보는 것도 나아가는 과정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감사히 읽어볼 만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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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 뇌를 누비는 2.1초 동안의 파란만장한 여행
마크 험프리스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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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이름도 개념도 생소한 계산신경과학과의 석좌 교수라고 한다. 계산 및 통계 모델을 사용해 인간의 뇌를 연구하는 시스템 신경과학자라고 한다. 계산신경과학도 시스템 신경과학도 참 생소한 분야가 아닌가 싶다. 본서는 그런 생소한 분야의 과학자가 저술한 책이라 그런지 뇌과학 분야 책 중에서도 생소한 스파이크를 다루고 있다. 시냅스를 가로지르는 미세전기 전달을 다루는 저작은 이 책 외에는 본 적이 없어서 더욱 끌렸고, 무엇보다 내가 이 책에 끌린 이유는 운기나 주천 또는 꾼달리니 샥티라고 불리는 에너지 운행을 근간으로 하는 수행을 사랑하다 보니 신경계와 뇌에서의 전기 전달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척수와 뇌에서의 전기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법을 따르다 보니 [우리 몸은 전기다]라던가 본서 [스파이크] 같은 분야는 유난히 관심이 가는 저작이다. 14살 때부터 수행을 하다 보니 그 시절에 [생명과 전기]도 읽어보았으나 그 책은 독서를 중도에 포기하게도 되었었다. 어떻든 생체 전기와 뇌 내 스파이크는 선도(단학)나 쿤달리니 요가 또는 탄트라 요가 수행자라면 누구라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심 분야라 해도 독서하는 중에 전문적인 대목에서는 흥미를 지속하기 쉽지 않기도 한데 그렇다 보니 이 리뷰에서는 유독 흥미로웠던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한다.

 

그건 암흑뉴런과 시냅스 실패 이 두 가지이다. 암흑뉴런은 활동을 하지 않는 뉴런을 말한다. 혈혈단신이면서 고립무원인 지경의 뉴런들을 말하는데 아무런 스파이크 활동을 주고받지 않는 1형과 스파이크를 보내지만 다른 뉴런들이 반응하지 않는 2형으로 나뉜다. 마치 정크 DNA처럼 그 기능이 밝혀지지 않은 뉴런들인데 정크 DNA처럼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존재 이유가 궁금한 게 사실이다. 암흑뉴런 2형은 스파이크를 보내는데도 왜 다른 뉴런은 반응하지 않을까? 이게 무의식의 작용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1형의 경우는 더욱 의문과 여러 상념이 오가게 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을까]라는 과학 저작에서는 물질세계에서 A에서 B로 운동을 파악하는 것과 B에서 A로 역행하는 운동을 똑같이 정리한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고 하는 예가 등장한다. 물리학적으로 시간을 배제하거나 역으로 정리한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또 우주가 팽창하면 다시 수축한다고 본다면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지만 언제가 미래에서 과거로 역행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책 저자의 말이다. 그 외에도 시간의 역행을 주장하는 과학적 가설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지금 기억나는 것 이렇다. 이 가설들을 굳이 기술한 건 그 책을 읽으며 시간이 역행할 수도 있다면,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책을 집필한 어느 과학자의 주장처럼 우리가 상황이 일어나기 몇 초 전에 이미 그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란 걸 인정한다면, 과연 우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시공간적 여정을 단지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과학적 가설들과 또 [자유의지는 없다]에서의 과학적 발견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뇌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미래부터 과거까지의 모든 순간을 현재에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우리가 기시감이니 미시감이니 부르는 것들도 우리의 뇌가 현재에 미래의 정보들을 인식하는 걸 제한하는 기능을 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의문 말이다. 미래를 인식하는 걸 제한하는 기능이 통제를 완전히 잃었을 때 우리는 예지라던가 예언을 하게 되고, 그 통제력이 어느 정도 상실되었을 때는 기시감을 느끼고, 무척이나 과하게 기능할 때는 미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상념 말이다.

 

더한층 상상을 더해 보자면 우리의 뇌나 심장에 영혼이 있다는 고대인들의 신념과는 다르게 우리의 본체는 상위 차원이랄까 현재의 시공간 밖에 있으며 우리의 뇌는 그 본체와 교신하면서 기능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봤다. 우리세계 외부의 우리의 실체는 이미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면서 우리세계에서 아바타를 통해 연기하고 있으며 우리의 몸이 우리의 실체와 교신하는 작용을 하도록 기능하는 게 우리 뇌의 실체는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암흑뉴런의 기능은 우리세계 밖의 실체와 교신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는 말이다. 이런 의문이랄까 가설은 아직 연구 대상이 되기에는 과학자들의 보수성이 깊을 것이라 생각된다.

 

시냅스 실패의 경우는 뉴런 간에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하나의 뉴런이 7500개의 시냅스를 가질 수도 있다는 데 이렇게 다른 뉴런과의 연결고리가 많아질수록 시냅스에서 스파이크 전달이 실패할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한다. 7500개의 시냅스의 경우 실패 확률은 75%에 이른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적절해 보이는 시냅스 실패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시냅스 실패가 실패이기만 하다면 이렇게 다중 연결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킨슨병의 예를 들면서 하는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시냅스 실패의 이유가 납득이 갔다. 파킨슨병은 스파이크의 전달이 지나치게 효과적이라 근 긴장이 극대화되는 경우인데 이럴 경우 미세 전선을 이용해 미세전류를 흘려서 시냅스의 스파이크 전달을 교란시켜 주면 증세가 완화된다고 한다. 이를 보며 과거에 있었다는 정신과 환자들에 대한 전기충격 치료가 원리상으로는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 생각되었다. 다만 과거에는 전압의 세기를 높이면 치료되는 것으로 오해했으나 현대에는 미세전기를 빈발하게 시냅스 교란의 목적으로 이용하면 치료되는 정신과적 이상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간질이나 망상 또 환각 같은 경우 미세전류을 빈발하게 주입하면 치료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에 대해서도 정신의학계에서 수용할 수 있는 연구가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로서는 본서의 전문적인 내용들 중 이렇게가 가장 인상 깊었다. 뇌의 활동은 미래를 만든다기보다 예측하는 작용을 한다는 대목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저작들에서도 들은 바 있는 내용이라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책이 말해주는 내용으로 나름의 상념을 전개해 보는 것도 독서의 재미 가운데 하나인데 본서를 통해서는 이런 상념들을 해 보았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흥미가 없으신 분에게는 별 감흥이 없을 것도 같지만 생체 전기나 뇌의 전기적 작용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나름의 감상이 깊어질 만한 책이다. 선택하시는 분들은 즐겁고 유익한 독서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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