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409)까지 읽었을 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직도(1권만) 500페이지가 남았다는 거고....... 
그런데 어쨌든 기원전이 끝나기는 끝났다는 거고!!! 

더 읽어보려고 했는 데, 다행스럽게도 오늘이 반납일이다...
470페이지에서 예수님 태어나셨는데.. 뭔가 시작되는 느낌이 드는 게, 너무.... 벅차지 않고 지겨워 ㅜㅜ
미안해 예수님.. 잠깐만 미룰게... 👏🏻 

이건 다 테스형 때문임..
아 진짜, 테스형!!!! 당신 제자들 왜그래??
나 정말 스토아 학파 싫어!

일단 반납하고 .. 잠시 내 마음에 들어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황제님의 <명상록>과 함께 하다가 
근미래에 다시 빌려서 읽어야겠다. 

그러한 내 결심을 잊지 않기 위해 2권을 결제함.
넘 후 두꺼워서 누워서 읽으려고 이북으로 샀는데도 비쌈. 
할인 다 때려넣었는데도 오만원 넘었음. 오 아르테 출판사여, 돈 많이 버세요.
혹시 안팔린다고 가격 낮추고 그러면 안돼여! 나 진짜 화남! 
사서 꽂아두라고 만든 책 맞죠? 
하지만 이북으로사서 진짜로 읽는 사람 바로 여깄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세네카는 ‘의지voluntas’라고 대답했다.
-😂네, 의지를 갖추겠습니다. - P385

‘선택’과 함께 사유의 중심은 행위로 옮겨 가고 철학의 실천은 ‘우리에게 좌우되는 것’의 영역 안에서 행동의 완전한 이성적 단계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선택은 자아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의 차원과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개인적인 발전의 차원에 주어진다. 모든 인간은 선택능력을 타고났으며 다른 모든 육체적, 정신적 능력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모든 외부적인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스스로의 본성적인 차원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훈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완전한 훈련을 통해 선택하는 법을 터득하고 확보했을 때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과 존재를 완벽하게 자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택proairesis한 것은 제우스도 이길 수 없다."
-😂 네, 제가 선택한 책이지요. 제우스 안이기고 싶은데. 이겨보자. 제우스 - P395

자아로의 귀가는 모든 형태의 경악과 불만족을 멀리하며 고통을 제거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왜냐하면 현실은 이성적 질서의 결과이며 그러한 결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아로의 귀가와 이를 통한 현실세계와의 화해는 실수로 범벅된 일상이 위협하는 개인적인 평화(아우렐리우스는 이를 평정eukosmia 이라고 부른다)를 회복시킬 수 있는 내면적 도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아로의 귀가를 통해 일상의 산만함과 실수에 저항하려는 철학적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개선의 시도 자체를 습관처럼 항구적으로 만들 수 있어야한다고 보았다.
-😂 네, 황제시여, 기꺼이!! 황제도 귀가하는데... 나도 귀가해야지.. (자아로의)귀가습관 힘들어...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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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8Wed

12월 부터 붙잡고 씨름하던 ‘성의 역사’ 1권을 끝내면서 푸코가 좋아져버렸다. 지금은 그가 싫어한다는 전기를 읽고 있다. 자살하고 싶어하는 꼬꼬마 폴-미셸이 서글프고 귀엽다. 세상에 그렇게까지 입시공부를 빡시게 했는 데, 네가 안 돌고 배기겠니. 덕분에 미래의 니가 쓴 책 읽다가 누님도 머리가 살짝 돌 뻔 했단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쓴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내 모든 텍스트는 자서전의 조각’이라고 했단다.

나는 아파서하는 모든 예술과 글쓰기와 공부를 사랑한다. 자신과의 거리두기를 염두하지 않는 연구. 분석 대상에 자기를 놓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 예외 없는 태도. 스스로를 공부하는 공부. 그런데 푸코의 경우는 좀 유별났다. 적당히한 공부가 아니어보였다. 엄청, 어엄청 치열하게 아주 으아주 성실하고 집요한 연구랄까. 실제로 <성의 역사>를 읽었다는 역사 전공자인 내 친구가 말하기를 “예를들면 현대철학 전공자가 지금의 어떤 주제를 연구하겠다고 공부하기 시작해서 삼국시대 고문서까지 직접 뒤진거나 마찬가지야, 사학과도 잘 모르는 문서를. 말이 돼?” 말이 안되니까 푸코가 됐겠지. 그러게 푸코는 왜그렇게 열심히 공부한걸까. 그만큼 아팠다는 걸까? 공부가 적성에도 맞았던 거겠지? 여하튼 자신의 문제에 천착하는 열정적인 공부라면 일단은 호감인데?

그치만 재빨리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대머리였고.. 게다가 나를 좋아할리(?)도 없는 게이였으며.. 그 텍스트의 여성혐오는 건네들어 알고 있었던 터라.. 책을 펴는 순간 번역된 문체에서 마저 입을 여는 동시에 독침을 백개 쏠 것 같은 시니컬함이 느껴졌다. 뭐야, 푸코 무서워.

차마 본문으로 돌입하지 못하고 입문서만 뒤적였다. 입문서를 읽으니 더 몰라졌다. 그러나 스톡홀롬 증후군이 진리인게(?) 계속 모르다가 쪼금만 알 것 같아도 푸코가 좋아지는 거다.. ㅋㅋㅋㅋㅋㅋㅋ 아, 내가 이렇게 스톡홀롬 증후군에 취약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좋은 걸 어떡해. 줄을 쫙쫙 그었다. 읽다말고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플래그도 붙이고 메모도 했다. 다 읽고 나서는 사라 밀스의 책을 한번 더 읽기까지했다. 그걸 두번 읽어도 솔직히 푸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정확히는 모르겠더라. (타츠루 센세 말대로 역시, 나는 바보가 싫다.. 라고 말한 걸까?)

“(97) 욕망이 있는 곳에는 이미 권력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사후에 실행될 억압에 비추어 권력관계를 규탄하는 것은 환상일 뿐만 아니라, 권력과 무관한 욕망을 찾아 나서는 것은 허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어떤 때는 ‘억압’에 관해, 또 어떤 때는 ‘법’에 관해, 금기나 검열에 관해 마치 그것들이 동등한 개념인 것 처럼 끈질기게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말했다. 나는 고집 때문이건 부주의 때문이건, 억압이나 법과 금기와 검열의 이론적이거나 실제적인 함의를 구별하게 해줄 모든 것을 등한시했다.- 성의 역사 1권”
“(208) 그는 그의 글이 논점이나 스타일이 불명료하다는 비판에 이렇게 답변한다. ‘내 문체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만든다는 것에 대해 나도 기꺼이 동의한다. 내 단점 중 하나는 본성적으로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 사라밀스,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이해하기 어려워 죽겠는 데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고. 심지어 인내심의 한계까지 알면서도 자기가 본성적으로 명확하지 않다는 걸 어쩌란 말이냐는 태도..... 🤬이 대머리가... 죽일까??? 도 싶었지만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으신 분이라. 오케이 너의 불명료함에 대한 인정을 인정.

사실 읽는 도중에는 책에서 나오는 끝없는 물음표가 좀 짜증스럽긴 했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빨리 니가 하고 싶은 말을 해봐.

“(18) 성의 억압은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맨 먼저 시선에 드러나고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 이것은 본질 적으로 역사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다. 두 번째 의혹, 권력의 메커니즘,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요컨대 억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금지, 검열, 부인은 아마 모든 사회에서 그리고 확실히 우리 사회에서 권력이 일반적으로 행사되는 양상일까?... 억압을 겨냥하는 비판적 담론은 그때까지 이의없이 기능한 권력 메커니즘의 통로를 차단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억압’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하는 (그리고 아마 왜곡할) 것과 동일한 역사적 망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일까? 억압의 시대와 억압의 비판적 분석 사이에 정말로 역사적 단절이 존재하는 것일까?”

물음표 살인마의 원형이 여기에 있었다. 이건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서 환장한 학계의 새로운 관종인건가. 한 문단에서만 물음표 다섯개 넘개 써놓고 자기는 이런 말 하려는 것도 아니고 저런 주장 하려는 것도 아니고 조심스럽게 요러저런 의혹을 제기해보긴 하겠는 데, 그래서 당신이 기대하는 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는 건 아니고 성에 대한 ‘담론현상’에 대해서 ‘고찰’하겠다여. 이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권력의 다형적 기술’이라나. 

저기요.. 전 ‘성’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었는 데.. ‘성 담론’의 역사라구요? 예?? 그를 통해 ‘권력의 생산과 지식생산의 심급’을 찾겠다구요? 갑자기???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했다. 푸코는 뜯을 머리가 없겠군 하니 약올라서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성의 역사>는 더덕단과 함께 읽기 도서였다. 이미 재빨리 푸코를 떼어낸 언니들이 멀리서 손짓하고 있었다. 공쟝쟝, 그걸 읽어야 <육식의 성정치>를 읽을 수 있어. 난 눈물을 훔치고 눈을 부릅뜨고 다시 연필을 들었다. 🙄 읽기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밑줄을 긋다 말고 푸코의 말에 리플을 달기 시작했다.


<보이나요, 무슨기획?? 말을 해!!!!>

어째저째 다 읽고 나니, 나의 리플이 얼마나 구차한지 깨닫게 되었고 동시에 내 안에 굳어있는 이분법(혹은 선/악구도)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 수치스러웠으므로 푸코에게 한 수 배웠다는 것을 수월하게 인정했고, 언제나 처럼 금새 리스펙 모드로 바뀌었다. 푸코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하지? 우와, 이렇게 다른 질문을 하려면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걸까?

“(35)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 침묵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담론의 체제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성이 덜 이야기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은 다르게 이야기되고, 다른 사람들이 다른 관점에서 다른 효과를 얻기 위해 성을 말한다. ...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 사이에 이항적 분할을 설정해서는 안되는데, 이보다는 오히려 말하지 않을 갖가지 방식,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말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 양자에게는 어떤 유형의 담론이 허용되거나 어떤 형태의 조심성이 요구되는가를 결정하도록 시도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침묵이 있는데, 그것들은 담론을 떠받치고 담론에 스며드는 전략의 일부를 이룬다. (이후에는 18세기 청소년들의 성 담론화에 대한 설명)”

이항적 분할. 이 부분에서 멈춰서 잠시 생각해야했는 데, 이 대머리 물음표 살인마의 책이 읽기 곤욕스러웠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인과관계와 이분법. 즉, ‘쉽게 생각하기/편하게 판단하고 단정짓기’가 내 머릿속에 얼마나 습관화되어 있었는지 책을 읽으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니까 성이 억압 된거? 안된거? 됐다면 언제부터 된거? 왜 그랬던거? 누가 그랬던 거? 그럼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뭘 해야하는 거? 🧐 내가 가진 물음표는 대충 이런 것들이었고 그래서 나는 거기에 맞는 답을 기대했나보다. 그러나 애시당초 푸코의 관심사는 이 질문들이 아니었다.

“(88) 무려 세 세기전부터 성에 관한 지식이 형성된 방식, 성을 대상으로 하는 담론이 증가한 방식,그리고 성에 관한 담론이 생산하리라고 생각되는 진실에 우리가 거의 믿기 어려운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 이유에 관한 탐구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역사분석은 아마 이 최초의 행로가 넌지시 드러내는 듯한 것을 결국 무산시키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가능한 오래 유지하고 싶은 애초의 전제는 권력과 지식, 진실과 쾌락의 장치, 억압과는 너무나 다른 이 장치가 반드시 이차적이고 부차적이지는 않다는 점, 그리고 억압이 어쨌든 기본적이지도 승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애초의 전제는 이 장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분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 요컨대 우리의 작업은 이러한 지식의 의지에 내재하는 권력의 전략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

분석의 방향을 바꾸는 것. 지식-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 또 다른 저항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그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주재료로써의 섹슈얼리티, 혹은 성에 대한 담론.

“(106) 따라서 우리의 연구는 권력에 관한 또 다른 이론을 자체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역사 해독의 또다른 격자를 마련하는 것이고, 역사 연구의 자료 전체를 어느 정도 자세히 들여다 봄으로써 권력에 대한 또다른 이해방식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법없는 성과 동시에 왕 없는 권력을 생각해보자.”
“(73) 푸코는 먼저 권력의 개념을 재정립한다. 기존의 개념에 따르면 권력이란 어떤 집단이나 기관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권력의 목적은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통제하는 것이다. 푸코는 바로 이런 소유 가능한 것으로서의 권력 개념을 혁파하고자 한다. 권력은 단순히 권력을 가진 자가 나약한 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다. 권력은 사람과 제도의 일상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일상적 관계 속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성의 역사:1권>에는 푸코의 이런 독특한 사유 방식이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권력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제약을 가하거나 억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생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 초기 마르크스 주의 이론가와 달리, 푸코는 억압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권력에 대한 저항을 강조한다. .... 그의 작업은 다수의 페미니스트들과 비판 이론가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어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국가나 이데올로기 혹은 가부장제와 같은 제도들의 억압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권력 이론이 남/녀 사이의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의 이론에 따르면 권력관계는 사회의 모든 관계 속에 스며있으며 따라서 권력은 아주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발현되거나 저항을 받게 된다. -사라 밀스, 같은 책”

푸코가 상정하고 있는 권력 모델이란 몇권의 페미니즘 책을 읽어온 나에겐 이미 익숙해진 사고 방식이었지만 책이 나올 당시에는 매우 급진적인 논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하필이면??) 성을 통한 권력 비판을 시도했기를 다행이다. 그 권력 모델을 발판삼아 많은 페미니즘 철학자들이 푸코를 넘어서는 통찰을 얻었고, 역으로 나는 지금까지 읽어온 페미니즘에 빗대어 푸코의 이론을 아주 조금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67) (페미니즘과 푸코) 양자는 인간의 몸을 권력의 장이라고 보고 있다. 국가의 절대 권력에 집중하기 보다는 권력이 지엽적이고 미시적인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양자 모두 헤게모니적 권력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담론의 결정적 역할을 전면에 내세움과 동시에 이 권력에 대한 도전이 주변화되고 인식되지 않는 담론 속에 갇혀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둘 모두 진리와 자유와 인간 본성의 보편성을 선언하는 서구 남성 엘리트의 경험을 특권화 시키는 서구 휴머니즘을 비판한다.- 사라밀스, 같은 책”

푸코가 인간의 ‘몸’을 권력의 장이라고 보고 그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는 것과 동시에 <성의 역사 1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는 ‘생명에 대한 권력’ 혹은 ‘생체-권력’ 개념 역시 흥미로웠는데, 이것이 ‘권력-지식’ 을 통해 어떤식으로 배치되고 있는지는 난해한 용어로 읽어도 직관적으로 떠올려졌다. 요 개념들은 나중에 더 푸코를 공부하면서 천천히 알아가는 것으로.

“(162)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생체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때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지식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일정부분 넘어가는 것이 된다. ... 권력은 살해의 위협을 통해서 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떠맡음으로써 육체에까지 미치게 된다.”
“(164) 이 권력은 폭발적으로 많은 인명을 빼앗음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규정짓고 측정하고 평가하고 위계화하게 되어있는 것이고, 군주의 적을 복종하는 신민으로부터 분리하는 선을 그을 필요가 없으며, 규범을 중심으로 배치를 실행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법이 소멸한다거나 사법제도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법이 규범처럼 작동하고 사법제도가 특히 조절 기능을 갖는 기관(의료, 행정 등)의 연속체에 갈수록 통합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편재’되어있다. 기존의 ‘권력-억압’의 도식은 권력의 역학을 설명해줄 수는 있어도 권력 자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성-섹슈얼리티’의 역사를 추적해 보여주고자 했다. 서양에서의 성은 주로 ‘권력-지식’의 형태(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로 전수되어 왔는데, 지식이 어떤 식으로 권력적으로 작용하는지, 권력이 어떻게 지식을 생산하고 담론을 만들어 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의 담론화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은 단순히 억압과 금지의 형태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기는 담론의 폭발을 가져왔으며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해 알고자 하는 지식에의 의지(권력)는 거대하고 치밀한 망을 이루면서 개인의 몸, 쾌락과 일상까지 지식(권력)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권력은 섹슈얼리티를 억압하지 않는다. 되려 섹슈얼리티를 따라서 권력이 흘러다닌다.

“(16) 내가 제기하려고 하는 물음은 ‘왜 우리가 억압받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그토록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이다.”

책을 읽는 동안 “저는 푸코의 마음 만은 알 것 같아요.” 라고 떠들었는 데, 결과적으로 그건 거짓말이 되었다. 종종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내 생각을 설명하고 싶을 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기 시작하다가 예시 때문에 설명이 더 어렵게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타인도 나도 답답하게 만들어버리는 상황이랄까. 쓰는 푸코도 읽는 나도 답답하여 지금 푸코가 그러고 있나? 의심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독후감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어려운 예를 드는 건 나같은 바보나 하는짓이고, 생각자체를 다르게 하는 사람의 글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나는 푸코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 다르게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글을 더 잘 읽고 싶고,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내가 획득하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의 언어이다.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납작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너는 쉽게 해석할 수 있다, 니가 어떤식으로 나올지 눈에 훤하다 류의 말들로 내 존재에 대한 지식-권력을 행사해왔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나 자신의 존재론은 커녕 사람들과 달라지지 않기 위해 바둥바둥 하던 날들이었다. 글쎄, 그들은 모두 달랐는 데도 같아지고 싶었다. 다른 나를 미워했기에 나의 다름을 교정하려는 말들을 더 귀담아 들었었다. 더 이상 “딱 보면 딱 알아!”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쉬운 해석을 허락해 휘둘리고 싶지않다. 아니 이젠 그것과도 상관없다. 그냥 시시때때로 고독에 머무르며 나의 언어를 만들어가면 될 일이다. 나는 내가 되고 싶고, 같아지기 위해 노력할 에너지로 ‘달라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자세를 배우기로 했다.

* 푸코에게서 배우고 싶은 점 :
이항대립적 사고 혹은 이분법 넘어서기,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억지 인과관계 찾지 않기, 자기 자신의 일관성이라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기, 열심히 쌓되 허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판단을 보류하기, 매끄러운 것을 경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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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1-10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멋집니다, 이번 페이퍼~^^

공쟝쟝 2021-01-10 11:23   좋아요 2 | URL
뭔가 엄마미소 댓글이다 ㅋㅋ 쑥쑥 잘 따라오고 있구만 그랴~ 이런 ㅋㅋ

비연 2021-01-10 11: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_____________^

공쟝쟝 2021-01-10 11:27   좋아요 0 | URL
아직 신에게는 읽기를 기다리는 2,3,4권이 남아있나이다!!!!

비연 2021-01-10 11:28   좋아요 1 | URL
저... 저도 ㅜㅜ (계속 외면중)

공쟝쟝 2021-01-10 11:29   좋아요 0 | URL
일단 쓱 몰래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있다가 심심하면 쓱 훑어보고 구럽시다 (속닥ㅋㅋㅋ)

비연 2021-01-10 11:30   좋아요 1 | URL
쓱 육식, 쓱 푸코, .. ㅋㅋㅋㅋㅋㅋㅋ

scott 2021-01-10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장쟝님 진정한 푸코 장인!

공쟝쟝 2021-01-10 11:28   좋아요 1 | URL
장인이라뇨... 요즘은 푸코처돌이 푸코짱팬 모드이긴 합니닼ㅋㅋㅋ

붕붕툐툐 2021-01-10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좋아하시는 거 맞죠? 중간의 대머리 부들부들하신 부분에서 빵터졌습니당~ㅎㅎ
공쟝쟝님 페이퍼 덕에 안 읽어도 읽은 거 같은 느낌입니다. 저도 도전해 보고 싶긴 한데 언제쯤일지는...ㅋㅋㅋ

공쟝쟝 2021-01-10 18:55   좋아요 1 | URL
빨리 도전하시고 2.3.4권에 함께 ㅋㅋ with me~~~

다락방 2021-01-10 2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넘나 멋진 분! 그런데 대머리가 어때서요! 저는 대머리에 관대한 편..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1-11 07:17   좋아요 0 | URL
저에게 대머리 스테레오타입은 아직까진 전두환... 푸코가 그것을 깨줄 것인가 ㅋㅋㅋㅋ

2022-04-08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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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성의 역사’로 돌입하기 전에 몇권의 책들을 뒤적뒤적 했는 데 걔중에 가장 나은 입문서였다. 입문의 입문서라고 할까. 제목부터 ‘쉽게 읽기’ 다. 물론 읽어야할 대상들의 이름부터 어렵게 생겨먹었지만ㅋㅋ 푸코까지만 딱 읽고 그만 읽으려 했는데 솔직히 재밌어서 끝까지 다읽게 되버렸다. 재미는 재미고 제목대로 정말로 쉽게 읽히냐고? 결론먼저 말하면 그렇다. 이보다 더 쉽게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책을 읽으면서 구조주의에 대한 흥미와는 별개로 이렇게 쉽게 설명하는 설명의 대가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앞으로 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몇권더 읽어보는 걸로.

말에 어떤 ‘주의’가 붙으면 어렵게 느껴진다. 대단하게도 느껴진다. 그래서 겁먹게 된다. 구조주의 역시 그렇다. 아니 구조주의야 말로 정말로 그랬다. 책을 읽고 난 후, 내 입말로 구조주의를 풀자면 대충 이런 것 같다. “우리는 어떤 구조라는 제약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대상자체보다 그것을 이루고 있는 구조/관계/맥락을 살펴보는 것을 더 유의미하게 여기는 연구 방법론 혹은 철학 사조”

소쉬르의 언어학으로 부터 시작하는~~ 블라블라 정의보다 어떤 현상의 의미를 더 깊이있게 파악하기 위한 인식론/방법론쯤으로 생각하니 어렵게만 생각했던 구조주의의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푸코의 여러 계보학 작업도 그런 의미에서 후기 구조주의로 불리는 거구나 싶어졌고. 그렇게 느슨하게 내멋대로 퉁쳐 이해하고보니, 타츠루의 말대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구조주의란 그냥 상식 속에 ‘이미’ 들어와있는 당연한 사고 관습 맞는 듯. 아니면 동양인이어서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가.

“(21) 그렇게 보면 포스트 구조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구조주의를 상식으로 간주하는 사상사적 관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됩니다.  ... 왜일까요? 그것은 지금 내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자체가 ‘구조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상식이 된 어떤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편견의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자각 자체가 구조주의가 안고 있는 중요한 단면입니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에 대한 이야기는 딱 여기까지만ㅋㅋ
사실 내가 급 이 페이퍼를 쓰는 이유는.... 성의 역사를 읽다보니 이 책이 얼마나 쉽게 쓰여졌는 지 더욱더 칭찬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

“(7-8)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모르는 것일까요? 왜 이제까지 그것을 모른 채 지내왔을까요? 게을러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모르고 있는 이유는 대개 한 가지 뿐 입니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가?’라는 물음을 정확하게 인지하면 우리가 ‘거기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와, 이 책을 다 안읽으면 괜히 내가 알고 싶어하지 않는 못난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맥락은 좀 다르지만) 위의 인용 구절은 여전히 페미니즘을 모른다고 당당히 말하는 남성들에게 복붙해서 고대로 적용하고 싶은 명문이기도 하다. 넌 근면하고 성실하게 모르기 위해 노력해왔어... 여전히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니가 들이는 노력을 생각해봐. 요즘 같은 시대마저도 페미니즘을 모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네 필사적인 눈돌림에 작용하고 있는 강력한 무의식적 억압을 검토해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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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소쉬르는 언어활동이 별자리를 보는 것처럼 원래 선이 그어져있지 않은 세계에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별자리를 정하듯 정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27) 일례로 장기를 두려고 하는데 졸이 하나 없는 경우 ‘자, 이걸로 졸을 대신 하지 뭐’라고 말하고 귤껍질을 잘라서 장기판에 놓는다고 했을 때 장기를 두는 사림이 그 ‘약속’에 합의를 하면 장기는 계속 진행됩니다. 그러나 ‘귤껍질’과 ‘졸’사이에는 그 어떠한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결합이 없습니다. 이런 엉터리가 ‘기호’의 본질입니다.
소쉬르는 ‘귤껍질’ 과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표시’를 ‘의미하는 것(시니피앙)’으로, ‘장기의 졸의 작용’을 ‘의미되는 것(시니피에)’이라고 불렀습니다. 기호란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세트이며,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이 둘을 합친 것이 ‘기호’ 입니다.”


구조주의의 아버지뻘이 된다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이렇게 별자리로 아름답게 정리해버렸다. 게다가 기표-기의-기호를 설명한 예시의 찰떡스러움을 보라지. 귤껍질과 장기졸 이라니 너무 사르르 이해되어 버려서... 아.. 탁월해.. 타츠루씨 돈만 있으면 제 철학 과외 선생님으로 영입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바로 푸코 뿌수고 한번에 버틀러로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아요..(마음만)...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은 없고 그것은 어떤 약속일 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그러한 약속-관계-구조로 파악/이해해야한다는 소쉬르의 주장은 이후 구조주의가 탄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난 현상이 있고 난 후 언어가 생겨난다는 고전적인 입장이 강했다. 지금도 그 생각이 더 기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물/현상에 대한 언어가 없다면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어느정도 수긍하게 되는 것은 ‘이름없는 문제’로 여겨졌던 페미니즘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는 별들을 구획으로 정리해서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 어떤 현상들은 엄밀하게 인식되고 포착되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에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그것은 실재하게 된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 것, 언어로 확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합의일 수도 있고, 약속일 수도 있으나 그 저변에는 힘이 작용한다. 여성들의 문제가 ‘이름없는 문제’였던 이유도, 페미니즘 입문서로 한국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 인것도- 여성에게 오랫동안 말과 힘이 없었음의 반증이다. 그러므로 이름 붙여야 한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생겨날지를 생각하면 벅차서 눈물이 찔끔난다. 나는 그 언어를 만들어내는 여성들을 지지할 것이고, 기꺼이 공부하기로 다짐한다. 그 언어들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힘을 갖게 되는 미래의 어떤 날을 생각한다.

*

대표적 후기 구조주의자 이지만 구조주의자로 불리기 싫어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을 열었다고 평가되나 그 자신은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주장한다는 모순의 왕 푸코는 (응, 네 너 잘났어요) 그 자신의 ‘권력/지식’( : 푸코는 지식을 권력관계와 정보에 대한 욕망이 결합되는 지점이라 규정하고, 지식이 언제나 권력관계를 동반한다는 의미에서 지식을 ‘권력/지식’이라고 정의한다, 사라밀스의 책 인용)이라는 개념에 와서는모순이 폭발하다 못해 자멸하게 되는 모양새인데 그에 대한 이야기도 쉽고 재밌었다.

“(120) 푸코의 사회사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의 ‘성의 담론화’에 대한 비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권력’이라는 말을 단순히 ‘국가권력’이라든지, 그것이 조종하는 각종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실체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권력’이란 모든 수준의 인간적 활동을 분류하고, 명명하고, 표준화하여 공공의 문화재로 지의 목록에 등록하려고 하는 ‘축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 비판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권력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실질적으로 열거하고 목록화해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부여하는 한 그것 자체가 이미 ‘권력’으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권력 비판’의 이론을 세웠다는 식으로 결론을 짓는 것 역시 그가 진정으로 원한 일이 아닙니다. 푸코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적혀있는 푸코의 학술적 이론도, 그리고 (이 책을 포함해서) 푸코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기술되거나 소개되는 모든 저술 또한 숙명적으로 ‘권력’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현재 푸코의 저작은 전 세계의 사회과학 ㆍ 인문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이며 이를 ‘공부하는 것’은 제도권 내에서 거의 의무처럼 되어 있습니다. 대학원생들은 푸코의 용어를 구사하고 푸코의 도식에 의거해 생각하며 추론하는 것을 거의 강제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권력=지’를 낳는 ‘표준화의 압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 이 역설을 예지하고 푸코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저같은 민간인(?)도 어쩔 수 없이(!) 읽고 있는 걸 보면요. 참 권력이 되셨소. 고통은 본인이 의도한 것 아니겠소? ㅋㅋ 고통받으라, 푸코선생.

*

“(197-99)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신분석적 대화는 피분석자가 ‘정말로 체험했던 것’과 ‘정말로 생각했던 것’을 찾아내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분석자는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중심의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없는 구조적인 ‘채워지지 않음’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분석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헛소리’입니다. 피분석자는 전력을 다해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는 피분석자가 그것이 자기라고 굳게 믿을 수록 단지 그와 비슷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점근선적인 접근에 불과했다고 해도 자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피분석자와 분석가 사이에서 창작되고 승인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나’의 사실성을 점점 증가시켜주기 때문입니다. .... 계속 되풀이 해서 말하지만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억압된 기억을 되살려내서 진실을 밝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병의 원인이 되는 갈등이 해결된다면 무엇을 생각해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신분석의 사명은 ‘진상의 규명’이 아니라 ‘증후의 관해(정신분열증의 증상이 없어지는 것-옮긴이)’이기 때문입니다.”


부분을 읽으면서는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라는 말이 주는 단호한 위로랄까.
‘요즘 나의 관심은 자아찾기다’라는 식의 글을 꾸준히 적고 있는 데, 사실 이 화두에 몰두하는 것에 적잖이 자신 없었다. 자아는 원래 없는 거 아닐까? 자아찾기야 말로 요즘 이데올로기 아녀? 고생해서 찾고 보니 내 자아가 너무 허접스러우면 어떡함? 등등의 의심+ 질문. 구조주의 관련된 책을 읽으며, 라캉의 작업에 대한 코멘트 속에서 어느정도 해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 데..ㅋ 독서란 참 좋은 것인 듯.

중요한 건 자아의 있고 없음 혹은 그 생겨먹은 모양이 아니라는 것. 결국 진상규명이 되지도 않을 테고, 과정 역시 허망함의 연속을 견뎌야하며, 끝끝내 헛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여도 - 그것에 대해 찾고, 말하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써보려는 시도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보려 한다면- 이 자체가 일종의 치유로서 작용하겠구나. 그거면 충분해. 그러니 나여, 계속 그렇게 하자.


*

친절하고 쉽게 구조주의의 인물과 개념들을 해설해주신 타츠루사마(이제 사마가 되었닼ㅋㅋ)는 마지막으로 나가면서까지 시원시원하게 정리를 해주시는데...

“(217)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된 것이지요.”

난 감동을 먹어버린 것이다. 응응. 넹넹! 그렇군요. 구조주의 4총사 핫핫 늬들 그이야기를 이렇게 어렵게 한거였어? 게다가 어쩐지 이 네명 중에서 푸코가 제일 바보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ㅋㅋㅋㅋ그래서 더 즐거운 책이었다.

*

마지막으로,
“(134)가치중립적인 어법 속에서 그 사회집단 전원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깃들어있다는 바르트의 생각을 보다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 페미니즘 비평의 언어론입니다. 페미니즘 비평 이론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자연적인 어법’이란 남성중심주의’적인 어법입니다. 그것은 온갖 기호 조작을 통해서 끊임없이 남성의 우월성과 위신을 말하고, 정치권력과 사회적 ㆍ문화적 자원을 오직 남성에게 귀속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언어 사용’입니다. 따라서 남자든 여자든 ‘자연적인 어법’으로 말할 때마다 우리 사회에서 ‘패권을 쥔 성 이데올로기’를 되풀이 해서 승인하고 찬미하게 됩니다.”
에 나오는 ‘교묘’라는 번역을 ‘정밀’이라는 단어 쯤으로 교체했으면 어땠을까. 


교묘하다는 말이 지닌 뉘앙스와 활용이라는 단어가 합쳐지니 부정적인 인식을 준다. 또 이 문단 직후에 바로 인용된 쇼샤나 펠만 “여자가 읽을 때, 여자가 쓸 때 - 자전적 페미니즘 비평”이라는 책을 정말 읽어보고 싶은데 국내 번역서는 찾지 못했다 ㅜ_ㅜ 혹시 이 책과 저자에 대해서 아시는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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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친구 자랑 (feat. 똑똑이 친구)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1-01-06 19:41 
    올해 2021년에는 책읽기 습관을 좀 바꿔볼까 한다. 대 여섯 권 정도를 동시에 돌려가며 읽는 편인데, 3분의 2 지점에서 책의 존재를 잃어버리거나, 아예 책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 난감하다. 작년에 시작한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올해의 새 책은, 올해의 열 번째 책이 될 듯 하다. 이 책에 대한 리뷰는 필요 없는데 알라딘 똑똑이 친구의 서재에 가면 아주 좋은 리뷰가 있다. (밑에 먼댓글 참조) 덧붙일 말도 뺄 말도 필요 없다. 한
 
 
cyrus 2020-12-13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샤나 펠만(Shoshana Felman)은 미국의 문학평론가입니다. 이 분은 라캉의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학 비평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도 이름만 들어서 이 분의 자세한 활동 내역은 잘 모르겠어요. 국내에 번역된 펠만의 저서는 없어요. 다만 펠만이 쓴 글 한 편(‘외디푸스를 넘어서’)이 <라깡과 문학>에 수록되어 있어요.

공쟝쟝 2020-12-14 07:44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런 저자였군요. 인용된 한 문단만 읽어도 문학종사자(?)의 느낌이 오더라고요. 언급해주신 글 한편, 독서력을 높인 후 읽어보겠습니다~!

다락방 2020-12-13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는 말을 이토록리나 어렵고 길게 한 거란 말이지요? 맙소사. 어쨌든 저는 이 책을 읽어볼게요.

공쟝쟝 2020-12-14 07:46   좋아요 0 | URL
락방님 굿모닝~월모닝~!! 공부를 너무너무너무너무 열심히해서 바보가 싫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푸코는 ...

단발머리 2020-12-13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고급져서 천천히 꼼꼼히 읽었어요. 나도 이 책 읽어보려고요. 푸코 읽기 전에 읽었으면 좋아겠지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눈이 많이 왔어요. 나도 늙었는가 눈이 반갑지가 않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12-14 07:48   좋아요 0 | URL
이미 푸코에 도착하고 떠나신 님에게는 쉬운 책이겠지만.... 단발님 우리 마음만은 십대자나요 ㅋㅋ 눈이 내리면 꼬마눈사람 만들면서 행복해하고 반가워하고 그래야하는 거 아니예요??

수이 2020-12-13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받으라 푸코선생 ㅋㅋㅋㅋㅋㅋㅋ 푸코 선생 땜시 고생하는 아줌마 1인 추가요!!

공쟝쟝 2020-12-14 07:49   좋아요 0 | URL
그 고통을 즐기는 것 같은 고상하고 고약한 수연님ㅋ

난티나무 2020-12-1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이 글 감탄하며 두 번 읽었어요. 머릿속의 두서없는 생각들을 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
나는 바보가 싫다, 라니... ㅎㅎㅎㅎ

공쟝쟝 2020-12-14 07:51   좋아요 0 | URL
제 글이 이리저리 확확 왔다갔다 해서 그럴 거예요 ㅋㅋ~좋았던 구절 끄집어 쓰다보니 두서없는 독후감이 되었지만, 쪼꼼이라도 어려운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구나 용기를 준 책이었답니다:)

난티나무 2020-12-14 15:43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글이 좋아서 두 번 읽었어요~~~^^

syo 2020-12-13 2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저는 우치다 선생님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제가 읽은 선에서 파악한 그 분의 스탠스는 ˝이퀄리즘˝입니다. 바로 그 이퀄리즘이요ㅋㅋㅋㅋㅋ

아, 저 설명의 천재가....

공쟝쟝 2020-12-14 08:02   좋아요 1 | URL
이퀄리즘ㅋㅋㅋ 설명의 천재가 기를르고 모르고저 하는 것이 있었으니 ㅋㅋㅋㅋ
 
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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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겨울, 적지않은 시간을 보낸 일터를 정리하고 나왔다. 어떻게든 견뎌보려 궁리했었는데, 그 궁리를 그만두면 동시에 내 있을 곳 역시 사라지는 거구나. 나라는 존재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고, 어떻게든 교체될 수 있고, 고유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흔해 빠진 - 흥 하고 풀고 버려지는 티슈 한 장 같은 거,구나, 했었다. 두루말이 화장지처럼 아낌없이 낭비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 번 쓰면 버리는 건 똑같은. 곽에서 뽑아쓰는 티슈. 그것도 딱 한 장 짜리.

현(실)자(각)타임 - 자유로운 모양새로 나풀나풀 땅바닥으로 하강하는 기분으로 일기를 썼더란다. “나는 티슈 한장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이 아주 더럽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누군가는 또 뽑혀 쓰이기를 원할 것이고 결국 그곳은 바뀌지 않겠지.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그러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바뀌어야 하는걸까.”

분명 여기에 더 있으면 안될 것 같아 박차고 나온 것은 나였는 데, 거기엔 일말의 후회나 미련이 없는데. 왜 후련하지 않은 걸까. 이 더러운 기분은 뭔가. 딱히 누군가를 탓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 때, 내가 느낀 건 굴욕감이었을까.

“(160)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 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즉 구조의 담지자로서 구조가 명하는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식이다. 실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굴욕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에게 자존감이 부족한 것이다. 당신은 혹시 어린시절에 사랑을 충분히 못 받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를 달래주어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믿어라! 그리고 당당해져라! 당신이 긍정적일수록 재취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때 부터였나. ‘누구도 쉽게 대체할 수는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척척척 모든 걸해내고, 나 없으면 안될 정도로 열나 유능해지면, 그렇게 일을 엄청 잘해버리게 되면, 나만의 고유한 능력치가 있게 되면, 그러면 이 쓰고 버려지는 드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걸까.

버려진 티슈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능력을 키우려면 일터로 돌아가야하는 거 잖아. 결국 더 노오오력해야한다는 거잖아. 누구 좋으라고? 나? 구겨진 티슈는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구깃한 마음으로는 노력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구김살 없이 기꺼이 쓰고 버려질 젊은 깨끗한 열정의 마음들이 지천에 널려있는 세상이 보였다. 더는 타협없이 생계의 몫을 다해야하는 조건에 놓인 타인의 몸들도 보였다. 다들 왜 저렇게 부지런한거야. 난 또 왜 이렇게 게으른거야.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게으른 티슈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월세가 무거워졌다. 안되겠다, 엉엉. 이미 쉽게 뽑아쓰고 버려질 몸, 인정하자. 나는 대체가능하다. 언제라도. 어떻게라도. 그러니까 너무 잘하려고 하지말자. 정성을 다하려고 하지말자. 아주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자. 그래! 더 싸서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두루말이 휴지가 되겠어!!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있는 고용주 여러분, 저를 마구마구 풀어써주세요. 풀려쓰이는 동안만큼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월급은 밀려선 안돼요. 왜냐 월세는 밀리면 안되니까요. 몇가지 자기계발 공정을 통해 두루마리 휴지로 거듭난 티슈에겐 의외의 좋은 점이 있었다. 저렴하고 막쓸 수 있을 지라도 두루말이 본인에겐 티슈시절에 없던 휴지심이 생겼다는 것. 그것은 텅비었지만, 그래도 심은 ‘심’이다. 나에게 있어 심은 일을 하되 일에 나를 너무 투영하지는 말자는 마음. 일하는 자아와 일하지 않는 자아를 분리시키겠다는 내적 선언.

“(87) 고프먼의 관점에서 사람이란 곧 연기자를 말하는데,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 위에 올라가서 실제로 연기를 하면서 우리의 사람자격을 확인받게 된다. ...그는 가면이 우리의 인격의 일부이며 우리는 가면을 씀으로써, 즉 어떤 역할 또는 성격을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떤의미에서 이 가면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관념 - 우리가 수행하려고 애쓰는 역할-을 대표하는 한, 이 가면은 우리의 더 진실한 자아, 우리가 되고자 하는 자아이다.’ ... 여기서 얼굴과 가면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두기로 하자. 인격과 성격을 구별하듯이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 가면이 우리가 연기하고자 하는 성격과 관련된다면, 얼굴은 그 가면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연기자로서의 우리의 주체성과 관련된다.”

휴지심이 생겨난 두루말이는 새로운 일터에서 모욕쪽에 더 가까운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지금의 나는 진짜 ‘나’는 아니고 일하는 척하는 나를 연기 중”이라고 되뇌일 수 있었다. 달리 어찌 방법이 없었다. 나긴 나인데 내 전부는 아니어야해! 인용된 고프먼의 글을 읽으며 탄복했는 데, 정밀한 사회학적 용어로 서술된 내용들이 피부와 찰싹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내가 연기한다고 가정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을 가면이라고 부르던, 연기라고 명명하든- 일과 자아를 일치시켜서 온전한 굴욕감을 삼키는 것 보다.. 진짜 ‘나’는 다른 곳에 있고, 나는 여기서 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는 사회생활을 하는 대부분이 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당하는 여러가지 모욕은 진짜 ‘나’를 훼손할 수 없다고. 너는 나를 쓰고 버리더라도, 진짜 ‘나’는 버려지지 않는다고.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나라는 현실자각은 끝났는 데. 또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이 지독한 연기를 끝마치고 ‘진짜 나’(편의상 이걸 자아라고 해두자)로 돌아갔으면 싶어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아가 있었으면 좋겠어. 딱 잘라 뜯어내 버릴 수도 없는 이 매일의 기꺼운 연기를 고생했다 토닥이면서도, 또 내일의 연기를 위해 아껴둘 수 있는 가꿔도 볼 수 있는 내 안의 훼손할 수 없는 - 그 무엇. 나는 자아가 있었으면 했다. 그것을 찾아보마 마음먹었다. 솔직히 집착했다. 이 글을 쓰기 바로 전에 알라딘에 올렸던 글도 그런 내용이었다.

자아를 찾자. 자아가 되자. 자아를! 얼굴을! 자아여! 가면 뒤 내 진짜 얼굴이여! 그러나 책은 곧바로 “(89)나는 지금 가면 뒤에 연기되지 않은 진짜 자기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연기하며, 심지어 일기를쓸 때도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다.”고 하네. 나빴다. 흥. 칫. 뿡.

사실, 이 책도 고프먼도 내가 자아라고 이름 붙인 어떤 것(고유한 개인의 내면- 혹은 본질 같은 것)을 다루지는 않는다. 내 뜻대로 신나게 오독해보고 싶었으나, 오독할 건덕지없이 완전봉쇄 당했다.

“(89) 가면의 뒤에 - 즉 얼굴의 자리에-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내면성이 아니라, 신성한 것 또는 명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얼굴을 개인이 맡은 역할이나 그 역할에 대한 그 사람 고유의 해석, 혹은 연기를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자기 이미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얼굴은 그처럼 개별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결코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하지 않을 때, 나아가 그의 연기에 호응하면서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지더라도 못 본 체 할 때, 한 마디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고프먼은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 상호작용의 목표라기보다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상호작용의 목표들은 보통 서로 얼굴을 잃지 않고 또 잃지 않게 하려는 노력속에서 진행된다.”

저같은 독자들이 혹여 다른 길로 샐까봐 열심히 쓰기로한 방향대로 글을 끌어가시는 김현경 저자님. 그렇다. 이책은 개인의 소외감이나 자아의 발견이 아니라 사람-장소-환대에 대한 텍스트 였떤 것이다!

“(25) 이 책은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에서 간과되어온 그림자의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인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나는 일종의 귀류법을 사용하여 -즉 절대적 환대 없이는 사회가 생겨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절대적 환대의 필요성을 증명하려 하였다.”

두루말이는 책을 덮고 고마워졌다. 비록 나는 쓰이고 버려지겠지만, 속은 텅 비어있지만, 어디에 발붙일지 몰라 언제나 불안하지만, 내가 누군지 잘 모른대도, 자아나 내면을 갖추지 않는 대도, 혹여 정말로 휴지조각처럼 온 세계가 나를 대한다 하여도. 그래도 태초에 절대적인 환대를 받았다는. 기억없는 그윽한 기억에 대해.

어쩌면 작고 험난한 내세상과 맞서느라 까먹은 진짜 문제에 대해 어렴풋이 환기해주는 책인지도 몰랐다. 현실에서 느끼는 무력감이나 굴욕감이 커지고, 사람들에게 실망할 수록 ‘구조-사회-역사-등등에 기대는 큰 언설’들이 허공을 헤집는 것만 같았었다. 그래서 차라리 통제가 되는 가장 작은 단위 - 자아(도통 있는지 모르겠는)에 몰두, 자아에 집착했을 지도.. 존엄은 엿바꿔 먹은 것 같은 일상 속에서 너에게 나를 모조리 다 바치지는 않았어!라는 ‘정신승리’로서의 손톱 만큼 남은 상념과 시간들의 확보 = 자아.(이렇게 쓰니 조금 가엾다.) 그 역시 나를 한 장의 티슈로 만들어버린 알고보니 신자유주의씨의 큰 그림이었나. 혹사시키고 내몰아, 모두를 알 수 없는 허망한 자아찾기 게임에 몰두시키는?

아아, 언제나 눈 똑바로 떠야한다. 눈은 똑바로 뜰텐데, 지금 그만두면 좀 아쉬워 질 것 같으니 저는 당분간 이 게임에 심취해 있겠습니다. 설령 없다한들, 그게 그닥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한들,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만이 지금을 사는 방식이라..... 두루말이는 변명한다. 내 휴지심 안엔 꽤 근사한 무언가가 들어차 있을 지도 몰라!!! (구겨진 휴지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242)신원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절대적 환대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한번도 그런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 그런 사회는 언제나 이미 도래해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봤거나,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환대’라는 눈에 익지 않은 그 단어에는 🥺 괜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버린다. 그러고보면 이 눈물의 정체는 그리움이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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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0-25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야요, 너무 좋쟎아요오~~!! 암튼 저도 이 책 샀는데 (배타고 오고 있는 중;;;) 인용한 구절이 저는 왜 잘 안 읽히지? 넘 어려워. ^^;;; 글을 읽으면서 우리 쟝 님의 글은 머리 쏙 들어오는데 인용글은 게속 주변을 맴돌아서 몇 번을 읽었는데도 이해가 안;;; 나 아무래도 난독증? 아니면 더 심각하게 이해능력 부족? 자아를 생각하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침요.ㅠㅠ 하지만 책 제목에 왜 환대가 들어가는지 알게되어서 끄덕끄덕,,,우야쯘둥, 우리 쟝 님 글 정말 잘 쓰신다!!^^

공쟝쟝 2020-10-25 11:45   좋아요 0 | URL
이 책 전체적으로도 하나의 완결성(?)을 갖고 있는 책이라 주욱 따라가면서 읽어야할 것 같아요. 인용한 밑줄들은 와닿았던 구절들이었는 데, 개념에 개념들을 저자 말대로 일종의 귀류법으로 논증해서- 인용만으로는 매력을 느끼기 어려우실지도. 어서 배타고 넘어간 책을 환대하시어, 누리시기를...!!

봄밤 2020-10-25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려진 휴지가 단단한 심을 가진 휴지로 성장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네요. 너무 좋으면서도 어렵게 느껴졌던 책인데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고양이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분 좋은 오전이네요!

공쟝쟝 2020-10-25 11:48   좋아요 1 | URL
그날은 티슈가된 기분이었다... 로 시작한 글이었는 데 쓰다보니 휴지의 성장서사...로 결론 나서, 역시 나는 성장서사 중독인가 ㅋㅋㅋㅋ 하고 웃었더랬죠! 귀여운 냥이 종종 찍어올리겠어요! 일요일 오후 잘 보내세요^.^

난티나무 2020-10-25 15: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휴지심,에 오! 감탄하며 읽다가,
그만 얼마전에 여기 출시된 ‘심 없는 휴지’가 생각나고 말았어요.
현대 사회는 우리의 심도 부정하면서 끝까지 다 풀어써 버리려는 작정일까요.

공쟝쟝 2020-10-26 08:04   좋아요 0 | URL
심없는 돌돌이 휴지라니 ㅠㅡㅠ 그럼 그 휴지는 어디에 거는 걸까요... 휴지에 이입했던 주말이었는 데, 그 휴지 참 쓸쓸하도다...

syo 2020-10-25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가 홉스한테 똥그라미쳤나! 홉스 피부색과 책 표지색의 저 어우러짐은 무엇인가.....
자는데 주먹쥐고 있는 것 좀 봐 ㅠㅠㅠ 엉엉

공쟝쟝 2020-10-26 08:04   좋아요 0 | URL
엉엉... 혼자 냄겨두고 출근하는 에미 맘은 찢어집니다... 귀여운 자 ㅠㅠ
 
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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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읽고 생각해야지. 자존감이 핵 쪼그라 들었으니까. 폭풍을 뚫고, 10시 퇴근을 하면서 떠올린 것은 읽다만 김상욱의 물리책이었다. 우주를 생각하면 엄청 거대한 걸 생각하면, 비루한 하루가 아주아주 작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은 나를 양자 역학-작고작은 원자와 전자의 운동-으로 안내하였고...)

“(p.23) 138억년 전, 빛이 처음 생겨난 이후 우주는 팽창을 거듭했다. 빛은 점차 묽어지고 우주를 압도한 건 어둠이다. 어둠은 우주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으며, 어둠이 없는 비좁은 간극으로 가녀린 별빛이 달린다.”

어둠을 통과하고 있었다. 저저번주는 정말정말 극강 힘들었고 일주일에 두번 이틀 연속 눈물이 났고, 안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우울증이 돋을것 같아... 그래서 살짝 퇴사의 뜻을 내비쳤다가 잘해왔으니 좀더 버티라는 소리 듣고 ‘맞아 이시국에 답도 없지’ 급 철회했더란다. 그리고 저번주는 저저번주의 뜻을 내비친 댓가로 정말로 그럴거냐, 불편눈치가 보였고 (요즘은 모두가 퇴사를 원하므로 먼저하는 사람이 역적되는 암묵의 눈치게임 중이다...) 설상가상 월요일 부터 건물에 확진자가 생겨서 (한 층이 폐쇄되었지만 나는 정상 출근을 했다ㅠㅠ) 차라리 코로나에 걸리고 싶었다... (아프다는 구실로 회사를 그만둬도 후회없을 만큼 힘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7월 중순부터였다. 뭔가 100% 다쓰고, 20% 더짜내는 느낌.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잠을 설치자 업무하중이 더 심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은 ‘무한한 가능성(젊음의 특권...?)’이라고 곱게 포장되는 실은 무지 하염없는 삶의 선택지가 정리된다는 거다. 이제 중년을 향해가는 어엿한 어른으로서! 내가 하는 선택은 대체적으로 사지선다형도 아니고 O 아니면 X의 문제인데, 예를들면 출근을 할건가 말건가. O. 이미 하기로 했으면 버스인가 지하철인가. (자가용 없음. 택시비 없음. 전세기는 당연히 없음) 환승2번 버스-지하철. 과 같은 것들. 보통의 나는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만 고민한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으니까 안하고, 꼭 할 필요 없는 일이라면 해야만 하는 것들을 넘어서고 난 후에 한다.

이를테면 꼭 해야만 하는 출근 길에 그다지 내 인생에 필요는 없을 물리학 책을 읽는 달지. 현실과 밀접한 선택지에서 필요는 없지만 좋아하는 어떤 것을 끼워넣어 must를 변용하는 소소한 기쁨, 가능성 없는 으른의 삶, 나쁘지 않다. 책을 읽다 어떤 구절이 엄청 마음에 든다고 해서 뜬금없이 물리학자가 되겠어, 나사에 들어가겠어!! 가 아닌 응 그렇군 다음번에 해야하는 프로젝트는 루빅스 큐브를 이용해 보는 게 좋겠어, 김상욱 글이 좋은데 추석에는 알쓸신잡3를 봐볼까, 정도를 고민할 수 있는 건 정말 좋다. 만약 읽은 책에 압도되어 우주배경복사와 암흑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졌다면, 너무 힘들었을 거다. 암흑물질 너무 궁금한데 수포자가 이공계 대학 갈 수 있나요? 따위를 네이버에 묻고 있을 어린 나를 상상해본다. 다행이다, 증가하기만 한다는 엔트로피 덕에 내가 과거로 갈 수 없어서. 역시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 좋고, 선택지는 양자택일이 좋다.

“(p.112)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은 결국 형태를 이루는 경우의 수가 작은 상황에서 많은 상황으로 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경우의 수’에 ‘엔트로피’라는 이상한 이름을 주면 열역한 제2법칙은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라는 멋진 문장으로 바뀐다.”

OX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나의 우울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더 버틸건지, 확 도망칠건지. 일상에 어떤 사고(accident)가 끼어들지 않고서 4지선다형의 상황에 도달하는 건 드물다. 그런데 지속적인 업무압박에 불안해서 잠을 설치는 사고가 생겼다. 안그래도 불안한데, 피곤하니까 더 불안해졌고, 드디어 그만둬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는 순간 생각할 일이 사지선다가 되어 더 불안해져 버렸다. 도망친다면 그냥 막도망을 칠건지, 퇴로를 만들어 놓고 칠건지. 버틴다면 지금과 똑같이 버틸건지,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견디는 방법이 있기는 한지.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지니까-, 난 아무 생각없이 ‘3.똑같이 버티기’를 기꺼이 해 볼 요량이었다. 3번을 살면 벅찬 일상 중에 아주 포~도~시 물리학 책(정말 나와는 아-무-상관없는 데 그래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같은 걸 읽을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풍족하진 않지만 그 자유가 흔치 않아 더 달콤하게도 느껴졌더랬다. 그런데 정말 힘들다는 건, 읽을 시간이 생겨도 읽지 못한다는 것. 틈틈히 만들어놓은 일상의 숨쉴구멍들 틈으로 걱정과 불안들이 꽉 들어차서 숨쉬기가 더 어려워 진 다는 것.

그러고보면 도망치는 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하고,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 인생에 몇번의 도망침(그만 버티기)들이 있었는 데. 돌이켜보니 도망을 결단할 때의 나는 진짜 용감했고, 될대로 되라지 나는 나를 믿어(!) 자존감도 있었고, 어떤 말들을 튕겨낼 수 있는 기운도 있었던 것 같다. 이번의 도망에 대한 불타오르는 욕구.....를 봉쇄(?)당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차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견딜만해서/견뎌야만해서’ 가 아니라 “그래도!!!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을 못.....해서 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아. 생각해보니까. 난 그만한다는 말 되게 못하는 사람이었어. 그..그랬지. (되풀이 되는 버티기의 악몽이여)

왜 그만둔다는 말도 못하냐, 가슴을 치고 돌아와 도망의 선택지를 지웠다. OX의세계로 돌아 온 것이다. 주말에는 잠을 푹잤다. 움찔움찔 기미가 보이는 이내 찾아올 우울을 그냥 기다리기로했다. 모르지, 축 쳐져서 다니면 그냥 그만두라고 할지도? 도망의 권리마저 회사에게 넘겨버리자. 그렇게 맘을 먹었고 또 월요일이왔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업무압박도 야근도 가스라이팅도 여전한데, 그냥 정말로 괜찮아져 버린거다. 복잡한 생각을 안하게 되니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 빛과 물질. 가장 큰것과 가장 작은 것. 최소작용의 원리와 양자역학. 중력의 법칙 같은 것들. 그렇게 안 읽히던 것들이 잘도 읽혔다. 모르는 데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퇴근 후 제법 긴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집에와서 김상욱의 신간이 들어있는 책 택배상자를 뜯고, 고양이 발톱을 깎아주고, 355ml 맥주를 두캔 따라마셨다.

“(p.250) 물리는 한마디로 우주에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뜻하지 않은 복잡성이 운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다. 생명체는 정교한 분자화학기계에 불과하다. 초기에 어떤 조건이 주어졌는지는 우연이다. 하루가 24시간이거나 1년이 365일 인 것은 우연이다.”

물리를 좋아하기로 했다.
해야할 일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암 때고 도망가도 물리는 잡지 않을 거다.
못해도 상관없는 데, 의미마저 없다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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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9-05 0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상평을 넘어선 진정한 과학에세이에 감동했어요! 힘내시구요, 즐건 주말되십시요!

공쟝쟝 2020-09-05 09:08   좋아요 1 | URL
진정한 과학을 1도 모르는 에세이지만, 일상을 잊는데 물리는 제격이었습니다! 즐거운 주발 보내세요~!

초딩 2020-09-05 0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데도 알 것 같다
떨림과 울림 만큼 마음에 드는 제목입니다 ㅎㅎ

공쟝쟝 2020-09-05 09:11   좋아요 2 | URL
이 책의 제목이 제가 책을 집어드는 데 한몫했어요.. 역시 제목은 중요해~~~~~

2020-09-05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5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9-05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이 오랜만에 길고 길게 써줄 땐 늘 좋지만, 이렇게 힘들고 아프니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ㅠㅠ 아침부터 넘넘 슬픔...떨리고 울림...이 책 나도 봤는데 역시나 기억이 안 나요 ㅋㅋ그런데도 김상욱님 과학공부책 이 책 보고 야심차게 양자공부책까지 샀어!!! 무용한 것에 비비대는 삶...도망치는 기준은 도망치고도 뒤도 안 돌아보고 침도 그쪽으로 안 뱉고 후회없다! 하면 당장 그곳을 나오시구... 빈 주머니와 비우지 못하는 장바구니 등등으로 결국 작은 후회라도 할 거 같으면 존버하는 겁니다...그래서 저는 존버,...존덴버...존버거...주말 푹 쉬고 조금조금 나아지길.

공쟝쟝 2020-09-05 09:16   좋아요 1 | URL
좀 배워야 할 것들이 있어서 ㅠㅠㅠ 존저 존덴버 존버거.........
퇴로를 준비하고, 도망칠거야!!!!!!! 그땐 존버거도 읽을 겁니다.. 히히..

비연 2020-09-05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상욱님의 책을 또 사야 하나... 쟝쟝님이 물리에 관심을 가진다니 왜 이리 기쁜지.

공쟝쟝 2020-09-05 09:17   좋아요 1 | URL
독서 느무 좋아요. 과학책 애송이가 비연님께 의지하며, 아는 기쁨을 누려볼것입니다!

2020-09-05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3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2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2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