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2)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의 순간으로 돌아가서 젊은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가 가진 생각과 기분과 세계관과 계획에 대해서 들어고보 싶다. 그리고 나는 단 한마디도 그를 가르치려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고맙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나의 불완전한 삶 전체에서 잠시나마 충만함의 기억을 선물해준 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하였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이 구절에서 놀랐다. ‘단 한마디도 그 때의 나를 가르치려들지 않을 것이다’라는 단호한 결심. 나라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가르칠 것이다. 그 때의 내가 대화는 커녕 입도 벙긋 못하도록. “그 사람은 만나지마. 그애를 사귄다면 좋은 경험이 될거야. 그들의 목소리를 너무 신경쓰지마. 그 이야기는 마음에 담아두지마. 겨우 그 일로 그렇게 슬퍼하지마. 그 후배는 너무 믿지 않는게 좋을거야. 그 공부는 별 도움이 안돼. 네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술 좀 그만 먹어. 끼니 좀 거르지마. 요가나 스트레칭을 열심히해. 빨리 경제적으로 자립해. 니가 믿는 것이 너를 가장 힘들게 할거야. 적당히 의심해. 그 사람 존경하지마!” 등등등. 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혹시 모르니까 리스트를 좀 적어둘까.

그러나 알고 있다. 그 때의 나는 아주 도전적인 눈을 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지금의 나에게 말하겠지. “낙장불입이야. 내가 책임져. 난 지금 누구보다 진실하고 진지한 선택들을 하고있다고. 잔소리 그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완전함과 충만함으로 당당했고, 이상에 가슴이 뛰었다. 용감하고 겁없는 그때의 반짝이는 나를 떠올리면, 한편으로는 부끄럽지만 보다 더 많이 사랑스럽다. 그래도 덜 사랑스러워도 좋으니까 조금은 늙은 생각을 하면 좋겠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너무 진지했고 너무 마음을 많이 바쳤기 때문에 훗날의 네가 많이 부서질지도 몰라. 그러니 너무 열심히 하지마.”



*

팟캐를 한편도 빼놓지 않고 들은 것과는 별개로, 채사장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었다. 열한계단은 어쩐지 읽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도서관에 꽂혀있어서 빼온 걸지도) 그리고 책을 읽는 순간, 책이 .. 들렸다!!! 정확히는 책에서 채사장의 목소리가... (-_-;;)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채사장 톤으로)

성경과 자본론이라니.
읽을 생각을 하면 하품부터 나올 것 같은 고전들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은 딱 지대넓얕의 그 느낌이지만, 사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고전마다 담겨있는 채사장의 성장서사였다. 덮고나니 한편의 잘 만든 성장 영화를 본 것 같기도. (일러스트 내 취향)

넘겨짚자면 채사장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에 앞부분 보다는 뒷부분에 있는 듯하다. 티벳사자의 서-우파니샤드 등으로 정리된 죽음과 내세, 혹은 내면과 영적자아(?) 같은.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통해서도 슬쩍 내비친 것 같긴 한데, 정작 인기를 얻은 것은 ‘세계에 대한 쉽고 재밌는 지식’이라는 컨셉이었던 듯 하고.

“(p.333)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현시대가 구획지어놓은 과학과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 머물며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놀라워하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넣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 이후에 대한 논의가 미스터리 서가에 버려져있는 것이 아쉽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죽음 이후의 문제를 어덯게 다루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주기 대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후에 대한 논의 없이 삶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죽음 이후를 배제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는 실제 인간의 삶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 두가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당신 스스로의 이해. 학문은 죽음 이후에 대해 논의하지 않아도 문제 없지만, 당신의 삶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서구 근현대 합리주의의 파수꾼이 아니라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창조자 이길 바란다.”


아마 최근에 나온 책이 이 주제를 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대중적인 소재도 아니거니와 약간 사이비 냄새도 나고(ㅋ) 해서 돈 안되는 것과 비효율을 증오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전작들 만큼 먹힐라냐 싶긴 한데- 그래도 채사장인데 먹히겠지뭐. 괜한 남 걱정...

<열한계단>을 읽고나니 개인적으로는 채사장이 권하는 이쪽 분야(죽음, 자아, 영적 세계, 내세, 내지는 초월)에 관심이 생겼다. 물론 팟캐스트로 들을 당시에는 “와, 이 인간 특이하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

“(p.401)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아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책의 처음에서 세네카의 격언 "출항과 동시에 폭풍을 만나 표류했다고 해서 그가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항해를 한게 아니라 오랜기간 수면위에 떠있었을 뿐이다." 언급했던 채사장은 책의 말미에서 다시금 바다로 돌아온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시작하며 열한계단-열두 계단 째를 올랐지만 그가 도달한 어떤 결론은 - '자아'란 결국 수평선(눈에 보이는 경계이지만 사실은 어져있는, 이어져있음으로 닫혀있는)과 같지 않겠느냐는 말 같기도 하고. 알듯 말듯. 일종의 열린/닫힌 결말인건가.

듣기만 하다가 글로 읽고 나니, 채사장은 생각보다 진지하고 또 진지하고 지극히 진지한 사람인 것 같다. 자기 삶을 어떤 서사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탁월한 이야기꾼이기도 하고. 어쩌면 사춘기 때 이후로는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들에 대해 채사장 덕에 생각해보게 될지 모를 일이다. 내일은 채사장의 다음책을 읽어봐야겠다.

(덧, 그러고 보니 알쓸신잡 제목 지대넓얕 따라했다더니..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의 제목도 채사장의 ‘열한 계단’을 카피한 것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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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9-18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대넓얕 정말 열심히 들었는데... 책은 한 권도 안 읽었네요.
그래서 저기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가... 들려요 ㅋㅋㅋ

공쟝쟝 2018-09-18 23:21   좋아요 2 | URL
열한계단은 재밌었어요~!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이나 시민의 교양 같은 책들은 뭘 두번을 듣나 싶어 안봤지만요~!

고양이라디오 2018-09-28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채사장책 다 읽었습니다. <열한계단>이 가장 좋았습니다^^

저도 과거의 저를 만난다면 멘토역할을 하고 싶긴합니다...

공쟝쟝 2018-09-29 01:49   좋아요 1 | URL
호오~ 저는 지금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읽고 있어요. 확실히 열한계단이 더 좋네용 ㅎㅎㅎ 채사장 책은 채사장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착시(?) 현상이..!!
 
꿈에게 길을 묻다 - 트라우마를 넘어선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서
고혜경 지음, 광주트라우마센터 기획 / 나무연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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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꿈 속에서 비행기가 꽝꽝 떨어지곤 했다. 뒤에서 꽝, 앞에서 꽝, 산너머에서 빌딩 뒤에서 꽝! 소리만 들리고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곤 했다.
돌이켜 보면 네가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추락했다는 내면의 암시였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후로도 몇 년동안 수 십번 (기억 못하는 것까지 합하면 수백번) 비슷한 내용의 꿈을 꾸었다.
내가 믿었던 것들을 어렵사리 포기하고 난뒤, 거짓말처럼 나는 다시는 그 꿈을 꾸지 않았다. 


*

좋은 꿈을 꾸면 로또를 사는 우리들은 꿈이란 미래를 내다보는 계시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사실 꿈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과거와 현재가 나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일 가능성이 높다.
난 종종 기억에 남는 꿈을 꾸는 날이면 그 때 느낀 감정과 은유들을 해석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잘 몰랐던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 항상 완벽하게 깨닫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꿈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

518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7명의 아저씨들은 30년이 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심각한 악몽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고 겨우 잠들거나, 불을 키고 자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 생의 1/3은 잠을 자는 것이 인간의 생리이니 그들은 적어도 10년의 시간을 악몽 속에서 고통받아왔다. 깨어있는 시간인들 괴롭지 않았을까. 518이 사건으로서의 상처였다면, 살아남은 이들이 겪어낸 세월은 그야말로 생지옥.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그룹투사 꿈작업가 고혜경을 불러 그분들과 꿈 분석-치료를 시작한다. 잠을 자고 꿈을 꾸고 꿈을 적고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고, 바꿔 꾸면서 그들의 사회적-개인적 트라우마를 조금씩 달래가는 과정의 녹취를 묶은 책이다.
꿈작업 참여자들은 모진 고통을 겪은 이들이지만 꼭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읽고 공감할 수 있다.
왜 아닐까. 우리모두는 연결되어있으므로- 사회의 상처는 모든 개인의 상처의 다른말이다. 나는 그들의 증언과 그들이 꾸는 꿈에서 놀랍도록 일치하는 경험과 꿈들을 발견하곤 했다.

*

악몽은 나쁜 꿈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매우 시급한 문제를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며, 사건의 해결을 촉구하는 무의식의 붙잡음이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꿈을 기억할 수 있다면,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결국 스스로와도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p.119)
보세요, 뭔가 할 수 있지요. 어떤 상황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내셨어요. 가위에서 벗어날 힘이 내 안에 있어요. 마비가 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건 내 안에 마비를 풀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꿈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고요. 고통이나 두려움에 압도당하면 그 사실을 잊게 되지요.
518때 고문당한 분들 아니면 이와 유사한 극한사황에 처해서 그 뒤에 트라우마를 앓는 분들이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 같아요. ‘인간은 절대 무력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무력했다면 지금까지 살아 계시지 못할거예요.


무척 감명깊게 읽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었다. 특히 자면서 악몽을 꾸는 사람, 비슷한 꿈을 되풀이해 꾸는 사람, 자주 가위에 눌리는 사람들은 꼭 읽었으면. (현실적 팁 제공)
또한 현재 우리에게 산재한 구조적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해결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 약간은 다른 장르의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도 좋다.

한동안 인류애도 떨어지고, 역시 인간은 지옥인가 절레절레 했었는 데- 읽으면서 잠시.. 아주 잠시(!) 사람에 대해 긍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흘만에 까먹었다고 한다.. 인류애 지못미..)

덮고나면 “트라우마를 넘어선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서”라는 책의 부제가 더 또렷이 보인다.
우리의 내면엔 우리가 감지한 것 보가 더 강한 힘이 있어,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극복할 것이다. 알기 쉽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단단한 인간 내면의 세계를 책으로나마 경험해 보시기를.


“(p.274)
김광현 : 518때 기동타격대 활동을 했던 제 동지들 중에서 민재, 석홍이, 창규란 친구가 죽었어요. 둘은 국립묘지에 들어갔는데, 안타깝게도 한 명은 구묘역에 있지요. 평상시에도 가끔 생각나면 밤중에 그놈들을 찾아가곤 해요. ... 또다시 잠들었는데, 이번에는 평소처럼 술을 사들고 망월동에 갔어요. 세사람 무덤에 가서 술을 비웠는데, 문득 우리 넷이 한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다들 별말 없었는데, 석홍이만 막 울었어요. 나만 많이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요. 그러더니 자기는 먼저 가야겠다면서 일어나버리더군요. 그 친구를 막 붙잡다가 깨어났어요.
...... 공중파에서 제 이런 이야기를 촬영해서 방영한 적이 있어요. 거기 나온 저를 보면 미친놈에 알콜중독자, 정신병자에요.
..
고혜경 : ..... 꿈이 전개되는 자리가 망월동 묘지여서인지 꿈 자체가 생사와 시공을 초월해요. 이 긴 세월 혼자서 술 사들고 묘지를 찾아와 독백해오던 입장이 되어보니, 이 독백에 드디어 친구들이 화답해주는 듯 해요. 저는 이 자리가 제 안에서 일어나는 화해의 자리 같아요. 그동안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우정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드디어 그 전환이 일어나요. 30여 년 지나 다시 만난 우리에게는 우정이 더 소중해요. 친구들이 나를 염려하고 위로해주는 장면은 뭉클해요. ˝너 힘든 것 알아, 그동안 짊어진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아.˝ 이렇게 내 마음을 알아줘요. 그런데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요. ˝그간 애 많이 썼다.˝ 드디어 내가 나 자신에게 친절해져요. 이는 긴 세월 내가 나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에요.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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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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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가 넘는 많은 목소리와 증언을 읽었지만, 가장 인상 적이었던 부분은 이 목소리들을 기록하는 저자-알렉시예비치-의 관점이었다.

“(p.272)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작은 것, 평범한 것, 오류와 나약함, 감정, 일상과 느낌을 훑어내는 그녀의 기록들은 (보다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 본질과 비본질 등을 나눠서 생각하기 익숙했을) 소비에트 당국에게는 아쉽게 느껴졌을 것이다. 추측컨대, 때문에 이 글들은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녀도 권력과 불화하지 않았나 싶다.

“(p.36) ..나는 그저 녹취만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고통이 작고 연약한 사람을 크고 강인한 사람으로 빚어내는 곳에서 인간의 영혼을 모으고 그 자취를 좇는다. 인간이 자라고 성장하는 그곳에서.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더이상 말 못하는 벙어리도,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그 사람의 영혼조차 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권력과 갈등을 빚는 이유는 뭘까?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에는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17년후) 옛 일기장을 펼쳐본다.... 일기를 쓸 당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쓴다. 그때의 나는 이미 없다. 심지어 그때 우리가 살았던 나라도 이젠 없다.“ 

_

어쩐지 여성과 전쟁이라는 주제보다는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책. 

당국이 그녀의 기록을 재단하는 수준의 경직성을 빨리 쇄신했더라면,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 바꿔치기 하려는 욕망(p.188)“을 누그려뜨릴 수 있었다면, 책 속에서 말하는 ‘작은 의문들’을 포용할 수 있었더라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었던 소련의 사회주의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까. 입맛이 썼다. 아쉬워서. 제국주의를 쳐부수자면서 제국주의 만큼의 유연성도 없었던 그곳 혁명가들의 모습이.

그녀의 작업과 초창기 글들에는 (당국의 입장에서는) 문제적인 지적이었을 지언정 분명 애정이 배어있었다. 질문을 용납하지 못하는 검열과 적대가 결국 작가가 애정을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만약을 뒤로하고 어쨌든 세월은 흘러버렸다. 그들이 강조하고 싶었던 승리는 물론,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조국마저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삭제시키고 싶어했던 기록들은 남았다. 작고, 사소해서 교훈적이지 않다고 판단된 증언들은 고스란히 책으로 출간되어 2015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게 된다.

_

그리고, 두번의 역설. 
현실의 사회주의가 삭제되버린 현재의 나는 소련당국이 강조하고 싶어했던 부분-그들의 위업, 이념, 이상, 대의-의 텍스트를  오히려 찾아 읽기 어렵다. 그들이 남기고자 했던 내용들없이 그들이 버리고자 했던 남은 원고 더미를 더 먼저 읽게 된 것이다. 
다행이 알렉시예비치는 성실하게 기록하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수집한 증언들에는 작은 것과 큰 것들이 뒤섞여 있어서  나는 (당시의) 큰 목소리를  어렴풋이 유추해보았다.

“(p.317-8)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들은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어. 스탈린이나 레닌을 믿은게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을 믿었지. 나중에 사람들이 이름붙인 것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믿은 거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복.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 바로 그걸 믿었어. 그들이 꿈꾸는 자들이고 이상주의자들이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해. 하지만 눈먼 자들이었다는 의견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 절대로! ... 신념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군대처럼 그렇게 강력하고 군기가 센 유럽 전체를 호령한 그런 무서운 적을 물리치지 못했을 거야. ..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공포가 아니라 신념이었다고, 공산당원의 명예를 걸고 당신한테 말할 수 있어. 나는 전쟁중에 공산당에 가입했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공산주의자야. 나는 내 당원증이 부끄럽지 않아.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 내 믿음은 1941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

2차대전당시 소비에트 군대에는 무려 백만명의 여성들이 자원입대해 용맹하게 싸웠다고 한다. 맹목적 선동과 (우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내면화된 국가주의 만을 소녀병사들의 동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에 와서야 허망하게 들리는 어떤 ism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젊음은 물론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
기실 그들의 참전이 없었다면, 우리의 해방도 장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_
그래서 조금 복잡해졌다. 그녀들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해야하는 것 인지.. 그저 가엾게만 여긴다거나, 숭고한 희생이라고 마냥 찬미한다거나, 전쟁을 기념/반대하자 뚝딱 정리해버린다거나, 혹은 모른체 한다거나 - 여타의 쉬운 방식으로 간단히 교훈! 끝! 하는 거야 말로 기껏 듣게 된 목소리를 오독해버리는 느낌이라서. 

작은 것을 작다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없어져 버렸다.
알렉시예비치가 적었듯. “한 사람 만으로도 벅차다.  ... 그 안에서 길을 헤맬 만큼”

“(p.267)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잇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영토-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나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저자는 가장 어려운 길을 내놓는다.
사랑. 
그거야 말로 역사보다 전쟁보다 난해한 것 아닌가.

_
정말로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가? 
쉬웠으면 좋겠다, 단순했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는 뭉툭한 생각이 어떤식의 폭력으로 비화되기도 하는 지를 되짚는 요즘이다. 
나는 조금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바라보고 싶다.
그러면서도 애시당초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라서 이해할 수 없음을 끌어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_
아아, 결론내지 않겠다. 
당분간은 결론내지 않음을 견디는 연습을 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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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07-01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읽으셨구나

공쟝쟝 2022-07-01 10:42   좋아요 1 | URL
또 읽을 겁니다. 이 때의 저와는 다릅니다 ^^
 
공부 공부 - 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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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할 때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자라서 결국 공부가 업이 되어버린 저자 엄기호의 책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하던 그는 이제 자신이 ‘망가지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한다. 공부하느라 바빠 공부를 잊어버린 오늘의 우리에게 자신과 화해하는 ‘공부’를 당부하는 책.

공부를 ‘잘’하고 싶은 사람보다, ‘자신을 배려하는 일에 서투른 사람’이나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p.18) 그렇기에 공부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자유와 해방의 도구이자 과정이다. 다만 이때 경계해야할 것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데 집중하느라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점이다. 이미 한국 사회는 세상을 ‘돌보느라’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다. 아니, 세상을 이렇게 바꿀 수록 더 나락에 떨어진 세상이 만들어진다.

엄기호씨 책답게 우리가 무심히 넘겨오는 단어들의 개념 -공부, 배움, 겪음, 자아실현, 자기배려, 다룸, 한계, 자유, 기예 등등-을 엄밀하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읽다보면 왜 한 말을 또 하나 싶을 때가 있지만, 그 한 말을 또 되풀이 해서 읽는 동안에 그동안 내가 안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단지 내가 ‘안다고 믿은 것’들일 뿐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그렇게 읽는 이가 모른다는 것-한계-을 알게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일지도.

*

거칠게 감상을 적자면, 나는 일반적 의미로서의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단, 잘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워 깨닫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라는 것은 두루뭉수루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래서 이책 저책 뒤적이고 기웃거리는 걸지도) 젊었을 때의 난 어떤 물음표들이 다가왔을 때 골똘히 생각할 줄 몰랐다. 불안해 하지 않으면서 혼자일 줄 몰랐고, 멈춤의 시간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세상 속에서 살기도 했으니까. 공부에서 느꼈을 기쁨의 순간들은 내게서 익어갈 충분한 시간을 부여받지 못함으로 인해 어떤 결실로 연결되지 못했다. 성과없는 배움을 쳐주지 않는 사회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할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이것저것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즉, 나는 배웠으나 배우지 못했다.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 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핑계를 대자면 과정을 생략해버린 사회에서 무언가를 ‘익힐’ 충분한 시간이란 - 곧 비용이었고, 비용이 없으므로 용기내기 어려웠다.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인간.
무언가를 제대로 익혀본 적 없는 인간.
자유를 모르는 인간.

“ (p.241) 익힘의 과정이 부재하므로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어진다. 대신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오로지 외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문제만 해결되면 자기는 자유롭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기예의 문제를 조건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배움을 넘어 익힘을 통해서만 연마되는 기예가 늘 리 없다. 나는 이것이 지금 한국 교육이 처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조건만을 탓하게 된 불만쟁이.
안타깝지만 그게 지금의 나다.

그러니 이제라도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자아실현이 목적이 아닌, 자기배려가 출발점인 저자가 촉구하는 그 ‘공부’ 말이다.
먼저는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p.178) 그러므로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말하는 타자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대할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모르는 존재, 타자로 대해야 한다. 모를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시작도 않아놓고 다소 섣불리 언젠가를 다짐하자면... 늦으막에 시작한 나의 ‘공부’가 마지막 당부대로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자기배려에서 안주하지 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_

덧, 엄기호씨 책은 역시 재독-삼독 해야 빛이 나는 거 같다. 세번째 읽고나니 텍스트가 새롭게 보였다. 책 자체에서 저자의 공부 흔적이 역력하다. 다음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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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8-28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 않고 꽂아만 둔 책인데, 얼른 읽고 싶어지네요....

공쟝쟝 2018-08-28 21:58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어보세요. 정말 좋습니다 ㅎㅎ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 학살의 문화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수기 통일역사문화신서 1
최태육 지음 / 작가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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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의식 과잉의 20대는 가고, 일상을 조근조근 밟아나가는 것이 새삼스러운 요즘. ‘무엇’보다 ‘왜’보다 ‘어떻게’라는 물음이 따라 붙는다. 이 물음표의 단어는 삶이 조금 축적 된 후라야 중요해지는 것 같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 - 방법과 시간을 들였을 때 천천히 나타나는 류의 어휘랄까.


그때는 ‘무엇’이 중요했다. 뜻, 혹은 명분 어쩌면 실리였을 수도 있겠고. 그러나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어떤’이다. (그 무엇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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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단종.
많은 것을 이루어낸 세조.
그러나 사람들은 세조의 업적보다 영월로 유배된 단종의 산책길을 기억한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것은 세조가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단종이 ‘어떻게’살았느냐이다.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던 단종에게 무엇을 이루겠다는 목적이 있었겠는가?
이 땅의 세민도 단종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할 뿐이다.
단종과 세조의 삶은 이른바 좋은, 심지어 효율성이 있는, 그래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목적을 달성할 때조차도, 어떻게 행동했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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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육 목사의 수기이다. 그러나 목회수기가 아니다. 그는 강화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도중 교인들의 삶에서 한국전쟁과 학살에 관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독교와 학살 관계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과정에서 들은 바와 느낀 바를 적은 책이다. 특이한 것은 정리된 논문 형식이 아니다. 읽으면서 나는 마치 시같다. 라고 생각했다. 쉽게 읽히지 않았고 머릿속에 ‘어떻게’로 생생해졌다.

그런 것 같다.
가까운 과거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싸웠고, 또 왜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당시를 살다간 이들에게는 그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를 살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는 그들이 벌인 ‘어떤 참혹함’만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만이 전해지겠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어떻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역사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들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두환이 광주학살을 저지른 데에도 ‘무슨’ 명분은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두환을 여전히 믿고 따르는 이들은 ‘무엇’을 보라고 말한다. 당시의 ‘북괴’를 보라고. 그가 구현한 ‘업적’을 보라고.
역사를 살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로 바라본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에 먼저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두환, 네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네가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라.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의 가치관과 이념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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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라기도 하고, 만기라기도 알려진 백정,
경찰 황씨가 총살을 하다가 힘들면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만기에게 쏘라고 했다.
정신연령이 낮았던 만기.
정신지체 장애인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해도구가 되어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었던 경찰은 빌라도처럼 막걸리에 손을 씻었다. 그렇게 최소 120명이 살해되었다.(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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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증언자들은 각양각생이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노파, 사람을 다시는 믿을 수 없는 피해자, 70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증언하기위해 평생 사건을 곱씹었을 할아버지, 남의 일 인양 관찰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학살 가담자, 죄의식이 있는 자, 죄의식이 없는 자. 북을 치는 할머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낀 사람. 끝까지 반성하지 않으며 본인에게 도래할 천국을 위해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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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서산·태안에서는 무엇인가를 관철시키겠다는 두 가지의 목적이 충돌하였다.
그 결과 사람의 상식과 양심, 그리고 일상적 삶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목적의식이 경직되면서 사람들이 학살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실상의 일부를 조사하고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를 기록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아마 무엇인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기업, 회사, 시민단체, 학교, 신념에 넘치는 종교단체, 이념에 넘치는 국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무엇이라는 목적이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 일 것이다.
강화 교동면에서는 한국전쟁이 발생한 지 반세기가 지나도 가해자 씨족과 피해자 씨족이 함께 농사를 짓지 않는다. 소원면에서 정씨와 국씨는 한 그릇에 담겨 있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다소 불분명하고 지엽적이지만 전쟁과 학살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전쟁과 학살이 사람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국가가 국민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아저씨가 조카를 죽일 수 있다는 것, 제자가 선생님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친구가 친구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바로 이 두려움이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한 것이다. 학살은 사람에게 두려움에 뿌리를 둔 근원적 불신을 심었다.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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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을 대하는 방식은 사회·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작동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분류, 배제하는 사고방식은
‘어떻게 사느냐’ 보다 ‘삶에서 무엇을 더 이루’고자 했던 사람들의 일부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만나 타자를 절멸시키는 ‘학살’의 옹호자·가담자·가해자로 수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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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무엇’이 아닌 ‘어떻게’를 배웠다. 
‘학살’의 역사를 제대로 치유하기는커녕 직면조차 한 적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혐오, 분류, 배제는 당연한 귀결이다. 국가와 이웃에 의한 직접적인 살해 – 살해에 대한 입 뻥긋 하지 못함 까지도- 그야 말로 ‘존재의 소멸’이라는 공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은 그냥 그저 세대가 간다고 해서 사라질리 없다. (그것은 또한 나의 무의식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해법을 찾아야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나 개인은 더러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
당장 쉬운 태도를 갖추지 말아야지. 내가 쉽다는 것은 이미 의식화조차하지 못한 채로 생각이 끝나 버렸다는 것이고, 그것은 멈춰버렸다는 것. 어떤 완고함. 그것을 경계 해야지.

삶에서 ‘어떻게’가 중요해진다는 것은 만들어 가겠다는 시간을 염두한 다짐이다.
그러니까, 그만큼 비워야 하고 물렁물렁해야하고 움직여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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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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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xo 2020-07-20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 연락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늦게 나마 귀한 글을 써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을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전해주신 것같습니다.
저는 요즘 한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 본 후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분의 삶과 마을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메모를 남깁니다.
제가 알면 연락을 드릴 터인데 죄송합니다. 연락부탁드립니다.

공쟝쟝 2020-08-08 00:46   좋아요 0 | URL
오, 설마 저자 목사님이신가요? (이런 영광이 ㅜㅜㅜ) 읽고 느끼는 바가 많아서 남겼던 리뷰였는데 이렇게 친히 글까지 달아주시다니요. 다음에 쓰실 글도 꼭 찾아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