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천주희 외 지음 / 낮은산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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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있다.
가족과 애인, 아주 안전한 친구관계 몇몇. 독서와 생계. 
1년 가까이 된 것 같다.
쫄았다. 사람들한테.
관계에 들여야하는 ‘마음’이 마른걸레 쥐어짜듯 했다.
마음이 안생겼다.

사람이 어렵다.

웅크려있는 동안 수심깊은 곳에 헤묵어있는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았고, 내가 세상에 얼마나 겁먹어있는 지도 알게 되었다. 나를 돌볼 수 있을 정도로만 강해지자. 그 때 까지, 누구도 돌보겠다고 섣불리 노력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계속 침잠해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무서웠다.

“인간은 취약하다. 병든 개와 걸인 여자 같은 처지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취약하다.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고 돌봄 속에서 살아가고 죽는다. 모든 인간의 공통된 지위로서의 존엄성은 인간의 독립성과 자립, 자율성만이 아니라 인간의 ‘취약함‘을 포함한다. 약하고 상처 입기 쉽기에 그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취약성이다. (...) 상처와 취약함을 부인하는 사람은 의존과 돌봄을 열등함, 또는 무력함과 바꿔치기한다. 상처와 취약함을 부인하는 사람은 고통스러워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존엄성을 함부로 취급한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열등한 것이 아니고 도움을 받는 것이 무력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낙인찍는 사회가 열등함과 무력함을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의 가림막으로 사용할 뿐이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잘나고 제 힘으로 설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상처와 약함을 서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계기라고 한다면, 상처에 대해 뭔가 하려는 반응이 존중일 것이다. (p.103-4)”


마음을 주면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 그게 미치도록 힘들었다.
요즘은 다 끊어낸 그 최소한의 관계에서마저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취약함을 인정하고도, 누군가에게 의존하기가 어렵다.
애초에 건강한 ‘의존’이란거 안해봐서 잘 모르겠다. 침범하거나 흡수하거나 흡수되거나.
그래도 안다. 손 내밀어야 한다는 걸.
타인을 ‘실감’해야 한다는 걸.
그의 약함을 서로 알아보고 싶다. 건강한 의존을 하고 싶다.
내가 알아본 그의 상처가 나의 상처를 열등하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싶다.
존중하고 싶다. 너를.
그래서 한발짝 더 나가고 싶다. 인간.에게로.


p.41
부모가 사는 세계는 침묵의 세계 이지만, 자녀는 두 세계를 오가고, 부딪치고 충돌하며 세계를 점점 확장해 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도 ‘장애‘라는 말로 설명할 수없는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확장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장애‘라는 말로 장애인을 동질한 집단으로 범주화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세계든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그곳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듣지 못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손짓과 표정과 몸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타인이 나의 손짓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친절하고 크게 표현해야한다. 그 이야기를 전달 받은 사람은 상대의 손짓이 끝날 때 까지 응시해야한다. 나는 상대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상대는 응시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 사이에서 언어와 관계의 윤리성을 배운다. 다큐에서 한창 김장준비로 바쁜 엄마에게 불빛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다. 소리 없는 세계는 목소리보다 다양한 손짓과 눈빛으로 다양한 언어를 창조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가 다중 세계에 살고 있다는 감각은, 신비롭고 어렵고 깊은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다.

p.47
‘마음에 들면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하니, 당시 나로서는 이게 웬떡이냐 싶기도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돈이 오가는 세계에서 ‘마음에 들면‘이나 ‘원하는 대로‘같은 말이야 말로 가장 악질적인 어구일수 있다는 걸 몰랐다.

p.49-50
‘무제한의 수정‘과 ‘원고 불채택(퇴짜, 작업비 지급일 지연)‘등을 제멋대로 행사한다. 노동 시간에 따른 임금을 지불해야한다는 대원칙은 실종된다. 약속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수정해도, 정해진 결과물에 따른 최종 지급비는 변하지 않는다. ‘을의 을‘ 입장에서는 다음번 일감도 받아야 생계가 유지 가능하기 때문에, 항의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다.
업체 입장에서 갈수록 많은 일을 외주화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비용을 절감하고, 손쉽게 노동자를 쓰고 버릴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책임‘도 없이 사람을 사용하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용하는 데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외주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책임없는 자유, 리스크 없는 이익, 일화용처럼 쓰고 버릴 수 있는 인적자원에 대한 열망이야말로 이 시대의 꿈이자 시대정신이다.
...
‘책임없는 자유‘는 최종적으로 ‘죽음의 외주화‘로 실현된다.

p.77
대학원이라는 조직에 10년 넘게 자신의 청춘을 바쳐온 젊은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된 사람이 나간 것, 이라고 간편하게 규정지어버렸다. 나 역시 그랬다. 같은 처지에 놓인 이가 한 절박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보면서도 응원과 지지보다는 외면과 비난을 택했다. 나는 그들에게 공감하기 보다는 조직의 논리에 공감했다. 나를 감싼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주변인들과 함께 괴물이 되어갔다. 누군가의 면전에 퍼붓는 욕설이나 물리적 폭력만이 무기가 아니다. 외면하는 것 역시 당사자에게 겨누는 날카로운 칼이 된다.

p.97
여기서 모든 인권의 초석인 모든 사람의 공통된 지위로서의 존엄성은 자리를 잡기 어려워진다. ‘공통된 지위‘를 부인하게 되면 위계와 서열을 정해야하고, 위계의 가장 센 정당화는 ‘열심‘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를 이유로(이주 노동자다, 여성이다, 장애인이다 등등) 보통의 ‘열심‘에 낄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은 이중 삼중으로 차단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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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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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장강명이 제안한 ‘독자들의 새로운 문예운동’이라도 하는 듯 비장한(!) 각오로다가 독후감을 쓴다. 어쩐지 힘이 들어간 글이라서 더 못 쓸 것 같긴 하지만... 오랜기간 암흑물질(?) 독자 인생을 접고 나름의 코멘트로 죽어버린 한국의 출판-문학 시장을 살리는 데 기여해야겠다!!!!!!!! (부릅!)

당선, 합격, 계급.
또! 장강명이다. (이쯤 되면 팬인 것 같다. 인정해야할 듯.) 10년 치 기자짬밥 뚝뚝 묻어난다. 아, 이런 르포도 쓸 수 있구나. 멋지다.

문학공모전에 관심 1도 없었던 데다가, 400쪽이 넘어가는 두꺼운 책이었는데도, 한 번의 지루함 없이 시원하게 읽어 내려갔다. 원래 르포라는 장르가 이렇게 흥미진진한가? 추리소설 같기도,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쓴 에세이 같기도 하다. 공모전과 공채 시스템, 혹은 간판이라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계급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밝혀내고 있으며, 작가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모전을 준비하는 개인들을 위한 팁까지. 속속들이 깔끔한 책이다.

*

“경계 지대는 인정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 된다.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 그 지대에 놓인 사람들로서는 그 기준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도록 필사적으로 애쓴다. 어떤 기준을 적용해도 평판에 손해 볼 일이 없는 사람 (핵심에 있건 완전히 경계밖에 있건)만이 그런 논쟁에 무관심할 수 있다. (p.294)”

완전한 경계 밖. 책을 읽으면서 어떤 박탈감 같은 게 들었다. 여지껏 시스템에 들기 위한 간절한 노력들을 해본 적이 없다. 시험도 공모전도 공채도 도전해 본 적이 없다.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욕심이 없었다.

이미 그럴듯한 대학이라는 간판이 없으므로, 노력해도 제도권 안에 들기는 어렵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시험을 잘풀기 위한 공부는 하기 싫었고,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버는게 아니라 회사를 차려서 돈을 벌고 싶었다. 노력해도 안되는 세상을 통째로 비웃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노오력은 커녕 노력조차 하지 않았구나 싶다.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고 근근이 끼니를 때우지냈다. ‘남들 다 그렇게 살아’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기를 쓰고 살아야했다. 그렇게 외곬으로 제도의 바깥에서 씩씩대며 분투했지만, 세계는 견고했다.

서른이 되자 현실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하던 일에 실력이 붙었다고 느껴져 개인사업자를 등록했다. 월세, 건강보험료, 국민연금, 통신료, 세금들이 딸려온다. 1인분의 몫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 하루를 빠듯하게 써도 최저 생활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어제는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면서 근로장려금 신청도 했다. 근로장려금은 일을 하고 있지만, 소득이 적은 일하는 사람에게 국가가 주는 지원금이다. 


“대체로 어떤 시험을 치고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 신비로운 권위를 얻는다. 그 집단은 주류문단일 수도 있고, 명문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일 수도 있다. 시험에 합격해서 그 단체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만 한번 들어가고 나면 쉽게 퇴출되지 않는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그 단체 구성원이 되는 입시에 통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자격증처럼 작동한다.
이 신비로운 권위를 ‘간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p.289)”


꼭 간판을 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공채나 공모전에 도전하지 않아도, 영세 사업자인 나의 삶은 너무 바쁘고 책 한권을 읽기 위해 고독으로 침잠할 수 있는 겨를 조차 없다. 난 계급상승을 포기한 흙수저다. 한국사회가 인정투쟁을 하다가 탈락된 이 말고도 애초에 인정받을 생각이 없는 이들까지 ‘루저’라고 부른다는 것을 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세속의 기준에서) 난 ‘루저’다.

공모전과 시험을 준비한 사람들만큼 절절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나는 약간은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책을 읽었다. 간판을 욕망해본적도 없다는 사실이 어떤 도덕적 우월감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127만명의 청년들이 ‘9급 공무원’이라는 비생산적인 시험에 몰두하는 것은 분명 사회적 낭비이지만, 시험을 안봤다고 내 인생을 안낭비 한 건 아니라서.

경계지대는 인정투쟁이 치열하겠지만, 인정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생계가 치열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하물며 간판이라는 신화를 쟁취한 이들-합격자들의 세계-라는 것은 몇 억 광년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이런 내가 이상한 걸까.

*

““한국독자에게는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당위성을 줘야 먹혀요. 그 당위성을 위해 문학상이나 명사의 권위가 필요한 거고요. 학교에서 ‘꼭 읽어야할 책’같은 독서 목록을 받아왔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그런 식으로 책을 고르는 것 같아요.”
이건 독자들에게 장편소설 공모전이 좋았던 이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읽어야할 책을 골라야하는 수고를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딱지가 대신해주었다는 얘기다. (p.49)”

르포 초반, 시기별로 내러티브를 가지고 전개되는 문단-한국문학의 흥망성쇠(혹은 명과암) 부분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아아, 이런 모습으로 한국소설이 흘러왔구나 눈에 그려졌다. 그리고 오랜기간 잊고 살았던 ‘퇴마록’과 ‘드래곤라자’ 이후로 끊겨버린 ‘식음을 전폐한 책읽기’가 그리워졌다... 갑자기 재밌는 장르문학 읽고 싶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권위를 갖게 된 것은 상금이나 역사가 아닌 ‘독자가 문학작품을 고르는 데 게을러서’라는 식의 분석 일리 있다. 그러고 보니 딱히 문학작품을 즐겨 읽지 않지만 굳이 눈도장을 찍은 소설은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었다. (읽고 난 후, 박민규 소설 말고는 다 노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수년간 한국소설은 읽지 않았고, 요즘 들어 한권 두권 찾아보며 알게되었다. 한국문학이 재미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나의 취향을 찾는 데 참 게을렀던 거구나 하고.

*

“그런 불이익은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 없이도 발생한다. … 여기서 분명히 밝혀둔다.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가 없어도 부조리가 발생할 수 있다’라는 말은, ‘현재 아무도 악의가 없다.’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시험을 합격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넘어선 우월의식을 틀림없이 품고 있다. 과거에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미자격자, 무면허자로 몰아 배제하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다만 그런 흉한 생각을 품은 자들이 싹 사라진다 해도 여전히 이런 구조에서 배제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기리라는 이야기다.” (p.285-287)

거대한 악의가 없다는 의미에서 악의적인 이 시스템. 구조적 불의와 개인의 내면은 미묘하게 얽혀있다. 단단히 얽힌 매듭을 칼로 잘라내 버리듯, 사회를 뚝딱 개혁 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비가 촉촉하게 스며들어 언땅을 녹이고 새싹을 틔우 듯. 개인들의 작은 노력과 섬세한 제도개혁이 황폐한 한국의 계급사회에 스며들어야 할 것 이다. 장강명이 주문하는 정보의 확대도 좋은 방법이다.

현 체제를 일단 그대로 인정하고 시종일관 세밀하게 접근하는 저자에 비하면 나는 조금 더 급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현실을 ‘지양’하기 위해서 저자만큼 현실을 가지고 치열하고 치밀하게 고민해 본 적 있는 가? 사실 없다. 고민이 세밀하지 못했기에 내는 결론들도 뭉툭하지 않았었나 반성한다. 조금 더 섬세해져야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살아가고 있는 청년으로서 – 청년을 주요 소재로 소설을 쓰고, 또 청년들의 겪는 문제에 진지하게 르포까지 써낸 (중년의) 장강명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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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빠서 글쓰기는커녕 읽는데도 오래걸렸다. 2주 넘은거 아니겠지.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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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소유물로 대하는 부모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추게 된 이후, 나는 나의 부모를 많이 미워했었다. 이해한다. 그 분들 또한 교육받은 적 없고 조부모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와 상처는 별개다.
익숙한(받아온) 사랑방식으로 살다보니, 나의 관계맺기와 사랑에 빈번하게 문제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좀처럼(지금도) 통제나 소유가 아닌 ‘존중’에 기반한 사랑이 참 힘들고 어렵다.
엄마 아빠 개개인이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구조의 문제야”정도로 뭉뚱그리기도 아쉬웠다.


하루에도 몇건의 인면수심 패륜범죄들이 올라온다. sns를 하다보면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가 그늘진 글을 자주보게 된다. 결혼을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청년들도 많다.

#스웨덴식사랑이론
스웨덴은 아이들의 인격권을 보장하기 위해 ‘사적영역’으로 간주해왔던 가정 안에 국가가 섬세하게 개입했다. 법과 제도로 가족 내에서의 자율과 평등을 강제 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족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낮은 스웨덴은 가족이 감당하던 대부분의 복지를 국가가 담당한다. 그렇다고 사회적 연대를 위해 개인을 양보하거나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매우 개인주의적인 사회이나, 가족이 해체되지 않았으며, 스웨덴의 젊은이들은 부모되기를 어느 나라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제도의 기저에는 “여성이 엄마되기를 강요받지 않아야”하며 “자발적 부모되기”를 강조했던 뮈르달 부부의 사상이 깔려있다고.

스웨덴은 자율과 평등이 가족안에까지 깊게 스며들었다. 가부장의 권위와 아내의 헌신, 자녀의 복종이 가족의 규범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도, 양육의 부담으로도 의존적이지 않은 부부와 가능한 이른 나이에 독립하는 아이들 - 국가는 가족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며, 개인의 자율성을 수호하는 조력자로 작용한다.

‘건강한 지향을 가진’ 국가가 사적영역으로 일컬어는 가족에 제도적으로 개입할 수록 구성원들의 공존 능력과 사회적 신뢰는 높아졌다. 스웨덴의 국가주의적 개인주의를 cool trust 라고 칭한다. (친밀한 관계의 복종, 희생과 상호의존에 의해 형성되는 ‘뜨거운 신뢰 hot trust’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

언제나 hhooottttt한 한국사회에 스웨덴식 모형을 대입하자 라고 주장하기는 무리일것이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시작부터 기형적인 폭력덩어리 였으므로.. 
국가가 저지른 상처에 대한 치유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운 촛불 정부는, 아니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미래의 대한민국은 국민 특유의 역동성으로 여타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다. 스웨덴 역시 저출산 문제를 겪던 1930년대 부터 제도의 기틀을 다지며 천천히 오랜기간 신뢰를 만들어왔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개인과 가족에게 무리한 짐을 지우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꾸리는 게 아닌, 국가 덕에 존중과 신뢰와 사랑을 배울 수 있게 된다면.
늘 사랑이 어려웠던 나에게도,
그래서 부모님을 원망했던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제대로 사랑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이지 않나.

문재인 대통령이 정독했다니까 ㅋㅋ 나도 #국가덕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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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본토에서는 부모의 자녀살해 후 자살사건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의) 유교 가부장제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한번이라도 뜨거운 혁명을 성공해보았느냐?

이 책은 너무너무 강추하고 싶어 게으름을 이겨내고 꼭 독후감을 쓰리라 다짐하고 있는 책이지만, 이 페이지만큼은 특별하여 박제해 둔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같이 죽는 것을 “동반자살”이라는 아름다운 용어로 포장하는 문화는 유교+가부장제+자본주의(핵가족화)가 융합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일본, 대만, 홍콩에서는 나타나지만 중국에서는 거의 없다고. 왜? (사진으로 찍은 부분을 읽어보면 알 수있다) 아무튼 놀랍다.

유교모국 중국의 부모들이 자식을 독립적 인격으로 대하며 '소유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은 생각할 거리를 많아지게 한다. 혁명 혹은 사회주의적 제도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같은 유교 윤리라도 사회적 안전망에 따라 작용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거지. 반면 한국은 사회가 감당해야할 몫 까지도 오로지 가족이 감당해왔다.

*

Imf-신자유주의가 가장 심각하게 데미지를 입힌 것은 전라도도 노동계급도 아닌 “가족”이겠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어렴풋한 IMF의 기억이지만, 그때 우리 가족도 참 힘들었다. 요즈음의 비혼도 페미니즘도 세대갈등도 뿌리는 그에서 기인하지 싶다. (나포함) 가장 친밀한 가족 관계에서 만들어진 상처라면, 그것을 바꾸는 것보다는 거부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인 거다. 하여 한국의 비정상적인 가족문화에 대한 심각한 분석과 비판없이, 왜 어른을 공경하지 않느냐, 왜 부모를 미워하느냐, 왜 결혼을 나쁘게만 보느냐 라고 묻는 것은 허망한 질책이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관계는 공포고 가족은 상처다. 

나는 상처와 함께 사랑받는 기억도 있다. 양가적인 감정이 공존하기 때문에 버릴수도 무턱대고 믿을 수 만도 없다. 생선가시 발라내듯 섬세하게 나와 가족을 사랑하고 가꾸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개인적 삶은 그렇게 꾸려야겠지만, 사회는 답을 마련해야 한다. 가족구성원들이 과도하게 헌신하며 감당해온 최소한의 안녕,안전을 사회가 담보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천천히 멸망할 것이다.

*

386은 독재를 걷어내고 민주화를 가져왔을지 모르겠지만 민주화 이후는 신자유주의이기도 했다.  
경쟁 생존 경쟁. 그러므로 우리에게 민주화는 아름답기만한 용어는 아니다.

87년과는 다른 중국의 49년과는 또 다른 모습의 혁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것이 어떤 형태일까.
나는 피하지 않고 싶다. 우리는 우 리세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당사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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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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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근현대사 책 중에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
내일이면 4·19다. 4·19는 보통 ‘학생의거’로 불릴 만큼 학생들의 희생이 도드라진 항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역사의 한 단면. 사실 마산 앞바다에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을 때, 가장 먼저 분개하고 모여들어 행동한 사람들은 우리의 어머니-중년여성-들이었다.


“현장에 있던 미국 공보원 지부장은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있는 군중들 중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범위의 시민’들이 있었고, ‘여기에 참여한 중년 여성들의 숫자와 열기degree에 특별히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p.200)”
“그런데 4월 혁명 직후 출간된 책들을 보면 2차 마산항쟁에서 여성들이 인상적인 역할을 했다고 언급한 경우가 거의 없다. 김주열의 시신을 보고 중년 여성들이 분개했고, 시위가 시작되자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뒤따랐다.’라는 언급정도가 있다.(p.201)”


저자 홍석률은 한 장의 사진 (4월 혁명 당시 할머니들의 데모장면)으로부터 시작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구석자리에, 아주 작게,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이 서술된 여성들의 행적 (p.191)”을 찾는다. 아직 서슬퍼런 한국전쟁시기 학살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60년 “리대통령 물러가라”는 직접적인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한 최초의 이들은 이 마산의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동아일보>보도로는 약3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들은 경찰과 몸싸움까지 하며 경찰서 안으로 밀려들어가 ‘고문경찰 잡아내라’‘살인경관 잡아내라’라고 외쳤다. 당시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이 할머니들을 만류하느라 눈물까지 흘리며 쩔쩔 맸다고 한다.… 마산의 할머니들이 경찰서 정문 앞에서 몸싸움을 하던 무렵인 4월 25일 오후 3시경 서울 시내 대학교수들이 당시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들었다. 교수들은 이날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교수단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전국 각 대학교수단–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적혀있었다. 이승만 퇴진구호는 여기에 없었다. 교수단 시위대가 거리로 나오자 시민들이 급속이 몰려들면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다시 발생했다.(p.213)”

그렇다면 왜 한국 민주화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의 투쟁은 지워지고 종종 축소되었을까?

“일단 여성들은 원천적으로 기록에서 배제된다.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경과하여 작성된 기록들은 이른바 원천적인 기록(1차 기록 또는 당대의 기록), 즉 사건 발행 후 아주 가까운 시점에서 작성된 기록을 바탕으로 그것을 선별하여 작성된다. 이러한 선택에 당연히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주변부 인물들의 기록은 어렵게 기록되어 있어도 선별되지 않는다.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는데, 사건이 진행되어 어떤 결과가 발생하면, 그 결과를 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거나, 그러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활동은 부차화, 주변화 시킨다. 그러다 보니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의 인물들은 또 지워진다. (p.202)”

역사를 서술하는 이도, 항쟁을 통해 권력을 잡은이도 ‘남성’인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의도적 누락이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성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러한 역사서술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역사발 전의 유의미한 주체였던 다수의 사람들의 힘이 지워져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기록되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써 향후 역사발전 가능성마저 봉쇄한다는 데 있어, 어쩌면 악의적이다.

“주변부에 위치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기록되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변의 잠재적 역량이, 결코 엘리트에 비해뒤지지 않는 다수의 역량이, 이 사회에서 발휘되지 못하거나, 발휘된다 하더라도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주변부의 약자를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역량을 실현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차별과 무시 속에서 소진시켜버린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역사발전의 가능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다.(p.220)”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적히지 않은 역사들의 ‘행간’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석률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서술에서 부차화·주변화되면서 결국 “선거”때를 제외하고는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잔혹한 측면이라며 책의 제목을 “민주주의잔혹사”라고 지었다.

마산의 할머니시위를 비롯해 최초의 민주노조였던 동일방직여성들의 투쟁 (그녀들에게 왜 하필 투척한 것이 ‘똥’이었는지), 빈민에 대한 탄압이자 ‘비국민’으로 간주되며 기본적인 인권도 없이 ‘청소‘당한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의 목소리 등 한국현대사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들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부분은 힘이 없어서 적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커서 적히지 않는 역사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가려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불균등할 수밖에 없는 한미동맹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강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힘이 작용할 때 사람들은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거나 순응하여 여기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도,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강하고 구조적인 힘이 작용한 부분은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거나 모호해지고, 소략해진다.(p.170)”

5·16쿠데타의 형식적 명분이었던 “정군운동”의 주체들의 시대인식을 꼬집는 부분인데, 장면내각에 대해서는 반발하려 했던 이들이 그 구조가 가능하게 하는 압도적인 힘-비대칭적 한미동맹관계 규정력-에는 오히려 철저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힘’으로 인식조차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힘’에 대해서도 당대의 역사가(혹은 엘리트)들은 필연인 것처럼 상정해 버려, 서술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꼭 역사만이 그럴까?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박근혜는 옥살이를 해도 이재용은 풀려난다.
북핵에는 개거품을 물면서도 전세계에 가장 많은 핵을 보유한 미국의 핵에는 분노하지 않는다.
상업주의와 물신주의는 비아냥거리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미투를 지지하고 성폭력에는 욕을 하지만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너의 잘못을 문제 삼으면서 잘못이 가능하게 하는 구조는 문제 삼지않고,
구조는 문제 삼으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다.

가까운 것은 너무 가까워서
먼 것은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잘 본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역사를 읽는 다는 것. 역사의 행간을 읽는 다는 것.

우리들의 읽고 보는 능력이 조금은 더 평등해져야지, 민주주의의 ‘잔혹함’이 조금 덜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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