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이별입니다
나가쓰키 아마네 지음, 이선희 옮김 / 해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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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디렉터라는 직업이 나오는 소설은 처음 읽은 것 같아요. 관광객이 몰려드는 도쿄 도심에 자리 잡은 장례식장 반도회관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무거운 배경이지만 읽는 내내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드라마를 펼쳐 보이고 있어요.


남편의 병이 악화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나가쓰키 아마네 작가. 남편이 잠든 시간을 이용해 조금씩 글을 썼는데, 그것이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에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다고 합니다. 작가의 이름마저도 남편의 기일과 마음을 담은 특별한 필명입니다.


이 소설은 제19회 소학관문고 소설상을 받으며 작가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 남편을 떠나보내며 경험한 내밀한 감정이 <머지않아 이별입니다>에 담겨있어요.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떠난 사람, 남은 사람의 상실감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격하지 않게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에서 격리된,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장소. 즉, 비일상적인 세계다." -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한창 취업 준비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시미즈 미소라. 원하는 일에 계속 낙방하다 보니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아르바이트했던 장례식장을 다시 나가며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합니다. 그곳에서 장례 디렉터 우루시바라와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해 주는 스님 사토미를 만납니다. 이들은 미소라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걸 눈치채는데...


미소라는 평소 영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기에 민감해 영을 볼 수 있고 느낍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들에게 하면 무서워해서 숨기고 있습니다. 미소라에게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날 사고로 죽은 언니가 있는데 언니의 영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걸 느낍니다. 언니의 영을 제대로 본 적은 없고, 가끔 꿈에 나타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민감도는 다른 영을 볼 때는 잘 발휘되는 편입니다.


영을 볼 수 있고 느끼는 사람이 장례식장에서 일을 한다니.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민감하게 몰려와 기운이 짓눌려 컨디션이 무너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 외에는 둔감한 편이라 상차림하는 홀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상태입니다.


"죽음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니까요. 죽음을 어떻게 인정하느냐, 어떻게 포기하느냐. 유족이 마음속으로 매듭을 지으면 대부분 죽은 사람도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미소라의 재능을 알아챈 장례 디렉터와 스님은 미소라와 함께 곤혹스러운 일들을 함께 헤쳐나갑니다. 비명횡사한 사람, 스스로 삶을 마감한 사람,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눈을 감은 사람 등 죽은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강한 미련을 가졌거나, 자신이 죽은 줄 모르는 영도 있습니다.


장례 디렉터 우루시바라는 죽은 이를 잘 보내드리고, 남은 이들은 슬픔이 치유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마음을 써주는 것에 확실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미소라처럼 영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없는 대신 날카로운 관찰안이 있습니다. 뭔가 사정이 있어 보이는 장례식이라면 우루시바라가 맡을 만큼 능력 있는 장례 디렉터입니다.


영을 볼 수 있는 미소라와 사토미 스님, 능력자 우루시바라 셋이서 호흡을 맞추며 장례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피소드가 펼쳐집니다. 죽고 나서야 병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어린아이의 영을 보여주는 장면은 특히 애틋했어요. 부모는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목적을 잃은 상태고,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이 죽었다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부모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려 하는 아이의 영과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부모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 줘야 하는 난관. 어떻게 해야 이별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청춘의 이야기 속에는 장례식장에서 일하려는 딸이 걱정스러운 부모님의 마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경험해도 슬픔에 익숙해지는 일은 없다는 걸 미소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면 안 되는 것이기에 오히려 자신의 재능이 괴롭지 않습니다. 보람을 느끼며 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 미소라입니다.


미소라, 우루시바라, 사토미 세 사람과 함께 하는 장례식은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 모두가 마음의 보살핌을 받는 따뜻한 장례식이 됩니다. 슬픔의 매듭을 잘 지을 수 있는 이별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남은 이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생 드라마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눈물 나게 하는 소설이지만 비통한 슬픔이 아닌 따스한 배려를 받는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멋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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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개정증보 2판) - 복잡한 세상 명쾌한 과학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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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벌써 20년이나 된 책이라고요?! 언제 첫 만남을 가졌는지 가물거릴 정도인데 도서관에서 읽고 과학책이 이렇게 재미있게도 나오는구나 신기해했던 기억은 납니다. 중고등학생 아이들이 읽을만한 과학책으로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사랑받는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10년 전 개정증보판이 나왔었는데, 이번에도 그동안 바뀐 내용을 점검하고 수정, 보완해 20주년 기념 개정증보 2판으로 새 옷 입고 나왔습니다. 이쯤 되니 10년 후가 벌써 기다려지네요.


과학 콘서트라는 제목에 걸맞은 센스 있는 목차, 본문 상단에 그 주제를 표현하는 앙증맞은 아이콘이 배치되어 디테일까지 신경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사실 대학생과 일반인을 위해 쓴 책이라는데,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무척 인기 있는 책이 되었죠.


"물리학적인 사고와 관점으로 복잡한 사회 현상을 용기 있게 대면해 보아요."라는 저자의 멘트처럼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는 인간 사회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는 과학을 이야기합니다.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라고 하는 이야기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 말 정말 참일까요?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어쩜! 이런 것도 과학에서 다루는 거구나 싶어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시작된 케빈 베이컨 게임은 정말 3~4단계만으로 연결되는 걸 증명하고 있어 신기했어요.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에서는 잘 짜인 네트워크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현실은 많은 변수가 있어 딱 맞아떨어지진 않는다고 합니다.


에이, 싱겁잖아! 그런데 이 규칙의 의미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이게 포인트죠. 어쨌든 생각보다 우리의 세상은 작은 세상이라는 것. 저자는 '작은 세상 이론'이 공학적 설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예측을 합니다. 몇 가닥의 무작위 연결만으로도 빠르게 연결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있습니다. 감염과 질병 발병에 취약한 세상이기도 하니까요. 이처럼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모두 살펴보고 있어 독자들의 열린 사고를 유도합니다.





복잡계 물리학자인 만큼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것 중에 하나는 카오스 시스템과 프랙털입니다. 음악, 미술, 의학, 경제 등 인간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인지하지 못했던 카오스 시스템을 깨닫는다면 정말 세상이 달라 보일 거예요.


카오스 시스템은 결정론적 시스템과 무작위적인 시스템 사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통제적이지도 않은 반면 자유로울 수도 없는 걸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 불균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는 파레토 법칙과 그에 맞서는 롱테일 법칙을 이야기하며 더 깊게 들어갑니다.


어쨌든 카오스 시스템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부구조가 끊임없이 전체 구조를 되풀이하는 프랙털 구조를 가지고, 자연의 리듬과 닮았습니다. 심장 박동도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카오스적인 양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주식 시세에도 그 안에 법칙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복잡계 네트워크를 이룹니다. 카오스 시스템은 불규칙하지만, 유연하고 역동적인 적응하는 시스템입니다.


학문적으로 새롭게 발전한 내용들을 10주년 개정증보판에서 한 번 커튼콜을, 이번에 두 번째 커튼콜을 선사합니다. 첫 번째 커튼콜에서는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의 약진으로 주목받은 이슈를 소개했고, 두 번째 커튼콜에서는 뇌에서 창의적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과정을 복잡계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빛났던 시기의 과학적 이슈를 들려줍니다.


최근 10년 동안은 창의력, 혁신이란 말을 정말 숱하게 들었는데요, 창의적인 사람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과학적으로 살펴본 이야기가 나옵니다. 혁신이 탄생하는 과정의 본질에 집중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합니다.


알쓸신잡 시즌 1에서 이순신의 숨결을 계산하던 재승쌤은 이 책에서도 산타클로스의 어벤저스급 능력을 계산하며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그러고 보니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도 알쓸신잡처럼 여러 분야를 드나들며 새롭게 보는 눈을 선사하고 있으니, 20년 전부터 재승쌤만의 알쓸신잡은 이미 시작되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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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읽는 이유 - 기시미 이치로의 행복해지는 책 읽기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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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독서법 책인가하고 식상해하다 놓쳤으면 후회했을 뻔! 고미 후미타게와 함께 쓴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 저자 기시미 이치로의 책이라고 해서 읽어봤는데, 읽어가면서 호감도 급상승했어요. 한국어 원서로 읽었다는 김연수 작가의 책을 인용한 부분 무척 많이 나와요. 몇 줄만 읽어도 생각할 게 많고 너무 재미있다면서 곳곳에 김연수의 문장을 인용해 독서론을 들려줍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소설가를 꿈꾸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좀처럼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젊은 친구의 모델이 바로 저자 본인이라고 해요. 그만큼 책 읽기를 평생 실천해온 저자 기시미 이치로의 책 <내가 책을 이유>.


철학을 전공하고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한 저자의 책답게 독서론에 관한 이 책에서도 철학을 배우던 시절에 읽은 책 이야기와 아들러 심리학의 이론을 독서에 연계한 부분이 나와서 일반적인 독서법 책과 결이 다른 느낌이에요.


저자는 책을 읽음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행복이란 뭘까요. 즐겁게 읽으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은 단지 기분 전환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독서가 그저 기분 전환 이상의 것임을 알려주고 싶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를 썼다고 합니다. 책에 대한 거부감 없이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 필요에 의해 읽어야 할 때도 다른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들려줍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쁨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감정입니다. 저자와의 연결, 책을 매개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서 느끼는 기쁨은 현실 인간관계가 힘든 이에게도 책을 통해 구원받는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책을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보통 어떤 책을 읽는가로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어떻게' 책을 읽느냐로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떻게'라는 부분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요.


스스로 책을 찾아서 읽고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를 알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추천하는 책만 읽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며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해요. 책 읽을 때도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요. '좀 이상한데? 좀 억지스러운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은 질문과 반론을 훈련하기에 좋다고 합니다. 일상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한테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나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며 생각하는 걸 책을 읽으며 습관화해보는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밑줄보다 읽는 도중에 떠오르는 생각을 책 여백에 메모하는 걸 더 선호합니다. 물론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그때도 스스로 생각한 다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웃풋에 관한 이야기도 후반에 등장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얘기해 주는 느낌으로 쓰면서 자신만의 아웃풋을 습관화하는 내용입니다.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혼자서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독서. 다만 이걸 독서의 목적으로 삼으면 즐거움은 훼손됩니다. 내 삶을 음미할 수 있는 독서를 위해 '나는 왜 읽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생 곳곳에서 저자의 손에 들어왔던 책을 예로 들어 이야기합니다. 인생을 바꾼 책 한 권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도 난감해지는데, 저자도 그렇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우연한 만남으로 읽은 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경우도 소개합니다. 어떤 순간에 책과의 우연한 만남이 읽는 이의 인생을 바꾸는 걸까요. 읽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평가 좋은 책이라도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저는 에세이에서 특히 그런 호불호가 크게 작용하는 편이에요. 저자의 삶과 공명되지 않는 한 아무리 유려한 문장도 가슴 깊이 새겨지진 않습니다. 이처럼 책과의 공명이 일어났을 때 그 책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원서로 읽는 즐거움을 위해 한국어를 배운 저자처럼 외국어 공부를 독서와 연결하고, 어려운 책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때 가져야 하는 태도,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읽기 방법 등 책을 대하는 다양한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왜 책을 읽는지, 어떻게 책을 읽는지, 책을 읽고 난 후 활용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이 연결해 주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책 읽기를 통해 행복하다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 기쁨을 함께 누려보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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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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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또 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 등을 쓴 스미노 요루 작가가 인생 소설 제대로 터뜨렸네요. 제목부터 몽글몽글 여운 가득합니다. 순수하고도 찬란한 이상을 꿈꾸는 청춘이 현실을 살아내면서 겪는 이야기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이번 소설도 영화로 만들어진대요. 현재 일본에서 핫한 20대 배우 요시자와 료, <행복목욕탕>으로 주목받은 스기사키 하나가 캐스팅되어 2020년 여름 개봉 예정이라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다바타 가에데. 그러려면 인간관계에 깊게 개입하면 안 됩니다. 이런저런 말과 행동을 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기회조차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철칙을 흔드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보는 사람의 손발이 오글거릴 만큼 이상론을 펼치는 아키요시입니다. 수업 시간에 뜬금없는 질문을 빙자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아키요시. 관종이라 불리며 다들 꺼려 하는 요주의 인물로 등극합니다. 그런데 하필 아키요시의 관심을 받게 된 가에데 다바타. 뚜둔!


먼저 다가오는 사람을 차마 내치지도 못하는 다바타는 결국 함께 점심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면서 아키요시의 생각을 하나씩 알게 됩니다.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곳 없어 방황하는 아키요시는 다바타와 직접 동아리를 만들기로 합니다. 이름하여 '모아이'. 별다른 뜻도 없습니다. 그날 입은 티셔츠에 그려진 모아이를 보고 즉흥적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결코 관여해서는 안 될 존재라며 피하려고 했던 다바타와 함께 자신의 이상을 펼치고픈 아키요시. 대학 4년 동안에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을 만든다라는 신념으로 소박하게나마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것부터 정해나갑니다.


다바타는 지금껏처럼 가능하면 남에게 지나치게 다가가지 않고, 누군가의 의견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고수합니다. 타인으로부터의 영향을 줄이고 타인에게 주는 영향 또한 줄이려고 하는 다바타는 모아이 활동도 적당히 거리를 둔 채 활동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졸업반이 된 다바타. 취업 내정된 상태입니다. 파김치가 될 정도로 에너지를 소진해서일까요. 이력서에 쓴 거짓말들을 보며 자괴감에 빠진 채 대학 생활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순수한 이상만을 품고 있었던 친구 아키요시를 떠올립니다. 이미 이 세계에 없는 아키요시를요.


"괜찮다. 나 자신이 아닌 것을 밀어붙이면서 사는 것도. 잘못된 짓이 아니다. 잘못됐을 리가 없다. 잘못된 짓이, 아니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中 


아키요시와 함께 만들었던 모아이. 다바타는 일찌감치 그곳을 나왔습니다. 처음엔 순수했지만 이제는 민폐나 끼치고 다니는 모아이입니다. 처음에 지향했던 것들은 사라진 모임입니다. 이제는 학교 안에서 득세하는 거대 단체로 존속합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변질되었을까요.


이상이 아니라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변모한 모아이를 보면서도 다바타는 그동안 관계없는 곳이라며 피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활 마지막에 이르러서 현재의 모아이를 무너뜨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취업 활동을 하면서 모아이의 정체를 또다시 엿본 겁니다. 취업용 인맥 쌓기로 변질되어 이해득실로 사람을 사귀는 무리들일 뿐이었습니다.


'히어로'라고 불리는 현재의 리더를 추종하는 모아이를 해체시키려고 평소 모아이를 싫어하던 친구와 이런저런 작전을 세워봅니다. 개인이 대규모 조직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요.


변해버린 모아이는 우리들 개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순수하고 찬란한 이상을 꿈꾸던 나의 모습은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어디론가 흩어져 버립니다.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사회의 세상으로 내던져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은 차츰 깨지고 깨져 그 언젠가 꿈꿨던 것들은 기억 속에서조차 가물거립니다.


어리고, 아리고, 여렸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보여준 스미노 요루 작가. 여물지 않은 상태의 그 순수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20대 청춘이 읽으면 또래 이야기여서 더 공감하며 읽을 테지만, 이미 세상물 진하게 먹은 사회인들이 읽어도 좋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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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 과도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아름다운 지적 여정
나탈리 크납 지음, 유영미 옮김 / 어크로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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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베스트셀러 철학자 나탈리 크납의 책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부제 '과도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아름다운 지적 여정'처럼 말 그대로 다정다감하고 유려한 문장에 이토록 아름다운 철학이라니 감탄하며 읽게 됩니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불안한 시기. 인생에서 불안해하는 위기의 나날들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웬만하면 두려움과 불안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 시기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삶에서 익숙했던 규칙이 무력화하는 시기입니다. 저자는 그 시기를 과도기라고 부릅니다.


인생에는 사춘기, 중년의 위기, 갱년기 같은 과도기가 있습니다. 남들도 다 겪는 과도기이니 그저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불안에 짓눌린 채 유독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과도기는 백해유해한, 없애야 할 시기일까요.


그런데 저자는 "과도기는 인생 중에 만나는 '시적인 지대'다."라고 합니다. 과도기를 창조적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는 시간으로 보는 겁니다. 인생의 어려운 시기, 과도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은 달라집니다. 저자는 고통스럽고 불안한 이 시기들이 우리의 인생에 주는 의미를 깨닫고 이런 시기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시기들을 다른 태도로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삶은 행복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우리는 뭔가 이익을 가져다주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훈련과 준비를 통해 복잡한 인생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 완벽하게, 실수를 피하는 데만 주안점을 두면 라이브 연주의 생생한 묘미를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현재를 개선해야 하는 결핍 상태로 보고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는 상태에선 진정한 충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내면 깊이 뿌리내린 해로운 질문들을 하지 않을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특히 과도기에는 경험이 먹히지 않는 시기거든요. 현재의 순간과 그 가능성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삶의 모든 시기는 저만의 가치가 있습니다. 과도기의 소중함을 자연의 삶과 아이의 존재 의미로 비유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이가 아이인 까닭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은 아이로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살아 있는 것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임을 일깨웁니다. 벚꽃은 맛난 버찌가 되기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계절에 피어나는 것이 합당하기에 피어납니다. 한 번 핀 꽃은 의무를 다한 것이기에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과도기는 탄생의 형태를 내포한다고도 합니다. 과도기의 창조성입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스스로를 내맡길 수밖에 없지만, 그와 동시에 자발적 선택으로 인한 신뢰와 힘의 성장을 경험하기도 하는 출산. 나탈리 크납은 어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스스로를 열고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모든 위기의 순간에 해당하는 탄생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인생에서 진정한 예술은 매 순간 성장을 신뢰하는 것이다." -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의 창조적 긴장 가운데 있는 사춘기, 사별의 슬픔을 정신적 성숙 과정으로 승화하는 올바른 애도,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죽음 등 개인에게 찾아오는 불안해하는 위기의 나날들. 불안을 용인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생산적인 시간,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들려줍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탁월한, 소설 <온전한 삶> 속 주인공처럼 통제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과도기에 필요한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인 위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는 사회적 과도기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사회의 일부로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빨라진 사회적 리듬에 시간의 노예로 살기도 합니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 <모모>는 오늘날의 현상과도 같아 독후감 숙제로 대충 읽고 치웠던 그 책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공유경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 저자의 견해도 무척 흥미로웠고요. 뭐든 간에 본말전도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인생의 불확실한 날들을 이제는 '시적인 시간'으로 맞이하는 용기를 가지도록 독려하는 책, 나탈리 크납의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인생의 숱한 과도기를 거칠 아이를 위해, 죽기 전에 회한 없는 시선으로 삶을 돌아보길 원하는 자신을 위해 창조적인 과도기를 보내는 법을 들려주는 이 책을 읽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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