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레바퀴 아래서 - 짓눌린 영혼에게 길은 남아있는가
헤르만 헤세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5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스무 살 무렵 집필한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교과서 수록 작품이면 이상하게 재미없던 그 시절의 기억만으로 지금껏 살아왔던 겁니다.
성장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한 소년의 성장기가 아니라, 한 소년이 어떻게 성장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리프레시 출판사 버전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가독성 좋은 편집에 펜드로잉 삽화가 본문 곳곳에 있어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1906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헤세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 교육 현실에 여전히 강렬하게 울립니다. 모범생이라는 칭호 아래 숨겨진 고통, 사회적 기대에 짓눌린 청소년의 내면, 제도화된 교육의 폭력성을 담아낸 <수레바퀴 아래서>. 교육의 그림자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당시 독일 교육 시스템뿐 아니라 성과와 경쟁 중심의 모든 교육 체계에 날카로운 비판을 던집니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이 소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닌,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시험실 안을 둘러보니, 넓은 강의실에는 창백한 얼굴의 소년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고문실에 끌려온 죄수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라며 시험을 앞둔 한스의 심리 상태를 묘사한 이 장면은 오늘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시험장은 고문실로, 학생들은 죄수로 느껴지는 현실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주인공 한스는 전형적인 모범생입니다. 총명하고 성실하며, 어른들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는 소년입니다. 마을의 작은 영웅이자 미래의 희망으로 여겨지는 그는 신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목사님과 아버지의 기대, 선생님의 특별 지도, 마을 사람들의 관심까지 이 모든 것이 한스에게는 영광인 동시에 무거운 짐이 됩니다.
한스는 타고난 재능보다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밤낮으로 공부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 자연 속에서 낚시를 즐기던 순간들, 충분한 수면까지도 포기한 채 오직 시험 합격만을 위해 매진합니다. 한스는 점차 순수한 호기심과 자연에서 느끼던 기쁨을 잊어갑니다.
헤르만 헤세는 어른들의 역할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한스의 재능을 발견하고 격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기대와 욕망을 투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목사는 한스를 통해 마을의 명성을 높이고자 하고,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 바랍니다. 이들에게 한스는 한 인격체가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도구에 가깝습니다.
한스가 입학한 마울브론 신학교는 엄격한 규율과 학문적 우수성을 강조하는 곳입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장엄한 외관 뒤에는 아이들의 자율성과 개성을 억누르는 냉혹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현관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스에게는 지옥문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신학교에서 한스는 끊임없는 경쟁과 평가에 노출됩니다. 성적, 등수만이 그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한스는 성실함과 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지만, 점차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갑니다. 학교는 지식의 전당이라기보다 순응을 강요하는 기관으로 기능합니다. 단순 암기와 규칙 적용을 강조하는 교육은 한스의 창의성과 사고력을 점차 마비시킵니다.
체제 속 위안과 저항으로 한스와 하일너의 우정이 그려집니다. 하일너는 한스와는 정반대 성향의 인물로, 규율에 저항하고 교육 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하일너에게 학교는 영혼의 도살장과도 같습니다.
한스에게 하일너는 유일한 위안이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멘토가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보완해 주는 관계입니다. 한스는 하일너에게 안정감과 균형을, 하일너는 한스에게 자유와 비판적 사고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학교 시스템에 의해 점차 훼손됩니다.
헤르만 헤세는 하일너라는 인물을 통해 체제에 저항하는 개인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러나 그 저항은 결국 패배로 끝납니다. 당시 교육 체제의 견고함과 개인의 저항이 갖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한스의 붕괴는 점진적입니다. 지속적인 압박과 기대가 쌓여 일어나는 서서히 진행되는 몰락입니다. 한스는 점차 학업에 대한 흥미를 잃고 신체적, 정신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두통, 불면증, 집중력 저하 등 한스의 몸은 그의 영혼이 견디고 있는 고통을 표현합니다.
헤르만 헤세는 한스의 병을 사회적 압박에 의한 정신적 상처로 묘사합니다. 번아웃과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을 보입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한스의 변화를 사춘기적 반항으로, 의사는 일시적 허약함으로 진단할 뿐입니다.
한때 마을의 자랑이었던 그는 이제 실패자로 낙인찍힙니다. 가족도, 마을 사람들도 그의 내면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실패라는 결과뿐입니다.
한스가 겪었던 고통, 그가 가졌던 가능성, 그가 꿈꾸었던 미래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시스템은 변함없이 작동하고, 또 다른 '한스'들이 같은 수레바퀴 아래 짓눌리게 됩니다.
모범생이라는 칭호는 여전히 양날의 검입니다. 인정과 기회를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무거운 기대와 끝없는 성취에 대한 압박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나 열정이 아닌,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성공 기준에 맞춰 공부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스처럼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삶의 기쁨을 잃어갑니다.
헤세가 비판한 교육의 형식주의와 기계적 암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합니다.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면서도, 실제 교육 현장은 여전히 표준화된 시험과 정답 중심의 평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성적과 사회적 성공을 위한 도구인가, 아니면 개인의 내면적 성장과 자아 발견을 위한 여정인가를 묻는 <수레바퀴 아래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제도적 폭력, 성과만을 중시하는 사회적 가치관, 그 속에서 길을 잃은 수많은 영혼들에 대한 비극을 이야기합니다.